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필립 로스가 스스로 마지막 작품이라고 말한 소설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가 아직 살아 있는데 이런 표현을 썼다는 것이 조금 의외다. 언젠가 다시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가지고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이전에 다른 유명 작가들이 가끔 한 것처럼. 물론 그때까지 번역된 그의 소설들을 모두 읽고 싶다. 이 책 이외에 읽지 않은 일곱 권이 더 있는데 몇 권은 사 놓았다. 더 사야 한다. 언젠가는 그의 전집이 출간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장에 꽃아 놓으면 멋질 것 같다.

 

네메시스. 천벌로 번역할 수 있을 텐데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왜 이 제목을 사용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 천벌은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 때문에 유행병이었던 폴리오가 전염되었다는 자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1944년 여름 뉴어크와 인디언 힐의 풍경과 삶들을 그려내면서 하나의 유행병이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준다. 그 과정의 중심에 놓인 인물이 바로 뉴어크의 놀이터 감독을 맡은 스물세 살 버키 캔터다. 그가 바라는 것은 고등학교 체육교사가 되는 것이지만 삶은 그의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버키가 살고 있는 동네는 유대인들의 거리다. 버키의 아버지는 도박꾼이고,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죽었다. 그는 외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외할아버지다. 그에게 운동을 배웠고 강한 체력을 키웠다. 하지만 그의 시력은 아주 나쁘다. 그가 바라는 것은 유럽으로 가서 적들을 물리치는 것이지만 시력 때문에 군이 면제다. 지금의 한국이라면 좋다고 했겠지만 그 당시 버키에게는 부끄럽고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일이다. 이런 실패가 그가 감독한 놀이터에서 폴리오가 번지고 아이들이 죽게 되면서 분노 폭발로 이어진다. 자연스럽게 이것은 독실한 유대인에게 있을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한 원망 혹은 분노로 발전한다.

 

1944년 여름의 폴리오는 예전과 완전히 다르다. 점점 더 많아지는 폴리오 환자들로 인해 부모들은 공포에 질려 있다. 사그라지지 않고 무더위와 더불어 점점 늘어나는 폴리오 환자는 부모들로 하여금 히스테리 같은 반응을 자아낸다. 거리의 핫도그 가게를 비난하고, 놀이터가 위험하다고 말하고, 보건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고 욕하고, 그 외 이것저것을 탓한다.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버키에게도 자신이 좋아하는 학생들의 죽음이 큰 충격이다. 제대로 된 치료제도, 예방약도 없던 시절 이 병에 걸린다는 것은 죽음 아니면 장애인의 삶이 전부다. 자신과 주변 환경을 깨끗하게 유지하는데도 아이들은 병에 걸린다. 버키는 이런 연속적인 죽음과 병에 걸린 아이들 때문에 고뇌하고 두려워한다. 이때 그의 여자 친구 마샤가 자신이 여름방학 동안 일하는 인디언 힐에 올 것을 제안한다. 그녀는 버키가 병에 걸릴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버키는 양심과 공포 속에서 갈등한다. 이 갈등은 현실적 도피 방법으로 이어진다. 마샤와의 약혼이란 핑계로 인디언 힐로 가는 것이다. 시력 때문에 갈 수 없었던 군대와 달리 이제 그는 유행병에 굴복하고 시원한 산으로 간다. 놀이터와 아이들을 버리고 왔다는 죄책감과 함께. 인디언 힐에서의 생활에 적응하면서도 그의 마음 한 곳에는 죄책감이 남아 있다. 이것이 천벌로 발전하는 것은 인디언 힐에도 폴리오가 번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 탓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병균을 가지고 와 퍼트렸다고 생각한다. 자신도 폴리오에 감염되어 평생 힘들게 장애인으로 살았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길지 않은 분량의 대부분을 버키의 한 여름 이야기로 채웠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버키의 놀이터에서 놀던 화자와 버키가 다시 재회한 장면에 나온다.

