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안는 것
오야마 준코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가끔 나의 저질 기억력과 오독이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을 줄 때가 있다. 이번이 그런 경우다. 처음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가의 <하루 100엔 보관가계>를 읽었었다. 그것도 상당히 재미있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감독이 이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 소설의 작가라고 잘못 읽었다. 급한 성격과 인터넷 서점의 책소개를 대충 읽는 버릇이 만든 실수들이다. 자주 하는 실수다. 이런 실수들이 있었지만 소설은 잘 읽히고 잔잔한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머릿속에서는 얼마 전에 읽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양이>와 비교하고 있었다.

 

첫 이야기를 읽을 때는 고양이의 시선으로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줄 알았다. 자신이 인간인 줄 아는 고양이 요시오가 주인공으로 말이다. 그런데 바로 사오리 이야기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야기는 옴니버스 식으로 꾸며져 있고,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시간의 흐름 순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아 잠시 혼란이 있기도 했지만 부드럽게 이어지는 이야기라 큰 불편함이나 거북함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각각의 사연을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어 재미있었다. 대표적으로 사오리가 왜 고양이에게 요시오란 이름을 붙였는지, 그 연모의 대상이었던 요시오를 보고 오해했던 장면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등 세심하게 이야기를 짜놓았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상황을 판단하고 오해하는지 잘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고양이가 각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이 고양이와 연결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같이 어우러진다. 요시오와 사오리나 키이로와 고흐나 르누아르 같은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소설의 제목인 ‘고양이를 안는 것’은 키이로와 고흐의 이야기에서 나온다. “고양이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안는 것”이라는 고흐의 말이다. 미완성된 그림만 그리던 고흐가 하나의 그림을 완성했지만 예상하지 비극을 맞이하는 장면은 삶의 아이러니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이야기 또한 뒷이야기에서 새로운 상황 설명이 덧붙여진다. 깔끔한 정리다. 그래도 각자의 감정에 남겨진 여운은 그대로다.

 

도쿄 변두리 아오메 강의 네코스테 다리는 고양이들이 모이는 곳이다. 네코스테란 단어는 고양이를 버린다는 뜻이다. 이것은 강가의 창고가 신식으로 바뀌면서 쥐가 쉽게 구멍을 내지 못하면서 고양이가 필요 없어졌고, 부가 쌓였다는 의미다. 시대의 변화와 발전이 만들어낸 풍경과 현상이다. 이후 고양이들은 이 네코스테 다리 근처에 모여 살아간다. 이 다리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바로 세 명의 남녀가 고양이들에게 물과 사료를 준다는 것이다. 최소한 이곳에 오면 굶주릴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 고양이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한다. 재밌는 것은 각 고양이의 기억이 달라 작은 에피소드를 만든다는 것 정도랄까.

 

고양이를 중심에 두고 다양한 인물들이 나와 짧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을 한꺼번에 다룬 이야기가 크리스마스인데 따뜻함과 안타까움이 조용히 뒤섞인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희망이 깔려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도 알려준다. 그리고 고양이의 이름을 둘러싼 이야기에서 순간 울컥했다. 아이가 서투르게 발음한 이름에 부모가 숨을 죽이는 대목이다. 단순히 이 부분만 읽었다면 그냥 그랬겠지만 앞에서 쌓여온 감정이 이때 폭발한 것이다. 여기에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현실도 덧붙여졌다. 화려하지도 감정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감성을 건드리지 않지만 책을 덮은 뒤 충분히 그 여운과 감동을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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