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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전설 99
최정희 엮음 / 우리출판사(서울출판) / 1996년 10월
구판절판


"도련님, 어서 활시위를 당기십시오."
시중 들던 할아범이 숨이 턱에 차도록 채근을 하는데 과연 귀를 쫑긋 세운 노루 한 마리가 저쪽 숲에서 오고 있었다.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고 화살이 막 튕겨지려는 순간 수덕은 말 없이 눈웃음을 치며 활을 거두었다.
"아니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몰이는 하느라 진땀을 뺀 하인들은 활을 당기기만 하면 노루를 잡을 판이기에 못내 섭섭해 했다.
"너희들 눈에는 노루만 보이느냐? 그 옆에 사람은 보이지 않느냐?"
"이 산골짜기에 저런 처녀가?"
하인들은 모두 의아해 했다.
"도련님, 눈이 부시도록 아리땁습니다. 노루 대신 여인을... 헤헤."
"에끼 이녀석, 무슨 말버릇이 그리 방자하냐. 자 어서들 돌아가자."
수덕은 체통을 차리려는 듯 일부러 호통을 치고 갈 길을 재촉했으나 가슴은 뛰고 있었다.
노루사냥이 절정에 달했을 때 홀연히 나타난 여인, 어쩜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수덕 도령의 가슴은 더욱 뭉클했다.
"차라리 만나나 볼 것을..."
양반의 법도가 원망스럽기조차 했다.
"이랴."
마상에서 멀어져가는 여인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왔으나 들떠있는 수덕의 가슴은 진정되지를 않았다.-65~68쪽

책을 펼쳐도 글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눈에 어리는 것은 여인의 모습뿐.
하는 수 없이 도령은 할아범을 시켜 그 여인의 행방을 알아오도록 했다.
할아범은 그날로 여인이 누구이며 어디 사는가를 수소문해 왔다.
그녀는 바로 건넛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 낭자였다. 아름다웁고 덕스러울 뿐 아니라 예의범절과 문장이 출중하여 마을 젊은이들이 줄지어 혼담을 건네고 있으나 어인 일인지 모두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덕의 가슴엔 불이 붙었다.
자연 글읽기에 소홀하게 된 수덕은 훈장의 눈을 피해 매일 처녀의 집 주위를 배회했다.
그러나 먼 빛으로 스치는 모습만을 바라볼 뿐 낭자를 만날 길이 없었다.
어느 날 밤. 가슴을 태우던 수덕은 용기를 내어 낭자의 집으로 찾아 들었다.
"덕숭 낭자, 예가 아닌 줄 아오나..."
"지체 높은 도련님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낭자! 나는 그대와 혼인하기로 결심했소. 만약 승낙치 않으면 죽음으로 내 뜻을 풀어야 할 지경이오."
"하오나 소녀는 아직 혼인할 나이도 아닐 뿐더러 혼자 남은 미천한 처지입니다."
"낭자! 나는 그대로 인하여 책을 놓은 지 벌써 두 달, 대장부 결단을 받아주오."-65~68쪽

두 볼이 유난히 붉어진 낭자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일찍이 비명에 돌아가신 어버이의 고혼을 위로하도록 집 근처에 큰 절 하나를 세워 주시면 혼인을 승낙하겠습니다."
"염려마오. 내 곧 착수하리다."
마음이 바쁜 도령은 부모님 반대도,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상관치 않고 불사에 전념했다.
기둥을 가다듬고 기와를 구웠다. 이윽고 한 달만에 절이 완성됐다.
수덕은 한걸음에 낭자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제 막 단청이 끝났소. 자 어서 절 구경을 갑시다."
"구경 아니하여도 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 무엇을 안단 말이오?"
그때였다.
"도련님 저 불길을..."
절에서 불길이 솟구치고 있는 게 아닌가. 수덕은 흐느끼며 부처님을 원망했다.
낭자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수덕을 위로했다.
"한 여인을 탐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일념으로 부처님을 염하면서 절을 다시 지으십시오."
수덕은 결심을 새롭게 하고 다시 불사를 시작했다. 매일 저녁 목욕 재계하면서 기도를 했으나 이따금씩 덕숭 낭자의 얼굴이 떠오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마다 일손을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절을 완성 할 무렵 또 불이 나고 말았다.-65~68쪽