 

보통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기면 남 탓하기 바쁘다. 그런데 버키는 몇 가지 사건과 동기가 겹쳐지면서 자기 탓을 한다. 자신이 만진 더러운 호러스에게서 병균이 옮았고, 이 병균이 자신을 통해 아이들에게 전염되었다고 생각한다. 키는 작았지만 강하고 건강한 몸을 가졌던 그가 폴리오로 장애인이 되면서 자신의 약혼녀 마샤를 떠나보내고, 운동 경기도 보지 않으면서 과거의 자신을 외면한다. 하지만 그의 삶속에 살아 있는 마샤의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더불어 하느님의 개념을 새롭게 세운다. ‘좇같은 새끼와 사악한 천재가 합쳐진’ 모습이다. 작가는 여기서 몇 가지 가정을 세운다. 의미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 가정은 망가진 착한 소년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당시 어린 소년들에게 버키는 ‘무적으로 보’인 인물이었다. 이 문장이 마지막 문장인 것이 의미심장하고, 진한 여운을 남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발란데르 시리즈 한때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푸줏간 소년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패트릭 맥케이브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보다 영화로 먼저 다가왔다. 닐 조던이 영화로 만든 것이다. 지금 기억에 영화를 봤는지 잘 모르겠다. 늘 말하는 나의 저질 기억력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포스터는 잘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는 영화를 미친 듯이 보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무엇보다 워낙 인상적인 포스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채에서 이 책이 나왔을 때 낯익은 제목과 다른 표지에 약간의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이전에 다른 번역본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검색을 해보니 다른 책이 나오지 않는다.

 

책 두께와 영화에 대한 이미지와 잠깐 넘겨본 것을 참고로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앞의 몇 쪽은 그냥 잘 읽었는데 더 읽게 되면서 혼란에 부딪혔다. 문장 구성 때문이다. 한 문장에 따옴표도 없고, 쉼표도 없이 여러 사람과의 대화를 집어넣었다. 한두 번 정도라면 그냥 그렇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의 문장이 이어진다. 읽기 정말 힘들다. 여기에 환상과 현실이 분명한 경계를 나누지 않고 바로 이어진다. 잠시만 집중을 흩트리면 무슨 내용인지, 환상이 아직도 계속되는지 혼란을 겪는다. 번역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문장이다. 실제 원문을 찾아보면 과연 어떤 것일까 하고 궁금할 정도다.

 

이십 년, 삼십 년, 사십 년 전인가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모든 일의 화근으로 한 부인을 말한다. 누전트 부인이다. 그녀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다. 필립이다. 런던에서 사립학교를 다니다 전학 왔다. 필립의 집에는 좋고 아주 깨끗한 만화가 있었다. 프랜시 브래디는 친구 조와 함께 이 책들을 가로챈다. 그냥 소년들의 재미난 그러나 조금 과한 장난 정도로 볼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누전트 부인은 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른다. 술 마시는 아버지를 돼지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말하고, 떠나면서 그들을 돼지들 같다고 외친다. 이때만 해도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질지 아무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프랜시의 아빠는 트럼펫 연주자였다. 그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고 말한다. 프랜시의 엄마는 자살하려고 한다. 그리고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정상적인 가정의 모습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 이런 가정에도 훈훈함이 불어올 때가 있다. 크리스마스 때다. 이 날은 앨로 삼촌이 온다. 맛있는 음식과 음악과 노래가 집안에 가득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행복은 짧다. 평범한 소년으로 성장해야 할 프랜시의 삶은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불행이 모두 누전트 부인 때문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가운데 프랜시는 누전트 씨 집에 들어가서 난장판을 만든다. 그는 수도원 같은 병원으로 이송된다. 시간이 흘러 다시 그의 집으로 돌아온다.

 

프랜시가 집착하는 사람이 둘 있다. 한 명은 누전트 부인이고, 다른 한 명은 친구 조다. 그가 퇴원한 후 만난 조는 옛날과 달라졌다. 그의 기준에서 보면 말이다. 그리고 이제 조와 필립이 같이 공부를 한다. 형제로 생각하고 늘 그를 그리워했던 프랜시에게 이것은 엄청난 충격이다. 예전처럼 같이 놀기를 원하지만 중학생이 된 조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아이가 되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현재만 즐기면서 놀 단계를 지난 것이다. 문제는 이 모든 일에 누전트 가 사람이 엮여있다는 것이다. 두 집안이 서로 왕래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프랜시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정말 힘겹게 읽었다. 왜 이런 문장 구조로 글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읽지 않은 상태라 원래 이런 방식의 글을 쓰는지 확인할 수 없다. 추측컨대 프랜시의 의식 분열과 감정의 혼란 등을 표현하기 위해 이런 어려운 문장을 쓴 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할 뿐이다. 누군가의 의식이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문장으로 보여준다고 해야 하나. 그 가운데 이야기의 진짜 뼈대를 찾아서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 나의 경우는 거의 실패다. 언제 영화를 보면서 원작 소설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발신자 매드 픽션 클럽
카린 포숨 지음, 최필원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단한 소설이다. 이미 카린 포숨에 대한 예찬을 수없이 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글이 가끔 보여 마음을 비웠는데 읽으면서 빨려 들어갔다. 그 흔한 살인사건이나 피가 튀는 장면을 앞에 늘어놓지 않고 긴장감을 조성하는 그녀의 글솜씨에 반했다. 이미 그녀의 소설을 몇 권 사놓았지만 늘 보아온 호평보다 몇몇의 평이한 평에 더 눈길이 갔던 순간 때문에 읽는 것을 뒤로 미루었었다.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물론 그 사이 나의 취향이 변한 것도 있겠지만 역자가 말한 그녀의 이전 번역본을 머릿속에서 떠올려본 것은 사실이다.

