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약초가 자라고 있는 옥황상제의 약초원에는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불사초가 있기 때문이다. 옥황상제는 이미 영원히 죽음을 모른다는 불사약을 먹었으므로 자신을 위해서는 필요 없고 남은 한포기의 불사초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생각하다 자기 아내로 삼을 제일 아름다운 처녀에게 먹일 작정을 하였다.
그리하여 옥황상제는 천상백옥경의 궁녀, 남악봉의 선녀들 속에서 미인을 고르고 또 골랐으나 인물 잘나고 몸가짐과 걸음걸이가 단정한 처녀를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 였다. 그러는 사이에 크게 자란 불사약은 며칠 후에 성숙기가 지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다음 성숙기까지 300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옥황상제의 눈이 발칵 뒤집힌 일이 생겼다. 그것은 불사초를 누가 몰래 뜯어먹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불사초를 훔쳐 먹은 놈을 붙잡아 대령하라는 옥황상제의 엄명이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옥황상제 앞에는 범인이 끌려왔는데 범인은 간을 약으로 쓴다는 달나라에서 온 토끼였다. 옥황상제는 토끼를 당장 죽이라고 영을 내렸으나 신하들은 토끼가 불사약을 먹었기 때문에 죽일 수 없다고 아뢰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옥황상제는 토끼를 사람으로 변생시켜 인간세상으로 내려 보내 고생시키라고 명하였다.
옥황상제의 명으로 토끼가 사람으로 변신하여 금강산에 내려 온지도 반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토끼는 금강산 일만 이천봉우리들과 계곡, 호수, 해안경치들을 다 돌아보고 세존봉중턱 동굴에 자리를 잡았다. 그 동굴은 옥황상제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사람으로 변신한 토끼는 이름을 누리라고 지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 닥쳐올 것을 생각하여 겨울양식도 마련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누리는 세존봉 기슭에서 약초를 캐는 아름다운 처녀를 만났다. 처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누리는 처녀에게 다가가 몇 마디의 말을 주고받았지만 끝내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처녀도 분명 무엇인가 마음속 사연을 다 말하지 못한 것 같았다.
누리는 다음날 처녀가 또 왔으면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세존봉 기슭으로 내려갔다. 처녀는 어제처럼 약초를 캐고 있었다. 처녀는 누리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이렇게 만나기를 몇 번, 그사이 누리와 처녀와의 사이는 전혀 남 같지 않은 정이 들게 되었다.
누리는 어느 날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던 자신의 비밀동굴로 처녀를 이끌어갔다. 그리고 처녀의 두 손을 꼭 잡고 "나는 집도 없고 형제도 없는 이런 사람이요. 그대가 나의 아내가 되어줄 수 없겠소?"라고 말하였다.
한 참후에야 처녀는 수줍어하며 "나도 이 세상에 의탁할 곳이 없어요"라고 하며 누리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누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아내로 맞은것이 자랑스러웠다. 그 후 누리는 아내와 함께 동굴에서 떠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하루는 까닭없이 깊은 수심에 잠겼던 아내가 누리에게 자기 마음속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는 지금까지 남편인 누리를 속였다고 하면서 자기는 자라의 딸로서 동해바다의 용궁에서 살던 용녀였는데 궁녀로 들어간 지 10년이 되는 해에 용궁에 하나밖에 없는 수정대접을 깨뜨린 죄로 용왕의 벌을 받고 인간 세상에 쫓겨 온 몸이라는 것이었다. 아내의 기막힌 사연을 들은 누리는 아내의 손을 꼭 잡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
, 우리 둘의 운명은 어쩌면 그리도 꼭 같을까!"
그리고 누리도 자신의 숨기고 살아온 지난날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요. 지난날이야 아무려면 어떻소. 우리 여기 인간세상에서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재미나게 살아 봅시다" 그러나 용녀의 얼굴에 수심을 풀지 못하고 어제 밤의 꿈 이야기를 하는 것 이었다. 한밤 중이였다. 갑자기 동해의 진주로 만든 면류관을 쓰고 임금왕자가 새겨진 푸른색 비단 도포를 입은 동해바다의 용왕님이 나타났다.
용왕은 용녀에게 나무와 물, 산밖에 없는 속세에서 고생이 많았겠다고 하면서 용궁을 떠난지 10년이 됐으니 이제는 원죄에 대한 시효가 지났으므로 어서 용궁으로 돌아오라고 명하는 것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용녀는 용왕의 부름을 달게 여기며 지난날 자신이 살던 용궁으로 한달음에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강산을 떠나서 살 것같지 못했다. 그리고 누리와의 부부간의 정은 금실은실로 늘어져 더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꿈속에서도 용녀는 용왕에게 고생스러워도 자신은 인간이 사는 속세가 좋다고 이곳을 떠나지 않고 영원히 금강산에서 살겠노라고 목청껏 외쳤지만 안타깝게도 그 말은 입밖에 나가지 않고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이렇게 용녀는 그날 밤 꿈속에서 날을 지새웠다. 이런 말을 하는 용녀의 눈에서는 이슬이 흘러내렸다.
아내의 손을 꼭 잡은 누리는 자신도 용녀와 같은 처지라고 하면서 어떤 일이 있어서 돌아가지 말고 함께 금강산에서 살자고 말했다. 그러나 용녀는 머리를 저으며 용왕은 자신이 어디에 있어도 찾아내는 신비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의 말을 들은 누리는 두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했다.
"
그럴 일 없소. 이 동굴 속에만 있으면 하늘의 옥황상제도 못 찾겠는데 어떻게 동해바다의 용왕이 찾아내겠소. 아마 옥황상제도 나를 찾기 시작하였을 거요. 그러나 우리가 이 동굴에만 있으면 어느 때까지라도 일 없을 거요" 누리는 아내에게 믿음을 주었다. 누리와 용녀의 동굴생활은 이처럼 자신들의 행복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일로 되었다. 이렇게 날이 가고 달이 바뀌고 해가 지났다. 그들의 부부생활은 꿈속처럼 흘렀지만 옥에 티라고 그들의 행복도 완전한 것이 못되었다. 그것은 동굴 속에서만 살다 보니 금강산 구경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 부부의 소망은 처음에 작은 싹으로 틔어났지만 날이 가고 해가 바뀔수록 더는 미룰 수 없는 간절한 것으로 되었다. 금강산의 경치를 못보다 보니 밥맛이 없고 몸도 약해져 앓을 것만 같았다.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누리는 어느 날 아내와 함께 동굴 속에서 나와 꿈결에도 그리던 금강산 구경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먼저 구룡연 계곡을 돌아보고 난 그들 부부는 아름다운 금강산의 전경을 보려고 세존봉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산중턱에 올라 세존봉의 봉우리를 한눈에 바라보는데 갑자기 하늘에 검은 구름이 덮이며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었다.
때를 같이하여 총석정 앞의 동해바다가 폭풍 치며 뒤설레였다. 하늘을 쳐다보던 누리는 놀라 소리쳤다 "여보, 옥황상제가 나를 부르고 있소" 동해바다의 폭풍소리에 귀 기울이던 용녀 역시 "여보, 용왕이 나를 부르고 있어요."라고 말하며 겁에 질려 떨었다. 그만 금강산 구경에 취해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한 누리는 아내의 손목을 잡고 동굴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때 천둥소리와 함께 천지를 분간하기 어려운 암흑이 세존봉을 덮었다. 잠시 후 어둠이 물러나고 날이 밝아지니 누리가 서있던 곳에 토끼바위가 솟아나고 북쪽의 세존봉바위 위에는 용녀가 자라로 되어 돌로 굳어졌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