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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도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새 책, 이 책을 보면서 최근에 본 두 개의 드라마와 한 개의 영화를 떠올렸다. 하나는 <아씨 두리안> 이 드라마를 보면서 참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상상도 못했던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 죽음을 애통해하고 죽을 만큼 그리워하다 보니 부처님도 감동해서 타임라인을 넘어 그 님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 물론 시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그 님은 절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두 번째는 대만 드라마 <상견니> , 이 드라마도 사고로 떠난 연인을 잊지 못해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던 여자가 어찌어찌해서 타임라인을 넘어 그 연인이 고교 시절이었던 세상으로 넘어간다. 여기서도 물론 연인은 연인을 알아보지 못하는데 두리안과 다른 건 여자가 타임라인을 왔다 갔다 한다는 것, 즉 몇 십 년 전의 과거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왔다가 하는데 그 와중에 과거의 인물과 실제로 만나기도 한다는 것, 세 번째는 대만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이 영화는 고등학교 교내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된 여학생이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남학생이 그 여학생을 만나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는 것. 결말이 충격적이라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멍했었다. 그동안 내가 알던 대부분의 스토리, 전설의 고향을 비롯해 지금 이 시대의 러브스토리까지, 이승과 저승의 인물이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서로의 정체를 알고 나면 슬퍼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추억을 곱씹는 것으로 끝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는데 이 이야기는 살아있는 자가 연인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로 거침없이 떠난다는 것에 전율을 느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이 이야기 또한 비슷하지 아니한가. 열일곱 살때 만난 열여섯 살 소녀, 벽으로 싸인 도서관이 있는 둘만의 세계를 만들었고 서로가 자신의 전부를 다 줄 수 있었던 관계, 그 소녀가 갑자기 떠나고 소년은 마흔 살이 넘어서도 소녀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두 사람이 상상 속에서 만들었다고 생각한 벽이 있는 도시의 웅덩이에서 깨어난다. 물론 거기에는 남자가 그렇게도 못 잊어 현실에 제대로 발을 붙일 수 없게 만들었던 열여섯 소녀가 있다. 당연히 그 소녀는 남자를 알아보지 못한다. 남자는 자신의 그림자를 현실로 내보내고 스스로는 도서관에 남을 생각이었지만 멀쩡하게도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데 전보다도 더욱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견디다 못해 한적한 시골의 도서관 관장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그 불확실한 벽"이 있는 도시는 이 남자를 끝까지 따라붙는다. 그래서? 그 지역의 어떤 소년을 통해 남자는 다시금 그 도시로 들어가는데 그곳엔 여전히 소녀와 남자가 도서관에서 "꿈 읽기" 작업을 하고 있다. 대체 누가 실체이고 누가 그림자일까? 결국 소년이 "꿈 읽기" 자리를 차지하고 남자를 내보낸다. 과연 남자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림자와 실체가 합쳐진 온전한 인간으로 도서관 관장 자리를 유지하면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더는 소녀를 그리워하지 않으면서? 열일곱 소년이 만났던 열여섯 소녀는 그림자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무튼 하루키는 거대한 광맥을 발견했다. 파고파고 한없이 파내도 이어져 나오는 이야기의 광맥, 처음 이 책을 읽을 땐 <기사단장 죽이기>를 다시 읽는 기분이었다. 이게 뭐지? 남자가 한밤중에 들리는 요령 소리에 잠이 깨어 잠 못 자고 뒤척이다가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무덤인지 뭔지를 파내고 요령을 발견해 내는 무시무시한 장면이 자꾸만 떠오르면서 뭔가 무서운 게 나올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의 소설은 어떤 걸 봐도 비슷한 세계다. 죽은 자와 산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나오는 어떤 것들,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소설은 아예 죽은 사람과 산사람이 거침없이 왕래하기도 한다지만. 그리고 상상의 세계에 나오는 풍경들, 뭐가 들어있는지 모를 구덩이, 입 벌리고 있는 회색 물웅덩이, 컴컴한 지하의 끝없이 좁은 하천,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하면서 다 읽고 나면? 어떤 영양가라던가 내 삶에 자극이 되는 무언가는 전혀 없고 책 속에 빠져있는 동안 잠시 일상을 떠나 그의 판타지 세계로 빠져들었다가 아! 이제 세상 밖으로 나왔구나 하는 기분일뿐이다. 마취주사에 취해 의식을 잃고 있다가 수술이 끝난 후 수술대 위에서 들것으로 몸이 옮겨지는 순간 잠에서 깨어나듯 의식이 돌아오는 느낌? 캄캄한 영화관에서 두 시간 동안 정신 줄 놓고 있다가 환한 바깥으로 나와 다행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어 이런 기분?
언젠가 내가 힘들었을 때,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하루키의 책은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나를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의 책을 펼치면 곧장 골치 아픈 세상사를 떠나 작가의 주인공을 따라 하염없이 어떤 세계를 여행할 수 있게 된다. 그게 어디든, 나를 잊어버리게 하고 복잡다단, 조잡스러운 나를 다른 세계로 끌고 갈 수 있는 힘, 이게 하루키의 힘 아닌가 싶다. 영양가가 있든 없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