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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일 것 행복할 것 - 루나파크 : 독립생활의 기록
홍인혜 지음 / 달 / 2016년 11월
평점 :
겨울
어린 시절엔 크리스마스와 눈 썰매의 계절이었으나
이제는 가스비와 웃풍의 계절.
가스비 고지서를 받아들고 입을 떡 벌려봐야
진정한 독립생활자라 할 수 있다.
사계절이 있다는 사실이 이 나라의 장점이라고
세뇌받아온 지난 세월을 부정하며.
겨울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는 우리.
요새처럼 난방 텐트를 치고,
갑옷처럼 극세사 담요를 두르고,
군화처럼 수면 양말을 신고
이 약탈의 계절이 조속히 물러가기만을 소망한다.
건더기 수프
라면에 털어 넣는 알량한 야채 조각들.
부모님과 살 적엔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싱크대에 대충 따라 버렸다.
하지만 가사인이 되고 알았다.
음식물 쓰레기는 큼직한 것이 차라리 처리하기 쉽지
이런 작은 조각들은 거름망에 들러붙어
처리하기 사납다는 사실.
종잇조각 같은 맛이 날지언정
악착같이 건져서 먹어 치운다.
차라리 넣지 말까봐.
반려생물
이 집에 살고 있는 생물들을
생멸력이 강한 순서대로 소개한다.
1위는 물도 볕도 없는 냉장고 야채칸에서
20센티나 싹이 자란 양파.
놈들은 어디서도 생존 가능한 야채계의 울버린이다.
2위는 닦아내고 닦아내고 또 닦아내도
집요하게 생겨나는 욕실의 곰팡이.
놈들은 머리를 베도 베도 살아나는 미생물계의 히드라다.
3위는 과일을 이틀만 실온에 둬도
어디선가 출몰하는 초파리떼.
놈들은 어디든 침투 가능한 벌례계의 특수부대다.
꼴찌는 과민성 대장염과 비염.
역류성 식도염을 달고 사는 나.
이놈이 이 집의 주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최약체다.
술
나를 웃게 하는 유쾌한 친구.
용기를 솟게 하는 호방한 친구.
혼자서도 춤추게 하는 흥 많은 친구이자
꺼리던 사람까지 품게 하는 정 많은 친구.
하지만
공포를 제거하는 무모한 친구.
기억을 앗아가는 도적 같은 친구.
다음날 뒤통수치는 뒤끝 있는 친구이자
내일의 행복을 가불해 쓰게 하는 대책 없는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