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Cura님의 서재 (Cura 서재) &gt; 인문/사회/역사</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category/21008869</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hu, 17 May 2012 14:23:50 +0900</lastBuildDate><image><title>Cura</title><url>http://image.alad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category/21008869</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Cura</description></image><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남이 뭐라 건 네 갈 길을 가라 - [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598886</link><pubDate>Wed, 02 May 2012 12: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59888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637025X&TPaperId=559888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598/43/coveroff/896637025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637025X&TPaperId=559888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a><br/>이사야 벌린 지음,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03월<br/></td></tr></table><br/>‘남이 뭐라 건 네 갈 길을 가라’ 맑스는 신곡에 나오는 이 말을 평생의 자우명으로 삼앗다. 듣기엔 멋진 말이다. 실제 맑스는 그 말대로 살았다. 그러나 그 말에 따라 사는 사람도 멋질까? 저자가 그리는 맑스란 사람은 존경할 수는 있지만 인간적으로 좋아하기 힘들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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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호의적이고 다정한 사람이었다거나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배려해줬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들 대다수를 바보 아니면 아첨꾼으로 보았으며 그들을 드러내놓고 의심하거나 경멸햇다. 그가 외부인들에게 보인 태도는 지나치게 고압적이어서 불쾌감까지 주었다.” 천재들이 이런 경우가 많다. 자신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는 천재들은 자신이 본 것을 보지 못하는 개미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바보는 벌레일 뿐이다. 케인즈 역시 그러했는데 면전에 대고 경멸하고 모욕을 주기로 유명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케인즈에게 바보 취급을 받고 모욕을 당한 어느 경제학 교수는 얼마나 분했는지 아무 말 없이 케인즈를 보는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서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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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천재들의 우주는 자신이 인정할 수 잇는 작은 소집단에 만들어진다. 케인즈의 우주는 엘리트 집담인 케임브리지 대의 사도회에서 만난 사람들이 전부였다. 맑스의 우주 역시 그 만큼 아니 더 작았다. “그는 주위 환경에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살았다. 그의 주변에는 가족과 가까운 친구, 정치적 동지들로 구성된 소집단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주로 독일인들로 이루어진 세계였다. 그는 (런던에 살 때도) 영국인이라고는 거의 만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생활양식에 대해 이해라려고도 신경을 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유별나리만치 주위 환경에 영량을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자신의 우주를 벗어난 곳은 외계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자신의 삶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맑스는 당대의 혁명가들 중에서 기묘하게도 고립된 채 평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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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고립은 단순히 기질” 때문은 아니었다. 남이야 뭐라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것은 그 ‘남’을 침묵하게 하는 거대한 신념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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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는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과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비교하면서 두 작품은 오직 그 때만 가능했다고 말한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주관과 객관, 다시 말해 개인과 세계의 균형이라 아도르노는 말한다. 그러한 균형이 완전하게 구현된 것이 두 작품의 위대성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균형은 오직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건이 보여준 비전에서만 가능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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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 청년기에 프랑스혁명 때문에 열광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헤겔, 훨더린, 쉘링 등 젊은 날의 친구들이 튀빙엔의 학창시절에 자유의 나무를 심고 혁명가를 부르며 그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었다는 것도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또 학창시절에 프랑스혁명에 관한 금지된 저술들을 읽는 것에 몰두하는 어떤 비밀 클럽의 핵심이기도 했다. 이러한 열광은 그 당시 독일 지식인들 대부분에게 있어서의 프랑스혁명에 대한 일반적인 열광의 분위기에 속하는 것이다. 헤겔의 특별한 위치는 그의 전생애를 통해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고 이 혁명의 역사적 필연성에 집착했으며 죽을 때까지 그 혁명 속에서 근대 시민사회의 기초를 탐지했다는 점에 있다.” (루카치 ‘청년헤겔 I’)<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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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을 쓸 당시 “헤겔의 입장은 프랑스혁명이라는 거대한 세계사적 위기 이후에 나폴레옹 체제 속에서 새로운 시대가 생성되는 중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이제 그것의 사상적 표현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헤겔이 지금 자신의 고유한 철학 체계에 대해 내리는 독특한 평가는 그의 철학이 새로운 세계사적 시대의 시초를 철학적으로 총괄한다는 생각이다.” (루카치 ‘청년헤겔 II’) 그러므로 정신현상학을 쓸 당시 헤겔은 자신이 종교개혁 이래 이성과 현실의 화해가 마침내 실현되는 현장에 있다고 생각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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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 본 것은 개인(멜로디 악기)의 자유 그 그리고 그 자유가 구현되는 사회(나머지 악기들)가 화음을 이루어 웅장한 음악을 울릴 수 있다는 비전, 프랑스 혁명이 보여준 것은 그것이 실현될 것이라는 비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현상학이 쓰여지고 영웅 교향곡이 쓰여진 바로 그 때부터 불가능해졌다. 헤겔이 심은 자유의 나무는 말라죽을 운명이엇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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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세대가 본 것은 “적대적이고 천박한 세계”였다. 그러나 윗 세대의 비전을 물려받은 맑스는 “현재의 비이성적이고 혼란한 세계는 필연적으로 파멸할 것이라 믿엇다. 그 결과로 질서정연하고 잘 통제되는 자율적인 사회(정신현상학과 영웅 교향곡이 그린 세계)가 도해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잇었다. 그것은 모든 문제들을 종결짓고 모든 어려움을 녹여 버리는 저 무한하고 절대적인 힘에 대한 믿음이었다. 다시 말해 16,17세기 사람들이 처음에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트적 믿음에서 그 후에는 과학의 진리와 프랑스 대혁명의 원리 및 독일 형이상학자들의 체계들에서 찾아낸 것과 유사한 해방감을 가져다 주는 믿음이었다. 이들 초창기 합리주의자들을 광적이라 부를 수 잇다면 같은 의미에서 맑스 또한 광적이엇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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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를 선배들과 구분하는 것은 그의 종합에 있었다. “맑스 이론의 독창성은 지금까지 종종 의심을 받고는 했다 그러ㅏ 그의 이론은 의심의 여지없이 독창적이다. 맑스 이론을 독창적이라 하는 것은 새로운 가설을 만들어내기 위해 기존의 견해를 수정하고 결합함으로써 그때까지 해결되지 않거나 심지어는 형식화도 되지 않았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제공한 과학적 이론을 일컬어 말할 때의 그런 의미에서다. 맑스가 추구한 것은 새로움이 아니라 진리였다. 다른 사람들의 저서에서 진리를 발겨하면 그는 자신이 새로 종합한 이론 속에 그것을 결합하려 애썼다. 그의 사상의 기본 방향이 모습을 갖춘 파리 시절에는 특히 그랫다. 결과에서 독창적인 것은 어느 하나의 구성요소가 아니고 중심가설이앋. 중심가설이 각 구성요소를 나머지 모든 구성요소들과 걸합시킴으로써 부분들은 단일한 체계의 전체 안에서 전제와 결론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맑스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론적 문제들에 관해 잘 알려진 경험적 용어를 사용하여 명료하면서도 통일적인 대답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대답들에서 자연스럽게 명확한 실천적 지침들을 이끌어 냇다. 이것이 그의 이론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엿다” 맑스의 종합은 헤겔에서 시작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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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철학이 뿌리내릴 만한 토양은 고전주의 시대의 믿음과 어법에 대한 반발이 점차 커지는 과정에서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17세기에 시작된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은 18세기에 이르러 하나의 확고한 흐름이 되었다.” 고전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어법은 계몽주의였다. 계몽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어법은 뉴튼 역학이었다. “과학분야의 성과들은 자연스럽게 사회현상을 해석하고 삶을 이끌어가는 데 적용되었다.” 문제는 이 어법이 역사를 고려할 수 없다는 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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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많은 시스템들은 균형점을 갖고 있다. 당신이 지금 표면이 매끄럽고 둥글며 밑바닥이 원형인 큰 유리그릇과 고무공을 가지고 잇다 하자. 그릇의 가장자리에다 공을 놓고 손을 떼면 한동안 공은 앞뒤로 움직이면서 빙빙 굴러다니다 결국 그릇 밑바닥에 멈춘다. 그 순간 공은 균형 상태에 놓인다.” (바인하커) 문제는 균형 시스템에선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릇 안에서 공이 굴러다니는 것을 비디오로 찍었다 하자. 그 비디오를 리버스로 재생해도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컵이 깨진다든가 씨앗에서 싹이 튼다든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선 “역사가 매우 중요하다” 역사가 있는 것은 가역적이지 않다. 뉴튼 역학의 어법으로는 비가역성을, 역사를 설명할 수없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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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 정확히는 뉴튼역학의 어법을 인간세계에 적용하려는 것은 헤겔에게 “과학적 독단주의의 구현으로 보였다. 볼테르나 흄이 이해한대로 역사를 과학적 규칙들에 따라 기술한다면 역사적 사실들은 엄청난 왜곡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사물에 대한 단 하나의 참된 정의는 그 사물의 개벌적 역사에서 볼 때 왜 필연적으로 그렇게 발전하는지를 설명하는데 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물질적 조건은 1세기나 8세기, 15세기에도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고대 로마인들은 후대의 이탈리아인들과는 대단히 달랐고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인들은 당시 쇠퇴 일로에 있던 이탈리아가 잃어버힌 특징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자연과학자만이 다룰 수 있는 이 상대적으로 불변적인 조건들은 역사적 변화, 진보와 반동, 영광과 쇠퇴으 원인이 될 수 없다. 각 시대는 이전 시대로부터 새로운 무엇인가를 물려받는다. 발전의 원리는 갈릴레오와 뉴턴 이론의 토대인 규칙적인 반복의 원리를 배제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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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역사의 역학을 구성하기 위해 의인화를 시도했다. “헤겔은 개인의 인격적 특성을 가리키는 개념 즉 사고와 선택의 목적, 논리, 성질 등을 모든 문화와 민족에다 옮겨놓았다. 헤겔은 그것을 이념 혹은 정신 등 여러가지로 불렀으며 특정한 민족들과 문명들의 발전과정 즉 의식을 갖는 전체로서의 우주의 발전과정의 동기이자 동적 요소라 말했다.” 어떤 사람을 떠올릴 때 “우리는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모든 행위를 하나의 연속적인 합목적적 활동이 서로 다르게 표현된 것으로 본다. 우리는 그의 생애의 여러 단계에서 끌어온 수많은 자료의 영향을 받으며 이러한 자료가 모여 그에 관한 우리으 정신적 초상을 만드는 것이다. 헤겔은 하나의 문화라든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관한 우리의 개념도 마찬가지라 보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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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역사를 그린다는 것은 “운동 중인 시대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라 보았다. 그 초상화, 즉 정신, 이념은 헤르더의 집단정신이란 모호한 개념에서 발전한 것이다. “특수한 것, 구체적인 것, 분화된 것, 개별적인 것 속에서 보편적인 것의 가장 생생한 표현을 찾으라는 이러한 명령, 즉 역사를 사진가나 통계학자의 눈으로 보지 말고 전기 작가나 화가, 그리고 리얼리즘의 눈으로 보라는 이러한 명령은 독일 역사주의의 독특한 유산이다. 이 학설은 오늘날에는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한 세대 전체에는 이 학설이 기존 생각의 변화를 알리는 징후인 동시에 그러한 변화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우리는 특정 시기와 장소에 특정한 성격을 부여하고 개인이나 집단의 행위를 민족이나 시대의 전형으로 보곤한다. 우리는 또한 특정 시대나 민족 혹은 심지어 행위를 르네상스, 프랑스 혁명, 독일 낭만주의, 빅토리아 시대 등의 정신의 표현으로 기술할 수 있게 해주는 널리 존재하는 사회적 태도에 대해서도 그 나름의 적극적인 인과적 속성의 인격을 부여하는 습관이 잇는데 이러한 습관은 바로 이 새로운 역사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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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말을 재정립한 헤겔은 당대의 신조가 되엇고 인문학의 언어를 정의했다. 그러나 문제는 헤겔이 말하는 그 정신이 무엇이냐이다. “헤겔은 하나의 문화적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유와 행위는 그 시기의 모든 현상에서 드러나는 동일한 정신이 그 내부에서 활동함으로써 결정된다고 단언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문화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문제는 헤겔이 역사는 정신의 역사라 한 것에 있다. 포이어바흐는 모호한 신비주의일 뿐이라 공격한다. “그 이유는 헤겔의 이념이라는 것이 이념이 설명하고자 했던 것의 동어반복적 재구성이 아니라면 그것은 단지 기독교의 인격신을 다른 이름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포이어바흐는 헤겔이 말하는 것과 달리 “역사의 원동력이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 조건의 총합이라고 선언한다.” “여전히 관념론자였던 맑스는 ‘기독교의 본질’을 읽고 독단주의에서 깨어났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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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파리에서 맑스는 헤겔주의와 프랑스의 사회이론들,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종합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맑스는 역사적 구조에 대한 이론, 즉 인류 역사를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의 형식적 관계들에 관한 이론은 헤겔에세서 이끌어냈지만 요소 자체에 관한 내용은 생시몽과” 같은 프랑스인들에게서 얻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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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뜰어 생시몽은 “경제적 관계의 발전이 역사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엇다.” 그리고 푸리에와 시스몽디는 “이전으 모든 계급투쟁은 재화의 부족으로 발생했지만 앞ㅇ로의 계급투쟁은 기계적 생산수단의 발달과 그에 따른 풍요한 재화의 생산 때문에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계급투쟁을 막을 수 잇는 것은 “국가의 개입 뿐이다. 국가는 자본을 축적할 권리와 생산수단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제한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스몽디는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 나오기 훨씬 전에 이미 그러한 정책을 주창한 인물이엇으며 복지국가를 예언한 선구자였다.” 맑스는 경제적 관계의 우위와 분배의 문제라는 두가지를 모두 받아들였다.<o:p></o:p>
&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598/43/cover150/896637025x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637025X</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삶에서 죽음으로 - [성배와 칼 - 여성의 관점으로 본 인류의 역사, 인류의 미래]</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577340</link><pubDate>Fri, 20 Apr 2012 13:3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57734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036221&TPaperId=557734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84/99/coveroff/899203622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036221&TPaperId=557734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성배와 칼 - 여성의 관점으로 본 인류의 역사, 인류의 미래</a><br/>리안 아이슬러 지음, 김경식 옮김 / 비채 / 2006년 10월<br/></td></tr></table><br/>“’오레스테이아’는 가장 자주 공연되는 그리스 비극 중 하나다. 이 작품에서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살해한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을 때 아폴로 신은 아이들이 그들의 어머니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며 오레스테스를 변호한다. ‘어머니란 자기 아이라고 불리는 자의 부모가 아니다. 단지 새로 심어져 자라나는 씨앗의 보육자일 뿐이다.’ 오직 아버지만이 자녀들과 관계 있다.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여신 아테네는 ‘나를 낳은 어머니는 없다’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결혼을 제외하고 나는 항상 진심을 다해 남성과 내 아버지를 따른다’라고 덧붙인다. 그때 코러스-옛 질서를 대표하는 에우메니테스 혹은 분노의 신-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젊은 신들아, 너희 가 옛법을 짓밝고 내 손안에 있던 법을 찢어발기다니’라고 외치고 아테네 여신은 결정적인 표를 던진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살해안 죄를 모두 용서받는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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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극의 발단은 선단을 움지이기 위해 순풍을 얻기 위해 아가멤논이 딸, 이피게니아를 희생제물로 바친 것에서 시작된다. 돌아온 아가멤논을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단죄한다. “그녀는 아가멤논을 죽인 명분에 대해 물론 개인적인 슬픔과 증오도 있었지만 희생된 친족을 위해 복수할 책임이 있는 씨족의 우두머리로서 내린 결단이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간단히 말해 그녀는 모계 사회에서 정한 규범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사회적 책임이 있는 여왕으로서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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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오레스테이아’란 고전극에서 모계 문화가 부정당하고 부계 문화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시점을 읽어낸다. “클리타임네스라 사선이 정의로운 결단이었다느느데 수긍하게 한 다음 그녀의 딸이 잊혀지고 그녀의 유령이 사라지고 마침내 사건이 완전히 잊혀지는 지점까지 이른다. 그때 여성은 이미 주장할 권리도 자질도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클리다임네스트라 같은 막강한 존재가 딸이 살해당하는 도발적인 상황에서 복수할 권리가 없다면 과연 어떤 여성에게 그런 권리가 있겠는가?”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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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전극에서 저자가 읽는 것은 “공동체 사회 혹은 가계가 여성을 중심으로 이어졌던 씨족이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던 체제에서 남성이 재산과 여성을 사적으로 소유하게 된 변화”이다. “아테네 인들은 ‘오레스테이아’를 통해 과거 분노의 여신 퓨리와 운명의 여신들이 굴복당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후 남성 지배 질서와 새로운 규범이 확립되었다.” 그 굴복은 절대 평화롭지 않았다. 절대적인 폭력에 압도당한 결과였다. 패배한 신들은 “아크로폴리스 아래 동굴로 피신했다. 그때 아테네 여신은 그들에게 아테네에 머물라며 설득했다. 그 와중에도 아테네 여신은 변함없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은 친족이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되풀이했다. 비굴해진 그들은 아테네 여신을 도와 ‘최고 권력자인 제우스와 아레스가 통치하는 이 도시를 지키는’ 일에 봉사하헸다고 약속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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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딸을 죽여도 방관해야 하고 어머니와 자식은 가족이 아니라 말해도 인정해야 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가? 이것이 이책의 질문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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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 김부타스는 ‘신석기, 청동기 시대에 남동 유럽에 존재했던 다양한 문화집단들의 집단적 동질성과 성취를 인정하면서 고대 유럽 문영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등장했다’고 지적했다. 7000년전 남동 유럽에 살았던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는 윈시 정착민이 아니었다. 기원전 7000년경에서 3500년경 사이에 초기 유럽인들은 복합적인 종교 기구와 정부 기구들을 만들었고 청동이나 금으로 장식품이나 도구를 제작했으며 특히 청동이나 금으로 장식품이나 도구를 제작했으며 특히 문자로 보이는 기호를 개발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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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근동의 문명들과는 독자적으로 발전한 고대 유럽 문명은 근동과 마찬가지로 평화로웠고 계급이 없는 평등한 사회였으며 가부장제가 아닌 모계 사회로 남녀차별이 없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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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 예술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신석기 시대 예술에서는 무장한 군대, 잔임함, 폭력에 기초한 권력을 이상화한 주제가 없다. 이 시대에는 ‘고매한 전사들’ 혹은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이 없다. 사로잡은 포로들을 사슬에 묶어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 영웅 정복자나 노예제를 묘사한 증거도 없다. 또한 초창기와 가장 원시적인 남성 지배 사회의 정복자들이 만든 유물과 달리 유독 여신을 숭배한 신석기 사회에서는 특이하게도 사치스럽게 꾸민 ‘족장’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모든 곳에서-사원과 집에서, 벽화에서, 항아리에 새겨진 장식 문양들에서, 입체 조각상에서, 진흙 입상에서 얕게 양각한 세공품에서- 자연에서 모방한 상징적인 배열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다시 여신 숭배와 연관되어 삶의 아름다움과 신비에 대한 경외심과 놀라움을 증명해주었다. 여신의 몸은 탄생과 기적과 윤회, 재생같이 죽음을 삶으로 바꾸는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신성한 성배로 표현된다. 신석기 예술에는 여신으로 의인화된 생명체들이 상징하는 화합의 주제가 두드러진다. 여기에서 우주를 지배하는 최고 힘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물질적이고 영적인 양분을 공급하며 심지어 죽은 뒤에도 아이들을 자신의 우주적 자궁으로 다시 데려간다고 믿는 신성한 어머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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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예술이 보여주는 세계관은 “정복하거나 약탈하고 노략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구를 가꾸고 물질적, 영적 자원을 공급함으로써 만족스런 삶을 추구한다. 전체적으로 신석기 예술은 우주를 지배하는 신비로운 힘의 주된 기능이 복종을 강요하고 처벌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고 축배를 들고 접대하는 것이라는 세계관을 담고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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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는 마치 절반 이상이 찢어지거나 없어진 거대한 퍼즐같다. 완전하게 재구성하기는 불가능하다. 너무 많은 조각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재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우리가 갖고 잇는 조각들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을 막고 조각이 들어맞는 진정한 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장벽은 인간관계의 차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선사시대 문화에서 인간관계의 전형은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이다. “더 크고 강한 어른인 어머니는 분명 위계질서의 관점에서 ㄷ더 작고 약한 어린아이보다 우월화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아이가 열등하다거나 가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힘은 억압과 특권, 두려움이 아닌 책임고하 사랑으로 승화되어 사회를 안정시켰다.” 여신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세계관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회조직돠는 매우 다른 사회조직을 반영하는 것이 분명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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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간의 관계 마찬가지로 파악되엇다. “싢롸적이고 고고학적 증거들은 지배 중심 사회 이전에 팽배했던 정신 중 가장 특기할만한 특징은 인간과 자연이 하라나는 일체감을 자각한 것이라는 시실을 알려준다. 이것이 신석기 시대와 크레타&nbsp; 인들이 여신을 숭배한 본질적인 이유였다. 고대사회에서는 우주를 지배하는 힘을 모든 것을 내어주고 양육하는 어머니라고 여겼다. 그런 만큼 남성신들이 추구하는 인과응보의 관념보다 심리적 사회저긍로 안정감을 주엇다. 수천년동안 서구역사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 성모 마리아가 상징하는 동정적이고 자비로운 어머니에게 매달려 끈질기게 숭배함으로써 안정을 추구햇다. 다른 역사적 수수께끼처럼 이 끈질긴 숭배 역시 선사 시대에 수천년동안 여신을 숭배환 오랜 전통의 문맥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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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신석기 문명은 크레타에서 절정에 이른다. 크레타 사회에는 “’삶의 모든 영역이 창조와 조화를 가져다주는 자연의 여신을 향한 열렬한 믿음으로 충만해 있었다. 크레타는 역사 기록상 여성과 남성이 서로를 대등한 동반자로서 조화를 이루어 줄겁게 지낸 마지막 세상같다. 크레타 문명의 예술적 전통에 유유히 빛나는 것도 바로 조화의 정신이아. 플라톤은 크레타 문명이 ‘미적 가치와 우아함, 역동성’에서 또한 ‘삶의 유희와 자연과의 거리’에서 매우 독특했다고 강조한다. 어떤 학자들은 미노아 인들의 생활상을 설명하면서 ‘호모 루덴스의 삶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잇다’고 지적한다. 다른 학자들은 크레타 문명을 ‘감수성’ ‘우아한 삶’ ‘아름다움과 자연의 사랑’같이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다. 크레타 섬을 연구해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랍다는 말로 감탄과 충격을 나타낸다. 그들은 ‘동화 같은 세상에 대한 동경’이나 ‘이 세상에서 우아한 삶을 가장 완벽하게 누린 곳’같은 표현으로 이 문명을 찬양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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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사회는 다른 고대 고등 문명 세계와는 달리 부를 공평하게 나누었다. 플라톤은 이 점을 지적하며 ‘심지어 농부조차 생활수준이 상당히 높았던 것같다. 지금가지 발견된 어떤 집에서도 아주 가난했다는 증거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기본경제는 농업이 중심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축 사육과 산업, 그리고 무엇보다 무역-거대한 상업 선단을 타고 전 지중해를 항해하며 무역을 장악했다-이 경제발전에 크게 공헌하면서 가치를 더했다. 사회조직은 처음에는 모계 씨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중앙집권화되엇다. 크레타에도 부유한 지배계층이 있었지만 그들이 거대무장세력을 소유하며 권력을 유지했다는 증거는 없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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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 모두 운동과 스포츠에 참가했고 유희로 즐겼다. 음악, 노래, 춤을 향유하면서 삶을 더욱 즐겼다. 행진, 잔치 등 공식 행사가 잦았고 극장이나 원형 경기장에서는 종교의식을 마치면 곡예가 공연되엇다. 또한 유흥과 종교가 뒤섞이곤 했는데 크레타인에게 종교의식은 즐거운 행사였다. 종교는 여가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크레타 문명에서는 삶이 창조와 조화의 근원인 자연의 여신에 대한 열렬한 믿음으로 충만했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독재를 싫어하며 법을 존중했다. 지배층조차 개인적인 야망을 품는 일은 드물엇던 같다. 어디서도 작자의 이름이 새겨진 예술품을 보지 못했고 지배자의 행적을 기리는 기록 한 줄 본적이 없다. 크레타 예술은 권력이 지배, 파괴, 억압 등과 동의어가 아닌 사회를 반영한다. 크레타 사회에서 권력은 물리적인 힘을 휘두르거나 위협을 가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남성 지배자인 엘리트에게 복종을 강요하기보다는 모성의 책임감과 동일시되는 점이 많다. 바로 이것이 공동 협력 사회를 특징짓는 권력의 정의다.” 그리고 이 시대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력한 남성 지배자를 표현한 작품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왕좌를 차지했던 사람이 여성이었으리라 가정할 수 있다. 크레타에서는 여성이 예술품과 공예품에서 가장 빈번하게 다루어지는 중심 주제였으며 특히 공적인 영역에 주로 나타났다. 기원전 3500년경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사회계층 구분이 엄격해지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추락했다. 미노아에서도 도시화가 진행되고 ㅅ하회계층이 존재했지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여성의 지위도 변함없엇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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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계 사회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지위가 높다는 것은 성에 대해서도 자연스러웠다는 말이다. “성을 폭력보다 더 죄악시하는 현대 종교적 교리의 지배적 패러다임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스포츠와 춤에 대한 열정, 창조성,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개방된 성 문화가 삶에 깊숙이 스며 크레타인들이 자유와 평화와 조화를 지향햘 수 있었던 듯하다. 아놀드 하우저가 말했듯이 ‘미노아 문화는 그 정신이 동시대 다른 문화의 정식과 근본적으로 달랏다는 점에서 특별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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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문명은 고대 유럽 문명이 어떤 곳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 문명은 아리아인들에 의해 ‘잃어버린’ 문명이 되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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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7000년전 근동에서 고대 신석기 문화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여러 지역에서 압박이 거셌던 듯하다. 침략이나 자연재해 혹은 때때로 두 재앙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증거도 보이는데 엄청난 파괴와 대대적인 피난이 따랐을 것이다. 여러 지역에서 오래된 도자기 그림 양식이 사라지는 등 신석기 문화는 서서히 붕괴하더니 마침내 후퇴와 정체기로 접어들었다. 혼란이 격심해지는 동안 꾸준히 발전하던 문명은 완전히 멈췄다. 이후 2000년이 훨씬 더 지나고 나서야 수메르와 이집트에서 문명이 등장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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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타스는 그 단절의 이유를 쿠르칸족의 대이동이라 말한다. 인도-유럽어족의 조상인 이들의 “침략과 뒤따르는 문화적 충격 그리고 인구 이동은” 3차례 일어났다. “제1차 대이동은 기원전 43000년에서 4200년 사이, 2차대이동은 기원전 3400년부터 3200년에, 제3차 대이동은 기원전 3000년부터 2800년에. 그들은 강력한 남성 사체와 전사들의 인솔하에 전쟁의 남성신과 함께 이동했다. 그리고 인도의 아리안족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정착한 히타이트와 미타니족, 아나톨리아의 루위족, 동부 유럽의 쿠르칸 족, 그리스의 아케이아 족 그리고 나중에 동참한 도이스족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정복지에 자신들의 이념과 생활방식을 강요했다.” 셈족도 그 대이동의 하나였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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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안과 셈족 “두 종족에게 공통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사회적, 이념적 체제 구조다. 두 종족은 모두 지배 중심 체제에 기초한 사회였다. 남성 지배와 남성적 폭력, 그리고 위계질서가 분명한 권위적 사회였다. 또한 그들은 처음 서구 문명에 기반을 놓았던 사회와는 달리 생산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가 아니라 훨씬 더 효과적인 파괴력을 바탕으로 물질적 부를 축적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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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렇다할 기술도 문화도, 문명이라 부를 것도 없는 야만인에 불과했다. 그들은 야금술도 주변의 농경인들게 배웠다. 그 농경인들에게 구리 도끼는 나무를 자르는 도구였지만 이들에겐 사람의 목을 자르는 무기가 되고 힘의 상징이 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럽의 농부들에게 파괴기술은 사회적 특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쪽 사람에서 올라온 무리뿐 아니라 북쪽 메마른 땅에서 내려온 전쟁을 좋아한 무리에게 파괴력은 중요하고 유용한 권력이엇다. 철기가 인간의 역사에서 치명적인 역할을 한 시기도 바로 이때다. 이제 철기는 일반적인 기술 발전의 도구가 아닌 죽이고 약탈하고 노예를 만드는 도구가 되엇다. 김부타스는 ‘가늘고 날카로운 청동 도끼, 준보석으로 만든 철퇴, 전투용 도끼, 부싯돌 화살촉 등과 함께 청동무기가 등장한 것은 우연히도 쿠르칸 족이 이동한 경로와 일치한다’고 지적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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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파괴 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서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갔던 고대 유럽의 고고학적 풍경은 이제 몰라볼 정도로 변햇다. 김부타스는 ‘수천년동안 이어지던 전통이 단절되고 도시와 마을은 붕괴되고 훌륭한 그림이 새겨졌던 도가기는 사라지고 사원도 프레스코화도 조각도 가징도 문자도 모두 사라졌다.’고 지적햇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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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침략자긍릉 그들에게별 의미가 없고 가치도 없는 집, 사원, 뛰어난 공예품과 예술품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햇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노예로 사로잡혔고 운이 좋으면 달아났다. 이후 역사에서 인구 이동은 연쇄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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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살아있는 전쟁무기가 새로 도입되었는데 바로 무장한 기마병이다. 당시에 그들은 오늘날 탱크나 비행기보다 더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쿠르칸족이 파괴를 서슴지 않으며 이동한 흔적을 좇으면서 전사-족장의 무덤을 발견하고 그안에서 무덤 주인을 둘러싸고 있는 희생당한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의 유해, 동물 뻐 르리고 무기들을 출토햇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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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잦아지면서” 사회의원리는 평등에서 지배로 바뀌었다. “남성이 공동체를 지배했고 그 결과 여성들은 사회적 지위를 잃었다. 나아가 이전 시대에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던 여성 입상이 이후에는 더 출토되지 않았다. 과거의 이념은 바뀌었다. 모계 중심에서 부계 중심으로 사회구조가 바뀌엇다. 이제부터 ‘잡종문화’가 김부타스가 부르는 현상이 등장한다. 이 문화는 남아있는 고대 유럽 문화를 복종시키고 쿠르칸 족의 유목 경제와 부계 혈통의 계층화된 사회에 빠르게 동화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잡종문화는 이전 문화보다 기술적 문화적으로 훨씬 뒤떨어졌다. 이제 경제는 주고 가축 사육에 의존했고 고대 유럽의 기술이 잔류하고 있어 도가지는 놀랍도록 모양이 비슷했지만 질이 나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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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칸 족의 말발굽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던 곳에서도 문화충격이 나타낫다. “점차 날카로운 칼로 지배하고 파괴하는 권력이 생명을 지키고 부양하는 능력을 대신했다. 무장한 정복자들은 초기 공통 협력 문화를 단절시켰고 겨우 파멸을 면한 사회들도 변화의 흐름을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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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섬은 대륙과 바다로 떨어진 덕에 참화를 비켜갔고 자신들의 문화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이 증언하듯 지진과 해일로 크레타는 멸망햇고 그 잔해에 아케이아인들이 들어선다. “크레타의 종말은 본토에서와 비슷하게 시작되었다. 아케이아인이 지배했던 미케네 기간 동안 크레타 예술은 소극적이고 자유롭지 않았다. 그리고 죽음을 걱정하며 강조했다. 아케이아인에게 영향을 받기 전까지 크레타인들은 죽음과 장례 제의를 중요시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아케이아인 엘리트들은 달랐다. 아케이아인들은 문명화된 미노아 양식에서 많은 부분을 취하기도 햇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삶보다 죽음에 ㅇ릭숙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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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잔해에서 재조립된 미케네 마저 또다른 쿠르칸인인 도리아인들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후 그리스 본토와 주변 섬들 그리고 크레타에서 고도로 발달했던 문명은 서서히 사라졌다. 이 시대를 그리스사에선 암흑시대라 부른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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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신화들은 기록되지 않은 이 시대의 변화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이에 대해선 ‘자아폭발’ 리뷰에서 다루었다)이 그 예이며 헤시오도스의 타락 이야기도 그 중 하나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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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시대가 끝날 무렵 살았던 헤시오도스는 “한 때 황금종족이 있었다고 주장햇다. ‘좋은 것은 모두 그들이 차지햇다. 풍요로운 땅은 맣은 과실을 무한정 쏟아냈다. 평화롭고 평안한 가운데 그들은 땅을 가꾸었고 가축을 사육했다. 그 모습은 하늘에서 신들이 내려다보기에도 사랑스러웠다.’ 헤시오도스가 순수한 영혼들, 악을 물리치는 사람들이라 일컬었던 이 종족 이후에 그들보다 지위가 낮은 은의 종족이 나타났고 다시 그들은 은의 종족과 전혀 다른 재료로 만든 창에서 튀어나온 무섭고 힘센 청동의 종족으로 대체되었다. 헤시오도스는 이 민족이-청동기시대의 아케이아 인이라 알려진- 전쟁을 들여온 과정을 설명하면서 ‘모두가 슬퍼하는 아레스의 죄스런 작업이 그들의 주 관심사였다’;라고 지적했다. 그들은 앞선 두 종족과 달리 평화를 추구하는 농경민이 아니엇다. ‘그들은 곡식을 먹지 않았으며 마음은 단호하고 정복당하지 안는 돌처럼 냉혹했다.’ 헤시오도슨 ㄴ 아케이아인과 그들이 정목한 미케네 인들의 자손들을 독립된 네번째 종족으로 구분하면서 ‘이들은 먼저 있었던 종족보다 더 정의롭고 고상했다’고 덧붙ㅋ였다. 그들은 본래 타고났던 야만서을 어느 정도 벗고 고대 유럽인들이 누리던 더 문명화된 관습을 많이 채택했다. 이 무렵 다섯 번째 종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헤시오도스 시대에 이미 그리스를 ㄹ지배하고 있었다. 헤시오도스는 이들의 후손이었다. 그는 ‘내가 다쇼ㅓㅅ 번째 종족과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떤 사람은 다른 도시를 강탈화곤 한다. 옳다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이제 경건함은 존재하지 않는다.’”다섯번째 철의 종족은 도리아인들이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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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문명의 시작이라 알고 잇던 수메르 문명은 야만인들의 정복 이후에 태어났다. 인도 문명도 그렇게 태어났으며 이집트 문명도 그렇게 태어났고 그리스 문명도 그렇게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 문명은 그들이 파괴한 이전 문명의 잔해를 모아 복원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을 뿐이다. 그들 “문명이 필요로 하는 물질적 사회적 기술”은 “실제 지배 중심 사회 이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법, 정부, 종교, 문자, 야금술, 건축기술, 도시, 예술, 문학, 제의, 상하수도, 광장, 신전과 같은 도시계획 등 모두 지배와 전쟁과 무관했던 문명에서 태어났다. 신화는 ‘문명의 선물’을 준 것이 남성신이 아닌 이전 문명의 신들인 여신이라 인식한다. 실제 농경, 직조기술, 도자기, 문자 등 물질적 기술의 대부분은 여성이 발명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뿐 아니라 이집트나 유럽에서 발견된 증거들을 살펴보면 여성을 정의, 지혜, 지성과 연관 짓는 일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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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칼을 든 야만인들과 함게 모든 것이 바뀌었다. ‘오레스테이아’가 공연되던 시절까지도 쿠르칸족에게 정복당한 선주민들의 후예들은 이전 사회가 어떠했다는 기억이 생생했다. 야만인들의 폭력이 낳았던 암흑시대가 끝나고 문명은 다시 복구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문명에서 다시 살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지배와 그 지배의 수단인 폭력을 부정하는 평등주의와 평화주의였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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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손이 어머니를 따라 계보를 잇고 여성이 씨족의 우두머리그리고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존경받는 제사장이었던 사회에서 사회화된 사람들이 부계 혈통과 함께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은 분명 ‘부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은 어머니를 살해한 아들이 처벌받지 않는 것을 아이스클로스의 에우메니데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결코 이해할 수 없ㅇ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상할 수도 없고 정말로 신성모독적인 일은 우주를 지배화는 최고권력이 무장한 복수심에 가득찬 신들로 의인화되고 인간들이 일상적으로 살인과 약탈, 강간을 저지르는데도 그 신들이 묵과할 뿐 아니라 심지어 정의와 도덕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명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바뀌어야 했다. 신의 이름으로.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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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 중심 체제가 옛 공동 협력 체제 위에 포개어져 두 체제가 함게 지속되는 것은 엣 체제가 다시 힘을 얻을 가능성이 있단 점에서 대단히 위험했다. 모계 씨족 사회의 우두머리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땅을 관리하는 옛 사회 경제 체제는 분명 위협적이었다. 새로운 엘리트 지배층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성들에게서 의사결정권을 빼앗고 동시에 여 사제들에게서 영적 권위를 빼앗았다. 심지어 피정복민들은 익숙한 모계 전통을 빼앗기고 부계사회에 적응해야 햇다. 실제로 고대 유럽, 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가나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한줌의 정복자들은 “새로운 부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정복지에서 부를 파괴하거나 빼앗음으로써 지배력을 획득했다. 이제 군사력과 위협으로 경제적 부를 분배하는 통로를 조절할 사람을 정해야 했다. 지위를 정하는 것은 사회조직을 유지하는 확실한 원칙이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 위에 나머지 절반인 육체적으로 더 강한 남성이 올라선 것에서부터 모든 인간관계가 이 유형을 따르기 시작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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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지배자가 된 야만인들은 미토스를 장악해야 했다. 고대인들은 미토스와 로고스로 세상을 이해했고 각각은 다른 진실을 알려준다고 생각했다. 미토스를 통해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수용하고 혐오해야 하는지 신이 정한 것은 무엇이며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인정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배운다. 또한 사람들은 의식과 제의를 통해 ‘신성한’ 이야기에 참여한다. 그 결과 그 이야기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은 ㅇㅇ인간정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신성한 불면의 진리로 인정받으며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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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원칙을 평등에서 지배로 바꾸는 것은 천붕지열의 변화이다. 그런 변화를 정당화하려면 미토스를 장악해야 했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나오듯이 헤브루 족과 훗날 기독교도, 회교도들은 사원을 무너뜨렸고 벌목으로 신성한 숲을 파괴했으며 이교도 우상들을 살해했다. 또한 영적 파괴도 함게 감행했다. 책을 불사르고 이단자를 처단함으로써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살해하거나 개종했다. 고대 사제들이 신성한 이야기들에 행사했던 중앙집권화된 통제방법을 이해하기란 힘들다. 종교나 국가의 검열이나 대중매체의 방해공작을 제외하면 오늘날에는 매우 다양한 관점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대중이 읽고 듣는 것을 매우 제한했다. 주로 공인된 견해만 읽고 들을 수 있었다. 더구나 공인된 이념에 위협이 되는 주장은 결코 전파할 수 없었다. 수천년 동안 사회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는 고대 사제들이 이용한 영적교육이다. 고대 사회에서 사제는 국가권력을 유지하는 필수 요소였다. 그들은 민중을 지배하고 강탈했던 남성 엘리트들을 위해 봉사했다. 그리고 그들 또한 남성 엘리트였다. 사람들은 점차 폭력적이고 위계질서에 기초한 남성 지배 사회를 정상적이고 옳은 것으로 믿기 시작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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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년 전에 고대 유럽을 유린했던 쿠르간 족과 마찬가지로 남쪽 사막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을 휩쓸었던 헤브루 족은 전쟁의 신, 곧 사납고 질투심 많은 야훼 혹은 여호와를 찬양하는 신앙을 동반했다. 구약성서를 통해 우리는 여호와가 파괴하고 약탈하고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으며 실제로 이 명령들이 충실하게 수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헤브루 사회도 쿠르간 족이나 다른 인도-유러피언들과 마찬가지로 위계질서가 엄격하며 모세의 종족 곧 레위 족이 지배했다. 코나트 혹은 코헨 집안의 몇몇 엘리트가 사회를 지배햇다. 그들은 아론에게서 지위를 물려받은 사제들이었고 실질적인 권력을 소유했다. 구약성서를 보면 그들은 여호와에게서 직접 권력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했다. 더군다나 성경학자들은 바로 이 사제 엘리트 계급이 그들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화와 역사를 다시 작성하는 일을 상당 부분 담당했다고 주장했다.구약성서에서 폭력과 권위주의, 남성 지배라는 지배 중심 사회의 외형을 완성하고 지지함으로써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라고 노골적으로 선언했다. 유럽과 소아시아에서 대규모 파괴를 자행했던 쿠르간 족이나 다른 인도-유러피언 침약자들처럼 고대 헤브루 족도 남성 지배 체제가 엄격한 사회를 세웠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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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지배를 축성한 신 이외에 다른 신은 우상이 되어야 했고 부정되어야 했다. 특히 지배 원리를 부정하는 옛 체제의 미토스는 더더욱 부정당해야 했고 그 주인공들인 여신은 사라져야 했다. 예를 들어 “상직적으로 공공연히 신성시된 성경에서 여신을 언급하지 않은 까닭은 여성을 보호화고 남성이 여성에게 가한 부당한 처사를 복수해줄 신성한 힘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유대교 이전 고대 헤브루 종교는 사회에는 폭력의 지배를 선언하고 가정에선 가부장제를 선언한다. “구약성서에서도 나타나듯이 남성 지배계급은 새로 만든 법률에서 여성을 자유롭고 독립된 인간이 아닌 남성의 소유물로 정의한다. 처음에 여성은 아버지에게 속하고 나중에는 그들이 출산하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남편이나 주인에게 속하게 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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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보자. 구약을 보면 여자의 정절을 대단히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여성은 남성 가부장의 재산이기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 “신명기 22장 28절과 29절 사이에는 ‘만일 남자와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만나 동침하여 정을 통하던 중 발각되면 남자는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50세켈을 주고 그녀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처녀가 아니라면 그녀는 더 이상 그녀의 아버지가 보상받을만한 가치 있는 재산이 못 된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가치를 상실하게 만든 남자가” 그 값을 물어야 하고 그녀를 가져가야 된다는 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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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2장 13절에서 21절은 더 노골적이다. “남자가 자기 부인이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그 녀를 미워하고’ 심지어 그녀를 제거하고 싶어하는 사건을 다룬다. 만약 신부의 순결이 만족스럽게 증명되지 않는다면 남편은 원하는대로 그녀를 제거할 수 있다. 법률에서는 ‘그 여성을 그녀의 아버지가 사는 집 문 앞으로 데려가라 그러면 도시 남자들이 그녀가 죽을 때까지 돌로 칠 것이다.’가고 명시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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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없는 자 돌로 쳐라’는 예수의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은 간통에 대한 율법이다. 간통자는 둘 다 죽이도록 되어 잇다. 그 이유는 “도둑(다른 남자의 재산을 훔친 남자)을 처벌하고 훼손된 재산(남편에게 불명예를 안겨준 아내)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여전히 중동에서 살아있다. 소위 명예살인이 그것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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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예를 더 보자. “판관기 19장에서 성경을 기록하는 사제는 처녀인 딸을 만취한 폭도에게 내어준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상류층 레위 족 출신인 남자가 손님으로 왔다. 베냐민족 깡패 한무리가 손님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위협했다. 분명 폭행을 가하려는 것이다. 그때 집주인 남자가 나서며 ‘잠깐만 내 말을 들어보시오. 여기 내 딸이 있고 이 아이는 처녀요. 그리고 저 손님의 첩도 여기 있다오, 내가 그들을 글어낼 테니 그들을 욕보이든 어지하든 당신들 마음대로 하시오. 대신 이 사람만큼은 해치지 마시오.’라며 부탁했다.이 이야기는 볗ㄹ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듯 대수롭지 않게 서술되어 있다. 그 뒤에 이야기가 좀더 진행되면 ‘손님이 첩을 데리고 깡패들 앞으로 나가고 그들이 그녀를 행음하고 밤새도록 욕보이는’ 내용이 나온다. 나중에 그녀는 ‘자기 주인’이 잠든 문지방 앞에 엎드린채 쓰러졌고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다’ 여자를 주인은 ‘그만 일어나서 가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죽은 뒤엿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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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첩의 신뢰를 배반하고 심지어는 집단 성폭행과 힘없는 여성을 살해한 잔인한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어디에도 동정하는 말 한마디 없으며 도덕적으로 분노하거나 격분하는 언급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딸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 할 수 있는 처녀성과 목숨까지 희생하겠다고 제안한 아버지에게 아무 법적 제재가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레위 족 남자의 부인이라 할 수 있는 여성을 집단 성폭행하고 고문하고 결국 살해했으리라 추정되는 깡패들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책은 겉으로는 성스런 율법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괴상망측한 도덕성을 전제하고 있다.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아버지와 남편들에게 이끌려 강간당하거나 폭행당하거나 고문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도록 다른 사람에게 넘겨지는 것을 합법화할 뿐 아니라 가해자를 처벌하려 하지도 않고 심지어 비난도 하지 않는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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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선행으로까지 추겨세워진다. 롯에 과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롯은 당연하다는 듯 처녀인 두 딸을 집을 방문한 두 남자 손님을 위협하는 깡패들에게 내어준다. 이것은 당시 널리 용인되던 관습이었던 듯하다. 여기에서도 위법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딸들이 분노했다는 이야기도 없다. 오히려 롯을 찾아온 두 손님은 하나님이 보낸 천사로 밝혀진다.”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파괴되었을 때 하나님이 살려준 유일한 의인이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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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노예로 하는 것도 당연하고 오히려 자랑일 뿐더러 여성을 심지어는 자기 딸까지 사람이 아닌 재산으로 보는 그런 사회는 ‘신의 이름’으로 세워진 사회였다. 그 신이 명령한 사회에선 “권위에 불복하고 독자적으로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구하는 일을 가장 큰 죄악으로 간주하여 매우 엄하게 다스리지만 동료를 죽이고 노예로 삼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고 약탈하는 일은 묵인한다. 전장에서 벌어지는 살상은 성스러운 일로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전리품을 얻기 위해 약탈을 일삼고 여성과 어린아이를 강간하며 도시 전체를 파괴하는 일 역시 성스럽다고 용인한다.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에서 나중에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신성국가에서 전쟁과 전제적 지배, 여성의 예속화는 새로운 지배 중심의 도덕성과 사회적 핵심이 되었다. 간단히 말해 문화적 진화의 행로를 성공적으로 돌림으로써 이후 현실은 완전히 달라졌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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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84/99/cover150/8992036221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036221</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Overstretch: 돈이 문제다 -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 문명은 왜 야만에 압도당하였는가]</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569292</link><pubDate>Mon, 16 Apr 2012 13: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56929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024862&TPaperId=556929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282/43/coveroff/899002486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024862&TPaperId=556929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 문명은 왜 야만에 압도당하였는가</a><br/>피터 히더 지음, 이순호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11월<br/></td></tr></table><br/>로마제국이 왜 무너졌는가에 대해선 많은 말들이 있어왔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다. 문제는 왜 로마제국이 그것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을 막지 못했는가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두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로마제국 자체의 문제 때문에 그랬다. 둘째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막기엔 로마제국 자체의 역량이 부족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내생적 원인과 외생적 원인 두가지라 할 수 있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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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적 원인으로 보는 대표적인 견해는 기번의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은 잘 알다시피 서로마제국 멸망의 원인을 내부적 요인에서 찾았다. ‘로마의 쇠퇴는 터무니없는 거대함이 빚어낸 당연하고도 불가피한 결과였다. 번영의 이면에는 부패 요소가 만연해 있었고 파괴의 원인은 정복의 크기로 증대되었다. 그러다 세월 혹은 재난에 의해 인위적 토대가 허물어지자 그 비대한 구조물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주저앉은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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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번의 견해는 덕의 상실이라 요약할 수 있다. 로마는 지배계층의 자제력과 같은 덕 때문에 거대한 제국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성공은 그 덕을 깎아내렸다. 지배층의 타락과 함께 성공의 원인이엇던 덕은 사라졋고 제국은 무너졌다. 기번의 논리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기번이 멸망의 원인으로 기독교를 말하는 것은 그 논리의 연장선이앋. “기독교의 교리논쟁으로 로마제국에 내분이 일어났고 수도승이 될 것을 권장함에 따라 사회지도급 인사들의 정치참여가 줄어들었으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정책을 옹호하여 로마의 전쟁기계가 훼손되었다는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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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자는 의문을 던진다. “5세기 서로마제국의 붕괴는 동로마의 상황과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 한다. 동로마제국은 6세기에도 존속했고 나아가 융성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서로마 시스템 속에서 죄악으로 간주된 모든 요소는 동로마에도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동로마가 더 기독교적이었고 교리논쟁도 더 심했다. 동로마는 또 서로마와 같은 경제적 토대 위에서 서로마와 같은 정부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동로마는 살아남았고 서로마는 멸망했다. 따라서 그것만을 보더라도 제정 후기 서로마의 시스템에 고유의 내적 결함이 있어 스스로 멸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식의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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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4세기까지도 로마제국의 시스템은 잘 돌아가고 잇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팍스 로마나의 본질은 로마화였고 로마화가 제국 시스템의 근간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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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이 수립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의 피지배민족은 그들의 모국어외에 제국의 두 언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런 현상은 특히 부유층에서 두드러졌고 초기만 해도 어느 정도 필요에 따라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 곧 제국의 많은 도시들에서 라틴어 문법학자들이 급속도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학교들을 시작으로 라틴어와 라틴 문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유사교육기관이 제국 전역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4세기 무렵에는 제국 어디서나 문법학자로터 라틴어 교육을 받는일이 가능해졌다. 이로써 우리는 다른 모든 것들의 바탕이 되는제국의 발전, 즉 가장 근본적인 변화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탈리아 이외의지역에 로마의 농촌과 도시를 닮은 풍경이 만들어졌는가 하면 로마와 로마 원로원을 무색케 할 절도로 광범위한 정치사회가 조성되었다. 라틴어와 라틴 문학이 로마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간 것은 로마의 가치쳬게 전반을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고 거기에는 그런 교육만이 올바른 인간-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우월한 인간-을 양성할 수 있다는의미가 담겨 있었다.” 올바름, 우월함의 기준은 정치였다. 제국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이란 의미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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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화로 “방대한 지역의 주민 모두가 로마인이 된 것이다. 로마는 더는 지리적 개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나 이용가능한 문화적 개념이었다. 그로써 로마제국의 성공에 따른 가장 중요한 결과가 나타났다. 새로이 로마성을 획득한 로마인들이 정치적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초대형 국가가 만들어내는 힘과 이익의 분배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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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법학자에게 7-8년동안 교육을 받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지 않았다. 상당량의 돈이 드는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지주계급이엇다. 로마화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이들이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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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은 부유한 지주층만이 시스템에 진입할 수 잇었다. 제정 초기에 그 집단ㅇ속하려면 (지자체의 실권을 쥔) 참사회원이 될 정도의 토지와 개인적으로 문법학자를 두고 자녀를 교육할만한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것은 상당한 수입을 필요로 했다. 정치에 적극 참여한 지주층은 전체 인구의 5%를 넘지 못했을 것이다. 인구의 태반은 아직도 정치참여에서 배제된 농부들이었다. 그들에게 국가는 자신들의 초라한 수확에 세금이나 터무니없이 매기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마라타쿠르레니라는 이름의 산적 때는 제국의 징세원을 가장하여 농부들 재산을 갈취하는 식으로 북부 시리아에서 악명을 떨쳤다. 그들의 행위가 먹혀들었다면 국가의 세금징수가 어떠했을지 조금은 상상이 간다. 제국 인구의 태반은 시스템의 혜택으로부터 베제되거나 혹은 사소한 ㅎ택밖에 받지 못했다, 그것은 로마제국은 언제나 상류층의 이익 위주로 움직였다. 로마제국은 인구의 5%도 안되는 사람들이 부의 80% 아니 그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불평등의 중심에 바로 법으로 지주층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보호해준 중앙정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실제로 로마법의 상당부분은 재산문제에 관련돼 있었다. 기본적 소유권, 소유권의 활용방법(매각, 장단기 임대, 소작을 주는 일 등) 그리고 혼인 재산계약, 상속, 증여 등을 통해 세대 사이에 이루어지는 6재산의 양도 같은 문제가 그런 것들이었다. 서슬퍼런 로마의 형법도 소유권 보호에 단단히 한몫을 하여 좀도둑 이상의 도둑질은 거의 사형으로 다스렸다. 훗날 로마 못지않게 농업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불평등한 토지분배에 기반을 둔 영국의 ‘양반’도 이와 비슷했다. 제인 오스틴이 사랑, 결론, 재산 양도에 관한 고상한 소설을 쓸 무렵의 영국도 도둑질한 자는 채찍형(10페니까지) 낙인형(4실링 10페니까지 교수형(5실링 이상)에 처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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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국가는 정부기구의 모든 분야에서 속주 지주계급의 행정력에 크게 의존했고 징세문제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세금의 효율적 징수는 지주계급의 세금납부 의지에 달려있었다다.” 무산자들이 막대한 수적 우세의 이점을 누리는 상황에서 “모종의 다른 기구가 그것을 막지 않았다면 그 상황은 분명 부의 재분배로 이어졌을 것이다. 4세기에 이 모정의 다른 기구는 지난 몇세기와 다를 바 없이 로마국가였다. 지주들 뒤에는 그들에게 유리하게 법을 집행하여 수적 열세를 만회하게 해줄 능력을 지닌 국가가 버티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지주들이 로마 시스템에 참여한 방식은 조구받기식 등식에 입각한 것이엇다. 지주들이 국고에 돈을 넣어주면 국가는 엘리트 지위의 기반이되는 그들의 부를 보호해주었다. 4세기에는 받는 비율이 주는 비율을 훨씬 웃돌았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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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은 지주를 위한 지주에 의한 지주들의 국가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전히 4세기까지도 그 시스템은 지주들을 위해 잘 돌아가고 있었고 지주들의 지지는 확고했다. 로마제국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징후는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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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제국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는 관점도 설득력이 없다. 로마제국은 언제나 종교와 이데올로기적 통합을 쉽게 이루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래로 로마 제국주의는 로마야말로 주신들에 의해 세계를 정복하고 문명화할 운명을 지녔다는 일관된 신조를 펼쳐왔다. 신들은 로마제국에 인류를 최상의 상태로 만들라는 사명을 부여했을 뿐아니라 활제를 직접 뽑고 영감을 불어넣는 일에도 관여했다. 국가와 신의 관계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신속히 그리고 놀랄 만큼 쉽게 조정되었다. 그에 따라 로마의 주신은 기독교 신이 되엇고 기독교로의 개종과 구원이 인류가 구가할 최상의 상태로 여겨졌다. 제국이 세상에서 신의 뜻을 집행하는 신의 도구라는 주장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달라진 것은 신의 종류엿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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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모든 문제는 지정학의 문제였다고 말한다. 동로마에 비해 서로마는 지정학적으로 불리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양제국이 맞닥뜨린 서로 다른 운명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동로마가 소아시아로부터 이집트에 이르는 기다란 띠 모양의 비옥한 속주들을 북동쪽의 침입자로부터 지키기는 어렵지 않았다. 반면에 서로마는 위태롭기 짝이 없는 라인강과 도나우강으로 이어진 국경지역을 지켜야 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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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조건은 제정 초기부터 같았지 않은가? 문제는 3세기에 지정학적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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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기초는 군사력이다. 제국이 건설될 수 있는 것도 제국이 유지되는 것도 제국이 멸망하는 것도 군사력에 달렸다. 군사력이 강하면 제국을 건설할 수 있고 군사력이 충분하다면 제국은 유지되며 군사력이 약해지면 제국은 무너진다. 제국의 운명은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모든 힘이 그렇듯 무력은 상대적이다. 그 무력이 강한지 충분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지정학적 환경이 결정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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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위기는 3세기에 찾아왔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등장하면서 로마제국의 지정학적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산 왕조으이 탄생은 결코 현대 이라크와 이란 역사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질서가 열렸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사산 왕조의 흥기로 로마는 100년 동안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던 동방에서의 헤게모니를 완전히 상실했다. 로마제국의 전략적 위치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친 것이다. 페르시아의 새로운 초강대국 사산왕조는 3세기에 로마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주저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4세기 로마인들에게 제국의 안전에 가장 큰 위협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두말없이 동방의 페르시아를 지목했을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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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환경의 변화는 로마제국의 능력을 쥐어짜게 만들었다. “로마는 동방의 적을 상대하면서 제국의 다른 국경들도 방어해야 하는이중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군사력 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4세기 말 로마는 몸집도 불어나고 체질도 바뀐 새로운 군대를 조직햇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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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환경의 변화는 정치의 중심을 원로원에서 군대와 관료층으로 옮겨놓앗고 정치의 무대를 로마에서 국경에 가까운 변경도시로 옮겨놓았다. “제국의 정치적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곳은 더 이상 로마의 원로원이 아니었다. 제국의 운명은 국경지역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기동야전군의 사령관과 제국 수도의 고위관료들이 좌우했다.” 지정학적 압력이 증가한 결과였다. 군대는 언제나 로마 정치게임에 끼어왔지만 그 비중은 더 높아졋다. “군대와 정치의 놀라운 협조체계는 로마제국의 권력의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로 인해 군대. 황제, 관료들이 이탈리아를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황제도 여러 명 필요해졋다. 안티오키아와 콘스탄티노플은 라인강 국경지역과 너무 멀고 트리어와 밀라노는 동방과 너무 멀어 황제 한 사람이 3대 국경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다. 징치적으로도 황제가 한곳에서만 부를 베풀어서는 그 많은 군지휘관과 관료들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제위 찬탈의 위험이 상존했다. 3개 지역 군대 모두 황제에게 공정한 떡고움을 기대했다. 따라서 황제 한 사람이 장기간 단독 지배를 하면 반드시 분란이 일어났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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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의 위기로 로마의 정치구조는 급변했고 늘어난 군대와 관료는 제국의 재정에 압박을 가했다. “학자들은 제정 후기 로마군 병력을 40만명에서 60만명 사리오 본다. 그보다 규모를 낮춰 잡는다 해도 3세기 초에서 4세기 중반 사이 로마군은 애초의 30만명에서 10만명이 늘어나 최소한 40만명은 되었을 것이다. 로마의 재정지출 비붕이 가장 큰 항목은 언제나 군비엿다. 따라서 군비가 1/3만 늘어나도 제국이 거둬들여야 하는 세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재정압박에 시달린 제국은 3세기말에서 4세기 초 재정개혁에 들어간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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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개조의 효과는 그 즉시 나타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3세기 말에 로마는 전략의 안정화를 어느 정도 기할 수 있게 되엇다. 동방전선의 증강된 병력에 급여를 지급할 여력이 생긴 것이다.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들어선 뒤로 로마가 재무구조의 안정을 기하는데만 무려 5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또 그 과정을 감독하느라 중앙 행정기구도 몹시 비대해졋다.”<o:p></o:p>
개혁은 성공적이엇다. 개혁 이후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은 저지되었고 동방은 안정되엇다. 그러나 마른 수건까지 쥐어짠 그 개혁으로 제국의 재정력은 한계에 달한 상태가 된다. 한계에 달한 제국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대응할 수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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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영토확장은 라텐 문화와 야스트로프 문화라는 두 물질문화권의 중간지역에서 멈추었다., 두 문화는 일반적인 삶의 5ㅅ5ㅓㅇ격에서 몇가지 중요한 차이저을 보였다. 로마에 정복도기 전 유럽의 라텐 문화권은 마을 그리고 도시라고 해도 좋은 그보다 조금 규모가 큰 거주지를 형성했다. 그 문화권의 일부 지역에서는 주화가 사용되기도 했고 문자해독능력을 갖춘 사람도 있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도 그가 정복한 라텐 지역들 가운데 적어도 몇몇 부족 특히 갈리아 남서부 지방의 아이두이족들 사이에 복잡한 정치조직이나 종교조직이 보현화되더 있었다는 내용이 기록돼있다. 이것은 라텐 문화권이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전사, 사제, 장인계급을 부양할 식량생산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와 달리 야스토르프 문화는 낙농업을 영위하며 빠듯하게 살아가는 생활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주화도 사용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문맹이었으며 서기 1세기까지도 번듯한 거주지는 물론 마을조차 형성하지 못했다. 분화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다는 증거도 남아있지 않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통 야스트로프 문화권은 게르마니아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런 경제권에선 투자효율이 절대 좋을 수 없다. 무력은 공짜가 아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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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제국은 농업과 목축을 겸하는 중간지대에서 농업에 의존하여 안정을 기하려는 경향이 짙다. 중간지대의 현지 생산력만으로는 주둔군이 필요로 하는 군량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게르마니아는 정치적으로 심하게 분열돼 있어 로마에 정복된 비옥한 지역의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에서 배제된 것은 군사적으로 강대해서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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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텐 문화권과 야스트로프 문화권은 기후학적으로 볼 때 지중해성 기후대와 대륙성 기후대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브라이언 페이건은 로마제국의 팽창과 멸망을 기후대의 변화란 변수로 해석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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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야만족과의 투쟁과 함께 성장했다.&nbsp;첫번째 적은 켈트족이었고 켈트족을 제압하면서 로마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nbsp;페이건은 켈트족과 로마의 대결을 기후대의 대항으로 해석한다.&nbsp;“켈트족의 농경은 대륙성 기후대에 적합했다.&nbsp;대륙성 기후대가 남하할 때 켈트족도 같이 남하했고 로마는 이탈리아로 남하란 그들과 만났다.&nbsp;그러나&nbsp;“기원전&nbsp;300년경 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 사이의 추이대가 이동하기 시작해 지금의 부르고뉴까지 북상했다.&nbsp;그 결과 켈트 지역의 남쪽에 온난건조한 여름과 습한 겨울의 지중해성 기후가 자리를 잡았다.&nbsp;많은 도시 인구를 위해 밀과 기장 같은 몇가지 작물을 광범위하게 재배하는 로마식 농경은 건조한 남유럽 환경에 매우 적합했다.&nbsp;추이대가 북상함에 다라 고마의 힘이 급격히 증대했다. ‘로마의 평화’는 북상하는 추이대를 따라가며 꾸준히 켈트족의 땅을 잠식햇다.&nbsp;기원전&nbsp;2세기 중반 켈트족의 땅은 로마의 속주가 되엇다.&nbsp;온난한 기후 조건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 내내 지속되었다.&nbsp;로마의 장점은&nbsp;3가지,즉 잘 조직된 군대.&nbsp;도로와 해로 같은 기반시설,&nbsp;군대와 도시 주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효율적인 농업생산력이었다.&nbsp;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비롯한 모든 속주들은 로마인들을 부양했다.&nbsp;결국 모든 것은 사회의 주식이 된 곡물을 대량생산하는 능력에 달려있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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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강력한 국가와 튼튼한 경제에 어울리지 않게 기후에는 놀랄만큼 취약했다.&nbsp;문명의 조직도가 낮았더라면 오히려 제국은 기후의 압박을 거뜬히 이겨냈을 것이다.&nbsp;일반적인 추위와 가뭄주기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nbsp;대규모 엘니뇨도 마찬가지였다.&nbsp;그러나 유럽의 기후대가 크게 변동하고 그에 따라 기온과 강우량이 달라지자 로마의 지배는 큰 타격을 받았다. 500년에 서유럽의 날씨는 더 추워지고 습해졌으며 갈리아는 곡식의 대량생산이 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다.&nbsp;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의 경계는 또다시 북아프리카로 내려갔다.” (브라이언 페이건)<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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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성 기후대의 확장과 함께 그에 맞는 야스트로프 문화권의 게르만족이 남하한 것이라 페이건은 해석한다. 물론 단순히 기후의 변화만으로 게르만족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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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에서 5세기까지 “유럽의 게르만족은 인구는 큰폭으로 증가했다. 인구 규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식량인데 게르만족의 경우 농업혁명으로 곡물생산이 크게 늘어나면서 인구가 증가한 것이다.” 곡물생산의 증가는 다른 경제분야도 촉진해 철의 생산, 도기, 유리, 귀금속 제품 의 생산 등도 증가했다. 4세기 무렵 게르마니아에선 경제혁명이 일어났다고 저자는 말한다. 경제혁명은 사회혁명으로 이어졌다. “게르만 유럽에는 지배적인 사회 엘리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혁명은 사회적 분화를 촉진했다. “경제혁명으로 창출된 부는 고르게 분배되지 않고 특정 집단에 편중돼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근대의 산업력명이나 최근의 세계화로 창출된 부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부는 집단 사이에 치열한 경쟁을 유발했을 것이다. 또한 그 부가 막대할 경우 그것을 차지한 집단은 기존 권력구조와는 다른 새로운 권력구조를 창출했을 것이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 사분오열되어 있던 게르만족은 서서히 몇몇 집단으로 통합되어 갔다. “게르만 동부나 서부 모두 새로운 부가 증가하자 종주권을 차지하기 윟나 쟁탈전을 벌였고 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직업군대도 필요해졋다. 그 과정에서 4세기 게르마니아의 특징인 보다 규모가 큰 정치연합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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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4세기까지도 게르만족은 위협이 아니었다. 켈트족과 마찬가지로 단합할 줄 모르는 특성때문이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정치연합에 그친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의 시스템에서 병력을 제공하는 동맹자이거나, divide and rule의 전략에 따라 로마의 계략에 따라 자기들끼리 싸우는 장기말일 뿐이엇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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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훈족과 함께 모든 것이 변했다. 동쪽에서 훈족이란 당구공이 날아오면서 하나씩 하나씩 게르만족을 서쪽으로 밀어냈다. 게르만 부족이 하나씩 서로마의 영토로 들어올 때마다 제국은 납세자들이 학살당하고 농토가 황폐화되어 세입을 잃었고 게르만족이 영토를 차지하면서 납세자를 뭉텅이로 떼어주어야만 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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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상대해야 했던 “외부의 무장세력은 총 11만에서 12만명 정도였다. 이 외부침입자들이 불러일으킨 원심력 때문에 5세기 말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 신생왕국으로 하나둘씩 분열돼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세력을 개별집단으로 헤아려보면 각 집단의 병력은 수십만명이 아닌 수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전혀 압도적 병력이 아니다. 375년 서로마는 적어도 30만의 병력은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는 그것이 바로 서로마제국 붕괴의 실상을 보여주는 요소가 될 수있다. 서로마제국은 13세기 몽골족의 침략을 받은 중국과 달리 한순간의 정복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만족들은 당초 자신드르이 정주지를 세울 정도의 군사력만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 점차 세력을 키우면서 로마제국의 힘을 소진시켰고 그로ㅓ부터 독립왕국을 수립하는데는 적어도 2-3세대의 기간이 걸렸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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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은 일시적인 상실이거나 영구적 상실이거나에 상관없이 영토를 잃을때마다 국가의 생혈인 세수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그에 따라 제국이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역량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렇게 서서히 제국은 말라죽어야 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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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는 서로마가 그냥 죽게 놔두지는 않았다. 40%의 병력을 항시 페르시아 전선에 묶어두어야 하고 그외의 변경도 방어해야 하는 형편에서도 할 수 있는 지원은 모두 할만큼은 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서로마를 지키기엔 턱없이 부족햇다. 4세기에 이미 한계까지 올라간 재정부담은 서로마는 물론 동로마의 발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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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앙정부의 한계는 제국 붕괴에 필요요건은 될 수 있을지언정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5세기 서로마제국은 만족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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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 흔들리자 제국의 기둥인 “속주의 지주들 또한 불편한 진실에 맞닥뜨려야 했다. 국력의 약화는 그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기득권을 위태롭게 했다. 토지에 기반을 둔 지주들로서는 새로운 지배세력과 손을 잡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한 도모할 수 있는 길이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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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이어 유럽에 등장한 제국, 즉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제국이 9세기 말에 붕괴하는 과정은 서로마제국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카롤링거 왕조의 위대한 정복이 이루어진 뒤에도 항상 재원부족에 시달렸고 그런 상태가 2-3세대 넘게 지속되었다. 프랑크 제국은 특히 서로마제국을 500년동안 떠받쳐준 요소였던 재분배적 과세권을 결코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지방 엘리트들의 지원을 얻는 일에 중앙의 돈을 스게 되어 국가재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 결과 지방엘리트들은 프랑크 제국 수립 후 100년만에 자치를 도모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때로는 격렬한 투쟁 없이도 그것이 수월하게 얻어졌다. 몇세기 동안 보유했던 조세기반을 외부세력에게 빼앗긴 서로마제국과 달리 프랑크 제국은 통제할 자산이 처음부터 적었기 때문에 재정의 파탄에 이른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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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282/43/cover150/8990024862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024862</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역사의 시간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569280</link><pubDate>Mon, 16 Apr 2012 13: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56928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80941X&TPaperId=556928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579/89/coveroff/899080941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80941X&TPaperId=556928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a><br/>페르낭 브로델 지음, 김홍식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03월<br/></td></tr></table><br/>‘역사학의 대상은 무엇인가?’ 브로델의 경력은 이 질문과 함께 시작했다. 아날 학파 이전까지 역사학의 대상은 사건들이었다. 브로델은 “정치와 외교를 비롯한 사건 중심의 역사를 고집하던 기성 ‘소르본학파’에 강력하게 반발”했고 그의 휘하에 “젊은 역사학도들이 모여들어 아날학파 2세대를 형성’했다. 브로델은 사건이 아니라 구조 즉 “장기지속을 역사학뿐 아니라 모든 사회과학 방법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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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델은 “역사를 ‘시간지속의 변증법’이라 표현”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이 둘 사이에는 활발하고 밀접한 대립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우리 역사가들이 보기에 이러한 대립이야말로 사회적 실재의 핵심에 존재하며 다른 어느 요소보다도 중요하다. 우리의 세계를 파악하려면 세계를 움직이는 갖가지 힘과 조류, 움직임의 계층적 질서를 정의;해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합쳐서 다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연구하는 각 순간마다 오래 이어지는 움직임과 짧은 움직임을 구분해야 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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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말인가? 역자는 이렇게 풀이한다. “과거의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생기면 오랜 시간 관성을 얻은 힘과 새로 등장한 힘 사이에 충돌과 반목이 생기기도 하고 절충과 타협이 일어나기도 한다. 옛것을 유지하려는 힘은 긴 시간대의 힘이라 볼 수 있고 새것으로 바꾸려는 힘은 짧은 시간대의 힘이라 볼 수 있다.” 역자는 이런 예를 든다. “쓰레기를 분리수거한지는 얼마 되지 않으니 재활용 기준에 다라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은 짧은 시간의 힘이고 아무렇게나 버려 한꺼번에 매립하는 것은 오랜 시간의 힘이다. 한동안 분리수거 체계가 확대되는 듯하더니 얼마전부터 각 생활거점에서 분리수거한 쓰레기들도 중간처리과정에서 다시 섞여 매립장으로 간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처음에는 짧은 시간의 힘에 밀리는 듯했던 오랜 시간의 힘이 다시 승리하는 형국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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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델은 이렇게 역사를 시간의 지속에 따른 레이어로 나눠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통 우리 눈에 잘 띄고 우리의 관심이 쏠리는 대상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새로운 것들, 즉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브로델은 그러한 단기적 시간대에 주목하는 역사를 ‘표층의 역사’라 본다. 그러나 이 세계의 배후에는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장기지속하는 ‘심층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고 본다.” ㅜ심층의 역사는 “밑바닥에서 표층의 역사를 떠받치고 또 제약하면서 천천히 밀고 나가는 육중한 힘을 행사하는 실체라고 브로델은 생각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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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델이 말하는 심층의 역사는 아날 학파에서 장기지속이란 말로 통일되어 쓰인다. 장기지속은 사회과학에서 흔히 말하는 구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로델이 말하려는 것은 어떤 시스템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것은 “무언가의 결합이고 건축물과 같은 모습이겠지만 그보다는 시간이 흘러도 마모되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는 무언가의 실재를 뜻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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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델은 표층을 조건짓는다는 의미에서 심층을 ‘장기지속하는 감옥’이라 부르기도 한다. 심층이 구조와 다른 점은 시간만이 아니다. 브로델이 말하는 심층은 기든스 말하는 practical consciousness와 비슷하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수천 가지에 달하지만 아무도 결정할 필요없이 그것들 스스로 완수된다. 사실 이러한 일상적 관행은 우리가 충분히 의식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내 생각에 인류의 삶은 절반 이상이 일상생활에 묻어서 굴러간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수없이 많은 행동이 뒤죽박죽 누적되고 무수히 되풀이되면서 우리 시대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습관적 행동은 우리가 삶을 영위하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옥죄기도 하면서 우리가 사는 내내 우리를 대신해 결정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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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든스는 무의식이란 용어를 재정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실상 우리가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은 자동화된 루틴을 말한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핸들을 돌리고 브레이크와 액셀을 왔다갔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운전하면서 의식하는 것은 전화도 받고 잡담도 하고 음악도 듣는 의식의 표층에 떠있는 행동들이다. 그러나 갑자기 핸들이나 브레이크가 이상할 때 의식(discursive consciousness) 아래에 가라앉아 스스로 돌아가던 운전 루틴이 의식의 표층에 떠오른다. 일상어법에서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들은 대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의식 표층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기든스는 이것과 (의식으로 떠올릴 수 없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구분하여 불러야 된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기든스는 사회과학에서 구조라 부르는 것들이 자리잡는 곳이 바로 그가 practical conscioussness라 부르기를 제안한 곳이라 말한다. 그가 구조라 부르는 것은 시스템과 다르다. 시스템은 지금 여기에 실제하는 것이며 구조는 그 시스템을 짜기 위한 재료에 가깝다. 그가 구조라 부르는 것은 소쉬르가 말하는 langue에 가깝다. 언어의 통사, 음운구조, 의미론들이 그렇듯, 기든스가 말하는 구조는 역사적으로 켜켜이 쌓인 시간위에 형성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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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델이 장기지속을 심층 또는 무의식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기든스와 비슷한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가 심층, 무의식으로 부르는 것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오래된 것들이 많다. 이처럼 수백년 전의 과거는 아주 오대된 것이지만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현재로 흘러온다. 마치 아마존 강이 엄청난 물줄기에 토사를 실어 대서양으로 쏟아내는 모습과 비슷하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물질생활’이란 편리한 용어로 파악하려는 내용이다. 물질생활은 인류가 이전의 역사를 지나오는 동안 자신의 삶 아주 깊숙한 곳에 결합ㅎ해온 것이다. 마치 우리 몸속의 내장처럼 깊숙한 곳에 흡수되어 잇는 삶이다. 그래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게 된다. 이것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1권을 써나가는 길잡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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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브로델이 말하는 심층으로서의 물질생활은 기든스가 구조에 대해 말하듯 이중성(duality)을 갖는다. 하나는 조건으로서 구속하는 의미, 둘째는 “구조 자체를 만들어내고 또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을 뜻하는” 의미이다. 역자는 이렇게 말한다. “’장기지속은 곧 구조를 뜻한다’라고만 아해하기 곤란한 딜레마 같은 것 있다. 오랜 세월의 무게가 누적되어 형성되는게 구조라면 그 런 구조를 만들어내는 오랜 세월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 세월의 무게와 그로부터 형성된 구조가 아무리 무겁고 단단하더라도 세대를 거듭하는 ‘긴 시간대의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역사를 창조하는 원동력은 어느 한두 세대의 행위나 그들이 처한 조건을 뛰어넘는 훨씬 장기적이고 심층에 있는 힘에서 비롯된다는 말로 읽힌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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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는 장기지속에 한가지 의미가 더 있다고 말한다. “브로델은’우리는 심층의 역사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단지 우리의 생각으로 비추어 볼뿐입니다.’라고도 말한다. 장기지속이라는 개념은 역사를 기술하는 내용이나 결과라기보다는 역사를 기술하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또 한 그러한 방법으로 찾을 수 잇는 여러가지 비체계적인 재료를 가리키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무언가의 구조랄지 어떤 역사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하낟. 오히려 그렇게 찾아낸 여러가지 재료에서 읽어내야 할 과제가 구조나 법칙이 될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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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브로델은 베버의 이념형을 도입한다. “그의 핵심논지는 이 세상에 언제 어디서나 즉 시공을 초월해 적용가능한 보편타당한 모덿은 없다는 것이다. 즉 모델은 관찰자가 눈여겨본 사회 환경에서 추출한 실재를 반영해 만든 일종의 가설이고 설명체계인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얼마나 잘 적용되는지 시험해봐야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모델을 배에 비유하는 브로델은 일단 모델이라는 배를 만들면 역사적 시공의 물줄기에 띄워보는 시험항해를 한다고 말한다. 시험항해란 모델이 상정하는 실재, 즉 사료를 찾아 검증하는 일이다. 여기서 브로델은 역사적 시공의 구체성에서 이탈하는 보편타당한 모델을 배격함과 동시에 어느 정도 장기적인 연속성을 찾아 나서지 않고 단기적 사건에만 주목하느 태도도 배격한다. 브로델은 모델의 내용보다 모델을 활용하는 방법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잇다. 또 모델과 사실 사이의 지속적인 왕래를 위해 정밀한 개념의 모델보다는 되도록 많은 사실을 담아 비교해볼 수 있는 다소 느슨한 모델을 역사서술의 준거로 삼았다고 이애할 숭 ㅣㅆ다. 브로델이 역사 기술에 활용하는 모델들이 엄밀한 개념 정의 면에서 느슨한 혹은 과소결정된 것들이라는 점을 알아두는 것은 분량이 엄청난 그의 저서를 읽어나갈 때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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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15-18세기 서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이 시공속에서 자본주의란 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브로델은 두개의 모델을 시험한다. 첫째는 물질생활-시장경제-자본주의란 삼층집 모델이다. “브로델은 물질생활을 ‘물질문명’이라고도 표현한다. 이러한 삶의 차원들은 아무 말 없이 저절로 굴러가는 듯하지만 이것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토대이다. 또 아주 오랜 세월동안 장기지속하면서 형성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삼층집에서 일층에 위치함은 바로 그런 의미다. 물질생활은 거의 다 자급자족에 가까운 사용가치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브로델은 자급자족에서 탈피해 ‘교환가치의 문지방을 넘으면서부터 경제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물질생활의 거대한 등판을 딛고 ‘경제생활’이 시갖된다. 여기서부터 삼층집의 일층 위로 이층이 올라서기 시작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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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델이 말하는 경제생활은 ‘교환의 세계’란 제목의 2권에서 다뤄지는 내용이다. 그 내용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시장과 그리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브로델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다르다 본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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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는 처음엔 브로델이 경제생활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라는 두층으로 나눤다고 본 것같다고 한다. 그러다 경제와 시장경제를 같은 것으로 보고 자본주의는 별개의 한층으로 본 것으로 생각이 바뀐 것같다고 생각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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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와 자본주의가 다른 이유로 브로델은 중국을 예로 든다. “기초적 시장 단계에서 가장 놀라운 형태로 시장을 조직한 곳은 분명 중국이다. 시장이 거의 수학에 가까울 정도로 정확한 지리에 바탕을 두고 조직되었다. 가령 장이 서는 읍내나 작은 도시를 백지 위에 찍은 점이라 치면 그 주위로 뺑 돌아가며 여섯에서 열개의 마을이 위치한다. 이 마을들은 모두 농부가 읍내 시장에 갔다가 당일 내에 돌아올만한 거리에 자리잡고 잇다. 윌리엄 스키너는 중국농총의 생존을 결정하는 곳은 촌락 자체가 아니라 촌락을 아우르는 시장권이라고 했는데 옳은 지적이다. 이와 같은 읍들도 도시를 적절한 거리에서 감싸며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도시의 위성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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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브로델은 중국은 자본주의가 없었다고 말한다. 교환의 상층이 없었기 때문이다. 브로델이 말하는 자본주의는 이 교환의 상층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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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까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이 두형의 활동은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그 무렵까지 인류가 영위하는 생활의 대부분은 여전히 거대한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생활’ 속에 잠겨 있었다.” 자본주의라는 “실재는 화려하고 섬세하지만 비좁은 층위에 속해 있었고 경제샐활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했다.” 그 뿐 아니라 “보통 ‘상업 자본주의’라 일컫는 구체제하의 자본주의는 시장경제 전체를 장악하지도 못했고 마음대로 주무르지도 못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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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델은 삼층집 모델을 이렇게 묘사한다. “시장경제는 그 본성상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역할에 불과하니 전체를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19세기 이전에는 광대한 일상생활의 대양이 아래쪽에서 시장경제를 떠받치고 있었고 자본주의 메커니즘은 두번에 한 번 정도의 빈도로 위쪽에서 시장경제를 조작햇다. 즉 시장경제는 이 두층 사이에 끼어 있는 하나의 층에 불과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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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브로델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나누어 보는가? 그 이유는 자본주의가 반시장적이기 때문이라 브로델은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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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의 “거래는 투명해서 놀랄만한 사태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들 각자가 거래에 관한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잇고 이익도 항상 왠만한 정도엿기 때문에 사전에 개략적인 계산이 가능했다. 읍내에서 열리는 시장이 이러한 교환의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거래는 다르다. “중개인이 끼어들게 된다. 이 중개인은 기회를 노렸다가 상품을 사재기하고 재고 물량을 조작해서 시장을 교란하거나 지배하고 가격에 영향을 미쳤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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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델은 교환의 세계는 수직적 위계로 나뉘어진다고 본다. “대체로 아래층에 속하는 동네에서는 시장경제의 모습처럼 투명한 경쟁이 이루어진다. 그 수직 사다리의 위로 올라갈수록 이러한 시장경제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교환의 영역이 펼쳐진다는 것이 브로델의 논점이다. 이 상층영역에서는 소수의 덩치 큰 선수들이 영악한 술수와 힘을 휘드르며 법규와 규볌을 우회하거나 무시하고 높은 이익을 독차지한다. 브로델은 경쟁의 힘이 작용하지 안ㅇㅎ는 이 별세상 같은 교환의 상층부를 반시장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영역의 활동을 도저히 시장경제로 봐줄 수도 없고 경쟁과 규범이 아니라 독점과 지배가 힘을 행사하는 곳이니 시장경제와는 정반대라는 이야기이다. 바로 이 영역이 ‘예나 지금이나 산업혁명 이전이나 이후나 자본주의란 실체가 존재하는 곳’이라고 말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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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델이 자본주의라 부르는 곳에선 “소의 시장경제의 핵심법칙인 경쟁이 별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다음로 상인이 누렷떤 두가지 이점을 들 수 잇다. 하나나는 상인이 끼어들면서 생산자와 최종적인 상품 수요자의 관계가 끊어짐에 따라 시장의 양쪽 사정을 다 아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상인이 이득을 볼 가능성이 많았다. 다른 하나는 그의 주된 무기인 현금이 항상 수중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생산과 소비 사이에 기다란 상거래망이 형성된다. 이러한 상거래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분명히 그 효율성 덕분이엇다. 특히 대도시에 물자를 공급하는데 효율적이었고 그 덕분에 정분에 정부 당국의 양해를 얻거나 적어도 규제를 느슨하게 풀어주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거래 경로가 아주 먼 장거리로 늘어날수록 그만큼 통상적 규제와 간섭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쉬워졌고 자본주의적 과정이 더욱 선명하게 발생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과정은 원거리 무역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원거리 무역은 원하는대로 활동할수 있는 자유공간 그 자체였다.” 자유공간은 초과이윤의 공간이었다. “이처럼 두둑한 이익에서 상당한 규모의 자본이 축적된다. 특히 원거리 무역은 소수의 사람들만 참여했으니 자본축적이 빠르게 진행됐다. 이런 사업에는 아무나 참여할수없었다. 이슬람 세계에서든 기독교 세계에서든 이러한 자본가들이 군주와 가까운 사이였고 국가에 협조하면서 또 국가를 이용하는 존재엿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들은 오래전 아주 일찍부터 국가의 경계를 넘어섰고 해외 상거래 중심지의 상인들과 손발을 맞추며 거래했다. 또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게임을 왜곡할 수천가지 방법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들은 지식, 정보, 문화 면에서 누리는 우위를 바탕으로 주변에서 값나가는 것이면 무엇이든 장악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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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진보의 동력이라 볼 수 없다고 브로델은 말한다. 오히려 “모든 것이 물질생활의 거대한 등판을 딛고 서 잇다. 물질생활이 팽창하면 모든 것이 앞으로 나아간다. 시장경제는 물질생활을 희생시키면서 그 자신은 빨리 팽창하고 또 자신의 관계망을 확장한다. 이렇게 시장경제가 팽창할 때 자본주의는 항상 이득을 본다. 나는 기업가를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해결사인 양 내세우는 슘페터의 생각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은 어디까지나 결정적인 것은 전체의 운동이며 자본주의는 어떤 형태의 것이든 간에 우선은 그 밑에서 받쳐주는 경제를 바탕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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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시대 중국정부들이 자본주의를 용인하지 않았고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없엇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독점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며 그것은 힘의 논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국가와 한 몸을 이룰 때에만 즉 자본주의가 국가가 될 때만 승리한다.” 자본주의는 권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권력이 될 수 없을 때 자본주의는 성공할 수 없다. “명나라와 청날 때의 중국이 그러한 경우이다. 중국만큼 선명하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구체제의 프랑스 왕정도 그러한 경우이다. 프랑스 왕정은 상인들에게 특권적 역할을 주지 않았고 귀족으로 구성되는 지배적 위계를 가장 중시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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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권력현상이라는 것은 부르주아지의 역사 자체가 증명한다고 브로델은 말한다. “서구에서 개인이 홀로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지는 않았지만 역사는 똑 같은 교훈을 되풀이해 보여준다. 즉 개인의 성공은 언제나 악착스럽게 재산과 영향력을 야금야금 키워가는 신중하고 세심한 가문의 자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재산과 권세가 축적되는 과정을 눈여겨보면 유럽에서 봉건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봉건체제에서는 영지를 차지하는 영주들의 가문이 혜택을 누렷다. 가장 기본적 재산인 토지를 봉건 영주들끼리 나워 갖는 것이 부를 안정적으로 할당하는 형태이기도 했고 봉건 사회의 맥락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방편이기도 햇다. 부르주아지는 수백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특권계급에 붙어 기생했다. 그들 가까이에 서식하면서 그들의 실수와 사치, 게으름과 어리석음을 이용해 이 특권계급의 재산을 빼앗아간다. 그러다 결국 그들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스스로 특권계급이 된다. 이러한 유형의 사회는 봉건 사회에서 싹트기 시작해 여전히 절반은 봉건적인 채로 남아있기 때문에 소유권과 사회적 특권이 비교적 잘 보호되기 마련이다. 그만한 지위에 오른 가문들은 비교적 별 탈 없이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소유권은 신성불가침으로 취급된다. 그래야만 화폐경제를 배경으로 자본주의가 생겨나게 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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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럽을 벗어나면 그런 특권의 안정성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엿다고 브로델은 말한다. 중국의 경우는 과거제도 때문에 특권계급의 문호가 열려 있었고 사회적 이동성이 훨씬 컸다. 특권계급이 되면 “재산을 모으게 되지만 그 재산이란 것 유럽에서처럼 커다란 가뭊ㄴ을 일으킬 만한 것은 되지 못했다. 더욱이 재산이 아주 많거나 권세가 큰 가문은 원칙적으로 국가의 감시를 받는 표적이 되엇다. 국지적으로 상인과 부패한 관리가 공모하는 일이야 늘 있었지만 중국의 국가는 언제나 자본주의 확산에 적대적이엇다.중국의 진정한 자본주의는 중국 밖에서만 존재했다. 예를 들어 동남아 군도에서는 중국 상인이 완전히 자유를 누리며 행동하고 군림할 수 있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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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수직적 위계를 필요로 한다. 즉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성공하려면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자본주의에 필수불가결한 그 사회적 조건이란 사회적 질서가 어느 정도 안정적이어야 하고 국가가 자본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중립적이거나 아니면 허약하거나 호의적이여야 한다.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밤의 손님’이다. 모든 것이 다 갗춰졌을 때 자본주의가 당도한다. 달리 말하면 수직적 위계라는 문제 자체는 자본주의 너머의 문제이고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문제이며 자본주의가 출현하기에 앞서 존재하며 자본주의를 통제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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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본다면 맑스주의자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당신이 자본주의라 부르는 것은 생산양식인가?” 브로델은 자본주의란 용어 자체를 마지 못해, 달리 쓸 말이 없기에 쓸 뿐이다. 아마도 그런 물음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대답을 한다면 자본주의는 “자신의 고유한 요소들을 스스로 번식해가는 독자적인 ‘생산양식’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역자는 그말을 이렇게 풀이한다. “브로델은 자본주의라는 것은 생산양식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에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브로델 식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생산양식의 바깥보다는 위에 존재하면서 생산양식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존재. 즉 그가 말하는 최상층의 존재일 것이다. 따라서 브로델은 19세기 들어 자리를 잡은 산업자본주의가 진짜 자본주의이고 이전의 상업자본주의는 가짜 자본주의라고 생각하는 시각에 반대한다. 상업자본주의가 아닌 자본주의는 없었으며 19세기 이전이든 이후이든 19세기 중에든 금융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 상업자본주의는 늘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 말한다. 어디에서 높은 이익이 생기느냐에 따라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우선적 분야나 투자가 변할 뿐이라는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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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본 3층집 모델을 “지리적 공간에 횡적으로 펼치고 그 공간에 중심부-중간부-주변부라는 계층적인 지배-종속 관계를 더하면” 세계-경제(World-economy 역자는 경제계란 번역어를 제시한다.) 모델이 된다. “중심부에도 자본주의-시장경제-물질생활의 삼층집이 있고 중간부와 주변부에도 각각 삼층집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브로델의 논의를 따라가보면 결국 중심부의 최상층에 위치한 자본주의가 경제계 전체를 조직하는 힘을 발휘화는 곳이 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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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층집 모델과 경제계 모델로 자본주의의 역사를 살펴본 후 브로델은 자본주의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로 세가지이다. 첫째 자본주의는 여전히 국제적 자원과 기회를 활용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는 세계적인 차원과 세계적인 규모에서 존재한다. 적어도 세계 전체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현재 자본주의가 처한 커다란 관심사가 무엇인가? 바로 이 세계주의의 판을 다시 짜는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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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자본주의는 법에 근거한 것이든 관행에 근거한 것이든 여전히 독점에 의존한다. 독점이라는 문제를 놓고 격렬한 반대가 빗발쳐도 자본주의는 집요하게 독점을 유지한다. 조직이 여전히 시장을 우회하고 있다는 말이 오늘날에도 들여온다. 이런 문제가 정말로 새로운 사실이라고 여긴다면 잘못된 것디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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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사람들이 늘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자본주의는 결제 전체와 사회적 노동 전체를 포괄하지 못한다. 자본주의는 결코 자신의 완벽한 시스템 속에 이 두 가지-경제 전체와 사회적 노동 전체-를 다 주워 담지 않는다. 앞에서 물질생활과 시장경제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로 구분하는 삼중 구조를 제시했다. 이 모델은 서로 다른 것을 구분하고 설명하는 놀랄 만한 가치가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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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자본주의에 대한 브로델은 총평은 이러하다. “최악의 오류는 자본주의를 경제 시스템이라고만 여기고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사회질서를 이용해 생존하고 애초부터 육중한 상대자였던 국가와 대등한 지위에서 맞서기도 하고 공모하기도 하는 존재이다. 또 사회구조를 지탱해주는 문화의 역할도 이용한다. 소수의 특권으로서 존재하는 자본주의와 사회와 능동적으로 공모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질서의 한 실재이고 정치질서의 한 실재이기도 하며 문명의 한 실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경제 영역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특수한 형태이다. 그 실체는 인접한 영영과 그 영역들에 침투한 모습을 비추어 보지 않고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을 것이고 그때에야 자본주의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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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579/89/cover150/899080941x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80941X</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행성의 세기: 잔치는 끝났다 - [긴 여름의 끝 - 지구에게 문명과 인류의 생존에 대해 묻다]</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548073</link><pubDate>Thu, 05 Apr 2012 07: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54807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62406X&TPaperId=554807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269/19/coveroff/895862406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62406X&TPaperId=554807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긴 여름의 끝 - 지구에게 문명과 인류의 생존에 대해 묻다</a><br/>다이앤 듀마노스키 지음, 황성원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07월<br/></td></tr></table><br/>“지난 2세기 동안 세계경제는 폭발적으로 증가햇다. 이것은 자연계를 극단적으로 쥐어짜는 경제 빅뱅과도 같았다. 폭발적인 성장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이에 대해 사람들은 종종 인간의 천재성과 기술적, 제도적 혁신이 자신을 부양할 수 있는 경제성장을 일으킨 것이라 답한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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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경제학자들을 대표적인 예로 든다. “역설적이게도 주류 경제학자들은 직업적으로는 물질적 문제에 대해 생각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지만 주로 인간의 독창성과 기술을 가지고 모든 것을 심지어는 극단적인 기후변화마저 극복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가정 때문에 물리적 실재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자유롭다. 노벨경제학상 수장자인 로버트 솔로가 인간의 독창성 덕분에 경제는 자원고갈을 대체할 수 있는끊임없는 대체재를 발견할 수 있고 이로써 ‘세상은 결국 자연자원없이도 잘 굴러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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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럴까? “모든 살아 있는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는 꾸준한 에너지 흐름으로 스스로를 유지한다. 그리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사회를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1인당 에너지의 양은 많아진다. 산업시대에 들어 경제성장과 에너지 소비증가는 괘를 같이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근대산업은 에너지와 원료를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했고 그 결과 투자한 에너지 양에 비해 더 많은 경제성장을 이룬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는 효율성 증가보다 더 빠르게 팽창”햇다. 경제성장은 에너지 투입량에 비례했다는 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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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가 이렇게 퍼부어지듯 유입되지 않았더라면 예를 들어 세계인구가 20세기에 네 배로 증가하는 일은 업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농업용지의 양은 겨우 1/3 증가했지만 수확량은 6배 늘었다. 이것은 식량생산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놀랍게도 ‘80배’나 증가했기 때문이다. 산업시대는 모든 측면에서 ‘오색창연한 시대’였다. 지하에 매립되어 있던 화석연료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은 마치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것과 같았다. 산업문명의 유례없는 힘은 이런 유산이 화염 속에 사라져갈 때 만들어진 상상을 뛰어넘는 막대한 불길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두 세기는 성대한 잔치였다. 어마어마하게 해방되고 들떠 있지만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고 믿을만한 근거가 너무도 많은 그런 야단스런 잔치 말이다.”&nbsp; 잔치의 끝은 두가지로 찾아올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느린 죽음과 기습.<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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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느린 죽음이라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들어온 것이다.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어질 때 불길은 꺼질 수 밖에 없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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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에너지 수요와 복잡성은 한 쌍을 이룬다. 미생물들은 산소가 풍부한 대기를 만들어내고 진화를 통해 호흡하기 시작하면서 높은 에너지 흐름과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 산소를 호흡하면서 당분 분자 하나당 18배나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되엇다. “산소가 없었다면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생명체는 녹색 미생물 찌꺼기엿을 것이다. 게다가 산소의 증가. 빙하기와 폭염의 난폭한 반복과 함께 생겨난 기후 불안정은 진화를 촉진해 5억 7500만년에서 5억 2500만년 전 사이에 복잡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생명의 형태를 폭증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캄브리아기의 폭발’이라고 하는 지구 생명체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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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라는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 경제는 매우 복잡한 시스템이며 이런 복잡성은 지속적인 에너지 처리량을 바탕으로 한다. 개방 시스템에서는 에너지 사용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고 복잡성 수준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경제의 산소인 “에너지(석유)가 지속적으로 그리고 점점 더 많이 투입되다가 어느 순간 흐름이 중단되거나 감소한다면 우선 경제성장이 멈출 것이고 그 다음에 성장은 역전될 것이다.” (크리스 마틴슨) 복잡계의 붕괴가 시작되는 것이며 무질서 상태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붕괴의 정도는 성장속도에 비례할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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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아니 더 심각한 문제는 기습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오존 구멍이 대표적인 예라고 말한다. “남극의 오존구멍은 지난 60년간 전 지구적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이 지구상에서 엄청난 도약을 했고 행성차원의 새로운 지위를 얻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운명의 관문을 지나 지구와 전례없는 관계를 맺었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시기를 맞고 있다. 오존 구멍은 최소한 지구 시스템을 ‘정상적인 작동 범위 밖으로’ 몰아가다보면 극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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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존층에 구멍을 낸 프레온 가스는 오존층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던 시절에 발명되었고 당시엔 아무 해가 없는 ‘기적과 경이’의 화학물질이라 불렸다. 그러나 오존층과 프레온의 관계가 이론적으로 규명되었을 때 “현시대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이 생성 시스템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세상의 작동원리에 대한 근대적 이해와는 어긋나기 때문이다. 과학혁명 이후 서구문화는 과학이 인간에게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없이 개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수동적인 자원이라고 단정한 자연에 대해 훨씨니 더 큰 통제력을 갖게 해줄 것이라는 가정 아래 지식과 권력을 추구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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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이 보다 더 잘못된 사고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오존 구멍은 단순한 경악의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과학자들이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를 훨씬 뛰어넘는 일이엇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창공의 이 구명이 엄청난 오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구의 대기 중에 축적된 아주 적은 양의 인위적인 화학물질 때문에 생겼다는 점이다. 북미보다 더 큰 크기의 오존층을 파괴한 CFCs와 다른 합성물질에 함유된 염소의 총량은 피피앰도 아닌 피피비로 측정해야 할 정도로 적은 양이다.오존 구멍과 관련된 이야기는 세계의 본질에 대한 위험천만한 잘못된 가정들로 이어진 역사다. 이것은 그동안 발명된 화학물질 중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결국 가장 위험한 것으로 밝혀지는 과정을 그리고 잇다. 과학자들은 처음에 위험 가능성을 조사햇지만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햇다. 나중에 오존층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난 뒤 선도적인 과학자들은 이 위험이 과대평가되었다고 결론지었다. 몇 달 뒤 남극 상공의 엄청난 구멍이 발견되었다. 과학자들은 오존 구멍을 예측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구멍이 나타났을 때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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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오존 구멍의 교훈을 이렇게 정리한다.:“복잡계라는 난폭할 만큼 비선형적인 세상에서 아주 사소한 위협이 막대한 규모의 파괴를 빠르게 몰고왔다.” 그러나 “이처럼 복잡하고 비선형적인 시스템의 반응 방식에 대해 과학”은 무지만을 드러냈을 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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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막 지구를 이해하기 시작햇다.” 그러나 “근대 문명은 지구 시스템을 정상적인 작동 범위 밖으로 밀고 가면서 예측불가능서이 지배하는 치명적인 게임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그러므로 전 행성 차원의 시대에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고 사고할 수 없는 것을 고려하며 미래에는 ‘최악의 시나리오’보다 더 나쁜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속에서는 인간의 생존마저 보장할 수 없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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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가 재앙인 이유는 단지 몇도 기온이 올라가기 때문만은 아니라 저자는 말한다. 지구온난화가 예측불가능한 난폭한 비선형성을 부활시켰기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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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세상은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은혜로운 기후의 시기에 출현했다. 이 은혜로운 ‘긴 여름’은 지난 1만 1700년 가운데 유례없는 안정기였다. 그러나 인류가 이 행성 전체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이제 이 온후한 시기는 끝나가고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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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들은 앞으로도 지금과 같을 것이란 가정 아래 지구온난화를 생각한다. 몇도 올라가더라도 그 과정이 ‘선형적’인 점진적인 과정이라 생각하며 관리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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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들어 지구온난화는 가난한 자의 문제란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과연그럴까? “정책전문가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출 것이라 얘기한다.” 그러나 저자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 본다. 그런 생각이 맞으려면 온난화된 세계는 지금까지와 비슷한 논리로 움직일 것이라는, 그렇기에 지금도 통하는 수단이 그때도 통할 것이라는 가정이 있다. 즉 기후변화도 관리가능하다는 생각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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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제는 자연은 복잡계라는 것이다. 복잡계는 선형적으로, 점진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특히 기후는 난폭할 정도로 비선형적으로 변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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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학자 스펜서 위어트의 회상에 따르면 갑작스런 기수변화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40여년 동안 사고의 영역 밖으로 내딛은 일련의 위대한 발걸음 때문이었다. 1950년대에 가장 급진적인 제안은 주요한 기후 변동이 수만년이 아이나 몇천년 안에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1960년에 이르러 브뢰커와 그의 동료들은 거대한 전 지구적 기후 변동이 ‘1000년안에’ 있었다는 증거를 발표했다. 그 뒤 과학자들은 빙핵을 연구하면서 기후시스템이 누적되어 변동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불쑥 뒤바뀐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찾아냈다. 이 ‘급격한’ 기후변화는 이제 ‘아무래도 한 세기’거나 아니면 ‘10년’ 정도의 짧은 기간을 의미한다.” 빙핵의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과학자들은 “이동, 점프, 비틀거림, 지체, 깜박임, 흔들림, 극적인 기후 반전 같은 이야기들이 숨막힐듯한 속도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지구가 마치 위엄있고 우아한 숙녀처럼 왈츠를 추듯 빙하기로 접어들었다 빠져나온다는 오래된 관점을 유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했다. 빙핵에서 얻은 가장 놀라운 통찰은 급격한 기후변화가 ‘정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길고도 변덕스런 기후의 역사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는 정말 보기 드물게 온난하고 안정된 기후의 축복을 받은 약 1만2000년에 속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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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의 진정한 의미는 만년 정도는 더 갈 수 있었던 그 예외를 다시 변덕스러운 ‘정상’으로 되돌렸다는데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전 지구적 변화의 권위자인 윌 스테펜은 지구의 평균온도가 섭씨 5도 범위에서 요동을 치면 지구시스템은 새로운 상태에 접어들고 근대문명은 붕괴할 것이라고 믿는다. 빙핵은 우리가 이 행성의 기초적인 과정에 끼어들면서 자초한 위험을 지구온난화라 부르는 것이 잘못된 용어법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가 대기를 정상 작동범위 밖으로 밀어내면서 겪는 가장 큰 위험은 열이 아니라 기후변화다. 기온이 점점 올라다는 것도 결코 작은 문제는 아니지만 기후변화는 단속적인 도약이라는 상태에 정상적으로 도달했다. 복잡한 현대 사회를 가능케 했던 이 길고도 고요한 여름이 끝나가면서 우리는 행성수준의 위기 상황에 맞닥뜨린 상태다. 우리는 지속적인 변화와 놀라움, 불안정 같은 것들로 가득한 시대에 성난 야수가 반격하고 ‘잠자는 괴물’이 다시 눈뜰 수도 있는 시대에 접어들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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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배출량을 줄이는 것이 가능할지 현재로선 의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이미 재앙을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첫째 지금 당장 나타나는 온난화현상은 50년전에 쌓인 탄소때문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엔 시차가 있기에 지금 당장 탄소를 줄이더라도 그 효과는 먼 미래에 나타난다. 둘째 이미 기후격변의 스위치는 켜졌기에 탄소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더라도 ‘정상’으로 돌아간 괴물을 다시 잠재우기엔 늦었다. “우리는 이미 문턱을 넘었고 다시 돌아갈 수 없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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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필요한 것은 생존전략이라고 말한다. “생존 가능성 전략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펼쳐질 미래를 살아갈 이들을 위해 곤란함을 없애버리고 안정을 다지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한다. 한 가지는 지구의 물질대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인간의 활동을 줄이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중요한 다른 하나는 이런 붕괴로 발생할 수 있는 재난에 가까운 결과들에 취약해지는 인간 시스템 상의 경향을 역전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목표들은 행성의 세기에 살아남기 위한 기초라 할 수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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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시스템이 복잡계인 것처럼 인간의 문명도 복잡계이다. “문명은 승리라기보다는 거래였다. 농업 덕분에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는 전문화된 삶의 형태로 가는 문이 열렸다. 농업을 통해 발생한 잉여농산물 덕분에 일부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는 노동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생필품을 구하느라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어진 사람들은 성직자나 장인, 관료, 징세관이 되거나 아니면 침략자로부터 땅과 곡식을 지키는 군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회들이 점점 정교해지고 복잡성이 늘어났다고 해서 변덕스러운 기후를 감당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복잡한 사회는 레게 가수 지미 클리프가 경고한 종류의 위험을 안고 있다. 바로 ‘힘들게 온 것일수록 더 힘들게 망한다. 윌리엄 맥닐은 자연에 대한 지배력이 늘어날수록 취약성 또한 고조되는 이러한 유형을 ‘문명의 이면’이라 설명한다. 이는 ‘집단적인 노력과 도구 사용을 통해 지표면의 형태와 자연의 균형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우리가 치르는 대가’다. 문명은 진보라는 고전적인 설명은 최근 1000년동안 인간이 갈지자를 그리며 불규칙한 경로를 지나왔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맥닐은 ‘우리의 기술과 지식이 늘어날수록 점점 더 큰 규모로 승리와 재난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묘하고도 역동적인 균형’을 인류 역사의 특징으로 꼽는다. (기후격변과 문명의 취약성의 인과관계를 설명한) 페이건과 마찬가지로 그도 이와 같은 사회 복잡성의 증가 때문에 우리의 삶이 더 안전해졌다는 생각을 의문시한다. 테인터 또한 사회가 복잡성의 경로를 택하는 것은 당면한 문제를 당장 해결하기 위해서이며 이 때문에 이들은 장기적으론 더 취약해질 수 밖에 없다고 믿는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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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격변이 다가오는 이 떼 복잡성이란 기준에서 지금의 문명은 최고 수준에 올라있다. 과연 지금 수준의 복잡성에서 그 충격을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예를 들어 세계화를 보자. “오늘날 제조업자드은 세계 전역에 상품 생산 과정을 분산해놓앗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 지구적 자원 공급 및 생산조직은 예외적일 정도로 높은 안정성을 요구한다. 안정성보단 경제적 효율성을 더 높게 평가하는 이 전 지구적 시스템은 필수재의 여분을 남겨놓는 방식을 버리고 원재료와 필수요소들을 미리 갖고 있을 필요없이 필요할 때 공급하는 적기생산 공급정책에 의존하고 있다. 진화의 관점에서 이런 식의 세계화는 특히나 요즘처럼 불안정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시대에 위험한 변화다. 세계화는 인류를 단일한 무리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장기적으로 인류의 생존을 보장해주었던 전략을 되돌리고 있다. 인류는 오랜 세월 여러 지역을 광범위하게 돌아다니며 생활하다 다양한 기술과 자원을 가지고 대체로 자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상태에서 세계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대규모 재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졌다. 인류는 대부분의 역사에서 수많은 배를 타고 폭풍 속을 항해앴다. 오늘날 세계화를 통해 우리 모두는 현대적이고 효율적이지만 앞에 놓인 위험에 취약한 타이태닉호의 승객이 되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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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자들은 지나친 통합으로 시트템 전반이 내외에서 비롯된 혼란에 취약해지는 것을 과잉응집이라 부른다,. 생태학자이자 선도적인 행위이론가인 홀링에 따르면 이렇게 심하게 상호연결된 상태의 시스템은 ‘어떤 사고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상태’다. 동시에 구적인 취약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효율성이라는 이름ㅇ로’ 우리 자신을 허약하게 만들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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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간계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험난한 기후변화의 시기에 우리는 조직된 인간의 삶에 필요한 기본 서비스와 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자원을 모두 잃을 것이다. 여기에는 식품과 운송시스템 유지에서부터 물 공급원을 확보하고 죽은 자를 매장하는 일까지 수많은 것이 망라된다. 효율성보단 복원력을 우선시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의 변화에 대응하는 사회적 역량인 적응가능성을 키워야 한다. 그렇다면 불안정한 지구에서 생존의 비밀은 무엇인가? 레빈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것은 잉여와 다양성 기록 모듈식 구조다. 이 전략은 효율성을 쫓는 세계화의 추진력과는 완전히 반대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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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269/19/cover150/895862406x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62406X</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유전학의 현장 - [생명의 언어 - 당신의 DNA는 안녕하십니까?]</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548069</link><pubDate>Thu, 05 Apr 2012 07: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54806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6055807&TPaperId=5548069"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552/26/coveroff/895605580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6055807&TPaperId=554806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생명의 언어 - 당신의 DNA는 안녕하십니까?</a><br/>프랜시스 콜린스 지음, 이정호 옮김 / 해나무 / 2012년 02월<br/></td></tr></table><br/>이책은 개론서나 입문서가 아니라 유전학 분야가 지금 어디까지 가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쓰여졌다. 대개 이런 류의 책은 그 분야의 문외한에게는 암호문에 가까울 수 밖에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재 그 분야의 첨단을 보여주려다 보면 기본적인 것은 건너 뛰게 마련이고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인을 위해 쓰여졌기 때문에 기초적인 유전학 지식이 있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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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내용은 이런 식이다. 구글의 공동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은 DNA 검사를 단지 오락거리로 생각했다고 한다. 브린은 아내 앤 위지키가 창업한 트웬티스리앤미사의 첫번째 천제 유전체 규모의 검사 대상자가 되어 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다른 가족들에게도 이 검사를 받으라고 추천했고 어떤 DNA 구역이 그의 친척들과 같은지 아는 것을 즐겼다. 그는 어떤 질병이나 상태에서는 위험도 예측치가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높았지만 다른 질병들에서는 약간 낮았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하게 됨에 따라 그의 아내는 세르게이에게 유전자 LRRK2의 특정한 유전적 변이를 살펴보라고 했다. 그러자 상황이 완전히 돌변했다. 세르게이의 어머니는 파킨슨병이 있는 것으로 진단을 받았고 최근의 한 연구는 LRRK2 유전자의 희귀 돌연변이가 나이가 들었을 때 걸리는 신경질환 파킨슨병을 아주 높은 위험도로 유발한다는 것을 밝혔다. 트렌티스리앤미 사가 유전검사로 쓰는 DNA 칩에서 도출된 데이터를 자세하게 들여다 본 그는 자신과 어머니가 바로 그 LRRK2 유전자 변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는 더 이상 유전검사가 그냥 하는 오락거리가 아닌게 되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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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을 좋아하는 성격을 갖게 하는 D4 유전자라든가(스프링) 영국의 언어장애를 가진 가계를 연구하다 발견한 언어능력과 관련된 유전자라든가 인문서적을 읽다보면 유전학의 발견들이 심심치 않게 언급된다. 이책은 그런 발견들이 주된 내용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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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자가 의사인만큼 심리학 서적이나 인문학 서적에서 언급되는 내용들보다는 의학과 관련된 내용이 주종을 이루며 그런 발견들이 누적되면서 어떻게 의학혁명을 이루어가는지가 이책의 주제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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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에서 말하는 유전자는 우리가 흔히 보는 인문서적과는 달리 이런 것이다. “단백질은 여러 역할을 한다. 신체 구조를 구성하고 방어 면역 체계에 작용하며 때로는 화학작요을 촉진하는 촉매로 쓰이기도 한다. 단백질은 촉매로서 생물체의 성장과 기능을 통제한다. 유전 체계에서 하나의 유전자에 의해 합성된 단백질이 다른 유전자에 단백질을 형성하도록 또는 단백질 합성을 가로막도록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 달서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의 작용을 조절한다. 또한 유전자는 자신을 더 이상 형성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단백질을 만들기도 한다.” (폴 에얼리, 앤 에얼리)<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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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세르게이 브린의 가족에게 파킨슨병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것도 이런 유전자의 메커니즘을 말한다. 다른 병도 마찬가지이지만 파킨슨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변이도 여러가지인데 그중 알파 시뉴클레인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양성 변화로 보이는 단일한 아미노산의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다. 이 변화만으로도 돌연변이를 보유하는 사람들에게는 파괴적인 질병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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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브린의 가족에게 파킨슨병을 경고한 소비자 유전자검사는 게놈 프라젝트의 리더 중 한 사람이었던 저자가 10여년전 그 프라젝트에 참여할 때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놈 프라젝트 이후 많은 발견이 축적되었고 검사비용이 낮아지면서 가능해진 서비스이다. 물론 ‘현재로서는 이러한 검사들이 단지 전체 DNA 분자의 1%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ㅁ 것만 검사할 뿐이고 정보를 주는 질병이나 상태의 수도 단지 12개 정도이다. 가까운 미래에 질병과 상태의 수는 급속하게 증가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가 유전체의 나머지 부분에서 비밀의 문을 여는 것처럼 거의 매주 발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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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런 검사를 의학혁명이라 부른다. “이 혁명은 그동안 ‘모든 사람에게 들어맞는 단일 규격의 옷’과 같은 의학의 전통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유일하고 고유하며 특별한 형질들을 가진 한 개인에게 맞춤을 제공하는 강력한 전략으로 변화시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혁명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광범위한 주장들을 떠받치는 상세한 과학적 사실들은 아직도 진화하고 있다. 하나의 획기적인 패러다임 변화는 그 초점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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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는 의학혁명이란 가타카의 미래가 온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유전학 기술 중에는 영화에서 처럼 유전자를 바꾸는 것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가까운 미래에 그런 기술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너무나 불완전하고 제약이 많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혁명이란 병의 진단과 치료이며 그 메커니즘은 단백질 설계도로서의 유전자이다. <o:p></o:p>
<o:p>&nbsp;</o:p>
“과거에는 대부분의 약품이 경험적인 방법에 의해서 개발되었다. 가능성 있는 치료법으로 탐색되었던 화합불들은 세균, 곰팡이, 혹은 식물들에서 유래한 천연화합물이었다. 그리고 이것들중 단지 소수만이 임상실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전자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서 분자 수준의 메커니즘을 알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우면서 더욱 포괄적인 ‘디자이너 약물’접근법은 약품을 만드는 특정한 과녁을 먼저 정의한 다음에 수천수만의 후보약품들을 스크리닝해서 승자가 되는 물질을 찾는 것을 말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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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저자가 연구한 경우인 낭포성섬유증은 “단일한 유전자의 돌연변이에 의해 생기는 질병이다” 이 질병은 “이자(췌장)에 낭포나 섬유성 상처들이 생겨 소화효소를 분비하는 능력이 상당부분 상실된다. 이자에서 분비하는 효소들을 환자의 식단에 넣어주지 않는다면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리게 된다. 가장 중요하게는 환자의 허파가 크게 손상된다. 허파에 점성도가 높은 분비물이 축적되어 반복적인 감염이 일어나고 결국 허파조직이 파괴되어 어린 나이에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낭포성섬유증의 원인은 CFTR 유전자의 돌연변이이다. 유전자의 철자 하나가 잘못 쓰여진 것만으로 유전자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 경우이다. 체내에 소금과 물의 수송에 문제가 일어나고 허파, 대장, 이자 분비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낭포성섬유증을 위해 개발된 디자이너 약물은 이 문제를 분자수준에서 교정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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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자가 말하는 의학혁명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앞으로 적절하게 해독된 당신의 DNA는 컴퓨터화된 의료기록의 일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어 건강의료 제공자들이 약물 처방, 진단 및 질병 예방에 대한 다양한 결정을 내릴 때 유용화게 사용할 것이다. 당신이 아프면, 개인에게 적절하게 선택가능한 치료법들-상당수가 인간 유전체의 새로운 이해로부터 유래한 치료법-이 존재하게 되어 몇 년전에 적용가능했던 것들보다 더욱 효율적이면서 부작용이나 독성은 적을 것이다. 이러한 많은 치료법들이 바로 알약 형태일 것이고 아주 일부는 유전자 차체가 약품 같은 유전자 치료일 것이다. 일부는 심지어 당신의 피부 세포나 혈액 세포를 때어내 당신의 몸이 필요로 하는 예를 들어 당뇨병에 필효한 이자 세포나 파킨슨병에 필요한 뇌세포로 전환시키는 세포치료일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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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552/26/cover150/8956055807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6055807</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마키아벨리즘의 진수 - [대통령의 결단 - 위기의 시대, 대통령의 역할은 무엇인가]</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514971</link><pubDate>Wed, 21 Mar 2012 13: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51497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9891789&TPaperId=5514971"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545/9/coveroff/895989178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9891789&TPaperId=551497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대통령의 결단 - 위기의 시대, 대통령의 역할은 무엇인가</a><br/>닉 래곤, 함규진 / 미래의창 / 2012년 03월<br/></td></tr></table><br/>이책의 성격을 한마디로
하자면 미국정치사이다. 이책의 내용은 미국정치사의 흐름을 바꾼 대통령의 결정을 13가지 골라 그 결정이 이루어진 시대적 배경과 그 배경에서 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고 어떻게 그 결정을 현실로
만들 수 있었는가를 케이스 스터디로 파고 든다. <o:p></o:p>

