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Cura님의 서재 (Cura 서재) &gt; 수신/심리</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category/21008854</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hu, 17 May 2012 14:22:53 +0900</lastBuildDate><image><title>Cura</title><url>http://image.alad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category/21008854</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Cura</description></image><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세상은 경이로운 것 -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 세계적인 뇌과학자가 우울한 현대인에게 보내는 감동과 희열의 메시지]</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618948</link><pubDate>Mon, 14 May 2012 00: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61894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355831&TPaperId=5618948"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633/22/coveroff/899235583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355831&TPaperId=561894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 세계적인 뇌과학자가 우울한 현대인에게 보내는 감동과 희열의 메시지</a><br/>게랄트 휘터 지음, 이상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04월<br/></td></tr></table><br/>‘뇌가 유죄입니다’ 얼마전 미국의 법정에서 나온 말이다. 피고가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뇌가 살인을 했다는 말이다. 황당하게 들리는 이 말은 근거가 없지는 않다. 뇌과학의 설명에 따르면 피고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유전자를 타고 났고 그 유전자가 살인을 꺼리지 않는 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피고의 살인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 유전이며 뇌란 말이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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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자는 묻는다.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 생물학적 조건이 우리 안에서 무엇이 일어날지를 결정짓지는 않는다. 생멸 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생물이 살아온 역사에 좌우된다. 즉 생명 체계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매개에체서 일어나는 상호작용 속에서 생성해 나가야 한다. 따라서 생물학적 결정론을 운운하는 것은 한마디로 잘못이다.” 인간은 타고난 한계 내에서만 살아간다. 그러나 그 인간이 무엇이 될지는 그 한계 위에서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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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의 문제이다. 이 주제는 철학과 사회과학에선 구조와 헹위자란 이분법으로 반복된다. 그 이분법에 대해 맑스는 이렇게 정리했었다. “인간은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대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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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자유의지 또는 결정론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우리는 닥치는 대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중요하게 여기는 것만 배운다. 이때 어린아이 또는 노인으로서 누군가 무엇을 정말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에 관심을 갖고 그리하여 그리하여 열광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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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누구 누구는 어떤 사람이라 말할 때, 나는 어떤 사람이라 말할 때 그 내용을 정의하는 것은 뇌의 뉴런들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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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향성/내향성, 신경성, 성실성, 친화성, 개방성, 5 factor model의 변수들이다. 최근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이런 변수들은 유전적으로 결정되며 유전으로 결정되는 것은 뇌의 호르몬 시스템이라 한다. 성격은 유전이란 말이 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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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5가지 변수로 모든 사람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 변수를 타고 났더라도 그 변수의 결정도와 그 변수가 발현되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전으로 타고난 것이 어떻게 구체화되는가는 뇌의 건설현장에 달려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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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가 개인별로 고유한 특징을 띠며 형성되는 기본 원리는 실상 아주 간단하다. 애초에 뇌 안에는 언젠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이 준비되어 있다. 출생 전 이미 과다한 신경세포가 만들어지는데 이 중 어떤 식으로든 기능적인 연결망에 편입되는 것만이 마지막에 만고 나머지는 없어진다. 평균 1/3이 사라진다.” 그리고 무엇이 살아남을지는 환경에 달려 있고 그 환경은 처음에는 가족이며 후에는 친구, 선생님 등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성장기의 인간에게 영향을 주면서 복잡한 뉴런 연결과 시냅스 회로의 형태로 뇌안에 자리를 잡는 가장 중요한 경험은 다른 아닌 타인과의 생생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디른 동물의 뇌와 구별되는 뇌 부위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경험들이 쌓이면서 형성되고 구조를 갖추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뇌는 사회적 산물이며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가는데 최적화되어 있다. 뇌는 사회적 기관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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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ure or Nuture, 본성이냐 양육이냐란 논쟁은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자유의지냐 환경이냐의 논쟁도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맑스의 말마따나 인간은 자신을 만들기 때문이며 그렇게 만들어지는 자신은 그가 의도한 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만드는 것이 인간 자신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도 그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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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일상 세계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이 아이의 뇌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아이가 삶의 과제를 헤쳐 나가는데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 즉 아이 자신이 열광하는 것들만이 영향을 준다. 