 

아기는 집 뒤편에 놓인 유모차에서 곤히 자고, 엄마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든다. 엄마는 아기에게 문제가 생기면 금방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직장에서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며 맛있는 음식을 만든다. 남편이 돌아온다. 힐끔 본 유모차에 어떤 변화도 없다. 애정이 돈독한 부부는 사랑을 나누고, 식사를 한다. 그 동안 아기는 밖에서 조용히 잔다. 잠시 자신들의 감정에 취해 아기를 잊었다. 이 감정에 놀라 밖으로 나간다. 그런데 아기가 피범벅이다. 비명을 지르고, 병원으로 급히 차를 몰고 간다. 아이에게는 이상이 없다. 누군가 아주 심한 장난을 친 것이다. 이것을 시작으로 악의에 찬 장난이 이어진다.

 

이 장난은 악의로 가득하다. 살아 있는 한 할머니의 부고 기사를 내거나 루게릭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 집으로 장례식장 차를 보낸다. 한 엄마에게는 딸이 오토바이를 몰다 큰 사고가 났다고 전화를 건다. 이런 장난들은 한 소년이 유심하게 관찰한 후 악의로 재미로 저지른 행동이다. 보통 이런 장난을 치면 사람들이 잊고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그들의 불안한 심리를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려내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하나의 장난이 그들의 삶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집은 당연히 가장 먼저 사고가 난 집이다. 이들 부부는 이 장난으로 인해 자신들 속에 내재해 있던 공격성과 불안감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 소설 최고의 매력은 바로 이런 부분들에 있다.

 

이 모든 장난을 친 소년의 이름은 요뉘 베스코브다. 그는 홀어머니와 함께 산다. 그녀는 술에 찌들어 있고, 아이를 잘 돌보지 않는다. 소년은 늘 불만에 차 있고,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보여준다. 그의 가장 큰 불만 대상은 엄마다. 엄마를 죽이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런 소년에게 평화와 안정을 주는 존재가 있다. 할아버지다. 그는 할아버지 집에 가서 머물기를 좋아한다. 노년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살기 힘들지만 손자의 방문을 좋아한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존재가 이 소년이 더욱 엇나가는 것을 막아주고 있는지 모른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 이것이 가식적이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콘라드 세예르가 이 사건을 맡는다. 악의에 찬 사건을 조사하지만 아직 명확한 증거가 발견된 것은 없다. 그리고 사건이 연속적으로 벌어진다고 해도 시간의 간격이 짧지 않다. 세예르는 프랑크라는 개와 둘이 살고 있다. 수많은 탐정소설에서 본 모습과 전혀 다른 경찰의 모습으로 사건에 한 발씩 다가간다. 살인사건이라면 대대적인 인력 동원이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악의에 찬 심한 장난일 뿐이다. 요뉘가 장난 칠 상대를 찾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을 보여준다면 세예르는 그를 조용히 뒤쫓는 역할이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심심한 장면인데 작가는 이들의 심리 묘사와 감정의 흐름을 멋지게 잡아내어 표현하면서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든다.

 

그냥 이렇게 장난을 치다 끝났다면 아주 평범한 심리 스릴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아이의 죽음과

또 다른 죽음을 넣으면서 마지막 한 쪽에 강력한 반전을 펼친다. 미궁으로 빠질 수 있는 사건들 속에 하나의 정확한 증거를 남긴 것이다. 이것 또한 작가가 이야기 중에 지나가듯이 말한 것에 담겨 있다. 이런 부분들을 읽으면서 왜 수많은 거장들이 카린 포숨에 경탄하면서 추켜세웠는지 알게 된다. 일상 속에 늘 잠재되어 있던 공포와 악의를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긴장감 있게 표현하는 작가는 정말 흔하지 않다. 오랫동안 머릿속에 여운을 남기고, 잊고 있던 책더미 속 그녀의 다른 소설을 찾게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머를 든 철학자
알랭 기야르 지음, 이혜정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예상이 두 번 빗나간 책이다. 한 번은 읽기 시작하면서, 또 한 번은 좀 더 읽으면서 변했다.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책을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감옥과 철학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낯선 이름과 옮긴이의 주석이 읽기 어렵겠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끈기를 가지고 조금 더 읽으니 철학 소설처럼 다가왔던 이야기가 범죄 소설로 조금씩 바뀐다. 그렇다고 장르 소설처럼 확 바뀌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의 버릇은 그대로 유지한 채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감옥을 무대로 한 철학자의 낯선 경험이자 모험이다.

