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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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책이다. 한 가족의 3대를 다루는데 일반적인 가족의 모습과 다르다. 할아버지 다케지로는 러시아인 할머니 기누와 결혼해 혼혈 3남매를 낳았다. 기쿠노, 유리, 기리노스케다. 유리는 결혼해서 6개월 산 후 이혼했고, 기리노스케는 단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다. 기쿠노는 약혼자를 버리고 나가 유부남과 관계를 맺고 딸 노조미를 낳는다. 7년 만에 노조미를 임신한 채 돌아와서 도요히코와 결혼해서 아들 고이치와 딸 리쿠코를 낳았다. 도요히코는 회사 직원 아사미와 불륜을 저지른 후 막내 아들 우즈키를 낳았다. 이것이 이 집의 관계도다. 이들이 모두 한 집에 산다. 거대한 서양식 집에서. 작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들려준다. 시간 순서는 아이들이 자라는 사이사이에 어른들의 과거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다.

 

앞에 쓴 복잡한 관계에 대한 설명이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이 집안 사람들이 직접 등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는 사람이나 연인이 화자로 등장하여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순간도 몇 있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이렇게 엮인 관계인 채로 산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 놀라운 것이 이 집에 있다. 바로 아이들을 공교육으로 보내지 않는 것이다. 집에서 가정 교사에게 교육을 받는다. 책 도입부에 고이치, 리쿠코, 우즈키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이 시도는 결국 실패한다. 자유롭게 집에서 놀면서 월등히 우월한 교육을 받던 이들이 먼저 적응을 하지 못하고, 기존 학생들도 이들을 배척한다.

 

집에서 자라다 보니 아이들에게 친구가 거의 없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대학에 들어가면 친구가 하나 둘 생긴다. 원래 비단 장사를 하던 집안이었는데 할아버지 다케지로가 영국에서 돌아온 후 무역회사를 차렸다. 그 후 이 일이 집안의 가업이 된다. 할아버지의 교육관도 특이하지만 가업을 이을 아들의 경우 1~2년 동안 해외에서 놀면서 공부할 기회를 준다. 돌아오면 당연히 회사 일을 해야 한다. 이 집안에서 가장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생활하는 기리가 해외 생활에 관한 몇 개의 에피소드를 풀어낼 때 고요하고 정적인 이들의 일상에 파탄이 일어난다. 물론 가장 큰 파탄을 불러온 것은 큰딸 기쿠노의 7년 가출과 임신이겠지만 평생을 홀로 살면서 조카들의 훌륭한 삼촌 역할은 한 그는 이야기 곳곳에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다양한 화자를 등장시키다 보니 괜히 한 인물에게 정을 붙인다. 바로 첫장과 끝장을 담당하는 리쿠코다. 그녀는 이 집안 여자들과 다른 길을 간다. 대학도 다니지 않고 소설을 써서 상을 받은 후 전문 작가로 변신한다. 하지만 그녀는 기리 삼촌과 함께 소설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장남인 고이치가 자신이 아닌 여자 친구 교코를 통해 그의 삶과 내면이 드러난 것을 비교하면 더욱더. 이것은 우즈키의 성장과 또 다른 삶을 보여주는 모습과 비교된다. 큰 언니 노조미가 대학을 졸업한 후 베이징대학에 유학을 간 것은 이 집안 남자들의 놀기 위한 유학과 대조되는 모습이며, 이 집안의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삶의 또 다른 모습이다. 고이치가 가업을 이어받지만 다른 남매들은 기존의 삶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이것은 분명 시대의 변화와도 관계가 있다.

 

3대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실제 2대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1대 할머니의 이야기는 반전 같지만 우리가 알고 삶의 외양이 얼마나 다른 이면을 가질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더불어 적지 않은 시간을 다루면서 한 가족의 성장과 소멸 과정을 보여주면서 삶의 유한성과 애잔함을 느끼게 만든다. 혼혈로 엄청난 미모를 지녔던 엄마와 유리 이모가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삶을 살지 못한 것을 보면 할아버지의 교육관이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유리 이모의 엄청난 결벽증이나 리쿠코의 짧은 초등학교 경험 속에 나온 구토 등은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이지만 누군가에는 엄청난 고통임을 보여준다. 이것이 이들을 사회와 떨어져 있게 만든다. 관계가 좁아진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넓어지지만 아주 많이 부족하다. 읽으면서 순간적으로 갑갑함을 느꼈던 순간들의 대부분은 유리 이모와 관련되어 있다.

 

한 가족 전체가 화자로 등장하여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주다 보니 각각의 인물들 삶이 파편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왜 기리 삼촌이 독신으로 살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고, 고이치는 화자로 등장하여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왜 직접 표현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할아버지 다케지로의 목소리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것도 아쉽다. 1960년에 시작해 2006년에 끝나는 이야기 속에 완고한 아버지나 따뜻한 할아버지로 등장한 것을 제외하면 이 놀라운 집안을 만든 그의 모습이 너무 희미하다. 러시아인 할머니 덕분에 그들만의 용어가 등장하는 부분에서 감탄을 했다면 책 제목에 나온 ‘라이스에는 소금을’이란 말이 의미하는 ‘자유만세’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화목한 것 같은데 하나씩 조각으로 나누어지는 과정 속에서 들여다 본 그들의 모습은 결코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문장에서 달콤한 한숨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어쩌면 가장 적합하고 함축적인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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