아이들에게 이는 우선적으로 자기 몸의 기능과 동작을 조절하는 일이고 이후에는 가장 중요한 애착 대상과 관계를 맺어 가는 일, 그리고 점점 복잡해지는 일상 세계를 하나하나 발견하고 새로이 만들어가는 일이다.” 아이가 열광하는 것,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그것은 바로 긴밀한 유대의 경험, 그리고 성장하고 자기만의 능력을 습득해가는 경험이다. 이 두가지는 기본 욕구로 자리잡으면서 장차 아이의 기대치를 좌우하게 되낟. 그리하여 사람은 평생 동안 유대감과 자유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관계를 추구한다. 두 기본 욕구 중 어느 하나가 채워지지 않으면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결핍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찾는데 실패한 사람은 일단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라도 얻으려 들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리만족이라 불리는 것인데 이제부터 그 중요성이 커지면서 그 사람이 원래 지녔던 열린 자세, 관계를 맺는 능력, 무궁무진한 호기심과 창조욕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게 된다. 그러면서 TV 시청이나 채팅, 쇼핑, 아니면 남태평양 바다에서 보낼 다음 휴가 여행처럼 실제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쉽사리 중요성이 부여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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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유대감과 자유를 다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두 가지 기본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하나는 유대관계를 맺고 친밀해지고자 하는 욕구 다른 하나는 성장하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 자유롭고자 하는 욕구다. 다시 말해 남들과 함께 자기 가진을 뛰어넘어 성장할수 잇을 때 인간은 행복하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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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행복을 결정하는 두가지 욕구는 서로 모순은 아니더라도 긴장관계에 있다. 남과 유대감을 갖고 소속감을 갖고 싶은 욕구 때문에 “아이들은 타인들 또 그들의 행동방식, 확신, 의견, 생각 등에 점점 크게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로 인해 아이 뇌 안에 생기는 새로운 회로 패턴들은 아이 몸의 경험과 지각을 통해 형성된 이전의 뉴런 연결망과 불화를 일으킬 소지가 크다. 이를테면 몸을 움직이고 싶은 욕구가 처벌이나 심지어 어른들의 본보기만으로도 제약을 받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멋대로 뛰어다니며 괴성을 지르는 아이를 생각해보라. “유아의 역우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몸 전체를 사용하려는 충동이 아직 남아잇지만 이 역시 나중에는 억제되기 마련이다. 불안과 고통 지나친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감정들도 타인과 함께 살아가면서 점점 통제를 받게 된다. 이 같은 적응과정을 거치면서 어릴 적 자신의 사고, 감정, 행동에 주로 영향을 끼쳤던 것, 곧 자기 고유의 몸 체험, 감각 체험으로부터 차츰 멀어진다. 또 그때까지 자아를 이루던 아주 자연스럽고도 근원적인 요소들을 일제히 억누르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간다. 몸 자체를 포함해 몸에서 비롯되는 욕구들은 소속감, 인정받기, 정체성 발달, 자아 개발 등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걸림돌로 여겨지면서 억압되고 분리된다. 어쨌거나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야말로 지성과 감정, 두뇌와 몸을 분리시키는 그 같은 기이한 순응과정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이 순응의 과정이 개별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결과는 똑같다. 태어난 후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쌓은 그리하여 뇌안에 자리잡게 된 경험들은 이전의 몸 체험, 감각 체험과 모순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낙원에서 쫓겨나는 성경 속 이미지는 대다수 사람들이 사회화 과정에서 체험한 내용을 아주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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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부딫히면서 아이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관심을 보이고 자신의 관심에 따라 자신의 뇌를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며 자신의 뇌를 만들어간다. “그 초기 경험이 그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 뇌를 사용할지 뇌 안에서 어떤 연결 패턴이 형성되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지를 결정한다. 이때 그들의 뇌 안에서 활성화된 회로들은 점점 효율적으로 연결되고 미끈한 길로 변하면서 처음의 좁은 ‘신경 길’이 서서히 단단한 도로가 되고 결국에는 널찍한 ‘고속도로’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고속도로는 “익숙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아 이후 그 사람의 사고와 감정, 행동을 규정한다. 자연히 그것은 기존에 획득한 능력의 유용함을 입2증할 수 있는 여건을 자꾸만 만들어내고 지속시키려 애쓸 것이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는 이유는 뇌의 고속도로 때문이다. 일단 고속도로가 건설되면 그 도로가 쓸모가 없어지더라도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새 도로를 내기는 무척 어려워진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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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경험들은 특정한 뉴럼 회로 패턴으로 뇌 안에 자리를 잡는다. 자주 하는 중요한 경험들은 뇌에 익숙한 자취를 남기고 우리의 지각과 사고, 감정, 행동을 좌우함녀서 계속해서 일방적인 방식으로 뇌를 사용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풍부한 지식이나 달달 외운 명제들, 닳도록 읽은 안내 책자며 교과서 따위가 아니라” 뇌에 뉴런의 네트웍으로 이루어진 고속도록 즉 “각자가 품고 다니는 표상, 내적 확신, 세계 및 인간상이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실현하고자 애쓰고 따르고 또 스스로 묶어 놓은 사슬처럼 거기에 매달려 있다. 그렇다. 스스로 묶어 놓은 것이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느니 어떻게 하면 세상에 잘 적응하고 어떻게 타인을 대하고 또 옷은 어떻게 입고 집은 어떻게 짓고 방은 어떻게 꾸며야 한다는 것에 관해 정해진 생각을 가지고 세상에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맑스의 말마따나 “이념은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 없는 풀려나기 힘든 쇠사슬과도 같다.” “이러한 표상이 ‘가슴’과 긴밀히 이어져 있어 ‘가슴이 찢어지지’ 않고서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게 사실이라면 결국 이들 표상은 감정과 결부되어 있”기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고통스럽고 화가 나고 슬프고 심지어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뇌 안의 고속도로는 사용한 시간이 오래될수록 더 넓고 더 튼튼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더 완고해지고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러면 인간은 늙어가면서 정신적으로 추해지고 무력해져야만하는가?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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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여기저기 헤집고 돌아다미녀서 느꼈던 기분들이 아직도 생각나는가? 