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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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슴 아프다.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나의 눈물은 왕따로 죽은 슌스케 때문이 아니다. 그의 자살 이후 삶이 바뀐 사람들 때문이다. 갑자기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부모와 동생, 유서에 절친이란 말이 남겨진 사나다 유,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나카가와 사유리 등이다. 유서에는 그를 괴롭혔던 두 명의 같은 반 학생이 있었다. 하지만 이 둘은 이 소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왜 그가 자살했는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사나다를 비롯한 사유리와 가족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20년 동안 이어진다.

 

왕따와 자살은 이제 우리 주변에서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런 뉴스가 나오면 ‘또’라는 반응이 먼저 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감정은 ‘불쌍하다’, ‘얼마나 심했으면’, ‘나쁜 놈들’ 등과 같은 것들이다. 너무 자주 많이 일어나면서 둔감해진 것이다. 이 문제를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불러놓고 이야기해봐야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는다. 자신의 아이들 문제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이 사건은 불쌍하고 안된 일일 뿐이다. 하지만 가족은 다르다. 그들은 평생 가슴에 이 사건을 품고 살아야 한다. 그럼 절친과 짝사랑의 대상으로 낙인찍힌 그들은 어떨까? 이 소설은 바로 절친으로 낙인찍힌 유의 기록이다.

 

초등학교에서 유짱으로 불렸고 함께 놀았지만 중학교 올라간 후 그렇게 친하지 않았던 사나다에게 유서에 쓰인 절친은 엄청난 스트레스다. 이 단어가 슌스케 가족에게는 각각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엄마에게는 고마운 친구지만 아버지와 남동생에게는 절친이면서 그렇게 되도록 뭘 했는가 하는 원망과 증오의 대상이 된다. 이 때문에 낙인찍기라는 단어를 앞에서 사용했다. 절친으로 알려진 그는 방관자였고 용기 없는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그가 이런 괴로움과 고통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의문을 계속해서 던지면서 답을 찾아간다.

 

사나다가 슌스케와 친구였다면 사유리는 단순히 짝사랑의 대상이다. 그녀는 같은 반도 아니다. 하지만 자살한 날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죄의식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유서에 남겨진 이름은 그녀도 낙인찍기의 대상으로 만든다. 처음 그녀가 슌스케의 집으로 찾아다닌 것은 이런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은 상황이다. 나중에 그녀가 이 사실을 말했을 때 동생 겐스케가 형을 살릴 수도 있었다고 원망했을 때 그녀가 그때까지 품고 있던 고통과 고뇌와 아픔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한 소년의 자실이 그녀도 가해자로 만들고 동시에 엄청난 피해자로 만든 것이다.

 

자식의 죽음에 가장 충격을 받는 사람은 당연히 부모다. 평생 가슴에 묻는다는 말로 표현이 불가능한 경험을 한다. 그 엄마가 충격에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과거 속에서 좋았던 추억만 찾아다니는 것이나 자살한 아들을 처음 발견한 아버지가 결코 반 친구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들의 반성문마저 언론에 흘리는 일을 저지르는 것은 이런 충격의 여파 중 일부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짱과 사유리마저 조금씩 그 일을 잊고 있을 때 그들은 매일 불단을 보면서 아들의 부재를 가슴속에 새겨 넣는다.

 

우리는 흔히 너무나도 쉽게 용서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다. 겐스케가 용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말할 때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고 불가능한지 알게 된다. 이렇게 어려운 것을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쉽게 말하는 사회에서 잘못을 바로 잡을 힘이 있을까 의문이다. 물론 용서하지 말자는 의미는 아니다. 너무 쉽게 진솔한 참회나 반성 없이 용서를 내뱉고 바라는 것에 감정이 욱해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의 감정과 행동은 솔직하다.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다 표출하지 않지만 절제된 상태에서 그 감정이 강하게 전달된다.

 

