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판 스캔들 - 저작권과 해적판의 문화사
야마다 쇼지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공기 반 소리 반>

이 말은 굉장히 유명하다. 고유명사처럼 쓰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K팝스타라는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으로 나온 기획사 JYP의 대표 박진영씨가 한 말이다. 음악 좀 하고 좀 듣고 좀 안다는 사람들은 <공기 반 소리 반>이라는 말을 대부분 박진영을 까고 조롱하는데 쓴다. <공기 반 소리 반>이라는 알아듣지 못할 박진영만의 표현을 듣고 ‘그러네~ 맞아. 노래는 공기 반 소리 반으로 해야지’하는 시청자가 있을까? 그 소리를 들은 오디션 참가자는 다음번 스테이지에서 또 같은 말을 듣는다. <공기 반 소리 반>이 무슨 소리인지 당최 알 수 없는데, 뭘 고쳐야 하는 지 알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아니! 공기 반 소리 반이 뭔 소리요! 당신이 먼저 그렇게 불러 보든지”하는 오디션 참가자는 없다. 혹 있다 해도 모조리 편집! <공기 반 소리 반>이 인구에 회자되고 이번 시즌 K팝스타에서 유독 박진영의 심사평이 도드라지게 편집되는 건 어쩌면 프로그램 담당자의 욕심일 수도 있다. 워낙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고 어쨌든 살아남고 시청률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만인이 깔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물론, 심사위원 박진영은 함께 하는 두 사람보다 더 프로의식과 전문가의식을 가지고 심사를 하겠지만 말이다. 시청자와 음악 좀 하고 듣고 안다는 사람들 중 많은 숫자가 박진영을 까는 것은 그의 허무맹랑한 심사평과 더불어 박진영 개인에 대한 호불호의 차이다. 그가 구원파에 연루가 되어있느니, 결혼 생활과 여자관계가 어쩌느니, 기획사가 엄청난 재정난에 빠졌다느니 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사실여부를 알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의 표절 의혹이다. 여기서 의혹이라 하는 것은 국내 발매되는 음반과 음원에 대해 표절 판단을 내리는 주최도 애매하고 그것에 대한 신뢰도 마음껏 보낼 수 없는 골 때리는 음악 환경 탓에 있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표절>이라고 하고 싶지만 몸을 사려 본다.

그렇다면 박진영의 표절은 나쁜 것일까? 표절이라면 당연히 나쁜 거지! 남의 것 갖다 베낀 거 아니야! 당연할 걸 가지고!

 

맞다. 남의 것을 갖다 베끼는 행위는 잘못된 거다. 그런데 이런 표절 논란 같은 것에 휘말리는 가수나 작곡가들의 변명 중 대다수는 이런 것이다. “아~ 말이죠~ 음악을 잘 모르시나 본데 말이죠~ 얼마나 많은 음악이 존재합니까. 세상에는 말이죠. 창작 이라는 것은 말입니다. 무지하게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 뼈를 깎는 고통으로 만든 것을 가지고 말이죠. 멜로디 라인 몇 개가 비슷하다고 해서 표절이라고 하면 말이죠. 어떻게 음악을 만듭니까!!” 라고.

 

 

“책에 씌어 있는 지식의 대부분은 이미 어딘가에 씌어 있는 것이나 들은 것을 재구성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식에 소유권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누군가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 예전에 누군가가 소유하고 있던 지식을 사용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다. 책뿐만 아니라 문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있는 무언가에 얼마간을 덧붙여가는 것이 문화 행위이기 때문이다.” (p.302)

 

 

저작권을 비롯한 창작물에 대한 관습·성문법의 시초가 되는 ‘도널드슨 대 베케트 재판’에서 결과적으로 도널드슨이 승리하게 된 주요한 원인이 된 문장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창작은 자연스러운 행위이자 활동이었다. 출판물을 비롯해 음악·미술, 인류의 삶 전반에 걸친 모든 영역에서 창작은 반복되고 반복되어 왔다. 정말 아무도 하지 않았고 만들지 않은 순수한 창작물을 만드는 행위가 가능할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면서 표절을 반복해서 일삼는 이들의 행위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남의 창작물을 베끼거나 가져가는 행위가 아무런 절차 없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과도한 카피라이트의 적용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컴퓨터 인터페이스나 브라우저와 같은 경우 마이크로소프트와 대척점에 있는 오픈소스집단과 그들의 콘텐츠는 알 만하고 그것을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자유로운 정보의 이용으로 사용된다. 인터넷 브라우저가 당연히 마이크로소프트밖에 없는 줄 알았던 나와 같은 IT관련지식 문외한에게는 가르쳐줘도 사용하지 못하는 개념과 정보지만 창작물이 어떤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공유의 개념이라는 큰 틀에서의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것이 더 자유롭고 창의적인 정보의 생산과 창작물의 생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세상에, 인류에게 공유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학과 학문입니다. 그것들은 공기나 물처럼 자유롭고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p.191)

 

 

이미 18세기에 이런 생각을 하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것으로 인해 카피라이트의 개념이 지금까지 세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18세기 영국의 대형 서점주는 책의 기획에서부터 제작, 인쇄, 유통, 판매까지 모두 관여했다. 그 무렵의 서점주는 출판문화의 종합 프로듀서였던 셈이다.” (p.24)

