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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 소셜 - 사피엔스에 새겨진 ‘초사회성’의 비밀
장대익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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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거울을 볼 때마다 왜 눈에 흰자가 있는지 궁금했다. 눈은 시각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해 있는 감각체인데, 흰자는 아무 역할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 책 <울트라 소셜>을 읽으며 오랜 궁금증이 풀렸다. 눈의 공막(눈의 흰자를 공막이라고 하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이 있어서 시선을 알기 쉽고, 이에 따라 다른 개체의 관심과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공막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어 있어 눈동자를 돋보이게 하는 여백의 역할을 했다. 


고양이 전문가들은 고양이의 눈을 똑바로 보지 말라는 이야기를 한다. 고양이에게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은 “싸우자!”라는 의미라고 한다. 하지만 그걸 몰랐던 나는 처음부터 고양이를 똑바로 바라봤다. 내가 너에게 관심이 있다는 표시였다. 다행히 우리 고양이는 인간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을 이해해준 듯 하다. 내가 똑바로 바라볼 때 고양이가 나를 한 대 친 적은 없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때가 많았다. 이제 그 이유를 알았다. 눈동자의 움직임 없이 시선을 고정해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기 때문이다. 고양이의 눈은 인간과 달라서 눈동자의 시선으로 해석할 수 없었다.


눈의 공막처럼 <울트라 소셜>은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인간의 사회성을 읽어낸다. 틀린 믿음을 이해하는 것, 공정성에 민감한 것, 내부자와 외부자의 편을 가르는 것, 언어가 발달하고 학습으로 다음 세대에 지식을 전달하는 것, 이야기를 즐기는 것 등등. 사실 그 특성이 사회성만을 위해 진화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특성이 인간이라는 종족이 사회를 만들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의 기원>도 <울트라 소셜>과 궤를 같이한다. 인간은 생존과 번식을 유리하게 하려고 집단, 사회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데 유리하도록 진화했다는 거다. 행복은 그 과정에서 선택한 일종의 도구일 수 있다고 말한다. 고통이라는 부정적 경험이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면, 긍정적 정서에 해당하는 행복은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추구하도록 한다.


<행복의 기원>은 행복은 한번 이루면 끝까지 지속되는 업적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책에서는 부정적 정서보다 긍정적 정서 경험을 일상에서 더 많이 느끼는 것을 행복이라 정의한다. 연구를 통해 보았을 때 행복감은 어떤 객관적인 조건에 의해서 성취되지 않는다. 행복 수치가 높은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경우 개인의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 행복의 원동력이 된다고 한다. 혼자만 어떤 것을 성취하는 것보다, 다른 이들과 잘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을 통해 행복감을 느낀다고 할 수 있을까? 


연구를 통해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유전적으로 거의 정해져 있다는 거다. 행복감을 느끼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외향성 성격 특질이라고 한다. 외향성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많이 만나, 자기 확신이 높고, 보상이나 즐거움을 늘리는 데 초점을 둔다. 행복은 긍정적 경험의 빈도이기 때문에, 새로운 자극을 만나기 쉬운 외향성이 높은 사람이 행복감을 느끼기 쉽다고 한다. 그러면 외향성이 낮은 사람은 도태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과 불편함이 있긴 하지만, '사회성'에 중점을 두고 보았을 때는 이해는 갔다. 


책을 읽으며 인간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특성이 과학적으로 연구되었을 때 어떤 방식으로 보이는지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과학의 시선으로 보는 책이 늘어가면 갈수록 점점 더 "인간의 존엄성은 때려치워, 인간은 동물이야."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 생각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지는 아직 판단 불가인데, 과학의 시선을 유지하며 조금 더 파헤쳐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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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이동도서관
오드리 니페네거 글.그림, 권예리 옮김 / 이숲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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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이동도서관은 한 사람이 읽은 모든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에는 책뿐 아니라 내가 쓴 일기, 신문 조각, 시리얼 박스의 설명문 같은 것도 보관되어 있다. 한마디로 한 인물이 읽었던 모든 것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읽다가 중간에 멈춘 책이라면, 거기까지만 써있는 책이 보관된다.


