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니스 - 거대 기업에 지배당하는 세계
팀 우 지음, 조은경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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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이슈 중 하나는 '차이'일 것이다.

지식의 차이, 재산의 차이, 생각의 차이.
이런 '차이'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사회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도 미쳤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차이를 넘어서게 되면 긍정적 영향보다 부정적 영향이 더 크다.

경제적 관점에서 '차이'를 만들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독점'이다.
이익을 늘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사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독점 판매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소비자에게 불리하다.
이런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는 기업의 연구 개발에 대한 이익을 보장하면서 독점을 금지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이 책 '빅니스'는 바로 그 독과점을 금지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표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책의 원제는 'The curse of Bigness'이다.
직역하자면 '거대함의 저주'라고 할 수 있다.
특정 분야에서 독점은 기업의 규모를 키운다.
이렇게 커진 기업은 독점 한계에 다다르면 몇 개의 회사로 분사된다.
이것을 저자는 거대함의 저주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주제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독점'이다.
우리가 왜 '독점'을 경계해야 하는지, 무엇이 '독점'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국가는 독점을 경계하기 위해 노력하고, 기업은 최대한 독점의 이익을 누리려고 노력한다.
나라별로 독점을 대하는 태도도 이 책을 보는 흥미로운 요소이다.

핸드는 '거대 규모의 기업 통합은 그것이 어떤 경제적 결과를 가져오든 상관없이 내재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믿음'을 전제로 했다.
그는 '자본의 엄청난 집중과 집적 앞에 무력해질 수 밖에 없는 개인들 때문에 이와 같은 집중 현상을 종식해야 한다는 욕구'가 동기부여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미국 최초의 독점 기업 해체 결정문을 작성한 러니드 핸드의 말이다.
최초의 반독점 기업의 영예(?)는 알루미늄 기업인 알코아가 가져갔다.

'간접적이라도 그것이 미치는 사회적, 도덕적 효과 때문에, 관계된 대다수가 반드시 소수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시스템보다 개인 각자의 기술과 개성에 따라 성공이 판가름나는 소규모 생산자 시스템을 더 선호할 수 있다.'

소수의 대량생산보다는 다수의 소량생산이 사회적으로 파급되는 효과가 덜하다.
국가와 같은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사회적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선호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특정 기업만 가지고 있는 특혜는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IBM에 가한 공격으로 얻은 가장 확실한 효과는 독립 소프트웨어 산업이 부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가치가 1조 6,000억 달러이고 250만명의 고용 창출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었다.

IBM의 독점을 금지함으로써 소프트웨어 산업이 발달했다.
당시의 상황으로 지금의 소프트웨어 산업의 가치를 따지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양한 소프트웨어가 나올 수 있는 배경이었다.

강력한 자에게 도전하고, 기업과 시장구조가 얻은 이득을 새로운 산업과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내는 방향으로 변환시키는 것.
이것이 법이 최적의 역할을 할 때의 모습이다.

시장에 대한 법의 역할을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법은 이처럼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는가?
이 글을 보면서 많이 아쉬웠고, 또 아쉬웠다.
언제쯤 이런 법다운 법을 볼 수 있을까.

얼마 전 구글의 모든 서비스가 중단되는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어떤 회사는 본의아니게 모든 업무를 중단하기도 했다.
독점적인 서비스를 하고 있기에 벌어진 일이였다.

독점을 하려는 기업, 그것을 막으려는 국가.
이 둘의 전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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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할 일은 인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뿐이다 - 주광첸 산문집
주광첸 지음, 이에스더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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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할 일은 인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뿐이다.'
책 제목이 너무 멋지다.
미학자의 책다운 제목이다.


책의 구성이 특이하다.
보통 인상적인 문구는 책의 마지막에 정리처럼 보여주는데, 이 책은 제일 앞부분에 가장 아름다움 문장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장들을 보면서 '좋은 글이네'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리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본문에서 만났을 때 이전에 본 느낌이 살아나면서 감동이 더 커진 것 같다.
영화는 예고를 보고 본편을 보면 재미가 덜하지만, 글은 반대인 것 같다.
전후 맥락을 이해하고 보는 문장은 더욱 깊은 맛을 내는 것 같다.

