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기로 마음을 굳히자 태자는 아버지의 뜻을 바꾸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다. 그러나 부왕인 경순왕의 뜻이 확고함을 알고는 스스로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금강산으로 향하였다. 오랜 시간을 걸려 금강산 장안사 계곡에 도착하자 장안사에 주석하고 있던 대륜법사가 이미 알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태자는 대륜 스님과 앞날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으나 고려군에 대항하여 싸울 것인지, 아니면 군대를 해산하고 자신은 출가하여 승려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동네 주민들은 태자가 결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그에 감복하여 명경대 입구와 영원동에 이르는 구간에 산성을 쌓았다. 어느 날 고려의 군사가 쳐들어온다는 첩보가 날아들었고 고려의 군사와 싸울만한 인원이 없던 태자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시종하고 있던 사람들을 이끌고 망군대로 올라가 살펴보니 고려의 군사는 삼억동 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곰곰히 생각하던 태자는 즉시 사람을 시켜 횟가루를 가져오도록 하여 명경대 앞을 가로질러 내려가는 황천강 물줄기에 횟가루를 풀도록 시켰다. 한편 고려의 군사는 대열을 정비하여 공격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강물에서 흰색 쌀뜨물이 흘러오자 놀랐다. 그들은 횟가루를 쌀 씻는 물로 생각하여, 산골짜기에 신라의 대군이 숨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퇴각하였다. 이렇게 몇 년 세월이 흐르자 태자는 자신의 운명이 다하였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 사이 태자는 화려한 복장을 벗어 버리고 오직 베옷만을 입고 있었으므로 마의태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태자는 비로봉으로 올라가서 이제는 모든 것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타고 다니던 말을 계마석(繫馬石)에 묶어 두고 멀리 신라와 개경 쪽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이별을 고하자 마의태자의 몸도 천천히 죽어 갔다. 태자가 죽자 그가 타던 용마 역시 죽어 바위로 변하고 말았다. 지금 비로봉 구역에 있는 마의태자릉은 그 때 태자를 묻은 곳이며, 옆에 있는 용마석은 그가 타던 말이 변해서 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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