사진관집 이층 창비시선 370
신경림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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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를 맞으며




그 여자가 하는 소리는 늘 같다.
내 아들을 살려내라 내 아들을 살려내라.
움막집이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구멍가게 자리에 대형 마트가 들어섰는데도
그 여자는 목소리도 옷매무새도 같다.
공중전화 부스 앞에 줄을 서는 대신
모두들 제 스마트폰에 분주하고
힘들게 비탈길을 엉금엉금 기는 대신
지하철로 땅속을 달리는데도
장바닥을 누비는 걸음걸이도 같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세상이 달라졌어요 할머니 세상이.
이렇게 하려던 내 말은 그러나 늘 목에서 걸린다.
어쩌면 지금 저 소리는 바로
내가 내고 있는 소리가 아닐까.
세상이 두렵고 내가 두려워
속으로만 내고 있는 소리가 아닐까.– 20~21쪽
아무도 듣지 않는,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올해도 죽지 않고 또 온 그 여자의
각설이타령을 들으며 걷는
달라진 옛날의 그 길에 시적시적 봄비가 내린다.– 20~21쪽


 
 
 
사진관집 이층 창비시선 370
신경림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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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



1
느티나무를 돌고 마을 앞을 지나 신작로로 나가면
종일 통통대며 쌀겨를 날리는 정미소가 있고
매화가 피어 담 밖을 넘겨다보는 연초조합이 있었다.
병원이 있고 싸전 앞에 말강구네 밤나무집이 있고
그 아래 친구네 어머니가 빈대떡을 부치는 술집은
구수한 참기름 내와 술 취한 사람들로 늘 붐볐다.
양조장과 문방구와 잡화점과 포목점을 지나야
할머니와 삼촌이 국수틀을 돌리는 가게가 있었다.
할머니가 구워주는 국수 꼬랑지를 먹으러
나는 하루에도 여러차례 이 길을 오고 갔다.
어두워도 나는 이 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게마다 대롱대롱 매달린 전깃불이 동무였다.– 11~13쪽
2
그날이면 아버지와 당숙들은 흰 두루마기를 차려입었다.
노란 들국화와 보랏빛 쑥부쟁이가 깔린 산자락을 오르면
갓을 쓴 일가 할아버지와 아저씨들이 모여 있었다.
산소에 돌아가며 절을 하고 나면 할아버지들은
콧물을 훌쩍이는 우리들의 주머니를 다투어
대추와 밤과 곶감과 다식으로 채워주었다.
어른들은 이내 둘러앉아 술과 부침개를 먹으면서
누가 죽고 누가 잡혀갔다며 목소리를 죽였지만
모처럼 모인 아이들은 구슬치기로 신명이 났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와 당숙들은 주막엘 들르고
먼저 돌아온 우리가 마중을 가야 자리를 뜨는데
비틀대는 어른들 어깨 너머엔 둥그런 달이 떠 있었다.– 11~13쪽
3
장날이 우리 집은 그대로 잔칫날이었다.
아버지 광구에서 일하는 광부의 아낙들이 몰려와
아침부터 할머니와 어머니는 국수를 삶고 전을 부쳐댔고
아이들까지 따라와 종일 북새를 쳤다.
억센 사투리로 늘어놓는 돈타령 양식 타령이
노래판으로 바뀔 때쯤엔 남정네들도 한둘 나타나
어느새 마당에서는 풍물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이런 날일수록 아버지는 늦어서야 돌아왔다.
할머니를 따라가 광에서 훌쭉한 쌀자루를 들고
사내와 아이들을 챙겨 뒷문을 나서는
아낙들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이윽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마을 뒷길에서
새파란 칸델라 불빛이 도깨비불처럼 흔들렸다.– 12~13쪽


 
 
 
밀물결 오시듯 실천문학의 시집(실천시선) 214
이봉환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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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주려고





내 몸 허리를 찢어 애기나리 한 포기 캐낸다




도려낸 만큼 몸은 철없이 한동안 욱신거린다




아픈 자리 아물어 그런데 짙은 그늘이 생겨났다




평생을 마음 썩도록은 남아 있을 아린 그늘




생이 지나치며 자꾸자꾸 들여다보는 꽃그늘– 108쪽


 
 
 
밀물결 오시듯 실천문학의 시집(실천시선) 214
이봉환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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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무를 이해하고 왔다





진달래 꽃봉오리가 막 껍질을 찢고 빠끔히 세상을 내다
본다. 따끈한 입김 훅 끼치자 자꾸 고개를 도리반거린다.
가늘게 눈을 찡그린다. 어떤 안간힘이다. 허공으로 치켜
감싸 쥔 꽃받침이 궁금한 눈벷에게 들어가! 들어가! 하는,
활짝은 피지 않으려는 꽃 마음, 막 피려 할 때의 가장
좋은 그 마음, 환한 꽃 막 안팎의, 두근두근 너와 나의 처
음 눈빛을 간직한 꽃나무를 오늘 이해하고 왔다.– 99쪽


 
 
 
밀물결 오시듯 실천문학의 시집(실천시선) 214
이봉환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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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돌 말린 나뭇잎들




갓바위산 속 밤새 숨 놓아버린 굴참나무 잎들, 너럭바위에
오그라져 누운 저 몸부림들, 죽어서야 보여주는 삶의 결인가
살아서 환히 내밀지 못하고 늘 감춰들었던 햇살의 반대편,
그 반편의 삶들 죽어서나 오글쪼글 내보이는가 늦가을 햇살도
거기 초분에 내려들어선 노닥노닥 미안한 마음으로 오래 조문하거나,
혹은 유달산 쪽으로 기울어 가기를 아예 잊어버린 맘씨 좋은 햇살들 칠성판
에 누워 함께 바삭대는 중– 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