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잘것없어도 추억이니까 - 마음이 기억하는 어린 날의 소중한 일상들
사노 요코 지음, 김영란 옮김 / 넥서스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추억이 뭐라고>의 개정판이다. 추억이란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40대의 그녀가 쓴 에세이인데 읽으면서 시대에 맞지 않다는 느낌을 조금 받았다. 실제 출간된 연도가 1992년이다. 이 에세이는 시간 순으로 이야기가 풀려나오는데 읽으면서 ‘이런 것까지 기억하다니’ 하고 먼저 놀랐다. 나이가 많이 들면 어린 시절 기억이 더 뚜렷해지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 글을 쓸 당시는 그 정도 나이가 아니다. 아니면 그녀의 기억들이 그녀의 작업 연장선에서 떠오른 것일까? 여하튼 이 소소하지만 정확한 기억력은 놀랍다.

 

베이징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어린 시절의 일부를 보낸 후 일본으로 돌아와 성인이 될 때까지 이야기다. 패전국의 이미지가 강하게 드리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이 글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원자폭탄 개발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박수를 쳤다는 점이다.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보다 추억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글들을 읽으면서 날선 느낌에 깜짝 놀란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련한 추억의 분위기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분위기를 냉정하게 끊어내기 때문이다.

 

전쟁 후의 가난한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들 중 하나가 형제자매의 죽음이다. 영양실조와 병으로 죽은 형제자매의 모습을 작가는 있는 그대로 적었다. 이 아픔을 감정을 뒤집듯이 표현하는 대신 그 나이 또래가 느꼈을 법한 감정으로 풀어낸다. 어쩌면 그 시절에는 죽음이 그렇게 낯선 풍경은 아닐지도 모른다. 자기 주변에 있던 사물들을 입속에 넣고 맛을 보는 장면을 보면서 먹을 것 없던 시절의 한 기벽을 떠올린다. 밤에 아이들을 두고 엄마가 강을 건너 영화를 보고 온 뒤 아랫도리가 젖지 않은 것을 보고 작가가 추론하는 장면은 과거의 요코일까? 글 쓰는 당시의 요코일까? 이런 감정들의 시점들이 궁금하다.

 

어린 소녀의 당돌한 짝사랑 이야기는 재밌지만 서늘하다. 학생과 선생 사이를 다룬 글은 한 인간의 감정이 사제지간의 정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고양이를 아주 두려워했던 그녀가 고양이를 소재로 그림책을 그렸다는 사실은 의외이고, 우비 사건은 그녀의 당당함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녀는 당돌함과 오빠의 말 한 마디 없는 것에 더 마음이 쓰인 모양이다. 오빠가 창피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마지막 문장은 예상외의 반전이다. 강렬하게 느낀 감정들이 나온 가끔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달달하고 야한 감정이고, 짝사랑을 깨달은 부끄러움이다. 도둑질한 브로치를 달고 다니지 못한 것은 죄에 대한 공포와 원하는 것을 가진 만족 사이의 줄다리기다. 이런 심적 압박이 나에게 살며시 다가온다.

 

유년기는 악마의 시절이라고 말했지만 악의가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중학교 때 일어난다. 바다에서 그녀의 머리를 계속해서 밀어 넣은 선배의 행동이 그렇다. 엄마와 사이가 틀어진 날들 중 벌어진 식칼 에피소드는 무섭지만 공감할 수 있다. 작가는 결실을 맺지 못한 끊임없는 짝사랑을 했다고 하는데 그 에피소드 중 하나에서 표현된 대사나 감정에 어린 시절 감정을 살짝 돌아보게 된다. 절친한 친구를 만나게 된 도둑질은 어릴 때와 다른데 이 변화가 재밌다. 대중목욕탕 이야기는 얼마 전에 읽은 다른 에세이를 떠올려주었고, 한때 하숙한 숙모 집 귀신 이야기는 서늘한 경험담이다. 자신이 대중의 유행에 적응하지 못한 순간도 보여주는데 이 또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읽으면서 각 제목 옆에 있는 약간 서툰 듯한 그림을 발견했다. 어떻게 보면 초등학생의 그림 같다. 그런데 이 그림이 작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뭐지? 더 읽다 보면 이 그림들이 바뀌는 순간이 있다. 어떤 이야기가 끝날 때 한 장에 이 그림이 나온 다음이다. 그리고 다른 그림이 제목 옆에 나온다. 작은 분류는 없지만 이 경계가 장을 나누는 표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마지막 그림은 그렇지 않은 차이가 있지만.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누구나 삶의 순간들을 정리해서 글로 쓴다면 좋은 에세이를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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