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지기 전에 - 1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
김정섭 지음 / Mid(엠아이디)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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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자 없는 비극, 1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재구성하다!

1차 세계대전이 한반도의 안보에 던지는 질문과 경고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과 압박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ICBM을 발사했다.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핵탄두 소형화 기술 발전을 향한 이번 발사는 미국과 국제 사회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의지를 명확히 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핵과 ICBM이 가져다주는 공포를 앞세워 체제를 공고히 하고 힘의 우위를 선점하여 한반도를 자신들의 뜻대로 재편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북한과 대화를 모색하던 정부와 미국은 보다 강력한 외교적 압박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그간의 정황으로 미루어봤을 때 실효성은 미지수다. 선제타격론이나 북한 핵 위협을 무력화하기 위한 방법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단호함만으로는 평화를 담보할 수 없고, 서로의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마냥 낙관적인 태도로 그들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것 또한 쉽지 않아 보인다.

 

 

 

   이제 우리에게는 냉정한 상황인식과 절제된 접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낙엽이 지기 전에>의 저자인 김정섭은 현재 국방부 고위공무원으로 재직 중인 실무자로서 “잘못된 정세판단, 군사와 외교의 단절, 위기관리에 대한 몰이해로 발발한 1차 대전이 한반도에 던지는 교훈”에 주목한다. 1차 대전처럼 의도하지 않아도 일어날지 모르는 한반도 전쟁의 위기 앞에서 이를 극복해나갈 민군관계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가, 의문을 던진다. 이것은 곧 1차 대전이 우리에게 전하는 심각한 경고이며, 진중한 메시지인 점에서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잘못된 믿음과 잘못된 선택들

 

 

   <낙엽이 지기 전에>의 저자 김정섭은 1차 대전은 온갖 아이러니가 가득 찬 수수께끼 같은 전쟁이었다고 평가한다. 주모자를 지목하기가 쉽지 않을 만큼 침략자 없는 전쟁에 가까웠고, 영토 정복과 경제적 이권 같은 탐욕의 충돌도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방어전쟁을 수행한다고 생각하며 뛰어든 전쟁이었고, 당시 서유럽 열강들이 지닌 공격지상주의 신화, 단기전의 환상은 국가적 차원의 일치된 전략적 결정이 아니라 그야 말로 '터져 나온 것'이라고 표현해야 할 만큼 뜻밖의 비극을 불러온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낙엽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한 독일 빌헬름 황제 역시 수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될 정도로 장기간에 걸친 대재앙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1차 대전이 특별히 비극적인 것은 잘못된 믿음 때문에 필요하지 않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방어가 유리했는데도 공격우위의 악몽에 짓눌렸고, 전쟁이 불가피하지 않았는데도 어느 순간 체념하고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였건만 그 준비는 언제부턴가 자체 논리에 의해 움직였고 아무도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탐욕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일어난 전쟁, 억제를 위한 노력 때문에 억제가 깨진 전쟁이 바로 1차 대전이었다. / 34P

 

 

  독일은 비스마르크가 재상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현상유지적인 유럽 질서와 안정적인 운영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런데 젊은 황제 빌헬름 2세의 등장으로 친러정책을 폐기하고, 독일의 번성을 바탕으로 제국 확장에의 야욕을 드러낸다. 독일이 해군력을 증강시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우려한 영국은 자신들을 향한 도전으로 인식하고 프랑스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독일을 주변국으로부터 고립시키려 한다. 아울러 러시아 역시 병력과 중화기를 대폭적으로 증강시키고 있었으며, 프랑스는 방어위주 작전이 아닌 기동성에 바탕을 둔 공격 위주의 군으로 개편한다. 이렇게 요동치는 서유럽 열강들 간의 역학변화 속에서 마침내 유럽의 화약고와 같은 동남부 발칸지역에서 1차 대전의 방아쇠가 된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사라예보에서 18세 청년과 세르비아 내 지하조직 ‘검은 손’에 의해 오스트리아 왕국의 황태자 암살 사건이 벌어지고만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이를 구실로 단호한 대응책을 펼치기 위해 독일로부터 전적인 지원을 약속받는다. 사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의 국지 전쟁으로 끝날 수 있었던 사안이 독일의 지원으로 인해 세계 대전으로 확대될 단추가 끼워진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연합 하에 세르비아가 종속되는 것을 우려하여 당시 러일전쟁의 후유증으로 더 이상 전쟁을 벌일 수 없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준비태세를 갖추어나간다. 이들의 모습은 전쟁으로 보이기에 충분했고 유럽 각국이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너도나도 연쇄적으로 동원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비록 발단은 발칸 지역의 분쟁이 원인이었다고는 하나 이렇듯 세계의 열강들이 하나같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유럽 대륙 내 힘의 균형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우려한 결과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대부분이 군사를 일으키면서도 반드시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빌헬름처럼 길어야 3주 정도에 그치는 단기 전쟁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상하게도 1차 대전에서는 군사작전이 가져올 정치적 결과, 즉 전쟁의 궁극적 목적과 이후에 대한 토의가 없었다는 점이다. 전쟁이 요구하는 엄청난 피의 대가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배제된 채 마치 ‘눈을 뜨고 있었지만 보지 못하는 몽유병 환자처럼’ 유럽은 제 발로 재앙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만 것이다.

