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구두당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 때 누구나처럼 동화를 참 좋아했다. 집에 있는 동화책을 다 읽고 친구집에서 새로운 동화책을 발견하면 빌려 읽었었다. 그때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살아오는 동안 많은 힘과 재미를 준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그렇게 좋아했던 동화의 이면을 조금씩 보면서 어릴 때 느꼈던 감동과 안타까움이 완전 다르게 다가왔다. 한때는 아예 잔혹동화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오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그림형제의 동화가 원작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망했던 적도 있고, 디즈니가 원래의 이야기를 망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동화를 읽는 그대로 재미를 느낄 나이가 지나간 것이다.

 

그림형제가 각 마을을 돌며 이야기를 모아 동화를 낸 것처럼 현대도 이 동화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비틀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들이 많이 등장했다. 단순히 예쁘고 연약한 공주의 이미지를 벗겨내고 전사의 이미지를 씌운 동화도 있고, 아예 그림형제에게 퇴마사와 같은 역할을 부여하는 작품도 있다. 동화 속에 담긴 상징을 새롭게 해석하여 현대 속에 재해석한 작품도 가득하다. 한때 텔레비전을 켜면 신데렐라 스토리로 가득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구전문학이 텍스트로 바뀐 후 다시 시대 속에서 변주를 시작하고 있다. 이 단편집도 그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모두 여덟 편의 나쁜 동화가 실려 있다. 나쁜 동화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아마도 우리가 동화에서 기대하는 전개와 행복한 결말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내용도 그렇게 동화스럽지 않다. 제목만 놓고 보면 어떤 이야기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단편도 있다. 동화 속에서 모티브를 따왔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다른 작품들이다 보니 이 단편집을 단순하게 동화를 재해석했다고 말하기도 조금 어색하다. 표제작 <빨간구두당>의 경우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에서 멈추지 않는 소녀 이야기를 빌려 색이 사라진 세상 속에 색을 보는 사람을 등장시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만든다. 흑백만 존재하는 세계에 빨간 구두를 신은 아가씨의 등장은 혁명과도 같다. 하지만 이 색을 보고 느끼는 사람은 일부다. 지배세력은 이들을 처벌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길지 않은 이야기인데 그 속에는 전체주의 혹은 근본주의 종교에 대한 비판을 담아내고, 인간들의 이기심과 사악한 욕심도 같이 곁들였다.

 

단 한 편의 동화를 재해석하기 보다는 여러 편을 하나의 이야기 속에 녹여내어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만든 경우도 있다. <개구리 왕자 또는 맹목의 하인리히>가 대표적인 경우다. 기본적인 모티브는 개구리 왕자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동화를 짧게 인용하면서 개구리 왕자의 여정을 재미있게 만든다. 그렇지만 그 결말까지 따라가지는 않는다. 또 화자를 맹목적인 하인 하인리히로 만들어놓고 동화의 이면을 비틀고, 주변 인물이었던 존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기슭과 노수부>는 명확하게 떠오르는 작품이 없지만 영웅의 모험담이 결코 모든 행복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현실의 높은 벽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모두가 행복했다는 동화의 결말을 노골적으로 부인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카이사르의 순무>는 읽으면서 섬뜩함을 느꼈다. 농부의 기지가 수탈을 피하게 만들지만 결국 보복은 피할 수 없다는 암울한 현실을 보여준다. 알 수 없는 존재의 죽음과 그가 묻힌 곳에서 자란 거대한 순무와 그곳에 붙은 뼈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잔혹하고 서늘하다. 거대한 순무를 진상받고 상을 내리기보다 그 땅을 수탈하는 모습은 거대한 자본의 탐욕과도 닮아 있다. 긴 세월 속에 부당함과 거짓 등을 한두 번 정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넘어갈 수 있지만 지속적인 탐욕 앞에는 너무 무력하기만 하다. <헤르메스의 붕대>는 자신은 결코 인정하지 않는 질투를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 읽으면서 뜨끔했다. 가장 좋은 것을 나눠 가지지 못하고 숨겨야 했던 부분과 권위로 포장한 질투심이 엇나갈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잘 보여준다. 이야기 속 한 부분은 아주 섬뜩하다.