<o:p>&nbsp;</o:p>

실질적으로 미국이란
국가의 정체성을 만든 링컨의 노예해방령이라든가 고립주의 국가 미국을&nbsp; 제국주의 국가로 진로를 바꾸게 한 파나마운하 건설, 2차대전 참전, 원폭투하, 아폴로
계획, 인권법, 닉슨의 중국방문, 레이건의 악의 축 등등이 이책이 다루는 주제들이다. 모두 미국이란
국가의 방향을 바꾼 결정들이라 할 수 있다. <o:p></o:p>

<o:p>&nbsp;</o:p>

물론 저자가 후기에서
말하듯이 그런 결정적 순간들이 13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베트남 전쟁이라든가 닉슨의 경우 브레튼우즈 체제의 포기 같은 것들이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예이다, 그러나
이 얇은 책에서 미국사를 다 다룰 수는 없고 별 의미도 없다. <o:p></o:p>

<o:p>&nbsp;</o:p>

이책의 초점은 최고위
의사결정자로서 대통령이 정세를 어떻게 이해했었고 그 정세에서 자신이 원하는 결정을 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썼는가와 같이 짧은 지면에 재미있게 상황을
잘 간추려 요약하고 있다는 점 그러면서도 그 대통령의 성격과 그의 치적등, 그 시대를 잘 요약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잘 간추려진 정보량으로도 상당하다.<o:p></o:p>

<o:p>&nbsp;</o:p>

여기서는 13가지 중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린든 존슨의 사례를 소개한다. <o:p></o:p>

<o:p>&nbsp;</o:p>

미국정치사에서 마키아벨리스트를
꼽으라면 아마도 린든 존슨이 가장 좋은 예이다. 최연소 하원의원으로 정치인생을 시작한 존슨은 의회정치의
진수를 배울 시간과 기회가 많앗다. “ 샘 레이번 하원의장이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같은 유명한
사람들을 멘토로 삼고 교훈을 얻어 정부의 각종 스위치들을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누르고 당길 수 있는지에 대해 맛본 다음 존슨은 다듬어지지
않은 정치운영능력이 서서히 권력을 향한 강한 열망으로 변해가는 과정에 매료되었다. <o:p></o:p>

<o:p>&nbsp;</o:p>

정치가로서 그의 자산은
나이만이 아니었다. “나는 정치에 대해 하루 18시간 이상을
생각해본 적은 절대 없다. 잠은 자야 하니까.” 그의 말은
사실이엇다. “그는 그 누구보다 오직 한가지에만 몰두하던 사람이엇다.”
정치는 그의 모든 것이었다. <o:p></o:p>

<o:p>&nbsp;</o:p>

시간과 집중력은 그의
명성을 높여갔다. “존슨은 워싱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그보다 먼저 이곳에 20년 동안 있었던 사람들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존슨의 의원시절
초기를 설명하는 말이다.” <o:p></o:p>

<o:p>&nbsp;</o:p>

상원에 들어갔을 때
그는 원내대표가 되었고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지도자급에 오른 사람이 되었다. 이제 그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그
어떤 입법이나 합의도 존슨의 승인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다. 심지어 아이젠하워 대통령조차도 국내문제에
관한 일을 처리하하기 위해서는 이 텍사스주 상원의원의 환심을 사야 했다.<o:p></o:p>

<o:p>&nbsp;</o:p>

존슨이 빠른 속도로
리더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나 운이 아니었다. 그는 상원에서의 힘은 단 한가지에
기초한다는 것을 빠르게 파악했다. 바로 인적관계였다. 존슨은
동료의원들의 이해관계, 욕망, 필요를 이해하는데 자신의 온힘을
쏟았다. 또한 그들의 상황과 관련된 모든 것에 통달함과 4동시에
자신을 그들의 구미에 맞게 조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카멜레온처럼 자신을 각양각색으로 바꾸는
변신과 모방의 달인이 되었다. 북부출신의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남부출신 특유의 느릿한 말투가 딱
부러지고 사무적인 억양으로 바꿔었다. 이와 달리 서부출신 의원들과 대화할 때는 소탈하고 경쾌한 스타일로
말했다. 그러나 남부출신 동료의원들 앞에서 존슨은 그들과 다름없는 듬직한 동요의원이었다. 그는 그들 앞에서 ‘깜둥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했고 서빙하던 흑인종업원을 종종 비하했다. 이런 일은 존슨이 이에 반감을 가진 다른
사람 앞에서는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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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남은 자리는
이제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닿을 듯하면서 닿을 수 없는 자리엿다. 그가 남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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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든 존슨의 정치경력은 두 가지 상충하는 요소가 만들어냈다. 하나는 남부출신이라는 태생적 요소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자신의 정치력을 끝없이 넓히려는 욕망이다.<o:p></o:p>

<o:p>&nbsp;</o:p>

존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1964년 선거가 있기 전까지 20세기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남부 야심가들에게
대통령직은 닿을 수는 없었으나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가까운 자리였다. 이유는 강력한 인종차별이었다. 대부분의 북부와 서부 사람들에게 남부의 인종차별과 야만적 폭력은 그것이 가진 폭력성만큼이나 충격적인 발상이었다. 남부출신들은 국가지도자 혹은 적어도 비중있는 인사가 될 자격이 없다는 선입견이 온 나라에 팽배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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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 자신은 인종주의자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그는 연민어린 눈으로 흑인과 히스패닉들을
너그럽게 대했다. 이것은 당시에 온전히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행동이었고 누군가의 눈에는 파격으로 비치기까지
햇다. 존슨이 소수자와 불우한 사람들에 대해 가졌던 진심어린 관심을 보여주는 일화는 많다. 주민 대다수가 히스패닉인 지역에서 젊은 교사로 일하던 시절 그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른 교사들과 다르게
행동했다. 그 약속은 바로 멕시코계 미국인 아이들도 앵글로색슨계 백인 아이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엇다. ‘나는 그들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일깨우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을 앞날에 대한 열망, 관심, 신념으로
가득 채워주려 마음먹었습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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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부인이란 꼬리표는
위력적이엇다. 1956년 전당대회에서 “존슨은 야심차게 대통령후보로
지명받고자 햇다. 그러나 북부대표들이 그에게 ‘남부 후보’란 꼬리표를 붙이자마자 그의 시도는 실패했다.” 그리고 그는 교훈을
얻었다. “존슨은 이제 오직 자신의 이미지를 자유주의자들의 눈에 맞게 바꾸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엿던 민권법을 지지하는 일이엇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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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의 첫걸음으로 그는
케네디의 러닝메이트로 나섰다. 8년 후에 대선후보로 나설 생각이었다.
그러나 기회는 더 빨리 왔다. 케네디가 암살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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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임기 중이었던
“1963년 초 남부 흑인들의 권리에 무엇인가 조치를 취해야한다는 압력은 절정에 달해있었다. 온 나라가 폭동, 소방호스, 경찰의
전투견, 곤봉, 휘두르는 모습들이 담긴 영상들로 몸살을 앓았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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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해야했고 케네디는
하기는 했다. 그러나 미지근한 조치만 취했다. “그는 민권법의
실패가 자신의 모든 입법의제들을 위태롭게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남부의 반발때문에) 재선에도 치명적이라는 사시을 잘 알고 있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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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부인이기에
존슨은 달라야 햇다. 대통령에 취임한 존슨에게 “민권법 입법은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의제”였다. “이 시점부터 그는 완전히
민권법 이슈에 전념했다.” 다가올 1964년 선거에서 이기려면
그래야 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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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에겐 선거만이 아니라
“자신이 후대에 어떻게 평가될지에 대한 생각 역시 큰 역할을 했다. ‘나는
링컨이 시작한 일을 마무리 짓는 대통령이 될거야!”<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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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전 세계에 과시할권력을 원하며 대통령 찬가를 듣습니다. 또 다른 이는 특권을 얻기 위해 권력을 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권리를 모든 사람에게 특히 가난한 사람과 흑인에게 주기 위해 권력을 잡았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가식일까? 아니면 허심탄회하게 드러낸 진심일까? 아마 둘
모두 조금씩 들어있을 것이다., 존슨은 흑인차별이 존재하던 남부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받아야 했던
끔찍한 차별에 항상 가슴 아파했다. 분명 대통령이 되려는 야망이 존슨에게 동기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가 왜 타협이 가능했음에도 당대 가장 해곃하기 어려운 문제에 ‘모든 것을 걸었는지’를 설명할 수는 없다.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마키아벨리적인 책략이 진정한 관심과 열정으로 주도권을 잡고 나라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직관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o:p></o:p>