믿기 힘들 정도로 만사에 활짝 열려 있었고 창조적 욕구에 불탔고 뭔가를 새로이 발견할 때마다 기뻐했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에 대해 열광했고 눈앞에 지천으로 놓여 있던 발견거리와 창조의 재료들에 열광했다. 어린이들은 하루에도 20번에서 50번까지 이런 상태를 맛보는데 그때마다 뇌 안의 정서 충추가 활성화된다. 이런 열광의 상태는 어김없이 뇌 안에 거름뿌리개를 작동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뉴런 연결망의 성장과 재족화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거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이들에게 세상은 경이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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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표정으로 아이가 묻는다.<BR>'엄마 저 소리가 뭐야?'&nbsp;<BR>'종이 울리는 소리란다'&nbsp;<BR>'아 그게 어디있는데?'<BR>흥분한 아이가 묻는다. 난감해진 엄마는 이렇게 얼버무린다.<BR>'저 멀리서 들려오는 거란다.'<BR>'그럼 '멀리'를 보여줘 '멀리'가 어디 있는데?'<BR>'............'<BR>아이는 타협안을 내놓는다.<BR>'그럼 엄마 종 만들 수 있어?'” (조앤 에릭슨)<BR><BR>흔히 볼 수 있는 부모와 아이의 대화이다. 부모를 난처하게 만드는 아이들의 이런 질문 공세는 아이들이 세상에 어떻게 열광하는지를 보여준다. 아이들이 세상에 열광하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경이이기 때문이다. 조앤 에릭슨(에릭 에릭슨의 아내)은 아인슈타인이 세기의 천재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감각의 경이를 기억하고 그 경이감을 잊지 않으면서 감각에 따라 구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nbsp;<BR style="mso-special-character: line-break"><BR style="mso-special-character: line-break"><o:p></o:p>
아인슈타인은 지진아였다. 말문이 늦게 트이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느렸다. 그러나 감각을 통한 관찰을 강조하는 페스탈로치 학교에 들어간 후 그의 재능이 꽃피게 되었다.&nbsp;아인슈타인은 일곱살까지 어떤 단어를 가르쳐주면 그 단어를 반복해서&nbsp;소리내어 읽고 다른 사람이 그 단어를 발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배웠다. 그러니 말을 늦게 배울 수 밖에 없었다.&nbsp;기하학이나 대수학, 연산법도 종이 위에 기호로 받아들이지 않고 구체적인 물체나 형태, 비율로 접근했다.&nbsp;천재란, 창조성이란 경이라는 감정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 조앤 에릭슨은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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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는 최초의 감각이 주었던 경이를 잊어버리고 '어 종소리'네 하고 무심해지고 무감각해진다. 우리는 그렇게 감각의 구체성을 잃어가면서 세상에 대한 열광을 잃어버리고 무감각해지고 무심해지면서 창조력을 잃는다.&nbsp;<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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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에게는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 하는 일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아면서 일상에 적응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법을 훌륭히 익혀 나갈수록 이 세상의 발견거리 창조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것들은 점점 중요성을 잃게 된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고 주변 환경을ㅇ 의도대로 꾸며 가는 가운데 익숙하고 정해진 틀에 안주하게 되고 뇌가 녹슬 위험도 덩달아 커진다.” 녹스는 것은 뇌만이 아니라 삶 자체이다. “삶은 매력을 상실해버렸다. 모든 것이 똑같이 중요해졌거나 똑같이 무의미해진 가운데 최적의 상태로 삶을 통제하게 되엇다. 어른들은 내면의 잠재력을 발휘하겠다는 의욕을 거의 상실한 상태다. 따라서 사는 데 무엇이 중요한지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아이들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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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되었는가? 왜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찾아 나섰던 우리가” 길을 잃었는가? 저자는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며 우리가 만든 사회를 말한다. “성과를 강조하는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이 갈수록 절감하는 현실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바로 다람쥐 쳇바퀴다. 흥미로운 점은 바퀴 속에 갇힌 사람만이 아니라 바퀼르 돌리던 장본인들도 어느덧 그런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누가 자신을 이 길로 보냈는지 누구로부터 이런 생각을 받아들엿는지 더 이상 자신에게 묻지 않는다. 그저 최대한 완벽하게 기능하기를 원할 따름이다. Eoansdp 그는 최적으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도달한 것 즉 거기서 얻은 성과물을 삶의 진정한 가치이자 핵심으로 여기게 된다. 도달할 목표가 사라질 때까지 그는 줄곧 이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 목표가 없어지면 삶의 의미도 잃는다. 그러고는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한다. 머릿속에 든 다람쥐 쳇바퀴를 보완하고 더욱 강화하는 것이 바로 분업 사회가 발전시킨 수많은 조직 및 관리 구조다. 조직으로 편성되고 관리 대상이 되는 경험을 자주 할수록 고유한 가능성을 찾고 고유한 삶을 창조해가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체험할 기회는 더욱 줄어든다. 더욱이 이런 일이 일찍부터 집중적으로 벌어질수록 당사자는 그런 능력을 스스로 발달시키는 일에 훨씬 어려움을 겪는다. 그 결과 조직 및 관리 구조라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사회적 쳇바퀴 속에서 일생동안 갇혀 지내게 된다.” 우리 자신이 만든 쳇바퀴에서 우리는 “일상 세계를 발견하고 만들어가며 느끼는 즐거움을 빼앗”겼다.<o:p></o:p>
&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633/22/cover150/8992355831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355831</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사회적 깨달음 -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 - 현대사회의 딜레마들에 불교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568309</link><pubDate>Sun, 15 Apr 2012 23: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56830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797658&TPaperId=5568309"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554/76/coveroff/897479765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797658&TPaperId=556830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 - 현대사회의 딜레마들에 불교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a><br/>데이비드 로이 지음, 허우성 옮김 / 불광 / 2012년 02월<br/></td></tr></table><br/>“적을 향한 진군은 우리 이웃, 사회, 나라와의 따스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유대감을 만들어냈고 소외와 혼란이라는 불편한 암류를 완전히 제거했다. 전쟁의 매력은 이것이다. 전쟁은 그 파괴와 대학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생에서 갈망하는 것을 줄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목적, 의미, 삶의 이유를 준다. 전장에 있으면 우리 인생의 대부분을 채우는 피상성과 권태가 뚜렷해진다. 