이 소설에서 미스터리가 하나 있다. 그것은 친하지도 않는데 유서에 절친이란 단어를 왜 사용했을까 하는 것이다. 이 의문은 사나다의 아들이 쓴 노트에서 나온다. 아내가 말해준다. 그가 모르는 친구이자 절친이라 불린 친구가 사실은 동경의 대상이라는 것을. 이 순간 사나다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통곡한다. 슌스케에게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 깨달은 것이다. 20년을 이어져온 미스터리가 풀린 것이다. 그리고 슌스케가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의 의미를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이자 가장 가슴을 아리게 만들고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부모는 자식을 잘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가장 모르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자식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만 그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하는 행동으로 습관이나 좋아하는 것 등을 알 수 있지만 가장 은밀하고 중요한 것들은 놓치기 십상이다. 아마 슌스케가 왕따 당하고 있는 사실을 부모에게 말했다면 그의 자살에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혹은 부모들이 이 사실을 알아주길 바랐는데 알아채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가정은 사실 무의미하다. 가장 솔직한 표현은 유가 다시 방문한 중학교에서 선생이 된 친구가 그렇게 믿고 싶다고 한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믿고 싶은 것을 깨트리고 현실을 제대로 직시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가는 것에 대해 사나다 유는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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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 빠진 훈제청어의 맛 플라비아 들루스 미스터리 3
앨런 브래들리 지음, 윤미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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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아 들루스 미스터리 시리즈 3권이다. 전작을 재미있게 읽었다. 주인공 플라비아는 귀엽고 깜찍한 소녀다.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그녀 외 다른 언니들에게도 눈길이 점점 많이 간다. 그녀를 끔찍하게 괴롭히는 언니들이지만 각각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재능이 플라비아의 사건 해결을 도와줄 때 빛을 발하고 다음 이야기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기대하게 만든다. 캐릭터와 이야기 전개가 여전히 잘 조화를 이루면서 부드럽게 이어진다. 비록 전작에 비해 재미나 플라비아의 능력이 조금 약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이번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첫 장면에서 그녀에게 점을 봐주는 집시다. 그녀는 플라비아 엄마에 대해 말한다. 당연히 이것은 언니들의 장난이다. 하지만 어리고 엄마를 기억하지 못하는 플라비아에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이 때문에 그녀는 놀라 허둥대다 양초를 쓰러트린다. 집시 텐트가 불탄다. 이 인연은 둘을 엮어준다. 미안함이 플라비아를 그녀 곁에 머물게 만든 것이다. 거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곁들여졌다. 집시를 가문의 영지에 머물게 한다. 예전에 아버지가 절대 금지했던 일이다.

 

전작에서도 외부에서 온 사람에게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집시가 머리를 맞고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다. 빠르게 의사에게 연락해 그녀를 치료한다. 그리고 사건 현장에서 생선 비린내를 맡는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늦은 밤 자신의 집에 몰래 들어온 브루키다. 마을의 말썽쟁이다. 물론 플라비아도 평범하고 착한 소녀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의미가 좀 다르다. 그녀가 그를 용의자로 꼽고 조사를 하는데 그가 그녀의 집 분수대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새로운 시체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제 사건은 두 개가 되고 플라비아는 더욱 열심히 이 사건들을 수사한다.

 

이 귀여운(?) 소녀가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은 논리적이지만 명탐정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 나이 또래의 소녀들과 다른 취향과 행동을 보여준다. 덕분에 우린 그녀의 활약에 두 눈을 부릅뜨고 재밌게 읽지만 부모라면 결코 반길 수 없는 아이다. 어떤 부모가 독약과 화학에 관심을 가지고 밤늦게 돌아다니고 마을 사람들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바로 이런 점들이 우리를 즐겁게 만든다. 탁월한 직관과 관찰력과 분석력은 경험이란 한계 속에서 충분히 성숙해지지 못했지만 그렇게 복잡하지 않는 사건을 해결하는 데는 충분하다. 가끔 주변에서 그녀에게 단서를 던져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욱더.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탁월한 인물로 꼽고 싶은 사람은 도거다. 전쟁 트라우마로 명확한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왠지 그에게서는 은거고수의 모습이 보인다. 그가 플라비아에게 던져준 몇 마디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고 그녀가 조사한 정보들은 이것과 결합하여 사실에 한 발 더 다가간다. 열한 살 소녀의 한계 속에 그 나이를 뛰어넘는 지성은 분명 균형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그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동과 사건과 사람들은 이 불균형을 넘어 재미를 준다.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을 해결하는 단서가 되고 의문은 그것이 풀릴 때 다시 처음으로 연결된다. 이 고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모두 풀리는데 이때 든 생각 중 하나는 경찰들은 왜 이 사건을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뭐 좀더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해결했을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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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머니 1 밀리언셀러 클럽 130
옌스 라피두스 지음, 이정아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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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우리에게 복지국가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나라 스웨덴. 작가는 그 나라의 이면을 아주 신랄하게 파헤친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코카인과 욕망에 자신을 내던진 세 명의 남자다. 이야기는 그들을 따라가면서 서로 교차하고 엇갈리고 서로 다른 욕망을 풀어낸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아주 현실적으로 다룬다. 살인과 폭력은 최대한 절제되고 돈에 대한 욕망은 거침없이 드러난다. 그리고 복지국가 이면에 있는 거대한 신분 격차와 타락은 그곳도 우리와 다름없는 사회임을 보여준다. 현직 형사 전문 변호사가 보여주는 암흑세계는 너무 현실적이라 오히려 거부감이 생길 정도다.