<o:p>&nbsp;</o:p>

그러나 미국의 대가는
컸다. “그는 앞으로 수십년 동안 민주당이 남부 선거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존슨의 생각은 적중했다. 수년 동안 남부의 주들은
민주당의 보루에서 공화당의 요새로 변해버렸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공화당의 신보수주의가
미국을 지배하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위대한 사회란 구호로 존슨이 대표했던 민주당의
뉴딜 연합은 “남부와 노조, 도시의 정치집단, 그리고 좌파지식인의
조합”(폴 크루그먼)이었다.
그러나 이 연합에서 남부가 이탈해 공화당의 거수기가 되면서 뉴딜연합은 무너졌고 공화당 지배가 시작되었다.<o:p></o: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545/9/cover150/8959891789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9891789</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無心 - [불온한 신화 읽기 - 바가바드기타는 인도를 어떻게 신비화하였는가]</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497596</link><pubDate>Wed, 14 Mar 2012 12: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49759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905770&TPaperId=549759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381/69/coveroff/899390577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905770&TPaperId=549759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불온한 신화 읽기 - 바가바드기타는 인도를 어떻게 신비화하였는가</a><br/>박효엽 지음 / 글항아리 / 2011년 11월<br/></td></tr></table><br/>이책은 바가바드기타의 해설서이다. 그러므로 이책의 내용을 알아보기 전에 바가바드기타가 어떤 책인가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누구나 이름은 알지만 그 책이 무슨 책인지 아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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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기타는 마하바라타의 일부이다. 예기의 일부인 중용과 대학을 따로 떼어 독립된 책으로 읽는 것처럼 마하바라타 중 일부를 떼어 독립시킨 경우이다. 그러므로 바가바드기타를 이해하려면 원래 있었던 마하바라타란 책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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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드, 오딧세이와 비교되는 마하바라타는 인도의 2대 서사시 중 하나이다. 이 서사시가 성립된 시기는 축의 시대가 끝나가던 기원전 500년경이다. “이야기의 천체 윤곽은 기원전 4세기말에 확립되었을 것이다. 축의 시대의 결정적 텍스트들이 사제와 출가자들의 저작인 반면 이 서사시는 크샤트리야 전사 계급의 에토스를 반영한다. 축의 시대의 종교혁명은 그들에게 곤혹스러운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카렌 암스트롱)<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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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 시대에 일어난 종교혁명의 에토스는 아힘사, 폭력에 대한 반감이었다. 아직도 원시시대 수렵채집생활을 하던 시절의 기억이 남아있던 당시로선 전사들의 악의적인 폭력은 새로운 것이엇고 폭력과 함께 열린 영웅시대도 인간에겐 낯선 것이었다고 카렌 암스트롱은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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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시대 이전 아리아인들의 종교는 수렵채집인과 초기 농경민들의 종교가 그러했듯이 “호혜주의, 자기 희생, 동물을 사랑하는 태도를 가르쳤다.” (카렌 암스트롱) (아이슬러가 말하는) 협력의 원리가 지배하던 시절,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는 황금의 시대였다. 그러나 스티브 테일러가 말하는 자아폭발 이후 협력의 원리는 지배의 원리로 바뀌었고 그들은 약탈자가 되었으며 그들의 종교도 변했다. “이제 습격자들이 갈망하는 신의 모범은 신성한 전사 인드라였다. 아리아인 카우보이들은 싸우고 죽이고 강탈하면서 자신들이 무력으로 세계질서를 확립한 인드라를 비롯한 호전적인 데바들과 하나라고 느꼈다. 그들은 전차와 강력한 청동검을 사랑햇다. 그들은 목축민이었으며 이웃의 가축을 훔쳐 생계를 유지했다. 희생제는 인도 아리아 사회의 영적 핵심이엇다. 그러나 희생제는 경제의 중심이기도 했다. 과거 초원지대의 평화로운 제의는 가축 도둑의 위험한 생활을 반영하여 훨씬 호전적이고 경쟁적으로 변햇다. 아리아인의 희생제는 미국 북서부 원주민 부족들이 거행하는 포틀래치의식과 비슷해졋다. 부족민은 자신의 노획물을 과시하며 많은 짐승을 도살하여 호사스러운 희생잔치를 벌였다. 공동체가 필요 이상의 동물이나 작물을 축적하면 이런 잉여는 태워야 햇다. 늘 이동하는 유목민 집단이 잉여 생산물을 보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이 지역에 만연해있던 폭력이 희생제 때문에 더 증가했다. 희생제가 끝나면 라자는 가축이 남지 않았으므로 재산을 채우려고 다시 습격을 시작했다.” (카렌 암스트롱)<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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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영웅시대가 지나고 아리인들도 정착해갔다. “경제는 약탈보다 농업생산물에 더 의존하기 시작했다. 약탈과 대응 약탈이라는 파괴적 순환을 중단해야 한다는데 점차 합의가 이루어졋던 것같다.” (카렌 암스트롱)그 합의는 기원전 9세기의 전례 개혁으로 나타났고 인도에서 축의 시대를 열었다. 전례개혁의 목적은 희생제에서 폭력을 없애는 것이엇다. 폭력에 대한 반감은 점차 자아에 대한 공격으로 발전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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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적 폭력은 비대해진 자아에서 자라난다. 그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이다. “호메로스는 두 시에서 전쟁이 주는 흥분, 동지애의 기쁨, 아리아스테이아-전사가 ‘승리의 흥분’에 사로잡혀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되어 앞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상태-의 영광을 찬양한다. 호메로스는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더 강렬한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 같다. 만일 영웅의 명예로운 행위가 서사시에서 기억된다면 그는 죽음의 망각을 극복하고 소멸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불멸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명성은 생명보다 소중하며 시는 명성을 얻기 위해 서로 필사적으로 경쟁하는 전사들을 보여준다. 이 영광의 탐구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선다. 영웅은 명예와 지위의 문제에 시달리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며 시끄럽게 자신의 공적을 떠벌리고 자신의 존엄을 높이기 위해 전체의 이익을 언제든지 희생한다. 케노시스, ‘자기 버리기’는 없다. 전사가 자아의 경계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길은 살해의 엑스타시6스를 경험할 때뿐이다. 전사는 전쟁의 신 아레스에게 사로잡히면 생명의 엄청난 풍요를 경험하며 신과 같은 상태에 이르고 아리스테이아 속에서 자신을 잃고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도륙한다. 따라서 전쟁은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이다.” (카렌 암스트롱) 전형적인 자아폭발(이 개념에 대해선 ‘자아폭발’ 리뷰 참조)의 심리상태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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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즉 “타락의 결과로 권태가 인간의 근본적인 상태가 되었고 우리 자신이 비현실성에 대한 인식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권태는 우리의 경험에서 사실성을 제거하는 ‘둔감화기제’가 작동한 결과 발생한다. 이로 인해 세상은 어슴프레하고 절반만 사실인 장소이다. 이곳에서는 실제로 아무 것도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고 흥미를 끌지도 못하며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잇는 것조차 없어 보인다. 그리고 비현실감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퍼져 나가는 끊임없는 생각의 수다의 결과이다. 전쟁은 이 권태와 비현실감을 덜어주려는 시도의 한 방법으로 발달했을 수도 있다. 바꿔 말하면 전쟁은 권태와 무목적성의 공포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오락 내지는 운동으로 그리고 인간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으르도&nbsp; 중요해졌다. 이것이 왜 전쟁 발발이 특히 전장에 나가 싸워야 할 젊은 남성에게 그토록 자주 축하할 만한 일이엇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1차대전의 개전이 그에게 얼마나 활기를 띄게 했는지 정확히 묘사한다.” (스티브 테일러)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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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의 말마따나 “인간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기 방에서 조용히 머무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소위 영웅들이란 자들의 폭력은 그 불행의 증상이었다. 9세기 인도의 종교혁명은 그 불행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란 깨달음으로 발전한다. “그들은 분리된 자아인식을 초월할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 자아가 초래하는 고통을 초월할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우파니샤드가 주장하는 세계관은 타락한 세상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우파니샤드는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가정, 즉 우리가 보는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인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인도 현인들은 타락한 정신이 하는 ‘거짓말’을 풀어내고 있었다. 자아가 고립되었으며 자기 이외의 우주는 저기 밖에 있는데 자기만은 머릿속에 갇혀 있으며 그리고 아무 상관도 없는 외계에 살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인식. 그들은 예리해진 자아인식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거짓된 인식을 주는 일종의 ‘가면현상’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오도된 정체성으로 고통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자아들이라고 믿지만 자아들이 사라져야만 우리으 진정한 본성이 될 수 있다.” (스티브 테일러)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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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에서 시작되어 붓다에서 절정에 이른 케노시스, 자기 버리기는 영웅의 가치들을 깡그리 부정했고 거짓된 자아의 파생물인 무의미한 폭력을 부정했다(아힘사). 영웅시대, 그리스사에선 암흑시대라 부르는 시절을 다루는 마하바라타 역시 그 시대에 대해 부정적이다. “서사시 내내 유디슈티라는 필사적으로 외친다. ‘크샤트리아의 다르마보다 더 악한 것은 없다.’ 전쟁은 신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피의 희생제가 아니었다. 잔혹행위였다.” 호메로스와 달리 마하바라타의 저자는 영웅을 기리지 않는다. “이 서사시의 이야기는 폭력이 더 큰 폭력을 낳으며 불명예스러운 배신은 또 다른 배신을 낳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하바라타는 그 폭력의 시대, 불의의 시대가 어떻게 끝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주제로 한다. “영웅시대가 폭력적인 결말에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희생제의로 질서를 회복해야 했다. 바로 전투가 이런 희생제였다.”(카렌 암스트롱)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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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혁명 이후 전사들은 “림보로 밀려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세상의 다르마에 묶여 있기 때문에 출가자나 요가 수행자들에게 감담할 수없었다. 그러나 밝은 베다 신앙은 자신들을 지탱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낡은 신앙은 때때로 악마적으로 보였다.” (카렌 암스트롱)<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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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왕이나 전사는 공동체를 방어하기 위해 싸우거나 죽여야 하는 자신의 소명을 이행하면서 어떻게 동시에 아힘사라는 이상을 존중할 수 잇는가? 축의 시대의 종교혁명은 그들에게 곤혹스런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카렌 암스트롱) ‘마하바라타’는 이 딜레마에 대한 고민이며 바가바드기타는 그 고민에 대한 크샤트리아 입장에서의 대답이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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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기타는 아르주나의 질문과 함께 시작된다. 나는 왜 싸워야 하는가? “아르주나는 적군으로 대면한 친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스승들을 둘러본다. 그러고는 그들을 죽여야만 하는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싸우지 않기로 결심한다.” 바가바드기타는 아르주나의 그 결심이 왜 틀렸는가를 크리슈나 신이 설득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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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주나가 싸워야할 전쟁은 따지고 보면 흑백이 명확하지 않은 동족상잔의 지저분한 싸움이다. “아! 왕권의 행복에 대한 탐욕 때문에 친족을 죽이려고 애쓰는 이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려고 우리가 마음먹었다니! 만약 이 전쟁에서 무기를 손에 든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들이 무장하지 않은 채 저항도 하지 않는 저를 죽인다면 그것이 저에게는 더 편할 것입니다.”<o:p></o:p>
“아르주나는 무엇이 선이고 악이며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면서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가르는 참된 기준을 알지 못”한다고 절규한다. “기타에서 크리슈나의 가르침은 아르주나가 그 무너진 기준을 다시 세울 수 있게 하는 목적을 가질 뿐이다. 회색지대에 놓인 아르주나가 진실한 가르침을 절실하게 필요로하 는 바로 그때 두 사람의 대화는 그 기준에 대한 물음이자 대답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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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상대가 있다. 영웅시대의 전사는 상대는 고려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영광과 자신이 얻을 전리품만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아르주나는 그 상대를 보아야만 했다. 자신의 사촌, 친구, 스승들이 상대였으니. 싸움의 상대, 타자를 발견했을 때 그는 묻는다. 왜 싸워야 하는가? 이 폭력의 의미는 무엇인가? “크리슈나여, 싸우기를 원하여 정렬한 저의 이 친족들을 보고 나니 제 사지는 맥 빠지고 입은 바싹 마르며 제 몸은 전율하고 털끝이 곤두섭니다. 손에서 간디바(활)가 미끄러져 떨어지고 살갗이 따끔따끔거리며 심지어 서 있을 수조차 없고 제 마음이 빙빙 도는 듯합니다.” 그에 대해 크리슈나가 한 조언의 요점은 마음이 문제란 것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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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즈니쉬의 해석은 이렇다. “무가치한 자신의 의무가 잘 실행된 타인의 의무보다 낫다로. 자신의 의무 속에서 죽는 것이 낫다오.’ 여기서 자신의 의무와 타인의 의무가 나온다. 아르주나는 무사이기 때문에 무사로서의 자기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기타는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 자신에게 일깨우려는 노력’으로 가득한 경전이다.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지 말고 자유롭게 하라는 것이다. 크리슈나는 그에게 자기 본성이 무엇인지 계속 상기하면서 본성을 따르는 행동이 무한한 자유를 준다고 가르친다.”<o:p></o:p>
<o:p>&nbsp;</o:p>
아힘사는 보편윤리일 뿐이다. “비폭력은 비본적인 것일 뿐 중요한 것은 아니다. 크리슈나는 보편적인 윤리보다 계급의 윤리가 우선된다고 가르친다. 기타에 나타나는 고민은 이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다. 따라서 전쟁에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그런데 아르주나는 무사가 아닌가. 무사는 반드시 전쟁에서 사람을 죽여야만 한다. 무사가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크리슈나는 이 고민에 대해 확실한 해결책을 내놓는다. 아르주나는 인간이기 이전에 무사라는 것이다.”<o:p></o:p>
<o:p>&nbsp;</o:p>
그리고 무사의 폭력은 업을 쌓는 것일 필요가 없다. 마음의 문제란 말이다. 여기서 기타는 3가지 요가를 제시한다. “기타에서 요가한 정신을 수련하여 보다 더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사람의 길을 가리킨다. 그 세가지 요가는 지혜의 요가, 행위의 요가, 사랑의 요가로 불린다.” 지혜의 요가는 요가학파나 불교의 승려들이 하는 기존의 요가를 말한다. 그러나 나머지 둘은 기타에서 새롭게 제시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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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의 요가란 행위를 하되 행위의 결과에 신경 쓰지 말고 행위 자체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타의 핵심이다. “기타는 행위를 추종하는 것도 아니고 행위를 배척하는 것도 아닌 행위를 추종하면서도 배척하는 새로운 대안을 가르친다. 제1의 길도 아니요 제2의 길도 아닌 제3의 길을 가르친다. 제1의 길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보통 사람들이 사는 길이다. 제2의 길은 속세를 떠난 승려들처럼 고행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길이다. 그리고 제3의 길은 이 두 가지를 절묘하게 혼합한 길이다. ‘그대의 특권은 행위 자체에 있을 뿐 전혀 결과들에 있지 않다오. 행위의 결과를 행위의 수단으로 삼지 마시오, 그대는 행위를 하지 않음에도 집착하지 마시오. 제3의 길은 행위를 하면서도 행위의 결과를 얻지 않는 길이다. 일상인으로서 이 사회를 유지한채 살면서 마치 고행자처럼 절제하는 삶의 길이다. 아르주나는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싸우려고 하니 친족을 마구잡이로 죽여야 하고 싸우지 않으려고 하니 무사의 의무를 져버려야 한다. 이에 크리슈나는 무척 간단한 해법을 제공하는데 즉 싸우면서 싸우지 않는 법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는 말이 되지 않는 엉터리가 아니라 현실에서 충분히 실현가능한 방법이다. 이 방법이 행위의 요가이다. ‘행위에서 무행위를 볼 수 있고 무행위에서 행위를 볼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지혜로우며 제어된 채로 모든 행위를 한다오.’ 인도의 역사에서 행위와 깨달음은 앙숙 사이였다. 둘은 결코 어울릴 수 없었다. 경이롭게도 기타는 이 둘을 절묘하게 화해했다. 행위의 요가는 행위의 구출이었ㅎ고 동시에 깨달음의 확장이엇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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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그러나 행위는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필요한 것이 사랑의 요가이다. “신이 행위를 하는 이유가 되고 근거가 된다. 이 세상의 모든 행위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 모든 행위의 이유를 따지고 따지면 마지막에 신이 있다는 것이다. 신이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이유이기에 항상 신을 생각하면서 행위를 하라.” 이 대목은 힌두교의 혁명이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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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예수의 등장이 획기적이었던 것처럼 힌두료에서 크리슈나의 등장은 획기적이다. 인도의 종교사에서 붓다의 등장이 한번의 종교개혁이었다면 기타에서 크리슈나의 등장은 또 한번의 종교개력이었다. 인도고대종교에 대항하여 붓다가 영원불멸의 형이상학을 무너뜨렸다면 크리슈나는 그 속물스러운 세속의 신학을 무너뜨렸다. 무엇에 대한 개혁일까? 고대 인도의 브라흐만 종교에 대한 개혁이었다. 고대의 브라흐만 사제들은 제식이나 제의에 미쳐있었다. 그들은 제식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루려 했다. 제식을 통해 신의 축복을 얻을 수 있고 비가 오게 할 수있고 아들을 낳게 할 수 있다. 제식만능주의의 시대였다. 그래서 그들은 속물스러웠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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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타에서부터 새로운 풍경이 등장한다. 하나. 여러 신을 숭배하지 않고 최고신만ㅁ을 숭배한다. 비슈누의 화신인 크리슈나가 그 대상이다. 둘. 최고신은 인간에게 공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그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 셋. 최고신이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이다. 진심어린 마음으로 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 즉 사랑뿐이다. 인간이 신에게 바쳐야 하는 것은 오로지 감정 뿐이다. 브라흐만 종교에서 사제들만 독점하던 그 어려운 언어는 이제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마음과 감정의 언어로 대체되었다.크리슈나는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말한다. 먼저 신에게 지고한 사랑을 행하는 자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궁극의 비밀을 알려주는 자이다. 궁극의 비밀은 무엇일까? 바로 크리슈나에게 의지하면 구원을 얻을 수있다는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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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의 요가에서는 현재 내가 하는 행위가 미래에 어떤 결과를 낳을지 고민하지 말라고 한다. 왜? 미래의 결과는 나의 몫이 아니고 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결국 신을 생각하면서 현재의 행위에 충실하고 있는 나의 삶은 그 자체로 신에게 구원받는다.”<o:p></o:p>
&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381/69/cover150/8993905770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905770</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폭풍전야? - [제국의 전쟁 - 중국 vs 미국, 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497580</link><pubDate>Wed, 14 Mar 2012 12: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49758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82083X&TPaperId=549758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542/66/coveroff/899382083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82083X&TPaperId=549758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제국의 전쟁 - 중국 vs 미국, 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a><br/>프랑수아 랑글레 지음, 이세진 옮김 / 소와당 / 2012년 02월<br/></td></tr></table><br/>“에피소드가 두 가지 잇다. 하나는 (2008년) 8월초 러시아와 그루지야가 벌인 짧은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9월 15일 리먼 브러더스 파산이다.” 두 에피소드는 “탈냉전 시대의 종식을 보여준다.” (캘리니코스) 두 에피소드 중 리먼브러더스 파산은 이해하기 쉽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번 위기로 미국의 헤게모니가 무너졌다는데는 별다른 이의가 없다. 그러나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전쟁은 설명이 필요하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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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찾아온 탈냉전시대는 미국 헤게모니의 정점처럼 보였다. 그 시절 미국의 세계전략 중 하나는 러시아를 봉쇄해 다시는 과거와 같은 슈퍼파워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엇다. 그러나 러시아는 다시 부활했다. 물론 “러시아가 옛 소련이나 러시아 제국을 부활시키려 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옛 제국의 영역에서 러시아 중심의 제도적 구조와 지리적 관계구조를 새로 창출하고 있다는 말이 옳다. 세계수준에서 러시아는 이 새로운 지역적 파워를 이용해 미국이 우위를 잃고 있는 세계체제에서 일정한 구실을 하고 싶어한다.” 러시아-그루지야 전쟁은 러시아의 그런 전략이 통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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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뒷배를 봐주던 그루지야에 전쟁을 걸 수 있었던 직접적 이유는 미국이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에 발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쟁은 “미국의 권력이 쇠퇴하는 훨씬 더 장기적인 지정학적 과정의 한 단계”라 캘리니코스는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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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2세 정부가 추진했던 세계적 프라젝트를 논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이 프라젝트의 재앙적 실패야말로 여러모로 오늘날의 세계정세를 만든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부시 2세의 프라젝트는 부시 1세와 빌 클린턴 정부의 노선을 더 과격하게 추진한 것이라 이해람이 가장 적절하다. 부시 부자와 큰린턴은 모두 옛 소련이 붕괴하면서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이 되긴 했지만 세계의 경제력 분포가 바뀌면서 전보다 미국경제의 비중이 축소되고 동아시아의 비중이 확대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그러한 상황에서 부시 부자와 큰린턴 모두 2차대전 이후 확립된 국제 공조체제를 유지, 확대해 미국의 헤게모니를 굳히려 했다. 그러나 부시 2세정부는 미국의 양대 비교우위인 펜타곤과 달러의 힘을 부시 1세나 클린턴 정부 때보다 더 일방적이고 공격적으로 휘둘렀다.” (캘리니코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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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는 이번 위기로 무너졌다. 그리고 펜타곤도 이라크에서 무너졌다. “프리드먼이 ‘쌍둥이 위기’라 부른 2008년의 위기 때문에 부시의 프라젝트는 더욱 엉망이 돼 버렸다. 우선 부시 정부는 캅카스 지역에서 러시아를 도발해 또 다른 역풍을 자초했다. 냉전 종식 후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한가지 핵심은 러시아가 약해진 것을 틈타 유럽연합과 나토를 동유럽으로 확장해 러시아를 포위하는 동시에 미국의 영향력을 유라시아 대륙 깊숙이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전략은 그루지아에서 러시아의 저항에 부딪혔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국 군사력의 한꼐를 보여주는 징후일 뿐 아니라 지난 70년간 미국이 구축하고 점진적으로 확장해온 초국적 자유자본주의공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징후로 읽혔다. 지금은 오직 미국만이 진정한 글로벌 파워다. 그러나 그 때문에 미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자신의 역량을 더 넓게 분산해야 하고 폴 케네디가 ‘제국의 과잉확장’이라 부른 위험에 노출되었다. 러시아는 바로 미국의 과잉확장위기를 기회로 활용할 수 있었다. 금융위기로 미국의 헤게모니는 더욱 금이 갔다. 그것은 이라크의 재앙 이후 또 하나의 엄청난 상징적 타격이다. 잘 나간다던 영미식 자본주의가 별안간 자폭하면서 세계경제까지 함께 끌어내렷으니 말이다.” (캘리니코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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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는 “더 직접적으로 미국의 패권을 약화시켰다. 앞으로 미국정부는 경제위기에 대처하느라 정치적, 경제적 자원을 소진하게 될 것이고 다른 문데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캘리니코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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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국 헤게모니는 아직 종식되지 않았다. 왜 일까? “위기가 닥쳤을 때 다른 경제체제들이 대부분 미국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을 입엇기 때문이다. 미국을 가장 소리 높여 비난하던 러시아와 베네수엘라는 완전히 찌그러졌다.” (닐 퍼거슨) 미국이 약해졌지만 그 약해진 미국조차 상대할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앞으로 수십년 동안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경제대국으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캘리니코스) 미국은 과거 그들의 경쟁우위를 보장해주엇던 것을 아직 잃지 않았다. 그 힘 덕분에 “미국은 19세기 말에 비스마르크가 건설한 독일처럼 될 잠재역이 있다. 당시 독일은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서로 맺고 잇던 관계보다 더 긴밀한 관계를 각각의 주요 국가와 맺은 유럽의 ‘정직한 중재자’였다. 말하자면 독일은 유럽 국가 체제의 허브였다.” (자카리아)<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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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리아의 말은 “미국은 경제위기로 약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국가 체제 속에서 극점을 차지하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식적으로 관리되는 강대국들의 합창곡을 계속 지휘할 수 있을” (캘리니코스)이란 말이다. 그러나 그 합창곡은 갈수록 불협화음이 될 공산이 크다. 그 이유는 미국이 중심에 있었던 그 허브의 그물망이 찢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캘리니코스 그루지야 사태를 중요한 사건으로 보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리고 러시아만 그 그물망을 찢고 나온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중국이다. 그리고 그것은 충돌의 전주곡이라 이책의 저자는 본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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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헤게모니의 붕괴조짐은 중국에 “엄청난 여파를 남겼다. 바로 중국이 자신의 힘을 깨닫는 계기가 된 것이다. (2010년 기준) 2년전부터 중국은 모든 영역에서 오만하게 자국의 힘을 시험해보고 있다. 영유권 분쟁 같은 쓸데없는 위신 세우기에 힘들 쏟는 것”도 그 예이다. “중국은 세계경제위기를 계기로 자신의 패권을 확신하게 되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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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확신은 과거의 패권국이나 패권국 후보들과는 심리적 배경이 아주 다르다고 저자는 본다. “중국인들에게 지금의 성공은 단순한 발전이 아니라 일종의 복수다. 200년간 세계최고의 자리를 감히 찬탈했던 서양인들에 대한 복수이다. 오늘날 중국의 성공은 민족주의적 상처를 달래기는커녕 더욱더 그 상처를 자극한다. 그러한 성곡이 강대국이 되겠다는 의지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과거에 누렸던 번영의 공백기는 이 정도 성공에 만족하지 못하게 한다. 모든 신흥강국들이 그렇듯 중국도 현재 세계의 패권을 쥔 미국이 자신의 앞길에 훼방을 놓는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마땅히 누려야 할 위상을 누리고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미국이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9세기 말에 독일이 영국이라는 당시의 강대국에 그러한 생각을 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포위 컴플랙스’는 평범한 중국인뿐 아니라 중국지도자들에게도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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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그 콤플렉스가 피행망상이라 치부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 뿌리는 미국과의 관계가 시작된 40년전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중미수교 40여년은 ‘9’로 끝나는 해마다 조금씩 더 복잡하고도 애매한 관계로 발전해왔다. 상대에 대한 감탄과 멸시, 상호필요와 성가신 의존성으로 이루어진 관계” 그 관계의 시작은 서로의 필요 때문에 시작되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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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발을 뺄 궁리만 하던 닉슨에게 중국은 좋은 카드가 되어 주었다. 하노이를 지원하는 소련을 고립시켜 소련에게 타격을 주고 하노이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이용해 협상을 시작할 수 잇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중국 입장에서도 미국은 좋은 카드였다. 점점 사이가 나빠지던 소련 대신 손을 잡을 상대가 되어주었으니 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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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베이징은 미국과의 화해에서 유익한 교훈들을 끌어냈다. 우선 중국은 미국과의 알력 관계를 경험하면서 중국 밖의 세상을 다루는 법을 익혔다. 미국과의 관계는 중국에게 불리할 것이 없었다. 닉슨과 키신저의 태도는 중국인들에게 중국없이는 강대국도 제구실을 할 수없다는 생각을 굳혀주었다. 심지어 미국 대통령은 자기 나라에서 재선에 성공하기 위해 중국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중국은 안심하고 문을 열었다.” 덩샤오핑은 “미국의 기술력과 대기업들이 필요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미관계는 그 성격 자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중국입장에서나 미국입장에서나 소련이라는 곰을 궁지에 몰기 위해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경제적 계산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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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관계는 중국입장에서 자존심을 끊임없이 건드려 댔다. 앞에선 중국만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뒤로는 반역도당, 대만에 무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선거때만 되면 베이징에 날아와 사진을 찍고 돌아간다. 만리장성에 찍은 사진은 세계의 리더라는 이미지를 팔아 표를 사는데 그만이기 때문이다. 닉슨도 그랫고 카터도 그랬으며 중국을 빨갱이라 욕하던 레이건도 그랬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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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끼는 건 매년 최혜국대우를 갱신할 때이다. “중국의 대미 수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미국의 ‘최혜국 대우’ 연례 갱신은 봄마다 빠지지 않는 코미디엿다. 이 코미디의 1막은 클린턴이 위협을 하고 미 의회가 적의를 드러내면 중국이 초조해한다. 2막에 들어가면 로비가 기승을 부린다. 1973년에 중국에 진출한 미국 주요기업들의 모임으로 설립된 미중무역전국위원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단체들이 알력을 행사한다. 반체제 투사 몇 명 감싸겠다고 중국시장을 막아버렸다가는 미국 재계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있다고 경고를 하면서 말이다. 3막에 들어가면 미국 행정부가 중국의 최혜국 대우를 한해 더 갱신해주고 그들의 후퇴를 감추기 위해 중국인들에게 훈계를 늘어놓는 식이다. 그러나 현실은 중국의 값싼 노동력을 십분 활용하는 미국기업들에게 클린턴이 그러한 특혜를 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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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처음 수교를 할 때만 해도 중국은 강대국으로 미국을 대우해주었고 미국도 중국을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갈수록 미국은 중국을 아이 다루듯 인권이 어떠느니 설교를 늘어놓는다. 말만 그렇게 하는게 아니다. 은하호 사건같이 남의 상선을 불법으로 나포하고 나서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혐의가 사실무근이라는 것이 밝혀져도 사과하나 없다. 힘 없는 것이 죄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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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호 사건은 중국인들의 새로운 두려움을 기정사실화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독불장군 노릇을 하며 도발을 계속하리라는 두려움이엇다. 물론 소련의 붕괴로 중국은 무거운 부담 하나를 덜었다. 그러나 소련이 사라지자 천하는 미국의 것이 되었다. 이미 2년전에도 워싱턴은 걸프전을 자국의 이익에 이용한 바 있었다. 경제분야에서 중국은 이제 자국의 힘을 확신하고 상승국면을 타고 있었다. 그러나 외교분야에서 중국인들은 유일한 강대국, 그들이 전략적 수단을 써볼 여지가 없는 대상을 상대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혼란에 빠진 지금 미국을 상대하기 위해 누구에게 기대며 누구와 동맹을 맺는단 말인가? 자유주의 질서와 미국의 지배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말이 나올만큼 서방사회를 안심시킨 반면 중국을 더욱 불안으로 몰아넣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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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베오그라드 중국대사관을 오폭한 사건은 중국을 드디어 폭발하게 햇다. “베이징에서 반미시위가 일어났다. 천안문 민주화운동 이후 최대규모의 시위였다. 1949년 이래 중국의 민족주의가 이처럼 대대적으로 폭발하기는 처음이엇다. 중국의 반미운동은 중국이 서양 특히 미국에 얼마나 깊은 원한을 품고 잇는지 잘 보여주었다.” 그 사건은 “중국인들의 상반된 두 감정, 즉 치욕의 한 세기에서 얻은 열등감과 위대한 제국의 유구한 역사에 뿌리내린 극도의 오만함을 자극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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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두 감정 중 오만함이 더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200년대 초 중국은 과거 1850년대에 이미 이룩했던 높은 생활수준을 되찾는다. 구매력 기준 국민소득은 서양의 20%수준이었?다. 중국 역사상 생활수준이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때는 1975년 문화대혁명시기였는데 당시 중국의 구매력 기준 국민소득은 서양의 7.5%에 불과했다. 이러한 경제성과는 중대한 전략적 변화, 특히 미국과의 관계에서의 입장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중국은 자율권을 얻엇다. 더욱 결정적인 또 다른 터닝 포인트가 있다. 중국은 서양의 경제모형과는 다르지만 효율성이 결코 뒤떨이지 않는 경제모형을 만들어냈다는 자각을 갖게 되었다. 중국의 경제적 상승은 워싱턴 합의를 활용한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00년대 초에 자국의 힘과 성공에 대한 중국의 자각은 새로운 단계로 넘어간다. 이러한 계시와 자기에게 투사하는 이미지 덕분에 중국은 전방위적 외교에 나서게 된다. 이때 베이징은 중국의 약진이 불어일으키는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 서양을 향한 새로운 컨셉의 선전공작을 편다. 화평굴기 즉 평화적 부상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 메시지의 의미는 명백하다. ‘강대국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지 말라. 우리가 언제나 차지했던 그 위상을 되찾게 되더라도 세계의 안정을 위협할 일은 없을 것이다.’” 미국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뿐이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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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국과의 관계는 2008년 역전되는 듯했다. “중국은 미국을 호되게 후려친 글로벌경제위기를 희소식으로 받아들였다. 이 불황은 중국이 세계무대에 나서서 미국을 무릎 꿇릴 기회였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미국이 그동안 지은 죄대로 벌을 받는다 여겼다.” 그러나 남의 집 불구경이 아니었다. 수출이 타격을 받으면서 중국도 나름 호되게 당해야 햇다. 이후 중국이 미국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진다. 더 이상 겁낼 필요도 없고 덕분에 피까지 봤으니 할말은 하고 살아야 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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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중순 중국중앙은행자 저유샤오촨이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그는 1971년 이후로 계속 변동하고 잇는 달러를 기분으로 하는 현 통화체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졌다. 저우샤호촨의 발언은 국제 금융계에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중미관계가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발언은 미국의 세계경제 지배를 중국이라는 ‘도전자’가 정면으로 반박했다고 봐야 한다.” 그의 발언의 진의는 이런 것이었다. “달러화 때문에 자기네들이 가진 금융채권의 위험도가 커지고 그렇기 때문에 달러를 국제기준통화로 삼는 체제를 지지할 수 없다.” 다들 하는 생각이지만 중국은 이젠 그럴 말을 해도 될 때라고 본 것이다. 중국의 도발은 그외에도 여러 외교채널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오바마는 집에 난 불 때문에 중국과 불장난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냥 모른 척 넘어가기만 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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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은 충돌할 수 밖에 없는가? 현재로선 터무니 없다. 군사력이란 체급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국방비는 5년마다 두배로 불어나고 잇다. 베이징의 국방예산이 워싱턴의 국방예산을 뛰어넘는데는 10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2020년에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 해도 미국의 힘으로 저지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미국은 엄청난 적자의 제약에 매여 있으므로 중국의 전진을 저지하는데 필요한 투자가 부담스럽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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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체급이 같아진다고 싸우란 법은 없다. 더군다나 전통적으로 중국은 정복전쟁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역사를 살펴보건대 단기간에 군비를 확충하고서 정작 그 군비를 사용하지 않었던 나라는 없다. 나라가 닫혀 있을 때에는 자국의 안보에만 집중했다. 대만과 티벳에 대한 집착은 ‘포위 콤플렉스’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은 20년전부터 크게 개방되엇고 중국은 자국 영토를 둘러싼 광대한 바다를, 석유와 원자재가 이동하는 전략적 경로를, 그리고 이러한 성장의 귀중한 동력을 공급하는 국가들을 주시할 수 밖에 없다. 중국이 개방을 하기 전에는 이 나라의 주요한 이익지역은 대만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개방 이후에 이 지역은 동심원을 그리며 크게 확장되엇다. 중국이 자국에 없지만 꼭 필요한 상품의 수입에 의존하면 할수록 그 지역은 더욱 확장될 것이다. 해외에서 취득하는 광산, 기업, 인프라등의 자산이 늘어날수록 그러한 자산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미국도 자기네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해야 할 때에는 폭력을 동우너하지 않았는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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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542/66/cover150/899382083x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82083X</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기나긴 여름 -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497573</link><pubDate>Wed, 14 Mar 2012 12: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49757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9797497&TPaperId=549757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97/1/coveroff/898979749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9797497&TPaperId=549757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a><br/>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남경태 옮김 / 예지(Wisdom) / 2007년 08월<br/></td></tr></table><br/>“많은 고고학자들은 기후변동이 인간사회를 변화시켯다는 것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기후변동이 농경이나 문명 같은 중대한 발전의 주요한 원인이라 보는 환경결정론은 오래전부터 학계에서 금기엿다.” 결정론은 언제나 극단성 때문에 오류로 증명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환경이, 기후변화가 무시되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생존을 위한 농경의 역학이다. 1만2천여년전 농경이 시작된 이래 사람들은 춥고, 습하고, 온난하고, 건조한 기후가 교대되는 주기 속에 살아왔다. 생존을 좌우하는 것은 농작물의 생산량과 다음해에 파종할 씨앗의 양이었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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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도 먹어야 사는 동물이다. 인간 역시 먹이의 증감에 따라 인구가 결정된다고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 먹이의 증감을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가 기후의 변동이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기후의 변동이 식량의 증감에 영향을 주는 정도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 능력을 취약성의 정도라 본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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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이 장단기적 기후변동에 점점 더 취약해졌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기후변동에 대응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고 비용도 커졌다. 수만년 동안 인구는 거의 늘지 않았ㅆ고 모두 수렵과 야생식물의 채집으로 살았다. 생존하려면 기동력이 더 뛰어나고 기회를 잘 포착해야 했다. 하루를 살아가기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기후의 충격을 완화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다. 이를테면 무리 전체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든가 무리의 일부를 나누어 다른 지역으로 보낸다든가 원치 않는 음식도 먹는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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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간은 그 취약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움직여왔다고 저자는 본다. 저자는 농업이 시작된 것 자체가 기후변화와 취약성의 정도를 높이는 사이클 때문이었고 역사는 그 사이클이 계속 강화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고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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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이 처음 시작된 곳은 중동지역이다. 빙하기가 끝난 기원전 13000년 이후 서남아시아는 “온난한 환경으로 바뀌면서 도토리를 품은 참나무 숲이 크게 늘었다.” 식용식물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이제 임시 근거지에 살지 않고 제법 큰 규모의 영구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도토리와 피스타치오를 많이 수확했다. 그 두 견관는 무엇보다 저장이 용이했다. 도토리와 피스타치오는 한 장소에서 오랜기간 머물기에 충분한 식량을 생산했다. 그러나 풍요에는 대가가 따랐다.” 도토리를 먹을 수 있게 가공하는데 “막대한 노동력을 지출해야 했다. 일곱시간을 투여한 뒤에야 가족이 며칠 먹을 음식재료를 만들 수 있었다. 도토리가 주식이 되면서 공동체의 생활이 달라졌다.” 긴 노동을 할 정주지가 필요해진 것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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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식량공급이 안정적이 되면서 인구가 급증했고 “소폭의 기후변동에도 매우 취약한 한계환경을 유발했다. 그들은 환경적 취약성의 문턱을 넘은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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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1000년경 마침내 심한 가뭄이 닥쳤다. 북미에서 빙하가 녹은 민물(아가시호)이 대량으로 래브라도 해로 방출되엇다. “아가시의 녹은 물은 명분 농도가 짙은 멕시코 만류의 위로 떠올라 일시적으로 뚜껑처럼 작용하면서 난류가 식어 가라앉는 것을 막았다.” 대서양 순환이 멈춘 것이다. “추위는 1천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1천년의 기간을 ‘영거 드리아스기’라 부른다. 북쪽이 다시 빙하로 변하고 대서양 순환이 차단되자 멀리 서남아시아에 즉각 기후변화가 일어났다.<o:p></o:p>
마지막 빙하기처럼 차가운 역선풍이 다시 불었다. 서남아시아는 1천년동안 길고 심한 가뭄에 시달렸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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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숲이 사라졌다.그러나 “사회적 유연성과 기동성의 고전적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오랜기간 평안하게 살았던 결과 촌락 인구는 300~4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인구 밀도는 떠돌이 생활을 하던 시절에 비해 훨씬 높았다.” 그러나 “영구정착지는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식량사정만 더 악화될 따름이엇다.” 많은 촌락이 버려졌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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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처음부터 버려진 것은 아니다. 뭔가 방법을 찾으려 했고 “기원전 10000년경부터는 합당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식물을 재배하여 수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터키 동부에서 외알밀의 재배는 급속히 퍼져나갔다. 닭과 나비나물도 마찬가지엿다. 그밖에 에머밀, 완두콩, 렌즈콩, 아마 등도 아주 짧은 기간에 길들여졌다.” 그러나 그정도로는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엔 부족했다. 사람들은 흩어졋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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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곳에서 “그,들은 야생 식물의 채집을 보충하기 위해 재배 실험을 계속했을 것이다. 몇 세대가 지나자 경작된 밭의 산출량이 늘기 시작했고 이 임시 전략은 곧 온전한 농경으로 변모했다. 영거 드리아스기가 끝나고 온난화가 재개되자 농경은 생활의 기둥이 되었다. 이윽고 기원전 9500년경 버려졌던 언덕에 새롭고 전혀 다른 거주지가 탄생했다.” 도토리와 피스타치오도 돌아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농부가 되었기 때문이다.농업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농업과 함께 취약성의 사이클이 다시 시작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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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남부는 경작 가능한 밭, 습지, 사구가 많으나 대부분은 염분이 섞인 황량한 사막이다. 강우량은 거의 없다. 자연의 극단적인 힘들이 사방에서 압박해오는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여름, 모진 겨울바람, 사나운 폭풍, 게다가 강물이 범람해 삽시간에 촌락을 쓸어버리기도 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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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래 이 지역이 그렇지는 않았다. ‘기원전 10000~기원전 4000년에 이 지역은 여름 기온이 높았고 강우량도 많았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강우량은 지금보다 25~30% 많았을 것이다. 강우량의 대부분은 여름 몬순에서 나왔는데 강우의 상당 부분이 증발했기 때문에 전반적인 습기의 양은 일곱 배나 많았다. 소빙하기가 끝나고 갑자기 온난화가 재개되자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목축을 병행하는 농경사회들이 퍼져나갔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최초의 거주지가 등장한 것은 소빙하기가 끝난 기원전 5800년경이었다.”이 당시의 메소포타미아의 삶은 “1천여년 동안 작고 분산된 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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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원전 3800년경 기후가 갑자기 건조해졌다. 실은 1천년전부터 서남아시아와 지중해 동부지역에 있었던 추세였다. 지구표면의 일사량이 줄어들었다. 동시에 서남아시아 몬순의 여름 강우량이 줄었고 경로도 동쪽으로 이동했다. 비는 양도 줄었을 뿐 아니라 시기도 늦게 내리기 시작해 빨리 그쳤다. 여름의 범람은 수학이 끝난 뒤에 발생했고 규모도 훨씬 작아졌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강우량에 상당히 의존해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관개시설에 의존해야 했다. 잉여식량은 없어졋고 오히려 식량부족에 시달렸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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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이 시작되기 전이나 농업이 막 시작된 무렵이라면 방법이 있었다. 이동하는 것이다. 실제 메소포타미아인들도 그렇게 대응했다. 농업을 버리고 유목민이 되거나 고지대로 옮겨가 농업을 계속하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눌러앉아 수렵채집을 농업과 병행했다. 그러나 농업덕분에 늘어난 인구가 너무 많았다. 성공이 재앙의 원인이 되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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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은 사회조직을 재편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1년 내내 관개가 필요했다. 수로를 통해 귀중한 물을 주변의 사막으로 돌릴 수 있는 위치의 더 큰 도시나 마을로 전략적이고도 현명한 이주를 감행했다. 우르처럼 성장하는 도시는 인간생활의 요충지가 되었다. 관개시설은 엄중하게 감독했다. 새로운 유형의 관리가 신전의 창고에 배치되어 농작물 생산량과 곡식 비축량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이때까지 물공급은 중앙정부가 아니라 가정과 사회의 관심사였으나 도시의 힘이 강력해짐에 따라 사정도 달라졌다. 수확기가 되면 신체건강한 모든 사람이 밭에 나가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며 농작물을 수확했다. 많은 관리들이 수확된 농작물을 세금으로 거두어 (가뭄에 대비해) 정부 식량창고에 비축했다. 사람들은 점차 국가를 위해 일하고 그 대가로 곡식을 받아 생활하게 되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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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사정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그러나 사회조직을 바꾼 대응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기원전 3100년경 남부 도시들은 세계최초의 문명권을 이루었다. 수메르 문명은 경쟁이 심한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었는데 각도시들은 고도 조직된 후배지를 거느리고 이웃한 도시들과 영토를 놓고 각축을 벌였다. 각 도시들은 관개수로를 단단히 방비했다. 물에 대한 권리와 관개된 토지가 평화와 전쟁을 가름하는 세상이었다. 도시가 생존의 수단이 되자 전역에서 도시화의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기원전 2800년 무렵에는 수메르인의 80%이상이 도시에 살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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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화는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이었고 그것은 성공했다. 그러나 한가지를 해결했지만 동시에 취약성의 수준을 더 높였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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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200년경 북쪽 멀리에서 대규모 화산분출이 일어났다. 지중해 동부의 방대한 지역에 그뒤 278년동안 지속될 가뭄이 시작된 시기였다. 아나톨리아 고지에는 비와 눈이 내리지 않아 강은 더 이상 범람하지 않았다. 가뭄은 비옥했던 하부르 북부 평원을 사막으로 바꿔놓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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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화는 이런 수준의 변화에는 견디지 못했다. “농업경제는 비틀거리다 이내 붕괴했다. 기원전 2000년경 도시에 사는 수메르인의 수는 50%를 밑돌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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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에 중요한 것은 규모다. 석기 시대의 소규모 무리는 새 사냥터를 찾아 이동하여 그곳에 최대한 머무는 방식으로 가뭄에 대처할 수 있었다. 또 농경촌락은 이웃 촌락에서 비상식량을 얻거나 교역 관계를 통해 알려진 물사정이 나은 지대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르 같은 대도시는 혹독한 가뭄의 파급효과로 인해 꼼짝없이 대규모 탈주와 기근을 겪을 수 밖에 없었으며 적응이나 회복이 쉽지 않었던 탓에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소규모 재앙은 거뜬히 방어할 수 있을만큼 성장했으나 대규모 재앙에 대해서는 오히려 취약성이 더 커졌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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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성의 사이클은 판돈이 더 올라가 로마시대에 재현된다. 로마는 야만족과의 투쟁과 함께 성장했다. 첫번째 적은 켈트족이었고 켈트족을 제압하면서 로마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저자는 켈트족과 로마의 대결을 기후대의 대항으로 해석한다. 켈트족의 농경은 대륙성 기후대에 적합했다. 대륙성 기후대가 남하할 때 켈트족도 같이 남하했고 로마는 이탈리아로 남하란 그들과 만났다. 그러나 “기원전 300년경 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 사이의 추이대가 이동하기 시작해 지금의 부르고뉴까지 북상했다. 그 결과 켈트 지역의 남쪽에 온난건조한 여름과 습한 겨울의 지중해성 기후가 자리를 잡았다. 많은 도시 인구를 위해 밀과 기장 같은 몇가지 작물을 광범위하게 재배하는 로마식 농경은 건조한 남유럽 환경에 매우 적합했다. 추이대가 북상함에 다라 고마의 힘이 급격히 증대했다. ‘로마의 평화’는 북상하는 추이대를 따라가며 꾸준히 켈트족의 땅을 잠식햇다. 기원전 2세기 중반 켈트족의 땅은 로마의 속주가 되엇다. 온난한 기후 조건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 내내 지속되었다. 로마의 장점은 3가지, 즉 잘 조직된 군대. 도로와 해로 같은 기반시설, 군대와 도시 주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효율적인 농업생산력이었다.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비롯한 모든 속주들은 로마인들을 부양했다. 결국 모든 것은 사회의 주식이 된 곡물을 대량생산하는 능력에 달려있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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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강력한 국가와 튼튼한 경제에 어울리지 않게 기후에는 놀랄만큼 취약했다. 문명의 조직도가 낮았더라면 오히려 제국은 기후의 압박을 거뜬히 이겨냈을 것이다. 일반적인 추위와 가뭄주기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대규모 엘니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럽의 기후대가 크게 변동하고 그에 따라 기온과 강우량이 달라지자 로마의 지배는 큰 타격을 받았다. 500년에 서유럽의 날씨는 더 추워지고 습해졌으며 갈리아는 곡식의 대량생산이 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다. 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의 경계는 또다시 북아프리카로 내려갔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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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이후 우리는 잠재적 격변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시대로 성큼 들어섰다. 더구나 그 위험성은 지구를 온난하게 하고 극단적 기후변동의 가능성을 증대하는 우리 자신의 능력 때문에 더욱 커졌다. 만약 그린란드의 빙상이 녹으면서 그 많은 물이 북대서양으로 흘러들어 영거 드리아스기처럼 멕시코 만류가 갑자기 끊긴다면 어떻게 될까? 유럽은 수십년쯤 지나면 북극권 기후가 되지 않을까? 기후는 문명의 형성을 돕지만 자비로운 방식으로 돕지는 않는다. 충적세의 예측할 수 없는 기후 변덕은 인간 사회를 압박하여 적응하거나 사멸하게 만들었다. 기원전 10000년경 영거 드리아스기에 서남아시아에서 농경으로 전환한 경우처럼 성공적인 적응도 있었지만 가뭄으로 멸망한 티와나쿠처럼 실패한 사례도 있었다. 예전의 많은 문명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드물게 일어나는 대규모의 재앙에 취약하며 단기적 가뭄과 이례적인 호우 같은 작고 평범한 압박에 대처하는 능력만 나아졌을 뿐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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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97/1/cover150/8989797497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9797497</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황제의 관점 - [넥스트 디케이드 - 역사상 가장 중요한 10년이 시작되었다]</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497568</link><pubDate>Wed, 14 Mar 2012 12: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49756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5700248&TPaperId=5497568"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250/89/coveroff/8965700248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5700248&TPaperId=549756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넥스트 디케이드 - 역사상 가장 중요한 10년이 시작되었다</a><br/>조지 프리드먼 지음, 김홍래 옮김, 손민중 감수 / 쌤앤파커스 / 2011년 07월<br/></td></tr></table><br/>이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미국 대통령을 위한 ‘군주론’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그렇듯이 이책은 통치자의 관점에서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말하려 한다. ‘군주론’은 권력을 어떻게 유지하고 행사하는가를 말한다. 당연히 그 독자는 권력을 가진 군주이다. 이책의 독자 역시 권력을 가진 자, 그중에서도 미국의 대통령을 독자로 한다. 그러나 그 독자의 성격은 미묘하게 다르다. 이책의 저자는 미국 내의 권력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제국의 권력을 논한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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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내가 저력(deep force)라 부르는 것을 가지고 있으며 이 저력이란 최고의 균형잡힌 힘이 되어야 한다. 균형잡힌 힘이란 경제력과 군사력, 정치력이 적절하게 상호보완적 총합을 이룬다는 의미다. 들어 유럽은 경제력은 있지만 군사력은 미약하고 토대도 얕다. 튼튼한 뿌리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균형잡힌 힘을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미 구소련이 붕괴된 이후 세계적 패권 다툼에서 미국과 경쟁할 국가가 모두 사라졌다. 이제 미국은 이런 상태를 좋아하든 말든 그리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냉전을 극복하고 국제적인 패권국가로 떠오른 동시에 세계적인 제국이 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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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이나 대영제국과 달리 미국의 지배구조의 비공식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미국은 대양을 통제하며 경제는 전 세계총생산의 25%를 차지한다. 미국인들이 아이팟이나 새로운 식도락거리를 만들어내면 중국과 라틴아메리카에 있는 공장과 농장은 체계를 개편하여 새로운 주문을 충족시킨다. 이는 19세기 유럽열강들이 중국을 지배하던 수법이다. 그들은 절대로 공식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으며 공식과 비공식의 구분에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중국을 개조하고 약탈했다. 미국은 상대국가에게 이익을 줄 때나 위협할 때만 한 발짝 움직인다. 이런 힘은 큰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지만 본성적으로 적댁감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은 상업공화국이다. 이는 미국이 교역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엄청난 부는 자원과 미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세계와 단절된다면 그것조차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이 규모와 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은” 자신이 제국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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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생각하는 제국의 전략은 힘의 균형과 divide and rule로 정리된다. “다음 10년을 위한 미국의 정책에 필수적인 항목들 중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균형 잡힌 세계전략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고대 로마제국과 100년전 대영제국의 사례를 통해 배운 것처럼 말이다. 이들 구세대 제국주의자들은 주력부대를 동원해 세계를 지배하지 않았다(여기서 저자는 부시 2세의 거창한 실패를 암시한다). 대신 여러 국가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상황을 조성한 뒤, 어떤 국가가 저항을 선동할 경우 주변의 다른 국가들을 통해 그 국가를 상대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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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권국의 지상목표는 자신의 패권을 위협할 경쟁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패권 역시 경쟁자가 없어야 한다. 자신과 대등한(세계적 차원은 아니더라도 지정학적 요충지에 한정된다 하더라도) 상대는 행동의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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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저자가 이책에서 제안하는 전략은 이렇다. “다음 10년 동안 미국은 이런 시도들 (저자는 부시의 헛짓을 말하고 있다) 때문에 발생한 고갈과 혼란에서 회볷하는 작업에 주력하게 된다. 그 첫번째 단계는 지역적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정책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는 지중해부터 힌두쿠시 산맥에 걸쳐 현재 미군이 개입하고 있는 주요 지역들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 지역에는 세 개의 고유한 지역적 힘의 균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랍-이스라엘, 인도-파키스탄, 이란-이라크 사이의 균형이 그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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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세 균형은 모두 무너졌다. 이스라엘이 균형의 한 축이 된 것은 저자가 말하는 힘의 균형 전략의 전형적인 예이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파트너로 선택한 것은 유대인의 로비 라든가 어떤 음모 때문이 아니라 제국의 본능때문이었다. 냉전시절 중동에서 소련과 힘의 균형을 만들어야 할 때 불행히도 이집트, 시리아 등 지역의 핵심국가들은 소련을 선택했다. 미국으로선 이스라엘을 키워 균형을 맞추어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웃의 아랍국가들이 제어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며 심지어는 그 지역에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저자는 이제 이스라엘은 미국의 짐일 뿐이라 말한다. 일찌감치 손을 썼어야 하는데 내버려둔 것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스라엘과 거리를 둘 때이다. 나머지 두 균형 역시 미국 때문에 무너졌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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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은 아프카니스탄 전쟁 덕분에 약화되었다.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이 사실은 하나의 실체이며 양측이 다양한 인종과 부족을 공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치적 국경선은 벌 의미가 없다는 좀더 근본적인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아프카니스탄 전쟁은 필연적으로 파키스탄으로 확대되어 내부 갈등을 촉진한다. 이는 파키스탄을 약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알카에다와의 전투를 돕고 아프카니스탄에 주둔한 미군에게 협조하라는 압박을 받은 파키스탄이 얼마나 분열되느냐에 따라 인도와의 대치상태가 붕괴되고 그 지역에서 인도가 핵심새력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최우선 전략은 강력하고 지속가능한 파키스탅을 만드는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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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이라크와 이란의 균형 역시 미국 때문에 무너졌다. “그 지역에서 오직 두 나라만이 아라비아 반도 전체를 지배할 수 있을 만큼 크고 강력한 잠재력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 두 나라는 바로 이란과 이라크다.” 그러나 이라크는 미국이 무너뜨렸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이란을 인정하라고 제안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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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은 이미 지역 내에서 지배적 세력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란이 이웃에게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까지 막을 필요가 없다. 이란의 영향력이 보여줄 양상들은 지역적 계획에 대한 재정적 참여, OPEC의 원유생산량 쿼터 설정, 아라비아 반도 국가들의 내정 등과 같은 범위 안에 있다. 약간의 절제만 보여준다면 이란은 자신들의 원유가 시장에 도달하는 것을 보면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우월한 위치와 경제적 이익을 누릴 수 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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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은 몇천년전의 페르시아 제국 시절을 아직도 자랑한다. 그런 나라가 실제 원하는 것은 그 지역에서 목에 힘을 주는 것 정도이니 그냥 인정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란은 서남아시아란 더 큰 체스판에서 다른 말을 사용해 충분히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터키가 그 답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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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에 대한 평형추 역할을 감당하고 지역 내에서 잠재적인 장기적 세력이 될 역량을 갖춘 유일한 국가는 터키다. 그리고 터키는 미국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앞으로 10년 내에 그 지위에 도달하게 된다. 아랍 세계는 시아파 이란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대변자를 지속적으로 물색하며, 오스만제국 시절 터키가 아랍을 지배했던 쓰라린 역사에도 불구하고 수니파 터키는 최고의 후보자가 된다.” 이란과 터키의 대립은 오스만제국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새삼스러운 견해는 아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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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장기적인 협력관계가 될 가능성이 있는 국가는 바로 터키다. 게다가 그들은 다른 지역에서도 미국에게 매우 가치있는 동맹자가 될 수 있다. 이는 러시아의 욕망에 대한 차단막 역할을 수행고 있는 발칸반도와 카프카스 지역에서 특히 터키의 엯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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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내용이 감이 잡힐 것이다. 제국황제의 논리이다. 그러나 이책은 황제만 봐야하는 것은 아니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세상이 어떤지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황제의 생각은 황제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위치에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껴보기에는 충분한 책이다. 예를 들어 부시 2세의 이해할 수 없는 정책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저자의 해석을 들어보자.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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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레이건과 부시 2세를 극단주의자라 생각한다. 그의 정책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관념에서 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부시의 감세정책이라든가 재정팽창정책 등은 (레이건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공급주의 경제학의 극단론처럼 보인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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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지 W 부시의 논리는 지정학과 미국 내부의 정치에서 출발햇다. 그는 이슬람 전사들과 전쟁 중이었다. 그러나 군사개입에 따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려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경제를 자극하여 조세 수입을 증가시키는 방법을 원했다. 이론에 따르면 군사비 지출과 세금감면, 낮은 금리가 어우러질 경우 경제가 팽창하여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충분한 정도로 세수가 증대된다. 만약 이런 공급 측면에서의 도박이 실패하더라도 부시는 2004년 대통령 선거 이전에 감행했던 증세가 정치적 기반을 약화하지 않은데 따른 이점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 그는 선거가 끝나고 전쟁이 종결됐을 때 자신이 경제적 불균형을 처리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전쟁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 얼마나 격렬하게 전개될지를 지독할 정도로 과소평가했던 거시다. 그 결과 부시와 연준은 경제적 불균형을 바로잡는 문제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전쟁이란 목적을 위해 세웠던 경제정책에 계속 발목 잡힌 채 대통령 직무수행에 제약을 받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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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무지로 통했던 레이건이 사실은 똑똑했던 것처럼 부시도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면 애초에 왜 전쟁을 시작했는가? 역시 지정학이 문제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빈 라덴의 목표는 이슬람권을 하나의 신정국가로 되돌리는 것이엇다. 그러기 위해선 기존의 체제를 흔들어야 하는데 “빈 라덴의 분석에 따르면 이슬람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목표들을 달성하기에는 그들의 지지가 너무 미온적이고 불충분했다.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그는 적어도 한 곳,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수의 중요한 이슬람 국가에서 폭동을 유발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의 대중들이 그들의 정부를 압도적인 힘과 확고한 장악력을 가진 존재로 보는 한, 그것은 실현불가능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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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는 그는 미국을 흔들기로 햇다. 그가 보기에 이슬람권 정부의 힘은 미국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사실 그 정부들은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고 “빈 라덴의 바람은 미국조차도 취약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자신들의 정부가 강력하다고 생각하는 이슬람인들의 인식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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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9/11이 이슬람의 심리를 겨냥한 것이엇지만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미국인들의 심리였단 것이다. 실질적으로 알카에다는 미국에게 전략적 위협이 될 수 없다. 그냥 귀찮은 모기일 뿐이다. 그러나 “미국인들 사이에 울려퍼진 심리적 경보음으로 인해 미국 정부가 당면한 전략적문제는 복잡해졋다. 침투력이 강하고 뿌리 깊은 불안감이 발생했을 때 정부는 반드시 이에 대처해야 하며 최소한 결정적 행동을 취하는 흉내라도 내야한다. 이 시기에 부시는 미국의 번영에 관한 국민적 자신감의 위기상태를 감당할 여유가 없었다. 알카에다는 9/11 테러가 이슬람 세계에 미칠 영향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것이 부시에게 가할 정치적 압박을 고려하지 못하는 착오를 저질렀다” 그 결과는 별 쓸모도 없는 땅인 아프카니스탄에 대한 재빠른 공격이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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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성공이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완벽한 실패이다. 그럼 왜 부시는 그런 재앙 속으로 걸어들어갔는가? 저자는 중동의 지정학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테러와의 전쟁을 하려면 아랍 동맹국들의 협조가 필요햇다. 그러나 동맹국들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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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행정부는 심혈을 다해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이 좀 더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공유하도록 압박했다. 이를 통해 미국이 중동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힘을 행사하는 전략을 구사하려 했다. 이것이 이라크 침공에 깔린 논리다. 군사적 행동은 즉각적인 결과를 초래하여 새로운 전략적 현실을 창조한다. 이런 현실은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를 위협하여 자국의 유전지대로부터 며칠 거리에 미군 기갑부대를 배치하는 상황으로 이어졋다. 그럼으로써 미국은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시리아, 터키, 이란과 접해있으며 중동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국가인 이라크를 장악햇다. 이라크를 통제하게 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단기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애초의 의도는 외부로 힘을 과시하기 위한 기지로서 이라크를 이용하는 것이었음에도 보유한 모든 전력을 이라크 내부에 집중해야만 햇다. 점령의 실패는 전쟁의 성격마저 바꿨다. 전쟁의 목적이 이라크 자체로 바뀌었으며 궁극적인 목표 역시 중동지역에 새로운 전략적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적절한 시기에 미군을 철수하는 것이 되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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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 그러나 저자의 분석이 옳은가? 그건 따져봐야 한다. 저자의 주장이 맞으려면 미국의 경제력이 군사력을 떠받칠 정도로 미래에도 튼튼해야만 한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를 미국의 헤게모니의 끝이라 보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의견은 틀렸다고 본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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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이래로 이처럼 파멸적인 사태는 없었다는 식의 말이 자주 반복된다. 그러나 이는 3중으로 틀린 말이다. 2차 대전이후에도 이와 유사한 붕괴가 세 번이나 더 있었다. 이것은 다음 10년을 예측하는데 중요하다. 왜냐하면 2008년의 금융위기와 비교할만한 대상이 대공황뿐이라면 미국이 가진 힘에 대한 나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이런 종류의 위기가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면 대공황과 비교하려는 주장이 지닌 의미는 줄어들 것이며 2008년의 금유위기가 미국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고 주장하기도 어렵게 된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힘이 쇠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정도 규모의 힘은 순식간에 붕괴되지 않는다. 한때 거대국가였던 독일과 일본, 프랑스, 영국의 국력이 쇠퇴한 것은 부채 때문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쟁으로 경제가 황폐해지고 전쟁이 남긴 부산물 중 하나인 부채가 양산됐기 때문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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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이다. 오일쇼크 직후 70년대도 만만치 않게 어려웠다. 저자의 입장은 이번 위기는 그냥 덩치만 큰 평범한 경제위기일 뿐이란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번 위기가 헤게모니의 붕괴로 해석되는 이유는 위기 자체의 규모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징후이기 때문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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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게모니 붕괴의 조짐은 저자가 언급한 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The great stagflation of the 1970s was deeply affected by the parallel crisisi of American hegemony which ensued from the escalation of the Vietnam War and eventual US defeat. As for the Reagan-Thatcher neo-liberal counterrevolution, it was not just, or even primarily, a response to the unsolved crisis of profitability but also-and especially-a response to the deepening crisis of hegemony” (Arrighi 2007)<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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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가 왜 70년대에 등장했는가에 대한 좌파의 설명은 이윤율저하 경향에 대한 자본의 반혁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기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정치적이엇다고 말한다. 아리기는 50-60년대의 황금기는 군사 케인즈주의 때문이엇다고 본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그 시스템에 과부하를 걸어 무너트렸다. “’Stepped-up Vietnam War spending’ is said to be the reason for the sudden acceleration of price inflation in the US which, between 1965 and 1973, slowed down but did not stop the growth of real wages, This acceleration of inflation, in turn, is held responsible for the weakening of the competitive position of American manufacturers” 베트남 전쟁의 시기는 우연히 이윤율 저하 경향의 시기와 맞물렸고 “the costs of the war not only contributed ro the profit squeeze, but were the most fundamental cause of the collapse fo the Bretton Woods regime of fixed exchange rates and the precipitous devaluation of the US dollar that ensued.” (Arrighi 2007)<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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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의 평가절하는 이윤율저하 경향의 부담을 경쟁자인 일본과 독일에게 전가하는 효과를 일으켰다. 그러나 아리기는 원래 닉슨 쇼크의 목적은 베트남 전쟁 비용을 전가하는 것이엇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과거 제국들처럼 미국 역시 전쟁비용의 압박 때문에 헤게모니 위기를 겪었다는 것이다. “At least intially, the liquidation fo the gold-dollar exchange standard did seem to endow the US government with an unprecedented freedom fo action in tapping the resources of the world simply by issuing its own currency.” 그러나 디폴트를 선언하거나 실질적으로 디폴트인 화폐의 평가절하를 시도했던 이전의 제국들처럼 미국 역시 헤게모니의 위기를 벗어날 수 없었고 오히려 헤게모니의 위기를 더 악화시켰을 뿐이다. 1979--82년의 통화주의 반혁명은 바로 이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엿다고 아리기는 본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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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제국을 유지하는 돈과 병력을 모두 인도에서 끌어다 썼다. 해외에 무력투사를 할 때 영국이 동원한 병사도 인도인이엇고 그 투사의 비용도 인도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의 병력과 자신의 돈으로 제국을 유지했다. 베트남 전쟁은 그런 시스템의 문제를 폭로했다고 아리기는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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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2년의 통화주의 반혁명은 바로 그 제국의 비용과 관련된 것이라 아리기는 말한다. “The main reason why the monetarist counterrevolution was so strongly successful in reveresing the decline in US poweer is the it brought about a massive rerouting of global capital flows towards the US and the dollar.” 에드워드 시대 영국의 Belle Epoque는 자본수출 덕분이엇지만 1980년대 이후 미국의 Belle Epoque는 자본수입 덕분이엇다는 말이다. “An escalating foreign debt enabled the US to turn rhe deteriorating crisis of the 1970s into a belle epoque wholly comparable to, and in some respect far more spectaculr, than Britaion’s Edwardian era.”<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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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본수출의 금융화이든 자본수입의 금융화이든 금융화는 일시적인 해결일 뿐이다. 왜냐하면 금융화는 위기의 압력을 핵심에서 주변으로 전가하는 방법일 뿐이기 때문이라 아리기는 말한다. “Over time, financial expansions tend to destabilize the existinf order through processes that are as much social and political as they are economic. Economically, they systematically diveret purchasing power from demand-creating investment in commodities (including labor-poweer) to hoarding and speculation, thereby exacerbating realization problems. Politically, they tend to be associated with the emergence of new configurations of poweer, which undermine the capacity of the incumbent hegemonic state to turn to its advantage the system-wide intensification of competition. And socally, the entail the massive redistribution of rewards and social dislocations, which tend to provoke movements of resistance and rebellion among subordinate groups and strata, whose setablished ways of life are coming under attack.”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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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또는 금융화는 헤게모니 위기에 대한 해법이었다. 그러나 그 해법은 언제나 일시적이었고 지속가능하지 않았다고 아리기는 말한다. 그리고 이번 위기는 다시 아리기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엇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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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5<o:p></o:p>
