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는 망각과 회복의 달인이다. 이혼 후 떨어져 사는 엄마가 만나자고 하면 별 고민 없이 흔쾌히 수락한다. 왜냐하면 보고 싶으니까. 만나면 반가우니까. 옥주는 그런 동주가 맘에 들지 않는다.
- P86

이것이 동주의 마음자리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흘려보내는 것.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보고 싶으면 일단 만나러 가는 것. 옥주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내 마음은 동주와 함께 홀가분해졌다가 옥주와 함께 축축해지고 서글퍼진다. 
- P87

"그러니까 쿨한 걸 하고 싶다는 거지?"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는 채로 대답한다.
"그런 것 같아."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진 나에게, 찬희가 당연한 사실이라는 듯이 말한다.
"누나는 따뜻한 사람이잖아."
나는 바보처럼 그 자리에 멈추고 찬희는 담담하게 일러준다.
"따뜻한 노래 만들어. 난 따뜻한 게 더 멋있더라, 이제는."
쿨한 것은 웬만큼 다 해본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
- P88

나에게 다린이는 즐겁고 터무니없는 이야기 중 하나다. 누군가가 너무 탁월해서 좋은 이야기 말고, 탁월하지 않아도 너무 좋은 이야기 말이다. 
- P97

함께 헤엄쳤던 바다에서 우리는 바닷물의 색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는커녕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물색이라는 건 너무 많고 시시각각 변하는 무엇이었다. 파도와 파도사이마다 시 비슷한 게 쓰여지는 것 같아서 어지러웠는데 어차피 금세 다 부서지니까 아무래도 좋았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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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는 누구나 자기가 맡은 일을 했으니,
누구라도 칭찬이나 동정을 얻자고 그 일들에 대해 말할 필요따위는 없었다. 언제나 늘 똑같은 긴 여름이었고, 모든 것이각자의 속도로 자랐다. 
- P33

할머니는 그림을 압정으로 벽에 박고 말했다.
"독창적이네. 이제 애를 좀 내버려 두자.
"
"얘 그림 좀 그릴 줄 아는 거야?" 소피아가 어둡게 물었다.
"아니." 할머니가 대답했다. "아니라고 봐. 아마 뭐 하나 제대로 해내면 다시는 그렇게 못 하는 그런 부류인 거 같아."
- P38

"그게 뭔데." 아이가 삐져서 물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거지."
"존중하는 건 또 뭐고!" 소피아가 외치며 발을 굴렀다.
"다른 사람이 믿고 싶은 걸 믿게 두는 거지!" 할머니가 외쳤다. "나는 네가 사탄을 믿게 두고 너는 나를 내버려 두는 거야."
"욕하네." 소피아가 속삭였다.
- P42

저택은 지나치게 새 집으로 보였다. 홍수 따위는 겪은 적도 없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얼른 물잔을 들어 저택에 부었다. 할머니가 재떨이에 있는 담뱃재를 손에 털고 돔과 벽에 문지르는 내내 소피아는 문에 매달려서 들여보내 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문을 열고 말했다. "운이 좋았지!" - P50

할머니는 발로 웅덩이 속의 물을 건드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옷핀이었나?" 소피아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어떤 날에는 잘 모르겠어. 키에 앉은 사람이 누구였어?"
"물론 네 할아버지지." 할머니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결혼했던 남자."
"할머니 결혼했어?" 소피아가 깜짝 놀라 외쳤다.
"
- P56

소피아는 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조용히 꾸준히, 한 단씩 차근차근.
‘얼어 죽을.‘ 할머니가 생각했다. ‘지긋지긋한 녀석 같으니라고. 하지만 이건 다 애한테 재밌는 일이라면 뭐든지 못하게 하니까 이렇게 된 거지. 나이 든 인간들이.‘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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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채로 낸 오만 원은 실제로 한 번도본 적 없는 할머니에 대한 판타지를 제공받은 비용 같았습니다.
- P63

병찬씨는 믿기지 않아도 별수 없는 사실이라는 듯 이야기를 마치셨어요. 이 얼마나 마르께스적인 화법입니까. 저는마술적 리얼리즘 문학을 읽듯 병찬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점프를 하다가 하늘로 승천해버린다거나 화산 폭발 같은 숨소리를 낸다거나 웃음소리로 집 안의 창문을 깨뜨리는 소설 《백년의 고독> 속 사람들 못지않게 순남씨는 환상적입니다. 
- P66

