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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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여사의 소설 중 시대물은 이번이 처음이다. 개인적으로 시대적 문제를 풀어낸 미스터리를 좋아하는데 이 시대물도 상당히 마음에 든다.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시대물을 몇 권 사놓고 그냥 묵혀놓은 지 몇 년 지났는데 언제 시간나면 정주행 한 번 해야겠다. 처음에는 에도 시대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적응하고 나면 그 시대 속에서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을 누린다. 첫 부분에서 이름과 관직과 상황 등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역시 미야베 미유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네 장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장은 독립적이면서 앞의 이야기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기본 줄기는 도가네 번 번주의 시종관이었던 아버지가 할복을 한 후 그의 둘째 아들 후루하시 쇼노스케가 에도에 올라와서 겪게 되는 몇 가지 사건을 연작으로 다룬 것이다. 이 아버지의 할복도 의심스럽다. 뇌물을 받은 것을 부인하는데 받은 영수증에 쓰인 필적이 자신의 것과 같다. 현대 미스터리물을 자주 보는 우리라면 당연히 똑같이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시대는 아직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고 신기하다. 붓글씨가 그 사람의 성격이나 마음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던 시대이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아버지는 혼자 할복을 시도하고 장남이 우연히 발견하고 그 목을 베었다는 것인데 아무리 사무라이 시대라고 하지만 끔찍하다. 하지만 실제 소설 속 장면들에서 이런 모습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전에도 에도 시대를 다룬 소설을 가끔 읽었다. 하지만 그때는 번의 계급체계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나의 지식이 워낙 얕았고, 생각이 경직되어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쇼노스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나름대로 수백 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포시 이해하게 되었다. 이 계급구조가 정체된 사회에서는 가장 안정적인 구조였던 것이다. 하지만 에도만 오면 이 사고와 현실이 뒤섞인다. 조그만 번의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도 에도의 빈민은 하루에 한 끼는 쌀밥을 먹는다. 번에서는 어느 정도 지위에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 하루 벌어 사는 에도인에게는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닌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돈 없는 지방 사람은 싼 방을 얻을 수밖에 없다. 쇼노스케가 살고 있는 도미칸 나가야가 그런 곳이다. 이곳에서 쇼노스케는 대본소 무라타야의 일을 도와주면서 생활비를 번다. 그 일이란 필사하거나 다른 소설을 수정해서 새로운 책을 내는 것이다. 이 일상을 주재한 것은 번의 에도 대행인 사카자키 시게히데, 일명 도코쿠다. 그를 만나면서 쇼노스케는 아버지의 뇌물 사건이 단순히 비리를 다룬 작은 음모가 아니라 거대한 음모를 짜기 위한 하나의 과정임을 알았다. 다른 사람의 필적을 그대로 흉내내는 대서인을 찾아야만 이 음모를 중지할 수 있고, 아버지의 원한도 갚을 수 있다. 이 긴 소설의 기본 뼈대는 바로 여기에 있다.

 

큰 흐름이 하나 있지만 재미를 만드는 것은 역시 자그만 이야기들이다. 각 장에서 하나의 큰 사건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중심으로 관계와 인연이 만들어지는 자그만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쇼노스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조그만 연적 관계나 꿈으로 생각했던 여인 와카와의 만남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도미칸 나가야 사람들과 엮이면서 일어나는 일상과 동명이인인 관계로 생긴 에피소드 등은 이 소설이 과연 미스터리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잔잔하고 유쾌하다. 한 소녀의 납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나은 정과 키운 정의 관계는 쇼노스케와 어머니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들고,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식적인 가족애가 제거된 모습이 너무 노골적이라 순간적으로 불쾌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가볍게 읽기에는 사실 조금 힘든 분량에 내용이다. 특히 마지막 장은 예상을 뛰어넘은 결론으로 이어진다. 쇼노스케가 보여준 인간적인 모습과 고뇌 등이 더욱 심화되고, 기존의 관습을 단순에 깨트리기 때문이다. 솔직하고 모든 것을 다 알려준 것 같은 사람들의 숨겨진 마음이 드러나고, 자신의 역할이 과연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든다. 읽으면서 분노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쇼노스케는 고민하고 걱정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지키려고 한다. 약간 무력해보인다. 쇼노스케에게 그만큼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에도 최고의 빈민가에 살고 있는 나가야 사람들의 따뜻하고 애정어린 관심이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가볍게 떠받친다. 가족보다 나은 이웃사촌들이다. 오랜만에 무딘듯하면서 날선 작품 한 편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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