&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250/89/cover150/8965700248_2.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5700248</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제국의 슬픔 - [중국, 그 거대한 행보 - 레이 황의 거시중국사]</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449517</link><pubDate>Sun, 26 Feb 2012 17: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44951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6377217&TPaperId=5449517"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38/42/coveroff/898637721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6377217&TPaperId=544951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중국, 그 거대한 행보 - 레이 황의 거시중국사</a><br/>레이 황 지음, 홍광훈. 홍순도 옮김 / 경당 / 2002년 10월<br/></td></tr></table><br/>조조를 악인, 유비를 선인으로 말하는 것은 정사의 입장에선 분명 왜곡이다. 정사 삼국지는 위나라를 정통의 입장에서 기술하며 조조를 나쁘게 그리지 않았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봐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조조를 나쁘게 보는 관점이 공식화된 것은 삼국지연의에서였다. 그리고 경극에서도 조조는 악인이다. 관객들은 조조가 이길 때면 한숨을 쉬고 유비가 이기면 기뻐했다. 왜 그랬을까?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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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중국인은 우주가 언제나 어떤 조화를 유지하면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엇인가 나쁜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그것은 분명 이 세상에 그에 상응하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어왔다. 위진남북조의 분열기에는 바로 조조가 그런 사람에 해당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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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조는 난세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던 뛰어난 정치가가 아닌가? 지금으로선 조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가 잔인한 면이 있었고 모략을 쓰기는 했지만 도덕과 정치를 분리해서 보는 관점에 익숙한 지금 사람들에겐 그런 것으로 조조를 탄핵하는 것은 그리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비친다. 난세를 끝낸다는 목적을 위해선 권력을 잡고 권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깨끗한 일이 아니다. 고고한 척하면서 손을 더렵히지 않고 어떻게 대의를 이룬단 말인가? 말로 천하를 바로잡을 수 있는가? 그리고 조조는 비난하고 유비는 찬양하지만 유비 역시 조조 못지 않게 음흉한 사람이 아니었는가?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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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조를 나쁘게 본 것은 민초들만이 아니었다. 유비를 정통으로 보고 조조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관점은 송대 성리학자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교적 질서를 무너트린 사람이라 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 중에도 이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첸무가 그런 예이다. 중국의 역사편찬 전통을 오늘에[ 되살린 대가로 여겨지는 그조차 조조의 찬탈행위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황제제도 아래에서 자연적인 질서는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행해지는 일방통행이었다. 만약 군주 스스로 하늘의 명을 받았다고 자처한다면 그것은 오직 군주만이 우주의 지고무상한 도덕과 지혜를 구현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3제로는 군주가 하급계층의 사정을 상세하게 알 수는 없다. 더욱이 그토록 광대한 영토 안에서 상충하는 숱한 이해관계가 모두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지만 궁중의 황제라는 자리에는 신비로운 이미지가 있다. 이런 이미지 때문에 황제는 그야말로 책임있는 중재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황제가 학식이 풍부하고 사리에 밝은 백관들에게 기대한 것은 다만 자신에 대한 신앙심일 뿐이었다. 만약 백관들 모두가 자기억제와 겸양의 미덕을 가장 큰 신조로 견지하고 잇었다면 그 어떤 충돌도 해결화지 못ㄹ할 것이 없고 또 극복하지 못할 기술상의 어려움도 결코없었을 것이다. 조조의 잘못은 거친 방법으로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도 잇지만 대중이 굳게 믿는 신화를 의식적으로 파괴하려는 언행을 서슴지 않은 데도 잇다. 첸무는 ‘국가는 원래 정신적인 산물이다;라고 말했다. 고대 중국에서는 수많은 백성들을 관리하는데 따른 기술상의 어려움 때문ㅇ사회적 가치의 총체로 삼을 수 있는 세습군주제를 시행해야 했다. 이는 나름 일리 있는 것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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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하나의 제국으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적 통일이었고 그 문화의 가치는 군주가 상징햇다. 그러나 조조는 제국의 기초에 있는 군주의 신성함을 모독했고 제국의 뿌리인 정신을 흔들었다는 것이다. 성리학자들이 조조를 비난한 것은 그런 이유이다. 조조는 내용에 관심이 있는 실용주의자엿지만 제국을 떠받치는 것은 내용이 아닌 형식이었고 그 형식을 무시한 조조는 비난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저자는 조조가 비난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중국의 한계였다고 본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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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적인 안목으로 보면 중국은 언제나 실질보다는 형식을 앞세우는 관료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정치적인 국가가 되었다.” 저자는 그 시작을 주나라의 봉건제도라 말한다. 주공이 창안한 주나라의 시스템에서 핵심은 봉건제도와 종법을 결합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봉건만으로는 원심력이 작용해 오래가는 시스템을 만들 수 없다. 주나라의 시스템이 수백년을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고 후대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이유는 공적 시스템을 가족제도와 묶어 안정적인 구조를 만들었다는데 있다. “훗날 유교라고 일컬어지게 된 이 평화공존의 관념은 공자 스스로도 인정한 것처럼 문왕과 주공에 힘입은 바 크다.” 공적 시스템에 사적 시스템을 결합해 안정성을 확보하는 아이디어는 이후 유교의 정치적 비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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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다오는 이러한 시스템을 종법적 家와 봉건적 國의 동형구조(종법일체화 구조)라 말한다. 유교 禮制의 핵시은 종법제도이다. 그러나 유교는 그 종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틀었다. “종법제의 외형적 틀은 유지하되 그 내용에는 질적 전환이 있었다.” 원래 종법이란 귀족들의 친족관계를 규정하는 틀이다. 유교 이전의 귀족이란 유럽이나 일본의 중세와 마찬가지로 무사 귀족이었다ㅓ. “갑골문에서 친족을 뜻하는 族이 깃발과 화살의 표상임은 시사적이다. 제후를 뜻하는 候역시 화살(矢)을 든 인간(人)을 표상한다. 고대 세계에서 족은 전투집단이었고 제후한 이 전투 집단의 장수, 사령관이었다. 유교에서 이루어진 종법의 질적전환의 핵심은 “군사적 친족주의에서 윤리적 친족주의로의 전환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군사적 친족주의로서 “종법제의 핵심은 군사적 지배체제의 계승원리였다. 그 시기의 예란 그러한 군사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의례에 다음 아니었다. 그러나 공맹에 의해 재정비된 예제의 핵심은 오히려 이 군사적 성격을 탈색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윤리적 질서 안에서 군왕과 가부장은 더 이상 군사적 지도자, 자의적 절대자일 수 없다. 부자와 군신의 관계는 군사적 질서가 아닌 윤리적 질서에 의해 새롭게 규정되어야 한다. 전통 속에서 전통을 변환시켜야 한다. 전통의 이름으로 전통을 바꾸어야 한다. 이 노선은 현실에 아주 잘 들어맞았다. 역사 속에서 유교의 승리를 보장해준 원천이었다. 친족주의의 핵심은 벤자민 슈우러츠가 고대중국에서 정립된 문명적 정향이라 강조했던 조상숭배다. 이 정향은 고대로부터 워낙 깊이 자리 잡은 것이었기 때문에 유교의 윤리적 변형조차 이 정향 위에서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상래)<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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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양주와 묵적에 대해 “단호한 태도로 추호의 융통성도 보이지 않은 채 ‘아비도 임금도 없다고 하는 것은 바로 짐승과 같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타협의 여지를 인정하지 앙ㄶ는 태도에 대해 오늘날의 독자들은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로지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아야 이해된다. 농민대중 속에 기층조직을 꾸리는 방법으로 혈족의 단결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엇다. 여기서 당연회 도출되는 결론은 가부장적인 의미의 세급군주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혈연관계에 멀고 가까움이 있듯이 남에 대한 호의도 반드시 친소(親疏)의 구분이 있어야 했다. 따라서 개인이 사사로운 이익을 기준으로 행동한다거나 남들을 모두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호소력이 있을 수 잇겠집만 고대중국에서는 오히려 현실성 없는 주장이엇다; 우선 법률 면에서 중대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왕조시대를 통틀어 중국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형법을 변함없이 유지햇다. 그 형법은 친족관계를 바탕으로 긴밀하게 결합된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한편, 형법의 범위 내에서의 정당한 행동을 옹호한 것이다. 유교를 신조로 하는 통치자들은 법률을 제정하면서 남자의 지위를 여자보다 높게 정했고 연소자보다 연장자의 권위를 더 세워주었으며 학식있고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는 일반 서민보다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그들은 분명 이 모든 것이 자연의 법칙에 부합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이 제도에서 비롯된 안정과 질서는 일찍이 해외로부터 찬사를 받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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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교의 승리에는 그만한 대가가 있었다. 조상숭배를 윤리화해 천하를 장악했지만 바로 이 승리는 진관다오가 ‘초안정구조’라 불렀던 친족질서(家)와 국가질서(國)의 大一統 체제의 항구적 보수성의 근거가 된다.” (김상래) 그러나 이 시스템의 안정성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었다. “그것은 평균적 민중의 최소한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최고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햇다. 조직이 단순하고 능률이 낮은 이 정치체제는 탄력성이 결여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힘도 부족했다.” 그 시스템은 시스템의 존재 자체를 위한 것이었지 시스템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묻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스템의 내용보다는 형식이 더 중요했고 “의례적인 것에 치우치고 실질보다는 형식적인 것에 더 집착하는 태도는 농업국가인 중국에서 그 뒤로도 수천년이나 이어지게 되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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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저자는 논점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중국의 경우 지난 십수 세기에 걸쳐 지속된 기본적인 요소는 2세기에 이미 갖춰져 있엇다. 장기적으로 보면 당시의 중국이 정치적으로 조숙했던 것은 하나의 큰 성취엿다. 그러나 중국인들 역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햇다. 표면상으로는 기원전에 벌써 이 같은 체제가 존재한 점에서 보면 국가의 조직이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그 기층은 아무래도 조잡하여 성장과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후세의 기준으로 보면 더욱 그러했다.” 중국경제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과대성장국가론이라 할 수있다. 문명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본다면 국가와 사회, 경제가 균형을 이룰 때 그 성장잠재력이 크다. 그러나 중국은 기원전에 이미 제국이란 정치시스템이 완성도 높은 수준에 올랐지만 사회와 경제는 그 수준을 따라갈 수 없엇다. 이 때 문제는 시스템의 불균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국에서 제국이 망하고 다시 세워지는 과정이 200년이란 짧은 간격으로 반복된 이유를 간단하게 이렇게 정리한다. 제국이란 정치 시스템은 ‘한대 이래로 축적된 농업적 재력이 일단 안정상태에 이르자 이를 저해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제도상으로 이를 더욱 강화시킬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국문명의 시스템은 저수준의 균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 이유를 저자는 낮은 수준의 균형에 제국 시스템이 최적화되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결국 전체적으로 중국문명이란 시스템은 저효율일 수 밖에 없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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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프로세스는 이렇다. “중국의 전통적인 관료정부는 부담은 많은 반면에 실효는 적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적당히 책임을 면하기 위해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관료정부도 납세자인 수백만 또는 수천만의 가난한 농민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청렴하지 않으면 아되었다. 자기억제와 상호존중을 중시하는 유교의 가르침은 많은 분쟁을 사전에 억누르는 역할을 했다. 혈연관계에 기초한 전통적인 사회질서에 만략 법에 의한 제재규정이 마련된다면 개인의 권리와 소유권 등을포함한 많은 법해석상의 유연성을 배제하게 된다. 그래서 정부는 각 종족에게 그 구성원들을 가르치고 다스릴 수 잇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그 덕분에 관료조직은 행정적으로 많은 부담을 덜 수 잇었다. 이와 함께 시가의 창작이나 경학의 연구에 능했던 관료들은 자신의 직무에 엄밀하게 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는 법을 적용하는 면에서도 적용되었다. 그들은 대체로 각 지역의 특수성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최소한의 공통요소를 전국적인 표준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문인관료의 모든 관직은 사실상 호환될 수 있었으며 하나의 거대한 제국을 추상적인 관념과 이데올로기로 다스릴 수도 있었다. 일반적인 시정방향은 고려되엇지만 그 밖의 특수한 상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허한 체제가 부적절하다는 것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체제를 전면적으로 개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제에 들어맞지도 않았다. 이는 교통과 통신 등 당시의 문화기술 수준보다는 중국 특유의 광대함과 복잡함이 이를 훨씬 능가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명백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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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효율의 시스템이 수천년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에서 제국은 있어야만 했고 제국의 존재 자체가 중요기 때문이다. “맹자의 생존시기는 진시황의 통일과 불과 50년도 안 떨어졌지만 그는 이미 법가와 마찬가지로 중국에 중앙권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찬동했다.” 법가와 유가가 다른 것은 방법일 뿐이지 목적은 아니었다. 맹자와 법가가 동의한 목적이란 국가의 폭력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폭력이 하나의 국가에 모아질 때 가능했다. 그러나 제국이 필요한 이유는 내란이란 폭력만이 아니었다. 제국이 성립한 후에도 중국이 제국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는 프론티어이다. “중국의 농경민과 변방의 유목민은 2000년에 걸친 항쟁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유목민족의 위협은 기원전 3세기부터 대단히 심각했다. 이간은 국면의 전개는 중국의 중앙집권화를 촉진햇다. 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선이었다고 할 수있다. 그것은 제3의 지리적 요인으로 작용하여 중국 농업사회의 관료기구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아래에 놓이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을 만들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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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이중톈은 이렇게 정리한다. “정권을 공고히 유지하는 데 능한 것은 역시 농경민족이다. 농업생산은 정성들여 조심스럽게 가꾸어야만 하며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천시, 지리, 인화가 중요하며 과도한 무력 사용은 결코 농경에 이롭지 않다. 그래서 춘추전국 시대에는 가을이 되어야 출병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이는 농업생산을 보호하는 한편 무력 사용을 제한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농경민족은 무력보다 권력에 더욱 치중했다. 비록 권력의 남용으로 농업생산이나 소농경제에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지만 그 폐해는 무력의 그것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니 두가지 폐해 가운데 그나마 가벼운 쪽을 택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른 선택이 불가능하다면 농경민족은 暴民을 택하느니 暴君을 택한다. 차라리 신하로서 황제에게 복종하지 비적들에게 자신을 맡기지는 않을 것이란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집권의 국가제도는 중국과 같은 농경민족만 생각해낼 수 잇다. 농경민족은 문명 시대로 진입하면서 권력사회 심지어 권력집중사회를 건립해야만 한다. 무력사회에서 권력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은 일종의 진보이다. 사회가 움직이는데 필요한 원가가 확실히 낮아지기 때문이다. 권력은 일종의 ‘비전형적 폭력’이다. 굳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목적을 실현할 수 잇으며 심지어 폭력으로 실현할 숭 ㅓㅄ는 목적까지 달성할 수 잇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자원 지배와 부의 분배에 관한 방식은 결국 무력을 사용하는 쪽에서 자본이 덜 드는 권력 쪽으로 향하게 된다. 과거에 자원을 지배하고 부를 분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햇다. 맹자 이루상에서 ‘땅을 다투는 전쟁으로 죽은 이들이 들판에 가득하고 성을 다투는 전쟁으로 죽은 이가 성 안 가득햇다’고 한 것은 그 대가가 널마나 참혹한지 말해준다. 그런데 이제는 강압적인 것에서 연착륙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저 호령이나 문서 하나만으로도 행위가 금지될 수 있으니 이 어찌 효율적이라 하지 않겠는가? 집권과 통일은 역사의 요청이었으며 진과 한은 역사의 요구에 부응한 집행자에 불과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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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국은 비용을 낮추는 동시에 올리기도 했다. 제국은 家와 國의 대일통구조 위에 세워졋다. 제국이 안정적이려면 그 구조가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안정과 질서는 대가가 있었다. 사회를 그 구조에 맞도록 끼워맞춰야 한다는 말이다. 유학자들이 상업을 적대시한 것은 바로 그때문이다. 상업에 있어서 경제적 자유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문제는 그 자유가 제국의 권력과 호환되지 않는다 점이다. “어떤 권력 집중 사회나 권력 집중에서 전제로 발전하는 사회에서는 민간자본이 규모를 키워가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이 결국 제국과 맞먹는 재력 사회로 발전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제국과 왕국은 이처럼 민간자본으로 형성된 재력사회에 무너졋다. 중화제국의 통치자들은 상공업에 대해 거의 본능적으로 적대시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품었다. 중농억상이란 말이 제국의 역사에서 그치질 않았다. 진 왕조 건립 초기에 진시황은 천하의 부자 12만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켰다. 감시 삼독을 위해서였다. 한나라는 건립하자마자 억상정책을 시행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진이 굴기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시 재부가 나라에 필적할만한 거상대고에게 많은 덕을 입었다. 그래서 상인의 세력이 막강해져 나라와 임금을 세우고 조정을 좌우할 지경에 이르렀다. 말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면 말에서 끌어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민간에서 운영되는 상공업에 대해 억제와 탄압을 가함으로써 제국은 자신의 생존을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이중톈)<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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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안정은 저효율을 대가로 얻어졌다. 그러나 저효율은 폭력의 통제란 최소한의 존재이유 조차 버겁게 만든다. “제국은 본질적으로 수탈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비록 이러한 수탈이 통상 비폭력 또는 비전형적 폭력으로 표현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수탈이 아니라 할 수는 없다. 제국의 몸통에 기생하는 흡혈동물인 통치집단이 만약 수탈을 하지 않는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기생’이라 말한 까닭은 그들이 세금을 징수한 후 현대국가의 정부처럼 납세자에게 세금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끊임없는 욕망을 채우는데 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수탈을 하지 않기를 기대할 수 없다. ‘좋은’ 전제는 그나마 괜찮다고 하는 ‘개명 전제’이고 가장 ‘좋은’ 수탈 역시 그저 ‘제한적인 수탈’에 불과하다.” (이중톈)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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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국의 안정은 엘리트의 숫자를 늘린다. 늘어난 엘리트는 자신들이 기생하는 국가를 통해 자신들의 몫을 더 늘리려 한다. 결국 제국의 수요를 감당하기엔 제국 때문에 저효율로 유지되는 사회가 견딜 수 없다. 줄어드는 자원을 놓고 엘리트들의 경쟁이 격화되면 엘리트들은 귀족화되면서 제국의 근간을 무너뜨린다. (이 과정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은 ‘제국의 탄생’ 리뷰 참조)<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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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들의 자원과점, 즉 토지겸병은 ‘중국의 역사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소규모 자작농들이 징병과 징세의 기초가 되었던 점은 우선 그 공평성 여부는 제쳐두더라도 중국 농촌에 단일하고 균일한 초석을 다짐으로써 관료조직의 통제가 용이하도록 만들었다. 한 제국은 효(孝)와 염(廉, 청렴함, 재물을 탐하지 않음)이라는 덕목을 강조했는데 이는 당시의 조정이 문치를 통한 응집력을 중시한 반면 경제적인 번영을 꾀할 뜻은 없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같은 조직과 구조는 토지의 집중현상으로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토지겸병은 우선 제국의 세수기반을 무너트려 제국의 최소 존재이유를 무너트린다. 그뿐 아니라 “황제의 권위가 위에서 아래로 전해짐으로써 전국이 일원화되는 것이 전제정부의 일반적인 체제인데 만약 지방귀족 세력이 강해지면 이러한 체제는 그만큼 흔들리게 된다. 조씨가 한나라를 대신하고 사마씨가 위나라를 대신함으로써 전면적인 붕괴위기는 일단 넘길 수 있었지만 그 근본원인이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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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분은 진관다오의 초안정구조론의 핵심이다. “구조형태상으로 말하자면 중국 봉건사회는 종법일체화의 구조엿고 그것은 두가지 조절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첫번째의 조절 메커니즘은 왕조의 안정기에 작용했는데 그것은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 세가지의 하위 시스템을 강력히 통제하여 상호 적응시키거나 또한 신구조의 성장과 맹아의 상호결합 과정을 억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조절 메커니즘은 조직교란력의 증대를 저지할 수 있을 정도의 무게를 지니지는 못햇다. 조직교란력이 일정 정도 증대하면 지주의 농민에 대한 착취는 필연적으로 한도를 넘어서서 국가는 대농민반란 가운데 붕괴되었다. 이때 두번째의 조절 메커니즘이 작동했다. 한편에서는 종법일체화 구조가 왕조회복의 거푸집(유전자)을 제공하고 또한 대동란이 조직교란력을 소멸시켜 왕조회복의 가능성도 생겨났다. 다른 한편 대동란이 생산력의 축적을 가로막고 새롭게 생겨나는 맹아를 파괴함으로써 사회는 원래의 舊구조로 되돌아갔다. 이렇듯 두가지 조절 메커니즘이 번갈아 작용력을 발휘하며 사회구조의 거대한 안정성이 유지되었다. 이들 두 가지 조절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는 것이 초안정시스템이다.” (진관다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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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제1제국(저자가 진한시대를 가리키는 말)이 사라진 위진남북조의 300년이 제국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고 본다. “이 시대의 역사는 종합적인 구심력이 없는 대신 넓게 뻗어나갔다는 데 특징이 있다.” 진관다오가 말하는 종법일체화 구조에서는 다양성이 살아움직일 수 없다. 제국의 넓은 땅은 나름의 사정이 있고 사람도 사정이 있다. 그러나 제국이란 틀은 그 모든 다양성을 제국이란 대패로 밀어 같게 만든다. 그러나 300년이란 분열기는 그 다양성을 해방시켰다. “당이 제국의 황금시대를 이룬 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잇다. 우선 장장 3백여년에 걸친 동란이 한 원인이다. 위진남북조는 369년이란 세월 동안 다양한 형태의 문화를 생산했으며 나름의 활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활력이 없었다면 수의 창업 토대도 마련되지 않았을 것이고 대당의 성세도 존재할 수 없엇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당 태종 시절의 이른바 정관지치는 그 열매를 따먹은 것에 불과하다.” (이중톈)<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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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 왕조에서도 시스템의 불균형이란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유가의 전통적인 왕조는 일종의 조직이었을뿐 아니라 실제로 하나의 규범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둬야 한다. 그런 까닭에 전통적인 왕조는 면밀하고도 빈틈없는 방식으로 구성되지는 못햇다. 당왕조가 지방관리의 임면권을 확립한 이후로 공문서가 증가햇다. 그러나 문서처리는 갈수록 형식화되었”고 지역의 경제적 이익을 증진한다든가 유목민족에 대한 대책이라든가 수재나 한재에 대책, 황무지 개간 등의 행정에서 “더 이상 실질적인 정책이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시스템의 불균형을 언급한다. “근대 서양의 상황과 비교하면 당시 중국에서는 제도화된 사적인 이익이 정부와 대등한 지위를 가질 만큼 보장되지 못햇다. 반면에 서양에서는 그러한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 개인이 정부에 도전할 수도 있었고 정부에 서비스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들도 부분적인 행정비용은 부담해야 했다. 여분의 자금력을 동원할 수 잇는 대등한 위치의 민간조직이 없었던 당나라의 관료기구는 전적으로 관료의 명예라는 규범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대체로 하부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언제나 매우 중요한 듯햇지만 모든 것이 산만했고 형식화된 상급의 행정기구는 언제나 일을 얼버무리거나 책임회피에 급급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체계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아래로 압력을 가하는 도리밖에 없엇다. 요컨대 전제정부는 전제권력자의 선택을 벗어날 수 없다. 중국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지방조직이나 기술적인 설비 면에서 미처 규모도 갖추기 전에 대제국의 통일이 실현되고 말았고 그로 인해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사이에 중간계층이 형성되지 않음으로써 오로지 전제군주가 자기 나름의 결단으로 이 결함을 보완하려고 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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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왕조가 멸망한 요인은 도덕의 타락도 기율의 전면적인 해이도 아니었다. 바로 왕조의 창업 당시 갖추어졌던 조직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관료들의 형식 위주의 통제도 절절히 조정될 수 없었던 것이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왕조의 말기에 철저한 지방분권이 이루어져 군벌할거의 국면을 맞이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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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문제를 수량관리의 부재라 요약한다. 언듯 중국의 제국질서는 합리성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합리성은 목적적 합리성일 뿐 그 목적적 합리성을 구현할 도구적 합리성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제국의 위정자들이 “수량관리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혼란의 원인은 여러 가지였다. 어떤 곳의 창고에는 그야말로 물품이 넘쳐나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물자부족을 보고하는 경우가 허다햇다. 송대의 재정보고에서는 石을 단위로 하는 곡물, 緡을 단위로 하는 동전, 疋을 단위로 하는 비단이 호환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일용품의 가격은 지역마다 달랐고 어떤 때는 같은 지역이라도 시간과 계절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기도 햇다 관방의 기록은 실질적인 교환율이 거의 세금징수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었음을 인정하면서 그에 따라 ‘백성은 호소할 데가 없는’ ㅊ지엿다고 서술하고 있다. 징세자와 세무관리가 서로 대립할 경우에는 세액을 각지의 정채진 액수에 따라 겨둘 것인지 실제상황에 맞추어 신축적으로 적용할 것인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징수해야 할 세목과 이미 징수된 세목이 혼동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미 소실되거나 면세된 재물조차 징세대장에서 좀처럼 삭제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은 복식부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전 서양에서도 발생했지만 송대의 경우처럼 그렇게 놀랄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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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저자는 안록산의 난 이후 절도사들에 의해 제국이 사실상 분할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예를 들면 오늘날의 하북성 동남쪽에 잇던 성덕진 관할하의 4개주는 100년이 넘도록 왕씨 일족의 세력 범위 안에 잇었다. 이를 불안정한 징표라 할 수는 없다. 위박진의 하진도는 829년 군사들의 추대를 받은 뒤 비로소 중앙정부에 의해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관할하에 있던 7개주는 오늘날의 하북과 하남 사이에 걸쳐 있었다.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민심을 많이 얻어 그 직위를 자손에게 물려줄 있었다. 이러한 예는 곧 징세능력을 가진 자가 그 지역을 지배할 수 있다는 고금불변의 원칙을 실증해준다. 지역의 다양성이 추상적으로 만들어진 제국의 일반체계를 능가하게 될 때 제국의 통제범위는 이전보다 줄어들지만 행정의 효과는 이전보다 높아졌다. 중국은 여전히 소규모 자작농이 주체를 이루는 국가엿다. 다만 개인의 경작규모와 지역별 생산력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새로운 세입은 주로 상업과 농업, 양조업, 광업, 내륙교역 등에서 얻을 수 잇었으며 심지어 화폐의 주조로도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과거처럼 관념적인 계획으로 국가를 운영하거나 지방호족이 좁은 지배영역을 확장하여 독립왕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때와는 달랐다. 군벌의 할거는 실로 그런 특수상황에 대한 역사의 답이었다. 이는 중앙정부가 전국에 걸쳐 일률적으로 세율을 적용하는 제도와는 다른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즉 해당지역의 실력자인 세습군벌이 세금을 부과했을 뿐 아니라 세금도 각 지역의 실정에 맞추어 납세자의 능력에 따라 분담하도록 햇다. 행정적인 면에서도 그 지방의 실정을 더욱 중시할 수있게 되엇고 지역의 개발도점차 촉진되었다. 예를 들면 오늘날의 호남에 있었던 마씨 일족은 차 산업을 발전시켜 수출까지 했고 전씨 일족은 절강에서 수리사업을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왕씨 일족은 복건에서 대외무역을 크게 장려했다. 이와 같은 성취는 과거의 중앙집권적인 관료조직으로서는 원만하게 이루어내기 힘든 것이었다. 중앙집권적인 관료조직은 대체로 지역간의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된 쪽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전체적 균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햇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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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제국은 그런 발전을 배경으로 성립한 제국이다. 그러나 송 제국 역시 근대국가에서 볼 수 잇는 수량관리가 가능한 도구적 합리성이 없었다는 문제를 그대로 보여준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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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이 멸망한 후 5대10국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일어난 “송 왕조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모병제로 군사를 조달한 왕조였다. 조광윤은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엇다. 이는 정책상의 역점이 정통을 중시하는 추상적 원칙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전환되었다는 점과 중농정책에서 새로이 상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점, 그리고 수동적인 지배에서 능동적인 지배로 전환되었다는 점 등을 말해준다. 이렇게 하여 송제국에는 한때 신선한 기풍이 감돌았다. 경제적인 면에서 송 왕조는 중국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발전을 보였다. 도시가 번창했고 내륙의 운하에는 선박들이 빈번히 오갔으며 조선업도 비약적으로 성장햇다. 국내외의 교역량이 전에 없이 높은 수준에 달랫다. 동전의 유통은 그 뒤의 어느 왕조도 깨지 못할 신기록을 세웠다. 정부의 장려로 광업과 제련업도 크게 발전했다. 방직업과 양조업도 마찬가지였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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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군벌할거 시대의 발전을 바탕으로 송 왕조에서 제국의 시스템을 바꿔보려 했지만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송 왕조는 강력한 국가 아직 사회적으로 준비가 미흡한 상태에서 서둘러 금융관리 시스템 기술을 행정수단으로 삼으려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왕안석의 신법은 그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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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안석의 신법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비를 강화하려는 목적을 갖고 잇었다. “오늘날의 고나점에서 왕안석의 업적을 생각해보면 실로 경이로움을 느낄 뿐이다. 우리보다 900년이나 앞선 시대에 이미 경제관리에 따른 국사의 처리를 제도화하려 했다는 점이 정말 놀랍다. 더구나 그 범위나 심도는 세계의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엇다. 신종 조욱에게 ‘세금을 더 걷지 않고도 국고가 충분해질 수 잇다’고 말했던 그는 이미 신용대출의 방법이 경제성장을 자극할 수 잇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생산성이 증대되면 비록 동일한 세율을 적용하더라도 그만큼의 증세효과를 거둘 수있다는 확장론적 안목은 분명 전통적인 경제안목과는 다른 것이엇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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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송 제국의 재정기구를 상업적인 성격으로 전환하려면 금융의 통제방식이 적절히 정비될 필요가 있었다. 송금통지서, 선하증권, 보험증권, 해손의 규정, 선박저당대차, 모험대차증서, 합자계약, 어업권 등이 모두 입법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아무런 장애없이 시행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산상속이나 파산, 담보물 취득권 상실, 사기, 횡령 등에 대한 규정도 상업사회의 유동적인 상황과 서로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금전으로 통괄해야 이허나 것이 통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내륙 상업구조의 실상은 이 같은 요구를 충족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농업부문에서 자본축적을 이룰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은 오늘날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와 같은 조건이 지속되는 과정에서는 서비스와 관련된 사업이 생겨날 수가 없었고 발전할 수도 없었다. 통행료를 내는 국도도 건설되지 않앗고 정규적인 우편업무도 부재했다. 소송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민법의 발전도 지체되었다.” 이전과 이후의 제국들처럼 “송나라가 전국적으로 일치된 국면을 보일 수 잇었던 것으 문화적 응집력에 서 발전한 사회규범 때문이지 금전의 힘과 그에 따른 교환성 때문이 아니었다.” 왕안석의 신법은 “다만 시대의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이엇다. 중국의 정치적 통일은 그 수준이 국내의 경제조직을 훨씬 앞서 있었고 그러한 상황이 지속되는 한 양쪽 모두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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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5]]></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38/42/cover150/8986377217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6377217</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종교의 기원 - [슈퍼내추럴 - 고대의 현자를 찾아서]</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449512</link><pubDate>Sun, 26 Feb 2012 17: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44951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4231&TPaperId=544951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94/39/coveroff/897291423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4231&TPaperId=544951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슈퍼내추럴 - 고대의 현자를 찾아서</a><br/>그레이엄 핸콕 지음, 박중서 옮김 / 까치글방 / 2007년 07월<br/></td></tr></table><br/>“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라스코 지하 동굴에서 안내원이 손전등을 껐을 때의 효과는 엄청나다. 한 방문객은 이렇게 회상했다. ‘갑자기 모든 감각이 멈추고 수천년의 시간이 무너져 내린다. 그보다 더 짙은 어둠은 겪어보지 못햇다. 그건 뭐랄까, 완전히 넋이 나가는 경험이었다. 동서남북 어느 쪽을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방향감각은 모두 사라지고 태양이라고는 구경도 못해본 어둠 속에 서 있게 된다.’ 대낮처럼 밝은 의식이 꺼지고 나면 ‘떠나온 지상세계의 모든 금심과 요구들포부터 아득히 멀어지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1만7000년전 구석기시대 조상들이 꾸며놓은 이 동굴 중 첫번째 동굴에 이르기까지 방문객들은 지하 20미터에 위치한 창자처럼 구불구불한 경사진 굴속을 24미터쯤 더듬더듬 내려가야 한다. 그때 안내원이 갑자기 손전등을 천장에 비추면 거기 그려진 동물들이 마치 바위 속에서 불쑥 나타난 것처럼 드러난다. 움직이는 동시에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 들소, 말, 사슴, 황소 때들의 행렬 뒤로 불룩한 배와 길고 날카로운 뿔을 가진 낯선 맹수 한 마리가 거닐고 있다.” (카렌 암스트롱)<!--?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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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가 처음 발견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그때서야 발견된 이유는 그 동굴들이 접근이 힘든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페슈메를 내부의 통로와 회랑은 비교적 드나들기 쉽고 안전하게 재정비되었지만 고대인들은 낭떠러지를 오르고 좁은 통로를 기어가는 등의 위험을 감수하며 이곳까지 들어왔을 것이다. 이곳에 한번 들어왔다 나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용기와 의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으리라.”<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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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은 분명 그만한 어려움을 겪을 가치가 있는 곳들이다. “페슈메를은 자연이 이루어낸 최초이자 최고의 경이 가운데 하나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의 광경을 접한 사람들은 누구나 신비로운 느낌을 받을 것이다. 계속해서 걷다 보니 몽환적인 기분이 들었다. 마치 어떤 다른 우주, 난쟁이와 요정이 사는 딴 세상으로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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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왜 거기다, 그 힘든 곳에다 그림을 그렸는지는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다. 이 책은 그 수수께끼에 관한 책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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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가 처음 발견된 것은 1879년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에서였다. 그러나 그 벽화는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조작되었다는 혐의만 씌워졌다. “아마추어였던 사우투올라의 발견은 당시의 고고학계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그의 일생을 망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알타미라의 가치에 대해서 제법 정확한 가설을 세웠음에도 사우투올라에게는 세가지 약점이 있었다. 첫째는 그가 (고고학계의 주류인 프랑스가 아닌) 스페인인이었다는 것이며 둘째는 알타미라 동굴이 (프랑스가 아닌) 스페인에 있었다는 것이고 셋째는 그가 (교수가 아닌)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다는 것이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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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였던 프랑스 고고학계는 어떤 증거를 내놓아도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과학적인 방법론에 기초해 학계가 인정할 만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것이야말로 선사시대 동굴벽화에 관한 최초의 저술이며 오늘날로 따지면 노밸상 감이라 할 업적이었지만 가뜩이나 매몰찬 학계의 증오만을 더더욱 불러일으켰을 뿐이었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것이었다면, 프랑스인이었다면 교수였다면 인정받을 일이엇지만 학계는 외부자의 것은 인정하지 않았고 그를 사기꾼으로 몰았다. 결국 사우투올라는 홧병으로 죽는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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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유럽 곳곳에서 동굴벽화가 발견되면서 결국 프랑스 학자들도 알타미라를 진짜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후 한 세기 가까이 그들은 도대체 그 벽화가 무슨 의미인지, 무엇을 그린 것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프랑스 학자들은 몇가지 이론을 내놓기는 했다. 그 벽화가 토템을 그린 것이란 이론이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벽화에 그려진 동물들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무시해야만 성립되는 이론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그러나 선사학의 교황(학맥의 중심에서 교수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잇던)이 내놓은 것이란 이유만으로 수십년동안 통용된다. 그가 죽은 후 결국 이론은 페기되고 애니미즘적인 사냥주술을 위한 그림이었다는 이론이 나오지만 당시 그들이 사냥한 동물과 그려진 동물은 달랐다. 역시 폐쇄적인 학파의 리더가 제시한 이론이란 이유만으로 도전받지 않다 그가 죽자 폐기되었다. 그후에도 몇가지 이론이 제시되었지만 모두 반박되었고 고고학계는 벽화를 해석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냥 벽화를 분류하고 숫자를 부여하는 의미없는 작업만 계속했다. 그러나 여전히 의미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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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장면을 기록할 때마다 기록자는 먼저 그것을 해석해야 했다. 가령 어떤 것을 춤추는 장면’으로 분류하면 곧이어 그것이 상상적인 것인지 제의적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결국 이는 기록자가 어떤 그림을 쓱 쳐다보기만 해도 그것이 무엇을 묘사한 장면인지 알 수 있다는 식의 전제를 깔고 잇는 셈이다. 결국 통계에서 해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석으로 통계를 만드는 셈이었다.’ 남아프리카의 험한 산과 들을 헤매던 루이스-윌리엄스는 결국 이런 식의 연구가 그야말로 ‘엄청난 시간과 정력의 낭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분노했다. 그는 결국 자신이 연구한 산족의 암벽화와 유럽의 후기 구석기시대 동굴벽화를 비교하면서 느끼게 된 흥미에다 기존의 무의미한 연구방법에 대한 분노와 좌절로 이제껏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접근을 시도할 수 있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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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족은 부시맨으로 알려진 !쿵족의 친척이다. !쿵과 달리 산족은 19세기말 유럽인들에게 의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냥당하기 전까지 수만년동안 암벽화를 그려왔다. 그들이 그린 암벽화는 유럽의 후기 구석기 동굴벽화와 매우 유사하다. 루이스-윌리엄스는 산족이 암벽화를 무슨 의미로 그렸는가를 알면 유럽의 동굴벽화도 의미를 알 수 있다는데 착안한다. 그 단서는 19세기에 작성된 민족지였다. “산족문화에 관한 19세기의 기록은 노트로 100여권, 1만2000여 페이지에 달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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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지의 기록은 암벽화가 샤먼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기-텐(산족의 샤면)이 그린 방대한 암벽화는 산족이 믿는 특정한 초자연적 영과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을 묘사한 것이었다. 산고 사회에서 기-텐은 영의 세계와의 접촉을 담당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이 지닌 초자연적 능력(기)이란 유체이탈을 통해 영의 세계에 다녀오는 것을 말했다. 현대의 인류학자들은 대부분의 고대 종교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이와 비슷한 내용을 샤머니즘적이라는 말로 통칭한다. 어떠한 문화에서건 샤먼은 변성의식상태를 초래하고 제어하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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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성의식상태란 흔히 트랜스라 불리는 의식상태이다. 산족은 길고 격렬한 춤을 통해 트랜스로 들어갔지만 아마존의 샤면은 아야후아스카란 식물의 DMT 성분을 이용해 트랜스 상태로 들어간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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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머니즘 자체는 단순히 어떤 신앙체계나 의도적인 연구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트랜스에 돌입하기 위한 기술인 동시에 그로 인한 체험을 통해 어떤 사건을 해석하고 행동의 지침을 얻는 기술이다. 샤머니즘에 따르면 다른 세계, 다시 말해 저승은 우리의 물질세계 너머에, 배후에, 위에, 아래에 즉 어디에나 존재하며 그곳에는 비록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지만 우리에게 해를 끼치거나 덕을 베풀 수는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산다. 대부분의 사름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물질세계에만 머물기 때문에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임무는 오로지 샤먼에게만 주어진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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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윌리엄스는 유럽에서는 1만2000년전까지, 남아프리카에서는 100년까지 그려졌던 벽화들이 모두 샤먼이 트랜스 상태에서 본 것을 그린 것이라 말한다. “아프리카의 산족이 남긴 암벽화와 유럽의 후기 구석기시대 암벽화가 다르리라는 것은 사실 누구나 예상할 수있다. 오히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두 가지가 서로 무척 닮았다는 점이며 바로 이 점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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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벽화와 산족의 암벽화에 공통으로 나오는 주제는 여러가지이다. 가령 지그재그, 나선형, 물결문양, 격자문양. 체크문양, 거미줄, “사다리 문양을 비롯해서 스페인의 알타미라와 엘 카스티요에서 발견되었던 문양 중 상당수가 역시 남아프리카에서도 발견되며” 그 추상적인 문양들이 구상화에 겹쳐져 그려진 양식도 유사하다. 그뿐 아니라 “선사시대 동굴미술의 수수께끼는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동물 즉 서로 다른 종의 특징을 결합한 키메라나 머리나 다리나 꼬리가 여러 개 달렸거나 혹은 괴물처럼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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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구석기 시대 유럽과 남아프리카의 암벽화에 공통으로 드러나는 주요개념을 요약하면 이렇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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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반수의 모습을 지닌 인간, 혹은 완전히 동물로 변신한 인간, <o:p></o:p>
동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몸에 창이나 화살을 맞은 인간, <o:p></o:p>
다른 동물로 변신한 동물, 혹은 두 개 이상의 종들의 혼합종으로 변신한 동물, <o:p></o:p>
기이한 외모를 지닌 동물과 완전히 낯선 동물, <o:p></o:p>
기하학적 문양<o:p></o:p>
단순히 텅 빈 캔버스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침투적인 암벽 표면”<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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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을 넘어 나타나는 이런 공통점의 열쇠는 트랜스 상태에서 본 것이 동일하기 때문이라 루이스-윌리엄스는 말한다. “루이스-윌리엄스의 신경심리학 이론은 변성의식상태에서 나타나는 6가지 형상, 7가지 원칙, 그리고 3단계 과정으로 이루어진 모델인 셈이다. 제1단계에서는 체험자가 오로지 내시현상(안내섬광이라고도 하며 신경학적인 구조 때문에 보이는 기하학적 문양)만 경험한다. 제2단계에서는 체험자가 내시현상을 도상적 형태로 (가령 지그재그 모양을 뱀의 형태로0 변화시키려고 시도한다. 제3단계에서는 체험자가 일종의 소용돌이나 회전터널에 둘어싸인 느낌을 받는다. 소용돌이의 가장자리는 마치 TV 화면처럼 사각형의 격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화면’으로부터 도상적 환각이 생성되고 나중에 가서는 내시현상이 도상적 환각(즉 진짜 환각)으로 대체된다. 가령 들소인간과 같은 반인반수 혼합의 형상 같은 경우 (환각제를 이용한) 현대인 실험 참가자들도 트랜스의 제3단계에서 종종 목격하는 것으로 그때는 영상들이 현란하게 결합되어 체험자는 기묘한 환각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가령 신경심리학 연구의 선구자인 클뤼퍼는 메스칼린을 직접 복용한 뒤에 어떤 사람의 머리에 고양이 털이 수북하게 자라더니 곧이어 사람의 머리가 고양이 머리로 바뀌는 광경을 보았다고 기술했다. 이처럼 반인반수를 목격하거나 혹은 스스로가 반인반수로 변하는 듯한 경험은 환각제 실험에서도 종종 보고된다. 어느 해시시 체험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우 생각을 했더니 내가 갑자기 여우로 변신해 있었다. 긴 귀와 부숭부숭한 꼬리가 눈앞에 보였고 나 자신이 해부학적으로 완전한 여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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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의 반인반수는 (종전에 주장된 것처럼) 의식용 의상이라기보다는오히려 환각이라고 해야 더 잘 설명되는데 왜냐하면 거기에 뭔가 비현실적인 특징이 분명히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에게 이 환각은 신경계 즉 변성의식상태를 통해서 서로 다른 도상적 이미지가 결합된 형식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루이스-윌리엄스는 “변성의식상태로부터 유래한 종교가 이후 미술의 발생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후기 구석기시대 미술의 특색은 선사시대 미술가들에게 신경학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들은 ‘그림을 발명’할 필요도 없엇고 단지 모래 위나 부드러운 동굴 벽에 투사된 머릿속의 이미지를 거기에 고정시키면 그만이었다. 바로 거기서부터 미술의 역사가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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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구석기 유럽과 남아프리카 암벽화의 구도는 이런 공통점이 잇다. 지평선과 같은 원근법적 구도를 완전히 무시한 채 마치 붕붕 떠잇는 것처럼 비례가 맞지 않는다. 암벽 표면이 그림의 배경이 아니라 도상들 사이에 드리워진 휘장이나 막처럼 여기고 사용한다. 이미 그려진 그림 위에 다른 그림이 겹쳐진다. 이런 구도는 트랜스 상태에서 보는 것이 그렇기 때문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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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단계로 화가가 동굴이나 암벽 은신터에서 변성의식상태에 들어간다. <o:p></o:p>
두번째 단계로 그들은 동굴이나 암벽 은신처의 벽과 천정 뒤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듯한 환각을 체험한다. 이때 환각은 여러 개가 서로 겹치며 나타나고 여기저기 떠오른 듯하며 비례나 위치는 완전 무시된다. <o:p></o:p>
세번째 단계로 트랜스 상태가 지나가면 화가는 자신들이 본 환상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동굴이나 암벽 은신처의 벽에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곳을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확립하거나 기념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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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하기 힘든 곳에 벽화를 그린 이유는 그곳이 트랜스 상태로 들어가 신성과 만나는 성소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루이스-윌리엄스의 이론이다. 그러나 루이스-윌리엄스는 그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벽화로 그려진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뿐이다. 저자는 거기서 더 나아가 트랜스 상태에서 그들이 본 것이,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인가란 질문을 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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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머니즘은 트랜스에서 보는 “초자연이 실제로 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우리의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고 본다. 과학자들은 이런 생각 자체를 환각으로 치부하지만 사실 과학은 환각이 어떤 작용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조차 규명하지 못하며 특히 신경학에서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수준 이상으로 더 멀리 나아가지도 못한 상황이다. 결국 샤머니즘의 핵심-우리의 정신이 다른 층위의 현실을 경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험이 지금의 현실에 어떻게든 이바지할 수 잇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과학에 반대되는 것ㅇ리다. 과연 그렇한 실체는 근거가 없는 의식상의 허구에 불과할까? 샤먼들의 증언과 서구인의 환각제 실험에서 매우 유사한 결고가 나온 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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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저자는 환각제를 통해 우리가 트랜스로 돌입할 수 있다는 그 현상 자체의 의미를 묻는다. 먼저 저자는 윌리엄 제임스와 올더스 헉슬리의 이론을 검토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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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화질소를 이용해 트랜스 상태에 들어간 후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썼다.: “우리의 정상적으로 깨어 있는 의식, 혹은 합리적 의식은 여러 의식의 양태 중 하나에 불과하며 마치 영사막처럼 얇은 차단막 뒤에는 그와 다른 잠재적인 의식의 형태가 존재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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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제를 여러 번 복용했던 헉슬리는 “두뇌와 신경계와 감각기관의 주 기능은 생산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거적으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감압밸브의 역할을 한다. 이런 기관은 우리가 무가치하고도 부적절한 지식의 무더기에 압도당하거나 혼란을 느끼지 않게끔 우리가 언제든지 인식하고 기억할 수 있는 지식은 대부분 차단함으로써 오로지 실질적으로 유용한 소수의 특별히 엄선된 지식만을 남겨둔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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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환각제 LSD를 처음으로 합성한 호프만은 이렇게 달리 말한다. “우리가 LSD의 영향 아래에서 또다른 현실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두뇌, 즉 수신자의 채널이 생화학적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이ㅏㅆ다. 이때 수신자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현상과는 다른 즉 그에 상응하는 또다른 파장에 맞춰진다. LSD와 다른 다른 환각제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자아라는 수신기의 채널을 바꿔줌으로써 현실의식의 변성을 초래하기 때문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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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트랜스에서 경험하는 것은 또다른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현실은 장구한 세월 동안 인간에게 알려졌고 지금도 알려지고 있으며 그 예로 저자는 샤머니즘 뿐 아니라 UFO 피납자들의 경험을 예로 든다. UFO 피납자들의 증언은 “대개 ‘외계존재’에 납치되어 ‘하늘에 떠 있는 우주선(혹은 수중이나 지하)로 끌려가 고통스럽고 불쾌한 체험을 한 뒤에 집으로 되돌려 보내졌다는 것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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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O 피납자들을 연구한 정신의학자 존 맥은 “이 현상을 트라우마적 사건에 수반된 정신장애의 일종으로 규명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피랍자에 대한 심리학적 검사에서도 이들이 주장하는 경험이 정신적이거나 정서적인 장애에서 비롯되엇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실제 무언가를 경험한 것이다. 그 경험이 무엇인가가 문제이다. “외계인 피랍현상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현상의 범주 자체가 서구의 주류 과학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가시적 물질세계에 관한 것도 아니고 결코 우리의 세계 안에서 드러날 것같지도 않다는 점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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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O 피납자들이 말하는 항목 중 하나라도 경험한 사람은 전체의 2%이다. UFO 피납자들은 환각제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트랜스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라 저자는 설명한다. 전체 인구의 2%가 그런 사람들이며 UFO에 피납되었다는 주장은 샤먼이 트랜스에서 경험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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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대부분의 피랍자는 ;떠오른’ 상태로 UFO까지 끌려갔다고 주장하며 샤먼들은 입문 단계에서 대부분 하늘을 날았다고 증언한다.” 공통점은 많다. “‘뭔가 바늘처럼 날카로운 것이 비스듬한 각도로 목을 찔렀다.’ ‘외계인이 30센티 길이의 바늘에 손잡이가 달린 도구를 들고 왼쪽 귀 아래에서 두개골 쪽으로 찔렀다.’ ‘30센티는 되는 금속기구가 콧속을 통해 두뇌로 약 15센티나 삽입되어 뭔가를 부숴가면서 내 두뇌에 도달하려 했다.’” 이 증언들을 샤먼들의 환각체험과 비교해보자. “’입문자는 종종 검은 악마 셋에게 붙잡혀 온몸이 조각조각 잘리고 머리가 창에 찔리며 살점이 사방팔방으로 흩뿌려진다.’ (야쿠트족) ‘영은 입문자에게 창을 던져 목 뒤를 뚫고 혀를 지나 입으로 나오게 한다.’ (아룬다족, 호주) ‘머리에는 뱀을 한마리 집어넣고 코에는 마법의 물체를 꿴다.’ (와라뭉가족, 호주)”<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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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샤먼의 환각 체험과 유사한 것으로 서구의 요정도 마찬가지라 말한다. 그외에도 많은 종교사의 사건들이 샤먼의 환각 체험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3세기의 마니교 창시자인 마니는 자신이 열두 살때부터 ‘번갯불과 함께 나타난 천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슬람교도들은 예언자 마호메트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코란의 내용을 계시받았다고 믿는다. 기독교의 사도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하늘에서 빛’과 목소리에 그만 땅에 떨어져 사흘동안 눈이 멀었다. 바울의 회심사건이야말로 샤먼의 입문과정과 유사하다. 원시 기독료도 가운데 그노시스파는 특별한 종류의 사물의 본성에 관한 지식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는데 이때 그런 지식은 가르침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 입문자에게 전해진다고 믿었다. 또한 그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이 근본적으로 환상이며 영혼은 오로지 환각상태에 들어가야만 진정한 현실을 볼 숭 있다고 주장했다. 잔 다르크는 영의 세계이며 그곳의 초자연적 거주자들과 직접 의사소통함으로써 ‘기적적으로 왕과 조국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천사가 아니라 악마의 ‘목소리’를 들었단즌 교회의 판정에 의해 처형당했다.” 교회에 의해 마녀로 몰린 여성들의 경우도 중상모략만은 아니며 샤먼 현상과 관련이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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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5<o:p></o:p>
&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94/39/cover150/8972914231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4231</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모든 것의 끝 -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449500</link><pubDate>Sun, 26 Feb 2012 17: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44950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764137&TPaperId=544950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496/34/coveroff/895276413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764137&TPaperId=544950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a><br/>크리스 임피 지음, 박병철 옮김 / 시공사 / 2012년 01월<br/></td></tr></table><br/>“한 우주 여행자가 태양계로 접어들어 세 개의 행성을 발견했다. 그 중 하나는 크기가 지구와 비슷한데 대기의 주성분은 질소이고 이산화탄소가 조금 섞여 있으며 산소는 전혀 없다. 두번째 행성은 이산화탄소로 이루어진 걸쭉한 대기가 지표면을 두텁게 덮고 활화산과 간헐천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가. 세번째 행성은 조금 작은데 대기가 엷고 육지 표면에서 얕은 호수가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이 세개의 행성에는 모두 미생물이 번창하고 잇다. 이것이 30억년전의 태양계의 모습이다. 첫번째는 지국이고 두번째는 금성, 세번째가 화성이다. 30억년 전만 해도 금성과 화성이 지구보다 더 살기 좋은 행성이었다. 금성은 처음 생성된 후 거의 10억년 동안 바다가 있었고 운석의 집중 충돌기 뒤에 생명체가 형성될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따지고 보면 지구는 생명체에게 가장 이상적인 환셩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지구는 생존가능한 환경의 극단에 속한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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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명이 있는 행성은 지구뿐이다. 그 이유를 제임스 러브록은 가이아란 말로 설명한다. “생명체와 물질 환경은 하나의 결합된 계로 진화해왔으며 이로부터 기후와 화학성분을 샌존에 적절한 상태로 유지하는 자체제어능력이 개발되었다. 러브록은 지난 수십억년동안 지구에 도달한 태양 에너지가 25%나 증가했음에도 대기의 온도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그는 불안정한 기체인 대기 중 산소가 지각 속의 광물과 빠르게 결합하여 사라져야 함에도 오랜 세월 동안 대기의 성분이 변하지 않았다는 점도 신기하게 여겼다. 강물이 바다에 계속 유입되고 있음에도 바다의 염분 농도가 세포 활동에 적절한 값을 유지하는 것도 신기하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러브록은 어떤 거시적인 계가 모든 것을 컨트롤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안정된 상태가 유지된다고 결론지었다.” 러브록은 자체제어능력을 가진 이 시스템을 가이아라 불렀고 생명체가 그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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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는 지구의 환경 자체를 바꿔왔고 자신에 맞게 그 환경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생명의 미래는 영원할 것같지는 않다. 물론 50억년 후 태양의 수명이 끝날 때 지구도 사라질 것이고 지구가 사라질 때 생명이 남아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생명의 종말은 그전에 찾아올 것으로 보인다. 태양 때문이다. 태양계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태양은 25% 더 뜨거워졌다. 지금까지는 그 변화에 지구의 시스템이 적응할 수 있었고 생명이 살 수 있는 조건으로 평형을 맞출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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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5억년동안은 온난화가 가속되면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바다로 이동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적으로 지구 온난와가 뜨거운 이슈로 부각되지만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온난화의 주범으로 지목하지만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바다로 이동하려면 아직 멀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앞으로 한참 동안 증가할 것이란 이야기다. 앞으로 이산화탄소가 바다로 유입되면서 대기 중 농토가 감소하면 나무를 비롯한 식물들은 더 이상 광합성을 할 수 없게 된다. 그후로 지구에는 악재가 계속되낟. 얼음층이 녹으면서 적도 지방에 홍수가 덮치고 따뜻해진 바닷물은 성층권까지 증발하고 지구는 서서히 말라간다. 지구는 황량한 사막으로 변할 것이다. 그대로 태양은 사정없이 내리쬐고 심해 바닥의 퇴적층에 저장되었던 이산화탄소까지 대기에 유입되어 온난화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결국에는 이 기체마저 우주로 날아가 버린다. 앞으로 35억년 후에 어떤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한다면 바싹 마른 바위 외에는 가져갈 게 없을 것이다. 지구의 일생을 펼쳐놓고 보면 시작과 끝이 매우 비슷하다. 메마른 불모지에서 시작하여 활기찬 생명으로 우글대다 다시 메마른 불모지로 끝난다. 지구의 일생을 십억년 단위로 펼쳐보면 대륙이 나타나고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생명 활동에 필요한 수준 이하로 떨어지고 바닷물이 끊어오르고 지표면이 바싹 구워지면서 완전히 소독되고 지구가 죽음의 나선운동을 시작하면서 태양에 빨려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천문학자들은 지구의 미래가 그리 아름답지 않다는데 대체로 동의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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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멸종은 여러 번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공룡을 쓸어버린 운석충돌이다. 그리고 지금이 또 한번의 대멸종 시기라 학자들은 본다. 인간이 환경을 바꾸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생태계가 거기에 적응할 시간이 부족하고 종들은 빠르게 사라진다. 종들이 사라지는 속도는 과거의 대멸종과 맞먹을 정도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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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대멸종을 불러올 수 잇을 정도의 힘을 갖게 된 것은 과거에 멸종직전에 갔던 사건 때문이었다. “9만~13만5000년전 아프리카 대륙은 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화석에서 채취한 DNA를 분석해보면 당시의 인구수에 심각한 병목현상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잇는데 학자들은 그 무렵의 인구가 2,000명 내외까지 감소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멸종직전의 인류는 뇌의 용량을 키우고 더 영리해지는 방법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자신이 부른 대멸종도 넘길 수 잇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인간이란 종 자체가 멸종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명도 그럴지는 알 수 없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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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살아남는다면, 지구상에서 생명 자체가 멸종하기 전에 우주로 나가 생명을 퍼트릴 수 잇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생명을 영원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우주 자체도 끝이 잇기 때문이다. 단지 그 시간이 상상할수도 없을 정도로 장구할 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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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우주가 어렸을 때 사방에 퍼져있던 기체로부터 탄생햇다. 빅뱅이 있고 약 140억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기체는 사라졋고 늙은 별들이 자신이 지닌 기체의 일부를 외부로 방출하고 잇다. 이 기체는 우주 초기의 가벼운 기체가 아니라 핵융합을 거쳐 개조된 무거운 기체이다. 외형상으로는 재활용이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효율이 점차 떨어지고 있다. 시간이 충분히 흐르면 이 재활용 사이클은 완전히 멈출 것이다. 결국 끝까지 남는 것은 적색 왜성이다. 이들은 거의 1조년 동안 핵융합을 근근히 유지하면서 간신히 빛을 발할 것이다. 10조년이 지나면 드디어 적색왜성까지 모든 연료를 소진하게 된다.” 은하의 모든 별이 죽은 후에도 연성계를 이룬 죽은 별들이 합쳐져 다시 핵융합반응을 일으키는 별이 되는 간간히 일어날 수 있으니 “100조년 후, 또는 그보다 먼 미래에도 은하수에서 별이 생성될 수 있다. 그래도 은하수는 빛의 상당부분을 잃는다. 지금은 4000억개에 달하는 별들이 빛을 발하지만 100조년 후에는 100개 남짓한 왜성들이 핵융합 한계 온도를 간신히 넘긴 상태에서 희마하게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별의 시대는 이것으로 끝이다. 자연은 은하수의 에너지 효율을 서서히 저하시켜 종말로 몰고간다.” 그리고 물질 자체도 사라질 것이다. “10의 100승년이 지나면 양성자는 모두 붕괴되고 별들도 사라지고 블랙홀도 모두 증발한다. 남는 것은 뉴트리노와 전자, 양전자, 그리고 관측가능한 우주보다 파장이 긴 광자들뿐이다. 이 l기에 일어나는 모든 물리적 과정은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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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미래이다. 현재의 천체물리학에선 우주는 무한히 그리고 더 빨리 팽창할 뿐 다시 수축할 것으로 보지는 않으니 엔트로피를 리셋할 이벤트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우주는 식어가면서 죽은 상태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은하가 완전히 증발하려면 100억*10억년쯤 걸린다. 이것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이해하기 위해 시간 스케일을 다시 조정해보자. 100조년을 1년으로 간주할 때 우주의 나이 137억년은 10시간에 해당된다. 이제 시간을 더 앞축해 은하가 모두 증발할 때까지 거리는 시간을 1년으로 잡아보자. 그러면 이 달력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빅뱅은 1우러1일 새벽 0시에 있었고 지금 우리는 그로부터 13초분의 1이 지난 시점에 와있다. 제야의 종이 이제 막 울리기 시작하는 새해 벽두이다. 마술 같은 사건으로 가득 찬 이 우주에서 마지막에 어떤 일이 일어나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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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496/34/cover150/8952764137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764137</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신자유주의의 기원 -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 자유 시장과 복지 국가 사이에서]</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449486</link><pubDate>Sun, 26 Feb 2012 17: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44948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972241&TPaperId=544948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882/97/coveroff/899197224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972241&TPaperId=544948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 자유 시장과 복지 국가 사이에서</a><br/>토니 주트 지음, 김일년 옮김 / 플래닛 / 2011년 02월<br/></td></tr></table><br/>“미래는 독재와 함께 하지 않을까? 확실히 그렇게 보였다. 1945년 연합국이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이러한 우려는 가시지 않았다. 불황과 파시즘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에서 떠나지 않앗다. 전후의 시급한 과제는 이 엄청난 승리를 자축하고 나서 전쟁 이전의 일상응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1914년에서 1945년 사이에 겪었던 경험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게 해줄 방법을 찾는 것이엇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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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는 전후 유럽의 분위기를 가장 잘 나타낸 작품이다. 48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아내를 잃고 자신의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오웰의 절망에서 태어났지만 개인적인 불행보다는 전체주의는 언제든 가능하다는 아마도 전체주의가 미래일 것이라는 절망이 더 컸다. “수백개 사단을 거느리고 동쪽에 버티고 있는 붉은 군대와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벨기에에서 득세하고 있던 공산당과 노동조합.” 국무장관 마셜이 유럽을 방문했을 때 본 광경이다. “마셜 플랜은 2차대전 이후의 상황이 1차 대전 히우에 벌어졌던 사태들보다 더 나쁜 결말로 치달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의 산물이엇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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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몰락하고 나서 한참이 지난 후에 그에 대해 평가해 달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일부 국외자들은 더러 최소한 그는 독일인들에게 일자리를 되돌려주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또한 트탈린이 어떤 결함을 지니고 있었든 간에 최소한 그는 소련을 대공황으로부터 지켜 냈다는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기차가 제 시간에 맞춰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무솔리니에 관한 농담조차 그 행간에는 다음과 같은 항변이 담겨 있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다는 거야?”<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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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으로 문명을 되돌리는 일은 가능해보이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이 문제를 고민했던 사람은 바로 메이너드 케인스였다. 영국의 클레먼트 애틀리, 프랑스의 드골, 그리고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에 이르기까지 당대 혁신적인 법안의 통과를 이끌었던 일련의 정치가들과 마찬가지로 케인스 역시 천성적으로 보수주의자였다. 당대 대부분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은 모두 케인스에게 매우 익숙했던 평화로운 시절에 태어난 노신사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충격적인 대격변의 시절을 겪은 자들이엇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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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더 이상 그들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아름다운 시절(Belle Epoque)로 돌아갈 수는 없었고 그 시절의 가치를 그대로 되살리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전간기에 자본가들은 이미 스스로 자기 이익을 최선으로 지켜낼 능력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뭔가 달라져야 했다. 그리고 그일은 국가가 해야할 일이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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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아주 역설정인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에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불릴만한 변화들 덕분에 자본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후 초창기에 정책 논쟁은 도덕적인 성격을 띠었다. 실업, 인플레이션, 그리고 농민들이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토지를 내팽개치고 극우정당으로 달려가게 만든 농산물 가격폭락 등은 단지 경제적 쟁점이 아니었다. 성직자에서부터 세속의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당시 모든 사회구성원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공동체의 윤리적 일관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간주했다. 모두가 국가를 믿었다. 이는 전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불과 얼마 전에 경험했던 끔찍한 공포를 두 번 다시 겪고 싶어하지 않았고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의 자유를 제한하는데 기꺼이 찬성했기 때문이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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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한세대를 프랑스에선 ‘영광의 30년이라고 불렀고 이 시절의 정점에서 맥밀런 수상은 이렇게 장담했다. “’이렇게 좋은 시절은 앞으로 다신 오지 않을거요.’ 그가 옳았다. 극단주의 세력이 다시 부상할지 모른다는 우려는 자취를 감추었다. 서양은 번영과 안녕의 황금시대에 들어섰다. 거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편안한 거품에 파묻혀 과거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삶을 누렸고 희망찬 시선으로 미래를 기대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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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사회민주주의의 기적은 “보편주의란 마술에 의해 성취된 것이었다. 중간계급의 공포와 불만이야말로 파시즙ㅁ을 권좌로 불러들인 원동력이었다. 중간계급을 민주주의 지지자로 돌려세우는 일은 전후의 정치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리고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낸 것이 보편주의의 마술이었다. “중산층은 더 이상 소득에 견주어 혜택을 받지 않았다.” 이전에 복지란 중산층에겐 단지 돈만 내고 자신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젠 “무상교육에서부터 무료 혹은 저가로 제공되는 의료 혜택, 공공연금, 실업보험에 이르기까지 노동자, 빈민층이 누리는 것과 똑같은 혜태ㅑㄱ을 누렸다.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많은 부분들이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충당된 결과 유럽의 중산층은 1960년대에 이르면 자신들의 가처분 소득 수준이 1914년 이후 그 어트 때보다 높아졋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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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영광의 30년이 가능했고 무려 한 세대동안 잘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고 말한다. 지적 혁명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맹신과 사직인 이익 추구가 항상 공익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믿음은 완전히 끝장났다. 두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사람들 대부분은 일상생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전시경제는 전쟁이란 목적을 위해 온 나라를 전쟁기계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렇게 묻기 시작했다. 그러면 평화를 위해서도 같은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시장은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해 그 빈틈을 메워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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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특히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란 분배의 개념이엏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규제받지 않는 경쟁이 낳은 결과에 분개햇다. 그들은 급전적 미래를 꿈꾸기보다는 더 나은 삶의 방식을 가능하게 해줄 가치들을 되찾으려 했다. 베아트리체 웹 같은 영국의 초기 사회민주주의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사회주의를 공교육, 공중보건서비스, 의료보험, 공원과 운동장, 노약자와 실업자에 대한 공적지원 등으로 규정했다. 정부가 이러한 일들을 맏아야 한다는 생각은 전대미문의 것이엇다. 2차대전 이후 사회적 목적의 실현을 위해 재정을 운용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책임으로 자리잡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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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광의 30년은 그 자신의 영광 때문에 무너졌다고 저자는 말한다. 영광의 30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공동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위해 국가가 나서야 된다는 합의였으며 국가에 대한 신뢰였다. 그러나 국가의 성공은 자신의 무덤을 팠다고 저자는 본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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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후에 태어난 자들에게 복지국가와 그 제도들은 과거의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그저 일상적인 삶의 조건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복지는 지루한 일상 그 이상이 아니었다. 60년대 중반에 대학에 입학한 베이비붐 세대는 다른 시절을 겪어보지 못했다.” 복지국가의 합의는 중간계급의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전쟁 직후 그 동의의 이유를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들은 복지국가를 가능하게 했던 지적 혁명을 뒤집어놓았다. “위대한 이상을 품고 1960년대를 살아온 우리 세대는 결국 자유주의를 파괴해버렸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세대의 일원인 케밀 파야의 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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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영광의 30년의 성과 자체가 그 시절을 가능하게 했던 지형을 부수어놓았다. “중간계급에게 실제로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든지 간에 뉴딜의 개혁정책들과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주의, 영국의 복지국가는 모두 육체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지지에 우선적으로 의존했다. 그러나 1950년대 내내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프롤레타리아는 지속적으로 파편화되면서 감소했다. 전통적인 공장 노동자와 광부, 그리고 운수업 종사자에 대한 좌파의 집착은 자동화와 서비스업의 부상, 그리고 여성 노동자의 증가로 더 이상 설자리를 찾지 못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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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기반이 흔들리는 가운데 중간계급도 변했다. “워싱턴에서부터 스톡홀름에 이르기까지 지난 시절의 개혁가들은 모두 정의, 기회균등 혹은 경제안정 같은 목적을 공유했고 이러한 목적은 공동의 노력으로만 달성할 수있다고 확신했었다. 지나치게 억압적인 하향식 통제와 조정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수많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은 이런 문제접들을 사회정의를 위한 비용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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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회정의란 목적이 이미 이루어진 시절만 경험한 젊은 세대에게 그런 목적은 더 이상 호소력이 없었다. 대신 “60년대 세대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필요와 권리였다. ‘개인주의’. 즉 모든 사람은 사적 자유를 최대한 누리고 자신의 욕망을 어떠한 제한 없이 표현할 자유가 있으며 이 모든 권리는 사회에 의해 존중되고 제도화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점차 그 시대 좌파의 슬로건으로 자리잡았다. ‘네 멋대로 하라’ ‘감정을 해방하라’ ‘전쟁 대신 사랑을 하자’ 이러한 목표들은 본질적으로 사적인 목표일 뿐 공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하다. 60년대의 정치는 사회나 국가에 대한 개인적인 권리들의 총합으로 전개되었다. 개인적 정체성, 성 정체성, 문화적 정체성 들 정체성의 문제가 공적 담론을 잠식했다. 이러한 정체성의 정치란 급진주의적 정치의 파편화와 맥이 닿아 있었고 다문화주의란 그럴듯한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 시절에 좌파가 된다는 것은 자기본위적인 자기개발적인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자신만의 관심사에 매몰된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목표를 공유한다는 의식의 퇴조였다. 전후 수십년간 이어져온 합의는 붕괴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그러나 확실히 부자유스러운 합의가 사적 이해관계의 절대성을 둘러싸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들의 감정은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으로 확실히 나위너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새로 등장한 우파 역시 이와 똑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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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란 통칭되는 “우파의 탄생은 그들의 적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70년대 중반 이후 30년간 이어진 보수주의의 승리와 그로 인한 근본적인 변화들은 필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일종의 지적혁명이 낳은 결과였다. 대략 10년 남짓한 짧은 기간동안 공적 담론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기존 패러다임이 국가의 적극적 개입과 공동선의 추구였다면 새로운 세계관은 마거릿 대처의 악명 높은 명언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사회 따위는 없다. 오직 개인과 가족이 있을 뿐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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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이고 사회따위는 없다면 국가의 역할 역시 다시 한번 조정자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되어야 햇다. 이제 정치가가 할 일은 개인들의 삶에 최대한 간섭하지 않으면서 개개인이 자신에게 이로운 일을 잘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엇다. 케인스식 합의와 비교해보면 사태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숭 있다. 케인스는 자본주의의 기능이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되게 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데 그친다면 그런 자본주의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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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882/97/cover150/8991972241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972241</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통치의 대차대조표 - [시진핑 시대의 중국 - 중국은 과연 세계의 지배자가 될까]</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449472</link><pubDate>Sun, 26 Feb 2012 17: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44947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209090&TPaperId=544947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514/46/coveroff/893520909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209090&TPaperId=544947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시진핑 시대의 중국 - 중국은 과연 세계의 지배자가 될까</a><br/>사토 마사루 지음, 이혁재 옮김, 권성용 해제 / 청림출판 / 2012년 02월<br/></td></tr></table><br/>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의 소프트 파워는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워싱턴 컨센서스라 요약되는 미국 모델이 무너지면서 중국 모델, 베이징 컨센서스가 힘을 얻고 있다. 이를 지적하면서 &nbsp;금융위기 이후의 세계질서를 분석하는 방법론의 초점은 세계를 베이징 컨센서스권과 워싱턴 컨센서권으로 나눌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미국의 네오콘 논객으로 유명한 로버트 케이건은 ‘새시대에는 민주국가와 전제독재국가 사이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때때로 대립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 예측한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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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문제에 대해 중국을 지지하거나 적어도 묵인하는 국가의 수가 상당하다는 것을 보면 이런 주장은 현실적으로 들린다. 무려 110개국 이상 적게 잡아도 64개국이다. “베이징 컨센서스권의 구체적 범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2010년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식에 중국의 요청으로 불참한 국가들과 중국의 입장에 지지와 이해를 표명한 국가의 수이다. 100여개국에 달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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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베이징 컨센서스권이란 개념엔 실체가 있는가? “베이징 컨센서스권의 확대와 결속에는 한계가 있다. 베이징 컨센서스권에 속한 국가일지라도 각국의 계산은 저마다 다르다. 그들은 서방의 비난을 반박하며 자국의 정당성과 체제를 유지한다는데 계산이 일치한, 응집력이 약한 정치연합에 불과하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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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정치적 실체로 묶이기에는 한계가 뚜렷한 모래알일 뿐이란 말이다. 더군다나 그 중심이 되어야 할 중국 자신의 문제 때문에도 더더욱 그러하다. “원자바오 총리는 2011년 3월 기자회견에서 프랑스 기자로부터 ‘중국은 독자적인 발전모델을 구축했는데 다른 나라들도 중국 모델을 도입할 수있다고 보는가’란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해 ‘우리의 개혁은 여전히 모색단계이며 중국의 발전이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답변했다.” 워싱턴 컨센서스와 달리 베이징 컨센서스는 보편성이 없다는 말이다. 보편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세력으로 뭉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보편성이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일당 지배를 통해 성공하는 중국 모델을 응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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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중국 모델이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하면 개발독재를 통한 일당 지배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중국 공산당의 통치 능력에 있다. 중국은 문제의 발견과 해결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당 지배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등지의 독재자의 통치능력이 반드시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으며 중국의 일당 지배 모델이 효율적으로 운용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경제가 성장하면 사회 각층의 이해관계가 복잡해진다. 따라서 민주적인 해결과정은 정권안정의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베이징 컨센서스권의 국가 모델은 영원히 이어지는 지속가능한 정치경제 모델은 되지 못한다. 중국도 그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베이징 컨센서스 동맹까지는 바라지 않는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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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모델이란 것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은 중국 스스로도 잘 알고 잇고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잊을만하면 제기되는 중국 붕괴론의 근거이다. “민주화를 추진하지 않으면 이익 분배는 편중되고 빈부 격차는 시정되지 않는다. 관료의 부패도 만연하게 된다. 13억 인구와 56개 민족을 안고 잇는 중국공산당과 정부는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고군분투하지만 이익 편중 등으로 인해 중국 모델은 지속가능한 통치모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중국은 붕괴하게 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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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쨌든 중국 모델은 살아남았고 앞으로 영원히 그렇지는 않겠지만 붕괴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 저자는 통치의 대차대조표란 개념으로 정리한다. 이 대차대조표에서 “자산은 정부의 통치능력, 부채는 과제를 나타낸다. 부채(과제)가 자산(정부의 통치능력)을 넘어서면 부채 초과 곧 불황에 빠진다. 정권의 안정도가 떨어져 정구너교체 압력을 받는다. 일본의 경우 하원인 중의원에서는 여당, 상원인 참의원에서는 야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왜곡국회와 비슷하다. 왜곡국회에서는 통치력이 저하되며 이는 정치의 대차대조표가 불황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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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경우 빈부격차, 관료의 부해와 독직, 환경오염 등 부채가 막대하다. 부채만 볼 때 중국은 분명 파산이 눈앞에 와 있는 것같다. 중국 붕괴론이 나오는 근거다. 그러나 부채에 비해 경제성장의 혜택과 공산당의 인적 자산, 신속한 정책 실행이 가능한 통치기구 등 자산이 두터워 부채와 자산이 균형을 이룬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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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중국의 정치력이 비결이란 말이다. 이책은 그 중국의 정치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성실하게’ 정리하는 책이라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소개한 ‘통치의 대차대조표’와 같은 체계적인 이론에 따라 체계으로 쓰인 대작을 기대할 수는 없다. 앞에서 소개한 개념은 이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라 정리해본 것으로 이책의 한 챕터에 불과하다. 물론 그 챕터에서 나름 깔끔하게 공산당의 자산이 정리되고 있기 하지만 책 전체와는 상관이 없다. 이책의 내용은 그보다는 중국에 유학을 갔었고 4년동안 주재기자로 근무하면서 보고 들은 바를 나름 체계적으로 분야를 나눠 중국정치를 개관할 수 있게 한권으로 책으로 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책이 다루는 범위는 방대하다. 정치엘리트들의 파벌과 그 파벌의 역학(그 역학의 구체적인 예로 시진핑이 차세대 지도자로 선출된 과정을 크게 다룬다.), 정치개혁의 진행과정, 그리고 주변국들이 촉각을 세울 수 밖에 없는 중국의 외교정책과 그 결정 메커니즘, 국방 등의 중국정치의 현안을 성실하게 개관한다. 그리고 그 목적으로서는 이책은 나름 성공했다고 할 수 잇다. 그러나 위에서 소개한 통치의 대차대조표와 같은 깔끔하고 체계적이면서 독창적인 안목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중국전문가라면 다들 아는 수준의 상식적 프레임에서 각 분야를 정리한다고 보면 이책의 수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넓은 영역에 걸쳐 간략하게 정리되었다는 점은 이책의 미덕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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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5<o:p></o:p>
&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514/46/cover150/8935209090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209090</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바른 생활 사나이 - [기다림의 칼 - 100년의 잔혹시대를 끝낸 도쿠가와 이에야스]</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433811</link><pubDate>Sun, 19 Feb 2012 18: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43381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0924455&TPaperId=5433811"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722/89/coveroff/895092445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0924455&TPaperId=543381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기다림의 칼 - 100년의 잔혹시대를 끝낸 도쿠가와 이에야스</a><br/>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박선영 옮김 / 21세기북스(북이십일) / 2010년 06월<br/></td></tr></table><br/>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 저자가 내리는 판결은 간단하다: 재미없는 바른 생활 사나이.<!--?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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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장례식이 치러지는 과정을 보면 육친이나 측근 외에 과연 그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긴 사람이 있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그는 정말 대중적인 인기가 없는 인물이엇다. 히데요시처럼 죽은 뒤에도 다이묘는 물론 서민들에게도 인기가 지속되는 현상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이에야스라는 인간을 고찰할 때 정말 흥미로운 문제다. 사람들은 분명히 그를 신뢰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나 히데요시처럼 이치에 어긋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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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분명 신뢰받는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 신뢰는 컴퓨터에 대한 신뢰와 마찬가지였다. 요즘 말로 하자면 그는 로봇 같이 ‘완벽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같다. 예를 들어 히데요시의 헤픈 눈물을 보아 온 사람들은 인간같지 않은 이에야스의 눈물을 볼 수가 없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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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병상에 누웠을 때 아들 “다테마루의 어머니가 그 죄를 용서해달고 애원하자” 이에야스는 ‘눈물을 비췄을’ 뿐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아들을 만나겠다고 하지 않았다. “정말 눈물을 닦을 정도로 울었던 적은 있었을까? 아마도 노신인 도리이 모토타다와 헤어질 때뿐이었으리라. 이에야스는 정말 ‘냉혈인간’으로 느껴지는 면이 있다. 따라서 사사로이 ‘정에 빠지는’일이 없었다. 그의 냉철함이 무엇보다 확실히 드러나는 부분은 여성과의 관계다. 이에야스가 사랑했다고 할만한 여인은 없었다. 여자 때문에 정치를 그르치는 일은 없었지만 남성으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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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에야스가 아스퍼거 증후군이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사람의 정을 느끼고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자식에게 실망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도 사람이니 때때로 감정이 격해지기도 했”고 “분노를 폭발시키는 일도 있어서 사실은 다혈질이 아니었을까” 생각되지만 “강한 의지력으로 자신을 통제했다.권력을 쥔 이후에도 누부나가나 히데요시처럼 감정적이거나 잔혹한 행동은 하지 않앗다. 권력을 쥐면 3년만에 멍청이가 된다고 하고 또 많은 권력자들은 실제로 그런 모습을 보이지만 이에야스는 결코 냉정을 잃는 일이 없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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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더불어 즐길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엇에도 빠지는 법이 없었다. 폭음, 폭식은 물론 여자에게도 빠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금욕주의자도 아니니 한마디로 절제가라 할 수 있다. ‘술 때문에’란 변명은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식사도 마찬가지로 지나치지 않게 먹는 것을 최상으로 여겼고 과식은 의지가 약하기 때문으로 보앗다. 만사는 적당한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절연은 금연보다 어렵다고 하듯이 만사를 적당하게 절제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에야스는 평범하지만 어려운 이 ‘적당히’를 평생 지속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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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사람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신뢰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에야스가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세운 것은 그의 모토가 ‘주의와 경계’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에야스를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말로 표현하며 “이에야스는 어린 시절 인질 생활로 고난을 겪었고 그 경험이 훗날 그의 성격이나 삶에 큰 영향을 끼졌’기 때문이라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자는 묻는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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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이에야스의 일생은 당시 다이묘의 삶으로서는 순탄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선 인질이라는 것도 “당시의 인질은 현대의 인질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생명의 안전을 보장하고 우대해야 하는 ‘동맹관계’의 보증인인 경우도 있다. 그래서 당시에는 인질을 ‘증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따라서 그 시대의 일반적인 정황에서는 ‘인질이 되어 편안한 생활을 했다’고 표현할 수는 있어도 적어도 고생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에야스를 인질로 받은 요시모토는 인질보다는 피후견인으로 돌봐주었고 “이에야스는 유년 시절동안 미카와를 보존하고 동시에 자신을 보호해주고 양육해준 요시모토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고 인질로 있던 시절의 이에야스는 후대가 상상하는 만큼 불행하지 않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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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와 경계’의 진짜 이유는 하극상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야스의 조부와 아버지는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당시에 그런 일은 흔했다. 그런 세상에서 믿을 것은 실력뿐이었고 그것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력 즉 무력이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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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야스가 유년기를 보낸 이마가와 가문은 센코쿠 시대에는 별천지였다. “전통적인 형식과 질서가 남아 있었다. 그곳에는 백성들이 귀인으로 받드는 명문가의 슈고가 있었고 교토 조정의 귀족인 구게(公家)와 혼인관계를 맺어 활발하게 교토 문화를 수입해으며 많은 구게들도 직접 이 지역으로 이주한 결과 이마가와 가문 자체가 상당히 귀족화되었다. 노부나가가 무시한 오가사와라류의 ‘제례집’이 이곳에서는 모든 질서의 기본이었고 귀족들이 즐겨 읊던 고전 시가인 와카나 상류층의 공놀이인 게마리(蹴鞠)도 유행했다. 귀족적인 문화에 휩쓸려 기개를 잃은 모습도 보였지만 동시에 하극상과 같은 살벌한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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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기하게도 이에야스에게선 그 귀족문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이마가와 가문을 반면교사로 생각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미카와의 영주라는 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방의 소영주가 통치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능력은 무력이었다. 개인적인 무술과 무공이 없다면 백성들을 다스릴 수도 지배권을 확립할 수도 없었다. 센고쿠 시대에는 당연히 개인적인 무공보다 전투 지휘 능려과 뛰어난 용병술이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전장에서 부하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려면 지휘관 자신의 개인적인 무력도 필요했다.” 지방의 소영주에 불과했던 이에야스의 “출발점은 소부대의 최전선 지휘관이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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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뛰어난 무인이기도 했고 지휘관이기도 했던 이에야스는 “스스로 훈련을 통해 무공을 닦았으며 무술훈련은 일종의 취미와 같았다.” 그러나 이마가와 가문에서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한시나 와카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렌가나 다도에도 취미가 없었으며 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 마디로 이런 교양 계통에는 모두 서툴렀다.” 물론 이에야스가 학문을 즐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게 학문이란 당시 통용되던 한시에 능하고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학문은 정치학이고 군사학이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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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로서 가장 필요한 능력은 휘하 토호들의 영지를 보장해주는 것(소령 안도)이었고 센코쿠 시대에 그 능력은 무력이었다. “따라서 센고쿠 시대의 장수에게 무력은 절대적이었다. 물론 무력과 동시에 모략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생애를 살펴보면 모토나리처럼 하나의 모략에 이어 또 다른 모략을 세우거나 하지는 않았다. 늘 정정당당하게 대진해서 결전을 벌였다. 그는 그런 전투를 통해 승리를 얻지 못한다면 심복도 얻을 수 없다고 믿었고 그 신념은 틀리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아케치 미쓰히데가 잘못 생각한 점이다.그는 혼노 사에서 노부나가를 쓰러뜨렸지만 아무도 그 휘하로 달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를 쓰러뜨리면 주도권을 쥘 수 있으므로 오히려 모두가 노리는 먹잇감이 되었다.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것은 대규모 암살사건이었지 정정당당한 전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승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에야스는 잘 알고 있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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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상하게 이에야스는 너구리 영감이라 통용된다. 이런 이미지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나 오사카 성 함락 후에 생긴 듯하다. 그전까지 이에야스는 ‘의리의 사나이’로 통했으며 센코구 무장치고는 분명히 의리파였다. 마음만 먹으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는 히데요시나 히데요리 모두 암살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는 명분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부나가가 쇼군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정치적으로만 대결한 것과 같은 이유엿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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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천하포무는 히데요시에게도 이에야스에게도 적용된다. 말하자면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무력의 위압으로 정권 질서를 수립하는 일은 당시로서는 상식 이전에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단지 무력으로 제압하려면 암살과 같은 잔꾀는 소용이 없었고 어디까지나 정정당당히 전투에서 승리하는 과시적 이벤트 효과가 필요했다. 이에야스가 ‘천하라는 것은 스스로가 지닌 운명이 있어 인력이 미치는 곳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단순한 운명론자라는 뜻은 아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전자으이 승패 또한 운명에 따른 ㄴ것, 따라서 천하를 손에 넣으냐 마느냐 또한 운명이라는 의미엿으리라.”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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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에야스였기에 “상대방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면 깨끗하게 복종햇고 일단 따르기로 햇다면 그에 맞게 상대방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그는 이마가와에 복종했으며 오다와의 동맹에서도 그의 지위는 좀더 특별대우를 받는 오다 가문의 무장에 지나지 않았다. 고마키-나가쿠테의 경우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종합적인 전력에서는 자신이 히데요시에게 뒤처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엇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대등하게 강화를 맺었지만 이에야스의 위치는 또다시 도요토미 정권 속에서 조금 특볋란 대우를 받는 일개 부장, 히데요시의 명에 복종하는 일개 제후였다. 그런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그로선 자기보다 약하면서도 자신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 자는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일종의 증오심마저 느꼈던 듯하다. 요도기미와 히데요리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에야스는 상대가 자신보다 강력하다고 판단하는 한 동요하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문제삼는 것은 오로지 무력뿐이엇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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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그런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생애 대부분을 그다지 권모술수가 필요하지 않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며 그의 적성이기도 했다고 저자는 본다. “그의 전투는 늘 평범하고 재미없는 정공법이었다. 그 때문인지 사람들의 인상에 남는 것은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 그리고 또 하나가 미카타가하라의 패전 정도다. 게다가 이런 전투에서 세운 무공의 대부분은 오다 노부나가의 그늘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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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영주로서 이에야스는 특별하게 순탄했다. 그것은 그의 운이기도 했지만 ‘주의와 경계’란 그의 태도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라 하면 흔히 무법천지를 떠올린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 사건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신겐은 아버지 노부토라를 추방했고 아들 요시노부를 죽였다.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지만 당시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다. 노부나가도 모토나리도 자신의 동생을 죽였고 히데요시도 조카를 죽였다. 이에야스도 자신의 자식인 노부야스와 아내, 손녀 사위인 히데요리까지 죽였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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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권력층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사건이었고 일반인들까지 같은 상황이었던 것은 아니다. 백성들이 이런 짓을 했을 때는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당연한 일이다. 민중들까지 무법천지에 빠진다면 가장 곤란한 것은 센고쿠다이묘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영내의 투쟁과 혼란은 호시탐탐 국경을 넘보는 이웃 지역에게 틈만 보일 뿐이다. 지배자들은 무력으로 대내외적으로 투쟁하면서도 영내에서는 가능한한 평온한 법치체제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이에야스가 인질 생활을 한 이마가와 가문이 좋은 예이다. “이마가와 가문도 당대에는 혁신적인 통치자였다.” 이에야스가 천하를 통일한 후 보여준 법치주의의 신념은 이마가와 가문에서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이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 있던 시절의 이에야스에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인지도 모른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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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주의는 단지 이마가와 가문만의 것은 아니었다. 법치주의는 영지경영의 한 방법일 뿐이었다. 영지가 안정되어야 경제력이 생기고 “무력을 유지하는 것은 경제력이다. 