 

모든 이야기는 세 남자 중심이다. 마약상인 호르헤. 그는 구 유고 연방의 세르비아 출신 갱들에 의해 감옥에 간다. 감옥은 범죄자에게 좋은 학교다. 그곳에서 그는 코카인 등에 대해 전문가가 된다. 그리고 기발한 생각으로 탈옥한다. 그의 탈옥을 보면서 화려한 복수를 기대했다. 하지만 작가는 액션과 폭력으로 가득한 복수 대신 현실적인 문제를 다룬다. 언제 다시 경찰에 잡혀 감옥으로 들어갈 줄 모른다는 공포다. 그렇다고 그의 증오심이 사그라지거나 복수가 멈추지는 않는다. 한 번의 실패는 있지만 그 다음 번 준비는 더 철저하다. 그가 어떻게 복수를 준비하고 실천하는지 보는 것은 많은 재미 중 하나다.

 

JW. 그는 대학생이다. 상류층 학생들과 어울린다. 그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친구들의 생활수준을 결코 따라갈 수 없다. 상류 사회에 대한 그의 열망은 대단하다. 그들과 보내는 하룻밤을 위해 엄청난 절약을 한다. 그러나 돈은 늘 부족하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온다. 코카인 판매상인 압둘카림이다. 상류 사회 시장을 개척하려는 압둘카림과 늘 돈 부족에 시달린 JW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언제나 마약은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 많은 돈을 벌수록 JW의 돈에 대한 욕망은 거대해진다. 중고와 가짜의 자리를 신상품이 차지하고 점점 거대해진 욕망은 그 끝을 향해 달려간다.

 

므라도. 세르비아 출신 갱이다. 그의 전문분야는 폭력과 휴대품 보관소 사업이다. 휴대품 보관소는 현금이 오가고 세금 신고도 없는 알짜배기 사업 중 하나다. 이 사업은 세리비아 갱단의 두목 라도반의 휘하에 있다. 라도반은 그와 함께 유고 내전을 경험한 동료이자 욕소비치라는 거물 갱의 부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그를 라도반의 부하로 만든다. 쉽게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의 활약을 보면 단순히 폭력만 휘두르는 갱이 아니다. 탈옥한 호르헤가 그를 협박했을 때 보여준 행동이나 경찰의 폭력조직 진압 작전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면 탁월한 전술가의 모습이 보인다. 세 명 중 유일하게 폭력적이고 진짜 암흑세계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 한 여자의 납치 장면이 나온다. 처음에는 이 장면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녀가 JW의 실종된 누나라는 것도, 그녀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도. JW가 카밀라 누나를 찾는다. 그녀의 흔적을 따라가지만 어느 순간 끊어진다. 첫 부분에 누나가 어떤 위험에 처했는지 본 독자들은 그녀의 현재를 두렵게 바라본다. 여기에 또 한 명이 누나를 그리워한다. 호르헤다. 그에게 가족 특히 누나는 중요한 존재다. 탈옥한 그를 쫓아온 므라도가 누나에게 보여준 폭력의 흔적은 그를 분노하게 만든다. 재미난 것은 므라도가 딸 양육권 때문에 전처와 소송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강렬한 폭력배도 피붙이 앞에서는 약해지는 모양이다.

 