 

<엘제는 녹아 없어지다>는 한때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 농담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한때의 나.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지만 힘이 없는 여자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어떤 일을 당하는지 보여주는데 녹아 없어진다는 말 속에 담긴 의미가 심상치 않다. <거위지기가 본 것>은 거위지기의 시선에서 어린 공주와 왕의 결혼을 지켜보고, 그의 진심어린 조언이 뒤틀린 관계를 바로 잡는다. 하지만 그의 강렬한 욕망이,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이 자신을 어떻게 만들지도 알고 있다. 그의 욕망은 불나방과도 같다. <화갑소녀전>은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를 새롭게 해석했다. 행복한 결말과 환상은 사라지고, 산업재해와 성추행 등이 그 속을 채운다. 익명으로 처리된 공장의 생산현장은 어딘가 떠오르는 곳이 있다. 현대 기업이 요구하는 몇 가지 가치가 실제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보여줄 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방살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5
나카마치 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 서술 트릭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가 독자와 공정한 게임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믿고 있던 세계가 산산조각나면서 순간 멍하게 만들다 보니 감탄을 자아내기보다 뭐야? 하면서 욕을 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가 단서를 곳곳에 심어놓고 구성을 잘 짠 서술 트릭이라면 순수한 감탄과 함께 어디에 그 단서를 숨겨놓았을까? 하고 찾게 된다. 이 책은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 거대한 얼개 속에 독자가 먼저 선입견을 가지게 만들고, 그 사실의 일부가 드러났을 때 반전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서술 트릭은 선입견 없이 읽게 되면 금방 그 어색함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한정된 시간 속에 책을 읽는 독자라면 대부분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다. 처음에 살짝 어색함을 느낀다고 해도 이어져 나오는 이야기에 몰입하면서 새롭게 나오는 단서와 상황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에서 서술 트릭은 잘 짜인 구성과 필력이 없으면 금방 그 트릭이 들통 난다. 나의 경우 대부분의 서술 트릭을 다룬 미스터리를 읽을 때 속아 넘어가는데 아주 가끔 그 어색함이 계속 잔상처럼 남아 불편함을 느끼면서 트릭을 발견한다. 이것은 나의 추리력이 탁월해서 라기 보다 오랫동안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단련된 유형의 승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운이 좋았다.

 

프롤로그를 제외하고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에 7월 7일 오후 7시에 사카이 마사오가 청산가리 중독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 자살이 아니면 밀실살인이다. 겨우 반쪽의 글 속에 프롤로그를 마무리한 후 7월 7일 오후 7시 고묘소 빌라의 3층에서 살던 사카이 마사오라는 남자가 자기 집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1부인 사건의 도입부다. 그리고 사카이 마사오가 어떤 남자인지 간단하게 설명한다. 청산가리를 먹고 고통스러워하다 창밖으로 뛰어내렸을 것이라고 경찰은 판단한다. 사카이 마사오는 신인 추리소설가로 어느 잡지의 추리소설 신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뒤로 제대로 된 작품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주변 친구는 자살을 부인하지만 경찰은 창작의 고통으로 인한 자살에 더 무게를 둔다. 여기에 작가는 아주 중요한 단서를 하나 슬쩍 흘려놓았다.

 

그 다음부터 이야기 구성은 간단하다. 나카다 아키코와 쓰쿠미 신스케가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추궁, 전개, 진상으로 이어지는 구성 속에서도 이것은 변함이 없다. 아키코는 의학책 편집자이자 사카이의 연인이었다. 그녀가 볼 때 사카이가 자살할 이유는 전혀 없다. 자신과 결혼을 약속하고 큰돈이 생긴 후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의문을 품게 된 것 중 하나는 이전에 사카이의 집에서 만난 한 여성이 그에게 전달한 적지 않은 돈이다. 도가노 리스코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업무상 출장을 갔다가 잠시 둘러 그녀를 만나고, 하나의 가설을 세운다. 리스코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쓰쿠미 신스케는 르포작가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어느 날 사카이와의 관계를 안 잡지사 편집장이 이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의뢰한다. 그와 사카이는 추리동호회에서 만난 사이다. 그냥 아는 사람을 만나서 몇 가지 정보를 덧붙여 글을 쓰면 되는데 <산악>이란 잡지에 실린 한 편의 소설 때문에 사카이의 표절 문제가 제기되면서 이야기의 방향이 바뀐다. 소설계의 거장 세가와 고타로가 산을 배경으로 쓴 <내일 죽을 수 있다면>과 사카이의 사후 발간된 <추리세계>의 <7월 7일 오후 7시의 죽음>이 거의 같은 작품이란 것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사카이가 이것을 표절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추리세계> 편집부에는 사카이를 증오하는 인물이 한 명 있다. 야나기사와다. 그의 동생이 사카이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문이 있다.

