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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유
이향규 지음 / 창비교육 / 2018년 2월
평점 :
#후아유#이항규#창비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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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성과 선긋기
성숙과 경직성, 혼돈을 이어가는 시대에 정체감의 확립이란 비단 청소년들만이 겪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나날이 발전해가는 기술과 그에 부응하는 새로운 문화, 신조어, 무역과 여행, 이민의 증가로 국가간 흐려진 경계, 그밖의 것들. 굳건히 정립해 놓았다고 믿었던 정체성 조차 흔들릴 지경인데 어찌 단단한 자아정체성이 있겠는가.
'우리'라는 이름표 붙이기를 좋아하는 사회, 더불어 규정하기를 좋아하는 사회는 단일문화와 다문화 가정 내지는 순혈과 비순혈을 가름하려 한다. 정체성 규정을 통해 구획을 지어, 정책적 지원 혹은 표집의 용이성을 위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들을 결정적 순간에 타자화시키지 않기 위해, 한 사람을 온전히 그 개인으로 보았는지 끊임없이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데, 실제는 늘 그렇듯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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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어와 인터뷰이, 동등한 인격체와 대상화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연구서를 쓰기에 적합한, 혹은 예상되는 결과를 보기 위한 질문과 선택지를 만들고, 마음과 상황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놓은 범위 안에서 표시하라고 하는 폭력. 통계의 수월함을 위해 규격화할 수 밖에 없다는 합리화. 이 모든 것들이 엮여 불편함을 만들어낸다. 올 한 해만해도 서너편의 보고서를 쓴답시고 기관 관계자, 다문화가정 구성원, 그 외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선사했던가. 나의 무지가, 배려 없음이 이렇게 드러나고야 만다.
"나는 이 설문지를 하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대상화'된다는 게 이런거구나. 한국사회에서 늘 양지에, 주류로 살았던 나는 연구하는 사람이었지, 연구 '대상'이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말하는 사람이었고, 가르치는 사람이었고, 설명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생태를 안다. 그들의 생태 안에서, 그들의 논리에 따라서, 그들이 보고 싶은 것을 먼저 결정하고 만든 설문지. 그 설문지가 지지고 볶으며 사는 삶의 깊이와 역동을 얼마나 잘 보여줄 수 있을까."(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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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리멸렬함
내가 자란 문화에서 자연스럽게 여기는 모든 것이 상대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배려와 이해.선의를 가장한 이런 행위를 줄곧 해오며 속으로는 '내가 이 정도 물러서니, 너도 어련히 알아서 해.'라는 말을 얼마나 곱씹었던가. 내 감정이나 생각은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가늠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을, 내가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서로 다른 가치에 대한 합의의 과정에 이르러야 평안함을, 오늘도 머리로만 받아들이고만 만다. '늘 그렇지'라 혼잣말하며.
"가족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아니라면 작은 차이는 그냥 받아들인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지라도 내가 마음이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그 정도이다."(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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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2를 앞두고
여성으로서, 아이를 둔 엄마로서, 결혼이주민으로서 그 밖의 많은 수식어를 걷어내도 그저 한 명의 인간이기에, 그녀의 이야기는 절절한 공감을 자아낸다. 학력과 경력, 사회적 관계망이 무용지물한 공간에서 발을 내딛는 건 막연함을 넘어선 공포감이 압도적일 것이다. (물론 얼마 안있어 해외에 나가 살아야 할 나의 두려움이 더 크게 작용해 그리 느꼈을 것이다.) 내가 지워지는 수많은 시간 속에서 흐려지는 자신을 붙잡고, 침묵과 낯선 언어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발화란 알을 깨는 것과 같은 고통일지 모른다. 동화나 통합보다는 비주류와 이방인으로서의 삶으로 지칭될까 매 순간 발을 구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를 나라는 사람의 캐릭터를 공고히 하는 시간으로 깨닫게 된다면, 숨을 고르고 나를 다져, 매력적인 시즌 2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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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이라는 그 애매한 시간은 엄청 무거워서 쪼개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다. 쪼개야만 내 삶도 손에 잡히고 그래야 지금 뭘 해야 하는지도 알 것 같다. 그래서 이제 1년씩만 살려고 한다. 그러다가 그 1년이 모여서 평생이 되면 좋은 거고 아니어도 좋은 거고."(1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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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에게 민감한 교육 환경은 사실 모든 학생에게 좋은 교육 환경이다. 그렇지 않은 교육 환경, 최종 승자 몇명만 보상받는 교육환경은 약자에게 불리한 것을 넘어서서 대부분의 아이들을 교육적 약자로 만들어 낸다. 더 비극적인 일은 우리 자신이, 그것 말고 다른 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 자신이, 그 시스템을 가장 아래에서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닌 줄 알면서도 말이다.(142-143p)
각자 너무 바쁘면 관계에서 '관심'은 사라지고, '관리'만 남는다. (1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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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우린 바구니를 안고 시소를 타고 있는 것 같아. 내 바구니가 무거워서 엄마한테 그 안에 잇는 물건을 던지면 엄마게 무거워지고, 그러면 또 엄마는 나한테 그걸 던져서 내 게 무거워지고......"(163p)
"We wanted a labour force but human beings came."(17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