전쟁은 우리를 고귀하게 해준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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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사태 때 테러리스트들이 비행기를 몰고 돌진한 이유는 바로 그 ‘고귀함’ 때문이다. 테러리스트들은 영적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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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촌에서 미래에 대한 별 희망도 없이 점점 쇠약해지는 것이나 TV 채널 서핑에 빠져 있거나 상점에서 쇼핑하는 것에 비해 얼마나 의기양양한 대안인가? 영적 투쟁은 죽음조차 초월할 수 있는 영웅적 정체성을 부여한다. 위험하고 혼란스럽고 격렬한 바다(현대사회)에서 종교는 형안의 항구에 내린 닻이다. 깊고도 거의 초월적인 의식수준에서 그들(종교 테러리스트)은 자신들의 삶이 통제에서 벗어났음을 감지한다. 그리고는 그 혼란의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느끼면서도 자신들 역시 그 혼란의 희생자라 생각한다. 그런 세계에서 종교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종교적, 인종적, 국가적 공동체보다는 위험에 처한 자신의 개인적 자아에 주로 관심을 쏟는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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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느끼는 무의미함은 성(聖)의 차원이 세속화된 이 세계에서 거세되었기 때문이다. “저 폭력적인 종교운동에도 일리는 있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으며 우리 또한 그들과 공유하는 기본 문제는 다른 종교들이 제기하는 위협이 아니라 이데돌로기가 아닌 체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세속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인데도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세계인 것처럼 가장ㄴ다는 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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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주의는 아주 독특하고 특이한 현상이다. 성과 속이란 대립개념은 성의 증발 때문에 태어났다. “성속의 구별은 우리의 결핍감을 달래기 위한 더욱 개인적인 길이었다. 루터는 신앙을 내면화하고 신의 거룩한 영역을 세속의 저 높은 곳에 투사함으로써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이 서로 연속한다는 중세의 세계관은 무너졌다. 그, 둘 사이에서 새롭게 해방된 공간은 새로운 것, 곧 세속적인 것을 창조햇다.” 왜 이것이 문제인가? “세속세계에는 뭔가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세속세계에는 우리의 결핍감을 이해하고 해소할 효과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인데 이는 근본적으로 영적 문제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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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핍감을 기독교에선 원죄란 말로 설명했고 여러 종교들이 그것을 설명하고 처리할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세속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더 이상 그런 처리는 가능하지 않다. “나는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옳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많은 사람을 오래 살게 하고 때로는 죽음을 육체적으로 덜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잇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공허에 대한 해답은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세상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 줌심의 바닥없는 구멍을 메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은 우리가 갈망하는 의미를 우리에게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전쟁이라는 방식은 우리의 삶의 잘못되었음을 확실히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전쟁은 우리의 개인적인 결핍을 묶어서 그것을 외부의 적에게 투사하는 단순한 방법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이 종식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근본적인 영적 문제를 해결하는 더 나은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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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방법을 불교가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런 결핍감, 뭔가 없다는 느낌, 내 인생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우리의 잘못된 자아 감각이 갖는 어두운 면으로 본다.” 즉 고(dukka)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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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 요점은 돈이 많고 건강한 사람들조차도 근원적인 불만, 곧 부단히 괴로운 불편(dis-ease)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인도의 전통에서 고란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요가도 자이나교도 그외 수많은 (불교의 입장에서) 외도들 모두 고의 문제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고를 자아감각과 연결시킨 것이 불교의 진정한 업적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교에서는 자아가 바로 고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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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란 말은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구성된다는 말이다. 자아감각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아에 대한 ‘나의’ 느낌은 습관적으로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런 무상한 과정들은 다른 과정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로부터 분리된 자아감각을 발생시킨다. 만일 그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과정을 모두 제거한다면 그것은 양파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다. 마지막에 이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문제는 우리가 無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중심에 나 있는 텅빈 구멍은 우리를 매우 괴롭힌다.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우리 자신과] 일치시킬 것도 매달릴 것도 없다는 말이다. 즉 내가 ‘무’라는 건 구성된 느낌으로서의 자아가 근거 없는 것이고 그 근거 없는 자아가 비실재성과 불안전성(insecurity)이라는 근본적인 느낌의 출몰로 괴로움을 겪는단 말이다. 자아감각은 결코 안정적일 수 없다. 그것은 안정적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o:p></o:p>
<o:p>&nbsp;</o:p>
無我란 말의 요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비실재감을 ‘내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느낌으로 경험한다.” 문제가 있다는 그 느낌, 그 불편함이 바로 고의 내용이라고 불교는 말한다. <o:p></o:p>
<o:p>&nbsp;</o:p>