 

사카이 마사오란 남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두 사람이 각각 다른 사람들을 용의자로 지목한다. 그들을 추궁하고, 단서를 뒤지고, 증거를 모은다. 이 부분은 어떻게 보면 두 편의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개인적으로 이들이 자신의 추리를 뒷받침할 단서와 증거를 찾아 돌아다니고 조사하고 추리하는 모습이 아주 재미있었다. 물론 약간 허술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다. 자신들이 지목한 인물에 상황을 맞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가설에는 아주 큰 문제가 있다. 선입견에 빠진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충분한 설정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고, 하나씩 트릭을 끄집어낼 때마다 읽으면서 내가 세운 가설들은 산산조각났다. 다 읽은 후 복기를 하면서 더 감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라 다이어 1
미셸 호드킨 지음, 이혜선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라 다이어. 주인공 이름이다. 3부작 시리즈라고 하는데 아직 그 정체가 하나도 밝혀진 것이 없는 채 끝난다. 이 때문에 읽으면서 뭐지? 뭘까? 하는 궁금점이 계속 생긴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작가는 굉장히 영리하다. 마지막에 앞에 나온 미스터리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살짝 제공해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 이전까지는 중간중간에 환상을 집어넣어 현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새롭게 시작하는 불안한 연인들의 티격태격하는 싸움을 곁들였다. 어떻게 보면 10대의 로맨스 소설 같지만 판타지적인 장면을 넣어서 호기심을 자극하고 기시감처럼 죽는 사람을 등장시켜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거대한 이야기의 도입부라 아직 명확한 것이 하나도 없다.

 

한 소녀가 병원에서 깨어난다. 자신에 일어난 일을 그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 전에 이 소녀와 친구들이 위저보드를 가지고 노는 장면이 나온다. 한때 유행했던 분신사바 놀이와 비슷한데 뭔가 낌새가 심상찮다. 현실 속 병실에서 소녀는 자신과 함께 간 친구들이 죽었다는 것을 이야기 듣고 놀라 비명을 지른다. 건물이 무너졌는데 에어포켓 사이에 있었던 관계로 목숨을 유지한 것이다. 이 소녀의 이름이 바로 마라 다이어다. 그녀는 부모에게 전학을 요구한다. 절친했던 친구들의 죽음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이애미로 이사한다.

 

현실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은 마이애미다. 하지만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은 그전에 있었다. 전학 온 그녀가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정상적인 상태라도 쉽지 않을 텐데 그녀는 그날의 사건 이후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 거기에 그녀는 환각을 본다. 그 대상은 주로 그전의 남자 친구였던 주드다. 주드는 학교에 간 그녀를 쳐다보고, 밤에 그녀의 집으로 찾아온다. 당연히 이 현상을 트라우마에 의한 환상이라고 판단한다. 이런 현상은 그녀로 하여금 현실의 학생들과 어울려 생활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나 첫 등교에서 한 남자가 시선을 끈다. 바로 노아다. 작가가 묘사한 노아의 이미지에 딱 부합하는 배우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영화로 만들어지면 가장 궁금한 부분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주드나 다른 친구를 보는 것을 단순히 환각이라고 치부하면 약을 먹고 치료될 수 있다. 실제 그 증상이 심해지면서 의사를 만나 상담하고 정신병 약을 먹는다. 하지만 그녀를 찾아오는 존재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여기에 더 심한 일이 일어난다. 개를 학대하는 한 남자가 죽은 모습을 보고 몇 시간이 지난 다음에 똑같이 죽어 있는 그 남자를 본 것이다. 여기서부터 뭔가 낌새가 이상해진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예언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복수로 스페인어에 F학점을 준 교사에게 분노하고 죽는 모습을 상상한 후 일어난 죽음은 단순히 예언이나 기시감 정도가 아니다. 그녀에게는 알 수 없는 죽음의 기운이 있다. 어렴풋하게 이것의 정체가 드러나지만 실제 어떤 모습일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다.

