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벚꽃
왕딩궈 지음, 허유영 옮김 / 박하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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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띠지의 광고 문구다. 하루키를 말하며 ‘글을 무기로 싸울 수 있는’이란 표현을 썼다고 한다. 그 내용이 나오는 것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고 하는데 읽은 적이 있지만 이런 문장을 기억하지 못한다. 남는 시간이 있으면 다시 읽으면서 검증을 할 수 있겠지만 예전 같이 잉여롭지 않다. 아쉬운 대목이다. 다시 읽지 못한다는 것과 확인하지 못한다는 두 가지가 겹쳐진 아쉬움이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매력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력이 이 소설 속에 녹아 있다. 그것은 화자가 택한 직업과 그가 경험한 것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한 나라 건설업의 부침을 간략하게 다루면서 그 속에 한 개인의 아픔을 녹여내는 과정은 빠르면서도 깊이가 있다. 빠른 것은 시간이고, 깊이는 그 시간 속에서 화자가 느끼는 감정이다. 그가 느끼는 감정은 우리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 평론가들이 고전적이라고 한 것과 닮아 있다. 상실의 아픔을 견디고, 그 아픔 속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그의 삶은 처음에는 의문으로 시작했다. 그의 아내 추쯔와 뤄이밍은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 하는.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지만 그 예상은 틀렸다.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소설 속 중요 인물 네 명 중 두 사람이 이야기 속에만 등장한다는 것이다. 바로 추쯔와 뤄이밍이다. 이야기는 화자가 뤄이밍의 딸 뤄바이슈에게 대화 속에서 풀려나온다. 바이슈는 왜 그가 손님 없는 카페를 하는지 궁금해 하고, 그가 카페를 연 후 왜 아버지가 자살하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자 한다. 실제로 뤄이밍은 기부도 많이 한 유력 인사다. 마을 사람들은 이 때문에 화자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 바이슈의 이야기에 따르면 엄마가 죽은 후 재혼도 하지 않고 홀로 살았고, 옷은 구김이 없을 정도로 꼿꼿하고 훌륭한 인물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이 바람이 나는 것인데 이것만으로 추쯔의 실종이 설명되지 않는다.

 

외딴 바닷가 카페에서 화자는 아내가 오길 기다린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기약 없고 가능성도 거의 없다. 바이슈와의 대화가 없다면 그의 삶과 슈쯔가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랑은 요즘 거의 없다. 이들의 만남은 특별하지도 않다. 가난한 연인들은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그들의 삶에 큰 변화로 다가온 것은 대지진이다. 추쯔에게 이것은 이전 사고의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이런 아내를 돌보기 위한 그의 노력은 처절하다. 가난은 단숨에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이 생겼을 때 작은 것을 사는 행복은 또 다른 것을 사지 못하는 아쉬움과 겹쳐진다. 작은 행복이 또 다른 행운을 불러왔지만 실제로 이것은 불행의 시발점이다. 수동 카메라의 당첨이 뤄이밍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인품을 가진 뤄이밍은 추쯔와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만나는 그는 화자의 바람을 들어주는 착한 인물이다. 하지만 불행의 연속선상에서 그가 보여준 행동은 악의로 가득하다. 화자만의 착각이라고 한다면 그의 자살 시도가 설명되지 않는다. 열심히 일하고 사랑하는 아내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젊은이에게 사회의 변화는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추쯔가 직장에서 짤렸을 때도, 화자가 회장의 심복으로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를 담당했을 때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가진 자들의 허세와 욕망은 회장의 행동으로 잘 표현된다. 가벼운 욕망의 배출로 매춘을 선택한 회장과 그를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하는 화자의 대비는 삶의 부조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동시에 절망에 빠진 그의 선택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아픔은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적의 벚꽃. 이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빨간 벚꽃을 떠올렸다. 그런데 아니다. 그 적은 원수를 의미한다. 이 벚꽃 이야기는 마지막에 가면 나온다. 그 벚꽃이 의미하는 바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풀려나오는 이야기는 한 사람의 삶이자 한 시대의 풍경이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짧았던 행복한 시절의 기억은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같다. 현실에 깊이 뿌리 내리지 않은 삶은 외부 바람에 너무 쉽게 흩어진다. 화자와 추쯔의 삶을 보면서 우리 시대의 청춘을 떠올린다. 그리고 화자의 열정과 다시 없을 사랑을 생각한다. 그가 뤄이밍의 벚꽃 이야기를 듣고 떠올린 미소를 생각한다. 그의 떠남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아직도 계속된다. 좋은 대만 작가 한 명을 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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