우리는 그 불편함을 억압하려 한다. 결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 불편함, 자신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느낌, 결핍감을 메우기 위해 뭔가에 매달리려 한다. 그 뭔가가 전쟁이 되고 돈이 되며 명성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慾이란 결핍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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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우리가 그것으로 어떤 것이든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집단 속에서 우리가 실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기 때문에 중요하다. 명성 역시 비슷하다. 만일 내가 정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면 그만큼 나는 정말로 더 실재한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아도, &nbsp;“많은 사람들이 주목한다 해도 우리의 결핍감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욕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권력이 우리 실재의 가시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그것을 갈망한다. 히틀러와 스탈린 같은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사회를 지배햇다. 르거나 그들은 실제로 안전하다고 느낄 정도로 상황을 통제하지는 못햇다. 권력을 가장 많이 요구하는 자는 가장 지독한 편집광이 되고 만다.”<o:p></o:p>
<o:p>&nbsp;</o:p>
내가 無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에 우리는 不善하게 된다. 불교가 말하는 三毒, “탐욕, 악의, 망상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아주 곤란하게 만드는 문제 있는 동기들이다.” 그것을 불교에선 業이라 말했다. “나의 자아감각이 내가 습관적으로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있다면 업은 내가 가진 어떤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그 자체이다. 중요한 건 내 존재를 바꿈으로써 곧 내가 습관적으로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재구성함으로써 내 업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o:p></o:p>
<o:p>&nbsp;</o:p>
왜 업을 바꾸어야 하는가? “내가 만일 탐욕, 악의, 망상에 따라 움직인다면 다른 사람을 조종할 필요가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킬 뿐 아니라 나 역시 그들로부터 더욱 분리된 존재라고 느끼게 한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나의 자아’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방어하고 띄우기에 바쁘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잘못된 자아 감각을 강화한다. 내가 (삼독의 반대인) 관대함과 자비로 움직일 때 나는 여유를 갖고 마음을 열며 덜 방어적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반응하려 할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모두를 위해 고를 줄이는 쪽으로 움직이게 된다.”<o:p></o:p>
<o:p>&nbsp;</o:p>
불교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하다. “우리가 텅 비어 잇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방식이 문제를 키운다.” 무아의 요점은 “자아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자아가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었기에 제거는 불가능하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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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는 일반적으로 고통으로 번역되지만 기본적인 불편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낫다. 고란 무언가를 성가셔하는 깨닫지 못한 마음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장 근본으로 불교에서 강조하는 바는 고와 자아 사이에 연관관계가 잇다는 통찰이다. 내가 살아가고 잇는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잇다고 자아가 느끼는 것, 바로 여기에서 가장 깊은 좌절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런 분리감은 환상이며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망상이다.”<o:p></o:p>
<o:p>&nbsp;</o:p>
그러나 불교의 통찰은 새로운 질문으로 바꿀 필요가 잇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는 지옥에 좌선만 하는 사람을 위한 특별 장소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들은 지옥으로 치닫는 바깥세상에 무관심한 채 자기자신에게만 빠져서 방석에 앉아 좌선을 한다.”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고 말한다. “삼독 역시 집단적으로 작동하는가? 집단자아가 있다는 말은 집단적인 탐욕, 집단적인 악의, 집단적인 망상이 존재한다는 의미인가? 이런식으로 질문을 던지면 답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현재 경제제도는 탐욕을 제도화하고 군사주의는 악의를 제도화하며 기업화된 대중매체는 망상을 제도화한다. 이와 같은 제도화된 삼독의 본성을 깨닫는 일을 우리가 영적 수행의 결과로 얻은 개인적 깨달음만큼이나 중요하다. 실제로 방석 위에서 좌선하여 얻는 개인적 깨달음은 그러한 ‘사회적 깨달음’으로 보완될 때까지는 불완전하다. 보통 개인 차원에서 달성하는 확장된 의식을 수행의 목표로 떠올리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집단 망상을 걷어내어 사회, 경제, 생태에 관한 이분범에 감춰진 실체를 폭넓게 이애해야 한다. 개인의 고와 집단의 고가 같이 간다면 오늘의 거대한 사회, 경제, 생태적인 위기는 동시에 영적인 도전이며 그러하므로 그에 요구되는 대응에도 영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불교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이라 저자는 본다.<o:p></o:p>
<o:p>&nbsp;</o:p>
내면을 바라볼 때 나는 내가 무임을 본다. 그것이 지혜이다. <o:p></o:p>
바깥을 바라볼 때 나는 내가 모든 것임일 안다. 그것이 사랑이다. <o:p></o:p>
이 둘 사이에서 내 인생은 맴돈다.<o:p></o:p>
나사르가다타 마하라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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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5<o:p></o:p>
&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554/76/cover150/8974797658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797658</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유연하라 - [생존력 - 위기에서 살아남아 삶의 균형을 회복하는 서바이버 자질 매뉴얼]</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514310</link><pubDate>Wed, 21 Mar 2012 08: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51431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5545799&TPaperId=551431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555/68/coveroff/892554579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5545799&TPaperId=551431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생존력 - 위기에서 살아남아 삶의 균형을 회복하는 서바이버 자질 매뉴얼</a><br/>앨 시버트 지음, 이경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02월<br/></td></tr></table><br/>“유명한 사진기자 앨리슨 라이트는 라오스의 밀림 속 도로에서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너덜너덜해진 팔에선 피가 철철 흐르고 몸은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폐와 횡경막을 다쳐 숨을 쉴수도 없었다. 그 상태에서 상체의 힘으로
버스 밖으로 기어나와 누웠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고 떠들었다.” 그녀는 오랜 시간 수련한 요가와 명상을 떠올리며 고통을 견뎠다. <o:p></o:p>

