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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ㅣ 매드 픽션 클럽
카린 포숨 지음, 최필원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9월
평점 :
대단한 소설이다. 이미 카린 포숨에 대한 예찬을 수없이 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글이 가끔 보여 마음을 비웠는데 읽으면서 빨려 들어갔다. 그 흔한 살인사건이나 피가 튀는 장면을 앞에 늘어놓지 않고 긴장감을 조성하는 그녀의 글솜씨에 반했다. 이미 그녀의 소설을 몇 권 사놓았지만 늘 보아온 호평보다 몇몇의 평이한 평에 더 눈길이 갔던 순간 때문에 읽는 것을 뒤로 미루었었다.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물론 그 사이 나의 취향이 변한 것도 있겠지만 역자가 말한 그녀의 이전 번역본을 머릿속에서 떠올려본 것은 사실이다.
아기는 집 뒤편에 놓인 유모차에서 곤히 자고, 엄마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든다. 엄마는 아기에게 문제가 생기면 금방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직장에서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며 맛있는 음식을 만든다. 남편이 돌아온다. 힐끔 본 유모차에 어떤 변화도 없다. 애정이 돈독한 부부는 사랑을 나누고, 식사를 한다. 그 동안 아기는 밖에서 조용히 잔다. 잠시 자신들의 감정에 취해 아기를 잊었다. 이 감정에 놀라 밖으로 나간다. 그런데 아기가 피범벅이다. 비명을 지르고, 병원으로 급히 차를 몰고 간다. 아이에게는 이상이 없다. 누군가 아주 심한 장난을 친 것이다. 이것을 시작으로 악의에 찬 장난이 이어진다.
이 장난은 악의로 가득하다. 살아 있는 한 할머니의 부고 기사를 내거나 루게릭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 집으로 장례식장 차를 보낸다. 한 엄마에게는 딸이 오토바이를 몰다 큰 사고가 났다고 전화를 건다. 이런 장난들은 한 소년이 유심하게 관찰한 후 악의로 재미로 저지른 행동이다. 보통 이런 장난을 치면 사람들이 잊고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그들의 불안한 심리를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려내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하나의 장난이 그들의 삶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집은 당연히 가장 먼저 사고가 난 집이다. 이들 부부는 이 장난으로 인해 자신들 속에 내재해 있던 공격성과 불안감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 소설 최고의 매력은 바로 이런 부분들에 있다.
이 모든 장난을 친 소년의 이름은 요뉘 베스코브다. 그는 홀어머니와 함께 산다. 그녀는 술에 찌들어 있고, 아이를 잘 돌보지 않는다. 소년은 늘 불만에 차 있고,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보여준다. 그의 가장 큰 불만 대상은 엄마다. 엄마를 죽이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런 소년에게 평화와 안정을 주는 존재가 있다. 할아버지다. 그는 할아버지 집에 가서 머물기를 좋아한다. 노년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살기 힘들지만 손자의 방문을 좋아한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존재가 이 소년이 더욱 엇나가는 것을 막아주고 있는지 모른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 이것이 가식적이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콘라드 세예르가 이 사건을 맡는다. 악의에 찬 사건을 조사하지만 아직 명확한 증거가 발견된 것은 없다. 그리고 사건이 연속적으로 벌어진다고 해도 시간의 간격이 짧지 않다. 세예르는 프랑크라는 개와 둘이 살고 있다. 수많은 탐정소설에서 본 모습과 전혀 다른 경찰의 모습으로 사건에 한 발씩 다가간다. 살인사건이라면 대대적인 인력 동원이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악의에 찬 심한 장난일 뿐이다. 요뉘가 장난 칠 상대를 찾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을 보여준다면 세예르는 그를 조용히 뒤쫓는 역할이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심심한 장면인데 작가는 이들의 심리 묘사와 감정의 흐름을 멋지게 잡아내어 표현하면서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든다.
그냥 이렇게 장난을 치다 끝났다면 아주 평범한 심리 스릴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아이의 죽음과
또 다른 죽음을 넣으면서 마지막 한 쪽에 강력한 반전을 펼친다. 미궁으로 빠질 수 있는 사건들 속에 하나의 정확한 증거를 남긴 것이다. 이것 또한 작가가 이야기 중에 지나가듯이 말한 것에 담겨 있다. 이런 부분들을 읽으면서 왜 수많은 거장들이 카린 포숨에 경탄하면서 추켜세웠는지 알게 된다. 일상 속에 늘 잠재되어 있던 공포와 악의를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긴장감 있게 표현하는 작가는 정말 흔하지 않다. 오랫동안 머릿속에 여운을 남기고, 잊고 있던 책더미 속 그녀의 다른 소설을 찾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