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맨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6
오리하라 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이번에도 당했다. 첫 에피소드를 읽을 때만 해도 예상한 결말로 이어져 ‘쉬운데’ 하고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작가의 특기인 서술트릭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면서 연속으로 당했다. 예전에는 이런 서술트릭을 그렇게 좋게 보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작가가 단서를 문장과 서술 속에 남겨놓았을지 모르지만 다른 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에게 이런 단서는 아무 의미없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물론 좀더 세심하게 읽고 이상한 부분을 차분하게 연구한다면 이상한 점을 발견해서 작가와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책을 읽기에는 시간도 부족하고, 취향과도 맞지 않고, 재미도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다르겠지만.

 

제목만 보고는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다. 뒤표지를 보면 이름과 나이와 직업 등이 나오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쉽게 파악할 수 없다. 대신에 층간소음, 살인, 절도, 스토킹, 사체유기 등의 단어가 나오면서 각 에피소드의 내용을 알려준다. 물론 이 단어들이 어떤 일이 펼쳐질지 전적으로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읽다보면 빠르게 몰입하면서 어떤 반전이 펼쳐질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어떤 에피소드는 맞추고, 어떤 에피소드는 작가가 판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사실 이런 재미로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것이지만.

 

그랜드맨션. 오래된 아파트다. 이 아파트 옆에 그랜드맨션 2관이 들어선다. 지금 아파트는 4층인데 2관은 10층 건물이다. 이 때문에 일조권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담담하다.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높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이 고령의 주민들도 당연히 하나씩 에피소드를 차지한다. 어떤 에피소드는 고령이기에 가능한 것도 있다. 작가는 이런 사람들을 다양하게 등장시켜 어떤 것은 섬뜩하게, 또 어떤 에피소드는 코믹하거나 코지 미스터리 같이 마무리한다. 이렇게 마무리하게 된 것은 아마도 그랜드맨션 사람들만으로 에피소드를 꾸려나가려는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문화적 차이가 분명히 보이지만 몇몇은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대표적인 것인 층간소음과 보이스피싱이다. 최근 층간소음에 대한 배상판결이 나온 후 주변에서 갑자기 민원이 들어와 배상했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있다. 이 책에서 층간소음은 다르게 흘러가지만 날림으로 지은 집들의 문제는 한일 간에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지금은 조금 뜸해졌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보이스피싱에 당한 사람들 이야기가 뉴스에 심심찮게 나왔다. 물론 요즘도 진화한 보이스피싱에 사람들이 당하고 있다. 한국인의 주민등록번호가 이미 공공재로 변했다고 하는데 이 소설 속 보이스피싱도 정보누출에서 시작한다.

 

작가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서술트릭을 사용하여 곳곳에 함정을 파놓았다. 한순간 방심하다가 잘못 발을 들여놓으면 끝까지 이상함을 느끼면서 작가에게 당하게 된다. 스토킹과 연금사기를 둘러싼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세심하게 읽지 않으면 이상함을 느끼다가 이야기가 끝난다. 특히 두 명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교차하면서 진행할 경우 시간과 공간에 대한 착각의 정도가 더 심해진다. 호의와 선의를 소재로 이렇게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반전이 펼쳐지는 것은 또 다른 재미다.

 

한국의 노령화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점점 빠르게 노령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일본은 이미 노령화가 엄청나게 진행된 상태다. 이 소설 속 무대인 그랜드맨션의 거주민의 반 이상이 노인들이다. 젊은 사람들조차 정규직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이야기가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는다. 노인들이 많은 곳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지금도 노인들이 옥장판이나 건강보조식품 등을 속아서 구매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부러운 것도 있다. 그것은 노인들이 연금 등으로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어느 정도 과장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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