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 트레킹 - 플라톤부터 러셀까지 철학자들과 함께한 영국 종단기
게리 헤이든 지음, 곽성혜 옮김 / 유노북스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내 삶에서 며칠을 연속으로 걸었던 적은 없다. 한참 유행하던 국토대장정도 가지 않았고, 지리산 종주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나다보니 이렇게 긴 길을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한 환상이 있다.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룬 에세이에 빠지고, 단순히 길을 걷는 사람에 대한 소설에 감탄했다. 이런 나에게 영국 종단과 철학의 결합이란 이 책이 매혹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두께도 그렇게 두껍지 않으니 부담 없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읽기 시작하면서 산산조각 났다. 예상하지 못한 문장과 구성 때문이다.

 

문장은 건조하다. 어느 시인의 산문집에서 꽃과 나무 이름을 아는 것이 얼마나 풍성한 글을 만드는지 읽은 적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이 책의 저자도 자신의 글재주가 조악하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묘사는 늘 막연하기만 하다고. “살림 지대를 지났다고 말할 수 있을 뿐, 나는 어떤 종류의 나무가 있었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들판을 가로질렀다고 말할 수 있을 뿐, 어떤 종류의 농작물이 있었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실제 이 책을 읽으면서 꽃과 나무와 농작물에 대해 쓴 글을 거의 보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삭막한 문장들이다. 하지만 이 삭막함을 가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걸으면서 느낀 감정과 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인용한 철학자 등의 글이다.

 

스코틀랜드 북부 땅끝에서 잉글랜드 남서부 땅끝까지 약 1900킬로미터의 거리를 도보로 종단한다. 3개월 동안 250만 걸음을 걷는다. 남한을 한바퀴 삥 둘러도 이 정도 거리는 되지 않는다. 중간에 텐트 등을 집으로 보내기는 했지만 가장 힘든 초반 코스를 무거운 짐을 지고 걸었다. 며칠 만에 아내인 웬디의 발에 거대한 물집이 잡혔다. 어쩔 수 없이 쉬어야만 했다. 이런 고난이 있었지만 이 부부는 무사히 종단을 마쳤다. 그 과정은 물론 간단하지 않았다. 벌레와 곤충과 추위와 통증과 힘겨움 등을 견뎌야 했다. 읽으면서 간접적으로 그 기분이 느껴졌고, 순간적으로 왜 이렇게 힘든 도보 여행을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여행은 웬디가 바라던 것이다. 그녀는 베트남에서 5년 동안 영어 선생을 했다. 대단히 활동적인 여성이다. 낯선 외국이란 그런지 모르지만 우리의 국토대장정처럼 영국에서도 이 종단을 꽤 많은 사람이 시도하는 모양이다. 반대 방향으로 걷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 종단이 끝날 무렵 이들의 몸 상태는 최고조에 달했다. 초반보다 편한 길은 몸을 더 가볍게 한다. 중간에는 자신들의 예산을 생각하지 않고 텐트도 보낸다. 숙소와 먹는 것이 좋아지면서 상태도 좋아진다. 적지 않은 나이고, 긴 시간 동안 걸은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열정과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감정을 저자는 그저 담담하게 적어나간다.

 

모두 여덟 코스로 나누었다. 각 코스마다 철학자 한 명씩 넣었다. 하지만 그 철학자 한 명이 그 코스 전체를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걸으면서 느끼고 깨닫고 배운 것들을 철학자나 시인의 글을 통해 적절하게 풀어내었다.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기획하고 걸은 길이 아니다 보니 이런 구성이 되었다. 에피쿠르스에서 장 자크 루소까지 이어지는 이 여정을 이들만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읽으면서 동양에 대한 약간의 환상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철학자와 하이쿠 시인 바쿠를 인용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의 이런 생각이 또 다른 편견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여행을 떠나기 전 이들은 앞으로 겪을 시련과 고난을 낭만적으로 생각했다. 욱신거리는 등짝과 물집 잡힌 발바닥 때문에 낭만이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힘든 여정을 지나면서 몸은 환경에 조금씩 적응을 하고, 조글을 걷는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생각한다. 어떤 순간 육체적 도전은 그 이상이 무엇이 되었다. 종교인들의 순례의 열정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감정과 깨달음은 마지막 코스를 걷는 순간에도 변함없다. 이제 이 모든 길들이 하나로 다가온다. 부분적인 좋고 싫음이 아니라.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들의 만족감이 얼마나 높은 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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