 

마라 다이어는 그전에 낡은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사건을 하나씩 기억한다. 이 기억 속에는 그녀 자신이 숨기고, 잊고 싶었던 비밀이 몇 가지 있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그날의 비밀을 직접 파헤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작가는 그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새로운 단서를 제공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마치 드라마 마지막 장면에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맛보여주는 예고편처럼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중심을 잡고 있다. 바로 노아와의 연애다. 영국에서 전학 온 엄청난 부자의 아들이자 멋진 모습을 가진 소위 말하는 킹카다. 학교의 모든 여학생이 사귀길 원하고, 그에게 상처받은 여자가 수두룩하다. 그런 그가 마라에게 다가온다. 어설프고 전형적인 연애가 펼쳐진다. 물론 이 둘 사이에는 운명같은 힘이 살짝 흐른다. 이제 이 둘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약간 말랑말랑한 십대 연애물이 미스터리와 공포의 힘으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도 없는 한밤에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말 오랜만에 킹의 소설을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킹의 광팬은 아니다. 그런데 그의 책이 나오면 산다. 밀리언셀러클럽에서 그의 소설들이 나오기 전에 이미 그의 소설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다. 한참 헌책방을 다닐 때 사계 시리즈를 보고 사지 않았었다. 그의 다른 장편이나 단편을 산 것과 비교하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이름을 잘 몰랐을 때도 그의 소설을 잡고 읽으면 쉽게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기이한 이야기에 홀린 것이다. 읽고 나서 그 내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그의 책이라면 사고 읽었다. 한때 무협을 제외하고 집에 가장 많은 책을 가지고 있던 작가였다. 지금도 적지 않은 킹의 소설들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중단편집이다. 모두 네 편이 실려 있다. 모두 분량이 다른데 역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첫 작품인 <1922>다. 처음에 읽으면서 왠지 낯익은 분위기를 느꼈다. 한 부자의 살인 사건이 우리의 귀신 이야기와 닮아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살인 사건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왜냐고?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이것을 아들이 돕기 때문이다. 이때 아들의 나이는 열네 살이다. 아내를 죽인 이유도 아내의 부정이나 사치 때문이 아니라 아내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을 둘러싼 갈등 때문이다. 남편 제임스는 아내의 땅이 돼지 도축업을 하는 패링턴 사에 팔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아내 알렛은 이 땅을 팔아서 도시로 나가고 싶어한다. 각자 자신의 재산을 가진 채 이혼해도 되겠지만 제임스는 자신의 땅 옆에 패링턴 사에 들어오는 것이 싫다. 바로 여기서 비극이 생긴다.

 

첫 번째 비극은 그가 예상한 대로 아내가 쉽게 죽지 않는 것이다. 돼지 목을 따듯이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되지 않는다. 몇 차례 시도를 한 끝에 겨우 죽인다. 아내의 시체를 아들과 함께 사용하지 않는 우물 속에 넣는다. 어린 아들이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이다. 아내가 가출한 것처럼 꾸민다. 아내를 찾아 패링턴 사 직원과 보안관이 온다. 아내는 우물 속에 묻혀 있다. 집에서 키우는 소 한 마리가 우물 속에 빠지면서 그의 계획은 더 좋아진다. 겉으로 볼 때 이야기다. 우물 속에 사는 쥐들은 아내를 파먹고 축사에까지 들어온다. 그에게 이 쥐들은 아내의 부하다. 그리고 두 번째 비극이 생긴다. 바로 아들의 여자 친구가 임신을 한 것이다. 겨우 열다섯 살인데. 부모들이 이들의 결혼을 반대하면서 상황은 더 나빠진다.