<o:p>&nbsp;</o:p>

“그녀가 치료를 비슷한 것을 받기까지는 14시간이
걸렸다. 그날 밤 헬기가 자신을 수송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접하자 이제 죽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순간 앨리슨은 모든 두려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통에 항복하자
모든 아픔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졋다. 그녀는 ‘갈 준비’를 했다. 사선을 넘나드는 경험을 한 후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게다가 전에는 몰랐던 압도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사랑이엇다. 이러한 감각이 그녀의 결의를 더 확고하게 해주었다. 한동안 호흡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놀랍게도 태국으로 가는 긴 여정이
끝났을 때까지 그녀는 살아있었다”<o:p></o:p>

<o:p>&nbsp;</o:p>

본격적인 치료가 시작되었을
때 그녀는 “등과 골반, 갈비뼈가 골절되었으며 내상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심장이 튀어나왔고 비장이 파열되었고 횡경막에는 구멍이 났고 폐는 액체로 가득했다. 마취도중 숨이 멎어 외과의사가 겨우 살렸다.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그녀는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을 통제했다. 그녀는 살아남았다. 생존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뇌는 고통을 차단했다. 그래서 죽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까지도 말이다. 이런 마음 자세로 상황에 맞춰 적응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생존 전략과 태도를 수정할 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살고자 하는 의지와 모든 것을 놓아버리겠다는 마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앗다.”<o:p></o:p>

<o:p>&nbsp;</o:p>

이런 사례를 들으면
보통 놀란다. 감탄한다.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슈퍼맨의 이야기라
치부하기 마련이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딴 세상의 이야기란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일을 겪고 이겨낸 사람들은 당신과 별다를 것없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 말한다. 단지 그들의
습관이 달랐을 뿐이다. <o:p></o:p>

<o:p>&nbsp;</o:p>

“이것은 살아남아야 할 때 살아남을 수 있도록 삼라만상과 관계를 맺는 생활방식에서 비롯되낟./ 앨리슨은 일찍이 경험했던 다양한 일이 위기에 당당히 맞설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시켰다고 술회했다. 다시 말해 일상의 습관적인 방식이 위기나 비상사태에 직면해 서바이버가 될 가능성과 밀접한 관련이 잇다는 얘기다.”<o:p></o:p>

<o:p>&nbsp;</o:p>

저자는 그 습관을 3가지로 정리한다. <o:p></o:p>

<o:p>&nbsp;</o:p>

<!--[if !supportLists]-->1.&nbsp;&nbsp;&nbsp;&nbsp;
<!--[endif]-->상황에 대한 정보를 재빨리 흡수한다. <o:p></o:p>

<!--[if !supportLists]-->2.&nbsp;&nbsp;&nbsp;&nbsp;
<!--[endif]-->뭔가를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o:p></o:p>

<!--[if !supportLists]-->3.&nbsp;&nbsp;&nbsp;&nbsp;
<!--[endif]-->가능한 행동이나 반응 등 뭐든 고려한 준비가 되어 있다.<o:p></o:p>

<o:p>&nbsp;</o:p>

저자가 말하는 서바이버의
습관은 요즘 흔히 말하는 회복탄력성과 유사하다. 저자가 말하는 3가지를
보통 하는 말로 하자면 호기심, 자신감, 유연성이라 할 수
있다. <o:p></o:p>

