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 기키 기린은 늘 좋은 모습만 보이는 인간형이 아니다.

 온화하고 따뜻한 미소뒤에 장난기가 숨어있고 그 장난기에 악의가 가득할 때도 있다.

위악을 떨거나 의뭉스럽게 아닌 척 착한 척 하는 얼굴로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맨얼굴을 버림으로 더 뜨악하고 섬뜻한 무언가를 드러낼 때가 있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무심하게 레이스를 뜨면서  장남의 기일마다 찾아오는 구출된 아이를 계속 찾아오게 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 그 아이도 충분히 죄책감을 맛봐야 한다는 말과 겨우 일년에 한번 여기 오는게 뭐가 힘들다고 그러냐는 말을 태연하게 하는 엄마의 모습은 앞에서 계속 가족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시중들며 챙기던 엄마와는 다른 모습이다.

아니 똑같이 온화한 표정을 짓고 정성스럽게 레이스를 뜨는 그 모습 그대로 본심을 드러내는 말을 감추지 않고 뱉어내버리는 모습이 더 대비된다.

물론 앞 장면에서 남편 흉보거나 아닌 척 재혼한 며느리에게 직언을 해버리거나 아들에게 은근히 걱정하는 모습등등은 그저 푸근하고 모든 걸 받아주는 엄마가 아니라 속물적이고 내 자식이 우선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아프게 해서라도 내가 위안을 받아야 겠다는 그 말이 가장 냉정하다.

그러나 그 말을 하고도 태연히 다정하게 손자에게 인사를 하고 잠자리를 챙기고 떠나는 아들 내외를 배웅하고 아쉬워한다.

 

<태풍이 지나가고>에서의 엄마도 그렇다.

아들이 기왕이면 출세해서 엄마에게 척척 용돈을 주고 위신을 세워주고 어디에서든 자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을 온몸으로 드러낸다.

전혀 아니라고 말을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나 행동에는 아쉬움 속상함 그래서 은연중에 표현해버리는 태도들이 담겨있다.

여기에서 자식들 역시 그런 엄마가 익숙해서 아무렇지 않게 받아 넘긴다.

속으로 쌓이는 상처나 앙금이야 없지 않겠지만 우리 엄마는 늘 저래왔던 사람... 이라는 태도가 아들에서도 딸에서도 보인다. 어쩌면 그래서 더 편하게 엄마를 대하고 이것저것 부탁하고 심지어 몰래 집안을 뒤져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을지도 모른다.

엄마도 사람이고 단점을 드러내고 욕심과 속물근성을 드러내는 인물이라 자식들도 그냥 그런게 당연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이런 가족사이에 늘 예의를 차리고 긴장하고 있는 건 이혼한 며느리다. 어쩔 수 없이 태풍때문에 전 시어머니 집에서 하루를 묶어야 하는 상황이 불편하지만 그동안 익숙했던 관계의 사람들이고 이제 알만큼 아는 터라 보아넘기고 적당히 무시하고 맞장구쳐주며 하루를 넘기려고 한다.

그런 며느리의 속내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어쨌든 이번 기회에 아들 며느리가 합쳐지면 좋겠고 덜 떨어지고 어딘가 아픈 손가락인 아들을 며느리가 책임져 주면 좋겠고 그 핑계김에 손자를 자주 보면 좋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남들 보기에도 이혼하고 말도 안되는 사립탐정노릇이나 하는 것보다 번듯한 가족이 있고 뭐리도 하고 있는게 더 보이기도 덜 창피스럽다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극속의 기키 기린 역시 그런 마음을 손톰 만큼도 숨길 생각이 없다.

노골적으로 더 큰집으로 이사가고 싶다고 하고 누구나 아들은 용돈을 얼마를 주고 하는 말을 아들앞에서 하니까

 

<앙>에서는 그래도 수더분하고 겸손하다.

여기서는 누구의 엄마도 누구의 시어머니도 아닌 그저 슬픈 과거를 가진 한 개인으로 나온다.

그럼에도 그 역할을 기키 키린이 함으로써 인물은 더 풍성해진다.

아픔은 있고 사람들에게 소외받았던 인물이지만 유머도 있고 직설적인 화법도 여전히 구사하며 더 다양한 인물이 된다.

그저 참고 인내하는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라 눙치는 유머도 할 줄 알고 사람 속을 모르는 척 고집을 피우기도 하고 팥들을 아기처럼 보살피고 말도 거는 귀여운 할머니가 되기도 한다.

 

<어느 가족>에서 기키 기린은 너무 늙어버려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틀니를 빼고 연기해서 더 나이 들어 보였고 말년에 암으로 고생했다고 하니 그 여파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을 가족으로 삼고 낡고 오래된 집에서 다 함께 생활하는 할머니

돌아가시 할아버지가 남긴 연금을 타고 다른 가족이 다양한 방법으로 벌어오는 돈을 같이 쓰고 보살핌을 받고 집에 들어온 누구든 내치지 않는다.

영화 중반에 보면 아마 바람을 피워 재혼한 할아버지의 둘째 부인 자식에게까지 찾아가 그야 말로 말 그대로 삥을 뜯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죽은 영감의 기일이라는 이유로 남의 집에 가서 염치 없이 향을 올리고 대접하는 케잌을 야무지게 모두 먹어치우는 모습 그리고 배웅하며 내미는 돈봉투까지 사양없이 받아 챙기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다.

그냥 그렇게 늘 해왔던 사람처럼 모든 것이 물흐르듯 하다.

 

이 배우를 처음 어느 영화에서 봤는지 모르겠다.

아 <도쿄 타워>에서도 생활력 강하고 자식을 친구처럼 대하는 그래서 오히려 자식이 더 어려워하는 어머니로 나온다.

늘 보면 인자해서 뭐든 양보하고 희생할 것 처럼 생긴 할머니가 은근히 장난기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누군가를 골리고 나서 짐짓 시치미를 뗀다. 누군가에게 들키면 아닌 척 하거나 쉿 하며 함께 공범으로 만들어 버리는 모습

그런데 그 모습이 밉지가 않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 같은 일들, 차마 남의 눈 때문에 체면때문에 못한 일들을 태연하게 해치우며 어깨를 으쓱해버리는 모습이 의외로 후련하고 시원하다.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연기를 볼 수가 없다.

 

느긋한 하루 <어느 가족>을 보면서  영화의 내용에도 빠져 들었지만

이제 그렇게 익숙하면서도 새롭고 은근 유쾌하고 따뜻한 그 인물을 만나지 못한다는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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