이 책은 '현대 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주광첸의 산문 중에서 34개를 모아놓았다.
우리의 인생, 일상을 미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어떨까?
미학자의 글이라고 하니 문단 하나, 문장 하나를 천천히 곱씹어 보게 된다.
보통의 일상이 이토록 아름답고 멋진 삶이였나 싶을 정도로 행복한 기분을 들게 만든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부족함이 있기에 이것을 메울 수 있다는 희망과 기회가 존재하고, 또 다른 세상을 상상할 여지가 생긴다.
세상은 부족함이 있어서 가능성이 커지는 공간이다.

'부족함'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무한한 장점의 영역으로 확대시켜 버렸다.
스티븐 잡스의 'Stay hungry. Stay foolish'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캔버스 전체가 꽉 채워진 그림을 좋아했는데, 요즘은 여백이 많은 동양화 같은 그림을 보면 편안해진다.
'여백'을 '부족함'이라 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맥릭이라고 본다.
여백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지 못한 것을 그리고, 상상할 수 있어서 좋다.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두 가지가 될 수 있다.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일은 애쓰며 정복하고, 도저히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일은 잠시 벗어나 힘을 비축했다가 다른 일에 쏟아붓는 것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란 말이 신성시 되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이런 문구를 외치는 곳이 많다.
분명 필요하지만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면, '할 수 없는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유한하다.
유한하기에 효율성을 고려해야 한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효율적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과감히 포기해라.
혼자 나무를 켜고, 벽돌을 쌓고, 기와를 올리면서 집을 지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그러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할 때도 이와 같이 생각하면 될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일을 할 때 범하는 폐단이 바로 멈춰 서는 것은 두려워하면서 느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말로는 일을 안 한다고 하지만,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느릿느릿 힘겹게 살면서 쉬지 않고 일하고, 일을 한다고 해도 딱히 대단한 결과를 내지 못한다.

글을 읽으며 뜨끔했던 문구이다.
멈추는 것이 두렵기에 계속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힘차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쉬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냥 내려놓아야 한다.
쉴 때는 쉬고, 일할 때는 일해야 한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일과 휴식도 동시에 할 수 없다.
어느 하나만 선택해서 집중해야 한다.

이 책으로 미학의 개념을 더 넓힐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이 생각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소중함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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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생활철학 - 유쾌한 삶을 위한 '에티카' 해설서
황진규 지음 / 인간사랑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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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문장입니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글이나 말 중에 위와 같은 글이 없다고 하네요.

이런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책 중 하나가 '에티카'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이해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 책 '스피노자의 생활철학'은 스피노자의 '에티카'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에티카'를 설명하기에 앞서 '철학'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앎'은 이론이자 지식으로서의 철학이고, '삶'은 실천이자 수행으로서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삶'을 통해 철학을 배우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과 각종 제약이 있으므로 '앎'을 통해 철학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스피노자의 생각이 아니라 저자의 철학에 대한 생각입니다.
'앎'과 '삶'을 통해 우리가 철학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철학은 삶을 구성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철학이 없다면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게' 됩니다.
'삶을 구성하는 방식'을 아는 이만 능동적으로 살 수 있고, 그 방식을 모르는 이는 삶에 휩쓸리게 되니까요.

누구나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살아지는' 사람이 더 많죠.
내 인생이라고 말하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누군가의 일을 대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어야 '사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나만의 철학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자유로울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잘못 '정의'했기에 자유롭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달릴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잘못된 곳을 향해 달렸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진정으로 자유를 원한다면, '역량'을 문제 삼기 전에 '정의'를 문제 삼아야 한다.
'자유로울 역량이 있는가?'보다 먼저 해야 할 질문이 있다.
"진정한 자유는 무엇일까요?"

누구나 자유를 원합니다.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 지금의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견디고 있습니다.
당연하다 생각하는 이 '자유'에 대해 저자는 '정말?',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자유룰 누릴 능력이 부족한 것일까요?
자유가 뭔데요?
그렇네요. 
내가 생각하는 자유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남이 정의해 놓은, 멋져 보이는 자유를 내 것인것 마냥 착각하고 있었네요.
'나의 자유'에 대해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모든 환경과 조건을 초월해서 제멋대로 하려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부자유다.
오직 자신이기에 따를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 법칙을 따른 '체계'를 만들어 나가며, 그 체계를 반복하는 '루틴'에 따르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이다.
'자유'는 '규칙'의 밖에 있지 않다.
'자유'는 '규칙' 안에 있다.

