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민의 겨울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5
토베 얀손 지음, 따루 살미넨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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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기다려도 비는 내리지 않고, 비처럼 땀만 흐른다. 더위에 지치는 요즘, 어떤 소설을 읽으면 좋을까 고민했다. 무더운 여름을 색다르게 즐길 수 있는 소설, 『무민의 겨울』이다. 캐릭터가 워낙 유명해, 무민이 아기자기한 이야기 주인공이란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무민은 토베 얀손이 쓴 소설 속 캐릭터다. 그가 쓴 무민 시리즈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받을 만큼 어린이를 위한 소설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겨울 무민 골짜기의 추위와 어둠 속에서 혼자 깨어난 무민이 처음으로 독립적으로 활동하며 느끼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담담히 그려냈을 뿐만 아니라, 책임감 속에 죽음을 경험하는 내용은 아동 문학상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든 철학적 깊이를 더했다." 그래서일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가 그린 무민 시리즈를 기억하고, 여전히 그 이야기가 주는 여운을 즐기고 있다. 『무민의 겨울』은 한 겨울에 홀로 겨울잠에서 깨어난 무민의 모험기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는 무민과 요즘 극한의 여름을 견디는 우리와 묘하게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었다.

하늘은 거의 새까맸지만, 소복이 쌓인 눈은 달빛에 비쳐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어렸을 때, 시골 할머니 댁에 할머니와 단둘이 여름을 보낸 적이 있다. 다른 사촌들이 모두 읍내의 이모 댁에 머물렀는데 나만 할머니 댁에 남은 것이다.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할머니가 삶아주신 찰옥수수를 먹던 밤이 기억난다. 모기한테 물린다며, 얼른 방으로 들어가라는 할머니 말씀에도 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때 서울에선 느낄 수 없는 시골 여름밤만의 어둠을 제대로 느꼈다. 『무민의 겨울』을 읽는 데 어두웠던 여름밤이 떠올랐다. 달조차 보이지 않는 새까만 여름밤은 빗소리만 들릴 뿐 굉장히 어두웠다. 비 내리는 여름밤은 칠흑 같은 겨울밤 못지않게 어둡다. 소설 속 이야기는 어느 겨울밤에 무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면서 시작된다. 동그란 몸에 아장아장 움직일 것 같은 무민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 다시 잠들어야 하지만 한번 깨어난 겨울잠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따뜻한 봄바람이 불면 다시 겨울이 찾아들 수 없는 것처럼. 결국 무민은 잠으로 지나온 겨울을 깨어서 보내게 된다. 난생처음으로, 어쩌면 무민 중에 처음으로.  난생처음 겨울을 알게 된 무민은 겨울의 모든 것이 신기하다. 땅이 만드는 줄 알았는데, 하늘에서 내리는 눈. 태양이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하늘. 조용하고 적막한 공간. 난생처음 만나는 친구들까지. 무민에게 겨울은 낯섦, 그 자체였다. 두려웠던 낯선 겨울과 마주 선 무민은 두려움 대신 새로움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겨울만이 무민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을 말이다.
 
여름 꿈을 꾸던 무민마마는 잠시 불안해졌고 걱정이 밀려왔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무민은 무민마마의 침대 옆에 깔린 카펫에 몸을 웅크렸고, 기나긴 겨울밤은 계속되었다.

모두가 알듯이 겨울밤은 유난히 길다. 유난히 짧은 여름밤과 달리. 태양도 자취를 감춘 겨울은 어둠을 지나는 계절이다. 무민 역시 잠으로 그 어둠을 지나갔다. 이번에 무민은 어둠을 지나가던 겨울과 함께 봄을 찾는 여정을 떠난다. 그 여정에서 무민이 느끼는 감정은 우리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혼자라는 외로움, 낯선 환경에 대한 호기심, 갑자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생긴 두려움..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하는 경험이다. 그래서 어차피 지나갈 것이라며, 태연하게 넘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항상 생각하는 것만 쉬울 뿐이다.  불안과 걱정은 동동거리며 마음에 조바심만 부른다. 무민도 다르지 않았다. "무민은 외로움을 덜어 보려고 집에 있는 시계란 시계는 모조리 태엽을 감았다." 어떻게 이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는 무민의 행동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혼자 있을 때 적막한 것이 싫어서 혼잣말을 하거나, 노래를 틀거나, 영상을 틀어둔다. 무민이 시계를 왜 감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두려움은 잠든 집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내내 무민의 마음속 어딘가에 숨어 있었겠지만, 이제껏 맞닥뜨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만나는 겨울과 무민은 마주 설 용기를 내지 못한다. 미지의 세계와 마주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의지로 그 세계와 부딪치는 걸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이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여름에 익숙한 무민에게 겨울은 전혀 다른 세계였고, 그 겨울에 만날 수 있는 친구들과 나눌 수 있는 대화,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은 전부 새로운 것들이었다. 무민이 두려움을 이겨낸 모습은 내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굳은 의지나 결단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때때로 익숙한 여름의 흔적을 찾는 모습까지도 좋았다. "무민은 다락에서 커다란 스티커 상자를 찾아냈고, 그 안에 담긴 아름다운 여름날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며 그리움에 젖었다"라는 대목에서, 어쩌면 낯선 환경에 적응하면서도 익숙함만이 줄 수 있는 편안함에 기대고 싶은 나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나 그런 것이 있지 않은가. 힘들고 벅찰 때 기대어 쉴 수 있는 나만의 핑계 혹은 휴식처 같은 거 말이다. 

날이 포근해졌다. 쏟아지는 눈 때문에 주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무민은 여름에 바닷물을 헤치며 걸을 때마다 느꼈던 황홀한 기분이 떠올랐다. 무민은 목욕 가운을 벗어던지고 눈 더미에 풀썩 드러누웠다.
무민은 생각했다.
'겨울! 이제 겨울도 좋아!'

겨울을 만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무민의 겨울 탐험기는, 다른 무민들은 경험할 수 없는 자신만의 추억을 만든다. 무민이 겨울을 보내는 방식이 그 세계에서 겨울을 보내는 전형적인 방식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 어떤가. 이미 즐겁게 겨울을 만났고, 그 겨울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무민과 난 다르다. 꿈이었으면 좋겠을 이 무더운 여름을 좋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여름밤, 꿈이라도 좋으니 겨울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크다. 뜨거운 태양이 따뜻해지는 가을과 겨울은 언제 찾아올까. 무민이 봄을 맞이한 것처럼 이례적인 더위와 마주하다 보면 어느새 가을과 겨울이 와 있으면 좋겠다. 찾아봐야겠다, 무민이 겨울을 탐구했듯 이 여름을 즐 길 수 있는 이색 방법을.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민의 겨울』과 같은 겨울 이야기에 끌린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여름 사진을 꺼내보았던 무민처럼, 추운 겨울을 떠올릴 수 있는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얼른 여름이 지나가고,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무민과 같은 계절감을 느끼고 싶다,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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