다시 또 한 달.
드디어 신비롭기 그지없는 웅장한 대웅전이 완성됐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수덕은 흡족한 마음으로 합장을 했다.
"도련님, 소녀의 소원을 풀어주셔서 그 은혜 백골난망이옵니다. 이 미천한 소녀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마침내 신방이 꾸며졌다. 촛불은 은밀한데 낭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부지간이지만 잠자리만은 따로 해주세요."
이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수덕은 낭자를 덥썩 잡았다.
순간 뇌성벽력과 함께 돌풍이 일면서 낭자의 모습은 문밖으로 사라졌고 수덕의 두 손에는 버선 한짝이 쥐어져 있었다.
버선을 들여다보는 순간 눈앞에는 큼직한 바위와 그 바위 틈새에 낭자의 버선 같은 하얀 꽃이 피어있는 이변이 일어났다.
신방도 덕숭 낭자도 세속의 탐욕과 함께 사라졌다.
수덕은 그제야 깨달았다. 덕숭 낭자가 관음의 화신임을.
그리하여 수덕은 절 이름을 수덕사라 칭하고 수덕사가 있는 산을 덕숭산이라 했다.
지금도 수덕사 인근 바위 틈에서는 해마다 「버선꽃」이 피며 이 꽃은 관음의 버선이라 전해 오고 있다. 〔예산. 수덕사〕-65~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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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 보따리 -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우리 옛이야기 112가지 살아있는 교육 23
서정오 지음 / 보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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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나이도 똑같고 몸집도 비슷한 세 아이가 같은 글방에 다녔어. 그런데 이 세 아이에게는 소원이 한 가지씩 있었어. 한 아이는 신선이 되는 게 소원이어서 이름을 '신돌이'라 했고, 또 한 아이는 글 잘하는 선비가 되는 게 소원이어서 '선돌이'이라 했지. 또 한 아이는 부자가 되는 게 소원이라 '부돌이'라고 했어.
세 글동무가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나 봐. 그래서 배우는 책을 죄다 줄줄외게 됐어. 하루는 글방 훈장님이 셋을 불러 놓고,
"너희들이 그동안 글공부를 부지런히 해서, 이제 내가 더 가르칠 것이 없구나. 그러니 이제부터는 내 곁을 떠나서 너희들끼리 공부를 하여라."
하더래. 그래서 셋이 조용한 산속에 가서 글공부를 하기로 했어. 훈장님과 부모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산으로 들어갔지. 마침 깊은 산속에 빈 절이 있어서, 거기서 잠도 자고 밥도 지어 먹으며 글공부를 했더래.
셋이서 약속을 하기를, 아침밥은 신돌이가 짓고 점심밥은 선돌이가 짓고 저녁밥은 부돌이가 짓기로 했어. 그런데 밥을 지어 상을 차려 오는 품이 셋이 저마다 다르더란 말이지.-107~110쪽

신돌이는 밥을 그릇에 퍼 담을 때 두 동무 것을 먼저 수북하게 담고, 남은 것을 제 밥그릇에 퍼 담아. 그러니까 늘 자기는 찌꺼기밥이나 누룽지 차지지. 그래도 군말 한번 하는 법이 없어.
선돌이는 밥을 어떻게 퍼 담느냐 하면, 세 밥그릇에 저울로 단 듯이 똑같이 밥을 담아.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똑같이 담아 놓으니 누가 더 잘 먹고 못 먹고 할 것이 없지.
부돌이는 늘 자기 밥그릇에 먼저 밥을 수북이 퍼 담고 나서 남은 찌꺼기와 누룽지를 두 동무 밥그릇에 퍼 담아. 그러니 아무리 양식이 모자라도 제 밥그릇은 늘 푸짐하지. 그래도 다른 두 동무는 알고도 모르는 채, 쓰다 달다 말이 없었어.
이렇게 하루 세끼를 먹으며 공부를 하니 신돌이는 날이 갈수록 몸이 야위고, 선돌이는 날이 가도 어제가 오늘 같고, 부돌이는 날이 갈수록 피둥피둥 살이 쪘어. 이렇게 살다 보니 삼 년이 후딱 지나갔거든. 이제 글공부도 할만큼 해서 산을 내려가기로 했지.
"이제 우리 여기서 헤어지자. 저마다 소원을 이루고 십 년 뒤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이렇게 약속을 하고 헤어졌단다.-107~110쪽