따라서 생산력 증강은 당시 센고쿠 무장들의 지상과제였으며 유능한 다이묘들은 모두 영내 개발에 힘을 쏟았다. 이런 점에서 센고쿠 시대는 경제성장과 기술개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제는 영내의 치안 유지엿고 이것이 방위의 기본이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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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이에야스 세명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면 이에야스는 미적 감각이 가장 떨어지고 번득이는 재능도 재치도 느낄 수 없는 인물일 것이다. 노부나가도 히데요시도 이에야스를 건실하고 의리 바르며 충실한 2인자로 취급했다. 만일 이에야스가 히데요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면 역사가들은 히데요시가 만년에 가장 실력있는 신하를 잃어 큰타격을 입었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당시 사람들에게 다양한 측면에서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그렇다면 이런 재능을 싹틔우고 자라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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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에야스는 ‘가이도 제일의 활잡이’로 전투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뛰어난 지휘자였다. 이에야스가 자신의 무용을 자랑하지는 않았지만 남들이 스스로 이에야스의 무공과 지휘 능력에 고개를 숙였다. 다음은 통치력과 부하들을 이끄는 통솔력이다. 이는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간토 영지 이동과 또 새로운 봉지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된 지배권 확립과정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세번째가 그의 재정능력이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이에야스 세사람 중에서 이에야스는 화려한 것을 싫어했으며 가장 검소했다. 구두쇠나 다름없었지만 세사람 중에서 재정능력이 가장 뛰어난 자는 이에야스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능력을 키운 바탕이 바로 그의 ‘학문’이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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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에야스의 능력에는 정략도 포함된다. 무장으로서 이에야스는 정공법을 선호했다. 그것은 모략으로 이기는 것은 이긴 것이 아니라는 그의 판단이기도 했고 그의 위치가 그리 모략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당대 센고쿠다이묘들처럼 모략을 쓸 줄 몰랐던 것이 아니다. 단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뿐이다. 그러나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다. 그가 전쟁을 수단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정치가가 되었을 때 그에겐 다른 능력이 있어야 했다. 무장의 전쟁과 정치가의 전쟁은 다르며 이에야스가 무장으로서 싸웠던 전투와 그가 정치가로서 싸웠던 전투는 다르다. 이에야스 정권의 미래가 걸려있었던 세키가하라가 “‘작전의 전투’가 아니라 ‘정략의 전투’”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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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승부가 결정되는 전투와 정치는 다르다. 정치는 정책이란 결과를 낳는 일이지만 정책이란 결과를 얻기 위해선 권력을 얻고 유지해야 한다.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일은 소모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런 소모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정책을 실현할 수 없다. 그 소모적인 일을 정략이라 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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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카가 말하듯 권력을 지향하지 않으면 권력을 얻거나 행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권력욕이 없는 자는 통치력이 없다는. 권력욕이 없는 자를 통치자로 삼고 싶다. 민중의 꿈은 말 그대로 꿈이다.” 그리고 (다른 리뷰에서 다루었듯이) 그것이 유교의 성왕론이 허구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모스카는 능력있는 정치가란 정책적 능력과 정략적 능력을 함께 갖춘 사람이라 했다. 또한 유감스럽게도 그런 인간은 극히 드물며 만일 그런 정치가를 가진 국민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라 햇다. 그의 기준으로 보면 이에야스는 정책능력과 정략능력을 함께 갖춘 희귀한 정치가였다. 이에야스가 정략가로서 유능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점만 지나치게 부각해서 그를 너구리 영감으로 평가한다면 정책가로서 그가 보여준 탁월한 재능을 간과할 수 있다. 그저 모략만 뛰어난 너구리 영감이 267년이나 이어지는 도쿠가와 막부의 평화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겠는가. 이에야스는 아시카가 말기부터 오다와 도요토미 시대를 거치면서 천하의 백성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잘 알고 있었다. 또 그 바람으로 정책적으로 실현하는 수단과 능력을 지녔다. 사람들의 바람은 한 마디로 전쟁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평화로운 법치체제 아래서 생존할 권리를 보장해달라였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실현한 사회는 결국 모든 사람들이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고 법치제도 아래에서 사적인 권력 생사를 제한하며 보수적인 질서가 형성된 사회였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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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천하의 바람을 실현하는 것은 그 자신과 가문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야스토키나 이에야스나 모두 근본을 따지자면 모두 현지에서 세력을 키운 관리이거나 혹은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 하극상을 통해 천하를 손에 넣은 자들이다. 이 하극상의 권력자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은 ‘후계자’가 나타나 자신이 그랫듯이 하극상을 일으켜 자신을 쓰러트리는 일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기 대에서 하극상ㅇ르 끝내고 이후로는 자신의 통치 아래 질서있고 영속적인 법치사회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노부나가의 노선을 따를 수 없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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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는 天下爲公이란 비전을 위해 살았던 이상주의자였다.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도 아니엇고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그린 이상에 따라 세상을 디자인하기 위해 살았다. 그가 그렸던 천하에는 온세상을 불태우는 다이묘들의 자리는 없었다. 그렇기에 얼마든지 쇼군이 될 수 있었으면서 쇼군이 되지 않았다. “’’시바 료타료는 노부나가가 봉건제를 배제하고 중앙집권제를 수립했을 것이라 예측했다. 사실 그런 시각에서 노부나가의 행동을 살피면 히데요시와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노부나가는 ‘다이묘 절멸 작전’을 시행해 센코구다이묘들의 가문을 잇달아 멸망시켰다. 확실이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는 일단 부하에게 하사하지만 대대로 소유권을 보장하지 않으며 상속권도 인정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명령을 내려 빼앗고 다른 영지를 준다. 그 지위를 유지한다면 다이묘지만 파면된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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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는 내심 이런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왜냐하면 다이묘들이 항거한다면 스스로가 곤란한 입장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반대정책을 폈다. ‘본령 안도’를 미끼로 상대방의 전의를 꺽고 항복시켰으며 그 대가로 자신의 부하로 이용했다. 히데요시의 방식은 학실히 능률적이며 센고쿠의 통합이라는 점에서보면 가장 희생도 적고 손쉽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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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야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에야스는 당시 다이묘, 특히 ‘히데요시의 은혜를 입은 장수들’로 불리는 신흥 중소제후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한마디로 히데요시 님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출세를 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었다. 동시에 오랜 전란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제는 오로지 손에 넣은 것을 보존하고 유지하면서 누군가가 일가의 안전을 보장해주기만을 바랐다.” 히데요시 사후 2인자인 이에야스에게 자연스럽게 힘이 모아진 이유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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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시스템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고 언제 자신의 위치가 뒤집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사람을 끄는 강한 매력이 있었던 히데요시와 달리 이에야스는 인기가 없었다. “이에야스의 명성은 천하를 제압했지만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그가 두려워 굴복했을 ㅃ누 좋아서 따른 것은 아니었다. 이에야스는 특히 인간미나 유머 감각, 장난기, 그리고 상대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 부족햇다. 히데요시라면 현대 서비스 업계에서도 최고경영자로 당당히 성공했을 인물이지만 이에야스라면 불가능햇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평생 놀이도 모르고 장난기도 없었다. 반면 히데요시는 늘 유머러스하고 흥겨웠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항상 빈틈없고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인기가 없는게 당연하지만 그 자신도 인기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는 얄미울 정도로 자율적인 인간이었다. 이에야스는 사람들이 신뢰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경우너시하게 되는 타입이었다. 도요토미 가문은 대체적으로 관대했지만 이에야스가 천하를 손에 넣으면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시대가 올거라고 사람들도 예감했다. 물론 센고쿠의 혼란이야 지긋지긋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 맛보았던 자유는 읽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센고쿠다이묘들이 원한 것은 ‘신중하고 온화하고 관용적인’ 지도자, 즉 전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면서도 자신들을 일일이 간섭도 않고 소령 몰수도 않는 지도자 고도의 자치권과 자주성을 인정해주고 자신들이 영지 내에서 왕처럼 ㅅ행세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는 지도자엿다ㅣ. 배부른 소리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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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시대의 자유는 피가 없이는 불가능한 자유였다. “누구나 원한다면 싸워서 이긴다면 그리고 적을 죽여 없앤다면 최고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시대엿으며 어느 사회나 존재하는 계급의 차이가 완전히 무시된 시대였다. 그점 만을 평가한다면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시대였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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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한 농민에서 지존까지 올라선 히데요시는 이 혁명의 시대의 총아였다. 히데요시 정권은 센고쿠 시대란 하극상 사회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그 혁명은 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인 자유를 지워버려야만 가능하다. 히데요시의 기적은 사람들에게 자유와 혁명이 공존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환상을 줄 수 없는 이에야스는 항상 비교당해야만 했다. 특별하게 이에야스를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많은 다이묘들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반대쪽에 섰고 서고 나서도 미지근하게 싸운 것은 그런 이유였다. 그러니 이에야스가 자신의 체제가 오래 갈 것이라 생각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붉은 여왕의 체스판서 달리는 것처럼 제자리에 머물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뛸 뿐이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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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722/89/cover150/8950924455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0924455</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신도 진리도 없는 유쾌한 세상 -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 일리노이 주립대 학장의 아마존 탐험 30년, 양장본]</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433791</link><pubDate>Sun, 19 Feb 2012 18: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43379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6217522&TPaperId=5433791"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614/93/coveroff/899621752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6217522&TPaperId=543379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 일리노이 주립대 학장의 아마존 탐험 30년, 양장본</a><br/>다니엘 에버렛 지음, 윤영삼 옮김 / 꾸리에 / 2010년 01월<br/></td></tr></table><br/>“내가 피다한 마을에 들어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제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내 삶의 여정에서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하나니므이 복음은 피다한 문화와 전혀 맞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선교사로 아마존의 피다한 사람들을 만났던 저자가 30여년을 그들과 보낸 후에 내린 결론이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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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물여섯 살에 피다한 마을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은 경로혜택을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젊음을 바친 셈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게 된 이유는 이렇다. “’사람들을 구원하려면 그들의 삶에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인식을 심어줘라.’ 자신의 삶에 무엇인가 심각하게 모자란다는 인식을 하지 않는 한, 신이나 구원과 같은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일 확률은 낮다.” 예를 들어 저자는 선교사들이 하는 방법대로 자신이 왜 예수를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피다한 사람들에게 간증을 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마치고 나자 피다한 사람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황당한 반응이었다. 아니 신경질 나는 반응이었다. 이전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는 하나같이 깊은 감명을 받고는 ‘오! 주여! 하나님 감사합니다!’ 같은 말을 연발했기 때문이다. <o:p></o:p>
‘왜 웃어?’<o:p></o:p>
‘네 엄마가 자살햇다고? 우하하! 참 바보같다. 피다한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아.’<o:p></o:p>
그들은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을 했다는 사실이 피다한 사람들에게는 신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전혀 되지 못했다. 아니 이것은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만 낳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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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다한 사람들에게는 우울, 스트레스, 만성피로, 심한 불안, 공황발작 등 오늘날 산업화된 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심리적 질환의 기미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우리와 같은 사회적, 경제적 압박이 없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피다한 사람들은 카드결제일에 쫓기거나 자식의 대학입학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말라리아, 바이러스, 세균감염, 리슈마니아 병과 같은 자칫 생명을 잃을 수 있은 질병의 위험이 늘 도사린다. 나에게는 일생에 있어 특별한 경우에만 겪는 그러한 고난을 피다한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겪는다. 아니 그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난은 내가 아주 특별할 때 겪는 경우보다 훨ㅆ니 나빳다. 이들은 어른 아이 할 것없이 가족이 죽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다. 피다한 사람들이 기대하는 수명은 서양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들은 이러한 차이를 알지 못한다. 피다한 사람들의 인식에 비춰보면 특히 미국인들의 삶의 의지는 욕심에 가깝다. 또한 이들은 가족을 위해 매일 먹을거리를 구해와야 한다. 이들의 장례식에는 이웃은 물론 가족도 모이지 않는다. 엄마가 죽어도 아이가 죽어도 남편이 죽어도 사냥을 하고 낚시를 하고 먹을 거리를 찾아다녀야 한다. 누구도 이 일을 대신해 줄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해서 삶은 관대함을 베풀지 않는다. 그리고 이따금씩 이방인들이 침입하여 이들을 폭력적으로 위협하기도 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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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산업화된 사회에서 살기 땝문에 심리적 압박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일 뿐이다. 피다한 마을에서 나는 그들보다 훨씬 더 편하게 생활하면서도 여전히 늘 짜증응ㄹ 내고 신경질을 부렸다. 똑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나는 짜증을 냈지만 그들은 언제나 즐겁고 유쾌했다. 이들이 불안이나 걱정을 느낀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 피다한 말에는 ‘걱정’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MIT 뇌인지과학부 연구원들이 피다한 마을을 방문하여 그들을 검사하고 나서 자신들이 지금까지 조사한 사람들 중에서 피다한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로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러한 판단의 바탕이 된 지표는 여러 가지이다. 그 중 하나는 피다한 사람들의 평균적인 웃는 시간을 측정하여 이 수치를 이전에 측정한 다른 집단의 수치와 비교하는 것이다. 연구원들은 앞으로도 피다한 사람들을 이길만한 집단은 나타나지 않을 것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30여년동안 나는 20여개 아마존 원주민을을 찾아다니며 연구해왔는데 피다한 사람들만큼 유쾌하고 명랑한 사람들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애석하게도 다른 원주민들은 대부분 부루퉁하고 수줍어했다. 피다한 사람들과 달리 전통적인 문화의 자율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와 외부세계의 발달한 문명을 누리고 싶어하는 욕구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피다한 사람들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만족을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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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행복하고 만족을 아는 이유는 그들이 전형적인 수렵채취인들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피다한 사람들은 (스티브 테일러가 말하는) 자아폭발을 겪지 않은 조상이나 수렵채집인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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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채집인들은 어느 정도의 노동분화를 이루고 정주생활을 했지만 물질적인 재화를 축정하거나 지위와 권력을 얻으려 집착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 내면에 이러한 것들을 얻는 대가로 치러야 할 필요가 있는 근본적인 불행은 없었다는 점을 시사한다(그 대가인 정신적 불화에 대해선 ‘자아폭발’ 리뷰 참조) 바꿔 말하면 그들은 우리만큼 ‘정신적 불화’로 고통 받지 않았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그 이후에 등장하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문화의 큰 특징인 죄와 억갑, 그리고 고통의 분위기가 전혀 없는 것같다. 그들에게는 그 대신 명랑하고 즐거운 분위기와 인생에 대한 신성함 그리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분위기가 있어서 그들이 정신적 불화로 고통받았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이러한 태도는 수렵채집인들과 단순원예인들의 종교생활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들과 그 뒤에 나타나는 사람들 간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그들에게는 종교와 생활이 분리되는 일이 없었으며 신이 실생활과 분리된 동떨진 존재라는 생각은 분명히 없었다. 그들에게는 신이나 영은 어디에나 무엇에나 존재했다. 이는 분명히 이 사감들이 자연을 그토록 깊이 숭배하도록 만든 부분적인 이유였다. 높은 곳에서 세상을 굽어보며 만사를 관할한다는 신들에 대한 관념이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를 가졌을지는 의심스럽다.” (스티브 테일러) 이런 태도는 피다한 사람들의 종교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들은 영을 실제로 본다고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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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저기 히가가이 신령이야!’<o:p></o:p>
‘그래 보여 우릴 위협하고 있어.’<o:p></o:p>
‘모두 와서 봐봐 빨리! 히가가이가 강변에 나타났어!’<o:p></o:p>
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실제로 들리는 소리인지 꿈에서 들은 소리인지 분명치 않았다. 건기가 한창인 8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 6시 30분. 해가 눈부시게 빛났지만 아직 뜨겁지는 않았다. 피다한 사람들의 고함소리, 웅성대는 소리에 잠을 깬 나는 곧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앉았다. 밖을 내다보니 우리 집에서 6미터 정도 떨어진 강둑에 사람들이 모여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우리 집을 등지고 강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o:p></o:p>
‘무슨 일이야?’<o:p></o:p>
‘저기 안 보여? 구름 위에 사는 히가가이가 저쪽 강가에 서서 우릴 보고 소리치고 있잖아. 정글에 들어가면 우릴 죽이겠다고.’<o:p></o:p>
‘어디? 난 안 보이는데?’<o:p></o:p>
‘저기 있잖아!’<o:p></o:p>
꼬호이는 짧게 내뱉고는 건너편 강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o:p></o:p>
‘저 강 뒤에 있는 정글 말이야?’<o:p></o:p>
‘아니, 강변 모래밭에 잇잖아! 안보여?’<o:p></o:p>
그는 화를 내듯이 버럭 소릴 질렀다. 정글에 들어가면 피다한 사람들 눈에는 보이는 것들이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야생생활이 익숙하지 않은 나는 그들이 보는 것만큼 많은 것을 보지는 못햇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100미터도 되지 않는 강 건너편에 하얗게 펼쳐진 모래밭 위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 것도 없다고 확신하는 만큼 피다한 사람들은 거기 무엇인가 있다고 확신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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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다한 사람들이 집단착란을 일으켰을리는 없다. 그들은 분명 무엇을 보았지만 저자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뇌의 활용도에 있지 않을가 싶다. ‘긍정의 뇌’의 저자가 보여주는 우뇌만의 인식은 우리의 일상적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자아폭발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우뇌의 활용도가 더 높고 긍정의 뇌에서 묘사되는 인식을 하는 것을 보인다. “나무들과 바위들 그리고 산들이 살아 잇게 만드는 것은 영적인 힘이 그것들 내부를 통하여 흐르기 때문이다. 모든 원주민들은 이 영적인 힘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아메리카 호피족은 마사우로 라코타족은 와칸탄카로 포니족은 티라와, 아마존의 우파니아족은 푸파카로 각각 부럴ㅆ다. 폴리네시아에서는 그것을 마나라고 불렀으며 뉴기니 일부 지역엣6j는 이무누라고 불렸다. 이 힘은 세상을 굽어보고 인간이 도움을 구하며 숭배하는 인간적인 존재의 신성함이 아니다. 그것은 인격도 없고 성별도 없다. 그것은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어떤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내재하는 힘이며 지성이다.” 그힘은 실재로 볼 수 있는 것이었고 피다한 사람들이 토요일 아침에 본 것은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신성은 믿음이 아니라 현실이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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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다니엘, 예수는 어떻게 생겼어? 우리처럼 피부색이 까매? 아니면 너처럼 하얘?’<o:p></o:p>
‘음 난 실제로 그를 보지 못햇어. 그는 아주 오래 전에 살았어. 하지만 그가 한 말은 알아.’<o:p></o:p>
‘그럼 다니엘, 네가 그 사람을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데 그가 한 말은 어떻게 알아?’<o:p></o:p>
네가 예수를 실제로 보지 못했다면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를 해도 피다한 사람드르이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게 끝이다. 피다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접 본 것만 믿는다는 사실을 그때는 아직 잘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믿기도 했지만 그것도 말하는 사람이 직접 본 경우에만 그러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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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것이 피다한 문화의 대원칙이라 보며 ‘경험의 직접성’ 원칙이라 부른다.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면 어떠한 것도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직접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남아잇지 않은, 아주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에 기초하여 선교해야 하는 기독교의 교리가 이들에게 쉽게 스며들지 않는 까닭이다. 이것이 바로 그토록 오랜 세월 선교사들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저항할 수 있었던 힘이다. 증거를 요구하는 이들의 문화에서는 그 흔한 창조신화조차 설 자리가 없지 않았던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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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직접성 원칙은 자아폭발을 겪지 않은 사람들의 문화에 특징적인 시간의식의 한 형태라 보여진다. 예를 들어 “애버리진의 수백가지 언어들 가운데 시간에 해당하는 단어는 없으며 애버리진에게는 시간이라는 개념도 없다. 그리고 애번스프리처드는 누에르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누에르인들의 시간에 대한 관점은 매우 짧은 기간으로 한정된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은 대부분의 원시사회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유럽적인 의미에서의 시간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그들에게는 낭비되거나 절약되거나 추상적인 것으로써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다.’ 우리가 미래와 과거에 집착하여 현재로부터 멀어지는 반면, 그들에게는 현재가 유일한 사실이다. 홀이 설명한 대로 ‘나바호족에게는 미래는 비사실적인 동시에 불확실하였으며 그들은 ‘미래의’ 보상에는 관심이 없었고 동기부여를 받지도 않았다. 아프리카의 하즈다족과 음부티족은 절대로 과거에 대하여 말하지 않으며 ‘역사’라는 개념조차 없다.” (스티브 테일러)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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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테일러와 “켄 윌버는 선형 시간 개념의 발달을 ‘타락한’ 자아의식의 등장과 연계시켰다. 그는 그것을 자아의식이 가져온 죽음에 대한 더 크나큰 인식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당신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은 잠재적인 부재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기로 죽음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되는 것은 죽음의 공포도 더 켜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윌버에 따르면 최초의 타락한 정신은 그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며 정신이 육체를 벗어던진 다음에는 영원한 선형의 시간이 정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스스로 설득함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처리하엿다. 그러므로 선형 시간 인식의 발달은 타락한 내세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고 믿었으며 이를 위해 시간을 선형으로 상상해야만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죽음에 대한 인지가 더욱 심화되면서 자아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 자신을 선형으로 꾸준히 진행되는 시간의 세상에 풀어놓음으로써 자아의 본질적으로 채워지지 않고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은 영원히 앞으로 나아갈 여지가 생겼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중요한 내용은 과거와 미래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현재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에 있는 동안에만 미래와 과거에 대한 생각을 갖는다. 오ㅜ리는 현재 이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기억하며 현재 이후에는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를 기대한다. 선형 시간은 관면에 의하여 생각함에 의해 창조된다.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은 선형 시간 감각이 없다. 단순히 그들의 마음이 우리 마음처럼 관념저그올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들이 마음이 과거를 기억해내고 미래를 기획하느라 끊임없이 재잘거리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와 과거는 그들에게는 별로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선형 시간 인식은 고도의 추상화 또는 쉬지 않느 생각의 수다가 우리 정신의 한 특징이 되었을 때 발달하였다.” (스티브 테일러)<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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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다한 사람들에게도 선형 시간 의식이 없다. 그들에겐 오로지 현재만이 있다. “밭을 일구고 마니옥을 심는 것은 사실 피다한 사람들의 전통이 아니다. 내가 오기 몇 년전 스티브 쉘던이 힘겹게 이들에게 가르쳐주고 간 것이다. 밭을 갈기 위해서는 괭이 같은 도구를 외부에서 들여와야만 한다. 그런 도구를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렇게 중요한 도구들을 피다한 사람들은 전혀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새로 거래하여 얻은 도구를 아무데나 버려두기도 하고 때로는 강물에 던져버리기도 한다. 심지어는 브라질 상인들이 가지고 온 먹을거리와 밭가는 도구를 바꿔버리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피다한 사람들의 문화적 패턴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음식을 보존하지 않는다. 도구를 소홀히 여긴다. 한번 쓰고 버릴 바구니만 만든다. 이것은 바로 이들의 문화에 ‘미래에 대한 관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 게으름과는 다르다. 피다한 사람들은 아주 부지런히 일하기 때문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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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란, 구체적인 것에서 구체성이 없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을 만드는 추상화는 무한을 전제한다. 지금 여기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다는 전제가 없으면 개념이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란 특수함을 넘어 언제 어디서나란 보편성의 극한인 무한은 선형적 시간을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시간축이 과거와 미래로 제한없이 뻗어나가고 공간축 역시 그러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전에는 무한이란 성립하지 않는다. 무한에 의해 가능한 사고방식의 대표적인 예는 수학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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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다한 말에는 수를 세는 말이 전혀 없다. 처음에는 나는 피다한 말에 하나, 둘 많다 정도는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세가지 숫자만 있는 문명은 지구상에 많다. 그러나 피다한 말은 실제로 숫자가 없다. 모두, 각각, 온통과 같은 수량형용사도 없다” 그것은 단순히 그런 단어가 없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겐 숫자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손가락은 물론 어떠한 신체부위도 물건의 수를 세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숫자란 개념이 없으니 이들도 불편을 겪었다. “이들은 브라질 상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돈을 이해할 줄 몰라 불리한 거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일을 방지하고 또 항의하기 위해서 숫자와 셈을 배우고 싶어했다. 뽀르뚜갈 말로 10까지 세는 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자신들이 먼저 원해서 열정적으로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스스로 숫자를 배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수업은 끝이 났다. 8개월동안 어느 한 사람도 10까지 세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3+1은 물론 1+1을 배운 사람도 전무하다. 1+1의 답을 2라고 어쩌다 한번 대답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관되게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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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그 이유를 경험의 직접성 원칙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들에겐 색깔을 나타내는 어휘도 없기 때문이다. “숫자란 구체적인 대상에서 직접적으로 느씰 수 잇는 속성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이며 산술적인 속성을 공유하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색깔도 마찬가지이다. 색깔 또한 가시광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위적으로 경계를 나누고 이를 보편화하는 작업을 통해 성립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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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없고 색깔을 없는 이유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피다한 사람들은 오래된 과거나 아주 먼 미래, 또는 허구적 내용과 같이 경험하지 못한 사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숫자를 세고 계산을 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서 보편적으로 개념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경험을 넘어서는 추상화 작업은 경험의 직접성 원칙을 위반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또한 경험의 직접성이라는 원칙으로 설명할 수 잇는 또 다른 사실을 찾아냈다. 피다한 사람들은 음식을 저장하지 않으며 오늘 하루 이상의 시간에 대해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또한 먼 미래나 먼 과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지금’, 그러니까 직접적인 경험에 초점을 만춘 결과로 여겨졌다. 피다한 사람들에게 역사, 창조신화, 민담 같은 것들이 없는 것도 경험의 직접성 원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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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의 추상화, 시간의 발명은 우리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다. 과거에서 배우고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을 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간다는 생각이 우리를 압박한다는 것, 그리고 현재가 쏜살같이 흘러가며 쇠퇴와 죽음은 필연적이라는 우울한 인식. 살아있다는 것은 순간이라는 인식은 타락 이후 시대를 특징짓는 염세적이고 비관주의적 분위기의 한 측면이다. 붓다는 이것이 인간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찰 수 밖에 없는 이유라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우리가 삶의 현재 시제의 사실로부터 소외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너무 많은 시간을 미래와 과거에 대한 6생각에 몰두하며 보낸다는 사실은 우리가 충분히 현재를 살지 않는다는 rejt을 의미한다. 우리가 특정한 순간에 우리가 처한 상황이나 그 상황에서 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기보다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 하던 일들 또는 처했던 상황 또는 미래에 하려고 계획하는 일들에 대하여 생각한다. 이것은 약간 기이하다. 현재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사실이다. 우리는 오직 현재에만 살 수 있다. 우리가 현재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것은 상당부분 우리가 실제로는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티브 테일러)<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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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피다한 사람들에 대한 첫인상은 그들이 행복해 보였다는 것이다. “얼굴마다 웃음이 가득했다. 낯선 이방인을 마주할 때 보통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과는 달리 어느 한사람도 지르퉁하거나 움츠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머리 위로 날아가는 새들, 사냥길, 마을의 오두막, 강아지 등 내가 흥미를 가질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면서 신이 나게 설명했다.” 경험의 직접성이란 원칙은 그들이 현재로부터 소외될 수 없게 만들었고 실제로 살아 있다고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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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직접성이란 원칙은 그들 언어에도 영향을 주었다. “피다한 말의 문법은 인간 언어의 본질, 기원, 활용에 관한 현대 언어학의 여러 견해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특정한 문법원칙을 알고 있다는 촘스키의 가설과 문법 구성요소들이 어떻게 함께 작동하고 조율되는지를 설명하는 그의 이론으로는 결코 피다한 말의 문법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촘스키의 이론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유전자 수준에서 결정된 언어본능이 사람에게는 있고 그 본능은 문법수준에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경험의 직접성이란 문화적 원칙이 문법까지 결정하는 피다한 말의 사례는 언어본능이란 가설을 무너트린다고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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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드는 가장 대표적인 예는 순환(recursion)이다. “언어학자들은 단문보다는 하나의 구나 절 속에 다른 구나 절이 들어가는 복문에서 문법적 특성이 자세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복문은 어떤 언어에서나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피다한 말에는 복문이 없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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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빠이타, 못 몇 개만 가져와. 다니엘이 못을 샀어, 그건 같아” 이말의 의미는 “다니엘이 사온 못을 가져와’이다. 못을 수식하는 ‘다니엘이 사온’이란 수식구를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기능적으로 같은 의미를 갖도록 3개의 문장을 늘어놓은 것이다. 피다한 말에 복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유는 경험의 직접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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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큰 남자가 집에 잇다’ 이 문장은 두개의 작은 문장으로 이루어졋다. 주문장은 ‘남자가 집에 있다’이고 종속문장, 안긴문장은 ‘키(가) 크(다)’이다. ‘키(가) 크(다)’는 듣는 사람이 동의할 것이라고 간주하는 정보 즉 구정보가 담겨있다. 반면에 주절 ‘남자가 집에 있다’는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장 즉 신정보가 담겨있다. 언어학자들은 이러한 신정보를 표명(assertion)이라 한다. 이런 이유로 안긴 문장이 표명의 의미로 상요되는 경우는 거의 찾기 힘들다. 표명은 경험의 직접성 원칙과 깊은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표형은 듣는 사람이 직접 확인할 수있지만 표명이 아닌 정보는 직접 확인할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데 집에 남자가 있는지 없는지는 눈으로 확인할 수있지만 그가 키가 크다는 것은 확인할 수 없다. 말하는 사람은 키가 크다고 생각하지만 듣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예문을 보면 차이가 더 명확해질 것이다. ‘어제 본 남자가 여기 있다.’ 여기서 신정보 ‘남자가 여기 있다’는 청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안긴문장에 들어있는 구정보 ‘(내가) 어제 (봤다)’라는 사실은 직접 확인할 수 없다. 결국 안긴문장은 표명이 아니기 때문에 경험의 직접성 원칙을 위반한다. 따라서 피다한 말에는 안긴문장이 없다. 안긴절이 잇다면 표명이 아닌 말을 한다는 뜻이고 이는 경험의 직접성 원칙을 어기는 결과를 낳는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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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는 인간이 유한한 두뇌를 가지고 어떻게 문장을 무한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알고 싶어한 최초의 언어학자엿다. 흔히 언어학에서 말하는 ‘유한한 도구의 무한한 활용’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촘스키는 인간언어의 이러한 창조성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 바로 순환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피다한 말에 순환이 존재하지 않는다. 피다한 말에 순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나의 주장이 옮다면 촘스키 학파들은 낭떠러지로 몰리고 만다. 순환이 언어의 핵심요소라 주장하는 이론을 가지고 순환이 없는 언어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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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이 없다는 것만으로 피다한 말이 촘스키 이론에 치명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피다한 말에는 문법이라 할 것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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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다한 문법에는 문장구조에 대한 규칙(통사론)이 없다. 단순히 낱말들을 늘어놓고 이것을 문장으로 이해한다면 구나 절이 존재할 수 없다. 구나 절이 없다면 순환도 생길 수 없다. 실제로 피다한 문법에는 공사구, 명사구, 안긴문장 같은 것이 없다. 구나 절이 없기 때문에 문법읕 매우 단순하다. 그저 여러 낱말들을 실에 꿰기만 하면 문장이 되는 것이다 동사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단어들을 나열하고 최소한의 한정을 덧붙이면 된다. 문장 하나당 대개 형용사나 부가와 비슷한 성분들도 하나 이상 쓸 숭 없다는 것이 규칙이라면 규칙일 것이다. 피다한 말의 모든 규칙은 통사론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규칙이 지켜지는 이유는 모두 경험의 직접성 원칙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화적 가치가 문법을 직접 제약한다는 뜻이다. 아니 ㅂ문화적 가치가 곧 문법이라는 뜻이다. ‘어이 빠이타, 못 몇 개만 가져와. 다니엘이 못을 샀어, 그건 같아’ 여기에는 ‘다니엘이 못을 샀어’와 ‘그건 같아’라는 두개의 표명이 있다. 그러나 영어에서처럼 ‘다니엘이 산 못’이라 표현한다면 표명이 없는 말이 된다. 따라서 이것은 경험의 직접성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기에 쓸 수 없는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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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가 열정을 쏟았던 연구방향은 대부분 철저하게 촘스키 노선을 따른 것이엇다. 문법은 인간게놈의 일부이고 세계언어의 문법적 다양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모든 문법을 포괄하는 보편문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화가 문법에 주요한 영향을 미칠수 잇다는 나의 주장이 옳다면 이전에 내가 추구했언 가설은 틀린 것이다. 우리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특별한 유전적 능력 때문이 아니다. 문법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생물학적 기초는 요리를 맛보는 능력, 수학적 추론을 하는 능력, 기술을 개발하는 능력의 기초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언어능력이란 인간의 단순한 추론능력과 전혀 다르지 않아다. 무엇인지(대상), 그 대상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는지(사건), 그 대상이 어떠한지(상태) 이야기할 수 없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남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언어에는 반드시 동사와 명사가 있어야 한다. 이 두가지가 잇다면 이제 문법의 기본골격은 완성되는 것이다. 동사의 의미는 명사를 필요로 하고 이러한 명사와 동사가 논리적으로 규칙에 따라 결합하여 단문이 된다. 이렇게 결정된 근본적인 문법은 문화적 가치, 문맥적으로 중요한 요소, 명사와 동사의 한정등에 따라 순서가 변형되기도 한다. 이러한 진화론적 발달과정을 정리해보면서 나는 비로소 인간게놈이나 언어기관 같은 특별한 능력들이 없어도 우리는 충분히 문법을 만들어내고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o:p></o:p>
<o:p>&nbsp;</o: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614/93/cover150/8996217522_2.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6217522</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실낙원: 문명의 역사심리학 - [자아폭발 - 타락]</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375098</link><pubDate>Wed, 25 Jan 2012 08: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37509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7661404&TPaperId=5375098"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323/58/coveroff/897766140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7661404&TPaperId=537509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자아폭발 - 타락</a><br/>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09월<br/></td></tr></table><br/>“약 500년 전에는 따뜻한 날보다는 추운 날이 훨씬 더 많았다. 1500~1850년까지의 소빙하기에는 유럽과 북아메리카 동부에 걸쳐 지속적으로 대단히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이 시기 소빙하기는 태양흑점의 감소 때문이다. 태양흑점이 감소하면 태양에서 지구로 오는 복사에너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17세기 후반에 걸쳐(기본적으로 1645-1715년까지) 흑점의 활동이 대단히 분명하게 그리고 예기치 못하게 사라졌다.”&nbsp;(랜디 체르베니)<br><br>기후학에서 1645-1715년 사이의 기간을 마운더 극소기라 부른다. 흑점활동에 따른 기온의 냉각이 중요한 이유는 농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17세기 소빙하기 이전 흑점주기로는 1400-1510년의 슈뢰퍼 극소기, 1280-1340년의 볼프 극소기가 있다.&nbsp;<br><br>볼프 극소기 직전에 중세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12세기 르네상스가 있었다. 이 시기가 끝난 것은 보통 흑사병 때문이라 본다. 그러나 랜디 체르베니는 흑사병의 유행보다 볼프 극소기로 들어선 것이 12세기 르네상스의 종식의 더 큰 원인이라 생각한다.&nbsp;<br><br>슈뢰퍼 극소기 역시 중요한 시기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겹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본질적으로 경제의 장기순환에서 하강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낮은 이윤율에 시달린 자본이 생산적인 투자로 돌려지지 않고 과시적인 소비에 돌려졌으며 그 소비가 르네상스의 자금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종교개혁과 30년 전쟁 같은 전란의 시기였다.&nbsp;<br><br>마운더 극소기에 “지구의 기온은 오늘날에 비해 1.5도 정도 더 낮았다. 혹독하게 추었고 서구문명에서 전쟁과 혁명이 많이 일어났던 시기와 맞물린’다.&nbsp;(랜디 체르베니)<br><br>당시는 대항해시대이기도 햇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폭력의 일반화 혹은 폭력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이전 시대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이상사회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군사기술과 무기가 더 발달하고 군사력이 훨씬 강력해졌으며 또 그렇게 강화된 군사력을 더욱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맥닐이 말하는 ‘군사혁명’이 일어난 유럽의 근대는 전쟁의 시대였고 그 폭력은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nbsp;<br><br>세계 여러 문명의 조우는 불행하게도 평화적이기보다는 대개 폭력적이었다. 유럽의 팽창 자체가 우선 무력 사용이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다른 대륙의 이질적인 문명권 안으로 뚫고 들어가기 위새서 무엇보다도 강한 무력을 갖추어야 한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아에 거주했던 포르투갈 인의 보고에 의하면 1502년 바스코 다 가마가 캘리컷에 도착했을 때부터 벌서 가공할 폭력성을 드러냈다. 그는 무슬림 선단을 격침한 다음 800명의 귀와 코 손을 잘라서 캘리컷의 지배자에게 보내면서 카레라이스를 해먹으라고 말햇다고 한다. 그의 선단의 한 선장은 무슬림 상인을 채찍질하여 그가 실신하자 입에 오물을 넣고 돼지고기 조각으로 입을 막음으로써 종교적인 모욕을 가했다. 유럽인과 아시아 인 사이의 거의 첫번째 접촉부터 유럽 인들은 너무나도 폭력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앞세워 그들이 찾아간 해외 지역의 현지인을 지배 정복하거나 약탈과 해적 행위를 통해 직접 부를 취하기도 했으며 교역 행위를 할 때에도 무력 위협을 통해 유리한 위치를 점하였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여러 학자들은 전산업화 시대에 유럽 인들이 전 세계에 수출한 것은 다름 아닌 폭력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주경철)&nbsp;<br><br>유럽인들은 왜 그렇게 폭력적이엇을까? 지금의 유럽인들을 생각하면 떠오르기 힘든 이미지이다. 랜디 체르베니는 소빙하기가 그 일부를 설명할 수있다고 말한다. “소빙하기(1550-1850) 기간은 오늘날 보다 상당히 추웠다. 이런 혹독한 환경에 걸맞게 당시 유럽 문명은 문화적으로 대단히 요란하고 열광적이어서 식민지 확장, 혁명, 전쟁으로 얼룩져 있었다.”&nbsp;(랜디 체르베니)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근대란 폭력이 만들었다는 말이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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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저자는 문명 역시 그러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문명을 만든 폭력 역시 유럽의 폭력처럼 기후가 원인이었다고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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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000년경에 빙하시대가 끝난 이후 가장 중요한 환경 및 기후변화 중 하나가가 일어났다. 제임스 드메오는 건초화가 진행되어 그가 ‘사하라시아’라 부르는 지역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이름이 시사하듯 사라하시아는 북아프리카에서 중동을 거쳐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건조한 땅으로 이루어진 고아대한 지대이다. 기원전 4000년경까지 사하라시아는 삼림에 가까운 초원이었으며 호수와 강, 인간과 동물로 가득차 있었다. 기원전 4000년 이전까지 사하라시아가 비옥했던 것은 아마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뒤 빙하가 물러나고 녹아내려 해수면이 상승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결국 빙하는 더 줄어들고 녹아서 사라져 버려 더 이상 수분도 남지 않았다. 해수면도 내려갔고 근동과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마르기 시작했다. 식물은 사라지고 기근과 가뭄이 심해졌다. 농업은 불가능했다. 물이 없으므로 사냥을 나가도 짐승을 잡을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없었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정신이라는 양면에서 엄청나게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변화를 저자는 타락이라고, 성서는 에덴에서의 추방이라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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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이전에 대한 기억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졌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각색되어 민담이나 신화가 되었다. 에덴동산에는 이란의 파이라대자처럼 강과 아름다운 생명나무가 있었다. 아담과 이브는 거기서 벌거벗고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화합하여 살았다. 그런데 뱀이 이브를 유혹하여 선악과 열매를 먹도록 하였다.” 저자는 이란의 낙원 신화와 성경의 신화는 동일한 사건을 가리킨다고 본다. “두 이야기 모두 따듯한 고향이 사막으로 변하여 추방되지 않을 수 없었던 사하라시아인들의 경험에 대해 언급하는 것같다.” 그리고 낙원에서의 추방된 인간의 정신은 타락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타락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폭력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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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인류 이외의 다른 동물의 왕국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릴라나 침팬지 같이 어느 정도의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는 영장류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인간처럼 호전적이지는 않다. 그것들은 타고난 행동양식이나 서식지가 침해받을 경우에만 낮은 수준의 호전적 행동을 나타낸다.” 그러나 방어적인 동물의 공격성과 달리 “인간의 공격은 악의적이다” 저자는 인간의 악의적인 공격성을 타락의 결과라 말한다. “전쟁은 단지 기원전 4000년경에 시작된 듯하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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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고고학과 인류학의 연구결과를 종합하면서 기원전 4000년 전 이전 그리고 수렵채집인들에겐 전쟁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기원전 4000년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분수령을 타락, 즉 자아폭발 때문이라 말한다. 건조화란 환경재앙때문에 사하라시아인의 정신을 파괴되었기 때문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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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그들의 환경이 변화하면서 집단들은 새로운 난관들에 직면하게 되자 틀림없ㅎ이 새로운 종류의 지능과 실용적이고 창의적인 문제 해결능력이 필요해졌다. 그들이 생존해 나라기 위해서는 심사숙고하고 미리 생각하고 해결책을 신속히 발견하고 새로운 실용적 조직적 능력들을 발달시켜야만 했다. 예를 들어 땅이 매우 건조해지면 산출물을 늘리기 위해 새로운 사냥법이나 농경법을 찾아내고 새로운 물 공급원을 찾아내거나 이전에 쓰던 수로를 더 길게 만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하라시아인들은 더 많이 생각하고 자성능력을 발전시키고 추론하고 머깃속에서 자신들에게 ‘말하기’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 대한 더 강한 인식을 발전시킴으로서 이를 할 수 있었다. 우리가 본 대로 자성이란 내 머릿속의 ‘나’가 자기 자신에게 수다를 떠는 것이다. 당신이 창의적이길 원하고 심사숙고하고 싶고 미리 계획을 세우고 싶다면 당신은 생각할 ‘나’를 가져야만 한다. 이러한 종류의 생각은 필연적으로 환경과의 분리와 ‘개인적이고 예리하고 공간적으로 결정되는 의식’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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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환경이 변하기 시작하여 곡물수확이 줄어들고 사냥하려는 동물들도 죽어 없어지고 물도 마르는 등 인간집단의 생활이 매우 곤궁해지면서 이기심이라는 새로운 정신을 고무시켰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전체 공동체의 관점보다는 그들 자신의 필요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자신들의 필요를 공동체의 필요보다 먼저 생각하기 시작해야만 했다. 공유는 더 이상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렵채집인들은 자원이 부족해도 다른 집단에 더 공격적이거나 경쟁적으로 대하는 등의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다른 장소로 이동하거나 다른 집단들과 합친다. 그러나 사하라시아인들은 농업으로 살았다. 경작지가 부족할 때에 단지 새로운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고 해결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니며 자원이 너무나도 희귀해져서 같은 집단 구성우너들조차 먹일 수 없게 된 집단들은 새로운 구성원을 받으들일 것같지 않았다. 한 집단이 자원에 대한 접근을 확보하려면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힘을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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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새환경이 개인과 공동체의 분리, 마음과 몸의 분리, 개인과 자연의 분리를 촉진했다. 그리고 자성과 합리성의 더 큰 능력이 필요해졌다. 몇세대의 사하라시아인들이 새롭게 예민해진 자아인식을 가지고 살게 되자 그것은 그들의 일부로 고착되어 모든 개인들이 어른으로서 자연적으로 발달시키는 정상적인 정신상태가 되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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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과를 저자는 자아폭발이라 부른다. 저자는 자아폭발은 “우리에게 발명, 창조성, 합리성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선사했다. 자아폭발을 뒤따른 시대가 지적으로 놀라운 진전을 이룩한 시대엿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시기적으로 청동기 시대와 일치하는 이 시대에 “글쓰기, 수학, 그리고 천문학이 발견되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지식폭발이 일어났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마음이 갑자기 새로운 차원을 드러낸 것 같았다. 금속 가공술의 개선, 건축기술, 바퀴, 쟁기, 달력, 수로체계 등의 모든 기술혁신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사하라시아인들에 의해 불과 수세기만에 이루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문명은 사하라시아인들로 인해 가능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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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하라시아인들이 처음 문명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최초의 문명이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문명은 그들 이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사하라시아인들 이전의 문명은 “흔히 높은 기술수준과 강력하게 중앙집권화된 권위를 포함한 사회조직, 사회적 계급분화 그리고 전쟁” 같은 특징이 없엇다. 사하라시아인들 이후의 문명은 새로운 문명이라 보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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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아폭발의 선물은 정신적 불화란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얻은 것이었다. “정신적 고통 단지 타락과 함께 존재했다. 타락은 인간의 생활양식만 바꾼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삶을 체험하는 방식과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에도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다. ‘인생은 고통’이라는 붓다의 말씀은 타락 이전 세상에서는 분명 틀린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 이후의 세상에서 그것은 모든 말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진실이엇고 모든 인간이 자신들의 존재의 핵심에서는 친숙해진 언급이었다. 인생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부담으로 갑작스럽게 바뀌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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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아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좌뇌의 인식이다. 콜린 윌슨은 자아의식을 좌뇌인식이라 부른다. “좌뇌인식은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듯이 스스로를 생각하는 능력이다.” 좌뇌와 달리 “우뇌는 비자아중심적 세계관이 특징이며 좌뇌처럼 세계를 해석하고 통제하려는 충동이 없다. 문제는 뇌의 두 반구가 상호배타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우뇌 특징이 더 강하면 좌뇌 특징은 더 약해진다.” 타락 이전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우뇌지향적이었다.” 우뇌지향적이었던 타락 이전 사람들이 느꼈던 세계는 타락 이후 사람들과는 완전히 달랐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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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졸증으로 좌뇌가 파괴되었던 질 테일러는 우뇌로 살아야 햇던 동안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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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과 나를 단단히 묶어놓았던 끊임없는 노의 수다가 잦아들자 그 자리에 평온한 행복감이 밀려와 나를 포근하게 감쌌다” 몸과 외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마치 우주와 하나가 된 듯했다. 좌뇌의 분석적 판단 능력이 상실된 상태에서 평온과 안락, 축복과 행복, 충만의 감정이 나를 휘감았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서둘러 밀어붙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햇다. 그저 한가롭게 해변을 거닐거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빈둥거리듯, 좌뇌의 ‘행하는’ 의식을 우뇌의 ‘존재하는’ 의식으로 바꾸었다. 아주 사소하고 늘 고립되어 있다고 느꼈던 내가 이제 거대한 존재가 되어 주위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것같았다. 내가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 이 순간 뿐이었고 그것은 아름다웠다. 단일하고 견고한 실체였던 나의 자아상이 완전히 바뀌어 스스로가 유동체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우뇌는 영원한 우주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즐거워했다. 나는 더 이상 고립된 외톨이가 아니었다. 내 영혼은 우주만큼이나 거대했고 드넓은 바다에서 흥겹게 장난치며 놀았다. 내 눈은 더 이상 사물을 구별하여 지각하지 못했다. 에너지가 서로 뒤섞여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나를 에너지 흐름 속에 있는 존재로 인식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엿다. “내게 사람들은 에너지가 집중적으로 몰려있는 덩어리 같았다.” “우뇌가 나를 지배하면서 타인의 감정에 더 많이 공감하게 되었다.” “여러분의 에너지가 주위의 에너지와 섞여들면서 늘어나고 스스로를 우주만큼이나 거대한 존재로 느끼게 된다. 여러분이 누구이고 어디에 사는지 일깨워주던 머릿속의 작은 목소리는 침묵한다. 여러분을 예전의 감정적 자아와 연결해주던 기억이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의 풍성함만이 여러분의 인식을 사로잡는다. 모든 것이 순수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질 테일러)<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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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에너지를 호피족은 마사우, 라코타족은 와칸탄카로 포니족은 티라와, 폴리네시아에서는 마나라 불렀다. 와칸탄카는 “모든 사물을 움직이는 힘이다. 포니족의 한 사람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티라와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티라와는 모든 것 내부에 있는 힘으로 생각하며 어둠 위에서 움직여서 밤이 새벽을 낳게 한다. 그것은 갖 태어난 새벽의 숨결이다.” 영어로는 spirit 즉 영혼이라 부를 수 있는 이것들은 힌두교에선 브라만이라고 도교에선 道라고 부른다. 브라만은, 도는 모든 것에, 생명이 있든 없든 우주의 모든 것에 있다. 타락 이전의 사람들은 자연을 영혼의 현시라고 보았고 그들 자신들도 영혼의 현시라고 “보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과의 연대감 및 연관성을 느끼며 자연과 정체성을 공유한다고 느낀다. 이는 우리가 보통 경험하듯 자연계에 대하여 타자성을 느끼는 것과는 상반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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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아폭발은 ‘나’와 세계와의 연결을 끊었다. 자아폭발의 문제는 “예민하게 발달된 우리의 자아인식이 우리가 머릿속에 갇혀있다는 인식, 우리가 두개골 안에 있는 하나의 ‘나’이며 우주의 나머지 및 다른 모든 인간들은 다른 편에 있다는 인식을 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근본적으로 ‘고독’을 인식한다.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연이나 다른 살아 있는 것들과 연대감을 갖는 것은 그들이 절대 혼자임을 체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항상 세상과 연관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 고독에 대한 인식은 불완전함에 대한 인식을 동반한다. ‘자아분리’는 우리가 단절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이 전체 우주의 일부인 반면 우리는 전체로부터 깨져나와 고립된 조각들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근본적으로 어떤 불충족 인식, 우리 자신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인식,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인식을 갖는다. 그것은 정신적 추방이며 유배이다. 그것은 우리의 집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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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뇌인식은 고독만 선물한 것이 아니라 권태도 선물했다.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굉장히 ‘사실적인’ 장소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살아 있다. 바위, 강, 산과 같이 ‘생명없는, 무생물적’ 사물도 살아 잇다. 그들에게는 창조의 경이와 환상이 모든 나뭇잎과 돌, 모든 가시와 싹에 어른거린다. 그러나 우리 타락한 사람들에게는 세계는 따분하고 지루한 장소이다. 하도 지루하여 실제로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정도이다. 우리는 다만 과제들과 집중을 방해하는 것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수다에 집중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바위나 강, 나무들에 내재하는 생명, 그것들이 (애보리진의 용어로는) ‘꿈꾸고 있다’는 인ㅅ힉을 상실했다. 마치 3차원적 인식이 아닌 2차원적으로만 볼 수 있는 것같다.” 타락 이전 사람들에겐 명백한 현실이었던 브라만, 또는 도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대신 우리가 얻은 것은 뇌의 수다이다. 뇌의 끊임없는 수다는 우리에게 분석력, 추리력, 예측력을 주었다. 그러나 그 수다는 비싼 대가를 치루고 얻은 것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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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하지 않은 우리 조상들은 정신적 행동이나 집중적 노력에 매우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정보처리에 특히 주위의 현상세계를 인지하는데에 사용할 정신적 에너지가 아주 많았다. 그러나 자아폭발과 함께 이 균형은 극적으로 이동했다. 자아는 매우 강하고 능동적이어서 훨씬 많은 의식 에너지를 사용했다. 동시에 사람들의 생활도 매우 어려워졌기 때문에 더 많은 에너지와 주의를 집중적인 노력에 투입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그들에게는 제3의 기능 즉 정보처리 특히 주위의 현상세계를 인지하는데에 들어갈 의식에너지가 줄어들었다.” 저자는 이를 “둔감화기제’라 부르며 정신 에너지의 재분배의 한방식이라 부른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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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감화기제는 우리 자신 밖의 것을 배경으로 처리해 잊혀지게 한다. 그렇게 절약한 에너지를 분석하고 추리하고 예측하는 좌뇌의 수다를 듣는데 써버린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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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선 번뇌라 부르는 이 수다는 마음의 폭군이며 불교식으로 말하면 우리를 무지하게 만든다. "무지는 교양이 없다든가 머리가 나쁘다는 듯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스스로의 의식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어떤 사고가 소용돌이 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뇌의 일부를 혹사하며 생각을 많이 할수록 신체와 마음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알기 어려워지고, 무지해진다. 상대의 표정과 목소리 변화를 확실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늘 같은 얼굴이군, 지루해...'라며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머릿속에는 쓸데없는 개념과 망상만 쌓이게 되고, 현실과 의식의 실제 흐름에 무지하게 된다. 무지라는 번뇌는 마음을 실제적인 현실에서 뇌 속의 생각으로 도피시키는 것이다. '이 일을 실패하면 어쩌지?'라든가 '실패해서 저 사람에게 무시당하면 어쩌지?'하는 잡념이 연쇄적으로 재빠르게 일어나며 마음속에 들끓게 되고 마음의 메인 메모리는 헛된 잡념으로 가득찬다. 1초동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도 0.1초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머지 0.9초는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나 과거의 잡음이 남긴 메아리에 휘둘린다면 어떻게 될까? 10초 중 9초는 현실감이 사라지고 한 시간에 54분은 멍청히 있게 된다. 현실 그 자체에 직결되지 않는 망상에 탐닉한 결과, 현실감이 사라지고 행복감도 사라진다. 나이가 먹을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과거로부터 엄청나게 축적되어온 생각이라는 잡음이 현실의 오감을 통해 느끼는 정보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고병 즉 '생각병'이다." (코이케 류노스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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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센트미하이는 뇌의 수다를 정신적 엔트로피라 부른다. “고독에 대한 인식의 결과로서 우리의 마음은 걱정에 사로잡힌다. 수다 떠는 자아는 우울한 사람과 같아서 모든 것에 대해 불평을 토로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곤경을 이야기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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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곤경의 으뜸은 죽음이다. “자아의식을 발전시키고 자신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그들 자신의 잠재적 부재도 알게 되었다. 우리와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 간의 한가지 중요한 차이는 그들이 죽음에 대해 덜 두려워하는 것같다는 점이다. 그들의 특별한 개인성이 그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자연이나 공동체 또는 그들이 속한 종족의 존재와 완전히 분리할 수 없었다. 때문에 개인으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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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은 우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우리를 분리시켰다. 그 분리로부터 태어난 첫번째 결과가 폭력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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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시아인의 대표적 종족인 인도유럽인과 셈족은 어느 시대의 기준으로 보나 극단적으로 폭력적이었다. 셈족의 경우를 보자. “유월절 축제는 예리코 공격에서 시작된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성전을 준비하는 행사였다. 예리코의 성벽은 기적적으로 허물어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소건 양이건 나귀건 모조리 칼로 쳐 없애버렸다.’ 야훼는 전쟁의 신이었다.” (카렌 암스트롱)<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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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노소, 가축까지 돌 하나 남기지 않고 즐겁게 ‘신의 축복’을 받으며 살인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남의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다. “자아폭발은 인간들 사이에 공감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것이 전쟁의 중요한 원인이다. 공격성은, 보통의 경우에조차도, 단지 공감능력이 줄어들었을 때에만 발생한다. 당신이 만약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낄까에 마음을 쓴다면 다른 사람을 해치려 할 수 없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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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전쟁은 단순히 타인에 대한 무감각만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저자는 전쟁이 둔감화기제 때문에 생긴 권태와 비현실감을 해소하려는 방법으로 발전했을 것이라 말한다. “전쟁은 권태와 무목적성의 공포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오락 내지는 운동으로 그리고 인간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으로도 중요해졌다.” 파스칼은 “권태와 전쟁의 연관성을 인식하고 ‘인간에게 유일하게 좋은 일은 그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에서 다른 데로 생각을 돌리는 것이다. 그것이 도박과 사교계, 전쟁과 고위관직이 매우 인기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1차대전에 유럽인들이 열광했던 이유라고 에른스트 융거는 주장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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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다녀야 할 청년이 젊은 군인의 고귀한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책가방 대신에 무기를 든다. 청년은 비가 내리고 화염이 진동하는 황혼의 전선에서 육중한 화약상자를 두 손에 들고 말없이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순간 그 청년이 고독하게 짊어진 책임의식은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을 그 청년은 청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 타오르는 꿈으로 극복한다. 바로 여기서 이름없이 사라져간 용사들에 대한 조용한 미사가 진행된다. 이러한 영웅적인 믿음의 화음이 울려 퍼질 때 인간은 자신을 희생한 인간들에 의해서 구현된 고귀한 형제애를 맛보게 된다. 그리고 화혐의 지옥에서도 영혼은 숨쉬기 시작하며 청년은 내면의 날개를 달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날아오른다.” (융거 1929, 박찬국 2001에서 재인용)<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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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적 근대주의자라 평가되는 융거는 전장의 경험을 ‘모험정신’이라 요약한다. 총탄과 폭탄이 뇌우처럼 쏟아지는 전장에 뛰어든 인간이 목숨을 건 대가로 얻는 것은 “강력한 내적인 고양”의 경험이라 융거는 말한다. “융거의 반동적 근대주의는 파시즘의 미학과 통한다. 파시즘의 미학은 자기 희생을 통한 죽음,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행동에서 최고의 삶의 고양이 일어난다고 보는 죽음의 미학이다.” (박찬국) 융거가 말하는 전장의 경험은 ‘서부전선 이상없다’가 말하는 전장과는 판이하다. 그러나 노리로르와 같은 역사사는 융거의 분석에 동의한다. “그들은 건너편 참호의 적을 증오하지 않았다. 혹독한 생을 이어가지 위해서 사람들은 보다 훌륭하고 보다 고결하며 보다 정신조국에 대한 신앙에 의지했다. 사람들은 나중에 진정한 국민은 저 멀리 참호 속에 있었다고 말하고는 했다. 틀림없이 영국과 프랑스의병사들도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보다 아름다운 생활, 새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조국, ‘영웅이 사는 나라’에 돌아가는 꿈이었다. 전쟁터의 정신을 고향에 이식해 생을 변혁하는 일은 불가능한가? 모든 에고이즘이 제거된 생활은 불가능한가? 이 전쟁에는 그 빡에 더 많은 것이 있었다. 희생과 영웅적 용기, 살벌하고 가공할 전쟁 속에서 의무를 수행하려는 의지, 이런 것들이 많은 독일 청년들이 전쟁터에서 구현하고자 한 정신이었다.” (노이로르 1956)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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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거는 전쟁을 억압되엇던 야성적인 생명력의 폭발적인 분출이라고 해석했다. 전쟁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 광적인 도취와 고통, 그리고 냉혹함, 피와 용기와 동지애와 적개심과 같이 평소에 억눌려 있던 야성적인 감정과 힘이 거리낌 없이 발산된다. 그리고 전쟁은 새로운 인간을 길러내는 훈련장으로 해석했다.” (박찬국) 융거는 자신의 해석을 니체의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란 개념에 근거해 제시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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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ill to Power names what constitutes the basic character of all beings. ‘Will to power is the ultimate factum to which we come.’ As the name of the basic character of all beings, the expression ‘will to power’ provides an answer to the question ‘What is being?’ All Being is for Nietzsche a Becoming. Such Becoming, however, has the character of action and the activity of willing. But in its essence will is will to power.” (Heidegger)<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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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란 무엇을 있게 하는 힘을 말한다. 힘으로서 자신을 파악하는 존재자, 자신을 being이 아닌 becoming으로 이해하는 존재자는 타락 이전 사람들에겐 낯설수 밖에 없다. Being이 아닌 becomng이란 선언은 존재의 불완전성을 의미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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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 제2부에서는 세계를 빈틈없이 지배하는 권력으로서, 인간적 자유의 유희 속에도현존하는 것의 이름이 명확히 진술된다. 기초적인 사상은 이제 권력의 의지라는 교설이다. 변화한 인간, 즉 어린이가 된 인간은 창조아이다. 이 자는 본래적, 본체적인 인간이다. 창조적으로 유희하는 자, 가치들을 정립하는 자, 자기에 대하여 하나의 목표를 세워 하나의 새로운 투기를 감행하는 어떤 큰 의지를 의욕하는 자를 말한다. 창조자에게는 받아들여서 단지 그것에 순응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이미 완성된 의미의 세계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사물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대처한다. 그는 모든 척도와 저울을 새로이 정한다. ‘너희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우선 너희들에 의해 창조되어야 한다.” (오이겐 핑크)<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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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자로서의 인간이란 존재의 본질적인 불완전성을 폭로한다. 그것은 자아분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존재자이다. 그 인간이 창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그의 창조물은 부와 권력이라 불렸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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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타락한 사람과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가장 놀라운 차이 중 하나는 물질적 재화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은 재산이나 땅을 갖거나 소지품을 모으려는 욕망이 없다. 수렵체집인 집단에선 사적소유는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간주된다. 세계의 타락 신화들 일부는 분명히 ‘소유에 대한 애정’이 타락의 부정적인 결과 중 하나임을 웅변한다. 애버리진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소유에 대한 애착’이라는 유럽인들의 질병에 매우 당황했다. 인디언들은 땅의 한 부분을 판다는 관념을 어리석은 농담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유럽인들이 땅을 형편없이 낮은 가격에 살 수 있었다. 세네카족의 족장이 말한 대로 ‘사람이 바다와 그가 숨 쉬는 공기를 팔 수 없듯이 땅도 팔 수 없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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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물질주의는 우리 내면의 정신적 불화를 넘어설, 또는 환화할 행복의 원천을 찾으려는 욕망에서 분출한다.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은 정신적 불화로 고통받지 않으므로 물질주의적이지 않다. 재산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 우리는 세상을 근본적으로 위협적인 장소로 체험하며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는 살아있는 존재로서 우리의 위치가 허약하고 임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재산이 우리에게 일종의 영속성과 보호받는다는 인식을 주는 것이다. 강한 분리 인식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결핍인식을 남겼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내면의 구멍을 메우려는 강한 욕구를 가진다. 돈과 물질적 재화를 축적하는 것이 이일의 한 방편이 되리라.”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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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신적 불화를 넘어서는 또 하나의 방법은 당신이 ‘자아기반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중요한 사람이 됨’으로써 성공하고 유명해짐으로써 다른 사람의 존경과 찬사를 받음으로써 행복을 발견할 수있다고 믿는다. 전쟁, 가부장제, 그리고 사휴ㅚ적 계급분화는 모두 이 욕구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은 ‘중요한 인물’이 되려는 욕구가 없는 것같다. 이는 그들 사회에 사회적 계급 분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위에 대한 욕망은 이것보다 훨씬 더 나가서 미친듯이 권력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하여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아마도 그들은 날 때부터 자아인식이 보통 사람들보다 강한 탓에 그들 내면의 정신적 불화의 수준도 높았을 것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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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들의 고전적인 예가 소위 영웅이다. “호메로스는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더 강렬한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같다. 만일 영웅의 명예로운 행위가 서사시에서 기억된다면 그는 죽음의 망각을 극복하고 소멸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불멸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명성은 생명보다 소중하며 시는 명성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경쟁하는 전사들을 보여준다. 이 영광의 탐구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선다. 영웅은 명예와 지위의 문제에 시달리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며 시끄럽게 자신의 공적을 떠벌리고 자신의 존엄을 높이기 위해 전체의 이익을 언제든지 희생한다.”&nbsp;(카렌 암스트롱)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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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 나폴레옹, 히틀러 같은 정복자들은 전세계를 정복하여 불멸의 신과 같은 지위를 얻으려 했다. 루퍼트 머독과 같은 현대 정치인이나 사업가들은 권력에 대하여 이와 같은 종류의 극단적인 욕구를 갖고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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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라 불리던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아의식이, 즉 자아분리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 공감능력의 결핍이 심하다는 점이다. &nbsp;“남편감으로 어떤 사람이 좋으냐는 질문에 대해 여성들은 문화와 관계없이 무엇보다도 친철함과 공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도 상당히 중시한다. 그러나 친절함과 공감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과 충돌한다. 여성들이 이 두개의 서로 엇갈리는 가치를 어떻게 관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현실적인 문제다. 여성에게 화려한 삶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삶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nbsp;(대니얼 네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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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자아폭발의 다른 결과인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과 공감의 결여를 한데 묶으면 우리는 지난 6000년의 인류역사를 형성한 대부분의 사회병리현상의 근본적 원천을 확보한 셈이 된다.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면 모든 타락한 사회들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이른바 자본주의 체제는 경제학자나 정치인들에 의해 사회에 강요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정신의 한 부분인 부와 지위에 대한 욕망의 필연적 결과였다. 공산주의는 타락 이전 시대에 속한다. 공산주의는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비정상적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사유재산, 경쟁, 권력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섹스나 음식을 포기하고 하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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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이책에서 저자는 가부장제의 기원, 환경파괴의 심리학, (신을 섬기는) 종교의 기원, 축의 시대에 대한 타락의 관점에서의 재해석, 인류의 멸망을 피할 가능성 등에 대해 타락이란 관점에서 일관된 설명을 제시한다. 그러나 리뷰가 너무 길어진 관계로 여기선 이것으로 줄이고 다른 리뷰에서 기회가 되면 다시 다루기로 한다.<o:p></o:p>
”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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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323/58/cover150/8977661404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7661404</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게임과 비교한다면 현실을 망가져 있다.” - [누구나 게임을 한다 -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게임에 대한 심층적 고찰]</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375093</link><pubDate>Wed, 25 Jan 2012 08: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37509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5545748&TPaperId=537509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450/52/coveroff/892554574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5545748&TPaperId=537509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누구나 게임을 한다 -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게임에 대한 심층적 고찰</a><br/>제인 맥고니걸 지음, 김고명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2년 01월<br/></td></tr></table><br/>“나는 비행기 타기를 끔찍이 싫어하지만 1년에 150시간 이상을 그렇게 끔찍하게 보낸다. 세월이 지나면서 나아지긴 했어도 여전히 비행기에서 먹고 자고 일하진 못한다. 절대로 ‘즐겁게’ 비행기를 탈수가 없다. 거의 항상 불안감으로 안색이 안 좋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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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2,500만 명 이상이 비행을 두려워하고 상용 고객 중 52%가 항공기 탑승에 가장 어울리는 말로 ‘답답함’을 꼽았다. 통제권의 부재는 본질적으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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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게임을 하고 게임에 몰두하는 이유가 통제의 문제라 말한다. 세상일이라는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종잡을수도 없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느낌은 이코노미 좌석에 붙잡혀 뭘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와 비슷하다. 우리를 괴롭히는 스트레스의 정체는 통제의 문제란 말이다. 동물원의 동물들은 야생상태에서보다 수명이 짧다. 객관적으로 안전을 보장하고 먹이가 더 풍족한데도 그렇다. 그 이유는 심리적 스트레스이다. 선택권이 없다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느낌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수명이 짧아진다.&nbsp;<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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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력을 행사하면 기분이 좋아지며 그러지 못하면 불쾌한 기분이 들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런 반응은 동물에게 스트레스의 근원을 제거하고 통제력을 되찾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에 야생의 단기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생존 가능성을 높여준다. 그러나 스트레스의 근원이 지속된다면 다시 말해 피하거나 싸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면 스트레스 반응이 지속되어 결국 신체는 탈진 상태에 이른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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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정성껏 자신들을 보호해주지만 동물원에 사는 동물들은 삶을 거의 통제할 수 없으르모 죽음의 함정에 빠졌다고 느낄 수도 있다. 동물 우리를 둘러싼 어마어마한 해자와 벽, 그물, 유리벽에도 굴하지 않고 많은 동물이 탈출을 시도하는데 그중 일부는 성공하기도 한다. 2004년 베를린동물원에서는 마치 안경 쓴 것처럼 눈 둘레에 백색테가 있는 안데스 산 안경곰 후앙이 통나무를 이용해 서식지의 해자를 건넌 다음 벽을 타고 넘어가 자유를 쟁취했다. 동물원 관계자들은 후앙이 동물원의 회전목마를 한 바퀴 돌고 미끄럼을 몇 차례 탄 뒤에야 허둥지둥 진정제를 쏘아 체포할 수 있었다.” (쉬나 아이엔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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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이 자유를 찾아 우리를 탈출하듯 인간도 자유를 찾아 숨쉴 곳이 필요하다. 자신이 현실을 통제한다는 느낌을, 현실에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싶어한다. 저자는 게임이 그런 곳이라 말하낟.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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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들은 이제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게임 세계에서는 전력을 다해 충실히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현실 세계에서는 대체 어디에서 그런 느낌을 찾을 수 있을까? 능력을 발휘해 동료와 함께 장대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느낌은?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를 당성했을 때 찾아오는 감격스러운 성취감은? 개인적인 성공과 더불어 팀에서 함께 목표를 달성했을 때 느끼는 벅찬 감동은? 물론 현실에서도 이따금 그 같은 즐거움을 경험하긴 한다. 그러나 좋아하는 게임을 할 때는 그야말로 그칠줄을 모르고 계속된다.” 그러니 게이머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게임과 비교한다면 현실을 망가져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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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의 69%가 컴퓨터, 비디오 게임을 즐긴다.<o:p></o:p>
젊은 층의 97%가 컴퓨터, 비디오 게임을 즐긴다.<o:p></o:p>
게이머의 40%가 여성이다. <o:p></o:p>
게이머 4명 중 1명이 50세 이상이다.<o:p></o:p>
게이머의 평균 연령은 35세로 평균 12년 간 게임을 즐겼다. <o:p></o:p>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앞으로도 계속 게임을 할 생각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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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통계이지만 이런 수치가 나올 수 있는 이유는 현실보다 게임이 더 현실감을 주기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게임을 하면 통제권을 되찾는데 도움이 된다. 진정한 게임은 언제나 자발적이기에 게임 플레이는 자유를 행사하는 행위이다. 또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실력을 기르는 과정에서 유능감과 지배감도 생긴다.” 간단히 말해 게임을 하면 자신이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는 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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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임에는 목표, 규칙, 피드백 시스템, 자발적 참여라는 4가지 본질적 특징이 있다. <o:p></o:p>