마르께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그 실수 때문에 어떤 고독이거듭되죠. 후대의 자손들도 선조와 비슷한 고독을 겪고요.
그러나 저의 판타지에서는 고독보다 재주가 더욱 커다랗게 반복됩니다. 마술 같은 재주와 귀신같은 솜씨로 우리는 몇대를 횡단하며 연결됩니다. 
- P71

그 컵이 어디 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작가가 되고 내 동생은 음악가가 되었는데, 그것은 엄마가 더욱더 엄마가 되고 아빠가 더욱더 아빠가 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 P76

유일한 것이 너무 드문 서울로, 뭐가 최고인지 결코 알 수 없는 도시로 돌아갈 시간이다. 안녕을 바라는 사람들을 향해 간다. 더 이상 젊지 않은 모부에게, 헤어질 연인에게, 새롭게 사랑하게 될 연인에게. 우리 앞엔 아름답고 험준한 세월의강이 펼쳐져 있다. 그 강을 오래오래 안녕히 건너가기를 바라는 봄이었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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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스승에게서 편지가 왔다.
이렇게 끝나는 편지였다.
"슬아, 생이란 아흔아홉 겹 꿈의 한 꿈이니부디 그 꿈에서 무심히 찬연하기를."

할머니는 설레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작가님이 꼭 결혼하면 좋겠어요. 애도 낳고요. 그럼 또 얼마나 삶이 달라지겠어요? 그럼 또 얼마나 이야기가 생겨나겠어요? 나는요. 계속 달라지는 작가님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듣고 싶어요."
- P28

나는 무대에서서 수십 갈래로 뻗어나가는 내 인생을 본다. 그중 살아볼 수 있는 건 하나의 생뿐이다.
- P29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눈물 대신 하품이 났다. 친구의 사정은 슬펐지만...... 슬픔도 지루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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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어진 모양새는 언어표현력을 더욱 높였다. 농밀해진 표현력은 연상에 깊이더했다. 한 젊은이의 견습 시절 분위기를 전하는 묘사, 사회 변동기의 의료업, 그리고 잘못을 지적하기만 할 뿐 칭찬에는 인색한 스승에 대한 양가감정이 켜켜이 쌓여 마침내 하나의 드라마가 짜였다. 이러한 짜임새를 결texture 이라고 한다. 나를 흔들어놓은 것은, 그리고 추억의 대상인 고인뿐만 아니라 추억을 되짚는 자의 존재감까지 훨씬 더 생생히, 아주 즉각적으로느낄 수 있게 해준 것은 바로 이 결이었다. 
- P8

덕분에 나는 말해지지 않은 것, 결코 말로 할 수 없는 것까지 전부 알아차렸다. 인간관계의 따스하고도 고통스러운 불완전함을 통감했다. 
- P9

아무리 어렵다 해도 에세이나 회고록을 쓸 때는 그런 페르소나를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 이는 조명 도구나 마찬가지다. 이게 없으면, 주제도 이야기도 있을 수 없다. 회고록이나 에세이를 쓰는 작가는 그런 페르소나를 빚어내기 위해 소설가나 시인처럼 자기 성찰이라는 견습 기간을 거치며, 왜 말하는가,누가 말하는가를 동시에 알아내야 하는 이중고를 겪는다.
- P12

우리의 연사가 갈팡질팡하며 찾아 헤매는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복잡한 감정. 먼저, 그런 감정이 있음을 이해한다. 다음엔 그 감정을 시인한다. 그리고 이를 통로 삼아 경험으로 들어간다. 그러고 나면 그 감정이 곧 경험임을 깨닫는다. 이제 그는 쓰기 시작한다.
익숙한 것을 꿰뚫고 들어가기란 당연한 듯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힘들고 또 힘든 일이다.
- P13

 내 책은 신기하게도 이집트자체를 흉내 낸다. 그것이 강점이자 한계이다.
- P17

『존경하는 어머니 Mommie Dearest "처럼 서술자는 아무잘못 없는 사람, 서술 대상은 괴물로 묘사되는 회고록은 상황이 정지 상태로 머물러 있기에 실패작이 된다. 드라마가 깊어지려면, 괴물의 외로움과 무고한 자의 교활함이 보여야 한다.
무엇보다, 서술자가 단순하지 않아야 대상에게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다.

- P43

결국, 서술자가 고백이 아닌 이런 종류의 자기 연구, 즉 움직임과 목적과 극적 긴장을안겨줄 자기 연구에 몰두할 때 비로소 작품이 구축된다. 여기서 필요한 요소는 적나라한 자기 폭로이다. 자신이 상황이 일조한 부분-즉 자신의 두려움이나 비겁함이나 자기기만을이해해야 역동성이 만들어진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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