세 남자는 돈에 대한 욕망과 가족에 대한 애정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호르헤와 JW는 누나, 므라도는 딸. 각각 다른 길을 가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서서히 겹쳐지는 부분이 나온다. 사실 이 부분이 강렬해야 하는데 조금 약하다. 전체적으로 스웨덴 암흑가의 풍경을 잘 설명해준 것에 비해 오락적인 강렬함이 약한 것이다. 복지국가 이면에 숨겨진 인종차별과 돈을 둘러싼 폭력과 살인 등은 스웨덴에 대한 환상을 깨기 충분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화려한 밤문화가 일부고 JW의 부모 같은 분들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폭력배의 세계가 마약 등으로 일반 사회로 점점 침입하지만 그 한계는 분명하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특별한 활약도 하지 않는 것 같은 경찰조직이 중간중간에 힘을 발휘하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조금 건조한 듯한 이야기지만 읽을 때보다 다 읽은 지금 더 많은 느낌과 생각이 가슴으로 머릿속으로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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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 지음, 황문성 사진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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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정호승 시인의 책을 읽었다. 시집으로 기억하는 것은 <서울의 예수>다. 아마 제목 때문에 이 시집을 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후 안도현의 <연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어른을 위한 동화 <항아리> 등으로 만났다. 각각 다른 장르의 두 책을 읽은 시간차는 상당하다. 그런데 이번 산문집은 그것보다 더 크다. 그리고 작가 이름 그 이상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나에게 온 이 산문집이 가슴 한 곳에 울림과 반발감을 심어줬다. 그것은 요즘 내가 듣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여러 번 썼지만 산문집을 읽기 시작한 것이 불과 10년 정도다. 그 이전에도 전혀 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거의 없었다. 철학자의 에세이를 제외하면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최근 10년 동안도 그렇게 많이 읽은 것은 아니다. 여행에세이를 제외하면 이 비중은 더 줄어든다. 이렇게 에세이 종류를 읽지 않은 것은 학창시절 선생의 말 한마디가 큰 영향을 미쳤다. 에세이는 나이가 많이 먹은 후 읽으면 좋다는 종류의 말이다. 이것은 워낙 소설을 좋아하는 나의 성향과 신변잡기 성격을 주로 다루는 에세이가 너무 심심해서 더욱 그랬다. 이후 조금씩 변하기는 했지만.

 

모두 3부로 나누어져 있다. 우주의 크기와 상처 많은 나무와 길이란 단어를 담은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첫 이야기가 ‘가끔 우주의 크기를 생각해보세요’다. 우주에 비해 나 자신이 얼마나 작은가에 대한 인식에서 마음의 크기로 이어지는데 가끔은 너무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인식이 이어져 오리혀 역효과를 불러오는 경우도 있다. 이것만 봐도 긍정적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삶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과 경험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거의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삶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만들기도 하지만 기존 자기계발서의 내용을 되풀이할 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보다 문제의 초점을 나로 축소시키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살면서 수많은 경험을 한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경험하는 것이 바로 실패다. 잘못이다. 그래서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고, 반성은 아무리 늦어도 빠르다.’는 말을 가슴에 품고 산다. 반성은 잘못과 실패를 되짚어 보게 만든다. 이것을 통해 내가 성장한다. 하지만 잘 되지 않은 것 중 하나가 ‘손해 보는 것이 이익이다’라는 말이다. 조금만 손해를 보면 서로가 평온하게 지낼 수 있는데 그 조그만 손해를 보지 않겠다고 대립하면서 벌어지는 수많은 손해는 지난 후에야 절실히 느껴질 뿐이다. 그리고 희망에 대해 말할 때 왜 사람들이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를 사회 구조적인 관점이 아닌 개인으로 축소한 것에서는 아쉬움을 느낀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실적을 높게 잡아놓아도 누군가는 반드시 그것을 달성한다. 분명 말이 되지 않는다고 시작부터 말하는데도 달성되는 실적을 보면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만들어내는 성과는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걱정은 돌 하나도 옮길 수 없다’라고 말할 때 잘못을 보면서 그 잘못을 먼저 탓하고 시작하려는 나와 이것을 벗어던지고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는 사람과의 차이가 다시 느껴졌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종교적’이라고 주장할 때는 그의 종교가 이런 인식으로 이어진 것인지 아니면 나의 인식이 이것에 미치지 못한 것인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일상의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내고자하는 작가의 노력이 돋보이는데 배울 점이 많다.

 

작가는 천주교인이다. 절에 가면 부처에 절도 한다. 편협한 종교인이 아니다. 천주교를 믿게 된 과정도 전도가 아닌 책에서 시작했다. 대단하다. 하지만 종교인들이 가진 인식의 틀은 그대로다. 많은 부분에서 삶을 평온하게 만들고 실천으로 이어진다면 유익한 이야기가 가득하지만 이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부족하다. 그의 인식이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가치가 있다. 개인이 모여 사회가 이루어지니 말이다. 그럼 사회 구조를 바꾸게 되면 어떨까? 하드웨어가 바뀌면서 소프트웨어 변화 속도까지 올라가지 않을까? 덧붙이자면 이 산문집에 인용된 작가의 시들은 책 내용 때문인지 모르지만 비교적 쉽게 이해되고 강한 울림을 전해준다. 다시 한 번 작가의 시집을 펼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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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신맨 - 기계가 된 남자의 사랑
맥스 배리 지음, 박혜원 옮김 / 레드박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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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애니메이션의 영원한 고전 <은하철도 999>가 생각난다. 이 애니 속에서 돈 많은 부자들은 기계인간이 되어 영원한 삶을 살고자 한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병들면 죽을 수밖에 없다. 너무 오래전이라 희미한 이미지만 남았지만 그 당시 기계인간이 된 그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계로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든 인간들에게 끌리는 것을 경험했다. 사고로 신체 일부를 잃어버린 후 첨단 기술로 이것을 대체하고 악당을 무찌르는 영웅에 환호했다. 똑같은 기계인데 그들의 행동에 따라 나의 호불호가 갈라진 것이다. 이런 감정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계속되었다.

