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le 2017-10-27  

남쪽으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이승우를 읽었어요. 모르는 사람들. 드디어 읽게 된 거죠. 이승우의 소설은 처음인데 이승우, 문체가 한수철 님과 비슷하더라고요. 아, 그래서 한수철 님이 좋아했던건가 했어요. 사람은 자기랑 비슷한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잖아요. 한수철 님이 쓴 소설이라고 해도 믿겠더라고요 하도 비슷해서. 이 작가도 이야기를 참 술술 잘하는 사람이구나 말하자면 성석제처럼. 물론 성석제가 훨씬 더 재밌게 잘하지만서도. 그러나 그런 생각은 들었어요. 이승우는 깊은 이야기는 잘 못하겠구나. 이 사람은 우물의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야.

두꺼운 모직 코트에 스카프까지 두르고 남쪽으로 갔는데 다들 가벼운 트렌치 코트 정도를 입고 있어서 뭐랄까, 제가 아주아주 북쪽에서 온 사람 같아서 기분이 좋았답니다 헤헤. 북쪽에서 온 스파이, 아니아니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존 르카레. 

 
 
한수철 2017-10-28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oule 님은 뭔가 여전히, 이동 중이시군요?^^

..... 저는 예전에 이승우는, ˝우물의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는˝ 소설가라고 생각했어요. 생각해 보면 당시에 저는 평범하고 태연한 인생을 살고 있었고, 이렇다 할 풍파를 겪지 않았더랬죠. 그래서일까, 현재는 ‘아니, 이승우가 우물의 바닥까지 내려갈 수 없다면 누가 내려갈 수 있는 거죠?‘라고 묻지 않지요. 즉
누군가에겐 그의 소설이 지극히 우멍한 우물의 검은 바닥 같을 테지만, 누군가에겐 그저 우물가 주변을 맴도는 관념적 배회 따위로 여겨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즉, 각자의 관점을 통해 판단해야 할 개별적 사업이라는 생각입니다.ㅎ
음, 제 근황을 좀 말씀드릴까요? 저는 요새 소수의 뉴스기사, 옛날 수필들, 르포르타주적 성격의 글 위주로 읽어요. 다른 글은 잘 읽히지가 않거든요.
.....언젠가 ‘시적 영향에 대한 두려움‘이란 책을 읽으며 이승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어령칙하게 나네요. 저는 그게 뭐든 남을 따라하는 걸 강박적으로 염오하지만, 이승우에게 친연성을 대번에 느낀 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좋아하면 서로 닮아간다는 풍문을 신봉하는 것도 사실이에요.ㅎ 그런데
전적으로는 다릅니다, 일테면 <같은 장르의 글을 유사한 분량>으로 써야 한다는 조건이 주어진다면요.^^ 제 말씀의 취지를 십분 이해하셨으리라 믿어요...

한편 성석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네요. 저는 관심이 없으면 쳐다보지도 않는 타입의 인간이거든요.
책장을 둘러보니, 존 르카레의 소설이 없네요.
그냥 암, 스파이들의 인사말로 여길게요.

존 르카레!

Joule 2017-11-01 00:31   좋아요 0 | URL
친연성, 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그녀 생각이 나요. 국문학과를 나와 벌써 여러 해째 신춘문예를 준비하고 있던. 마르고 개운한 얼굴에 음색이 맑던. 어느 날 그녀가 자취방에서 최근에 쓴 단편소설이라며 원고 하나를 건네줬어요. 그녀의 소설은 아니 글은 처음 읽는 거였는데 몇 장 읽다가 저는 내려놓고 말았어요.

부끄러워서 못 읽겠더라고요. 야한 내용도 아니고 베스트 극장에 나오는 흔한 소재의 이야기 상가집 이야기였는데 글이 그녀와 너무 똑같아서 도저히 더 읽어나가지 못하겠더라고요. 얼굴이 점점 빨개졌거든요.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나갈 때마다 마치 그녀의 옷이 벗겨지며 속살이 점점 드러나는 것 같은 비슷한 기분이 들어서요. 막 야한 상상이 아니라 그녀의 말투, 호흡, 사소한 습관 같은 것들이 문장에서 살아 있는 것처럼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서요. 숨이 막혔던 것 같아요.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

그녀의 남자친구는 이미 시인이었는데 음... 파렴치한이었어요. 그녀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러니까 음... 친연성요,

한수철 2017-11-01 01:07   좋아요 0 | URL
일화 한 토막을 들려 주는 스타일의 댓글..... 퍽 오랜만입니다.^^
저는 열 시께부터 막걸리를 혼자 마시며 이런저런 음악을 들었습니다. 혹시 ‘지평 막걸리‘ 드셔 보셨나요? 일반 막걸리에 비해 아주 진하고 맛이 좋긴 한데... 두 병 좀 못 먹고 취했습니다. 저랑 좀, 안 맞네요.ㅎㅎ

......‘음, 왠지 녹음된 자기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보는 기분과 유사할 것 같은데‘...라고 유추해도 괜찮을까요?

댓글의 마지막 문단은- 문단 성추행 사태가 없었다면 제법- 소설의 괜찮은 소재였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제목: 그녀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나저나
지금 이 시간만큼은... Joule 님에게 친연성이 현저히 느껴지네요.

어...말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고

근데 이제 저는 자야 할 것 같아요. 찡찡거릴 것만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