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꾹질의 사이학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31
고영 지음 / 실천문학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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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꾹질의 사이학






서울에서 방 한 칸의 위대함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월세 계약서를 앞에 놓고 주인은 거듭 다짐을 받는다
너무 시끄럽게 하면...... 딸국! 전기세는...... 딸국!
사나운 사냥개 어르고 달래듯
물 한 컵 단숨에 들이마시고 또 딸국!
숨을 한껏 빨아들인 주인의 입이 잠시 침묵하는 사이
불룩해진 아랫배가 딸국, 유세를 떤다
근엄한 입에서 딸국질이 한번 포효를 할 때마다
달동네 방 한 칸이 자꾸 산으로 올라간다
딸꾹질이 맹위를 떨칠수록 주인의 다짐도 조금씩 수위
를 높여간다
서둘러 도장을 찍고 싶은 마음이
딸꾹질의 훈시에 맞춰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서울 쓰고 딸꾹! 서대문구 쓰고 딸꾹! 번지 쓰고 딸꾹!
사내가 주인인지 딸꾹질이 주인인지
계약서 한 장 작성하는 데 한 시간이 딸꾹,
여차하면 어렵게 찍은 도장마저 딸꾹질이 업어 갈 판
인데 또 딸국,
딸꾹질의 폭력 앞에서 나만 점점 왜소해진다
아직 주지시키지 못한 다짐이라도 남아 있는 듯
딸꾹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인은 천천히 계약서를 훑어보고 있다
보증금을 건네는 손이 나도 모르게 딸꾹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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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 지음 / 실천문학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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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풍경





새끼를 낳은 누렁개가 대문 앞으로 어슬렁거린다.
오지 않는 인기척을 기다린다.
여섯 마리 새끼들. 어미 그림자 속에 숨어 젖꼭지를 빤
다. 말라붙은 젖꼭지를 물어뜯는다.
입안에 고이는 통증. 침이 되어 흐른다.
어미는 자꾸 엎어져 있는 빈 밥그릇에 눈길이 간다.
목에 걸린 줄을, 어미가, 원망스럽게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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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 지음 / 실천문학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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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의 말씀




가벼운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종이 한 장의 처세가
웅숭깊다



승객들 무릎과 무릎 사이를 옮겨 다니는
종이 한 장의 표정을
더듬더듬 읽는다
공복에 기댄 탓인가, 공손한 글자들이 자꾸
시선 바깥으로 떨어져 나간다



종이의 말씀을 새겨들을 줄 알아야
좋은 시인이라고
어머니 살아생전에 목구멍에 칡이 돋도록
말씀하셨는데



더듬더듬, 띄엄띄엄 읽어 나가는 동안에도
종이의 공손함은 볌함이 없다



손가락 없는 손이, 고개 숙인 노파의 손이
죄 많은 무플에 닿을 무렵
자세를 고쳐 앉아
무릎과 무릎이 벌어지지 않게
종이를 떠받들고
나는



웅숭깊은 나무를 품은
연필 한 자루를 공손히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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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 지음 / 실천문학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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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나와 당신 사이에도
꽃이 피고 별똥별 지던 밤들이 있었지



순결한 꽃잎에 편지를 써 날려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그 사이
곁을 훔쳐보는 그 사이



누가 꽃의 입을 닫게 했는가
누가 별똥별을 꺼뜨렸는가



나와 당신 사이
함부로 읽을 수 없는 등짝의 이력(履歷)만
밤새 애타게 등한시하는 사이



맨발의 입술만이
저 사이를 다 건널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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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 지음 / 실천문학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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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라는 그 길고 슬픈 말




아무 거리낌 없이

강물에 내려앉는 눈발을 맹목적이라고 허공에 쓴다



아픈 기억들을 불러내어 물 위에 놓아주는 강가

무뉘도 없는 저녁이 가슴을 친다

하류로 떠밀려 간 새들의 귀환을 기다리기엔

저 맹목적인 눈발들이 너무 가엾고

내겐 불러야 할 건절한 이름들이

너무 많다



강물에 내려앉은 눈이 다 녹기 전에

아픈 시선 위에 아픈 시선이 쌓이기 전에

바람이 다 불기 전에

상처가 상처를 낳기 전에



너라는 말

자기라는 말

누구누구의 엄마라는 말

당신이라는 말

미안하다는 말



모두 돌려보내자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자



속수무책 쏟아지는 저 눈이 녹아

누군가의 눈물이 되기 전에

다시 하늘로 돌려보내자



후회라는 그 길고 슬픈 말을 배우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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