“요컨대 이 싸움은 밀러처럼 에든버러에서 일찌감치 런던으로 진출한 서점주와 도널드슨처럼 뒤늦게 찾아온 사람과의 싸움, 즉 선발 업체가 독점한 시장에 신규 참여자가 파고들려고 한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다.” (p.41)

 

진짜 이유는 기득권 싸움이다. 기득권을 쥔 쪽이 후발주자를 견제하고 자신들의 방으로 기웃거리는 새싹을 짓이겨 다시는 움트지 않도록 하려는 시도였다. 저 멀리 촌구석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대영제국의 수도 런던 서점가에 들어와 자신들의 밥상 한쪽을 차지하려는 도널드슨을 없애버리려는 시도였다. ‘도널드슨 대 베케트’재판의 양쪽 당사자들과 법률 대리인들이 펼친 이야기들은 보편적 인권과 인류의 자유로운 정보교류 등 고상한 것들이 많았다. 책에서는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고상한 용어와 문장과 단어들 뒤에 숨은 의도는 결국 자기 기득권 지키기였다. 결국 재판에서 승리한 도널드슨도 에든버러에서 서점주로 성공한 후 런던으로 진출해 더 큰 성공을 바란 것이지, 처음부터 영국과 자유국가와 그 시민들의 인권과 공유의 가치 실현을 위해 재판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독점과 ‘해적’은 선악이라는 이분법으로 가를 수 없다. 양자는 어디까지나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지만 자신들의 처지를 옹호하는 방편으로 저자의 권리나 독자의 편의를 말해왔다. 양자의 힘과 힘이 충돌하고 거기에 법률가들의 인간관계가 뒤얽히며 시대가 움직여갔다.” (p.324)

 

 

이 책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솔직한 주장이다. 가치 판단은 너무 어렵고 골치 아프다. 오늘 날짜로 정당이 없어진 통합진보당 관련한 대법원의 판결을 가지고 ‘악’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나? 그리고 17만 장이나 된다는 판결문의 내용만큼 오늘 날짜로 없어진 통합진보당의 구성원들이 ‘악’이라고 규정지을 수도 없다. 선악의 이분법은 간단한 듯 어렵고 골치 아픈 문제다. 이분법이 간단해 지면 그 틈을 비집고 폭력과 야만이 기어 들어오게 마련이다. 차라리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이자 목표다. 권력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것이다.

 

 

“저작권 연장에 찬성하는 쪽의 논의에는 저작권 사업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 열쇠를 쥐고 있는 자란 곧 콘텐츠 유통 사업이다. 저작권이 연장되면 가장 득을 보는 것은 저작자가 아니라 저작권자이고 저작물을 유통시켜 이익을 얻는 회사다.” (p.320)

 

 

한국에서 음악을 만드는 뮤지션(대형 기획사가 찍어낸 보이·걸그룹은 제외하고)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뮤지션이 한 곡당 가져가는 저작료가 몇 십 원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음반 시장은 붕괴한지 오래고 음원 시장이 현재 갑인 구조다. 이것 떼고 저것 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돈을 저작료로 받는 다는 것이었다. 그런 현재 한국의 음악시장의 구조를 놓고 보면 저작권 및 카피라이트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하지만 근본 원인은 창작자는 물론 소비자까지 ‘을’을 지나쳐 ‘병’이나 ‘정’쯤으로 만들어 버린 ‘갑’들에게 있다. 대형 유통 업체. 수백, 수천 곡의 음원을 싸게 사 들여 그것보다는 조금 더 비싼 금액으로 소비자에게 파는 그들의 ‘갑’질에 대해 제재하거나 수익구조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 이상 한국의 뮤지션들에게 ‘도널드슨 대 베케트 재판’ 판결의 주요 요인이 된 개념을 들이밀며 “에이~ 만인을 위해서 저작권, 카피라이트 따위 매달리지 말고~~ 에이~ 더 만들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폭력의 구조를 바꾸지 않고 고통의 연속인 창작에만 매달려도 시원찮을 뮤지션들에게 정보의 공유와 오픈소스 개념을 주장하는 것은 과도하다.

어? 그러면 K팝스타의 심사위원 박진영씨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은 과도한 거 아닌가? 표절의혹이 아니라 단지 너무 허무맹랑한 심사평과 유명한 해외 뮤지션들을 한방에 깎아내리는 절대 신공의 용기가 싫은 건가? 잘 모르겠다. 크흐흐...

 

 

“‘도널드슨 대 베케트 재판’의 결과, 카피라이트는 영구적이지 않고 기간이 정해진 권리라는 원칙이 만들어졌다.” (p.10)

 

 

아무튼 ‘도널드슨 대 베케트 재판’은 런던의 기득권 대형 서점주들에게 패배를 안겼다. 그들이 가진 독점적 권리와 자폐적 탐욕은 사라졌다. 물론! 잠시 동안! 카피라이트가 영구적이지 않고 기간이 정해진 권리라는 원칙이 이미 200년도 훨씬 전에 만들어 졌지만 아직도 모든 영역의 창작활동과 창작물에 대해서 표절 논란과 의혹이 넘쳐나는 세상이니까. 쉬운 일이 아니다. 간단하게 선을 긋기도 모호하다. 선악의 이분법만 들이밀기에는 골치 아픈 문제다.

 

결론은 공기 반 소리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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