흔히 '자유'라고 하면 규칙에 반대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부자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 자유로운 삶은 '나만의' 법칙과 체계위에서 반복되는 삶입니다.
'법칙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뜻으로 만든 법칙'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유스러운 삶은 편안함을 주지만, 부자유스러운 삶은 공허함, 불안함을 줍니다.

꿈을 실현하려는 노력만큼, 그 꿈에 대한 '의욕'과 '욕망'이 어디서 왔는지 묻는 노력도 필요하다.
어떤 외부요인으로 인해서 자신의 의욕과 욕망이 생겼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 외부원인을 하나씩 찾아갈 때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꿈'도 '자유'와 같습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정말 '나의 의지'만을 반영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부모님의 의사, 친구의 의견, 사회적 기준 등 외부요인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요?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기 이전에 왜 그 꿈을 가지게 됐는지부터 생각해 보길 권하고 있습니다.

'슬픔'의 감정을 다루는 법은 간명하다.
'슬픔'의 감정을 차분히 응시할 것.
그리고 너무 오래 '슬픔'을 눌러두지 말고 적절하게 표현할 것.
그럴 수 있다면, '슬픔'은 자기 파괴적인 '슬픔'이 되지 않는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욕망이든,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는 것이 중요하다.
어떠한 감정이든 그것이 내면에 고여 쌓이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온 감정들을 차분히 응시하고 적절히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 감정을 긍정한다는 것의 진짜 의미다.
우리에게 주어진 감정들을 긍정하는 것만이 감정을 잘 다루는 유일한 방법이다.

감정을 잘 참는 것을 감정을 잘 다루다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참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내면에 쌓이지 않고 잘 흘러가게 두는 것, 이것이 잘 다루는 것입니다.
감정을 잘 흘려 보내기 위해 울고, 웃고 해야 합니다.
이것을 스피노자는 '감정들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건강과 신의 경배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사람들은 선이라 하고, 그 반대를 악이라고 했다."
(에티카, 제1부, 부록)

예를 들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서는 '선'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악'입니다.
반대로 '안중근'은 우리에게는 '선'이지만, 일본에서는 '악'입니다.
이처럼 '선'과 '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의 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행위일지라도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도 선과 악이 바뀌기도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 이유없이 때린다면 '악'이지만, 괴롭힙을 당하는 사람을 구해주기 위해 때렸다면 '선'이라고 합니다.
'때린다'라는 행위는 같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는 것이죠.
이는 '선악'뿐만 아니라 '질서/무질서'에도 같이 적용될 수 있는 같은 개념입니다.

스피노자의 선/악 개념은 분명 파격적이다.
하지만 그 파격은 '궤변의 파격'이 아니다. '진실의 파격'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향하여 노력하고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 어떤 것을 지향하여 노력하고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에티카, 제3부, 정리 9, 주석)

'선악'에 대한 정의가 정말 파격적입니다.
쉽게 말하면 쓰레기를 줍는 행위가 '선'인 이유는 그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우리나라와 일본의 사례도 이와 같습니다.

스피노자의 '선,악'이 무엇인가?
기쁨을 주는 것을 따르고, 슬픔을 주는 것을 따르지 않는 것 아닌가.
즉,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기쁨을 주는 일을 따르고 슬픔을 주는 일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스피노자는 '선=기쁨', '악=슬픔'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고, '슬픔'을 거부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조직,사회의 기쁨'을 위해 '개인의 슬픔'을 택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원치 않는 야근이나 살신성인과 같은 것이지요.

'희망'은 불확실한, 즉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기쁨이다.
그래서 그 기쁨은 항상 의심되는 기쁨이다.
'언젠가 훌륭한 작가가 될 거야'라는 기쁨은 그 '언젠가'가 도래해야지만 확실해진다.
그래서 희망이 주는 기쁨은 언제나 불확실한 기쁨일 수밖에 없다.