목표는 플레이어가 성취해야 하는 구체적 결과다. 규칙은 플레이어가 쉽게 목표를 이루지 못하도록 제약을 만든다. 확실한목표 달성 방법을 없애거나 제한하여 미지의 공간을 탐험하도록 유도한다. 이로써 창의력이 발휘되고 전략적 사고가 활발히 일어난다. 피드백 시스템은 플레이어가 목표에 얼마나 다가섰는지 알려준다. 실시간 피드백은 목표달성이 분명히 가능하다는 약속으로서 플레이어가 계속 게임을 하도록 의욕을 불어넣는다. 자발적 참여는 게임을 하는 모든 사람이 목표, 규칙, 피드백 시스템을 선뜻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한다. 이러한 자발적 수용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게임을 할 공동기반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마음대로 게임에 참여하고 끝낼 수 있는 자유가 있기에 플레이어는 어렵고 때로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오히려 게임에서 안정감과 재미를 느낀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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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4가지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런 말이 된다. “게임을 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도전하는 행위다.” 골프를 예로 들어보자. “골퍼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다른 사람보다 공을 적게 쳐서 조그만 홀에 집어넣는 것이다. 게임이 아니라면 식은 죽 먹기다. 그냥 공을 잡고 걸어가서 홀에 떨어뜨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서서 클럽으로 공을 치기로 정했기 때문에 골프는 게임이다. 즉 모든 사람이 과제 어려운 방식을 통해 해결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우리는 골프에 열중한다. 믿을만한 피드백 시스템도 있다. 그래서 공이 홀에 들어갔는지 그리고 스트로크 몇번 만에 들어갔는지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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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4가지 특성은 우리가 상황을 통제하고 잇다는 느낌을 준다. 저자가 말하는 4가지 특성은 우리가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이며 인간 행위의 본질이다. 그러나 게임과 달리 현실에선 4가지 중 어떤 것도 분명하지 않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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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생활에서 힘든 일을 해야 할 때는 대부분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다. 먹고살기 위해, 출새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아니면 그저 남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그런식으로 해야 하는 일을 혐오한다. 스트레스만 잔뜩 받고 가족, 친구와 보낸 시간도 빼앗긴다. 게다가 싫은 소리는 왜 또 그렇게 많이 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왠만해서는 노력의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좀처럼 만족을 못 느낀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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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놀이보다 재미있다.’ 사람은 일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것이다. 생리적으로 일은 스트레스의 원인이다. 일을 하려면 어쨌든 스트레스 호르몬이 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트레스도 긍정적인 것이 있다. 현실과 달리 우리의 심리메커니즘에 맞게 설계된 게임을 할 때 우리는 긍정적 스트레스, 유스트레스를 받는다. “유스트레스는 부정적 스트레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 유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보상회로가 활성화되며 두뇌의 통제 충추로 가는 혈류가 증가한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가짐에는 튼 차이가 있다. 유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두려움이나 비관에 빠지지 않는다. 일부러 스트레스 상황을 만들었기에 자신감이 생기고 태도가 낙관저으로 변한다. 자발적으로 힘든 일을 택했을 때 우리는 자극과 활성 상태를 즐긴다. 어서 달려들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을 끝내고 싶어진다. 이렇게 낙관적이고 기운찬 상태가 휴식보다 훨씬 기분을 좋게 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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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트레스를 사람들이 즐기는 이유는 그것이 ‘힘든 재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든 재미에서 사람들이 얻는 보상을 ‘피에로 fiero’라 게임업계에선 부른다. “피에로는 역셩을 극복하고 느끼는 기분이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워도 직접 느껴보면 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피에로를 느끼는지도 쉽게 알 수 있다. 거의 모든 사람이 피에로를 표현할 때 하나같이 두팔을 높이 쳐들고 소리를 지르니 말이다. 피에로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신경화학계의 최고조 상태다. 피에로는 다른 감정격발상태와 다르고 장애를 힘들게 극복할수록 강렬해진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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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이 게임에 매혹되는지 알겠다. 그런데 그것은 도피가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게임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길을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업임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0%가 업무 중에 짬짬이 게임을 즐긴다고 밝였다. 임원 대다수가 날마다 15분에서 1시간 정도씩 게임으로 휴식한다는 말이다. 많은 임원들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게임을 즐긴다고 하는데 이는 당연한 말이다. 현실의 일이라는 외적 압력 즉 부정적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게임 속 일이라는 내적 압력 즉 긍정적 스트레스로 주의를 돌인다. 이들은 잠깐 컴퓨터 게임을 하고 나면 자신감과 활력이 생기고 집중력이 증가한다고 했다. 모두 유스테스의 특징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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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그외에도 여러가지 예를 든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에서 유행하는 소셜게임은 게임을 같이 하지 않는다면 시간을 같이 보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좋은 구실을 제공한다. “렉슈러스는 2007년에 출시돼 페이스북 최초로 거대 사용자층을 형성한 게임이다.” 이 게임은 말잊기 놀이라 할 수 있다.&nbsp;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안부를 나누려고 일부러 렉슐러스를 한다. 연락할까 말까 망성이던 사람은 렉슐러스가 계기가 된다. 내가 말한 ‘차례’가 됐다고 일러주니 능동적인 연결상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소셜 네트웤 게임을 하면 우리가 사랑하지만 평소 잘 만나지 못하거나 대화가 부족한 사람과 끈끈하고 능동적인 연결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더 쉽고 재미있어진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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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자가 이책으로 보여주려는 것은 그 이상이다. 게임이 세상 자체를 바꿀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게임 디자인의 논리로 세상을 디자인한다면? 그 좋은 예로 저자는 게임처럼 디자인된 학교를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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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시의 ‘퀘스트 투 런’은 6-12학년 학생을 위한 자율형 공립학교이다. 세ㅐ계최초의 게임 기반 학교로 전 세계 학교의 본보기가 되는 것이 설립자들의 바람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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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교 학생의 일과는 이런 식이다. “오전 9시 영어 시간 지금 라이는 레벨 업에 온 정신 쏠려 있다. 이야기하기 수업에 참여해 벌써 5점을 받았다. 이제 7점만 더 받으면 이야기의 ‘달인’ 반열에 오른다. 오늘은 작문 미션도 완수해 점수를 더할 생각이다. 레벨 업은 정규 곡선에 따라 A에서 F로 점수를 매기는 체계보다 평등하다.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레벨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퀘스트에 실패하더라도 성적표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남지 않는다. 더 많은 퀘스트를 수행해 원하는 만큼 점수를 얻으면 그만이다. 이 같은 성적 체계는 부정적 스트레스가 아닌 긍정적 스트레스를 일으켜 학생이 수행평가가 아니라 학습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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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라이는 집에서 베티라는 가상 인물과 이야기하고 있다. 베티에세 대분수 나눗셈을 가르치는게 목표다. 베티는 교육 가능체라는 것으로 아이들이 디지털 캐릭터에게 특정한 문제 해결 방법을 가르치게 하는 평가도구다 다시 말해 라이보다 더 적게 알도록 디자인된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라이가 할 일은 프로그램을 가르치는 것. 교육가능체가 쪽지시험을 대신하므로 압박감 속에서 문제를 풀 때 생기는 불안감을 줄인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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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5]]></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450/52/cover150/8925545748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5545748</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선비, 얼치기 근본주의자들 -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349800</link><pubDate>Thu, 12 Jan 2012 09: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34980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119376&TPaperId=534980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417/5/coveroff/899311937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119376&TPaperId=534980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a><br/>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br/></td></tr></table><br/>“먼 옛적 어버이를 장례 지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그 어버이가 죽자 바로 들어 골짜기에 버렸다. 다른 날 그곳을 지나다 보니 여우와 이리가 뜯어먹고 파리와 모기가 빨아먹고 있었다. 이마에 진땀이 나고 흘겨는 보나 차마 바로 보지는 못했다. 땀이 난 것은 다른 사람의 눈 때문이 아니었다. 마음의 중심이 얼굴과 눈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돌아와 흙과 풀로 덮었다” (맹자, 등문공 上)<!--?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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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하나인 장례가 어떻게 생겼을가에 대한 맹자의 추리이다. 맹자의 상상이 사실일리는 없고 옳은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맹자의 이야기가 그렇듯 이 이야기에는 묘한 울림이 있다. “맹자가 말하는 것처럼 장례가 없던, 장례라는 관념 자체가 없던 옛사람들 마음의 구조는 어떠했을까? 부모의 방치된 시신을 보더라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 것이다.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다. 우리 주변의 동물들이 지금도 그런 것처럼,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이마에 땀이 나고 차마 정면으로는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다? 분명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 엄청난 충격, 혼란, 죄의식이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부모가 바로 곁에 느껴졌을 것이다. 들판 쑥덩굴에 버렸던 그 몸뚱이, 죽은 어미… 자기도 모르게 이마와 등줄기와 손에 진땀이 흐르고 괴로웠을 것이다. 갑자기 내면에 발생한 이상한 감정에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죽은 어미? 죽은 아비? 어디에? 분명히 죽고 없는 부모가 ‘여기 이곳’에 느껴진다. 기억의 단순한 잔영이 아니다. 땀과 충격, 희미한 죄의식이 그를 흔들었다. 감관적, 물리적 세계 밖의 또 다른 차원이 인간의 의식 안에 불쑥 출현한 것이다. 맹자의 땀 이야기는 종교성의 근원을 생생한 몸의 반응으로 설명한 아주 특출한 사례이다. 우리 도덕의 기원은 몸에서 우리 몸의 땀에서 시작되었다. 축의 시대에 탄생한 보편윤리, 세계종교의 공통적 핵심은 무엇인가? 그 바탕에는 맹자의 땀에서 시작된 종교성의 원형이 있다. 그 종교성은 감관세계, 물질세계를 상대화햇다.” (김상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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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가 종교인 이유는 초월에 있다. 지금 여기에선 죽은 어미를 흙으로 덮어주어야 할 어떤 이유도 나오지 않는다. 장례의 이유는 지금 여기를 넘어선 초월, 성(聖)에서만이 만들어진다. 물론 초월은, 성은 축의 시대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성의 탄생이 보편윤리, 세계종교를 출현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의 위기 때문이었다.” 카렌 암스트롱이 말하듯 축의 시대에 등장한 세계종교들의 공통점은 폭력에 대한 반감이었다. “기독교의 에덴동산이나 노자의 소국과민은 모두 고대도시, 고대국가가 출현하기 어전의 상황을 말한다. 도시와 국가는 예나 지금이나 고도의 인위와 작위의 산물이다. 착취와 전쟁이 체계화, 대규모화한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방법론들이 고도화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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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 시대에 등장한 세계종교들에는 모두 그 당시 세상에 만연했던 폭력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기독교는 사랑으로 불교는 자비로 말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유교를 정치종교로 만들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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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땀은 철저한 타자, 가고 없는 존재자에 대한 윤리적 부채감이다. 여기서 폭력과 전쟁에 대 한 철저한 반대가 나온다. 폭력의 주인인 군주에 결연한 비판과 견제의 마음이다. 아울러 공정함과 정의로움을 지키려는 강직한 태도다. 천하게 바르지 않게 될까 걱정하는 天下爲公의 마음, 우환의식이다. 마음에 그치지 않았다. 근심하고 있지만 않았다. 현실의 중앙에서 천하위공을 실현하려고 했다. 여기에 유교의 핵심이 있다. 군주와 대면하고 국가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유교는 국가의 폭력성을 밑으로부터 통어하려 했다. 국가의 주인인 군주를 윤리적으로 통제함으로써 군주주권을 내파 즉 안으로부터 해체했다.” 그 내파의 논리가 성왕론이었다. “성왕론은 유교이념의 핵심일 뿐 아니라 유교정치체제의 근간이다. 윺교의 예란 이러한 이념과 체제를 작동시키는 행동원리이다.” (김상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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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퍼스는 이 시기에 인류가 최초로 윤리적 감각을 갖게 된 것으로 본다. 여기서 말하는 윤리란 주어진 현세의 현상과 힘 자체를 회의하고 초월하는 반성력이다. 이러한 윤리적 각성은 현세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이러한 각성 이후에는 현세적 사실과 윤리적 초월 간에 팽팽한 긴장이 발생한다. 유교의 창건자들은 ‘폭력에 대한 윤리적 혐오감’이라는 전혀 새로운 감성을 중국 문명에 최초로 이념적으로 체계화한 사람들이다. 그러한 인식에는 무엇인가 부당하고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부당하다는 의식 자체에 초월적 계기가 싹트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옥이라는 초현세적 계기를 구성하여 현세의 불완전성을 초월적 논리 틀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다. 유교에서 이러한 초월적 조정 놀리는 어디에 있는가? 유교는 이 문제를 두가지 축으로 풀었다. 첫째는 성인 군주라는 이념의 창출이고 둘째는 예의 강조다.” (김상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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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는 유교란 정치종교의 사제였다.”겉으로 보면 유교에는 정치권력으로부터 분리된 교회가 없고 타 종교에 비할 사제 신문이 없는 것같다. 그러나 유교의 그러한 특성들이 오히려 정치와 윤리(종교)간의 갈등을 유교정치 내부로 끌어들여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유교는 정치와 윤리 간의 갈등이 유독 강했던 특이한 정치종교였다. 유교정치에서 고도로 발전한 간쟁의 전통은 강력한 정치적 윤리종교로서의 유교의 특징을 잘 표현한다. 정치적 행위 자체 특히 군주에게 윤리적 이상을 간하는 정치 행위에 종교적 사명을 걸었던 종교는 유교가 유일하다. 죽음을 불사했던 유교 간쟁의 전통은 종교적 현상으로 다만 고도의 정치적 윤리종교로서 유교를 이해할 때만 설명될 수 있다. 유교에서는 유자가 타 종교의 사제 역할을 수행했다.” (김상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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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조선에서 그 사제 역할을 했던 선비에 대한 품인론이다. 선비를 평가하려면 그들이 목숨을 걸었던 그 신념체계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 그들의 신념인 유교는 당대의 보편적 세계관이기도 했으므로 선비를 평가할 때 적절한 기준이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비들의 성적표는 낙제라 저자는 말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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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를 국시로 내건 조선의 건국은 국가의 폭력, 전쟁과 착취를 뿌리뽑자는 이상에 따랐고 한국 최초의, 그리고 아마도 세계사에 유래가 드문 이념에 근거한 혁명이었다. 그 혁명은 유교의 말로 하자면 천하위공의 실현이 그 목적이었다. 그 혁명을 주도한 유학자들, “선비는 사회의 주도층으로서 그에 따른 책임의식을 느끼는 자들이며 그들의 최대 관심은 개인적 욕망을 이겨내고 자신과 타인이 다 함께 생을 실현할 수 있는 공동의 선인 공적 의로움 즉 공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선비의 모든 덕목은 공의, 즉 천하위공의 각론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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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의 실제는 어떠했을까? 그 선비들이 만든 조선은 차별의 나라(노비, 서얼, 여성), 특권층의 나라, (작당하는) 소인배의 나라, 가난한 나라, 사대주의의 나라, 허례허식의 나라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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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차별의 나라를 보자. 君君臣臣 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다워야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공자의 정명론이다. 유교에서 올바른 사회란 이름이 이름다운 것 즉 명과 분이 일치하는 명분론에 맞는 세상이다. 김시습의 말을 들어보자. “명분이란 사람에게 중대하다.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서 건곤이 정해졌고 (인간세상도) 높고 낮음이 펼쳐져 귀천의 위계가 정해졌다고 했다. 그러니 명분은 누구도 범할 수 없음을 이른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명이라 이르는가? 천자, 제후, 공경대부, 사, 서인이 그것이다. 무엇을 분이라 이르는가? 상하, 존비, 귀천이 그것이다. 이미 이름(명)과 구분이 있는데 또 그것을 예로써 절제함이 없으면 기강과 법도가 저절로 유지될 수 없으며 명분의 실상도 한갓 빈 그릇이 되어 다스릴 수 없다. 이로써 천자는 제후를 제어하고 제후는 공경대부를 제어하고 공경대부는 사와 서인을 다스린다.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을 부리고 천한 사람은 귀한 사람을 따른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은 마치 눈과 머리가 손발을 움직이는 것과 같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은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나무밑둥과 뿌리를 호위하는 것과 같다. 이런 후에야 상하가 서로 돕고 본말이 서로 지지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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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평등이란 가치를 들이대고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당시 세계의 현실에선 그리 이상할 것 없는 논리이다. 문제는 선비들의 나라 조선은 그 명분론 조차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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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정명론을 말했을 때 군과 부는 신과 자에 대해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신과 자가 떠받들 가치가 있을 때 그 상하관계는 명실상부하게 되며 이름에 걸맞는 관계가 된다. 그러면 선비들은 지배계급으로서 이름에 걸맞았는가? 저자는 아니라 말한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명분론이엇지만 그 명분은 자신들만을 위한 차별의 나라를 만드는데 악용되었을 뿐이라 저자는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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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말을 들어보자. “신이 엎드려 생각하니 인재를 얻기 어렵게 된지 오래입니다.. 온 나라의 영재를 다 모아 발탁해도 오히려 부족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영재의 8,9할을 버리다니요? 온 나라의 인민을 육성시켜도 오히려 인재가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운데 하물며 그 8,9할을 버리다니요? 상민이라고 버리고 중인이라서 버리고 평안도와 함경도라서 버리고 황해도와 개성과 강화도라서 버립니다. 강원도와 전라도에서도 절반을 버립니다. 서얼도 버립니다. 북인과 남인은 버리지 않는다지만 오히려 버리는 셈입니다. 버리지 않는 것은 벌열집안 수십뿐입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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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얼의 차별은 밥그릇 싸움과 관계가 있다. 유교의 본산인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서얼 차별은 원래 주자가례를 교조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에서 파생되었지만 끊임없는 서얼 허통 운동에도 불구하고 차별이 지속된 이유는 무엇일까? 당파싸움과 마찬가지로 결국 밥그릇 싸움이 아니었을까?<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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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노비는 조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까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조선 전체 인구의 30% 이상이 노비였다. 이런 특이한 노비제도와 너무 많은 노비인구는 같은 동아시아에서도 유독 조선에서만 나타난 기현상이엇다. 선비들은 노비제도의 유용성을 역설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정당화를 넘어 조선의 선비들은 노비 보유를 늘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노비 문제와 관련해 한국의 전통과 유교가치 사이에 충돌이 있을 경우에는 늘 노비 소유주의 입장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이 입장에선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농업만이 유일한 산업인 조선에서 토지와 노비만이 생산재였고 노비와 땅은 많을수록 좋았다. 그러면서 양반들은 ‘우리나라의 노비법이 비록 중국하고는 다르지만 예의와 염치를 중시하는 우리라나의 풍속은 사실 이 노비법 때문에 가능합니다’라고 합리화했다. 예의와 염치는 차치하고 노비제의 비인간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노비가 늘면 양반들은 좋을지 모르지만 국가의 재정은 파탄날 수 밖에 없다. “16세기에는 상민보다 노비가 더 많아지는 현상이 심해져 16세기 초부터 이미 조선 조정에서는 세금을 징수할 대상으로서 양인인구 곧 수세원을 심각하게 상실하기 시작햇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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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이 다 그렇듯이 양반도 세금을 내지 않았다. 세금이란 언제나 아랫것들이나 내는 것이니. 그런데 그런 무임승차는 대다수가 세금을 낼 때나 가능하다. 그러나 토지와 노동력이란 생산재를 축적하면서 양반들은 그 대다수를 소수로 만들었고 자신들의 무임승차 자체를 위태롭게 했다. 버티다 못한 국가가 양반도 세금 좀 내라면 양반 체통에 그런 것을 어떻게 하냐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고 별의 별 논리를 동원해 자신들의 무임승차를 정당화했다. 전형적인 기생귀족의 모습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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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위공이란 말의 어디에도 그런 정당화는 가능하지 않다. 결국 어느 종교의 사제들이든 부패해갔던 것처럼 양반들도 부패해갔을 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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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가 권력을 장악한 조선은 부유한 양반들에게는 병역 면제와 감세의 특권을 주고 가난한 농민과 천민에게 갖가지 의무를 지운 나라였다. 그럴지라도 외부로부터 경제적 잉여가 유입되는 경제구조라면 나라도 재정이 넉넉하고 민생도 안정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시종일관 국내에서 생산해 국내에서 소비하는 자급자족 국가였다. 이렇다 할 해외무역이 없는 탓에 물화의 입출입이 미미한 조선에서는 특권층 일부를 제외하고는 구조적으로 총체적 가난에 허덕일 수 밖에 없었다. 개항직전 청나라와 일본을 상대로 한 무역량은 청나라 상대로 약 300만원, 일본을 상대로 약 12만원 정도였는데 이 무역총액은 당시 조선의 국내총생산의 2%^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규모였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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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라는 파이 자체를 키우는 방향의 경제 관련 개혁안이 나오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저 하늘이 내려준 유한한 물산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의 문제가 조선시대 내내 조정에서 벌어진 경제관련 논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부에서 생산한 재화만으로 배분을 한다면 그것은 제로섬 게임일 수 밖에 없다. 누군가 이전보다 더 많은 배분을 받게 되었다면 그것은 누군가 그만큼 손해를 봐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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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보자.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와 저지른 패악은 왜군보다 더 심했다고 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 원인 중 하나는 당시 일본이든 중국이든 동남아이든 동아시아 어디서든 통용되는 은을 가지고 와도 조선에선 살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굶지 않으려면 약탈할 수 밖에.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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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전후의 일본만 보더라도 조선보다 더 부유했다. “1624년에 일본을 다녀온 강홍중 역시 에도에 이르는 거리 풍경의 묘사를 통해 국가의 경제력과 관련 인프라에서 이미 일본이 조선보다 크게 앞섰음을 글로 남겼다. 조선은 이미 17세기 초부터 동아시아에서 중국이나 일본과는 비교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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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한심한 상태를 내버려두었는가? 그 이유는 여러가이이겠지만 상업을 말리(末利)라 경멸한&nbsp; 유교의 이념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이유가 크다. 상업이 안된다면 “조선이라는 전체 파이를 어떻게 키울 수 있었을까? 민생을 책임져야 할 사대부라면 당연히 이런 고민을 했어야 마땅한데 조선의 사대부 선비들은 벌로 그렇지 않았다. 선비들이 권력을 독점한 예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조선의 경우가 유일한데 바로 그 조선이 가장 가난한 나라였으니 이게 우연일까? 특히 15세기까지만 해도 조선과 일본의 거리 풍경과 경제력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16세기를 지나면서 그 차이가 급격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16세기 후반은 이른바 사림 곧 선비들이 권력을 장악한 바로 그 시기였다. 이런 타이밍은 우연일까?”<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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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용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묻는 제자에게 공자는 먼저 부유하게 할 것이라 햇다. 그 다음 예를 가르칠 것이라 햇다. 배가 고픈데 예를 지키라 할 수 는 없기 때문이다. 재력가인 양반들이야 안빈낙도하는 시늉을 하고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곶간에서 인심난다. “가난하고 배고픈 백성들에게 밥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가난하고 배고픈 것을 감수하고 그저 예로서 참으라 할 뿐이었다. 맹자도 맹자 백성을 먼저 배불리 먹인 후에야 예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항산항심) 했음에도 말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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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의 치인(治人)은 낙제를 면치 못한다고 저자는 총평한다. 그럼 왜 이런 한심한 성적이 나왔을까? 중이 고기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국가의 지배계급들도 모두 양반들과 별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고 그들이 기생귀족이 되었을 때 그 국가와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은 거기서 한가지를 더 보아야 한다. 그들은 정치종교의 사제들이었다. 그들을 평가하고 그들을 이해하려면 종교적 측면도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선비들이 그렇게 추앙했던 조광조를 예로 들어보자.<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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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는 타고난 자질이 정말로 아름다웠으나 학문의 힘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시행한 바가 너무 지나쳤다. 그렇기 때문에 사업이 끝내 실패하고야 말았다. 만약 학문의 힘이 이미 갖추어지고 덕성의 도량이 완성된 뒤에 벼슬길에 나와 세상일을 맡았더라면 이룩한 바를 쉽게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nbsp;<br><br>퇴계의 조광조에 대한 평이다. 실제 조광조의 문제가 뭐였는지 에두르는 이 말만으로는 퇴계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퇴계가 지적한 것은 책상머리 관념론이었을 것이다. 조광조는 실제 그런 사람이엇다.&nbsp;<br><br>“중종 13년 '오랑캐의 수장인 속고내가 국경에서 가까운 곳으로 나와서 사냥중.' 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속고내는 원래 조선에 투항을 하였던 여진족 추장인데 그 뒤에 변심하여 갑산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당시 혼란을 틈타 다른 여진족 역시 공격에 가담해 변방이 어지러웠다. 보고를 들은 조정은 소수의 정예 병력으로 속고내를 잡아들이기로 결정했다.&nbsp;<br><br>그런데 당시 부제학이었던 조광조는 중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왕의 움직임은 신중해야 합니다. 반드시 이치에 맞은 뒤에 행동해야 합니다. 지금 속고내가 공격하려는 마음이 없고 다만 사냥하러 왔을 뿐인데, 기습하여 사로잡는단 말입니까? 도적처럼 행동하여 기습한다면 의리에 맞겠습니까? 속고내가 죄가 있다면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켜야 합니다.”&nbsp;<br><br>영의정 정광필이 조광조의 말은 유학의 도리에는 맞지만 변방의 일은 해결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조광조는 “군주가 오랑캐를 대하는 데는 변경을 충실하게 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여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고, 저들이 먼저 변경을 소란하게 하여 적이 우리에게 침범하면 부득이 대응하되, 서서히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본디 사리에 마땅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의 병력을 살피고 헤아려야 하며 가벼이 움직여서는 불가한데, 하물며 명분 없는 일까지 해야 합니까? 신은 변방의 일만 일으키고 국가의 체면만 크게 상하게 될까 염려됩니다.”&nbsp;<br><br>병조판서 유담년이 화가 나 중종에게 말했다. “ 밭을 가는 일은 남자 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를 짜는 일은 여자 종에게 물으라는 옛 말처럼 이번 일에는 소신의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중종은 훈구파를 무시하고 조광조의 사림파 편을 들어주었다.&nbsp;<br><br>그리고 중종 때 조선의 변방은 편할 날이 없어서 조정에서는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국경을 지키는 조선군은 번번이 패배하였고 중종 18년 여진정벌전을 계획하였으나 허공교전투에서 조선토벌군이 패배하였다.”&nbsp;<br style="mso-special-character: line-break"><br style="mso-special-character: line-break"><o:p></o:p>
조광조의 궤변은 성왕론이란 이론으로 보면 말이 된다. 공자가 모든 별들이 븍극성을 중심으로 도는 것처럼 왕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그의 덕이 높다면 저절로 정치는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가 그런가? 성왕론의 요점은 사실 그런 글자에 있지 않앗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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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임금이라는 교의에는 강한 역설이 배어 있다. 어떻게 권력투쟁의 중심에 서 있는 현세의 군주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성인일 수 잇는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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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 세존께서 조용히 명상하고 계실 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죽이지 않고 죽이게 하지 않고 승리하지 않고 승리하게 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슬퍼하게 하지 않고 법에 의해서 통치할 수는 없는가?’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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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악마가 이렇게 말했다 “존귀하신 분이여! 세존이 직접 통치하십시오.” (쌍윳타 니카야)<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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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와 비폭력은 붓다의 기본적 가르침이다. 성자의 길과 정치의 길은 언젠가는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 ‘죽이지 않고 죽이게 하지 않고 승리하지 않고 승리하게 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슬퍼하게 하지 않고 법에 의한 통치’는 붓다가 꿈꾼 이상적인 통치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인류의 비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제나 전쟁은 벌어지고 사람들은 고통을 받는다. 붓다는 이런 세상의 모습에 사무치게 슬퍼하였으리라. 그런 비장한 슬픔이 이 짧은 일화에서 전해진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을 정법으로 통치한다면 이런 비참한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붓다의 심중에 오갔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성자가 가는 길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 게다가 이런 장애물은 성자의 길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그러나 붓다는 이런 장애물을 넘어서 갔다. 정치의 길은 대체로 혼탁한 길이다. 붓다의 청정행과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었을 것이다. 붓다는 의연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나카무라 하지메)<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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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도 불가능한 길을 누가 갈 수 있을까? “성인이라면 현세의 권력관계를 초탈한 사람일 것이고 군주라면 현세의 권력관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유교의 예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른 방향과 바른 자세와 바른 순서에 따른 움직임, 우주의 숨결에 따른다는 순전히 자동적인 절문(節文)의 행위만으로 도대체 상쟁하는 폭력적 현실이 어떻게 다스려진다는 것일까? 이 질문 그리고 이 질문에 내포된 역설에 대한 숙고는 우리를 곧바로 유교의 핵심으로 끌어들인다. 모든 심원한 교의의 중심에 안티노미가 있듯 유교 교의의 중심 즉 성왕과 예의 이념에도 역설이 존재한다.” (김상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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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론의 근거는 요순우 3대이다. 유자들이 3대를 성스럽다고 했다. “그들에게서는 한 점의 분노도 한 점의 폭력도 한 점의 허영도 한 점의 증오도 없다. 그들은 한없이 선하고 한없이 부드럽고 한없이 검약하고 한없이 백성과 혈육을 사랑한다. 이것이 유교의 창건자들이 바라던 군주의 모습이다.” (김상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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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하다. 가능해도 효과는 없다. 정조의 한탄을 들어보자. “지금 나는 君師의 지위에 있으므로 사도(師道)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유학을 밝히고 세상에 가르침을 부식시키며 깨우치게 하고 이끌기를 부지런히 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습속은 점점 어그러지고 선비들의 기풍은 옛날만 못하며 크게 변화되어 가르침을 따르는 효과가 보이지 않는다.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결국 정조는 헛되이 과로사했다. 정조가 성왕이라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유교의 기준으로 근접했다고는 할 수 있다. 그런 정조도 성왕론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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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가능하지도 않고 효과도 없는 성왕론은 왜 유교의 중심에 버티고 있는가? 그것이 유교의 성(聖)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는 것이기에 의미가 있고 그렇기에 유교는 종교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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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론의 근거라는 3대는 사실 조작되었다. “한 흥미로운 연구는 시경, 서경, 춘추의 오리지널 텍스트가 현재 남아 있는 그것보다 훨씬 더 방대한 자료였고 이 오리지널 텍스트들은 원래는 결코 유교만의 경전이 아니라 다양한 학파들의 공동재산이었음을 설득력있게 입증했다.” 유자들은 “그것을 유교의 ‘윤리적 가르침의 시각에서 부적절하거나 불필요한 부분들을 잘라내고 버리고 지웠”다. 그 기준의 핵심은 “폭력의 탈색, 그리고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이 남게 된 폭력에 대한 정당화”(김상준)였다. 유자들은 역사를 술이부작해 성왕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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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공자의 데미안이었던 무왕이 은을 정벌할 때 기록은 유자들의 편집에는 이렇게 나온다. “은나라의 ‘앞의 변정들이 뒤로 돌아 달아나니 그 창끝이 뒤의 병사를 찔렀다. 피가 흘러 방패가 떠다닐 정도였다.’ 그 피는 폭군의 병사들이 달아나면서 서로 찔러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피는 성스럽고 정의로운 무왕과 그의 군사의 창에 찔려 흘러나온 것이 아니었다! 강처럼 흐른 피를 닦아내는데 텍스트의 저술자들이 겪었을 당혹감”(김상준)을 짐작할 수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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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른 학파들의 저술에 남은 단편들로 미뤄보면 실제 역사는 유가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판이하다. ‘시자’가 전하는 무왕을 보자. ‘무왕은 친히 주왕의 간신인 악래의 입에 활을 쏘았고 또 친히 주왕의 목을 칼로 쳐 손을 피로 적셨고 그 피를 벌컥대며 마셨다(또는 그 살점을 생으로 먹었다) 그 순간 무왕은 한 마리 맹수와 같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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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팩트가 아니었다. 그들은 폭력이 범람하던 그들의 현재와 긴장을 일으킬 기준점이 필요했다. 그들은 천국을 역사 속에 창조했다. “이 긴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부당하고 잘못된 현실에 대한 ‘초월적 조정 논리’를 만들기 위해 유자들의 초월적 조정 기관은 “이 세계 밖의 어떤 곳이 아니라 요순우탕이 살았던 바로 이 세계내에 존재하며 요순우탕의 그 완벽한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유교에서 예란 성왕들이 세상을 다스렸던 행이 양식을 말한다. 예란 우주의 질서 또는 도의 무의의 결에 맞게(節文) 행위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예란 이 불완전환 세계의 배경에서 항상 살아 실현되는 우주의 올바른 질서에 자신과 나라를 맞추어 나가는 행위양식이다. 유교에는 현세와 내세라는 구분은 없었지만 불의가 존재하는 무질서의 우주와 어떤 불의도 존재하지 않는 질서의 우주라는 ‘두개의 우주, 두개의 현세’가 병존했다. 두개의, 그러나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 줄로 연결된 우주, 유교에서의 윤리적 긴장은 이 두개의 우주 사이에서 발생한다.” 유자들의 성왕론은, “그들의 군주를 성왕에 가깝게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엄숙하고 신성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이행하는 일은 현실과 당위 사이의 끝없는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다.” (김상준)<o:p></o:p>
<br>“뭐 좀 안다는 놈들이 세상을 위한다며 나서지 못하게 하라.” 노자의 말이다. 조광조의 학문은 뛰어날지 모르지만 조광조는 군사문제에 괘변을 늘어놓기에는 전략적 식견이 모자랐다. 그는 성(당위)을 속(현실)과 구분해 읽지 못했다. 그가 꿈꾸었던 이상인 왕도정치도 그러했다. 그는 성과 속이 만날 때의 긴장을 읽지 못했고 그 긴장의 전위차에서 일어나는 스파크를 보지 못했다. 그가 그 스파크에 타죽은 것은 당연하다. <br><br>퇴계가 조광조를 평하면서 하고 싶었던 말하려던 것은 조광조는 스승이 없이 혼자 책만 보다 망했다는 것이다. 유교는, 주자학은 책을 통해 수입되었다. 그러나 장자가 말했듯 책이란 성인의 똥찌꺼기일 뿐이다. 그 책에서 읽어야 할 것은 글자가 아니라 행간이다. 행간을 읽는데는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전통을 따라 내려온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face to face로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은 그런 스승이 없었다. 스승이 없이 종이 위의 까만 것만 읽었을 때 그것은 근본주의가 된다. 무슬림들처럼.<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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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무슬림에게 아랍어는 제2언어이지 모국어가 아니다. 모국어는 언제나 실제 삶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모국어가 아닌 아랍어란 ‘신성한 언어’는 현실에서 분리될 수 밖에 없다. 아랍어를 제2언어로 하는 무슬림은 ‘땅에 발을 딛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현실과는 무관한, 언어로만 구축된 텅 빈 허공을 떠도는 추상적인 사고의 지배를 받게 된다. 우리에게는 발을 딛고 설 땅이 있어야 한다. 모든 의미는 그 땅 위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무슬림들의 종교는 그렇게 될 수 없기에 관념적인 극단주의가 피어났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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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가 아닌 한문으로 생각해야 했던 선비들 역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의 관념적 근본주의의 예로 저자는 사대주의를 든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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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까지만 해도 조선 사대부의 명나라 인식은 현실적이자 조건부였다. 명나라와 관련해 어떤 결정을 내릴 때에는 항상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익 여부를 조목조목 따지고 나서 이익이 있다고 판단이 될 때에만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사림들, 선비들이 집권한 후 사대주의는 관념론이 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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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임진왜란 때 자발적으로 분연히 떨쳐 일어난 의병 활동을 조국과 민족을 위한 행동으로 받아들인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선 사회에서는 의를 위해 일어난 의병을 난신적자를 처단하기 위해 일어난 무리로 정의했는데 난신적자란 바로 尊尊의 의리를 저버리고 (명나라) 천자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국시로 삼아 출범한 조선왕조에서 춘추의 의리는 곧 천자가 주재하는 천하질서에 순복하는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임란때 의병은 중국 천자를 위해 일어난 것이지 조선의 왕을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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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을 치기 위한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거부하려는 광해군에게 비변사 당상관들이 ‘차라리 전하게 죄를 범할지언전 천자에게는 죄를 범할 수 없다’는 말을 버젓이”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청나라에 끌려가 죽은 3학사는 “불사이군’을 외치다 죽었는데 여기서 군은 조선왕이 아니라 명나라 천자였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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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논리상으로는 조선 선비들의 생각이 맞다.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은 것은 중국의 천자이고 조선의 왕은 그 천자에게서 인정을 받았을 뿐이지 천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면 논리상으로는 의의 대상은 조선 왕이 아니라 중국의 천자가 되어야 한다. 후금군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척화파들이 나라가 망할지언정 의리를 저버릴수는 없다고 말한 논리는 그런 것이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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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의리의 대상이 중국천자였던 예는 조선이 유일하다. 중국에 조공을 바쳤던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그런 예는 없었다. 조공을 받는 중국도 조공을 바치는 명목상의 제후국도 그 관계를 명실상부한 실제로 보지는 않았다. 오직 조선만 말과 현실을 혼동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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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치기 근본주의자들이 만든 나라 조선, 그 나라가 차별의 나라, 특권층의 나라, (작당하는) 소인배의 나라, 가난한 나라, 사대주의의 나라, 허례허식의 나라가 된 것도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을까?<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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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417/5/cover150/8993119376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119376</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이론과 실천 -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328744</link><pubDate>Tue, 03 Jan 2012 21: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32874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0138021&TPaperId=5328744"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358/20/coveroff/897013802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0138021&TPaperId=532874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a><br/>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1년 10월<br/></td></tr></table><br/>‘예술에 관한 한 자명한 것은 없다는 것이 자명하게 되었다’ 아도르노의 ‘미학이론’ 첫머리이다. 서문도 없는 이책의 처음은 미학의 대상이 모호하게 되었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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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it goes without saying that nothing concerning art goes without saying, much less without thinking. Everything about art has become problematic: its inner life, its relation to society, even it sright to exist.”<o:p></o:p>
<o:p>&nbsp;</o:p>
그게 뭐가 문제인가? 딱 보면 아는 그런 예술이란 나이브할 뿐이다. 그런 예술을 잃어버린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그 대신 무한한 가능성을 얻지 않았는가? 얼핏 옳게 들린다. 20세기의 예술은 그 어느 시대에도 가능하지 않았던 다양성을 자랑하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험해왔다. 실험의 한계는 생각의 한계일 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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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럴까? 아도르노는 이렇게 반박한다. “What looked at first like an expansion of art turned out to be its contraction. The great expanse of the unforeseen which revolutionary artistic movements began to explore around 1910 did not live up to the promise of happiness and adventure it had held out. What has happened instead is that the process begun at that time came to corrode the very same categories which were its own reason for being.”<o:p></o:p>
<o:p>&nbsp;</o:p>
다양성은 예술의 자율성 때문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 다양성은 자유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사회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이 문제였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예술은 청중 또는 관객을 전제로 했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술은 더 이상 청중(또는 관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타자를 전제로 하는 예술은 대중예술이라 불린다.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차이는 타자로부터의 자유이다. <o:p></o:p>
<o:p>&nbsp;</o:p>
자유를 얻은 예술을 난해해진 동시에 무가치해졌다. 자유로워지면서 즉 사회와의 관계가 문제가 되면서 예술은 이해받을 필요가 없어졌고 도대체 왜 있어야 하는지, 타자에게 자신의 존재할 이유를 주장할 근거도 없어졌다. <o:p></o:p>
<o:p>&nbsp;</o:p>
난해함이란 자유의 선언이다. 나는 너에게 이해를 구할 이유가 없다는 선언이다. 난해함은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20세기 예술은 대중을 잃었기에 예술되었지만 예술이 되면서 그 존재이유를 잃어버렸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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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존재이유를 잃어버린 것처럼 맑스주의도 대중을 잃어버리면서 존재이유를 잃어버렸다: “맑스주의 이론은 대중의 혁명운동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경우라야 비로소 그에 적합한 지평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대중 혁명운동이 존재하지 않거나 좌절당하면 맑스주의 이론 역시 어쩔 수 없이 기형적이 되거나 퇴화한다.” NLR 편집장이었던 페리 앤더슨의 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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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더슨의 ‘서구 맑스주의 연구’란 책은 왜 이렇게 서구 맑스주의는 난해하게 되었는가란 질문에서 시작한다. 색깔이야 어쨌든 맑스는 사회과학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다. 그 아버지들 중 맑스는 특별하다. 그의 색깔이 아니라 문체에서. ‘그렇다고? 어디 그말이 맞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러 이러 하게 되는데 결론은 이렇게 되지 않는가?’ 맑스의 논쟁 스타일은 상대의 주장을 일단 받아들이고 그 주장에 따라 논의를 확장한다. 그리고 그 논리의 확장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가를 보여조는 식이다. 그 결론은 논쟁의 상대방도 웃게 만든다. 맑스의 문장은 읽는 재미가 있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알기쉬움은 서구 맑스주의에선 사라졌다. 앤더슨은 그 이유를 독자의 상실에서 찾는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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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이론이나 정치이론에서 서구 맑스주의가 쌓은 지적 업적은 사실상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경제와 정치 어느 분야이든 중요한 저작이 출판되지 않았다.” 서구 맑스주의의 무게 중심은 “철학으로 근본적인 이동”했다. 루카치로부터 알뛰세까지, 코르쉬에서 콜레티에 이르는 전체 맑스주의 전통에서 가장 놀랄만한 사실은 그 전통 내에 전문적인 철학자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는 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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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 살아있던 1차대전이전 “제2인터내셔널 시기에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는 닫ㅇ에 참여하지는 않으면서 대학에서 사회주의를 떠드는 ‘교수 사회주의자’ 즉 ‘강단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경멸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들은 이론과 실천을 정치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대학에 자리잡는 것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차대전 이후 맑스주의이론은 전적으로 대학에 들어가버리고 말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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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에서 대학으로의 후퇴, 왜 후퇴했는가? 그 이유를 앤더슨은 레닌의 말을 빌려 정리한다. “올바른 혁명이론은 진정한 대중 그리고 진정한 혁명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을 때라야 비로소 최종적인 모습을 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맑스주의 이론의 진보는 그 시대가 처한 물질적 생산조건-그 시대의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적 실천-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앤더슨은 말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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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맑스주의의 난해함 다시 말하자면 그 불모성은 혁명운동의 소멸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왜 혁명운동이 소멸되었는가? 이책의 저자는 맑스주의의 지적 파산 때문이엇다고 말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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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1권이 나오고 독일 사민당이 창당될 무렵만 해도 사회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의 종말은 기정사실로 보엿다. 당시는 대공황의 시기였고 그것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장기불황이었다. 당시 영국인들은 ‘It’s hard time’이란 말을 인사말처럼 썼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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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그랬기에 “1890년대 초 맑스주의자들은 대략 10년 안에 자본주의가 붕괴할 가능성이 높아고 생각했다. 이렇게 10년 정도의 비교적 잛은 기간이라면 맑스주의 정당의 임무는 예견된 그날을 준비하며 노동자들을 조직화해 대비시키는 것”일 뿐이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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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날은 오지 않았다. 1890년대 자본주의는 기사회생했다. 대공황의 원인은 1970년대 세계자본주의가 그랬듯이 이윤율저하경향이 문제엿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신을 재창조해냈고 부활에 성공햇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맑스주의자들의 대응은 초기기독교도들과 비슷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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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기독교도들은 정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날은 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그날을 미래로 미뤘다. 맑스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말로 올지 안 올지도 알 수 없는 그날을 막연히 준비하면서 하고한 날 맑스 책 세미나나 하는 집단이 종교집단이지 정당인가? 그럴 수는 없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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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반응은 맑스주의 역사에서 악명 높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엿다. “당시 독일 사민당은 입으로는 ‘임박한 혁명의 그날’을 이야기하면서 일상에선 그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상에서의 소박한 정치활동을 할 뿐이엇다. 막상 투쟁목표로 내건 것을 보면 기껏해야 일반적 참정권의 보장, 8시간 노동제, 언론, 출판의 자유, 지방자치권 등 김빠지는 것들이다. 이런 ‘일반적인 민주주의’의 요구들이 도대체 거창한 사회주의 세계관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무 해명이 없다. 베른슈타인은 당의 이론과 실천의 어처구니없는 괴리를 지적하면서 이제 공염불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린 ‘혁명주의’의 수사학을 걷어치우고 의회에서 다수석 점유를 통한 현실적인 권력 장악과 현실개혁에 집중하자고 호소한다. 그의 논점은 ‘자본주의의 운동에 대한 맑스주의의 예언이 현실을 빗나갔다’는 것이었다. 맑스주의 경제학은 더 이상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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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슈타인은 당시 유럽 사회주의정당의 현실을 공식화한 것에 불과했다. 사회주의정당에서 ‘혁명’은 수사에 불과햇다. 저자는 볼세비즘, 사회민주주의 역시 맑스주의의 지적 파산에 대한 대응이었고 베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수정주의였다고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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맔스주의의 지적파산에 대해 지적으로(맔스주의식으로 말하면 ‘과학적’으로)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한 것은 레닌이엇다. 그의 제국주의론은 왜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았는가를 설명해내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역사가 보듯 볼세비즘은 실패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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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주의 역시 실패였다. 1차대전 후 영국의 노동당,독일의 사민당 등 각국에선 좌파정당들이 집권당이 된다. 그러나 이들은 우왕좌왕했을 뿐이다. 방향을 알려주던 교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교조를 버리지도 못하고 교조를 대신할 무엇을 찾지도 못한 가운데 오로지 일상의 정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공허한 혁명이란 수사대신) 윤리적 이상의 차원을 강조하고 이것으로 사회를 설득해야 한다는 필요성만을 강조할 뿐, 윤리적 이상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상을 사회 전체에 설득하는 구체적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운동이 힘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니 혁명이란 공허한 수사를 놓을 수는 없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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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조없는 실천과 실천없는 교조가 결합된 기묘한 꼴”당시 상황을 정리한 말이다(‘정치가 우선한다’) “이렇게 이론과 실천이 괴리하고 당의 이념적 지향과 현실적 정체성이 뒤죽박죽으로 모순된 상황에서는 국민 전체는 고사하고 노동자들이라도 이끌 수 있는 강력한 지도력이 나올 턱이 없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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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당시 유럽 사회주의를 ‘무능’이란 한마디로 정리한다. 맑스를 대신 할 이론도 변해버린 상황에 맞는 실천도 실패한 말 그대로 맑스주의의 파산이엇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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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수정주의 중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로 비그포르스의 사민당을 말한다. 흔히 그렇듯 진정한 혁신은 변방에서 일어났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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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의, 좌파의 지적 파산에 대한 비그포르스의 혁신은 두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베른슈타인이 주장하듯 정당으로서 좌파정당의 힘은 도덕적 이상에서 나오고 그 이상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좌파정당이 할 일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내용에 대해 베른슈타인은 분명하지 않았다. 비그포르스는 그에 대해 분명했다. “사회민주주의가 내걸어야 할 윤리적 이상은 추상적이고 애매한 ‘상식’이 아니라 바로 노동계급의 삶의 현실 속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윤리적 이상을 온 사회가 받아들이도록 하는 과정이 바로 노동운동이며 사민주의운동이다.” 좌파정당도 현실의 정당이며 현실의 정치를 해야한다. 현실의 정당으로서 현실의 정치로서 구체성을 말한 것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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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그포르스는 이상 역시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비그포르스는 “사민당이 노동자들과 온 사회성원 들 앞에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사회의 모습을 제시해야 한다고 믿었다. 베른슈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맑스주의의 유토피아를 부정한 베른슈타인은 ‘사민주의 운동에 목표 따위는 없으며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끊임없는 운동뿐’이란 입장었다. 그러나 비그포르스에게 사민주의 운동은 노동자가 처한 사회경제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그들이 마음 속에서 간절히 열망하는 윤리적 이상을 추출해 모든 사회성원의 동의를 얻은 가운데 그러한 윤리적 이상을 담은 사회의 모습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최대한 총체적으로 만들어 제출하는 것이다. 그 모습이 궁극적인 유토피아는 아닐지라도 노동운동과 사민주의가 주어진 현 상황에서 실현해내고자 하는 ‘잠정적 유토피아’는 될 수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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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혁신인가? 비그포르스가 본 것은 생산의 주체이면서 그 대접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의 현실이엇다. “노동자들은 도처에서 정신적, 육체적 궁핍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 차별과 경멸을 받았으며 생산현장에서는 그저 자본가와 경영자의 명령에 따라 수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존재로서 다루어진다.” 비그포르스는 그런 현실에 대해 산업민주화를 말한다. 이전까지는 산업국유화가 좌파의 구호였지만 1차대전의 국가통제경제는 국유화가 대안으로서 끔찍하다는 실증이 되었다. 더군다나 맑스주의의 지적 파산은 국유화에 대한 지적 정당화 자체를 흔들어 놓았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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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스웨덴 사민당에선 당시 이론적 혁신이 있었다. “자본주의에서 소유권이란 사실 그다지 관계가 없는 혹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이런저런 권리들의 다발에 불과하다. 자본가가 기업에 대해 갖는 소유권 안에는 이윤을 챙길 권리, 경영자를 선임할 권리, 기업의 전략과 운영방침을 결정할 권리, 노동자를 고용, 해고할 권리, 가격을 결정할 권리 등 수많은 권리가 들어있다. 이 많은 권리의 다발인 소유권을 ‘사회가 일거에 빼앗아 온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 사회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별쭝난 인격체이기에 어느날 갑자기 이 권리들을 일사분란하게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사민당의 소유권 개념에 대한 혁신은 “스웨덴 사민당이 좀더 현실적이면서 구체적인 사회민주주의적 경제 형태를 착상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소유권 다발을 조금씩 하나하나씩 제한하고 빼앗아 오면서 “경제와 사회에 대한 자본 권력의 전횡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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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권 개념의 혁신은 비그포르스의 산업민주주의와 함께 이후 스웨덴 사민당의 방향을 결정한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얼마든지 유토피아는 가능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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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그포르스의 산업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면서 노동자들이 생산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임노동의 폐지가 아니다. “그의 산업민주주의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사가 협조하면서 노동이 경영에 참여하는 공동결정의 구상에 가깝다.” 산업구조를 바꾸면 “노동자를 차별하는 온갖 사회제도도 사라지게 된다. 노동자를 사회의 가장 소중한 생산의 주체로서 대접하는 공동체가 회복되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평등한 사회성원으로 통합될 것이다.” 산업민주주의 덕분에 “스웨덴 사민당은 추상적 이론과 공상적 유토피아에 기대지 않고도 자신들이 지향하는 사민주의 경제의 모습을 제시할 수 있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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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그포르스의 산업민주주의가 등장하고 현실정치에서 힘을 얻은 것은 대공황 덕분이엇다. 비그포르스는 산업민주주의를, 사민주의의의 이념을 ‘나라살림의 계획”이라 불렀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변함없지만 그 방향은 착취와 같은 자본주의의 비도덕성이 아니라 나라 살림과 산업 전체를 효율적으로 조직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비효율성에 맞춰졌다. 그러자 사민당의 이데올로기적 딜레마도 풀렸다. 이러한 방향 전환 덕에 당이 이제까지의 무능력과 무정책의 한계를 벗어나 나라 살림과 산업 전체의 효율적 조직이라는 목표에 맞추어 다양한 정책을 만들어낼 있었다. 이제 사민당은 예전의 사민당이 아니었다. (1932년) 선거에서 정교한 경제이론의 논리와 구체적이고 명확한 정책했으며 그 내용은 특정 집단이나 이념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당시 대다수 사람들이 가장 절실히 원하는 바람에 정확히 부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민당 당원들의 운동은 신바람이 났고 곳곳에서 돌풍이 일어났다. 이후 1976년까지 44년이나 이어진 사민당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다.”<o:p></o:p>
&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358/20/cover150/8970138021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0138021</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우리는 아직도 ‘극동’에 사는가? - [맹자의 땀 성왕의 피 - 중층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302552</link><pubDate>Sat, 24 Dec 2011 22: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30255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332073&TPaperId=530255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260/17/coveroff/895733207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332073&TPaperId=530255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맹자의 땀 성왕의 피 - 중층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a><br/>김상준 지음 / 아카넷 / 2011년 07월<br/></td></tr></table><br/>‘세계 속의 한국’많이 들어본 말이고 많이 해온 말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했을까? 지금도 그렇지는 않겠지만 지난 한 세기 그말을 할 때 우리는 한 없이 작아졌다. 세계의 변방에 불과한, 별볼일 없는 나라. 세계지도를 펴놓으면 한 없이 작아질 뿐인 나라. 스스로는 호랑이라 우기지만 사실은 겁많고 별볼일 없는 토끼일 뿐이라 속으로 되뇌이던 나라.세계 속의 한국을 정의하던 감정은 열등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지도의 중심은 태평양이 아니라 대서양이었으니까.<!--?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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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운데에 태평양이 그려진 세계지도를 보고 자랐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을 가본 사람은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보는 세계지도는 영국 그리니치가 중앙에 온다. 세계의 중심은 대서양이다. 그런 지도에서 한국은 ‘쉬렉’의 대사처럼 far far far away (‘겁나 먼’이라 번역되었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far east 어디에 처박힌 변방이라 부르기도 힘든 나라일 뿐이다. 그들로서야 당연한 지도이고 당연한 생각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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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끼는 것은 우리 스스로 그들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야 우리는 far east에 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왜 그말을 그대로 번역해 극동이라 말했는가? 그들이 세계의 중심이라 인정하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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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기가 바뀌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초가집도 없애고~~’ 과거는 부정하고 잊어야 할 무엇일 뿐이었다. 단군 이래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자던 새마을운동은 우리의 과거를 청산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새마을운동 전까지만 해도 농촌에서 풍물놀이를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그런 전통문화가 많이 살아남아 있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은 그런 과거를 부정하고 경멸하며 없어져야 할 것으로 규정했다. 사라진 것은 초가집만이 아니라 초가집에 살던 문화도 함께였다. 그때 없어진 것이 식민지 시절 없어진 것을 월등히 넘어선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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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더 이상 우리는 과거는 부정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시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이제는 떳떳하게 세계 속의 한국을 외치고 나아가 한국 속의 세계를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자신감을 보이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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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대 전만 해도 ‘Japan as No.1’이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세계제일은 커녕 세계의 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이지만 흔히 비전의 상실을 말한다. No.1이란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따라가지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다 따라잡고(catching up) 나니 방향을 잃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 비전을 잃어버렸기에 잃어버린 10년이 20년이 되고 어쩌면 30년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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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성장동력이 바닥났다, 경제시스템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10년을 허송세월했다. 흔히 하는 말이다. 이유는 여러가지이겠지만 일본처럼 비전의 상실이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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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이상 서쪽을 보아봤자 무엇을 할 것인가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답을 찾을 때이다. 이책의 저자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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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었던가? 오직 동아시아만이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따라갈 길이 남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근대화(솔직치는 서구화)의 길은 사실 우리에게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13세기 중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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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의 핵심어인 근대란 개념은 거의 베버의 정의를 따른다. 베버에 따르면 근대성은 합리성이며 근대화는 합리화의 과정이다. 베버가 여기서 말하는 합리화의 내용은 보통 도구적 합리성으로 이해된다. “한 마디로 집약하면 전 사회의 합리화이고 그 기본축은 1. 합리적 자본주의, 2. 합리적 법-행정체계 3. 합리적 사회분화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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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에 따르면 그러한 합리화는 ‘서구, 오직 서구에서만(in the West, in the West only)’만 일어났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자는 합리화의 과정으로서 근대화를 도구적 합리성이 관철되는 과정으로만 보지 않는다. 저자는 근대성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도구적 합리성과 가치 합리성, 베버의 두가지 합리성 모두가 필요하다고 본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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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도구적 합리성으로만 보더라도 근대화 과정은 ‘서구, 오직 서구에서만’ 일어난 것도 아니고 서구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다. 서구에서 근대화가 일어난 것은 먼저 송제국에서 일어난 합리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서구는 후발자의 이점을 이용하여 다른 문명의 근대적 요소를 빠르게 흡수하였고 특정한 역사적 국면(여기서 저자는 ‘리오리엔트’에서 프랭크가 지적한 시점을 염두에 두는 것같다)을 이용하여 특정한 역사적 국면을 이용해 본격근대로 진입하는 계기를 앞서 포착하였을 뿐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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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본격근대(High Modernity)은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였다. 그러나 근대성의 시작은 서구가 아닌 13세기 중국이었다. 이 시기를 본격근대가 시동하는 장기16세기와 대비해 초기근대(early modernities)가 시동한 장기12세기라 부른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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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근대의 최초 표출양상은 서유럽이 아니라 중국 송원 연간의 사회경제적, 정치문화적 전개 양상에서 풍부하게 발견된다. 그 특징은 정대주의적 통치권의 확립과 비판적 권위를 확보한 학인-관료집단의 형성,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농촌수공업의 성장, 수력양수기, 수력풀무, 대형방적기 등의 기계발명과 코크스 (강철) 제련 등 철강 부문에서의 혁신 등에서 보이는 다양한 기술혁명과 초기공업화, 도시, 교통, 화폐 및 무역 영역의 인프라 발전이다. 그 기반은 송대에 이루어졌고 몽골제국은 그 성취를 흡수하여 당시로는 가공할 수준의 전쟁, 행정, 건설, 교역 역량을 갖춘 세계체제를 구축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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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제국과 함께 처음으로 실제적인 세계화가 시작된다. “’긴 16세기’의 결과 팍스 브리태니카와 팍스 아메리카나가 출현했다면 유라시아의 ‘긴 12세기의 결과는 몽골세계제국, 즉 팍스 몽골리카였다. 유럽의 긴 16세기가 그렇듯 송원 연간의 긴 12세기 역시 세계적인 변화의 시대였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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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브리태니카와 팍스 아메리카나가 본격근대를 전 세계로 확장했듯이 팍스 몽골리카 역시 송조에서 시작된 초기근대를 전세계로 확장했고 그 바탕 위에서 장기 16세기가 가능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팍스 아메리카나와 팍스 몽골리카는 분명 닮아있다. 몽골 전통의 초원의 군사력에 유라시아 세계 최대 ‘중화의 경제력’을 합체시키고 게다가 종래부터 몽골과 공생에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무슬림의 상업권을 전면적으로 활용한 경제 지배하는 신방식이었다. 현대풍으로 말을 바꾸면 쿠빌라이의 신국가는 군사 초대국이며 경제 초대국임과 동시에 초대형의 통상입국이 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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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근대만 폭력으로 세계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 초기근대 역시 폭력으로 세계화되었다. 그러나 서구의 세계화가 그랬듯이 팍스 몽골리카 역시 하드웨어만 강했던 것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역시 강했기에 가능했다. 그 소프트웨어는 송조에서 시작된 근대성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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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 초기근대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장기 12세기와 장기 16세기의 결과인 세계화는 베버의 도구적 합리성 개념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 12세기가 왜 시작되었는가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장기 12세기를 설명하기 위해선 근대성이란 개념을 재정의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베버를 깨기 위해선 다시 베버로 돌아가야 한다. Return to Weber!<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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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지금까지 베버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고 본다. 베버 이론체계가 해결하려는 모순을 파악한 경우가 드물다고 저자는 본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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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Z 이론에 따르면 혁신은 모순의 극복이다. 예를 들어보자. 90년대초 까지만 해도 하드 디스크의 용량은 80MB가 최대였다. 어느 업체에서 “200MB를 상용화하겠다고 했다. 3-4개월이 지난 후 연구원은 열심히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기록용량을 올리려면 기록이 정확해지지 않는다. 데이터 저장 시 에러가 너무 많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에러를 줄여 기록의 정확성을 높이면 용량이 작아진다. 그래서 하드디스크의 헤드부분의 길이를 조절하거나 하드디스크의 기록 플래터 모양을 최적화 하는 등 각 부분의 개선과 최적화로 목표를 달성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그해 8월 “IBM 왓슨 연구소에서 획기적인 하드디스크 저장 원리를 개발하여 년말까지 1GB 하드디스크 양산이 가능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다음 날 연구원은 인터넷에 발표된 IBM의 새로운 저장방식을 이해할 수있었다. IBM의 방식은 정확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저장용량을 10GB까지 늘릴 수 있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이후 이 방식은 업계의 표준이 되었고 수많은 업체들이 로열티를 주고 그 방식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구원은 이렇게 되뇌었다. ‘이렇게 간단한데 왜 이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김효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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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의 방식은 플래터를 여러장 쓴다는 아주 간단한 방식이었다. 그러면 용량과 정확성의 기술적 ‘모순’은 간단하게 해결된다. 모순을 해결한 IBM의 방식이 업계 표준(dominant design)이 되었듯이 학계의 표준(dominant design) 역시 모순과 관련이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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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론은 공학과는 다르다. 공학의 현장이 모순의 해결이라면 이론은 모순의 파악과 관련이 있다. 현실의 근본 모순이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것이 이론이다. 그 모순이 근본적이고 화해불가능할수록 이론의 힘은 강력하다. 저자는 베버의 이론체계 역시 모순과의 대결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모순이 무엇이엇는지 베버의 사후 잊혀졌다고 저자는 본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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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의 사회적 행위이론의 핵심은 행위 동기의 이원성, 그 이원성의 화해불가능한 대립성을 강조한 점에 있다. 그 대립이란 행위의 수단합리적 성격과 가치합리적 성격 간의 대립이며 물질적 이해와 이념적 이해 간의 대립이다. 이러한 행위 동기의 적대적 이원성에 관한 이론은 베버 사회이론의 또 다른 특징인 정치와 윤리 간의 영원한 갈등이라는 문제의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베버에게 물질적 이해(또는 수단합리성)와 이념적 히애(또는 가치합리성)는 근본적으로 화해불가능한 동기이다. 그 근원에서 볼 때 전자는 현세적 이해추구인 반면, 후자는 구원의 이해, 즉 피안적 이해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전자는 경제-정치 영역과 후자는 종교-윤리 영역과 관렫된다. 이 양 가치의 대립이 화해부가능한 이유는 종교-윤리적 정의는 현세 존재 자체의 부정의한 성격과 근본적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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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의 모순은 물론 베버가 발견한 것은 아니다. 이성과 오성을 분리한 칸트의 발견이었다. 칸트에게 도덕은 현실에서 발견될 수 없다. 그것은 이성에 의해 요청되어야 한다. “베버의 이념적 이해 개념은 칸트가 말한 도덕적 이해관심 또는 실천이성의 진정한 동기에 준하는 개념이다. 칸트는 정념의 경향성과 무관한 요청인 도덕성이 또 하나의 이해관심과 옹기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철학적으로 풀이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주학의 理나 性 개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유학을 풍미했던 理氣論을 베버의 ‘전철수(switchman)’ 이론이나 칸트의 도덕동기론으로 풀이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왜 윤리적 요구인 理가 현세적 인과고리의 논리인 氣의 형상을 빌려 또는 기를 타고(乘) 나타나는가에 있었다. 칸트 역시 욕구능력이 감각에 의존하는 ‘경향성’의 원환에 갇힌 인간존재에게 도덕적 동기가 ‘경향성’으로 드러나는 난제를 풀기 위해 고심했다. 칸트에게 도덕동기란 기를 탄 이와 다르지 않다. 이와 기, 성과 속, 양자는 항상 얽혀 있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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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라면 떠오르는 말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일 것이다. 베버의 이론체계에서 그책은 종교사회학이란 거대한 프라젝트의 작은 사례연구일 뿐이었다. “베버 종교사회학의 주제는 다양한 가치합리성의 존재양식에 관한 분석이다.” 이는 기의 세계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기의 초월이기 때문이다. 기 즉 속, 또는 차안에 대해 이 즉 성은 피안이다. 베버는 성이 어떻게 속의 세계에서 태어날 수 있었는가를 파고들었고 속의 세계, 차안에서 태어난 피안, 성의 세계를 세계윤리종교라 불렀다. “세계윤리종교의 탄생과 함께 의식과 제도의 차원에서 세계성과 초월성이 출현하고 그 결과 현존 질서가 최초로 의문에 부쳐졌다. 이러한 점들은 세계윤리종교의 공통된 특징이다.” 야스퍼스가 말한 ‘축의 시대’는 베버의 종교사회학 연구에 기초한다. 저자는 축의 시대에 근대성의 원형이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근대는 성과 속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가의 문제라 말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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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축의 시대를 성이 속을 통섭(encompass)하는 세계로의의 전환이라 요약한다. “통섭이란 원리에 의한 통괄적 포섭을 의미한다. “유럽 중세 카톨릭의 교황정치, 유교의 성인 정치, 불교의 전륜성왕정치, 힌두교의 브라만-푸로히다 정치, 이슬람의 이맘-울라마 정치는 역사적으로 각각 다르게 현상하지만 성이 속을 통섭했다는 구조에 있어서는 상동이다. 성이 속을 통섭하는 세계질서의 기원은 막스 베버가 말하는 고대 ‘세계윤리종교’의 출현과 맞물린다. 세계윤리종교의 탄생과 함께 의식과 제도의 차원에서 세계성과 초월성이 출현하고 그 결과 현존질서가 최초로 의문에 부쳐졌다. 이러한 점들은 세계윤리종교의 공통된 특징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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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때 처음 종교가 출현한 것도 성이 탄생한 것도 아니다. 보편종교는 성의 위기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독교 에덴동산이나 노자의 소국과민은 모두 고대도시, 고대국가가 출현하기 이전의 상황을 말한다. 도시와 국가는 예나 지금이나 고도의 인위와 작위의 산물이다. 착취와 전쟁이 체계화, 대규모화한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방법론들이 고도화된다. 고대과학, 고대재정, 고대행정, 고대병참의 술과 학이 발전한다. 이러한 연상은 인류역사상 최초의 세속화라 불러야 마땅하다. 마술적 힘으로 가득한 신화적 세계 인식에 균열이 생기고 세속적 힘과 이해관계, 욕망의 계량학과 함수관계가 새로운 군주로 등극하기 때문이다. 기축시대를 전후했던 상황은 근대가 출현했던 상황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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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을 위기로 인식한 결과가 보편윤리, 세계종교엿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초월의 탄생이란 점에서 이 시기를 원형근대성이 태어난 시기라 말한다. 세속화, 즉 근대는 (내용은 다를지라도) 보편성의 합리화, 즉 기를 초월한 이가 기를 압도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들어 기든스는 근대성의 본질을 구체성을 탈피한 추상체계의 운동으로 본다. 그가 근대성의 핵심으로 보는 시공간 거리화는 power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disembedding되는 abstraction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시공간 거리화로 나타나는 권력은 구체적 氣의 세계에서 추상된 理로서, 초월로서 작동한다. 기로부터 독립한 이의 발견이 있었기에 가능한 과정이다. “근대성이 해방시킨 과학기술과 물질적 생산력은 애초에 혁명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역시 현재에 없는 현재를 보는 비전과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는 돌파가 없다면 불가능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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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고대 윤리종교에서 읽어낸 근대의 원형은 초월이다. 그리고 축의 시대에 탄생한 초월 즉 성의 본질은 폭력이 촉발한 윤리의식이엇다. “야스퍼스는 이 시기에 인류가 최초로 윤리적 감각을 갖게 된 것으로 본다. 여기서 말하는 윤리란 주어진 현세의 현상과 힘 자체를 회의하고 초월하는 반성력이다(기든스는 reflecxivity를 근대성의 핵심으로 본다). 이러한 윤리적 각성은 현세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이러한 각성 이후에는 현세적 사실과 윤리적 초월 간에 팽팽한 긴장이 발생한다.” 칸트가 말했듯이 윤리는 현실에서 주어지 않는다. 윤리는 현실을 초월한다. 저자가 말하는 근대의“원형이란 눈 앞의 주어진 시공 안의 현실과 ‘시간 밖의 시간’, ‘공간 밖의 공간’에서 오는 이념 사이의 윤리적 긴장관계였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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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를 유교답게 하는 근본적 안티노미는 “폭력과 성스러움의 화해할 수 없는 긴장”이었고 그 긴장의 집약은 ‘성왕론’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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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임금의 교의 즉 성왕론은 유교이념의 핵심일 뿐 아니라 유교정치체제의 근간이다. 유교의 예란 이러한 이념과 체제를 작동시키는 행동원리다. 성스러운 임금이라는 교의에는 강한 역설이 배어 있다. 어떻게 권력투쟁의 중심에 서 있는 현세의 군주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성인일 수있는가?” 성왕론은 성과 속의 긴장이며 나쁘게 말해 반사실적인 픽션일 수 밖에 없다. 성왕론의 근거 자체가 픽션이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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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론의 근거는 요순이다. “서경의 요임금 묘사에서 우리는 전쟁, 질투, 패륜, 음모, 갈등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한 점 폭력의 티끌조차 존재하지 않는 션세의 군주에 대한 묘사는 참으로 전례를 찾기 어렵다. 유교적 안티노미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 모아진다. 요순이 성스러운 이유는 신화적 영웅들의 성스러움과 정반대의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한없이 선하고 한없이 부드럽고 한없이 검약하고 한없이 백성과 혈육을 사랑한다. 이것이 유교의 창건자들이 바라던 군주의 모습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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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폭력의 흔적을 유자들이 제거한 결과일 뿐 실제 역사는 어디서나 그랬듯 폭력의 역사였다. 고대국가가 성립하던 시절 중국 역시 다른 문명권과 마찬가지로 영웅시대였고(영웅시대에 대해선 ‘축의 시대’ 리뷰 참조) 전쟁귀족의 시대였다. “회남자에서 요임금의 모습은 무인 군주에 가깝다. 여씨춘추에는 요임금의 모습은 여러 종족들 간의 치열한 투쟁의 존재와 이 투쟁에서의 최종적 승자로서 나타나고 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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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론의 요순은 조작된 이미지이다. “유교의 창건자들은 ‘폭력에 대한 윤리적 혐오감’이라는 전혀 새로운 감성을 중국 문명에 최초로 이념적으로 체계화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념은 현실에 없었다. 과거에도 없었다. “공자는 요순을 주자는 공맹을 보았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아브라함을 보았고 루터와 칼뱅은 다시 구약의 예언자들을 보았다. 인도의 개혁 사상가들은 늘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로 돌아갔다. 그들은 현재에 없는 현재., 즉 미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현재에 업는 것이므로 과거를 빌려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현재에 없는 현재를 보았던 까닭은 그들이 살고 잇는 현재가 너무나 많은 부조리와 폭력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에 없는 현재를 보는 그들의 비전은 현존하는 시공의 인과 안에서는 탄생할 수 없다. 현실 질서의 인과의 밖, 시간의 밖의 시간의 차원이 없다면 인류문명의 결정적인 톨파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이념의 탄생이야말로 윤리적 각성, 초월적 긴장의 탄생을 말해준다. 무엇인가 부당하고 잘못되었다는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면 초월적 계기가 싹트고 있는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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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윤리종교들은 성과 속의 대립 위에 태어났다: “불의가 존재하는 무질서의 우주와 어떤 불의도 존재하지 않는 질서의 우주” 그러나 유교는 특이하게도 그 성과 속이 모두 현세에 있다. 다른 종교들이 내세적 초월주의였다면 현세적 초월주의인 유교는 정치종교였다. “유학자들은 정치현실을 떠날 수 없다. 그들의 성인 군주는 하늘이 아닌 현실에 있었던 것으로 상정되어 있고 그들이 살아가는 당대의 현실군주의 모습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성왕응ㄴ 비현ㅅ길이자 당위적 현실이다. 그들의 군주를 성왕에 가깝게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엄숙하고 신성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이행하는 일은 현실과 당위 사이의 끝없는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다.” 그 긴장의 핵심은 “왕권의 폭력성과 비도덕성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였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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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메버의 말마따나 “모든 국가의 본질은 ‘폭력의 합법적 독점’에 있다. 더 줄여 이야기하면 국가문제의 핵심은 폭력이다. 유교 성왕론 안에는 ‘국가에 대항하는 국가’라는 유토피아적 신화가 감추어져 있다. 유교는 국가폭력의 주인인 현실 군주를 절대적으로 평화로운 ‘무결점의 요순 임금’이라는 신화로 꽁꽁 묶었다. 유교의 국가 이념이 잇다면 그것은 폭력 없는 구가다. 폭력 없는 국가체제, 그리고 국가간 체제가 가능한가? 그것은 이미 국가 너머의 국가요 국가 간 체제일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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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교회가 그랬고 유교가 성왕론으로 그랬듯이 현실을 초월한 성의 이름으로 속을 컨트롤한 시기를 저자는 통섭 I의 시대라 부른다. “통섭 I의 세계에서는 성의 영역이 물적 현상계를 물샐틈없이 감싸면서 통섭하고 경고하고 계도하고 잇다고 믿었다. 물적 현상계는 그를 통섭하는 성의 영역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단계에서 성과 속은 비록 분별되지만 같은 거소, 같은 시공을 나누어 쓰고 있었다. 물론 성의 압도적 위에서였다. 그래서 높은 곳, 하늘의 공간적 이미지가 어느 문명에서나 중요한 역할을 햇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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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우리가 말하는 근대성은 통섭I의 세계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축의 시대와 함께 인류는 고등문명의 세계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근대성의 세계를 통섭II의 질서라 부른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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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I의 질서는 막대한 긴장을 수반했다. 그 진장의 근본적 원천은 베버가 통찰했던 바와 같이 현세적 질서가 초월적 질서에 의해 상대화되었기 때문이다. 즉 성속 통섭의 틀 자체가 강한 긴장의 원천이 되엇다. 그 긴장의 내가 결과 통섭II의 질서가 출현했다. 베버의 종교사회학과 역사사회학은 그러한 통섭관계에서 비롯한 역사적 제도적 긴장응ㄹ 강조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유럽에서 발생한 통섭 전환(통섭I에서 통섭II로의 역적)에 대한 하나의 뛰어난 사례분석이다. 통섭전환의 예는 유럽의 종교개혁이다. 중세 카톨릭 교황정치는 성이 속을 통섭하는 전근대 모럴폴리틱의 유럽적 표현형태였다. 개신교는 현세의 질서 자체를 신성화한 중세 카톨릭 교리에 반발했다. 예정설은 현세 인과의 의미를 종교적으로 중립화했다. 그 결과 신성함의 근거는 내면화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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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그러한 통섭전환이 중국에선 장기12세기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송원연간에 관찰되는 초기근대의 증거들은 이 시기가 한당으로 이어졌던 중구의 고대제국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었던 시기였다는 점에 있다.” 위진남북조와 5대10국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세습귀족체제는 무너지고 사대부 계층이 등장한다. “성의 구현이었던 황실, 조정의 질서는 더 이상 절대적인 신성함의 지위를 독점하지 못한다. 조정만이 아닌 재야가 공의 영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공 개념의 함의 자체가 현실 체제의 황통의 정당성을 초월하는 보다 높은 수준의 보편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여기서 하버마스가 말했던 부르주아 공론장의 유교적 표현 형태를 읽을 수 잇다. 아니 근대적 公觀은 중국에서 일찍이 선취되었다” 공권력을 분점하던 귀족의 몰락하면서 “송 이래 중국에서 성립한 절대주의적 황권이란 바로 이러한 황제 아래 전 인민의 평등(月印千江 萬川明月)이라는 새로운 신분적 상황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 절대주의란 16세기경 유럽에 등장하는 절대주의 체제와 비견된다. 근대주권의 초기 형태 역시 동아시아에서 선행하고 있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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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은 이런 시대의 이념이었다. 주자학의 이기론은 이와 기를 나눈다는 점에서 새로웠다. “한당 시기까지 중국적 사유에서 이 양자는 뚜렷이 구분되지 않았다. 세계는 天(유교), 眞(불교) 道(도교)의 신성함 속에 잠겨 있었다. 즉 성이 속을 통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정주학에서 세계는 기로 이루어지고 기에서 理가 분리된다. 정주학에서 이는 내면화된 윤리 개념이다. 이제 이는 기의 바다 속에서 힘써 탐구하여 찾아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제 자연과 사회질서가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으로 표상되지 않고 그 곳에서 작동되어야 할 이의 원리가 발견되고 구성되어야 한다.” 종교개혁 이후 신이 인간의 내면으로 숨었듯이(Hidden God) 이는 기의 바다에 숨어 버렸다. 숨은 신이 찾아야 할 대상이듯 이는 기의 바다에서 찾아내야 할 대상이 되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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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근대는 어느날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니다. 장기12세기의 오랜 결과가 누적된 것이었다. “이슬람과 당 제국이 흥기했던 7,8세기는 주요 문명권을 연결하는 세계교역망이 사상 최초로 전면화된 시기다. 광대한 이슬람권의 형성으로 중국과의 교역통로가 안정되었고 동남아의 번영으로 바닷길 무역로 역시 안정되었다. 송대의 도약은 당대에 형성된 세계교역망의 임팩트에서 탄생한 것이다. 당시 세계화의 네트웤에서 당제국은 7세기 이후 번성했던 이슬람 제국과 함께 당대에 가장 거대했을 뿐 아니라 잘 조직되고 효율적인 정치체였고 대외문명교류에도 열린 태도와 자신감으로 적극적이엇다. 당시로는 최상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구비하고 있었다. 그 결과 세계 도처의 최선의 주요 문명적 문화적 자양분들이 국제적 네트웤의 여러 매듭들을 따라 그 핵심 허브인 중국으로 모여들 수 있었고 그것이 송대에 집중적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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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자양분이 뿌려진 토양이 귀족이 몰락한 신분적 상황이었기 송대의 초기근대혁명이 가능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황제 아래 모두 평등한 상황은 “사회적 잠재력의 해방”을 불렀고 “이러한 변화는 후일 유럽의 15-16세기 초기근대와” 유사했다. 이 시대의 이념이었던 주자학은 대원제국이 과거의 필수과목으로 만들었다. 보편성을 갖춘 세계제국으로서 초기근대라는 시대에 맞는 주자학의 보편성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nbsp;<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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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구치 선생은 북송 시대 정명도의 天卽理라는 언명의 혁명성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하늘(과 우주)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초월적이거나 혹은 알 수 없는 힘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신의 이성으로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이는 ‘이성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사건’이라 했다.” 천즉리 이전 중국의 세계관인 “‘주재자적인, 운명론적인 하늘에서 법칙적인 하늘로의 변화였다. 송대 이전 고대의 중국인은 하늘을 도(天卽道)라고 생각했고 ‘그 도를 주재자적인 그래서 만물의 밖에 있는 초월적 실체로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은 각각 초월적인 그 도에 운명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고’고 한다. 반면 정명도의 천즉리는 ‘인간세계의 일을 포함한 우주자연의 현상이 어떤 법칙성 가운데 있고 그 법칙성은 인간의 이성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보는 새로운 우주자연관이다’라고 풀이했다. 정주학은 기즉 속 우선의 교의였다. 따라서 정주학이 최초로 정립한 이기론은 통섭I이 아니라 통섭II와 원리가 같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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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주자학의 천즉리 또는 이기론이 태어나기까지의 배경을 이렇게 정리한다. “통섭II의 질서란 일종의 세속ㅎ솨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세속화한 통섭I의 질서가 뿌리에서부터 크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중국의 경우에는 앞서 설명했던 유라시아의 세계화 상황이 그런 것이었다. 당연히 믿어왔던 신성한 질서의 체계가 흔들리고 이내 거침없이 무너져갔다. 이미 남북조시대에 천즉도의 확고한 믿음은 조금씩 다른 형태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무정부주의와 쾌락주의, 허무주의가 만연했다. 천은 다만 물질적 세계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일 뿐이라는 사상도확산되었다 여기서 속을 물샐틈없이 통섭하던 성의 질서에 균열이 가고 이어 조각나기 시작한다. 속의 세계가 성의 통제를 벗어나 꿈틀러기고 올라온다. 이러한 혼란과 방황의 이행기에 다른 문명의 종교와 문화가 홍수처럼 밀려든다. 夷狄은 군주가 되고 세상은 蠻戎의 가르침을 따른다. 이러한 상황인식에서 정주학은 정초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명은 조각나 흩어진 성의 체계를 다시 이어 보다 견고한 형태로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과업이엇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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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저자가 이책에서 말하고 하는 근대성의 재정의를 살펴보았다. 이후에도 저자는 유교적 근대성의 완성형으로서 조선후기의 유교정치를 자세하게 분석한다. 그러나 이책의 기본적인 요점은 이상에서 제시되었다고 보므로 여기서 줄일까 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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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책은 올해 읽었던 책중에서 최고의 책이었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의미있게 보았던 프랭크, 아리기, 암스트롱 등의 논의를 종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틀로 마감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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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260/17/cover150/8957332073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332073</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도깨비를 찾아서 - [물리학의 최전선 - 지구의 극한으로 떠나는 실험 물리학 여행]</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259582</link><pubDate>Tue, 06 Dec 2011 09: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25958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624191&TPaperId=525958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352/11/coveroff/895862419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624191&TPaperId=525958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물리학의 최전선 - 지구의 극한으로 떠나는 실험 물리학 여행</a><br/>아닐 아난타스와미 지음, 김연중 옮김 / 휴먼사이언스 / 2011년 10월<br/></td></tr></table><br/>개인적으로 이책을 논평할 입장은 아니다. 이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책은 물리학의 첨단에 대해서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첨단이라는 것이 물리학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한 것이니 물리학 전공도 아니고 물리학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평가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하기야 그것이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조지와 그레이시는 기나긴 우주여행을 끝내고 드디어 지구로 귀환하여 오랜만에 휴식을 즐겼다. 이들은 술집에서 만나 우주여행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지구의 포근함을 한껏 누릴 수 잇었다.조지는 바텐더에세 자신이 늘 마시건 파파야주스를 달라고 하면서 그레이시를 위해 토닉워터를 탄 보드카를 추가로 주문했다. 그런데 조지가 막 시가를 한 모금 빨아들이던 순간, 시가가 갑자기 사라졌다! 어디서도 시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조지를 보고 놀란 그레이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랬더니 조지가 앉아 있던 의자 뒤편의 카운터에 문제의 시가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시가가 대체 왜 저지기 있지? 내 뒷머리를 뚫고 지나간 건가? 그러나 뒤통수에 구멍은 없었다. 