<o:p>&nbsp;</o:p>

위기가 닥쳤을 때 재빨리
반응하는 사람은 위기에 움추려들지 않는다. 익숙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평소에 호기심을 갖고 주변을 살피면서 정보를
분석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정보와 경험이 많고 그런 습관 덕분에 갑작스런 상황이라도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황에 맞춰 자신을 바꿀줄 아는 유연함이 있다.<o:p></o:p>

<o:p>&nbsp;</o:p>

요즘 유행하는 회복탄력성과
내용은 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비슷한 자질을 말한다. 저자는 자신이 말하는 ‘서바이버 자질’을 ‘세렌디피티
자질’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세렌디피티는 그냥 행운이 아니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도 아니다. 예리한 통찰력을 발휘해 사건을 행운으로 바꾸는 능력이다.” <o:p></o:p>

<o:p>&nbsp;</o:p>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불운이 될지 행운이 될지 아니면 꽝이 될지는 그 사람이 그 사건을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에 달렸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o:p></o:p>

<o:p>&nbsp;</o:p>

“정부가 당신의 예금을 빼앗고 사업체를 몰수하고 당신과 가족을 집에서 강제로 내쫓고
트럭에 태워 멀리 데려간 후 이제부터 그곳에서 살라고 하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이 이야기는 1941년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일어난 실화다. <o:p></o:p>

<o:p>&nbsp;</o:p>

나이토 가족은 유타
주의 솔트레이크시 근교로 강제 이송되었다. 가장인 히데 나이토는 실의에 빠졌다. 그는 모범적인 시민이었다. 오랫동안 도자기를 수입하는 사업해왔다. 가족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미국 정부가 그들 가족이 가진
것을 전부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시 16세였던 빌 나이토는
가족이 처한 상황을 직시했다. 그는 아주 작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빌은 형 샘과 닭을 키워 달걀을 팔기로 했다. 다행히 사업이 커져
온 가족이 달라붙었다. 4년동안 달걀을 팔아 생계를 꾸렸다. 닭통은
채소와 맞바꿨다. ‘닭이 갈수록 많아져 닭장을 큰 걸로 두 개나 지었습니다. 바닥은 콘크리트였어요! 바닥을 콘크리트로 깐 닭장을 생전 처음 본
이웃 농부들은 깜짝 놀랐죠!’ <o:p></o:p>