 

거대한 자본의 힘 앞에 개인의 농장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잘 보여준다. 이 과정 속에 한 가정의 파멸과 죄의식에 의한 환상이 교차한다. 대공황을 앞둔 시대를 작가가 선택한 것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농장을 헐값에 팔려고 했을 때 거절했던 이웃도 결국 무너지고 만다. 대공황은 사람을 가려서 다가오지 않는다. 살기 위해 농장주도 공장으로 가야한다. 이것도 운이 좋아야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을 제임스는 유서처럼 남겨 놓았다. 그가 죽인 아내 알렛의 환상과 그녀의 부하들인 쥐들 때문이다. 킹은 언제나처럼 이 심리 묘사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다. 아내를 죽이고, 묻는 과정을 읽으면서 서늘한 공포와 역겨움을 느꼈지만 그 뒷이야기가 궁금해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의 신문 기사는 제임스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빅 드라이버>는 <1922>를 읽고 난 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로 나를 놀라게 했다. 코지 미스터리물 작가 테스를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내세워 처절한 복수극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녀는 노파들이 주인공인 미스터리 작가다. 이 시리즈가 상당히 많이 팔렸고, 적지 않은 팬들이 있다. 어느 날 강연회에 초청받는다. 다른 유명 작가 자넷 에바노비치의 대타다. 자신의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와 강연료를 받고 브라운 베거스 북 클럽에 온다. 그냥 평범한 강연회다. 잘 끝내고 돌아가려는데 이 클럽의 회장인 라모나 노빌이 지름길을 알려준다.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테스는 그 길로 돌아간다. 불행은 바로 이때 생긴다. 그녀는 지름길로 가다가 폐자재의 못에 타이어가 찔린다. 휴대폰도 되지 않아 보험사도 부를 수 없다. 이때 거대한 한 남자가 다가온다. 순진한 첫 마디가 끝난 후 바로 본색을 드러낸다. 그녀를 때리고 강간하고 때리고 강간한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버린다. 테스가 죽은 척한 것뿐이다.

 

보통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강간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우선이다. 하지만 그녀는 탈출하는 과정에서 혹시 그가 좇아올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이고, 자신이 언론의 먹이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킹은 이 과정을 탁월한 테스의 심리 묘사와 행동을 통해 아주 잘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킹의 최고 매력은 인물의 심리 묘사와 기묘한 상황으로 독자를 자연스럽게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당연히 스릴과 긴장감은 같이 따라다닌다. 여기에 미스터리 작가의 복수극을 집어넣어 반격을 가한다. 우연으로 생각했던 불행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차분히 되짚으면서 단서를 쫓는다. 비극과 통쾌한 복수 뒤에 나오는 또 다른 이야기는 현실의 씁쓸한 단면을 보게 만든다.

 

<공정한 거래>는 악마와 거래를 한 남자의 소원이 풀려나가는 과정을 역사적 사실과 엮어서 보여준다. 한 가족의 처참한 몰락 뒤에 있는 숨겨진 거래가 예상한 반전을 뒤집는다. 가장 짧은 작품인데 그 속에 우리가 알고 있던 악마나 반전을 없앴다. 제목 자체가 역설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맞는 거래다. 이야기가 끝난 후 이 거래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진다. <행복한 결혼 생활>은 우연히 발견한 남편의 비밀을 다룬다. 남편의 정체는 열한 명을 죽인 연쇄살인마다. 하지만 집에서 그는 다정한 남편이자 아빠다. 이것을 발견한 아내 다아시가 느낀 공포와 혼란은 나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성적 판단보다 항상 앞서는 것이 감정이다보니 쉽게 답을 내놓을 수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남편이 결혼과 동시에 한 동안 살인을 멈추었다는 것과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내에게 다시는 이런 살인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사실을 그대로 덮어둔 채 살아갈 수 없다. 마지막에 비디의 연쇄살인 사건을 쫓는 은퇴 형사를 등장시켜 감정을 위로한 것은 약간 혼란스럽다. 깔끔한 결론이라는 생각도 있지만 여운을 없앴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인도 로망 컬렉션 Roman Collection 5
전아리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인도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그림에 대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림이 아닌 섬 이야기다. 이 섬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살고 있는 이 섬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어떻게 가는 지도 알 수 없는 곳이다.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그곳으로 끌려간다. 이 놀라운 섬에 대한 비밀은 한 남자가 자신의 밥값 대신 들려준 이야기 속에서 드러난다. 물론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나오기 전 한 노인의 미스터리한 죽음이 뉴스를 통해 알려진다.