그 뒤에 선돌이는 글공부를 더 많이 해서 소원대로 이름난 선비가 되었어.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도 하고 말이야. 벼슬 자리에 있으면서 나라일을 칼로 무 자르듯이 경우 바르게 딱딱 잘하니까, 사람들이 과연 선비 중의 선비라고 추어주고 그래. 소원대로 잘 되었지.
그러다 보니 두 동무들과 약속한 날이 되었거든.
'신돌이, 부돌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소원대로 신선 되고 부자 되어 잘 살고 있을까?'
하면서, 도포 입고 갓 쓰고 옛날에 공부하던 산속으로 들어갔단 말이야. 가보니 옛날 절이 있던 자리에 절은 온데간데없고 아담한 초가집이 한 채 있더래. 뜰에는 갖가지 꽃이 활짝 피었고 그윽한 향기가 집 안에 가득한데 쌍무지개가 초가지붕에 두둥실 걸려 있더래. 경치가 하도 아름다워서 입을 딱 벌리고 바라보고 있으니, 집 안에서 하얀 옷 입은 사람이 굽은 지팡이를 짚고 걸어나오거든. 가만히 보니까 바로 신돌이야.
"자네는 소원대로 신선이 되었네그려."
"자네는 소원대로 선비가 됐군."
둘이서 얼싸안고 반가워했지. 신돌이가 선돌이를 데리고 집 안을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는데, 신선이 사는 집은 좁아도 넓더래. -107~110쪽

동쪽 창문을 열고 보니 봄 경치가 나타나서 온갖 꽃이 울긋불긋 피어 있고, 남쪽 창문을 열어 보니 여름 경치가 나타나서 푸른 숲이 우거져 있더래. 서쪽 창문을 열고 보니 단풍이 한창인데 온갖 곡식과 과일이 무르익고, 북쪽 창문을 열어 보니 흰눈이 가득 쌓여 눈이 부시더래.
선돌이가 이렇게 좋은 구경을 실컷 하고 보니, 부돌이 소식이 궁금해지지 않겠어?
"부돌이는 왜 여태 안 올까? 약속을 잊어버렸나?"
그랬더니 신돌이가 한숨을 쉬면서 하는 말이,
"부돌이는 벌써 여기 와 있다네."
하거든. 그게 무슨 말이냐고,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까 신돌이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주춧돌 아래를 가리킨단 말이야. 거기를 보니까, 글쎄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이렇게 쳐다보고 있더란 말이지.
"저 구렁이가 부돌이란 말인가?"
하니, 신돌이가 고개를 끄덕끄덕해.
"아니, 어쩌다가 부돌이가 구렁이가 되었단 말인가?"
"부돌이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꾸 남의 것을 탐내다가 그만 하늘의 벌을 받았다네."
십 년 전 셋이서 글공부할 때도 제 밥그릇만 채우더니, 그 뒤로도 욕심을 못 버려서 죗값을 치르나 봐. -107~110쪽