 

 

짜르의 표현대로 하면 “힘을 과시함으로써 평화를 지킨다.”는 정책이었다. 문제는 모든 나라가 같은 생각으로 부딪혔다는데 있었다. 사조노프뿐만 아니라 베르히톨트도, 베트맨도, 포앵카레도 모두 단호함을 부르짖었고 그것이 평화를 담보한다고 생각했다. 위기 시에 가장 어려운 일은 성급한 행동을 삼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위기의 먹구름이 모두의 시야를 가릴 때 절제의 용기를 보여주는 사람은 없었다. / 156P

 

 

어느덧 외교의 시간은 가고 군인의 시대가 도래했다. 동원령이 발령되고 병사들의 군화소리가 들리자 각국의 전쟁성은 활기가 넘쳤다. 장교들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굳게 악수를 나누며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돌이켜 보면 모두들 환상 속에 전쟁에 뛰어든 격이었다. 공격지상주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었고 낙엽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전선으로 향했다. / 236P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연합,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연합의 전투는 이후 각 식민지 국가 및 소속 국가들이 모두 참여하면서 전선이 커지기 시작한다. 그야 말로 ‘세계전쟁’이 된 셈이다. 전쟁의 양상은 예상과 달리 지루한 진지전으로 이어지며 무의미한 살육전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독일의 잠수함이 미국 뉴욕을 출발한 영국 여객선을 공격해 침몰 시킨 사건을 계기로 독일이 멕시코 정부에 보낸 연합 제의 비밀 전문이 발각되면서 이제껏 지켜만 보고 있던 미국까지 참전 소식을 알리게 된다. 사라예보 암살과 세르비아 응징이라는 당초 전쟁의 목적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셈이다. 결국 미국의 합류로 전쟁은 1,568일에 이르러서야 정전협정이 이뤄지며 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게 된다. 이처럼 전쟁의 양상을 잘 살펴보면 결국 1차 세계대전은 전략 환경에 대한 오판으로, 방어우위라는 객관적 현실을 외면하고 선제공격 우위의 발상, 위기관리와 균형을 잃은 민군관계의 전형적인 실패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장군들뿐 아니라 외교관과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어떻게 위기를 증폭시키는지 몰랐고, 고조된 위기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몰랐던 결과가 이처럼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킨 비참한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인류가 미쳤다! 인류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을 보면 미친 게 분명하다. 너무도 끔찍한 학살극이다. 이처럼 끔찍한 공포와 대학살의 아수라장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내 기분을 말로는 도저히 옮길 수 없다. 지옥인들 이보다 끔찍하랴. 인간은 미쳤다!

이것이 주베르가 남긴 마지막 일기였다. / 260P

 

 

 

 

 

 

1차 대전이 한반도 안보에 던지는 질문

 

 

   100년도 전에 저 멀리 유럽에서 발생한 전쟁이지만 앞서 살펴본 문제들이 원인이었다는 점에 있어 우리 한반도 안보에도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한반도 전략상황에 대해 객관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하고 있는가? 두려움과 강박감에 젖어 과잉대응을 할 가능성은 없는가? 중요한 군사문제에 대해 평상시부터 민군간에 깊이 있는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저자는 북핵 위협으로 안보상황이 더없이 엄중해진 오늘날 절대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질문들로 우리의 안보 상황에 예리한 칼날을 드리운다.

 

 

 

   일단 저자는 핵무기가 실전에 사용될 가능성이란 북한 정권의 존립이 위협받을 경우 이를 저지하거나 최후의 보복 수단일 경우로 집약될 것이라 추측한다. 달리 얘기하면 한반도에서의 핵 전쟁은 억제의 허점을 노린 계획적, 의도적 결정으로 발발하기보다는 위기관리가 실패하여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북한의 핵 사용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단호함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기관리가 핵심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강력한 억제조치를 취할 경우에도 그것이 과도한 공포를 유발해 의도하지 않은 핵 사용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폐해는 이미 1차 대전이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반도에는 현재 공포의 균형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즉, 쌍방억제 상황이고 방어 우위 조건이다. 상대방의 의도를 확신할 수 없는 안보딜레마 상황이기 때문에 심리적, 전술적 차원에서는 상당히 불편하고 불안정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과잉 대응이 의도하지 않은 위기 불안정을 초래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방어 우위라는 객관적 조건을 놓치고 선제공격의 유혹과 공포에 굴복했던 1차 대전 유럽인들의 과오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 331P

 

 

되짚어 볼수록 1차 대전이 주는 교훈은 현재진행형이다. 전략상황에 대해 오판하지 말 것, 고정관념과 도그마에 유의할 것, 유약하지 않되 지나친 과잉대응을 조심할 것, 그리고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 민군간에 건설적인 대화가 있을 것.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결코 쉽지 않은 과제들이다. 평화는 결국 힘을 통해서만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냉철함과 절제된 용기, 그리고 민군지도자의 통합된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점이 바로 그 많은 피를 흘리고 얻은 1차 대전의 값진 교훈이 아닐까? / 354P

 

 

 

   1차 대전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거나, 발칸에 국한된 작은 전쟁으로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이었으나 이를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어느 한 나라의 거대한 침략 의도가 아니라 수많은 잘못된 결정들이 누적되어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터져 버린 결과였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과오를 범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어느 일방이 약해 보여서가 아니라 상호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전쟁이 터질 가능성에 유의해야 하며 가장 중요한 점은 위기관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낙엽이 지기 전에>은 한 편의 역사책처럼 1차 대전 발발 전의 상황과 전시 상황을 매우 사실감 있게 전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해석,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가능케 하는 의미 있는 책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던지는 한반도 안보에 전해는 경고와 메시지를 우리 모두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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