희망이 주는 불확실한 기쁨.
이 기쁨을 얻기 위해 우리는 매순간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 노력의 댓가를 얻으면 확실한 기쁨을 누릴 수 있지만, 얻지 못하면 스스로를 비관하고, 좌절하죠.
왜 그럴까요?

"공포 없는 희망은 없으며, 희망 없는 공포도 없다."
'희망'때문에 '공포'에 휩싸이고, '공포'때문에 '희망'을 갖게 된다.
야박하지만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스피노자는 희망이 주는 불확실한 기쁨, 그와 반대되는 것이 불확실한 공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희망이 크면 클수록, 공포도 그와 비례하여 커집니다.
그렇기에 큰 기대를 갖고 있던 일에 실패하면 좌절 또한 큰 것입니다.
그렇다면 좌절을 피하기 위해 희망을 가지면 안되는 것일까요?

희망 없이 사는 연습이 필요하다.
희망을 껴안고 사는 것은 얼마나 슬픈 삶인가.
더 많이 '희망'하는 삶은 더 많은 '공포'에 내몰리는 삶이고, 이는 결국 '안도'와 '절망'을 반복하는 삶일 뿐이니까 말이다.
이런 번민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보다 우울한 삶도 없을 테다.


희망 없이 어떤 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다 잘 될 거야'라는 억지스러운 희망 대신, '잘되지 않더라도, 내 삶을 사랑할 거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희망'이 아닌 '사랑'을 추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취직이 안되서, 결혼을 못해서, 집을 못사서...
N포시대라 불리는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입니다.
취직을 할꺼야, 결혼을 할꺼야, 집을 살거야와 같은 '희망'보다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세요.
그 노력이 직장을 얻고, 배우자를 만나고, 집도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행복한 삶은 동서고금을 막론해 하나다.
지금을 사는 것!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을 사는 것.
하지만 우리는 항상 과거와 미래에 매여 지금을 살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 희망 없는 삶을 고민해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을 사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희망 없는 삶, 정확히는 희망 없이 어떤 것을 사랑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희망 없이 사랑할 때, 우리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지금을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희망 없이도 기쁜 삶을 살 수 있다.

지금에 충실하라.
당연한 이 글이 너무나 무겁고 진중하게 다가옵니다.

이 책을 보면서 스피노자에 푹 빠졌습니다.
저자가 스피노자의 철학을 정말 쉽게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생활철학'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립니다.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도 이처럼 쉽고 재미있게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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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 사회적 순위 매기기 게임의 비밀
피터 에르디 지음, 김동규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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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피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비교'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누군가를 비교하고, 누군가와 비교당하며 살고 있다.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지만, 공평하지는 않다.
능력, 지위, 나이 등 기준에 따라 다르게 대하고 있다.
이런 기준에 의해 공평하지 않기에 생기는 순위가 만들어진다.
이 책 '랭킹'은 바로 그 순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비교, 평가를 위하여 임의의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의거하여 순위가 매겨진다.
학생들의 성적 순위부터 시작해서 국가별 경제, 행복 순위까지 사회 전반에 다양한 순위가 퍼져있다.

이 책은 순위를 왜 매기는지, 순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그 순위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자는 대부분의 객관적인 기준이 결여된 순위는 의미도 없고,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객관성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명 기관과 과학적인 알고리즘으로 무장한 기업들이 제시하는 순위임에도 왜 객관성을 증명할 수 없을까?
바로 '무지'와 '조작'때문이다.

예를 들면, 경영대학원의 인기는 대학의 인기 순위와 비슷하다.
그래서 유명 대학의 존재하지 않는 경영대학원의 인기순위가 높게 나타나는 황당한 경우도 있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무지'이다.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하고 부정확한 추측으로 순위가 바뀔 수 있다.

'조작'은 예를 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횡행하고 있다.
필요에 의해 순위가 조작되고, 이 조작을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비즈니스도 있다.
특히 모두가 공정하게 평가받아야 하는 시험이나 평가 등에서 이런 조작이 나타나면 사회적인 이슈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큰 노력없이 높은 순위에 들기 위한 가장 쉬운-하지만 가장 불합리하고 부정직한- 방법이 조작일 것이다.