아무리 죗값을 치른다고 해도 옛 동무가 저런 꼴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불쌍하겠어. 선돌이가 신돌이를 붙잡고 사정을 해.
"여보게, 아무려나 같이 공부하던 글동무인데 불쌍해서 못 보겠네. 자네는 신선이니 무슨 수가 없겠는가?"
그러니까 신돌이가 한참 동안 궁리를 해. 그러더니 구렁이더러,
"여보게, 뒤뜰에 가면 복숭아 나무가 하나 있으니, 거기 가서 복숭아를 있는 대로 다 따 오게나."
하고 심부름을 시켜, 구렁이가 된 부돌이가 그 말을 듣고 스르르 뒤뜰로 갔어. 구렁이를 보내 놓고 나서 신돌이가 하는 말이,
"만약에 부돌이가 복숭아를 그대로 다 가지고 오면 하늘의 용서를 받아 다시 사람이 될 수 있을 걸세."
이러거든. 조금 있으니까 구렁이가 복숭아를 세 개 입에 물고 와. 신돌이가 그걸 보더니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단 말이야.
"왜 그러는가? 부돌이가 뭘 또 잘못했는가?"
"뒤뜰에 열린 복숭아는 네 개인데, 자기가 한 개를 따 먹고 세 개만 가지고 왔어. 아직도 욕심을 못 버린 게야. 도대체 사람 노릇을 할 수 없는 심보니 난들 어쩌겠는가."-107~110쪽

그 소리를 들은 구렁이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더래. 그 뒤로 신돌이, 선돌이는 오래오래 잘 살았는데 부돌이는 다시 나타나지 않더란다. 지금도 구렁이로 살고 있는지 몰라.-107~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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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성 소화 선집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9
김준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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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생盧生이라는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의협심이 있었다.
일찍이 호남湖南을 유람하다가 고을 원을 방문했다. 관아에는 쑥대머리에 닭의 살가죽 같은 피부를 가진 예순 넘은 늙은 기생이 있었다. 그녀는 그래도 옛날에는 명창이라 불렀던 기생이었다.
노생은 나이를 고려하지 않고 밤이 깊어지자 그 기생을 불렀다. 기생은 즐거이 부름을 받들었다. 긴 옷을 입어 피부를 가리고, 입에는 산초를 머금어 입 냄새가 나지 않게 했다. 노생은 기생의 옛 명성을 흠모하여 마침내 잠자리를 같이하였다. 기생은 매우 기뻐하며 젊은 부부가 된 듯이 노닐었는데, 마치 아이들이 장난치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기생은 관아에서 나오는 사사로운 음식을 내지 못하게 하고 대신 몸소 음식을 갖추고서 큰 그릇 삼십여 개에 담아 노생에게 올렸다. 음식 하나하나가 모두 진미였다. 이처럼 기생은 노생에게 날마다 여섯 번 식사를 올렸고, 식사 때는 상머리에 앉아서 한 숟가락 한 숟가락 떠주며 음식을 권했다.
노생은 억지로 밥을 더 먹었지만 여섯 끼나 배불리 먹어야 하는 고통은 견딜 수 없었다. 다른 곳으로 가 머물려 하면 기생은 발악하며 조금도 떨어지지 못하게 했다.-367~368쪽

그래서 노생이 겪는 괴로움은 마치 당학질唐虐疾이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았다.
어느 날 새벽, 노생은 종에게 미리 말을 준비해두라고 했다. 그러고는 측간에 가는 것처럼 하고 나와 말에 채찍질을 더해가며 달아났다.
아전은 그 사연을 고을 원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고을 원은 웃으며 말했다.
"일찍이 맹상군孟嘗君의 식객도 배불리 먹는 것이 괴로워 달아났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네. 그런데 지금 내 손님은 배가 불러 죽을 것 같아 달아났으니 내가 맹상군보다 낫구나."-367~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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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성 소화 선집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9
김준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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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수토끼 한 마리가 곰의 굴에 들어갔는데, 어미 곰은 밖에 나가고 새끼 곰만 있었다. 토끼가 새끼 곰에게 말했다.
"네 어미가 있었다면 내가 마땅히 그 음문에 한번 흘레라도 했을텐데....... 마침 네 어미가 없으니 한탄스럽고 애석하구나."
어미 곰이 돌아오자 새끼 곰은 토끼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어미 곰이 화를 내며 말했다.
"호랑이는 산군山君이로되, 세상의 수많은 영웅들은 그래도 내가 먼저고 호랑이는 나중이라 하지. 하물며 쇠 입에 긴 수염을 가진 괴상한 존재인 토끼가 감히 나를 욕보이다니. 만약 다시 온다면 내 마땅히 그놈을 잡아 한입에 삼켜버리리라."
그리고 어미 곰은 숲 속에 몸을 숨겼다. 이윽고 토끼가 지나다가 다시 그 굴에 와서 새끼 곰에게 전과 같은 말을 했다.
그때 숨어 있던 어미 곰이 즉시 튀어나오자, 토끼는 깜짝 놀라 달아났다.
몸이 작은 토끼는 우거진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어미 곰도 토끼를 쫓아갔지만 워낙 몸이 커서 우거진 나무 사이를 뚫지 못하고, 오히려 칡과 등나무 덩굴에 끼이고 말았다. 그러자 토끼는 되돌아와 어미 곰 뒤로 가서 겁간을 하고 달아나며 말했다.-333~335쪽

