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란 - 오랑캐, 난을 일으키다
김은미 지음 / 채륜서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증이 돋보이는 역사 소설이다. 물론 작가의 상상력은 역사의 가능성을 살짝 열어 펼쳐보인다. 사실 이 가능성에 큰 무게를 두고 싶은 마음은 없다. 포로로 잡힌 한 여인이 경험하는 일들이 그렇게 크게 현실성 있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가능성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일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다만 이 소설 속에서 허임의 딸로 등장하는 윤성의 존재가 너무 큰 것은 시대와 상황에 비춰 너무 로맨스적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너무 유명한 장면이지 않은가.

 

호란이라고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가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생긴 전란이다. 광해군의 외교 감각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반정으로 몰고 간 정치 세력은 굴욕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사대주의가 백성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는 50만 노예란 표현에서 알 수 있다. 그 당시 조선의 인구가 얼마나 되었겠는가. 후금에서 청으로 발전하는 여진족의 발전은 단순히 한 위대한 지도자의 등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 국제 정세와 맞물려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작가는 이 부분을 글 속에서 아주 잘 녹여내었다. 사실 이 부분들을 읽을 때 소설이란 느낌보다 간결한 역사서를 읽은 듯한 느낌이었다.

 

허윤성, 봉림대군, 도르곤, 효장태후 등이 주요인물이다. 이 시대의 분위기를 가장 잘 요약해서 알려주는 인물은 도르곤의 노예로 잡혀온 량량이다. 여진족에서 속환되어도 관노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누가 지배자가 되어도 관계없는 민초의 속마음이다. 실제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을 기득권층의 세뇌일 뿐이다. 물론 지배 민족의 일원이 된다면 다른 것을 더 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리는 것은 역시 백성이다. 역사서에 숫자로만 기록된 바로 그들이다. 전쟁은 이들을 숫자로 기록하고, 평화는 이들의 죽음을 하나의 기록으로 다룬다. 우리에게 평화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다.

 

누루하치, 홍타이지, 도르곤으로 이어지는 세대교체와 청의 명나라 정복 과정을 빠르고 간결하게 그린다. 빠른 시간의 흐름 속에 중요한 역사적 사실만 요약해서 집어넣었다. 이 과정 속에 네 사람들의 관계는 엮이고 꼬인다. 평민인 윤성을 옆에 두고 자신의 정신 질환을 돌보는 도르곤, 윤성의 대찬 모습에 위안을 얻는 봉림대군, 정략결혼으로 황제의 후비가 되었다가 태후까지 올라간 다위얼 등의 관계는 표면적인 로맨스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은근히 그 관계가 스며든다. 이 은근함이 어느 순간 폭발하는데 이것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뭐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의문을 작가의 상상력이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그 당시 동북아 국제 정세를 아주 잘 표현한 것이다. 이 시대를 처음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많은 도움을 줄 것 같다. 청의 도르곤을 주요 인물로 내세운 것은 실제 그가 명을 정복했기 때문이자 죽음에 의혹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도르곤의 어머니가 죽게 된 이유와 그가 전쟁에서 느끼는 중압감을 질병으로 풀어놓고, 이 질병을 치료하는 인물로 초보 침술가 윤성을 등장시킨 것은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이다. 작가의 이력에 한약학과 졸업과 허임에 대한 글을 쓴 것이 보이는데 이것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한때 북벌을 주장한 효종에게 강하게 끌린 적이 있다. 하지만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 주장은 단순한 의지의 표현일 뿐이다. 실제 군대를 키워 청에 도전했다면 강희제 등으로 이어지는 청의 성세기에 조선은 두 번의 호란보다 훨씬 강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불운한 소현 세자의 삶은 이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 나라의 임금과 대제국의 실세에게 구애를 받는 윤성의 존재는 결국 사랑이란 감정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실제 한 여인이 역사의 전면에 나설 기회는 없고, 그 가능성도 없다. 효장 태후처럼 직접 권력과 맞닿아 있다면 다르겠지만. 이전처럼 몇몇 아쉬운 대목은 있지만 한 시대의 역사를 이렇게 재밌고 현실적으로 잘 요약하고 풀어낸 것은 박수를 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