이 사례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의사소통할 때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과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의 차이가 극명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취할 때, 얻는 것보다 잃는 것에 너무 많이 신경 쓰지는 않는가?

어떤 병에 걸려 죽을 수 확률이 10%이면, 살아남을 확률은 90%이다.
이때 어디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라진다.
바로 프레이밍 효과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조건에 대해 좋은 부분을 바라보는지, 나쁜 부분을 바라보는지 생각해 보자.
잔에 물이 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반이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 선택지를 좁힌다.
쇼핑몰에서 옷을 사기 위해 들르는 상점은 두 군데면 족하다.
- '적당히 좋은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운다.
- 선택하지 않아 놓친 것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 너무 많이 바라지 않으면 실망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선택장애가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이다.
강제로 선택지를 좁히고, 완벽한 것이 아니라 적당한 것에 만족하며, 이미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를 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더 빠르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무언가 더 하는 것이 아니라, 덜 하는 것임에도 쉽게 느껴지진 않는다.

우리는 왜 순위에 집착하는가?
순위가 신뢰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높은 순위는 그만큼 더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기준을 변경하고, 결과를 조작하여 순위를 변경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순위를 보는 시야를 한층 더 올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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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살고 있나요?
이종혁 지음 / 서울셀렉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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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한참 들여다본다.
상식으로 살고 있나요?


고민없이 '네'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자꾸 머뭇거리게 된다.
하나씩 하나씩 글을 읽어갈수록 점점 '아니오'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저자는 일상에서 우리가 늘 접하는 것들에 대한 상식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평범한 것에 대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란 생각이 들 정도로 뛰어난 관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의,식,주,인,생.
이렇게 5가지 범주로 나눠, 각각의 것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상식적으로 행동하고 생각하는지를 묻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상식은, 말 그대로 일반적이고 평범한 지식이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누구나 알고 있는 그 내용을 얼마나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단락 하나하나를 읽을때마다 한참을 생각한다.
얼마나 상식적으로 살아왔는가란 반성을 하면서...

명품을 선호하는 건 이성적인 자제력의 부족이다.
이성적 자재란 마음의 여유와 세상을 보는 지혜로움이다.
명품을 사는 것은 감성적인 행동의 결과다.
감성적 행동은 물질의 탐욕으로 자기를 평가하고 세상을 재단하는 이기심의 발로다.
마음의 충만함은 늘 검소함, 마음의 부족함은 늘 사치함과 연결된다.

적극적 소비생활은 심리적인 부족이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행동이다.
지금 나의 소비생활을 돌아보자.
난 지금 충만한가, 부족한가.
목이 마른 사람에게 맛있는 빵은 그리 좋은 대안이 아니듯,  마음의 부족함은 물질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다.
마음의 물을 찾아야 한다.

공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자기 생각을 수렴시키고 발산토록 하기 위함이다.
공간을 그대로 비워 두고 대신 작은 전신 거울 하나를 소박하게 놓아두었다면 가장 멋진 곳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누구든 아이디어를 발산하는 자신의 모습과 마주할 수 있도록 해 주면 그만이다.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정리된 공간이 있나요?"

가끔씩 정리를 통해 주변에 빈 공간을 만든다.
여백의 미를 충분히 즐기기도 전에, 새로운 무언가로 채워진다.
새로운 것을 채우고 싶어 정리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말 그대로 '비어있는 곳'으로의 공간을 갖고 싶다.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가지가 부족하다면 반려견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키우지 않고 인내하는 것이 동물복지 실천이다.
반려견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공유하는 가족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려견에 대한 저자의 생각인데, 매우 공감한다.
자신의 만족이 아니라, 개가 만족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리해야 한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키우는 것이라면 매우 이기적인 것이다.

어디선가 '길가의 꽃은 꺾어서 보는 것이 아니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꽃도 그러할진데 움직이는 동물은 오죽할까.
개답게 키울 자신이 없다면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자.

상식대로 산다는 것.
결국 '행동'을 말하고 있다.
머리로는 이미 넘치도록 이해와 공감한 것을, 손과 발을 통해 직접 움직여야 한다.

지금껏 알고 있는 상식이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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