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설 99
최정희 엮음 / 우리출판사(서울출판) / 1996년 10월
구판절판


"도련님, 어서 활시위를 당기십시오."
시중 들던 할아범이 숨이 턱에 차도록 채근을 하는데 과연 귀를 쫑긋 세운 노루 한 마리가 저쪽 숲에서 오고 있었다.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고 화살이 막 튕겨지려는 순간 수덕은 말 없이 눈웃음을 치며 활을 거두었다.
"아니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몰이는 하느라 진땀을 뺀 하인들은 활을 당기기만 하면 노루를 잡을 판이기에 못내 섭섭해 했다.
"너희들 눈에는 노루만 보이느냐? 그 옆에 사람은 보이지 않느냐?"
"이 산골짜기에 저런 처녀가?"
하인들은 모두 의아해 했다.
"도련님, 눈이 부시도록 아리땁습니다. 노루 대신 여인을... 헤헤."
"에끼 이녀석, 무슨 말버릇이 그리 방자하냐. 자 어서들 돌아가자."
수덕은 체통을 차리려는 듯 일부러 호통을 치고 갈 길을 재촉했으나 가슴은 뛰고 있었다.
노루사냥이 절정에 달했을 때 홀연히 나타난 여인, 어쩜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수덕 도령의 가슴은 더욱 뭉클했다.
"차라리 만나나 볼 것을..."
양반의 법도가 원망스럽기조차 했다.
"이랴."
마상에서 멀어져가는 여인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왔으나 들떠있는 수덕의 가슴은 진정되지를 않았다.-65~68쪽

책을 펼쳐도 글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눈에 어리는 것은 여인의 모습뿐.
하는 수 없이 도령은 할아범을 시켜 그 여인의 행방을 알아오도록 했다.
할아범은 그날로 여인이 누구이며 어디 사는가를 수소문해 왔다.
그녀는 바로 건넛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 낭자였다. 아름다웁고 덕스러울 뿐 아니라 예의범절과 문장이 출중하여 마을 젊은이들이 줄지어 혼담을 건네고 있으나 어인 일인지 모두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덕의 가슴엔 불이 붙었다.
자연 글읽기에 소홀하게 된 수덕은 훈장의 눈을 피해 매일 처녀의 집 주위를 배회했다.
그러나 먼 빛으로 스치는 모습만을 바라볼 뿐 낭자를 만날 길이 없었다.
어느 날 밤. 가슴을 태우던 수덕은 용기를 내어 낭자의 집으로 찾아 들었다.
"덕숭 낭자, 예가 아닌 줄 아오나..."
"지체 높은 도련님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낭자! 나는 그대와 혼인하기로 결심했소. 만약 승낙치 않으면 죽음으로 내 뜻을 풀어야 할 지경이오."
"하오나 소녀는 아직 혼인할 나이도 아닐 뿐더러 혼자 남은 미천한 처지입니다."
"낭자! 나는 그대로 인하여 책을 놓은 지 벌써 두 달, 대장부 결단을 받아주오."-65~68쪽

두 볼이 유난히 붉어진 낭자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일찍이 비명에 돌아가신 어버이의 고혼을 위로하도록 집 근처에 큰 절 하나를 세워 주시면 혼인을 승낙하겠습니다."
"염려마오. 내 곧 착수하리다."
마음이 바쁜 도령은 부모님 반대도,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상관치 않고 불사에 전념했다.
기둥을 가다듬고 기와를 구웠다. 이윽고 한 달만에 절이 완성됐다.
수덕은 한걸음에 낭자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제 막 단청이 끝났소. 자 어서 절 구경을 갑시다."
"구경 아니하여도 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 무엇을 안단 말이오?"
그때였다.
"도련님 저 불길을..."
절에서 불길이 솟구치고 있는 게 아닌가. 수덕은 흐느끼며 부처님을 원망했다.
낭자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수덕을 위로했다.
"한 여인을 탐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일념으로 부처님을 염하면서 절을 다시 지으십시오."
수덕은 결심을 새롭게 하고 다시 불사를 시작했다. 매일 저녁 목욕 재계하면서 기도를 했으나 이따금씩 덕숭 낭자의 얼굴이 떠오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마다 일손을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절을 완성 할 무렵 또 불이 나고 말았다.-65~68쪽

다시 또 한 달.
드디어 신비롭기 그지없는 웅장한 대웅전이 완성됐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수덕은 흡족한 마음으로 합장을 했다.
"도련님, 소녀의 소원을 풀어주셔서 그 은혜 백골난망이옵니다. 이 미천한 소녀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마침내 신방이 꾸며졌다. 촛불은 은밀한데 낭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부지간이지만 잠자리만은 따로 해주세요."
이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수덕은 낭자를 덥썩 잡았다.
순간 뇌성벽력과 함께 돌풍이 일면서 낭자의 모습은 문밖으로 사라졌고 수덕의 두 손에는 버선 한짝이 쥐어져 있었다.
버선을 들여다보는 순간 눈앞에는 큼직한 바위와 그 바위 틈새에 낭자의 버선 같은 하얀 꽃이 피어있는 이변이 일어났다.
신방도 덕숭 낭자도 세속의 탐욕과 함께 사라졌다.
수덕은 그제야 깨달았다. 덕숭 낭자가 관음의 화신임을.
그리하여 수덕은 절 이름을 수덕사라 칭하고 수덕사가 있는 산을 덕숭산이라 했다.
지금도 수덕사 인근 바위 틈에서는 해마다 「버선꽃」이 피며 이 꽃은 관음의 버선이라 전해 오고 있다. 〔예산. 수덕사〕-65~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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