읽는다는 행위는 무엇일까? 오래전에 읽기는 소리내어 읽는 것만을 뜻했다고 한다. 특히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던 시기에는 그렇게 읽어야만 많은 사람이 그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에 ‘읽기’는 소리내지 않고 읽는 묵독을 뜻한다. 따라서 읽기는 혼자만 할 수 있는 행위다. 영화 같은 경우에는 같이 볼 수 있지만, 읽기는 같이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영화는 모두가 같은 속도로 컨텐츠를 소비하게 되지만 책은 각자의 속도로 읽는다. 그만큼 읽기는 개인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읽었던 모든 것이 보관되는 심야 이동도서관은 매우 매력적이다. 만약, 내가 심야 이동도서관을 만나게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어릴 때에는 책이 늘어나는 속도가 엄청나서 이동도서관 사서가 책장을 마련하는 데 골치를 겪었을 것이다. 만화책까지 보관된다면, 아마 만화책 서가만 따로 마련해야 했을 것이다. 여러번 읽었을 때 책이 한 권 더 늘어난다면, 만화책은 너무나 많이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알렉산드라는 심야 이동도서관을 처음 만난 이후로 9년이 지나도록 절대 잊지 못했다. 책을 읽으며 자신의 도서관이 점점 채워지는 것을 생각했다. 다시 만났을 때에는 도서관에 있는 책을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심야 이동도서관에서 일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심야 이동도서관에서 일하게 되면, 더 이상 새로운 장서는 구성이 되지 않을 터였다. 딜레마다. 심야 이동도서관은 자기 자신의 일부라고 할만큼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들에게는 도서관이 천국이다. 하지만 그 도서관에 매몰될 경우, 새로운 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정체되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심야 이동도서관의 사서는 알렉산드라는 사서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알렉산드라는 심야 이동도서관의 사서가 되었다. 어떤 방법으로 사서가 되었는지는, 책을 읽어볼 분들을 위해 적지 않는다. 그러나 심야 이동도서관이라는 매력적인 공간이 눈에 있을 때, 나는 과연 알렉산드라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어려운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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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그래비티 - 만화로 읽는 중력의 원리와 역사 어메이징 코믹스
조진호 글 그림 / 궁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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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를 포기한 이들에게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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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6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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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나오는 디지언트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공지능과 다르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반려동물과 같다. 보통 인공지능은 어떤 쓸모가 있기를 바라며 개발된다. 책에서도 빠르게 습득하는 인공지능이나, 가정에서 집안일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만드는 인공지능, 그리고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인공지능이 등장한다. 그러나 디지언트들은 그저 내가 키우는 고양이처럼, 혹은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키우는 아이들처럼 감정적인 교류가 유일한 목적이 된다. 


그리고 그런 존재는 상업적으로 어떤 쓸모도 없기에 지속적인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심심한듯 흘러가는 이야기 중에 유일하게 문제 상황에 부딪히는 순간이다. (사실 기술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어냈기에, 기술 발달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심심하지 않고 놀라움으로 가득찰지도 모르겠다.) 디지언트들이 다른 디지언트와 인간과 교류를 할 수 있는 데이터어스라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은 오래 지나지 않아, 경제적인 이유로 한 회사에 귀속되고 만다. 그 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수요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 책의 주인공격인 데릭과 애나의 디지언트들은 다른 회사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공간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디지언트를 만들어낸 회사는 더 이상 운영하지 않으므로 기술지원이 불가능하고, 이식을 위해서는 수많은 돈이 필요하다.