조지는 유리잔에 담겨나온 파파야주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거기에 떠 있는 얼음조각들이 마구 출렁대면서 서로 정신없이 부딪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레이시의 보드카 잔에 있는 얼음조각들은 더 격렬하게 난리를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벌어진 일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둘이 잔을 바라보는 사이에 얼음조각 하나가 유리잔의 옆면을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졋다. 유리잔은 멀쩡했다. 

조지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우주공간에 너무 오래 있었나봐. 이런 말도 안되는 환상이 보이다니…” 그들은 술집을 나왔다. 그런데 그들이 술집에서 나올 때 통과한 문은 사실 진짜 문이 아니라 견고한 벽에 문처럼 그려놓은 그림이었다.”(브라이언 그린) 

이 해괴한 풍경은 양자역학이 연구하는 소립자의 세계를 의인화한 것이다. 에너지이면 물질이기도 한 소립자 세계에선 순간이동을 하거나 벽을 뚫고 지나가는 일은 일상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인만은 이렇게 말햇다. “상대성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12명뿐이라는 기사가 뉴스로 보도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그 보도가 사실과 다르다고 믿는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논문을 세상에 발표하기 전에 그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단 한 명뿐어었던 시절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논문이 공개되고 난 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상대성이론을 이해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12명은 분명 과소평가된 수치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나는 현재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잇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자신 잇게 말할 수 있다.” 

파인만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당연함은 이책이 소개하는 세계에선 더하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물리학의 표준이 된 이후 물리학의 과제는 두 표준이론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지금까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책이 다루는 것은 그 두 이론의 통합이란 물리학의 화두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양자역학의 해괴한 세계가 우주론의 규모로 확대된 세계이다. 

초끈이론은 그 해괴한 우주를 설명하는 유력한 후보 중 하나이다. 그러나 많은 물리학자들이 불평하듯이 초끈이론은 실험으로 증명되지 않고 있다. 초끈이론은 우주의 통합이론이 되려는 야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끈 이론이 원하던 대단원은 그 기미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부 물리학자들의 경우 점점 우주의 모든 것을 몇 개의 방정식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있다. 끈 이론 자체는 실험적으로 증명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많은 물리학자들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진지하게 끈 이론의 효과를 고려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쓸 결심을 한 것은 학회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이런 말을 했을 때였다.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현재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끈 이론입니다. 끈 이론으로 관측 가능한 과학을 만들 수 있을까요? 오직 실험만이 이 막다른 골목을 뚫고 나갈 것입니다.”

현재 물리학의 현실을 저자는 이렇게 요약한다. “이론 물리학자들은 현재 무제한의 자유가 허락된 상태다. 아이디어는 넘쳐나고 어림짐작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다.” 물리학이 활력에 넘치던 시절, 멀리 갈 것도 없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태어난 시절에는 이렇지 않았다. “물리학의 위대한 발전은 이론이 실험과 보조를 맞췄을 때 이뤄졌다. 때로 이론이 먼저 나오기도 했고 때로는 그 반대이기도 했다. 실험 물리학자들과 이론 물리학자들은 190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양자역학을 만들어 가면서 서로 경쟁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이론과 실험이 공동연구를 펼쳤던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두 분야 모두에 풍요로운 때였다. 그러나 활기찼던 이 상호작용은 현재 고착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론과 실험이 따로 노는 현재에서 저자가 이책에서 물으려는 것은 이것이다. “우주론과 입자 물리학의 다음 세대 실험이 이론을 현실에 정박시킬 수 있을까? 이책은 그 답을 얻기 위한 도전이다.” 

