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그림자놀이 - 2015년 제11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박소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연상시키는 박소연의 <꽃 그림자 놀이>라는 책 뒤표지의 설명이 꼭 맞아떨어지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의 두 책에 비해 박소연의 책은 훨씬 쉽게 이해되고, 빨리 읽히는 재미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꽃 그림자 놀이>는 마치 두 가지 비슷한 선율이 서로 얽혀 흐르는 것처럼 권력의 암투 속에서 숨어사는 인물과 독이 된다는 소설을 몰래 숨어서 쓰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이야기가 조각보처럼 짜여 있다. 소설의 시작은 아내와 사별하고 동상에 걸린 듯 세상을 향한 감각을 잃은 조인서가 친구 최린을 만나는 데서 시작한다. 이들은 조정에서는 금지하지만 몰래 읽는 소설을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조인서는 소설은 보잘 것 없고 하찮은 문장이라고 말하지만 최린은 소설을 쓰고 싶어 한다. 조인서는 최린의 집을 찾던 중 발견한 한겨울에 매화꽃이 핀 폐가가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의 진위를 밝히고자 그 폐가에 들어가 살기로 한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가려 했지만, 귀신이 나온다는 폐가로 오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소설을 써서 팔거나 중국 소설을 번역하며 살아가게 된다. 소설이 금지된 사회에서 소설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또 소설과는 다른 줄기의 이야기로 권력에서 내쳐진 사람의 삶은 금지된 소설처럼 몰래 이어져야 하는지를 그려내고 있다.

각 장의 서두에 적힌 소설에 대한 당시 지식인들의 말은 소설을 향한 서로 반대의 시선을 보여준다. 특히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의 소설에 대한 독설과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말은 부자지간임에도 큰 시각차를 보여준다. 소설을 좋아하고 후대에까지 남기고자 했던 사도세자에 반해 정조는 "소설을 보면 나는, 춥지도 않은데 몸이 떨린다"고 했단다. 정조는 소설을 애호했던 아버지와 반대로 소설에 대한 억압 정책을 폈다.

소설은 마음의 병을 고쳐주고 외로움을 없애주고 웃음을 주고, 교훈을 주고, 심지어는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 사도세자

소설은 독이다. 소설은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는 이단에 불과하다. 들뜨고 음탕한 말만 가득하고, 이치에 어긋나는 데다 사람들에게 해를 입힌다. 음란하고 야비한 음악이나,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간사한 사람과도 같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생각하면 춥지도 않은데 몸이 떨린다. - 정조 


나는 소설을 한 번도 펴본 일이 없다. 내간에 소장했던 잡서도 이미 모두 없앴다. 그러니 내 고심이 어떤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정조​

 

소설은 현실은 아니다. 소설 속 말처럼 일종의 그림자놀이에 가깝다. 소설의 문체를 나방의 눈썹이니, 달팽이의 뿔이니 하면서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버리지만, 나방의 더듬이는 섬세한 촉각으로 세상을 더듬고 빗자루 빗살처럼 인생의 바닥을 쓰는 것이 소설이다. 인간은 심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들까? "뿅 가기 때문이란다. " 픽션은 코카인과 같은 마약이다. 실상 이야기는 지루하고 가혹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마약에 불과하다." <스토리텔링 애니멀>을 쓴 조너선 갓셜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또 그는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적 공화국에서 시인과 이야기꾼을 쫓아냈다. 그들의 가장 큰 죄목은 부도덕한 행위를 퍼뜨린다는 것이었다. 플라톤 이래 수많은 사람들은 픽션이 도덕성을 좀먹는다며 발작적으로 비난을 퍼부었다. 플라톤은 틀렸다. 호들갑 떠는 후손들도 다 틀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도 지금도 역시 소설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견해를 내세운다. 글 속에 자신의 삶을 담으려는 사람들과 글은 고상한 내용만 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그리고 여전히 고상한 글을 주장하는 이들이 권력의 핵심에 있다. 소설이 죽었다고 한다. 누가 죽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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