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조영학 옮김 / 박하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원작을 이 소설로 착각했던 순간이 있다. 실제 원작이 되었던 책은 다른 책이다. 그 책은 에필로그에서 잠시 나왔던 앤드류 호치스가 쓴 앨런 튜링의 전기인 <앨런 튜링의 이미테이션 게임>이다. 이 전기가 상당한 두께인 반면 요약본 비슷하게 나온 책이 있다. 바로 얼마 전에 읽은 <튜링 : 이미테이션 게임>이다. 이 책을 너무 어렵게 읽었다. 솔직히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튜링>에 나온 이론들이 이 소설에도 나온다. 작가가 이야기 속에 더 쉽게 풀어내었다.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딱딱한 논문보다 훨씬 쉬웠다.

 

앨런 튜링의 자살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이 현장을 가장 먼저 찾아온 경찰이 있다. 바로 주인공 레오나드 코렐이다. 코렐은 현장을 둘러보고 이상한 점들을 발견한다. 수학 방정식으로 가득한 수첩과 베어 문 사과 반쪽이 옆에 놓여 있다. 때는 1954년 6월 8일 화요일이다. 이 시대는 2차 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벌어지던 시기다. 영국 내부에서 스파이들이 활동했고, 미국에서 매카시 열풍이 몰아치던 시기다. 튜링이 독일의 암호 에니그마를 해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전 동성애자라는 것만으로 호르몬 치료를 받는 등 엄청난 수모를 겪었다. 이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지금은 흔하게 동성애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불과 십 수 년 전만해도 이런 사실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한때는 이런 사람들이 불법이었다. 1950년대는 더 심했다. 그의 뛰어난 능력이나 업적에 상관없이 동성애자라는 사실만으로 그를 의심하고 미행하는 사람이 있던 시대다. 그의 죽음에 대한 수사를 맡은 것은 가장 먼저 현장에 등장한 코렐이다. 코렐이 이 사건에 특별한 의문을 가지지 않고 한 동성애자의 자살로 처리했다면 그냥 보통의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튜링의 죽음에서 이상한 낌새를 챈다. 혹시 이것을 밝히는 것이 이 소설의 재미가 아닐까 하고 기대를 하는 순간이다. 이 기대는 나만의 것이었다.

 

소설은 두 갈래로 진행된다. 하나는 튜링의 과거를 쫓으면서 그의 철학과 이론과 삶을 밝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에 불만이 가득한 코렐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 흔한 스릴러처럼 긴장감을 조성하는 추격전이나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펼쳐지길 기대했다면 그 기대를 접는 것이 좋다. 속도감 있는 액션이나 스파이들의 암약과 음모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 스파이들을 두려워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권력자들만 있을 뿐이다. 냉전 시대의 삶 중 일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진행이 긴장감을 조성하면서 긴박하게 풀어내지 않고 코렐의 시점에서 풀어내다보니 상당히 더디다. 최근 스릴러의 속도감을 예상했다면 약간 지루할 수도 있다.

 

솔직히 튜링이란 인물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최근이다. 에니그마를 깨트린 인물이란 것을 다른 책에서 본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강한 인상을 남겨주지는 않았다. 이 소설을 읽기 전 에니그마와 튜링의 역할이 많은 비중을 차지할 것이란 기대를 했다. 비록 튜링이 처음에 죽는다고 해도 그의 과거를 추적하는 코렐을 통해 2차 대전 당시의 긴박하고 스릴 넘치는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튜링에 대해 그 시대 사람이 알고 있던 것은 얼마 전 내가 알고 있던 것 이상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동성애자라고 놀림을 당할 정도였다. 그가 생각하는 기계를 말할 때는 말도 되지 않는다는 황당해했다. 어떻게 보면 너무 그 시대에 충실해서 다른 음모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이 책에서 2차 대전 당시의 암호 해독을 둘러싼 스파이들의 치열한 경쟁과 음모만을 기대했다면 앞에서 말한대로 빨리 책을 덮어야 한다. 튜링의 죽음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는 젊은 경관 코렐의 맹활약을 기대했다면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에는 그런 긴장감을 조성하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 강철같은 의지나 엄청난 추리력을 가진 주인공도 없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불만을 가지고 자신감이 조금 부족한 주인공이 있을 뿐이다. 엄청난 직관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논리의 모순을 밝혀낸 수학자가 있을 뿐이다. 제목이 암시하는 거대한 혹은 엄청난 방정식이 실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