 

주인공 찰리는 뛰어난 과학자다. 하지만 그의 사회성은 제로에 가깝다. 한 번도 여자와 제대로 연애한 적이 없다. 이런 과거 이력은 그가 당한 사고 후 만난 롤라와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가 당한 사고는 모두 핸드폰에서 비롯되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핸드폰이 보이지 않는다. 집 어디에도 없다. 미친 듯이 찾는다. 차에도, 침실에도, 소파에도 없다. 결국 회사 책상에 두었을 것이란 추측으로 이어진다. 그곳에도 없다. 순간적인 강박증이 이어진다. 그러다 실험 중인 방에서 핸드폰을 발견한다. 그러다 그 방에서 기계에 끼여 다리 하나를 잃게 된다. 이것이 의족을 가져온 롤라와 만나게 되는 경위다.

 

처음 그가 다리를 잃은 것을 알았을 때 다른 사람과 다른 차이가 없었다. 상실감이 그를 지배하고 불구자란 생각에 삶의 의욕마저 떨어졌다. 회사는 소송 문제로 발전할까 고민한다. 이때 다가온 의료보조기 기사 롤라는 여신처럼 그에게 다가온다. 그녀가 가져온 수많은 의족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의족을 한 그에게 그녀가 보여주는 반응은 그를 사로잡는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의 발에 맞는 기계 다리를 만들게 된다. 이 다리에 그녀는 엄청난 반응을 보여주고 이때부터 그는 기이한 열기에 휩싸인다. 남은 다리 하나를 자른 후 멋진 기계 다리로 바꿀 생각이다. 여기부터 예상한 전개로 이어지기 시작한다.

 

기계에 매혹된 남자 찰리와 자신의 심장을 기계로 대체한 롤라. 이 둘은 강한 연대감을 보여준다. 찰리의 기계 다리에서 사업성을 발견한 기업은 새로운 사업 분야로 발전시키려고 한다. 과학자들에게 자신의 분야가 새로운 연구와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것보다 더 매혹적인 것이 있을까.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과학을 이용하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연구하고 발전시킨다. 이때부터 그들은 점점 인간성을 상실해간다. 기니피그 사이언티스트로 찰리를 착각하고 존경한 그들이 이제 자신들을 대상으로 실험한다. 인간의 신체가 기계와 결합하거나 대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이런 시도의 끝은 <은하철도 999>의 귀족들이 아닐까?

 

강인함과 효율성에 빠진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다리의 무게는 거의 1톤이다. 제대로 걷기만 하면 되는데 그들은 불필요한 장치까지 한 것이다. 처음 이 무게를 읽었을 때 이런 다리를 하고 일상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겼다. 실제 그가 걷게 되면 타일이 깨진다. 좋은 점이라면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멀쩡하고 엄청 빠르게 달리고 힘이 무척 세다는 것 정도다. 물론 버그에 의한 부작용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팔 다리를 가진 군대를 생각하면 달라진다. 현대 무기가 이것을 당해낼 수 없다. 전투의 방식이 바뀌게 된다. 이 팔 다리를 가진 찰리가 보여주는 활약 몇 번은 갑자기 엄청난 힘을 얻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어설프고 황당한 장면들로 가득하다.

 

과학의 발전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세계와 미래를 보여준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누군가가 상상했던 세계를 현실화시킨다. SF소설이나 영화에서 본 것이 현실 속에 구현되고 있는 지금을 생각하면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지만 누군가가 상상했던 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 이것은 자신을 위해 사용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위험과 한계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지 않다. 여기서 다시 효용과 효율을 생각하게 된다. 소설 속 설정은 극단으로 몰고 간 부분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재미난 부분은 이 모든 것이 사랑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 살짝 삐딱하게 본다면 집착일 수도 있다. 필요를 넘어 광기에 휩싸인 후 기계로 변한 한 남자의 사랑은 현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또 다른 풍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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