저자는 그 답을 얻기 위해 실험물리학의 최전선을 찾아 세계 곳곳을 누빈다. 이책은 저자가 지구의 북극에서 남극까지 찾아다니며 확인한 실험물리학의 현재를 기록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책의 저자가 찾아다니며 기록한 것은 현재 물리학에서 해결하려는 문제들을 알고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저자가 어떤 답을 찾으려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기에 이책은 물리학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단순한 기행문에 불과하게 된다. 물론 이책은 남극점의 절대적 고요와 바이칼호의 겨울, 폐광의 절대적 어두움, 사막의 적막함 같은 장소들에 관한 훌륭한 기행문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책이 전제하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책을 따라 읽는 것 자체가 힘들다. 최소한 앞에서 인용한 브라이언 그린의 책 두권 정도는 읽었다면 어느 정도 이책을 따라 읽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가 던지는 그리고 저자가 찾아가는 장소에서 만나는 실험물리학자들이 왜 그런 오지의 난관을 이기고 그런 실험을 하려는지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책은 권할만한 책은 아니다.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352/11/cover150/8958624191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624191</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난세의 철학 - [나는 장자다 - 왕멍, 장자와 즐기다]</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195119</link><pubDate>Mon, 07 Nov 2011 15: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19511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5279820&TPaperId=5195119"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331/25/coveroff/897527982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5279820&TPaperId=519511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는 장자다 - 왕멍, 장자와 즐기다</a><br/>왕멍 지음, 허유영 옮김 / 들녘(코기토) / 2011년 10월<br/></td></tr></table><br/>이책은 장자 내편에 대한 주석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주석서와는 다른 구성을 보인다. 이 책의 구성은 장자 본문을 따라가면서 본문에 대한 코멘트를 더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그 코멘트는 김용옥을 떠올릴 정도로 상당히 장황하다. 김용옥을 닮은 것은 양만이 아니다. 내용도 그렇다. 표지를 보면 ‘왕멍, 장자와 즐기다’란 말이 있는데 광고문구로 적당히 붙인 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 저자는 장자라는 책을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자라는 저자를 읽어내려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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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에 성립된 주석서들은 자신의 의견을 자제하고 문구 자체의 의미를 밝히는 형식을 취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석은 자구 대 자구로 본문이 한줄이면 그 아래 두줄로 축자적으로 붙이는 형식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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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자는 책 자체의 글자 하나 하나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자신이 장자라는 책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 대만이나 본토에서 나온 책들을 보면 본문이 있고 그 다음에 백화 번역이 달린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냥 본문을 달아놓고 번역을 하는 대신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엄청난 의역을 한다. 그리고 나서 엄청난 길이로 ‘설’을 늘어놓는다. 게다가 본문을 전부 싣지도 않고 자신의 ‘설’로 연결이 되면 본문을 생략하기 까지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장자라는 책 자체보다는 왜 장자가 이런 말을 했는가를 묻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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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형식이다. 분명 이책의 체제는 내편 6편의 주석 형식이다. 그러나 그 형식과는 달리 이 책의 내용은 장자라는 책에 대한 전반적인 입문서에 가깝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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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자가 읽어낸 장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저자가 읽어낸 장자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이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것은 루루티아(ルルティア)의 음악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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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음악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면 아마도 일렉트로니카의 등장이 아닐까 싶다. 일렉트로니카는 신디사이저가 보급된 1970년대에 성립했다. 지금은 공기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간단하게 키보드라 불리는 신디사이저는 음악에 혁명을 일으킨다. 구체적으로는 바로크 음악의 부활이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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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라 하면 구체적으로 하이든 이후의 고전파를 말한다. 고전파 이후의 음악은 고전파에 의해 정립된 작곡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고전파 이전의 바로크 음악과 고전파 음악은 사운드 레이어의 구성법이 달랐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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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의 사운드 레이어는 4개로 이루어진다: 리드, 백그라운드, 레퍼런스, 패턴. 밴드 구성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리드는 멜로디 레이어로 보컬이나 기타 등의 멜로디 악기를 말한다. 백그라운드는 리드 레이어의 화음을 연주하는 레이어로 역시 기타나 피아노 등의 화음악기와 백코러스를 말한다. 레퍼런스는 토닉과 기준이 되는 레퍼런스 화음의 레이어로 베이스 기타를 말한다. 패턴은 드럼이나 신디사이저로 어택감이나 공간묘사를 담당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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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파 음악에선 리드 레이어를 중심으로 일치된 진행을 만든다. 그러나 바로크 음악에선 4개의 레이어가 서로 독립된 진행라인을 갖는다. 그런 진행을 대위법이라 한다. 댄스뮤직으로 출발한 일렉트로니카는 바로크적 진행을 부활시킨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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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홀에선 화음진행이 아니라 리듬이 중요하며 대위법적 진행이 더 어울린다. 결국 일렉트로니카에선 레퍼런스와 패턴 레이어의 진행을 음악의 중심으로 삼아 분위기와 리듬감을 강조하게 된다. 4개의 레이어가 일치된 협화음적 진행이 아닌 대위법적 진행을 갖는 바로크적 논리는 80년대 드림 팝, 노이즈 팝 90년대 트립합, 고딕 메탈의 혁신을 일으켰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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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디 진행과 독립된 대위법적 진행으로 모호해진 공간과 사운드 윤곽은 불안정한 느낌을 만들어 앰비언트와 같이 꿈꾸는 듯한 느낌을 연출하거나 스칸디나비아 메탈처럼 슬픔, 분노 등 부정적 정서의 배경을 만드는데 적합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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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루루티아의 음악를 '환상적이다' '신비감과 광기가 느껴진다'고 한다. 이런 인상은 바로크적 논리의 연출효과이다. 루루티아 음악의 의미는 곡의 분위기가 만드는 이미지이다. 루루티아의 음악에서 우선되는 것은 사운드가 만드는 '분위기'이며 분위기는 레이어의 대위법적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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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로크적 논리의 문제는 멜로디 라인이 거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댄스뮤직이면 모를까 아시아에선, 거의 멜로디만 듣는 아시아인들에겐 그런 음악은 호소력이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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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루티아 음악의 특징은 바로 바로크와 고전파의 절충이다. 보컬이 아예 없거나 존재감이 약한 앰비언트나 스칸디나비아 메탈과 달리 보컬의 존재감이 강하고 멜로디가 아름다운 루루티아 음악의 정서는 보컬과 하위 레이어의 긴장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루루티아 음악의 매력 역시 그 긴장관계에서 나온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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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가 아닌 보컬로서의 루루티아는 특이하다. 그녀는 숨을 내쉬고 바로 삼키듯, 맑고 가는 달콤한 음색으로 언제나 소곤거린다. 웅얼거리듯 소곤거리는 것은 지금, 여기의 사건보다는 여기가 아닌 과거에 일어난 일을 회상하는데 적합하며 자기주장이 약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사라져간 것에 대한 아픔과 슬픔이며 깨질 것 같은 덧없는 아름다움이다. 그녀 음악의 신비감은 이러한 보컬의 정서에 하위 레이어의 윤곽이 불분명한 텍스쳐가 대비되어 만들어진 효과이다. 그러나 바로크적 텍스쳐가 만드는 분위기에 멜로디 라인의 통일성이 더해져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은 그녀가 원용한 앰비언트나 스칸디나비아 메탈에선 보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그 통일감은 환상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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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루티아 음악의 정서와 사운드는 스칸디나비아 메탈에 가깝다. 시끄럽다는 말이다. 메탈의 정서가 그렇듯 루루티아 음악의 배경은 탐욕과 위선, 광기, 잔인한 폭력의 세계이며 그런 세계에 대한 분노, 슬픔, 절망, 좌절을 표현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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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과 백그라운드 레이어는 세계에 대한 정서를 멜로디로 표현하고 부정적 세계는 레퍼런스와 패턴 레이어의 어두운 노이즈로 표현한다. 루루티아 음악의 의미는 레이어의 긴장관계에서 만들어진다. 문제는 세계에 대한 정서를 표현하는 멜로디 레이어, 즉 보컬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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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루티아는 속삭인다. 보통 팝에서 whisper라 말하는 것으로 보사 노바에 잘 어울리지만 하위 레이어가 두껍고 시끄러운 메탈에선 묻혀버리는 목소리이다.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해법은 프로듀싱이다. 바로크적 텍스쳐에 묻히지 않게 편집한다는 말이다. 라이브로 들을 수는 없는 음악, 그것이 루루티아의 음악이며 루루티아의 음악이 환상인 이유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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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장자의 세계가 그와 같은 환상이라 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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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첫편은 소요유이다. 논어의 학이편 1장이 그렇듯 중국 고전에서 처음에 오는 장은 그 책 전체를 규정한다. “장자가 주는 첫인상은 ‘소요’라는 두 글자로 함축할 수 있다. 장자는 일생동안 줄곧 소요에 이르는 길, 즉 인간 내면의 초탈과 해방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소요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정신 상태이자 개인이 사회와 집단의 관념적 구속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내면 정신세계의 자유와 독립을 의미한다. 이것은 근현대에 서양에서 들어온 개인주의 관념과는 차이가 있다. 후자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중국의 소요는 사회와 집단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가치판단에 대한 주관적인 해방 또는 일시적인 망각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주관적인’ 해방과 ‘일시적인’ 망각이 장자가 지금까지 읽혀온 이유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해방과 망각은 아Q정신과 닮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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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실패할 때도 있고, 패배할 때도 있기 마련이다. 이유 없이 구박을 당하고 모욕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중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루쉰(魯迅)의 소설 『아Q정전』에 나오는 주인공 아Q는 그런 상황에서 매우 독특하게 대처한다. 시골에서 날품을 파는 아Q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주 멸시당하고 이유 없이 맞기도 한다. 현실에서 그는 늘 패배자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당한 멸시와 패배를 아주 간단한 방법을 통해 승리로 바꾸어 버리고, 마음의 평정을 회복한다. 아Q가 애용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하나는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이유 없이 자신을 때린 사람보다 자기가 훨씬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자신처럼 지체 놓은 사람이 하찮은 인간들을 상대해 무엇 하겠느냐고 생각한다. 무서워서 상대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생각하고는 자신의 패배와 굴욕을 잊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앞의 방법과 반대로 자신을 완전히 낮추는 방법이다. 자신은 형편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모욕을 당하거나 그런 패배를 당할 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Q가 애용하는 세 번째 방법은 자신이 당한 패배와 모욕을 자기보다 약하고 못한 존재에게 전가시키는 방법이다. 강자에게 뺨 맞고 약자에게 분풀이 하는 것이다. <br />
소설에서 아Q가 늘 얻어맞고 모욕을 당하면서도 늘 즐겁고 낙천적인 것은 이처럼 현실의 패배와 굴욕을 그 나름의 조작법을 통해 정신적인 승리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Q는 늘 패배하지만 늘 승리자이다.” (이욱연)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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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어렵다. 그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배운 사람 그것도 엄청나게 배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2천년이 넘도록 읽혀온 이유는 장자가 정신승리법을 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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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선 한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사람들, 특히 글 읽는 지식인들은 장자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거대함과 웅대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승리법의 최고봉이 아닌가. 정신적인 승리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이렇게 확실하고 영원한 승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춘추전국시대부터 그들은 세상에 나아가 쓰이지 못하면 한평생 허송세월하고 어저다 운이 좋아 높은 벼슬에 앉는다 해도 느닷없이 재앙이 닥쳐 하루아핌에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곤 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여러 차례 남에게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큰 뜻은 품었으나 재주가 변변찮고 운이 없는 탓에 가난과 실의에 빠져 시름겨운 한세상을 살다 가기도 했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온전히 정신적이고 완벽하게 무조건적인 승리조차 얻을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장자가 기재이고 독특한 논리로 훌륭한 글을 썼다 해도 그의 글을 읽다보면 ‘아Q 정신’이 응집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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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울 것은 없는 말이다. 중국혁명 직후 장자는 철저하게 부정당했다. 중체서용이니 떠들며 너희가 힘은 셀지 몰라도 우리는 정신적으로 더 고귀하는 식으로 현실의 패배, 정신의 승리를 말하며 중국을 말아먹은 아큐정신의 궁극이라는 논리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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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까지 그런 논리가 살아남지는 않았다. 눈 감고 아옹하는 아Q가 되기에 장자는 지나치게 똑똑한 사람이었고 현실을 비참할 정도로 철저하게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면 장자가 보았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는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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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담의 제자 백구가 제나라에 도착하자 형벌을 받아 기시된 시체를 보았다. 시체를 밀어 바로 누이고 조복을 벗어 덮어주엇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곡하며 말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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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대여! 천하에는 피살자가 많은데 그대가 먼저 당했구려! 말끝마다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하지만 영욕으로 핍박하니 이런 병통이 나타났고 재화가 한곳으로 모이니 이런 쟁투가 나타났다. 지금은 사람을 몰아 세워 병들게 하고 사람을 모아 싸우게 하고 사람의 몸을 곤궁하게 하여 한시도 쉬지 못하게 하니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재물을 위해 간계를 부리고 지혜롭지 못하면 어리석다 하고 어려운 일을 시키고 감내하지 못하면 죄를 주고 무거운 임무를 맡기고 다하지 못하면 벌을 주고 먼 길을 가게 하고 이르지 못하면 죽인다. 그러므로 부득이 민(民)은 지혜와 힘을 다해 꾀로 죄를 모면하려 한다. 무릇 힘이 부치면 꾀를 쓰고 지혜가 부족하면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 도둑이 횡행하는 것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옳은가?” (장자 잡편 칙양)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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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상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제자백가 모두가 물었던 질문이다. 제자백가의 아버지라 해야 할 공자는 성인의 질서로 돌아가자(복례 復禮)를 말하면 지배층의 질서를 바로잡아 천하를 바로잡으려 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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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논어 미자편의 5장에서 7장까지 나오는 은자들은 공자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탁한 물이 도처에 도도하게 범람하는데 누가 바꿀 수 있겠는가? 그대는 나쁜 사람을 피하는 사람을 따르는 것보다 세상을 피하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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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하려고 하는’ 사람이란 은자들의 조롱에 대해 공자는 이렇게 자신을 변호햇다. “벼슬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어른과 어린이의 질서를 폐기할 수 없는데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어떻게 폐기할 수 있겠는가? 자기 한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중요한 사회관계를 파괴한 것이다. 군자가 벼슬하는 것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 도의가 행해질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다.” (리쩌허우의 해석)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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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은자들의 차이는 세상이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엿다. “새나 짐승과 함께 살 수 없지 않느냐? 사람의 무리가 아니면 누구와 함께 하겠느냐? 천하가 태평하다면 내가 바꾸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신념을 지키기 위해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의지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에서 공자 자신이 항상 말한 사람에 대한 사랑 또는 사람다움이란 뜻인 인(仁)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나 은자들은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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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사회의 근간인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주와 신하는 오늘날 상급자와 하급자라는 직무상의 관계이고 그 원칙은 의(義), 즉 공평하고 정직하며 공적인 일을 받들고 법을 지키며 편을 들어 사사로움을 도모하지 않으며 윗사람을 속이거나 아랫사람을 억누르지 안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구별이 있다는 것은 가정 중심의 가치관이다. 사랑에 그치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서 피차에 언제나 돕고 이끌어주며 관용하고 양해하며 어른을 높이고 어린이를 어루만져주는 것” (리쩌허우) 공자가 하려한 것은 그런 당연한 도리가 천하에 행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자와 그를 조롱한 은자들이 살던 시대는 그것이 당연할 수 없는 시대엿고 시대가 그렇다는데 공자와 은자들은 이견이 없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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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에서 공자는 자신을 조롱하는 은자들을 존경했다. 그러나 은자들은 그런 공자를 조롱하며 공자가 되돌아가자는 성인의 질서(예)를 조롱했다. 그 은자들은 도가 계열의 선구였을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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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은자들의 맥을 잇는 노자는 전쟁과 살육, 착취와 억압은 권력의 본성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권력이란 것 자체가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러나 “노자는 사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부정하지 않았다. 입신출세를 철저하게 부정한 것은 장자가 처음일 것이다.” 치국의 도를 말하던 제자백가와 달리 장자는 “완전히 상반된 길의 극단에 있었다. 그는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노력을 모조리 부정했다. 왕후와 귀족을 부정하고 학문을 추구하고 논쟁하는 것 자체도 부정했다. 그가 자기 자신과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모델로 삼은 것은 왕후도 제자백가도 아니요 곤이나 붕새, 이백이나 베토벤 같은 천재도 아니었다. 바로 작디작은 뱁새와 두더지였다. 천재형 지식인들이 정신적 우월감을 느끼며 세상을 업신여기고 잘난 척했다면 장자는 자신에 대한 기준을 보이지도 않을만큼 낮춰서 뱁새와 두더지 같은 마음으로 세속의 명리와 권력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소요와 자유를 추구했다. 그는 밖에서부터 먼저 출발하지 않고 내부에서 먼저 모든 명리를 부정하고 세속에서 멀리 떨어져 화를 피하고 근심을 멀리했다. 세속에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얻기 위해 추구하는 모든 수단을 멀리했다. ‘자기 자신’의 편안함과 자유로움, 만족감, 다른 사물과 환경에 대한 무관심 외에는 그 어떤 감정도 인정하지 않았다. 장자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한 것은 자기 앞에 놓인 현실에 대한 무력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자의 소요는 절망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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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천하를 유세한 것은, 도를 다시 세우려 한 것은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장자를 읽어보면 장자는 유가계열에서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공문에서 장자는 출중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의 글에 엿보이는 “강한 자신감, 강한 자부심, 강한 사명감”은 천하를 논하는 유가 선비의 태도이다. 주자를 비롯한 송유들은 노자는 싫어해도 장자는 좋아했다. 자신들과 뿌리가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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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상에 나왔을 때 천하는 무도(無道)했고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알아주는 이가 없어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엔 자살과 모험, 정신적 해탈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막다른 길에 몰리면 사람은 위험한 모험을 하든가 자신의 지혜를 숨기고 어수룩한 것처럼 핻동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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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편 전체를 통해 장자가 바라보는 공자에 대한 시선은 따뜻하다. 그러나 공자의 주장에 대해선 냉정하다. 공자의 논리에 대한 장자의 비판은 “결코 추상적인 부정이 아니라 그것이 당시의 시대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해서 나온 것이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비극적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결과를 분명히 알 수 있는 형국에서 한발 물러설 줄 모르니” (왕보) 지혜라 할 수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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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불난 집의 비유를 들어 공자와 장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이웃에 불이 났으면 물 한 통 가져다 뿌린다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자는 마땅히 뿌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도리니까. 그러나 장자는 그것은 의(義)도 인(仁)도 아니라 말한다. 그것은 동정일 뿐이며 자기만족일 뿐이라는 것이다. 장자라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그냥 앉아 있겠다고 말한다. 장자는 냉정하다. 이 차가움을 장자는 ‘무정(無情)’이라 말한다. 대붕이 되어 소요하는 것은 무정해야만 할 수 있다.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인간세의 자잘함은 보이지 않을 때 소요는 가능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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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을 말할 때 친구 혜시는 정(고대 중국에서 정은 감정을 말한다)이 없는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논박한다. 혜시가 옳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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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물 한 통 뿌리는 수고도 하지 않는 사람은 인(仁)하지 않다. 인(仁)은 손익계산이 아니라 사람이면 마땅히 느끼는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공자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인(仁)할 수 있고 한 것은 그것을 말한다. 장자는 공자의 말을 잘 알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仁)해서는 천하의 불을 끌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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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끄려는 마음 자체를 없애야 한다. 사람이 아닌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정이란 말은 소요란 말은 철저한 절망의 표현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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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장자의 소요, 좌망, 무정 등은 불교의 해탈, 무욕, 무아 등과 닮았다. 실제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 중국인들은 장자의 개념을 빌려 불교를 이해하고 불경을 번역했다. 그리고 선불교는 도가식으로 불교를 이해한 결과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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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자의 소요를 불교의 열반이라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의문이다. 그렇게 이해하기에는 장자의 논리에 자기모순이 많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다투지 않고 논쟁하지 않을 것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논쟁하고 다투었고 한편으로는 마른 고목 같은 몸과 식은 재 같은 마음으로 홀로 앉아 세상의 모든 외물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완전히 잊어버리는 ‘좌망(坐忘)’을 주장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모든 걸 꿰뚫을 듯 날카로운 기세와 현란한 언변, 웅대한 기백을 과시하며 자신을 드러내 자랑했다. 이런 글이 마른 고목 같은 몸과 식은 재 같은 마음에서 나왔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자기과시욕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고 열정으로 잔뜩 격앙된 상태라야만 이런 글을 쓸 수 있다. 장자는 세속을 거부하고 거듭 반복해서 초월하고 또 초월하는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들에0서 수신제가평천하라는 이상을 하찮은 것으로 조롱하고 비웃었고 입신출세하려는 이상을 부정했다. 그랬던 장자가 왜 뒤에서는 ‘응제왕’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제왕과 유토피아에 대해 논했단 말인가? 그의 논리대로라면 비(非) 제왕과 무(無) 제왕을 쓰든가 최소한 망(忘)제왕을 썼어야 하는 게 아닌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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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장자의 소요란 자발적인 은퇴가 아닌 강제된 유배였다. 유배된 장자가 쓴 글을 저자는 ‘처연한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천하 속에서 천하를 떠나는 장자의 글은 ‘사변적 기능보다 심미적 기능이 훨씬 강하다. 이것은 철학이 괴로운 처지에 빠진 인간을 위해 찾아낸 아름잡지만 힘없고 속이 텅 비어 있는 열매와도 같다.” 장자의 글은 “훌륭하지만 읽는 이를 탄식하게 하고 감탄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씁슬한 건 어쩔 수가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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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5 <br />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331/25/cover150/8975279820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5279820</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관용과 독선 - [울지 마, 팔레스타인]</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184902</link><pubDate>Wed, 02 Nov 2011 17:1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18490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9402222&TPaperId=518490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326/57/coveroff/895940222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9402222&TPaperId=518490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울지 마, 팔레스타인</a><br/>홍미정.서정환 지음 / 시대의창 / 2011년 10월<br/></td></tr></table><br/>“시리아 리바넨시스 혹은 마운트 레바논이라 불리는 지중해 동부 해안은 천년이 넘도록 12개 이상의 종파와 인종과 신조의 온실 노릇을 해왔다. 마치 마법이 지해하는 듯한 완벽한 온상이엇다. 레반트의 도시들은 기본적으로 상업에 중심을 두고 잇었다. 거래는 명료한 계약서에 기초하여 이루어졋고 상업을 가능하게 해주는 평화를 숭상했다. 서로 다른 사회집단들 사이에도 긴밀한 소통이 유지되었다. 온갖 종파의 기독교도들, 모슬렘, 드루즈교도, 소수의 유대교도 등이 이 지방이 품고 잇는 종파들이다. 이곳에서는 서로 관용적 태도를 베푸는 것이 극히 당연하게 여겨졌다. 발칸 지방 사람들은 목욕하길 꺼리며 툭하면 싸움질이니 우리는 얼마나 개명한 사람들이냐고 나도 학창시절에 교실에서 배운 기억이 있다. 이 평평상태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듯햇고 역사는 개선과 관용의 세계로 나아가는 듯이 여겨졌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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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은 세계 모든 곳을 향해 열려 있었고 극히 세련된 생활양식과 활발한 경제, 오늘날의 캘리포니아처럼 온화한 기후를 자랑했으며 지중해 저 멀리 높은 곳의 눈 쌓인 풍경도 볼만했다. 스파이, (금발) 창부, 작각, 시인, 마약상, 모험가, 도박 중독자, 테니스 선수, 아프레 스키 애호가, 상인 등등 온갖 인간들이 모여들어 이곳의 문화를 형성햇다. 이 지역은 ‘낙원’일 뿐 아니라 흔히 하는 말로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기적의 교차점이기도 햇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블랙 스완’)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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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몰려오기 전 이웃인 팔레스타인 사람들 역시 그런 문화에서 살았고 아직도 그들은 그런 문화를 지키며 산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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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슬람이란 이성과 갈등하는 신화도 아니엇고 욕망과 갈등하는 도덕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권해야 할 선도 아니고 스스로를 옭아매야 할 규범도 아니었다. 하루 다섯번 꼬박꼬박 기도하고 금식하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이런 것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도 있다. 사마라 아버지가 전자의 경우라면 사마라는 후자다. 사마라는 무신론자다. 라마단 기간에도 집에서 요리를 해 먹는가 하면 술과 여자를 두루 좋아했다. 그러나 종교 문제로 아버지와 약간이라도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햇고 아들과 맞담배를 피우면서 밤 늦도록 아들의 결혼에 관해 얘기를 나누곤 했다. (레바논에서처럼)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슬람교와 기독교도 공존한다. 종교가 문제시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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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관용의 문화는 레바논처럼 높은 교양수준을 만들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지금도 그런 전통은 높은 교육수준으로 나타난다. “팔레스타인의 교육수준은 주변 아랍국보다 훨씬 높다. 세계문맹률 순위에서 시리아, 이집트 등은 모두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지만 팔레스타인은 문맹률 8.9%로 79위를 차지한다. 팔레스타인에는 비르제이트, 알쿠즈, 알나자, 베들레헴, 헤브론 대학 등 여러 대학이 있는데 이중 비르제이트와 알쿠즈 대학은 각종 순위조사에서 중동지역 10대 대학에 들 정도로 학술적 성과가 높은 곳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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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에 가까운 문맹률을 자랑하는 한국사람들에겐 그리 대수롭지 않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를 생각하면 이는 위업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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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브론 공업지대를 지나면서 그곳에서 가장 큰 공장이 어디인지 수소문한 끝에 노동자 47명을 고용하는 알샤르크 전기회사 공장을 찾아간 적이 있다. 전선과 철사, 용접봉 따위를 제조하는 이 소박한 공장의 관계자는 ‘우리 공장이 2008년에 무려 800만 셰켈(약 24억원)의 매출을 올렸다’며 자랑했다. 이 정도면 팔레스타인에서는 대기업에 속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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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현재 국내총생산이 128억 달러, 1인당 GDP는 2,900달러 정도다. 공장도 없고 중동에서는 흔한 석유도 나지 않는 팔레스타인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살까. 가장 정확한 표현은 딱히 먹고살게 없다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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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경제가 이 모양인 것은 이스라엘 때문이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된 이후 서안과 가자지구의 경제적 통제권은 이스라엘이 쥐게 되었다. 즉 팔레스타인에서 공장 하나를 짖는다든지 원료와 완성품을 수입, 추술하는 데 일일이 이스라엘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를 이유로 거의 허가를 해주지 않았고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 경제가 악화되었다. 오슬로 협정이 체결된 후 3년 동안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서 실업률이 2배 가까이 늘었고 1인당 소득도 20%나 줄었다. 지금 팔레스타인 경제는 더 나빠졌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농지를 강제로 수용하여 점령촌을 확장하는가 하면 수원지마저 독차지했다. 팔레스타인과 외국, 가자-서안, 서안-동예루살렘 간의 사람과 물자 이동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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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말하지 않지만 이스라엘의 경제파괴는 오슬로 협정 이전으로 올라간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은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어떤 자원도 인프라도 없는 가자의 좁은 땅으로 쫓겨간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미래는 밝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쫓아낸 것으로도 부족한지 그들이 쫓겨간 곳까지 쫓아가 그들의 어두운 미래를 더 어둡게 만들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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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성경구절처럼 팔레스타인인들을 “장작을 패고 물을 긷는 사람”으로 만들어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했고 이스라엘 상품의 소비자로 만들었다. 이스라엘은 지역산업의 발전을 방해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에 경제적으로 종속되게 만들었고 정치적 독립의 경제적 기반을 제거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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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는 제국주의의 식민지배가 사라진 세계에서 고전적인 식민착취가 부활한 예이다. 점령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착취의 도구이자 상징이었다. 2005년 가자 인구 140만 중에서 8천명에 불과한 유대인들은 토지의 25%, 경작지의 40%를 차지했고 수자원의 대부분을 통제했다. (이상 The Economist의 기사 요약)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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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이스라엘은 ‘점령촌 보호’를 명분으로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 분리장벽을 세우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았다. ‘Settlement’를 정착촌으로 옮겨 싣는 언론도 있는데 그보다는 정령촌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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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렴촌에 사는 유대인들은 쉽게 말해 극우주의자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0.1%나 될까 말까 한 이들은 팔레스타인 전체를 자신들의 땅으로 믿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옛날부터 서안지구의 아무 곳에서나 막무가내로 컨테이너 같은 것을 가져다 놓고 먹고 자기 시작했어요. 이스라엘 정부에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신변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하고요. 이스라엘 정부가 군대를 보내 경비를 서 줍니다.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어 진짜 집과 기반시서을 건설하게 되죠. 기왕에 군대가 있으니 군사시실도 만들고요. 그러다보면 팔레스타인인들은 접근이 금지되는 겁니다. 혹시 그쪽을 취재하실거라면 점령촌 사람들을 아주 조심하셔야 합니다. 외국인들도 안중에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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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용자원이 안 그래도 적은 곳에서 생산수단을 뺏긴 팔레스타인인들은 절대적 빈곤과 상상할 수 없는 궁핍에서 살아야 했다. 80%는 하루 2달러가 안되는 돈으로 살아가야 했다. 아직도 가자의 생활조건은 문명에 대한 모욕으로 남아 있다. 이스라엘의 지배가 끝나지 않는 한 팔레스타인의 미래는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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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목을 죈 이스라엘의 지배 덕분에 “팔레스타인 역제는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잇다. 팔레스타인 난민구호시구, 유엔개발계획 같은 유엔 산하원조기구와 세계은행, 적신월사 등 각종 경제, 인도주의기관에서 팔레스타인에 지원하는 돈은 매해 10억달러를 넘는다. 예르ㅜㄹ 들어 팔레스타인의 교사와 의사들은 난민구호사업기구가 아니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설립한 학교나 의료원에 출근한다.유엔기구와 유엔산하기관 외에도 라말라 시에만 약 1700개의 정치, 사회, 교육, 여성, 문화 등 각 분야 NGO들이 설립되어 있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데 크게 기여한다. 팔레스타인에서 NGO는 한국의 시민사회단체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대기업만큼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장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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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조는 팔레스타인의 자립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원조는 “기간산업 대신 식량, 의료, 교육 부분에만 직접적으로 편중되게 지원함으로써 그 자원의 배분을 놓고 팔레스타인 내부가 분열되게 조장했다. 또한 원조 이후 그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책임감있게 감시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자치정부의 부패를 눈감아줌으로써 하마스 정권이 등장하는데 일조햇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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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경제를 인공호흡기를 떼어내면 바로 사망하는 원조경제체제로 묶어두었고 정치 군사 외교적으로 팔레스타인을 고립시켰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이런 현실에서 ‘교육은 받아서 무엇 하나’하는 뿌리 깊은 회의와 무기력감에 젖어 있다. 팔레스타인 교육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한 팔레스타인 교사가 쓴 글을 발견하고는 먹먹했던 일이 떠오른다. ‘학생들에게 꿈을 이룰 수 잇다는 ‘희망’을 말해야 할 때 교사로서 가장 힘들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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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실에서 저항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최소한의 몸부림이며 종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생존권의 문제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최소한의 생존을 말할 뿐이다. 여전히 그들에겐 레반트의 전통인 관용은 살아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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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팔레스타인이 이슬람 근본주의가 성장할 수 잇는 폐쇄적인 곳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신을 존경하고 사랑하듯이 그 신이 창조한 모든 다른 사람, 다른 종교도 종중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했다. 자신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유대인이라고 예외로 두지 않았다. 내가 만난 대다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쫓아낸 뒤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는데는 관심이 없었다. 이슬람교도든 기독교인이든 ‘형제처럼 같이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주었노라 계속 우기고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공공연하게 ‘이스라엘은 유대국가’라고 선언하고 다닌다. 이처럼 오히려 자신들의 종교가 정통이고 우월하다는 쪽, 다른 종교를 인정할 수 없다는 쪽, 자신의 국민들이 타인을 핍박하는 데 마약과 같은 종교적 동기를 활용하는 쪽 국가 전체가 종교적 근본주의에 기운 쪽은 이스라엘이 아닐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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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 말하는 신이 약속한 땅이란 주장 자체도 문헌비평학적으로 보면 의심스런 주장이다 (신의 역사 1 리뷰를 참조) 그러나 그 주장을 인정하더라도 시온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 유대인이 그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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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주의는 그야말로 신화에 불과하다. 현재 유대인 대다수는 바빌론 시대나 로마제국 기대에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다고 전해지는 유대인과는 혈통적으로 관련이 없다. 현대 유대인들은 중세시대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 즉 기원후 6세기에 아라비아 반도 남부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힘야르 제국의 힘야르족과 8세기 중반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카자르제국의 카자르족의 후손이 대부분이다. 특히 카자르 후손인 유대인들은 현재 세계 유대인들의 약 80% 이상을 구성하는 아슈케나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더군다나 “현대 이스라엘의 히브리어는 이디시어의 파생어이며 성서 히브리어의 어휘 일부만 사용한다. 이디시어는 독일어가 혼합되기는 했지만 문장과 음운체계에서 슬라브어족에 속한다. 더 나아가 기원후 1세기에 로마가 점령하던 팔레스타인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대규모 이민자가 없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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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주의 자체가 근거없는 신화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이 신화가 아니더라도 1000년 이상 그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쫓아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시온주의는 독선일 뿐이다. 그것도 억지의 독선일 뿐이다. 그리고 그 독선의 실체는 미국의 전략이라 저자들은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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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없는 중동’을 가정해보자. 2차대전 이후 세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되었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에 자리한 나라들은 어떻게든 이 질서에 편입되었고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등 근대적 국가로 거듭나던 중동 각국에서도 변화는 있었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중동에서는 민족주의나 이슬람주의가 점점 더 힘을 얻었는데 이런 중동이 서장세계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질서에 호의적으로 재편되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중도 교두보가 된 것이 이스라엘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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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스라엘의 이런 성격이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결정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저자들은 말한다. “평화란 본질적으로 힘의 균형이다. 이스라엘은 건국 이후 폭력적인 방법으로 팔레스타인을 지배했다. 그 이유는 미국이 받쳐주는 한 미국에서 수입한 성능이 뛰어난 무기로 무장하는 한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잇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패권이 약해지고 있다. 중동을 “더는 힘으로 제압할 수없다면 미국과 이스라엘은 군사적인 것보다는 정치적 해법을 찾지 않을 수 없다. 2011년 이후 중동의 변화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정치, 외교적으로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게 될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상상력을 가능한 넓힌다면 ‘더 먼 미래에 과연 이스라엘은 생존할 수 있을까’라는 짋문에 이전처럼 쉽게 예라고 대답할 수는 없다. 반면 ‘팔레스타인인들은 마침내 평화롭게 살 수있을까’라는 물음에는 이전보다 더 쉽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br />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326/57/cover150/8959402222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9402222</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민주주의의 기원 - [상식의 역사 - 왜 상식은 포퓰리즘을 낳았는가?]</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184898</link><pubDate>Wed, 02 Nov 2011 17: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18489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307616&TPaperId=5184898"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297/75/coveroff/899230761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307616&TPaperId=518489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상식의 역사 - 왜 상식은 포퓰리즘을 낳았는가?</a><br/>소피아 로젠펠드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09월<br/></td></tr></table><br/>고대 중국에서 인(人)이란 글자는 원래 천자를 말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 인(人)이란 말은 제후들도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고 공자의 업적은 인(人)을 사(士)계급까지 넓힌 것이다. 인(人)이란 말의 역사는 중국에서 정치적 권리가 어떻게 확산되었는가의 역사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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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人) 즉 사람이란 말은 오직 정치적 권리를 가졌을 때만 쓸 수 있는 말이었다. 정치적 권리가 없는 사람은 인이 아닌 민(民)이라 불렸다. 민(民)의 자형은 꼬챙이로 눈을 찌르는 모양이다. 민에게 요구되는 것은 의무 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정치적 권리를 가진 사람만이 온전한 사람이라 불릴 수 있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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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나 사람은 평등하지 않았고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더 ‘평등’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었다. 남보다 더 평등한 사람만이 온전한 사람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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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온전하게 사람이라 불릴 수 있는가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달랐다. 왕과 제후만 사람이라 불릴 수 있었던 고대중국에서 德이라 불리었던 그 기준이 실제론 혈통이었다면 공자 이후로는 능력이었다. 그에 비해 고대 로마에선 재산이 기준이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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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 money made a high political career possible. Patrician blood had long become a liability. Money. It ruled the world. Without it, a man was nothing. Money. How to get it? How to get enough of it to enter the Senate? Dreams, Lucius Cornelius Sulla! Dreams!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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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ey again. Money, money, money. Though power entered into it too. One should never forget or underestimate power. Which drove which? Which was the means, which the end?” (Colleen Mccullough, ‘First Man In Rome’)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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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이후에도 유럽의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재산이 기준인 것은 의회민주주의가 자리잡았던 근대영국과 식민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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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에 관한 논쟁이 벌어질 경우 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개인의 부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식민지의 휘그당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또 유권자로서든 아니면 공무원으로서든 그 자격의 기준은 똑같이 부였다. 투표권에 관한 영국인의 사고에서는 오직 소득을 낳을 토지를 가진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독립적인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독립적인 사람들만이 공동체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에서 판단을 건전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재산이 없거나 생계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사람들, 말하자면 여성만 아니라 어린이와 노예, 소작인, 하인, 장인, 도제들은 스스로 정치적 결정을 이성적으로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걸린 문제에서 특히 더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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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은 우리에겐 낯설다. 우리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정치적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면 당연히 권리가 있다고, ‘인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권’이란 개념은 최근의 발명이다. 인간이 있어온 시간의 대부분 동안 인권이란 알려지지 않았고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다. 역사적 시간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평균을 벗어난 비정상이라 할만한 시대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우리의 시대는 비정상이 되었는가? 이책이 묻는 질문이다. 저자는 그 답을 한 가지 개념의 역사에서 찾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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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신화는 ‘자유롭게 태어난 잉글랜드인’의 신화다. 이는 이미 17세기부터 주창되었지만 19세기에 수차례의 정치개혁을 거치면서 비로소 확신되기에 이르렀다. 전제정 밑에서 신음하는 우상 숭배적인 대륙사람들과 달리 자유를 만끽하는 독특한 ‘섬나라 인종’이라는 이미지는 잉글랜드가 개신교 국가로 선회한 튜더 시대까지 소급되지만 ‘자유롭게 태어난 잉글랜드인’이라는 명제를 만들어내는 데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한 사건은 명예혁명(1688)이었다. 프랑스 공화국에서 프랑스 혁명이 차지하는 위상에 맞먹는 영국의 명예혁명은 의회와 왕정 같은 영국의 오랜 제도에 대한 보편적 믿음을 가져왔다.” (박지향)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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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믿음은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얻은 것이다. “1700년경 런던은 적대심으로 상처 입은 도시였다. 한 세기에 걸친 종교전쟁과 정치혁명은 불신을 유산으로 남겼다. 사법적 또는 신학적 전문성을 자랑하던 유서 깊은 중심지들에 대한 불신과 진리 탐구와 의사결정의 낡은 방법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었다. 권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가 아주 힘들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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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내전을 낳았던 권위에 대한 불신은 사상적 차이를 인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용인하는 관용을 낳았다. “대화는 관용과 질문하고 토론하는 능력에 좌우된다.” 그리고 대화의 상대를 인정하는 관용은 “서로 옳다는 주장들 사이의 차이를 조정하거나 적어도 희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영국인들이 어느날 갑자기 관용을 배운 것은 “어렵게 얻은 사회적, 정치적 안정을 오래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표현의 자유가 영국의 기본적인 요소로 정착”되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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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불신과 자유 덕분에 태어난 “산만한 도시 세계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다양성” 위에서 어떻게 질서를 세울 것인가였다. “영국의 상류층과 중산층의 입장에서 볼 때 혁명 후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극단적 다원론을 누그러뜨릴 초법적 방법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해와 오해를 구분하고 기본적인 사상들에 대한 의견일치를 어느 정도 촉진하되 그 모든 것들을 종교적 관용과 표현과 언론의 자유 안에서 이루는 것이 급선무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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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한 해법으로 ‘상식’이 제시된다. 공동체의 누구나 공유하는 상식은 “공통의 정체성이 세워질 최소한의 권위가 되어줄 것으로 보였다. 그럴 경우 폭넓게 받아들여진 핵심적인 가정들을 바탕으로 형성된 공동체는 과도한 개인주의와 정치적 증오, 당파성에 대한 해독제가 될 것이다. 정치역역에서 상식의 적이 ‘당파성’과 ‘이해관계’라면 종교에서 경멸해 마땅한 상식의 적은 ‘광신’이었다. 상식의 옹호자들은 상식을 그 모든 적들에 맞설 성채로, 또 불필요하게 학식을 자랑하거나 사변적이거나 난해하거나 광적인 것에 맞설 성채로 높이 평가했다.” 극단주의자들에게 한 세기를 끌려다닌 사람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상식은 “토론의 한계를 그어” 의견충돌이 낳을 “적개심을 누그러뜨릴 것으로 여겨졌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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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이 한계를 긋는 구체적인 방식은 이런 식이었다. 극단으로 흐르는 이상주의자들과 달리 보통사람들은 “현실의 상식적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그들보다 우수한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여기서 상식의 옹호자들은 세상 실정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정확히 말하는 본능을 타고 났다는 이유로 보통사람들을 옹호”하면서 ‘상식의 적’들을 공격했다. “과연, 상식의 가치에 대한 암묵적 동의는 18세기 첫 몇 십 년동안 휘그당의 과두체제와엘리트 사회의 결속에 필요한 토대가 되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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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정부나 교회가 검열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상식이 검열관의 자리를 차지한다. “상식의 옛날 개념이 개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심판관과 검열관’이었다면 이제 그 개념은 문화적 규제의 수단으로 일반화되고 집단화된다. 상식은 표현에 대한 형식적 규제를 철폐했다고 자랑하는 모든 사회들의 특징이라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구조적 검열이 되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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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상식의 누구의 것이냐, 이다. 물론 상식은 인민(people)의 것이다. 그러나 여성은 상식을 배울 수는 있지만 부족하다고 여겨졌고 가난한 자들도 상식이 적은 것으로 여겨졌다. “18세기 초에는 상식도 심미안처럼 노력 여하에 따라 키울 수 있는 미덕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미덕으로 불린 상식의 소유자는 “합리적이고 착실하고 멋을 알고 덕을 갖춘 중류층과 상류층 사람들로 이뤄진 예의 바른 대중”과 같은 뜻이었다. 상식의 옹호자들은 상식의 적(실제로는 그들의 정적)을 상식의 소유자인 인민의 편에서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인민은 상상의 산물일뿐 시골과 도시의 골목에서 만나는 현실의 인민이 아니었다. 상식의 이런 비현실성 때문에 결국 상식의 주창자들의 의도와 달리 상식은 상식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분쟁의 중심이 되었고 조화를 위해 고안된 개념이 정쟁의 무기가 되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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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추상성 때문에 상식(common sense)은 프랑스어권에서 양식(bon sens)로 변형된다. 사전적으로 영어의 상식과 불어의 양식은 거의 호환가능하다. “양식은 기본적인 추리능력과 일상적인 식별능력으로 정의되었으며 몽테스키외가 표현했듯이 모든 사람들에게 두루 받아들여질 기본적인 진리들을 얻게하는 ‘사물들을 서로 정확히 비교할 줄 아는 능력’으로 여겨졌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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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을 가진 사람, 교양인(homme de bon sens)이 누구인가가 문제이다. 교양인은 “사물들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이성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이용하는 사람”을 말한다. 정의상 (상식의 소유자인) 영어의 people과 다를 이유는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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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8세기 영국에서 상식이 검열법이라는 정교한 도구가 없는 가운데 공동체의 규범을 유지하면서 단속의 기능을 수행할 것을 약속했다면 유럽 대륙에서는 상식과 비슷한 양식이” 사회적으로 공유된 상식을 공격하고 해체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영국의 맥락에서 보면 상식은 사람들이 사물들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격려하게 되어 있었다. 반면 유럽 대륙에서는 상식의 프랑스어 상대인 양식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외양 밑에 있는 것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뒤엎기 위한 노력으로 넌센스를 드러내는 인간의 잠재력을 의미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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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상식과 대륙의 양식이 달라진 이유는 정치적 맥락이 달랐기 때문이다. 질서를 세우려던 영국과 달리 구체제의 “프랑스는 여전히 관습이 보통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사는 준칙의 원천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런 국가였다. 암묵적 일치에 의존했던 ‘만민일치’는 근대초기 유럽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신성불가침한 규칙의 원천이었다.관습은 임금과 고용조건에서부터 부채의 엋산까지 근대초기 경제적 삶의 중요한 측면을 모두 결정했다. 또한 계급구조를 떠받쳤다. 당연히 종교적 관행도 지배했다.” 그런 맥락에서 건전한 상식 즉 양식은 관습의 넌센스를 드러내고 공격하는 무기로 쓰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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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포퓰리즘이라 부르는 선동적 정치 스타일은 그 시대의 정치이론은 (상식과 양식이 대표하는) 계몽운동 문화의 다양한 갈래들이 결합하면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결합의 폭발력이 처음으로 증명된 것은 미국혁명에서 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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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이 ‘상식’이란 책자로 주장했듯이 미국혁명의 이념은 상식과 양식이 결합이었다. 페인은 미국인들에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설득했다. (양식) 국가 정체성에 변화를 줘야할 뿐 아니라 집단 상식이 자신들을 통치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상으로(상식)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과 양식의 결합은 “인민주권이란 공화주의 개념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을 실험하도록 햇다.” 저자는 이 “예상치 못한 결혼”이 “민주주의 상식”을 낳았다고 말한다. 페인이 교묘하게 만들어낸 ‘상식의 이중성’ 덕분에 “1776년이 다 가기 전에 이미 상식은 새로운 형태의 인민통치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이 형태의 통치에는 인민들이 각자 타고난 실용적이고 건전한 판단을 내릴 능력을 통해 주권자가 되지만 그들의 판단력은 상식에 의해 정의되고 제한을 받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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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국의 상식도 프랑스의 양식도 그랬듯이 “상식을 대효한다고 지나치게 주장하고 나서는 곳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린다. 상식을 대신하여 말을 한다거나 상식에 호소한다는 주장은 초기에 ‘양식’을 옹호했던 사람들이 잘 알았듯이 바탕에 기만을 깔고 있다.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서 진정으로 대중적인 것은 거의 없다. 어느 것이든 절대로 보편적이지도 않으며 폭넓게 교감이 이뤄지지도 않았다. 상식도 그것이 대체하고자 하는 것들만큼이나 추상적이다. 상식을 상기시키는 사태가 벌어지면 언제나 사회의 한 부류가 다른 부류의 희생을 바탕으로 득을 본다. 무엇보다 상식을 상기시키는 것은 논쟁을 부른다. 그것은 곧 상식이 정치적이라는 뜻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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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칸트가 말하듯이 “상식은 진리의 법정과는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상식은 지식주장에 요구되는 비판적 조사를 사전에 차단하는 수사적 방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또 대중의 판단도 협잡꾼들만 영광을 누리게 만들 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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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상식은 정치질서에 대한 비전을 낳은 것이 아니라 (포퓰리즘이란) 정치 스타일을 낳았을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상식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기둥 중 하나로 남아 있는 포퓰리즘의 인식적 토대이며 또 포퓰리즘을 정당화하는 바탕이 되어주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민주주의의 영원한 위협의 하나이기도 하다.’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297/75/cover150/8992307616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307616</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폭풍전야 - [튜더스 - 세계사를 바꾼 튜더 왕조의 흥망사]</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162966</link><pubDate>Sun, 23 Oct 2011 23: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16296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114729&TPaperId=516296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319/90/coveroff/899211472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114729&TPaperId=516296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튜더스 - 세계사를 바꾼 튜더 왕조의 흥망사</a><br/>G. J. 마이어 지음, 채은진 옮김 / 말글빛냄 / 2011년 09월<br/></td></tr></table><br/>튜더왕조란 말은 몰라도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 둘 만큼 대중문화의 사랑을 받은 왕도 없다. 튜더왕조는 아버지인 헨리8세와 딸인 엘리자베스 1세의 왕실계보를 가리키는 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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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도면에서 둘 중 하나를 꼽으라면 엘리자베스 1세보다는 아버지인 헨리8세가 압도적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인지도가 높은 이유는 영국이 변방으로 보잘 것없는 약소국에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된 계기를 마련한 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업적도 황당한 아버지 앞에선 무색해진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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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아이를 갖고 싶다고 이혼하기 위해 온 유럽을 뒤흔들고 종교개혁까지 한 왕. 그렇게 이혼하고 결혼해 놓고는 마누라를 처형한 왕. 황당하다는 말로는 부족할지도 모르는 왕이다. 황당의 극의를 보여준 왕인 만큼 영화와 소설, 역사의 사랑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얘기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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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얘기거리가 많기는 그 딸들인 매리 여왕과 엘리베자스 여왕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두 여왕에 대한 책도 영화도 많고 많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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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그 세사람을 모두 다룬다. 그렇다면 이책은 그 많고 많은 책들과 어떻게 다른가? 워낙 책들이 많이 나왔으니 한두권쯤은 읽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책들과 이책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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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그 세 사람이 속한 왕실계보 즉 튜더왕조에 대한 책이다. 이책은 그 세 사람에 대해서도 다루지만 그 세사람의 시대를 묶어 하나의 전체로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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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왕조가 등장한 시기는 중세가 끝난 시점이다. 12세기 르네상스부터 영국을 지배한 플랜태저넷 왕조가 백년전쟁의 패전과 그 패전의 후유증으로 일어난 장미전쟁으로 무너지고 그 전쟁의 폐허와 함께 중세가 끝난 시점이 튜더왕조의 시대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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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은 귀족의 수를 격감시켰고 귀족의 약화와 함께 영국에선 절대왕정이 일찍 시작될 수있었다. 한 왕조를 연 사람답게 헨디7세는 특별했다. 그러나 그의 특별함은 눈에 띄지 않는 특별함이었고 덕분에 그에 대한 역사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의 특별함이란 중세말기라는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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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7세의 과제는 “영국의 왕관을 귀족의 일개 분파 이상이었던 이전의 지위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왕은 단순히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해야 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잉글랜드의 왕은 ‘국왕이자 황제’라기보다는 ‘동등한 자들 중의 제일인자’에 불과했다. 장미전쟁은 농업, 목축업, 산업, 무역에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별 손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군주제에 해단 신뢰를 손상시켰다. 왕은 무능해보였고 모든 신민들의 권리를 보호할 능력이 없어 보이거나 보호할 의사가 없는 것같이 보였다.” (옥스퍼드 영국사)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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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7세는 그 과제를 해내는 위업을 이룬다. 이책의 저자는 그 이유를 헨리7세가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엇기 때문이라 말한다. “현재 그에게 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는데 아마 당시에도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스워스 전투 이전까지 그의 인생에는 극적인 순간들과 위기의 순간들이 종종 있었지만 그 자신이 그런 시련을 원한 적은 없었다. 그는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조용히 보냈다. 그에게 왕위를 안겨준 전투에서조차 그가 했던 일은 농아나 마네킹도 할 수 있을만한 역할이엇다. 헨리는 공격당했고 헨리는 보호받았고 헨리는 왕관을 얻었다. 어떤 장면에서도 그는 수동적인 역할만 했다. 그런데도 엄청나게 큰 업적을 이루었다. 기질적으로 그는 중세의 모험심 넘치는 전사황보다는 현대의 유능한 기업간부에 더 가까웠던 것같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언제나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는 군사적인 영광을 조금도 중시하지 않았으며 유럽의 유력 가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지만 그들에게 특별히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거의 명성을 남기지 못했지만그가 무대를 세운 덕분에 그의 아들과 그의 손녀가 거의 1세기 동안 차례 차례 활략을 보일 수 있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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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시대는 절대왕정의 시대로 불린다. 헨리7세는 절대왕정을 실현했고 그가 실현한 토대위에서 그의 자손들이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업적은 악전고투의 결과였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군주정은 흔들리고 있었고 귀족들은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재정은 파산상태엿다. 그는 군주의 권력을 세우고 귀족과 교회를 복종시키며 재정을 확립한 것은 헨리7세의 업적이다. 그런 아버지를 둔 것은 헨리8세의 행운이엇으며 동시에 불운이기도 햇다고 저자는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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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대는 없었다. 헨리는 행운이 따랐다. 그는 역사상 가장 운이 좋은 사람 중 한명이었다. 그가 누린 행운은 대부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헨리7세는 잉글랜드의 왕권을 과거 수대에 비해 훨씬 더 확고하고 강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국고를 금으로 가득 채웠고 백성들은 평화로운 시대가 가져다주는 혜택에 익숙해졌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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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익숙함, 당연함이 문제였다. 주어진 모든 것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헨리8세는 아버지가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그에게 물려준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그것은 물과 공기처럼 얼마든지 낭비해도 상관없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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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8세는 “아무도 못 말릴 정도로 자신의 매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고 모든 중요한 문제에 자신이 가장 뛰어나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성격은 그의 평생동안 계속 유지되었다. 그는 그냐말로 폭군의 자격을 제대로 갖춘 한심하고 위험한 살인광이엇다. 헨리처럼 자만심이라는 높은 벽 안에 갇힌 사람은 고마움과 같은 건강한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된다. 또 그런 사람은 자신이 운이 좋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의 운명은 거의 신의 뜻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고 그에게 일어나는 행운은 모두 우주에 대한 신의 위대한 설계를 이루는 과정이며 나쁜 일은 모두 신이나 그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그 외의 무언가가 우주의 법칙에 어긋났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가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헨리8세의 황당함은 그런 감사할줄 모르는 오만함 때문이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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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은 혹시 재채기라도 하면 국사를 내려놓고 스스로 쉬는 날이라고 정하고는 음악을 연주하거나 비가 잦아들면 정원에서 가벼운 산책을 즐겼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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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 잠을 설친 건 사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이렇게 땅이 꽁꽁 얼어붙었으니 사냥개가 움직이기 어럽지. 사냥개들이 나갈 수 없었을 거야. 양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게 아니야."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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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인내심을 갖고 우리 군주를 모실 수 있을까? 군주가 낮에 올린 서류에는 서명도 않는 채 자정이 다 되도록 브랜든하고 술을 마시고 킬킬대면서 노래나 부르고 있을 때 자네가 인내심을 보일 수 있을까? 자네가 국왕을 채근할 때 국왕이 이제 잠이나 자야겠다고, 내일은 사냥을 갈 거라고 말한다면 인내심을 보일 수 있을까? 국왕을 모실 기회가 온다면 국왕을 있는 그대로 쾌락을 추구하는 군주로 받아들여야 할 거야."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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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물려준 관료들이 있었기에 그는 마음 내키는 대로 즐길 수 있었다. “그의 곁에는 헨리7세 통치 말기에 정부고관이었던 충성스럽고 유능한 사람들이 있었다.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들은 모두 그들이 관리했기에 그들의 군주는 마음껏 사냥과 음악과 춤을 즐기고(그는 악기 연주와 작곡에 재능이 있었다) 마상 창시합, 도박, 테니스, 수집, 궁전 개축 등에 관심을 쏟았다.” 그는 전형적인 중세귀족이었다. 그는 아버지 덕에 주어진 모든 것이 당연했고 당연한 것을 마음껏 낭비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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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귀족에게 궁극의 오락은 전쟁이다. 전쟁의 영광을 위해 헨리는 아무 득도 없는 전쟁을 끊임없이 일으켰다. 그의 사치와 전쟁취미에 그의 아버지가 이룩한 재정은 파탄에 빠진다. 그러나 재정위기도 헨리의 취미를 그만두게는 하지 못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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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세금때문에 이 나라가 쓰러질 거라는 이유를 들어 내가 전쟁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지. 전쟁에 나가는 군주를 지원하지 않을거라면 나라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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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말을 한 루이 14세가 어떤 생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전쟁을 벌여 프랑스의 재정을 파멸로 이끌었고 결국 그 재정상태 때문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만든 루이 14세. 그에게 전쟁은 자신의 영광을 위한 놀이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헨리8세에겐 전쟁도 사랑도 사냥과 마찬가지였을 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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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왜 가지면 안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왕의 이야기가 어디로 흐르겠는가? 사랑 이야기로, 앤 이야기로,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것으로 흐를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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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은 국왕이 직접 편지를 쓰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늘 말했다. 다른 국왕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심지어는 교황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그랫다. 직접 편지를 쓰면 많은 게 달라질 경우라도 국왕은 절대로 직접 편지를 쓰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앤 불린은 왕이 직접 쓴 편지를 받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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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불장난에, 덧없이 사라질 감정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왕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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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삼켰다. 당신은 이제 마흔이고 (왕의 꿈에 나타난) 형은 당신에게 어른이 되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당신은 아서 왕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연극으로 상연했나요? 가면극은 얼마나 많았고 가장행렬은 또 얼마나 많았나요? 종이 방패와 나무칼을 들고 등장했던 배우는 또 얼마나 많았나요?" (이상 힐러리 맨틀 ‘울프홀’에서 인용)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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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정상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 나라는 그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그의 소유물일 뿐이니 그 나라는 자신의 욕망에 봉사해야 하는 도구일 뿐이며 그는 그 소유물에 대해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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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왕에게 사랑은 사냥이나 마찬가지로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한때의 유희였다. 전쟁 역시 더 거창할 뿐 그에게는 마찬가지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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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8세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메리,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벌려놓은 뒷치닥거리를 하느라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가 망가트린 재정문제를 해결해야 했으며 그가 사랑의 불장난 때문에 일으킨 종교개혁 때문에 분열된 나라를 다시 통합해야 했다. 이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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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헨리8세의 변덕이 왜 어떻게 그런 문제를 일으켰는가를 헨리8세의 행동을 따라 자세히 설명하고 그가 일으킨 문제들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상세히 살핀다. 이책은 반 이상의 지면을 그에 할당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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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머지 반에선 그 문제들이 그의 아들과 딸들의 치세에 어떤 문제를 일으켰고 그 문제들 때문에 그들이 악전고투해야 했던 상황을 설명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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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영국사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달리 왕이란 개인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본격적인 역사서보다는 전기에 가깝다. 가령 이런 서술은 이책에서 보기 힘들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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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 시대는 영국사의 한 분수령으로서 앵글로-아메리카 정신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신성한 전통, 고유한 애국심, 식민시대 후기의 침울함 등이 합쳐져 이 시대를 진정한 황금시대로 과대평가하게 햇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신화보다 더 복잡하고 더 흥미롭지만 덜 매력적이기 마련이다. 튜더 시대 잉글랜드가 지닌 잠재적 힘은 사회적, 경제적, 인구적인 것이엇다. 그러므로 만일 이 시기가 황금시대엿다면 이는 기본적으로 1500년에서 엘리자베스 1세의 사망 사이에 일어난 상당한 인구성장이 가용자원의 양, 특히 식량공급을 초과성장하여 맬서스주의적 인구위기를 초래할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근과 질병은 분명히 튜더 시대 경제를 저해했으나 14세기의 경우처럼 경제의 토대를 무너뜨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인구증가로 인한 노동력과 수요의 증ㄱ5k는 경제성장과 농업의 상업화를 자극하고 무역과 도시의 부활을 고무하고 주거의 혁명을 가져왔으며 특히 런던에서 영국식 예절을 세련화했다. 그리고 튜더 시대 영국인들 사이에서 새롭고 활력 있는 태도 특히 종교개혁 사상과 칼뱅주의 신학에서 유래한 개인주의적 태도를 조장했다.” (옥스퍼드 영국사)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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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책은 충분히 왕조사라 불릴만하다. 그 이유는 100년이 넘는 튜더왕조의 시대를 묶는 문제가 무엇이었는가가 이책의 주제이기 때문이며 그 주제를 제대로 설명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서에선 무시되기 마련인 왕이란 개인에 주목하고 개인이 어떻게 시대를 규정햇는가를 이해하는데 주목했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이다. <br />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319/90/cover150/8992114729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114729</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천재의 본질 - [오다 노부나가 읽는 CEO - 나를 바꾸는 창조적 파괴]</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146868</link><pubDate>Sun, 16 Oct 2011 15: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14686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0918625&TPaperId=5146868"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369/36/coveroff/895091862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0918625&TPaperId=514686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오다 노부나가 읽는 CEO - 나를 바꾸는 창조적 파괴</a><br/>아키야마 슌 지음, 박화 옮김 / 21세기북스(북이십일) / 2009년 05월<br/></td></tr></table><br/>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 전국시대의 세 영웅이다. 이들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로 ‘울지 않는 두견새’를 흔히 말한다: 울지 않는 새는 죽인다, 노부나가. 울지 않는 새는 울게 만든다, 히데요시. 울지 않는 새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 이에야스. 이 이야기에서 새를 일본으로 바꾸어 생각하면 오다 노부나가란 사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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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는 말수가 적었다. 노부나가가 내뱉은 말이라고는 고작 ‘그러한가’ 또는 ‘하는 수 없군’이 전부엿다고 한다. 물론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그의 행동 하나 하나가 암울하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행동을 분석하다 보면 마치 심연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처럼 혼란스러워진다. 노부나가의 목표와 의도, 행동의 동기와 이유, 계획과 가능성을 가늠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의 행동을 지탱하는 삶의 원리와 방법, 원칙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면 탄식이 절로 나온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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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는 살아있을 때도 죽은 후에도 이해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가 천재이기 때문이라 흔히 말해진다. 천재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한다. 자신이 보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을 천재는 견디지 못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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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신들을 불신하고 경멸햇다. 노부나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역시 그에 못지 않았다. 노부나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두려워 하거나 멍청이라 치부하는 둘 중 하나엿다. 어린 시절 그의 별명은 ‘오와리의 멍청이’였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부나가는 밝고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해받지 못했기에 그는 말이 없을 수 밖에 없엇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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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자는 노부나가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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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의 매력이 현실성에 있다면 노부나가의 매력은 비현실성에 있다. 그에게는 본보기가 없었다. 그의 비현실성을 이상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 이상은 항상 현실과 타협한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을 부정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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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천재였던 나폴레옹은 천재를 이렇게 정의한다. “전술을 짤 때에는 모든 기회를 잘 계산해야 한다. 우연조차도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고려해야 한다. 결코 실수해서는 안도니다. 소수점 이하의 작은 차이로도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명심하라! 천재는 객관적 판단력과 빠른 두뇌 회전력을 두루 갖추고 있다. 창조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객관적 판단과 빠른 두뇌회전력이 필요하며 그중에서도 임기응변 능력이 단연 으뜸인 까닭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임기응변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통사람에게 신기해 보이는 우연도 천재에게는 현실일 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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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노부나가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능력이었다고 그 능력이 노부나가의 비현실성이었다고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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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처럼 노부나가의 전술은 새로웠고 상식을 뒤엎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기에 아버지의 가신들은 그를 불신했다. 아버지의 사후 가신들이 노부나가 대신 그의 동생을 옹립하려 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 가신들과 10여년간 내전을 치루어야 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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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머리 굴리는 자는 필요없다. 이유 불문하고 오직 나를 믿는 자만 내 뒤를 따르라!’ 선두를 달리는 노부나가만이 상징이다. 그는 오로지 자신만을 믿고 따라올 병사들을 조직하고 훈련했다. 인간은 힘을 얻기 위해 일족이나 주변 인물을 포섭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할 사람들을 적대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반감시켯다. 다시 말해 자신을 깍아내린 것이다. 노부나가는 다른 사람들의 힘을 철저하게 부정햇다. 나폴레옹은 힘이 곧 진실이라 했다. 노부나가는 한시라도 빨리 자신이 가진 본연의 힘을 되찾으려 애썼다.”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않을 사람들을 끌어안아 봐야 그것을 힘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말을 믿을 사람들만으로 조직을 꾸렸다. “노부나가는 자기 삶의 원리를 부정하거나 모욕하는 자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설사 피를 나눈 형제라도 예외가 될 수 없엇다. 이것이 노부나가 삶의 신조엿다.” 집안싸움을 하던 시절 그의 병력은 고작 700명이었다. 가신들이 가진 병력보다도 턱 없이 작앗다. 그러나 그는 그 병력으로도 언제나 이겼다. “나중에 노부나가의 병사들에게 그의 말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한 인간의 말이 이렇게 절대적인 힘을 지닌 예를 노부나가 외에는 찾아볼 수없다 노부나가의 촌철살인하는 한마디는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이는 그와 함께 운명을 같이한 병사 700~800명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노부나가는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관철시켰고 병사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그의 말이 곧 법임을 가슴 깊이 새겼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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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행동과 결과엿다. 그는 항상 선봉에 서서 돌격했고 말을 하느니 행동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는 승리라는 결과로 자신을 증명했다. 저자는 그런 노부나가를 ‘강직함’이란 말로 정리한다. “강직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위엄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눈빛으로 나폴레옹의 강직함을 느꼈으며 노부나가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강직함만이 인간의 정신을 이끌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 노부나가는 강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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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와 같은 사람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한 그와 같은 사람은 적어도 일본사에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노부나가가 살았던 시대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본다. “센고쿠 시대의 일본인은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요컨대 개개인이 힘과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뮈든 도전하고 실험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모형 또는 새로운 삶의 지평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 가공할 에너지가 분출된 시대기도 하다. 사람들은 밝은 미래를 열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당시 일본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기 전이므로 본보기로 삼을 견본이 없었다. 고바야시 히데오는 센고쿠 시대를 일컬어 ‘문명의 대경험’이라고 했다. 일본의 문명은 센고쿠 시대를 겪으며 밑바닥부터 개조되었다. 그 누구도 미래를 확실하게 장담할 수 없었으나 미래에 대한 확고한 의식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불확실한 시대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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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노부나가와 비교하는 나폴레옹 역시 그런 시대의 자식이다. 그런 시대였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천재가 나타날 수 있었고 울지 않는 새는 죽이고 우는 새로 바꿀 수 있엇다. 노부나가가 울게 하려던 새는 일본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울지 않았고 노부나가는 그 일본을 죽이고 새로운 일본을 창조했다. 저자는 노부나가가 일본을 창조할 수 있었던 이유를 ‘천하’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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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겐은 가문을 소중히 여겼다. 그는 ‘사람은 돌담, 사람은 성’이라는 말을 남몄다. 이는 그의 가치관을 잘 반영한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과 자신을 중십ㅁ으로 한 국토의 번영과 영토 확대를 위해 전쟁을 치렀다. 즉 그의 전쟁원리는 일족의 번영과 확대에 있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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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달리 노부나가는 계속해서 본거지를 새로운 곳으로 옮겼다. 이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과 자기 가문을 부정하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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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또는 ‘천하포무’라는 사상은 자기 가문을 부정하는데서 출발한다. 이와 달리 신겐에게는 가문을 부정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가 과연 천하포무의 뜻을 품었을지 의심스럽다. 그들은 주변의 작은 분국을 흡수하여 자기 영토를 넓히는데 혈안이었다. 그들에게는 천하라는 개념이 없었다ㅓ. 설사 그들의 손에 천하를 쥐어준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을 것이다. 천하를 대상으로 자아를 확대,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센고쿠 시대를 이끌어갈 참신한 사상이며 현실적인 이념이지만 굳이 모든 것을 걸면서까지 천하를 향해 질주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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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는 전쟁의 천재였다. 그러나 센코쿠 시대에 그만 전쟁의 천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노부나가처럼 천하를, 일본을 무대로 생각할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 그들이 노부나가에게 이길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라 저자는 말한다. 다시 말해 노부나가의 군대는 노부나가의 ‘천하’라는 비전에 이끌렸기에 천하제일의 군대가 될 수 있었지만 노부나가의 경쟁자들은 단지 자신의 가문을 위한다는 것 이상을 제시하지 않았고 비전을 제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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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는 센코쿠 시대의 해방자였다. 천하포무는 정의와 불의의 관념을 타파하는데서 시작된다. 노부나가는 기묘한 원석을 자기 내부에서 꺼내어 보여주었다. 반노부나가 동맹군은 특권을 유지 강화하려는 자와 빼앗긴 특구너을 회복하려는 자, 신흥세력으로 부상하려는 자 등 서로 목적이 다른 무리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구심점은 물론이고 어떠한 이상도 없었다. 이와 달리 노부나가군에게는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노부나가라는 하나의 이상이 존재했으며 이것이 통일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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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해방자가 되려는 노부나가를 히데요시는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노부나가 군의 대다수가 그렇듯 “히데요시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사회의 전통적 질서와 계층을 무시한 노부나가라는 자기장이 있었ㅎ기 때문이다. 노부나가라는 자기장이야말로 홀로 앞장서서 새롭게 개척하려는 세계이며 그를 중심으로 확대되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영역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자기장은 노부나가 독재 아래 있는 일종의 공화제라는 느낌을 준다. 즉 천하포무는 노부나가라는 자기장의 천하제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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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자기장은 노부나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다. 노부나가의 후계자인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를 대신해 그 자기장의 중심이 될 수 없었다. “노부나가 덕분에 한낱 하급무사 출신에 불과했던 자신이 자유를 얻어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으므로 히데요시도 노부나가만큼은 진심을 다해 섬겼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 군에 들어가면 자기도 해방되어 좀 더 새로운 힘을 발휘할 수 잇다고 생각했다. 이에야스 시대에 넓은 소유지를 확보한 다이묘 대부분이 노부나가 밑에서 입신양명의 뜻을 이룬 자들이다. 그들의 으뜸이었던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후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자로서의 노부나가와 계승자로서의 히데요시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랐다. 노부나가는 산업, 교통, 유통, 무역의 진흥과 정신세계의 자유를 목표로 일관된 정책을 펼쳤다. 이를 통해 우리는 노부나가의 머릿속에 새롭고 바람직한 일본의 모습이 그려져 있음을 알 수있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이다. 이것을 실현하려고 노부나가는 끊임없이 노력햇다. 그가 말하는 천하포무는 단순한 천하통일이 아니라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상없이는 천하통일도 무의미하다. 이는 훗날 모모하고 터무니없는 조선출병을 단행한 히데요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히데요시에게는 정복원리와 해방에 대한 어떤 이상과 기대도 찾아볼 수 없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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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노부나가의 운명이었다. “노부나가에게는 전쟁과 평화라는 개념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오로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앞장섰다. 그러기 위해 때로는 전쟁이 불가피했으며 때로는 평화를 유지해야 했다. 노부나가의 전쟁은 가문을 번영시키거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전쟁은 천하포무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목표는 일국을 넘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쇼군이 되어 일본을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다. 명예심을 과시하려는 것도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자기가 열어갈 새로운 세계의 이미지를 널리 알리고 그뜻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노부나가는 전쟁으로 변화를 추구했으며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매진했다. 이는 자아의 현실과 시대의 현실, 즉 현재를 철저하게 변화시키는 것이 노부나가가 꿈꾸는 천하포무였다. 그의 정신세계에서 현재는 항상 새롭게 창조되었다. 노부나가는 천하의 현재를 변화시키기 위해 곧바로 질주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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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히데요시를 포함한 그의 부하들은 현실적인 인간이었다. 노부나가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비현실성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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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개방하고 보편화하려는 의도를 바탕으로 무명장수를 등용하고 이제 막 이렁서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쓰나가 히사히데에에게 손을 내밀었다. ‘노부나가처럼만 하면 된다는 말이지?’하고 쉽게 생각했다가는 큰코 다친다.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노부나가만큼 따라가기 힘들고 이해하기 힘든 인물도 없다. 실제로 노부나가를 따라가려다 보면 또 하나의 노부나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부나가를 거울로 삼아 자기 모습을 비춰보게 된다. 다시 말해 노부나가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자아상을 찾아내고 그것에서 노부나가의 그림자를 지우려는 움직임이 시작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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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가 선두에 서서 미노를 공략할 때까지만 노부나가와 추종자들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그들은 자기 운명을 노부나가에게 맡겼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눈앞에는 천하라는 광대한 무대가 펼쳐졌다. 천하라는 관념은 노부나가의 견해와 대략 일치하므로 각자 원하는 자아상을 노부나가라는 거울에 비춘다. 그런데 이를 통해 노부나가의 그림자를 지우기 시작하여 결국 그와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골은 점점 깊어진다. 이 무렵부터 노부나가는 독재자의 기질을 드러냈다. 그는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적들은 경멸하고 자기를 추종하는 아군은 신뢰했다. 그런데 아군이라도 자기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노골적으로 경멸했다. 노부나가를 대신하여 새로운 정신세계를 접하고 날카로운 투시력과 성찰력을 발휘할 부하가 없었으므로 그는 스스로 독려하며 모든 것을 직접 부딪쳐 깨달음을 얻어야 햇다. 노부나가와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 사이에 침범하기 어려운 고독의 영역이 발생하고 점점 확대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팽이같이 혼자서 빠르게 돌아가는 인간 주변에는 고독의 영역이 필연적으로 형성되는지도 모르겠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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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이야 천하포무라는 노부나가의 구상을 익히 알고 잇으나 당시 사람들에게 노부나가의 싸움은 목적도 끝도 없는 전쟁으로 보엿다.” 그것은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나폴레옹은 전쟁을 좋아하여 복고왕정과 자유주의자들에게 ‘코르시카의 식인귀’란 공격을 받았다. 탈레랑은 나폴레옹이 전쟁의 천재임은 인정하나 정치가나 외교가로서는 낙제생이라고 비평했다. 또 그는 잇달아 승전보를 터뜨리는 나폴레옹에게 진지하게 충고햇다. ‘승전국은 패전국에게 관대한 손길을 보내고 동맹세력의 일원으로 만들어 되풀이되는 패배로 상실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는 정책을 펼쳐햐 한다.’ 이러한 정책을 실시한 대표적인 인물이 히데요시다. 그러나 노부나가와 나폴레옹은 이 같은 방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우리로서는 근접하기 어려운 뭔가 다른 계산이 있었다. 융통성 있는 히데요시의 방식이 천하를 통일하기 쉬운 것은 사실이나 노부나가가 이루려던 천하포무와 차이가 있다. 노부나가는 밑바닥부터 현실을 변화시켜 세상을 새롭게하고자 했다. 고바야시 히데오의 ‘고흐의 편지’에서 인용해보자.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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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머릿속은 무한성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며 자기만의 새로운 양식을 얻으려는 노력으로 늘 복잡했다. 본인도 어쩔 수 없는 성향이었던 모양이다. 잠깐의 휴식도 잠도 허락하지 않고 뭐라 이름을 부여하기 어려운 힘이 그를 지배하며 부추기는 것처럼 보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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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전쟁은 무한성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며 양식을 얻으려는 노력, 또는 전쟁과 정치의 이음매다. 여기서 양식은 전쟁의 스타일이 아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양식, 평범한 인간의 양식을 탐구하려 했던 것이다. 이 무렵부터 노부나가와 가신들 사이에 미세한 단절이 생긱기 시작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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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목적은 체제변혁이었다. 그는 현실을 깊이 파헤쳐 요소들로 분해한 뒤 이를 변화시켜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려 했다. 새로운 형태가 어떤 것인지 백성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은 노부나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노부나가에게 자신의 시책을 나폴레옹이나 메이지 신정부의 시책과 대조해보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는 누구도 본보기로 삼지 않았다. 끊임없이 현실을 파헤쳐 새로운 현실의 형태를 끌어내려고 했다.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려고 했으므로 그야말로 독창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있다. 그래서 부하들은 그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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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오십년 <br />
천하에 비한다면 <br />
덧없는 꿈과 같은 것 <br />
한 번 태어나서 <br />
죽지 않는 자 그 누구인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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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가 부르던 노래이다. 이해받지 못한 주군에 대한 모반이 끊이질 않았다. 자신이 부르던 노래의 50세를 채우지 못한 49세에 노부나가는 총애하던 부하 미쓰히데의 손에 죽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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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369/36/cover150/8950918625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0918625</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인문/사회/역사</category><title>도시의 영혼 - [도시개발, 길을 잃다 - 대형 개발에 가려진 진실과 실패한 도시 성형의 책임을 묻다]</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146856</link><pubDate>Sun, 16 Oct 2011 15: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14685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762924&TPaperId=514685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315/43/coveroff/895276292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762924&TPaperId=514685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도시개발, 길을 잃다 - 대형 개발에 가려진 진실과 실패한 도시 성형의 책임을 묻다</a><br/>김경민 지음 / 시공사 / 2011년 09월<br/></td></tr></table><br/>외젠 앗제는 공공기관이 고객인 상업사진가였다. 그의 일은 어디까지나 고객이 지정한 건축물과 풍경을 찍는 것이었고 그 결과물은 유리원판으로 십여장씩 개인 고객들에게 백여장씩 공공기관에 팔려나갔다. 그가 하는 일은 그와 같은 일을 하던 다른 동료들처럼 파리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앗제의 사진은 특별햇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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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제는 “20세기 사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진가들 자신이 사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영혼이 없는 상업사진이라 치부하기엔 “그의 작품의 아름다움은 당혹스럽다.” 앗제는 기록을 남긴다는 의뢰의 목적대로 파리를 찍었다. 그러나 다른 동료들과 달리 그가 찍은 파리는 ‘앗제의 파리’라 불린다. 앗제의 파리는 “동적이며 만져질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앗제의 이미지를 관객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그 안으로 빨려드는지 관찰해보라. 우리는 사진의 공간을 소유하고 이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이 들게 하는 사진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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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앗제의 사진은 “위안과 놀라움과 감동을 선사하기는 하지만 좀처럼 매혹시키는 법은 없다.” 앗제는 무대의 주연이 아니라 조연만 찍었기 때문이다. 앗제에게 도시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무언가를 소비하며 정신적인 휴식을 찾는 공간”이엇다. 그러나 앗제가 찍은 사진은 그 도시의 드라마 자체가 아닌 드라마의 배경인 미장센이었다. 건물에 사는 사람과 그들의 삶보다는 그 배경인 건물을 찍엇고 사람들이 사고 소비하는 자체보다는 그 대상인 상품들과 그 상품이 놓인 진열장을 찍었다. 무엇이 그를 그런 배경에 몰두하게 했을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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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앗제의 사진작업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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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을 다루는 영화에 보면 커다란 삼각대 위에 올려진 카메라에 고개를 쳐박고 천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찍는 사진사를 볼 수 있다. 앗제가 들고 다닌 사진기는 그런 사진기엿다. 건물을 찍기 위해선 그런 커다란 사진기가 필요했다. “큼직한 뷰 카메라와 그에 딸린 올망졸망한 가방들을 끌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일이 얼마나 힘든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예순여덞이란 나이까지 앗제가 헤라클레스 같은 괴력을 내야 했던 이유는 아마도 소유욕이었을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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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옛 파리(Vieux Paris)의 모습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소유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옛 파리의 모습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고? 사실과 다르다. 앗제의 파리는 보행자. 노동자 계급, 좁고 지저분한 안뜰을 감추고 있는 전기 산업화 단계의 별볼 일 없고 미천한 파리엿다 ‘다른 사람들’의 파리가 아니더라도 그저 보통 사람들의 파리일 뿐이다.” (이상 Gerry Badger ‘외젠 앗제’에서 인용, 요약)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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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찍은 보통 사람들의 파리는 “오스망과 황제가 의도했던 것이 무엇이든 간에 ‘위험한 계급’과 불건전한 가옥과 산업을 도심에서 추방하는 일”(데이비드 하비)때문에 밀려나 사라져 버릴 운명에 놓인 것들이었다. 오스망이 만든 “널찍한 거리를 거니는 부르주아의 파리나 부르봉 왕조의 파리는 앗제의 진정한 관심 밖이었고 그의 거대한 계획과는 무관햇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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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망의 업적은 근대 도시계획의 위대한 전설이 되었다. 황제의 지원을 업고 자본과 노동의 잉여를 광대한 공공사업계획으로 흡수하는 수단으로 무장한 그는 수도의 사회적 경제적 삶의 공간적 틀을 재조직할 일관성 있는 계획을 고안했다. 오스망은 ‘다양한 지역적 상황을 충분히 적절하게 조화시킬 수 잇도록 상세하면서도 전반적인 계획’을 추구햇다. 도시공간은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되고 다루어지며 그 안에서 도시의 상이한 구역과 상이한 기능들은 상관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전체를 형성한다. 도시공간의 전체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때문에 오스망은 대도시 지역 내 공간질서의 합리적 진화를 위협하는 불균등한 개발이 진행되던 근교를 병합하기 위해 격렬한 투쟁을 벌여야 했다. 1860년대에 그는 끝내 승리했다.” (데이비드 하비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오스망의 승리 덕분에 우리는 모두가 아름답다 말하는 오늘날의 파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공짜 점심은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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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에서 미셸 푸코에 이르는 비판적 지식인들은 오스만의 도시 계획이 프랑스혁명 이후 폭동과 소요의 중심이 된 파리를 권력의 입장에서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한다. 거미줄같이 복잡한 골목길로 흩어지는 군중들을 통제하는 방법은 미로를 없애고 대로를 건설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겉으로 내세운 대로 건설의 목표는 비좁고 비위생적이고 불편한 파리를 개방적이고 위생적이고 편리한 도시로 만드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 파리 시민들에 대한 일상적 감시의 효율을 높이고 신속하고 용이하게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오스만 이전의 ‘오래된 파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오스만의 도시계획은 기억으로 가득 차 있으며 다양한 모습의 매력적 파리를 파괴했고 그 결과 파리는 영혼이 없는 도시가 되었다고 한탄한다.” (정수복)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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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제에게 사진은 권력에 밀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파리의 영혼에 대한, 상상적 소유였다. “그것은 프루스트적인 의미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자’하는 개인적인 추구이고 두번째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소유, 즉 자기가 속한 계급에게 프랑스의 문화를 되찾아 주고자 공공 문서 보관소에 조심스럽게 자기만의 소리를 불어넣는 행위를 가리켰다. 그러므로 앗제의 광범위한 테마는 여러 평자들이 결론지었듯이 단지 프랑스 문화유산의 목록을 작성하고 그것이 지닌 정신을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뛰어난 감수성과 감각있는 눈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앗제의 작품이 지니는 정령숭배적 경향이나 우울증, 사랑스러움 등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해줄 인물, 그의 삶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이점이 앗제가 지닌 진정한 가치이며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시적인 답변을 제시하는 사진작업을 해온 모든 작가들에게 그가 남긴 유산이다.” (Gerry Badger)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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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앗제의 유산이, 앗제의 파리가, 무엇이었건 역사의 승자는 오스망의 유산이고 오스망의 파리였으며 그의 파리는 이후 전설이 되어 모든 도시계획의 모범이 되었다. 그리고 도시의 영혼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오스망과 앗제의 투쟁은 지금도 계속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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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망에게 파리는 제국의 수도다워야 했다. 그런 파리에서 “저소득층이 모여사는 슬럼은 없어져야 할 대상이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에 유행했던 도시미화운동은 오스망의 모범생이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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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미국에서 시작된 도시미화운동은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중산층 이상의 계층은 저소득층 때문에 도시가 불결해지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고 유럽도시가 주는 낭만이 미국에도 필요하다는 유럽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유행했던 사회다윈주의는 “도덕의식과 시민의식이 부족한 열등한 저소득층 때문에 도시가 열악해졌다”고 암시햇다. “도시는 윤리적 질서가 있어야 하고” 시민은 마땅히 지역사회의 윤리적 가치를 공유하고 “시민의식과 시민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도시의 주거환경을 아름답게 바꾼다면 저소득층 주민들을 계도할 수 있다고 보았고 아름다운 도시건설에 매진했다. 도시는 아름다운 환경과 함께 그 기능이 원활해야 긍정적인 이미지를 창출한다고 믿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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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도심에 사는 저소득층 주거지”는 사라져야 햇다. 그렇게 사라진 공간에 “그들은 넓은 오픈 스페이스와 고대로마식 기념물인 거대한 건물, 아름다운 거리 조형물, 공원”을 새웠다. 오늘날 센트럴 파크를 중심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뉴욕은 그때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름다운 뉴욕은 ‘그들만의 도시’가 되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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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과 파리에 공원이 건설되자 뉴욕에서도 거대한 공원이 바람직하게 여겨지기 시작했고 아직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넓은 지역을 공원용으로 남겨두었다. 센트럴 파크가 건설되어 모양새를 갖추고 매력적인 모습을 띠게 되자 이 공원은 자석처럼 주택가를 북쪽으로 끌어들이는데 일조했다. 뉴욕의 부자들이 센트럴 파크 근처에 정착할 무렵 그들은 정말 굉장한 부를 자랑햇다. 센트럴 파크는 위치상의 이유로 인해 초기에는 주로 부자들만 찾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부자들의 핍스 애버뉴로의 이주가 절정에 달했을 때 그들은 핍스 애비뉴의 공원 쪽에 저택을 짓기 시작햇다. 많은 수의 대부호들이 이곳에 와 살면서 다른 지역에서 축적한 재산을 향유했다. 뉴욕의 오페라하우스에 박스석을 보유하는 것, 센트럴 파크에서 타고 다닐 마차를 소유하는 것, 핍스 애비뉴에 저택을 가지는 것 그리고 뉴포트에 루이 16세 시대 건축양식의 휴일용 별장을 두는 것이 네바다에서 온 은광왕들과 여왕들, 피츠버그에서 온 철강황, 시카고에서 온 곡물왕,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철도왕, 클리블랜드에서 온 석유왕들이 지닌 야망의 절정이었다.” (마크 기로워드)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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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공짜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대가를 낼 수 있는 사람의 것이다. 오스망의 파리는 아름답지만 프랑스인들은 그 아름다움의 대가를 지금도 치뤄야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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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거리를 따라 나란히 서 잇는 그 많은 5층짜리 건물들이 선사하는 기적적인 통일감을 즐기는가? 그것 역시 오스망의 작품이다. 오페라 거리는 어떠한가? 마찬가지이다. 프랑스의 그 모든 화려함 아래에는 깨끗한 물을 쓰레기로부터 분리해주는 하수시스템이 놓여있다. 이 역시도 오스망 덕분에 생긴 것이다. 1853년부터 1870년까지 오스망은 파리에 있는 건물 절반 이상을 없앴다. 오스망은 사실상 도시를 구하기 위해 도시를 파괴햇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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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없는 도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셰익스피어의 말이다. 사람들에게는 건물이 필요하다. 도시는 건품을 새로 짓거나 증축함으로써 성장하고 도시가 건물을 짖지 않을 때 사람들은 도시의 인접성이란 마술을 경험하는 것을 방해받는다. 도시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도시의 일부를 파괴해야 한다. 파리를 보존하기 위한 오스망의 현대적 욕구는 과거 적정한 돈만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었던 파리를 오늘날 부자들만 즐길 수 있는 부티크 도시로 바꾸어 놓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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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역사는 그곳에서 무일푼으로 성장기를 보냈던 위대한 예술가들의 이야기로 가득하지만 오늘날 어떤 가난한 예술가들이 파리 중심부에서의 생활을 감당할 수있는가? 장소가 건설활동을 과도하게 제한할 경우 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물가는 꾸준히 오르는 스테그네이션에 빠질 위험이 커진다. 도시의 역사가 도시를 구속한다면 도시는 그 가장 위대한 자산인 ‘개발능력’을 잃게된다.” (에드워드 글레이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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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론 오스망의 제자들은 역사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제자들은 오스망에게서 아름다움이란 가치만 빌렸고 오스망의 수제자였던 미국의 도시미화운동은 “태평양을 건너 인도와 아프리카의 영국식민지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20세기 중반에는 파시즘 정권의 도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무솔리니 치하의 로마 그리고 나치 정권의 베를린 개조계획은 기본적으로 도시미화운동을 사상적 토대로 삼았다.” 파시즘과 오스망(그리고 그 제자인 도시미화운동)은 같은 시선으로 공간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시선이라는.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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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권력의 시선으로 재편된 공간의 아름다움은 “피상적인 시각효과”일뿐이엇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는 영혼이 빠져있었고 외모만 아름다운 성형미인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없는 공간의 성형으로 영혼도 치유한다는 전제가 잘못된 것이다. 도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도시가 아름다워졌다해도 지역주민들의 의견이 무시되고 도시개발의 피해가 저소득층에 집중되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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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있는 세계 도시 서울 <br />
한강을 서울의 도시 브랜드로 <br />
한강을 도시발전 전략의 거점으로 서울의 도시혁신촉진 <br />
고품격 시민 문화 창조 <br />
상징적 건축물 조성을 통한 서울의 이미지 제고 <br />
밤이 더 아름다운 한강 야경 연출 <br />
모뉴먼트” <br />
서울시의 ‘한강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의 키워드들이다. 어딘가 많이 들어본 것이다. 60년대 이후 미국에선 포기한 도시미화운동의 키워드를 반복하고 잇다. “도시미화운동 방식이 태동한 역사적 배경과 그 진행 방식이 21세기 서울에서 재현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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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공원을 단장하고 접근성을 높여 시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것은 그 가치를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8개 정비 구역이 기본적으로 부동산 개발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으나 주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서울시가 일방적으로 진행한다는 점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과거의 재개발과 달리 서울시가 배제하려는 사람은 저소득층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8개의 정비구역은 압구정동과 동부이촌동, 반포의 고소득층 주거지역에서 일반 서민들이 사는 지역까지 모두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이다. 그런데도 서울시는 일방적인 계획안을 발표했고 주민들의 반발은 거세다. 2009년 9월 강남구청이 압구정 주민 6천명을 대상으로 주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98%가 반대했다. 가끔 일간지에 압구정 주민들이 ‘공공성’ 회복에 반대한다는 뉘앙스의 기사들이 실린다. 여기서 무엇이 ‘공공성’이냐는 것이다. 기존 아파트를 철거하고 오픈 스페이스와 공원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이 ‘공공성’이 될 수는 없다. 오픈 스페이스의 직접적인 수혜자는 거주민일 것이다. 그들은 본인이 거주하는 초고층 주상복합건물에서 내려다보는 한강의 절경과 공원의 쾌적함을 매순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픈 스페이스를 즐기기 위해 많은 돈을 주고 아파트를 구입해서 거기에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제값을 지불하고 즐기기 때문에 진정한 공익은 간접적인 수혜자들이” 가끔 지나며 느끼는 심리적 안정감과 쾌적함이 전부이다. “오픈 스페이스를 늘려 공공성이 획적으로 증대될 거라는 서울시의 주장만큼 공공성의 양이 엄청나게 증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공성이라는 이름 뒤에 제값을 지불하고 사는 중산층 이상의 고소득층이 공공성의 혜택을 받는다면 이것이 과연 얼마나 공익일 수 있는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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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 뉴타운 계획에서 서울시가 말하는 공공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울시는 ‘강북에 고품격 주거환경과 교육여건을 조성하여 지역간 격차를 해소하고 삶의 질을 개선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뉴타운을 만들면 주민의 소득이 올라가는가? 계획의 비밀은 추방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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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범지구와 제2차 뉴타운지구의 주민구성을 보면 세입자가 전체의 72.53%에 이른다. 특히 영등포 지역 뉴타운은 전체 세대의 86.8%가 세입지다. 뉴타운지구 주민의 월평균 가구 소득은 187만원으로 서울시 전체 평균 303만원의 2/3 수준이며 세입자 가구 중 순자산 4000만원 이하는 66.6%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저소득층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소득이 단기간에 획기적으로 오르지 않는 이상 아파트 입주자격을 얻는다 한들 입주비용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임대아파트를 많이 지어야 함에도 비중은 17%를 넘지 않는다. 오히려 임대아파트가 없는 지역조차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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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거주민의 낮은 소득수준과 신규공급된 아파트가 중대형 위주인 점을 볼 때 기존 거주민이 재정착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2007년 자료에 의하면 뉴타운 재정착률은 17.1%에 머문다. 따라서 지역격차해소라는 목표는 기존주민들의 소득향상을 통해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 주민들을 중산층으로 바꿔치기함으로써 격차해소를 줄이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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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타운 정책의 목적이 기존 거주민의 삶을 개선하는 데 있음을 밝혔는데도 현실에서는 기존 저소득층의 지역 커뮤니티가 붕괴되면서 새로운 중산층타운으로 변모하고 잇다. 구청 입장에서는 중산층이 들어옴으로써 주택가격이 상승하고 주변상권이 활성화되어 자신의 수입인 세금이 증가할 수 있기 때문에 내심 이를 조장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시의 22개구가 뉴타운을 경쟁적으로 추진하는 이유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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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고품격이며 누구의 삶의 질인가? 한세대 전에 끝난 냉전을 우리는 아직도 살고 있듯이 우리는 100년전의 도시계획 패러다임에 따라 아직도 살고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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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까지 “미국의 도심재개발과 도심을 관통하는 고속도로 건설은 대규모 강제이주를 동반햇다. 피해자의 상당수는 흑인을 비롯한 저소득층이었다. 집에서 쫓겨난 그들을 받아줄 정부의 임대 아파트 수는 매우 한정되어서 입주가 아주 힘들었다. 그야말로 흑인 저소특층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엇다. 언론사의 보도는 재개발의 부정적인 측면에 비판적이라기보다 재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정치인들에게 동조적이었다. 이는 저소득층 주민들의 대규모 이전을 전제로 한다는 점과 임대료 상승의 폐단으로 저소득층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는 점에서 서울에서 진행되는 뉴타운 개발의 폐해와 비슷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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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60년대 이후 미국과 유럽의 도시계획은 달라졋다. “미국의 주택 재개발의 과거 모습은 현재의 우리와 많이 닮았지만 현재 모습은 매우 달흐다. 단적인 예는 공공조직이 주민의 이익을 대변하여 공공 디벨로퍼로서 도시재개발 사업을 주도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의 공공기관은 주민을 대변하지 않는다. 공공기관에게 주민은 계획을 통보해주어야 하고 단지 설명해주어야 하고 동의만 해주면 되는 수동적인, 권리가 없는 ‘대상’일 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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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개발구역이 지정되기 2년 전에 일방적으로 서부이촌동 아파트를 편입한 계획안을 발표한 것은 지역 커뮤니티의 이익을 수호하는게 아니라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도시계획 절차상의 문제 되에도 용산국제업무지구의 개발사업자를 선정하는 절차를 들여다보면 여기에도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절차가 없다는 걸 알게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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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비교해 미국은 개발과정에서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놓았다. 뉴욕시의 경우 개발행위는 세단계를 거치는데 첫째 단계인 지역주민협의체에서 개발에 대한 승인을 얻어야 시 의회와 시장의 승인을 얻는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뉴욕의 디벨로퍼들은 지역주민협의체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 지역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정확히 인지하고 이를 만족시켜야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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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한국에선 어떤가? “공무원들을 사석에서 만나 개발사업활성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대부분이 환지방식(개발 후 토지를 주는 방식) 대신 수용방식(돈을 주고 주민을 내보내는 방식)을 선호한다. ‘개발방식이 깔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역주민이 개발과정에 개입하면 번거롭기 때문에 주민의 참여를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br />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 목소리를 내는 지역 커뮤니티가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지역 커뮤니티는 말 그대로 지역주민들의 모임이다. 다만 미국의 지역 커뮤니티가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지역 커뮤니티에 많은 지역 주민이 참여하며 교육, 범죄, 경제활동, 그 밖의 사회 이슈 등 지역의 문제점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다. 따라서 매우 자연스럽게 지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리더가 된다. 또한 이들은 부동산 개발이라는 특수한 목적으로 모인 게 아니어서 우리나라의 주택조합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나라의 조합은 주택개발이라는 경제적 목적을 위해 뭉친 것이지 자녀들의 교육이나 지역의 경제 활동 활성화, 범죄 같은 이슈에 대해 묻고 토론하는 집단이 아니다. 어찌보면 미국에서 지역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이유는 미국의 장점인 민주주의의 역사에 뿌리를 둔 것인지도 모른다. 특정 이슈에 대해 주민들이 의견을 교류함녀서 타협점을 찾고 합리적 선택을 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지역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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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무원의 눈에 주민은 ‘대상’일 뿐인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시민이 시민인 이유는 그들이 집단을 이룰 때이다. 그런 시민이 없을 때 국가의 눈에는 사람이란 없다. 마음대로 움직일 숫자만 있다. ‘사람들이 없는 도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도시의 영혼은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이 모인 커뮤니티이다. 그러나 서울에는 영혼이 있는가? 아니 있었던 적이 잇는가? <br />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315/43/cover150/8952762924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762924</link></image></item></channel></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