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 김용택의 꼭 한번 필사하고 싶은 시 감성치유 라이팅북
김용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백년

 

이병률

 

 

 

 

백년을 만날게요

십 년은 내가 다 줄게요

이십 년은 오로지 다닐래요

삼십 년은 당신하고 다닐래요

사십 년은 당신을 위해 하늘을 살게요

오십 년은 그 하늘에 씨를 뿌릴게요

육십 년은 눈 녹여 술을 담글래요

칠십 년은 당신 이마에 자주 손을 올릴게요

팔십 년은 당신하고 눈이 멀게요

구십 년엔 나도 조금 아플게요

백 년 지나고 백 년을 한 번이라 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을 보낼게요

 

그리움

 

신달자

 

 

 

내 몸에 마지막 피 한 방울

마음의 여백까지 있는 대로

휘몰아 너에게로 마구잡이로

쏟아져 흘러가는

이 난감한

생명 이동

 

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슬한 가슴에 있건만

 

바람의 노래를 들을 것이다

울고 왔다 웃고 갔을 인생과

웃고 왔다 울고 갔을 인생들을

 

 

그날

 

곽효환

 

 

 

그날, 텔레비전 앞에서 늦은 저녁을 먹다가

울컥 울음이 터졌다

멈출 수 없어 그냥 두었다

오랫동안 오늘 이전과 이후만 있을 것 같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밤, 다시 견디는 힘을 배우기로 했다

 

 

가을, 그리고 겨울

 

 

최하림

 

 

 

깊은

가을길로 걸어갔다

피아노 소리 뒤엉킨

예술학교 교정에는

희미한 빛이 남아 있고

언덕과 집들

어둠에 덮여

이상하게 안개비 뿌렸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아름다웠다

달리는 시간도 열렸다 닫히는 유리창도

무성하게 돋아난 마른 잡초들은

마을과 더불어 있고

시간을 통과해온 얼굴들은 투명하고

나무 아래 별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슬픔으로

사물이 빛을 발하고 이별이 드넓어지고

세석에 눈이 내렸다

살아 있으므로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시간들이 가서 마을과 언덕에 눈이 쌓이고

생각들이 무거워지고

나무들이 축복처럼 서 있을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저렇듯 무겁게

내린다고, 어느 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눈이 떨면서 내릴 것이다

등불이 눈을 비출 것이다

등불이 사랑을 비출 것이다

내가 울고 있을 것이다

 

 

웃은 죄

 

김동환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주고,

그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았지요

 

 

평양성에 해 안 뜬대두

난 모르고.

 

 

웃은 죄밖에.

 

 

다름 아니라

 

 

윌리엄 윌리엄스

 

 

 

냉장고에

있던 자두를

내가 먹어버렸다오

 

 

아마 당신이

아침식사 때

내놓으려고

남겨둔 것일 텐데

 

 

용서해요, 한데

아주 맛있었소

얼마나 달고

시원하던지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나짐 히크메트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당신이 만약 촛불을 켜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 어두움을 어떻게 밝힐 수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