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등록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7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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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티나 데이터>의 새로운 번역본이다. 같은 번역자가 출판사를 달리해서 개정판을 내는 것을 자주 보지만 이처럼 다른 번역자가 새롭게 번역하는 것은 흔치 않다. 물론 고전으로 넘어가면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출간된 것이 몇 년 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아주 낯설다. 인터넷 서점 미리보기로 첫 쪽을 비교해보니 두 번역가의 문장이 다른 곳들이 눈에 들어온다. 원문과 비교해서 읽는다고 해도 잘 모르니 어느 쪽이 더 나은 번역인가 하는 것은 넘어가자. 이 부분은 원서 능력자들에게 맡기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목의 경우는 이전 출간본이 원서를 따랐다면 이번에는 책 내용을 따라했다. 이것도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갈릴 것이다. 다만 이전 제목을 아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번 책 제목이 조금 낯설다.

 

가까운 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이번에는 DNA수사가 소재다. 현재 많은 국가에서 과학 수사의 한 방법으로 DNA수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DNA정보를 한 곳으로 모으지는 않는다. 정보가 한 곳으로 모이면 이 정보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행정 관료들이 원하는 일이다. 한국 같이 지문을 등록하는 나라가 거의 없음을 감안하고, 지문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DNA를 한 곳에 모은다면 어떻게 될까? 소설 속에서는 범죄 예방을 내세우고 있지만 현실은 행정 편의주의다. 이 때문에 범죄가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개인의 정보가 한곳에 모이면 그만큼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작가는 이런 부분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지는 않는다. 늘 이 부분은 아쉽다.

 

DNA를 통해 범인의 몽타주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면 경찰의 일을 더 쉬워진다.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이런 DNA 수사 시스템을 반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정보들을 한 곳으로 모은다면 어떨까? 한국 지문 등록처럼. 그리고 이 정보를 특정한 세력이 자신들 마음대로 만질 수 있다면? 완벽하게 모든 국민의 DNA가 등록되지 않았다면? 시스템의 해킹 가능성은? 간단해 보이는 시스템의 이면에는 많은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당연히 이런 문제점들을 차분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로 빠지면 장광설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너무 간단하다면 이야기 전체의 힘이 많이 부족해진다. 이 소설의 약점이다.

 

DNA 프로파일링이란 이름을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범인이 DNA검사를 할 수 있는 증거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발적인 범죄들의 검거율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스릴러 등에 나오는 연쇄살인범들은 이런 증거를 남겨두지 않는다. 혹시 남겨두었다고 해도 등록이 되어 있지 않으면 소용없다. 작가는 유전자의 유사성을 통해 등록된 가족들로 범위를 축소하고, 프로파일링된 몽타주로 범인을 잡는다는 설정을 보여준다. 아마 이렇게 된다면 많은 범죄들이 초기에 해결될 것이다. 아사마 형사가 경찰이 심부름꾼처럼 느낀 것도 이 때문이다. 발로 뛰는 형사가 거의 사라지고, 프로파일링된 정보에 따라 잡기만 할 것이다.

 

DNA검사란 설정에 한 가지를 더했다. 바로 이중인격이다. 주인공 가구라 연구원은 이중인격자다. 그의 또 다른 인격은 류다. 대단한 도예가였던 아버지가 자신의 작품과 프로그램으로 만든 작품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살한 순간 다른 인격이 생겼다. 여기서 작가는 과학과 인간의 대립구도를 만든다. 가구라가 유전자에 의해 인간의 성격 등이 결정된다고 믿는 반면 류는 화가처럼 그림을 그린다. 이런 경우 가구라와 류의 인격이 번갈아 등장해서 상황을 꼬고, 내적 갈등이 깊어지는 설정으로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뻔한 길 대신 더 간결하고 속도감 있는 진행으로 이어간다. 류의 존재를 오랫동안 숨겨놓는 방식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DNA프로파일링 시스템을 만든 천재소녀와 그 오빠가 죽고, 그들이 만든 프로그램이 있을 것이란 설정에서 시작한다. 가구라의 모발 하나가 현장에 떨어져 있어 프로파일링 시스템에서 그를 발견한다. 가구라는 무죄를 말하면서 다테시나 남매가 남긴 단서를 쫓고, 이런 그를 경찰들이 뒤쫓는다. 일본계 미국인 리사의 도움으로 극적 순간에 탈출한다. 이 남매가 작업한 숨겨진 별장으로 가지만 단서는 보이지 않고, 경찰의 수사망만 좁혀진다. 일본 경찰청과 경시청의 대립 속에 아사마 형사는 단서를 잡으려고 한다. 여기에 가구라의 환영이 분명한 스즈란이 같이 동행한다. 도망치고, 쫓는 과정 속에서 그 어떤 정보도 발견하지 못한 연쇄살인범의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NF13이 의미하는 바가 드러난다. 세부적인 아쉬움 속에서도 속도감과 재미는 어느 정도 보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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