"이래도 내가 네 지아비가 아니더냐?"
그때 마침 하늘을 돌며 날던 큰 수리가 토끼를 낚아채고 멀리멀리 날아갔다. 그러자 곰이 머리를 들어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시나요?"
그러자 토끼가 대답했다.
"하느님께서 나를 약에 쓰려고 수리를 보내 맞이하는 것이라네. 그래서 내가 수리를 따라가는 것이고."
수리는 두려우면서도 화가 나 말했다.
"내가 너를 잡아먹는다 해도 배에 차지 않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너를 풀 한 포기 없는 섬에 던져버려 굶어 죽게 하리라."
수리는 모래섬에다 토끼를 던져버렸다.
토끼는 모래섬에 떨어진 후 오랫동안 굶주려 장차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마침 별주부鼈主簿란 놈이 물결 위에서 노닐고 있는 것이 보였다. 토끼는 별주부의 화를 돋우려고 따지듯이 말했다.
"외로운 놈, 친척도 없는 자라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물고기와 자라는 모두 내 친족으로, 이들이 바다를 모두 덮는다면 바다가 오히려 좁을 게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가 와롭다고 하느냐?"
"네가 정말 그들을 불러 바다를 메울 수 있어?"
그러자 별주부가 그의 무리들을 불러 바다를 차례로 덮게 했다.-333~335쪽

"그렇다면 내 마땅히 수가 얼마나 되는지 세어보지."
그러면서 토끼는 자라의 등 위로 뛰어올라 차례차례 걸음을 옮겼다.
"한 자라, 두 자라....... 천 자라....... 만 자라......."
물가에 이르자 토끼는 육지로 뛰어오르면서 말했다.
"넘어가는 자라!"
그렇게 뽐내면서 가다가 토끼는 갑자기 시골 사람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었다. 거기에서 빠쟈나올 계획은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붉은 머리를 한 쉬파리가 토끼의 눈자위에 와서 앉았다. 토끼는 또 쉬파리를 흥분시키려고 말했다.
"너는 자손도 없으면서 어찌 감히 내게 오느냐?"
그러자 쉬파리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내 자손은 '수레이 싣고 말[斗]로 될' 만큼 많아서 그 수를 셀수 없을 정도다!"
토끼는 놀라는 척하며 말했다.
"정말 네 자손이 그렇게 많다면 불러 모아서 내 몸의 털 하나마다 알 하나씩 낳을 수 있느냐?"
쉬파리는 즉시 앵앵하며 소리를 냈다. 그러자 다른 쉬파리들이 무더기로 모여들더니, 토끼의 털에 알을 낳기 시작했다. 마침내 구더기가 온몸에 가득해졌다. 그런 상태에서 토끼는 숨도 쉬지 않고 거짓으로 죽은 척했다.
그때, 그물을 걷는 사람이 와서 보고는 탄식하며 말했다.-333~335쪽