디지언트의 보호자들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놀거리가 사라진 디지언트들을 작동 중지를 시킬 것인가. (어떤 디지언트들은 문제 해결 방법이 나올 때까지 작동 중지를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아니면 디지언트를 신규 스페이스에 이식시키기 위한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 데릭과 애나는 두 번째 선택을 하지만, 그 역시 수월하지는 않다. 비용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고, 자신의 몸을 희생하거나 디지언트를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데릭은 상업적인 용도로 디지언트를 개조하는 것을 고려하는데, 그것은 디지언트에 성(sex)을 부여하는 것이다. 최근에 자연과학에 대한 책을 읽으며 종족 번식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 하루살이에게 입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대체 종족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거기에 매달리는가. 현재로서는 이기적인 유전자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라고는 하나, 나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성적인 자극을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합리화하고, 성상품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책에서 무성으로 만든 디지언트에도 결국은 성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의외로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나는 자신을 희생해 비용을 투자받는 것을 고려한다. 나도 애나처럼 나 자신을 희생하는 쪽으로 생각했을 것 같다. 키우고 있는 고양이를 생각해보면, 어떻게든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있는 그대로 삶을 유지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 어쩌면 그 존재가 개조됨으로써 변화하는 것이 썩 반갑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도 고양이가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있다면 그대로 해줄 것 같기는 하다. 원하는 것을 한다 해도 그것이 옳은 방향일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도 그랬지만, 테드 창의 소설은 잘 모르고 보아도 재미는 있다. 그리고 아마도 잘 알고 보면 더 재미있겠지. 언젠가 이 분야의 지식이 쌓이게 되면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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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그리너리 - 도시를 걸으며 생태를 발견하다
최성용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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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학교에서는 자연과 도시를 대립적인 개념으로 배웠다. 물론 사전에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상태로 저절로 생겨난 것을 '자연'이라고는 말한다. 그래서인지 분명 도시에는 나무와 풀의 푸른 빛이 있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곤충과 고양이가 있어도 자연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시티 그리너리>를 보며 인간이 살아가는 도시 역시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인간 외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제거 대상에 가깝다. 공존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TNR 사업을 진행하는 길고양이도 그렇고, 평화의 상징에서 게으르고 지저분한 동물로 낙인찍힌 비둘기도 그렇고,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는 모기에서부터 낯선 형태로 혐오감을 주는 모든 곤충과 절지동물이 그렇다. 그런 점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인간에게 이로운) 산소를 내뿜어내는 식물은 긍정적으로 허용되는 생물체다. 다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늘 가까이에 있고 눈으로 보고 있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빈약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식물의 치열한 삶이 느껴져, 가로수길을 걷는데 생동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사실 예전에는 가로수나 공원, 아파트 단지의 나무와 풀을 보며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자연에서 자랐다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는 것을, 식물을 통해 도시의 공기를 정화하겠다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괴로운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고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식물은 나름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특히 식물이 종족 번식을 위해 인간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껏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도시에 있는 모든 식물은 인간의 취향에 맞게 심어진다. 인간이 먹기 위해 기르는 채소는 물론이고, 유전자 조작을 해서 길러내는 식물도 모두 인간이 인위적으로 골라내어 길러낸 식물이고, 가로수도 취향에 따라 바뀌어 심긴다. 여기에 식물의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식물의 처지에서 보면, 인간도 자연의 포식자 중의 하나일 뿐이다. 식물은 포식자에게 잘 보이는 종이 살아남아 종족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그들 나름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자연 상태에서 은행나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멸종위기 종이라고 한다. 하지만 멸종위기라는 말이 무색하게 도시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고 가을이 오면 노란 은행잎을 떨어뜨리거나 고약한 은행 냄새를 뿜어내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인간은 은행나무가 멸종되지 않도록 열심히 묘목을 심고, 은행나무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아름다운 풍경(과 구우면 맛있는 은행)을 제공한다. 인간과 은행나무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충족하며 공생 관계를 이어간다. 한마디로 인간은 은행나무의 종족 보존을 돕는 생물체인 것이다.


자연에서 인간을 제외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어떤 근자감이 있는 것은 아닐까.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하는 행동도 사실은 인간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일지 모른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틈새를 잘 찾아 살아갈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인간이 차지한 틈새가 영원히 인간의 것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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