 

24시간 해장국집의 주인 김 노인은 텔레비전을 통해 어제 발생한 의문의 사망 사건을 본다. 백주대낮에 비쩍 여윈 노인이 숨을 거두었는데 놀라운 것은 이 노인의 신원이다. 1986년 생 남자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신분증뿐이라면 큰일이 아닐 텐데 일주일 전 실종 신고된 황종민이라는 대학생의 지문과 일치한다. DNA 감정도 마찬가지다. 화학물질에 노출되었는지 검사했지만 깨끗하다. 신체 조직은 깨끗하고 자연스러운 노화현상에 의해 사망한 다른 사례와 다를 바가 없다. 김 노인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때 한 노인이 밥값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황종민의 동창이고, 밥값 대신 그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박성우다. 미인도(美人島)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박성우는 미대 학생이다. 노교수의 희귀한 미술품으로 가득한 집을 돌보기 위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한다. 무료한 일상 중에 컴퓨터를 찾기 위해 다니다 이상한 여자를 힐끗 본다. 쫓아가지만 만나지 못하고 쓰러진다. 다른 방에서 깨어난다. 기억이 없다. 다른 날 친구와 함께 스키장에 간다. 둘이 번갈아 운전을 하는데 그의 차례에 이상한 일이 생긴다. 얼핏 잠들었는데 차는 벼랑에 부딪히며 추락한다. 안전벨트를 맸는데 몸이 앞 유리창을 뚫고 튕겨 나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안간힘을 쓰다가 지쳐 기절한다. 비몽사몽 간에 이상한 경험을 한다. 다시 정신을 잃는다. 허기를 느끼며 깨어났을 때 옆에 앳된 여자아이가 있다. 소향이다. 그리고 이곳을 돌보는 수영을 만난다. 여인들이 사는 섬이라고 말한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섬의 시간은 현실 세계와 다르게 흐른다.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러도 현실에서는 찰나다. 황종민의 사건을 감안하면 이 섬을 살다가 남자들은 모두 노인이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성우도 그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잠들면서 그 시기를 놓친다. 이 섬의 몇 가지 규칙을 지키면 문제가 없는데 그것을 어기면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이 여인들만 사는 섬에도 권력을 둘러싼 음모가 진행된다. 수영이 다스리는 것을 반대하는 가희가 노파들과 그들이 키우는 동물들이 사는 숲을 베어 더 큰 집을 짓고 싶어한다. 비극은 언제나 비뚤어진 욕망에 의해 생긴다. 서로 다른 욕망이 결합할 때 그 비극은 더 커진다.

 

성우가 처음 이 섬에 왔을 때, 꿈을 꿀 때 얼굴이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한 여자가 그의 곁에 있었다. 그는 그녀를 찾고 싶다. 그러다 한 여자가 나타난다. 월화다. 그는 그녀가 비몽사몽과 꿈속에서 본 여자라고 생각한다.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싶다. 그런데 이미 다른 남자가 곁에 있다. 바로 황종민이다. 그는 그녀를 빼앗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을 지원하는 사람이 있다. 가희다. 가희는 성우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한다. 성우는 다른 남녀의 성교를 보고 춘화도를 그렸는데 이것이 섬 여인들이 원하는 물품이 된 것이다. 이 결탁은 섬에 비극을 불러오고, 그 비극을 통해 섬의 비밀과 성우의 비밀이 알려진다.

 

전아리는 이 섬의 모습을 환상적으로 그려내었다. 섬 여인들의 대화체나 옷 등도 현실과 다르다. 조선 시대 이상의 시대를 닮은 것 같다. 처음에는 읽으면서 이질감이 생겼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다. 그렇게 길지 않은 분량이라 조금만 집중하면 단숨에 읽을 수 있다. 엇갈린 운명은 자신들의 욕심에 의해 뒤틀리는데 길지 않은 글 속에 잘 녹여내었다. 맹인 남자들과 노파들의 정체를 적절하게 숨긴 후 단계별로 드러내면서 이야기의 호기심을 부채질한다. 간결하고 빠르게 진행하면서 군더더기를 없앴다. 성우가 마지막에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김 노인도 그곳을 다녀왔을지 모른다는 말이다. 나도 혹시 다녀왔을까? 어쩌면 꿈속에서 잠시 다녀왔는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