"그물에 걸린 지 오래되었구나. 썩어서 구더기까지 생겼으니...... 이를 장차 어디에 쓰리오?"
그러고는 산 구릉에 던져버렸다. 토끼는 뛰어 달아나며 말했다.
"달리는 자라가 마침내 죽음을 면했네."
토끼는 처음에 자라로 인해 목숨을 건졌던 까닭에 또한 기쁨이 지극해지자 자기 스스로 다시 자라라고 칭했던 것이다. 자라는 곧 별鱉의 속명이다.-333~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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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소총 5 - 한국고전걸작유머
김현룡 엮음 / 자유문학사 / 2008년 1월
절판


한 고을에 부잣집이 있어 많은 종을 부리며 살았다. 그 중의 한 여종이 얼굴이 잘생기고 예뻤는데 한 가지 결점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가까이 하다가도 피하는 것이었다.
곧 어릴 때부터 치아 관리를 소홀히 하여, 이가 누렇게 변해 보기 싫었던 것이다.
그 이웃에 홍씨 성을 가진 한 총각이 살고 있어, 신체가 건장하고 성실하며 열심히 일해 살림이 넉넉했다. 한데 이 총각은 자신의 몸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아 잘 씻지 않았고, 특히 팔에 낀 때가 햇볕에 그을려 오래되다 보니 매우 보기 싫었다.
그런데 간혹 이 부잣집 여종이 밖으로 나올 때면 이웃집 총각을 만나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서로 눈길이 마주쳐 정감을 느끼기는 했으나, 그대로 지나치기만 하여 별다른 인연이 생기지 않았다.
그 근처에 사는 한 호사자(好者:이야기를 좋아하고 짓궂은 일을 잘 꾸미는 사람)가 이 총각과 자주 만났는데, 유심히 살피니 부잣집 여종을 좋아하는 듯한 눈치가 보였다. 이에 호사자는 한 가지 계책을 꾸미기 시작했다.
하루는 여종이 집 밖으로 나왔기에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79~80쪽

"옆집 총각이 너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은데, 네 이가 보기 싫어 꺼리고 있단다. 그러니 매일 이를 잘 닦아 예뻐 보이도록 애쓰려무나."
이렇게 해놓고는 다시 총각을 만나 이야기했다.
"그 부잣집의 예쁘고 참한 여종이 너를 좋아하는 듯한데, 네 팔에 때가 너무 많이 끼어 싫어하니, 오늘부터는 그 팔이며 몸을 깨끗이 씻어 말끔해지도록 노력해 봐라."
그리하여 여종과 총각이 저마다 깨끗해지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몇 달쯤 지나자, 총각이 자기 팔을 보니 많이 깔끔해졌는지라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는 여종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을 떠올리며 한번 만나 보기로 작정하고 부잣집을 살피다가, 주인이 외출하는 날을 노려 찾아갔다.
이에 총각이 대문에서 소리쳐 부르니 여종이 나왔다.
"내 주인어른께 드릴 말씀이 있어 그러는데 안에 계시느냐?"
하면서 총각은 일부러 팔을 드러내 보이려고 앞으로 내뻗는 것이었다. 그러자 여종 역시 자신의 이가 깨끗해졌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입술을 벌려 이를 드러내니, 그 모습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보였다.
이러고서 총각을 바라보며,-79~80쪽

"주인어른께서는 조금 전에 외출하셨습니다."
라고 말하니, 총각이 보기에는 자신을 좋아하는 표정으로 느껴져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에 총각이 다정한 눈길을 보내니, 여종의 마음속에도 흠모의 정이 일어, 두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연정의 고리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후로 그들은 자주 만나 사랑을 나눴고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되니, 호사자는 흐뭇해 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전국 시대 소진은 합종책을 이루지 못하다가
어시로 문득 작은 지혜 말재간 인연 이뤘도다.
지저분한 것이 중간 연락됨을 웃지 마라
마침내 도저하여 꽃다운 인연 만들어 주었네.

훗날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은 아름다운 미담으로 여기더라. <어면순>-79~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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