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은 성공 지향이 강한 탓인지 공격 일변도인 반면 ‘디펜스가 약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야기와 연결해보자면,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무의미하고 방해되는 것’이 등장해 주인공이나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입히는 스토리가 반복됩니다. 그때 주인공은 일어난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 않는다기보다는 하지 못합니다.


사진 출처: 한겨레신문


『양을 둘러싼 모험』도 그렇고, 『태엽 감는 새』도 그렇고, 『해변의 카프카』도 그렇고, 주인공이 대체 어떤 경천동지할 만한 큰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말을 눈치채는 일은 없습니다.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뭐가 뭔지 모르겠는’ 사건 속에 휘말리고, 이리저리 채이고, 상처 입고, 사랑하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나를 지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당장 쓸 수 있는 집중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살아남아 후반부로 갈수록 ‘디펜스에 능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이런 카프카적인 부조리에 휘말렸을 때 주인공이 취하는 최고의 ‘디펜스’ 전략이 ‘디센시(decency, 예의 바름)’라는 점입니다. 


‘대개의 일은 그만한 수고를 들이면 대충은 알 수 있다’라는 것이 무라카미 월드의 주인공들이 가진 공통적 ‘탐험술’의 기본인 듯 보이는데, 여기서 ‘그만한 수고’는 단순히 너무 걸어서 다리가 뻣뻣해질 정도로 돌아다닌다든가,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전화를 걸어본다든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일단 만난 사람에게서 최대한의 정보와 지원을 이끌어냅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최대한의 정보와 도움을 이끌어내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의 바르고 우호적인 어조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작가적 직감에 따라 ‘디센트한 것’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한 최우선의 디펜스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절은 ‘살아가기 위한 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의 바른 행동은 ‘패배적 태도’이며, 방약무인하고 무례의 끝을 보여주는 행동이 ‘승리자의 특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예의 없이 사람을 대하는 것은, 예의를 갖춰 대했다면 손에 넣었을지 모르는 귀한 정보나 도움을 그런 줄도 모르고 도랑에 버리는 행위와 같으니까요.

경험해보셔서 아시겠지만 타인으로부터 ‘예의 바른 대접을 받으면’ 자기도 모르게 ‘교차되는’ 느낌이 듭니다. ‘교차되거나’ ‘제쳐지거나’ ‘건너뛰어지는’ 느낌이지요. 그런 대접을 받으면 그 이상 ‘깊이 파고들’ 수가 없습니다. 이쪽에서 공격적이 되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가 않습니다. 

고노 요시노리 선생으로부터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노 선생은 항상 전통 의상에 검을 차고 걷기 때문에 거리에서 취객이 달려들어 시비가 붙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고노 선생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취객에게 재빨리 다가가 “어머님은 건강하십니까?” 하고 말을 건다고 합니다. 


조직 폭력배건 취객이건 누가 자기에게 그렇게 친근하고 예의 바르게 말을 걸면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의 바른 대접을 받았으니 소리를 지르거나 싸움을 걸 핑계도 없습니다. 고노 선생이 망설임 없이 예의 바른 어조로 그렇게 말을 거는 동안 저쪽에서 기분이 상해 물러나버리고 만다고 합니다.이것은 디센시의 방어적 효과를 보여주는 훌륭한 일화입니다.



"어깨에 힘을 빼자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의 대표 지성이 들려주는 

유연하고 자유로운 인생을 위한 몸과 마음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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