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기의 여행 - 대책 없이 느긋하고 홀가분하게
송은정 지음 / 걷는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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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제목에 끌렸다. 송은정이란 이름은 조금 낯설었다. 작가 소개글을 읽다가 팟캐스트에서 그녀가 방송에 출연한 것을 들은 기억이 났다. 관심도가 더 높아졌다. 결정적인 것은 역시 부제인 ‘대책 없이 느긋하고 홀가분하게’이다. 아마 더 끌린 것은 ‘대책 없이’란 단어일 것이다. 여행을 갈 때 꽉 짜인 일정을 짜서 간 적이 거의 없다. 일정에 여유를 두고 보통 움직인다. 목적지가 정해지면 그곳을 가는 편이지만 도착한 후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또 제각각이다. 이런 변수들이 싫을 때도 있지만 이것이 다녀온 후 기억에 더 많이 남는다.

 

이 에세이는 여행과 일상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화려한 풍경에 대한 예찬이나 놀라운 여행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가 살면서 경험한 사소한 것을 중심으로 풀어낸다. 일본 교토 가이드북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동네 골목길로 마무리된다. 그 사이를 채우는 여행지는 유럽과 남미를 모두 아우른다. 놀랍고 신기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들도 많을 텐데 작가는 그런 부분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조금 심심해 보인다. 그런데 이 심심한 듯한 이야기가 가슴 속에서 작은 꽃망울을 피우면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간결하게 기록한 글들일수록 더 호기심을 자극한다. 특히 아이슬란드 일주 기록은 부럽기만 하다.

 

잘 짠 일정에 맞춰 효율적으로 여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예상한 것과 다른 일이 생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도 재밌다. 물론 이 예상 밖의 일이 짜증과 불안을 동반하는 경우도 많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일일수도 있다. 최대한 불편을 줄이고, 작은 변수들이 만드는 재미를 누린다면 최상의 여행이 된다. 실제 이런 여행을 계속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가끔은 불편함이, 짜증이 동반한 여행이 추억으로 더 길게 남는 경우가 있다. 이 책 속 많은 여행들이 그랬다. 길치이기에 가지는 두려움과 불편함을 조금만 견디고 주변을 돌아보면 꽉 짜인 일정 속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 보인다. 같은 곳을 자주 갈 때 이런 여유는 더욱 필요하다.

 

어떤 특별한 시간 순서대로 쓴 글이 아니다. 지역이 해시태그로 붙어 있지만 무시해도 별 상관이 없다. 해시태그가 붙은 나라나 지역은 이야기 속 배경일 뿐이다. 이 장소들의 시간 순서가 일정하지 않다보니 작가의 근심 걱정이나 그 순간의 삶들이 뒤죽박죽 섞여 나온다. 읽으면서 시간 순으로 정리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글들이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작성되었다면 그 시간만큼의 삶이 글 속에 잘 표현되었고, 생각의 변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을 테다. 여행, 마음, 하루로 이어지는 이야기로는 조금 부족하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일까?

 

느긋하고 홀가분한 여행을 떠나본 게 얼마나 되었을까? 그 시절 여행은 큰 일정만 정해놓고 지루하게 시간을 때운 적도 많다. 차로 무작정 달리기만 한 경우도 있다. 목적지를 가다 중간에 방향을 바꾼 적은 또 몇 번이던가. 그런데 이 여행들이 지금도 나의 머릿속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다. 그 순간의 깨달음이 나의 여행 방식을 조금씩 바꾸었다. 일정을, 볼거리를, 쇼핑을 꽉 채우기보다는 좀 더 빼고 빼서 가볍게 만드는 방식으로 말이다. 게으름은 사진 찍기보다 머릿속에 담기란 변명으로 바뀌지만 확실한 것은 사진 찍지 않은 순간들이 아직까지는 더 많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많은 에피소드 중에 엄마와 함께 일본을 여행한 이야기가 가장 큰 여운은 남긴다. 그것은 아마 그녀에게 내어준 그릇 때문일 것이다. 서투른 여행 가이드에 신경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 엄마와 여행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유니 사막에 대한 평가는 나의 상상을 넘었고, 안산 이야기는 우리 동네 뒷산 이야기로 생각이 이어졌다. 내가 생각만 하고 하지 못한 작은 여행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문득 어릴 적 무작정 골목길을 들어가 돌아다녔던 일이 생각난다. 막히면 돌아 나오고, 힘들게 목적지를 향해 가던 그 어린 시절들. 포기란 단어를 사랑과 연결해서 풀어낸 이야기는 부부관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작지만 소소하고 느긋하지만 그 속에 치열한 삶이 담겨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 치열함은 느긋하고 홀가분하게 보이는 모습 뒤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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