 

라자르 빌랭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철학을 전파하는 장돌뱅이 철학자다. 그는 사회복지사업의 하나로 감옥의 죄수들에게 철학을 강의하는 일을 권유받는다. 일반 사람들에게 이 일이 쉬울 리 없다. 조금 고민하다 승낙한다. 첫 감옥 강의에서 세 명의 죄수를 두고 사랑에 대한 철학을 강의한다. 실제는 두 명만 참석했는데 한 명은 실신 일보 직전이 되고, 다른 한 명은 식은땀을 흘린다. 왜 사랑 이야기에 이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간수가 이들이 감옥에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들은 불륜을 저지르는 아내를 죽인 남자와 창녀의 아랫배를 가위로 찌른 남자들이다. 끔찍해야 할 이 사연이 나올 때 살짝 웃음이 터졌다. 멋진 블랙유머이기 때문이다.

 

감옥으로 가는 철학자에게 리치올리가 봉투 하나를 전해준다. 이 봉투를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해달라고.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고 말한다. 당연히 이런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빌랭은 흰 봉투를 들고 감옥으로 들어간다.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서다. 떨린다. 불법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 여자를 만난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정도지만 그녀에게 매혹된다. 그녀의 이름은 레일라다. 물론 이때는 그녀를 자신처럼 사회복지사업을 위해 감옥에 온 음악선생 정도로만 생각했다. 첫 번째 임무를 잘 끝낸 그는 몇 번의 일을 처리한 후 처음 같은 두려움은 사라졌다. 익숙해진 것이다.

 

권투선수 출신 록키 등이 소개한 리치올리의 사업은 빌랭의 도움으로 승승장구한다. 빌랭은 봉투 안을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배달부처럼 그냥 전해주기만 한다. 이런 그에게 이름조차 몰랐던 레일라의 존재는 강한 매혹의 대상이 된다. 이것을 리치올리에게 말하고, 다른 감옥에 강의를 갔다가 그녀를 다시 만난다. 그녀에게 빠진다. 이 우연이 정말 우연일까? 빌랭은 리치올리에게 그녀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총 쏘는 연습장에 간다. 총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총을 쏘게 한다. 이제 그는 그녀의 정체 때문에 혼란을 겪는다. 양심이 자신의 마음 한 곳에서 불쑥 솟아오른다. 양심이 배달부를 그만두고 싶어한다. 이런 일에 퇴직이 쉬울 리가 없다.

 

감옥에서 죄수들과 철학에 대해 토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감옥은 다양한 직업군이 있고,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알려주는 인물들도 있다. 그러다 그가 낀 사업에 한 발을 담그려는 인물이 나온다. 리치올리는 그가 그만두는 것을 용납할 마음이 없다. 빌랭을 두고 두 조직이 싸운다. 하지만 언제나 일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풀린다. 모두가 좋아지는 방식으로 흘러가고, 빌랭의 돈도 같이 쌓인다. 이 무슨 이상한 반전인가! 아니, 코미디인가! 철학자는 이제 범죄자가 되어서 감옥에 철학을 강의하러 간다. 이제 범죄자가 된 철학자의 대단한 활약이 펼쳐질 것이란 기대가 생긴다. 그것은 단지 나만의 기대다.

 

이 소설을 범죄소설로 볼 수 없는 것은 철학자의 물이 가득 든 강의들과 감옥에서 만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과 그 시대상의 한 단면들 때문이다. 그 유명한 프렌치커넥션 뿐만 아니라 프랑스가 아프리카 식민지에 저지른 잘못까지 모두 다루고 있다. 각 개인의 사연들을 길지 않은 분량에 요약해서 들려주는데 이때 프랑스 골목의 이면이 살짝 드러난다. 솔직히 철학 강의는 지적허영이 있는 내가 봐도 조금 재미없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들의 사연과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좀 더 이 부분을 음미할 수 있다면 더 재미있는 책이 될 것이다. 나의 경우는 반반 정도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