<o:p>&nbsp;</o:p>

그로부터 70여년이 흐른 후 나이토 형제의 유산에는 다른 개발업자들은 건드리지도 못한 대형 재개발 프로젣트도 호함되었다. 열개가 넘는 사업체와 수많은 건물을 소유한 빌 나이토는 이렇게 말한다. ‘고생을
해야 꿈을 꿀 수 있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상상력을 자극했고 가능한 해답을 찾도록 해줬습니다.’”<o:p></o: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555/68/cover150/8925545799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5545799</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뜰 앞의 잣나무 - [붓다의 치명적 농담 -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別記]</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433845</link><pubDate>Sun, 19 Feb 2012 19: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43384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14248&TPaperId=5433845"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108/38/coveroff/895461424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14248&TPaperId=543384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붓다의 치명적 농담 -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別記</a><br/>한형조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03월<br/></td></tr></table><br/>현각, 틱낫한, 달라이 라마.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로부터 이책의 질문은 시작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국인이 아니면서 한국어를 쓰는 스님들보다 한국에서 더 알려졌고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o:p>&nbsp;</o:p>
왜 그런가? 하버드대 출신이라서? 프랑스에서 활동하기에? 세계의 지도자라서?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언어가 근본적인 이유라 저자는 말하낟. “그들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유행하는 이유는 이런 배경 탓이 아니다. 비밀은 그들이 쓰는 언어에 있다. 한문고전을 읽혀보면 학생들이 도무지 번역본을 읽을 수 없다고 불평이다. 유교 경전이든 불경이든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일어, 중국어, 영어 번역본을 던져주면 학생들은 영어 번역본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학생들은 영어 번역본을 통해 해당 ‘문장’의 의미를 적어도 애매한 구석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물론 영어권 동양학자들의 실력이 좋긴 하지만 중국은 모르겠지만 일본학자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 그럴까? <o:p></o:p>
<o:p>&nbsp;</o:p>
“영어가 한문이나 중국어보다 더 우리말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말은 19세기 후반에 근본적 변화를 겪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은 이전의 한자어나 우리 고유어가 아니라 일본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새로 창안한 번안어들과 거기 걸맞는 어법을 주축으로 한다.” 사실이다. ‘술 권하는 사회’란 단편을 보면 일본유학씩이나 한 남편이 돌아와서는 술주정뱅이가 된 이유를 물으니 사회가 술을 마시게 한다는 말을 듣고 주인공의 아내는 나쁜 놈이라 욕을 한다. 사회란 말을 처음들어본 것이다. “우리는 한자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전통 한자가 아닌 근대적 신조어로 말한다. 이런 말들은 거의 의미 손실 없이 서구어로 대체할 수 있다. 이방인 포교사들의 성공신화, 그 비결은 그들이 쓰는 언어의 프리미엄에 있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쓰는 말에 가까운 영어를 쓰고 있고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일상의 체험 위에서 정직하게 설파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o:p></o:p>
<o:p>&nbsp;</o:p>
작년부터 인기를 끈 코이케 류노스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알기 쉬운 구어로 일상을 통해 불교를 설명한다. 그러나 코이케 류노스케의 책을 불교서적으로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가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불교교리이다. 단지 그것을 쉽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의 언어로 말할 뿐이다. 그가 말하는 생각버리기(번뇌귾기), 화내지 않기, 침묵 등등은 모두 불교 수행에 언급되는 주제들이다. 그러나 그의 책은 자기계발서로 읽히지 불교서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한국에서 불교는 무슨 의미인가란 질문을 던지게 한다.<o:p></o:p>
<o:p>&nbsp;</o:p>
우리말이 달라졌다는 것은 그 말을 쓰는 사람의 생각이 달라졌단 말이며 그 생각의 맥락인 사회도 달라졌다는 말이다. 우리는 전통을 버렸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전통은 반 세기 이상을 올라갈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유교나 불교는 무슨 의미인가?<o:p></o:p>
<o:p>&nbsp;</o:p>
의미를 물으려면 먼저 그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그 질문을 불교는 철학이냐 종교냐로 이해한다. &nbsp;유교도 그렇지만 불교가 철학이냐 종교냐에 대한 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이다. 답이 애매한 것은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o:p></o:p>
<o:p>&nbsp;</o:p>
불교도 유교도 서양철학과 같은 논리학, 존재론, 인식론의 체계가 없다. 그런 체계는 서구의 전통에서 유의미한 것이고 서구와 다른 문제의식을 가졌던 불교와 유교에게 그런 체계가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물론 풍우란이 처음 중국철학사를 썼을 때 보여주려 했던 것처럼 억지로 끼워맞추려면 또 그런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양철학과 같은 질문을 가지지 않았던 지식체계가 동일한 틀을 갖는가 묻는 것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o:p></o:p>
<o:p>&nbsp;</o:p>
그러면 종교인가?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이었을 뿐 종교냐 아니냐를 묻지 않았다. 철학이 필로소피의 번역어로 성립한 것처럼 종교 또한 번역어일 뿐이다.” 종교냐 아니냐의 기준 역시 당연히 그들의 기준이고 그 기준은 유일신을 핵심으로 한다. 그런 신은 당연히 불교엔 없다. 그래서 “불교는 무신론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불교가 기독교와 맞서 스스로를 변호하고 선전한 전략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루돌프 오토의 기준처럼 ‘종교의 핵심을 ‘인간의 궁극적 관심’으로 전향한다면 불교나 유교는 인간의 구원이라는 최종적 관심으로 돌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깊이 종교이다. 또한 인식론의 복잡성이나 논리적 엄밀성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원래 그리스와 로마에서 그랬듯, 삶의 길을 계시하는 지혜에 대한 갈망과 추구로 규정한다면 불교와 유교만큼 철학적인 것 다시 없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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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종교의 새 이름이 등장하면서 유구한 전통의 불교와 유교는 때아니게 정체성을 의심받고 정당성을 도전받았다. 그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물음 앞에서 우리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모든 질문은 권력적이다. 누가 묻는가의 주도권을 서구가 거머쥠으로써 질문에 당황한 불교와 유교는 혹은 부끄러워하고 변명하고 저만큼 피해갔다. 그때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물을 수 있어야 햇다. ‘너희들 기준으로는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유교도 철학이 아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는가. 가르침이고 배움이면 족하지 않은가.’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물을 수 있었어야 했다. ‘예수는 과연 깨달은 사람이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해탈을 위한 적절한 지혜인가 아닌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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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불교의 구원과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무아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가 말하는 Good News(복음)가 아니다. “누구도 자신이 모르는 것을 새로이 알 수는 없다. 만일 안다면 그것은 마군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누구도 상대방이 모르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없다. 가르침이란 내속에 있던 어떤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시켜주는, 선가의 말을 빌리면 ‘지시’일 뿐이다. 그래서 옛 선지식들이 하나같이 ‘나는 네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햇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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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갖고 있는 것이기에 줄 수 없는 것, 그것을 불성이라 햇다. 그렇기에 저자는 불성을 보는 견성, “돈오는 쉬운데 정말 점수가 어렵다”고 한다. 지눌은 “돈오란 다름 아니라 ‘마음의 실상에 대한 지적 이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교의 이치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되 그 이치를 진정 믿기가 어렵고 그 가르침대로 살기가 어렵다.” “돈교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 너머에, 깨달음이니, 구원이니, 법계니, 정토니가 결코 없다는 사자후이다. 돈교는 지금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이 바로 ‘절대’임을 그토록 간절히 친절하게 일깨워주려 한다. 그래서 입만 열면 ‘깨달을 바도, 얻을 바도, 설할 바도 없다’고 했다. 다만 눈을 들어 ‘쳐다보라’고만 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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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다보기만 하면 되는데 보지 못하니 만공은 몰락한 상궁 나인들이 찾아와 법문을 청할 때 이렇게 말했다: “저 산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도 뚫는데 우리집 멍텅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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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비유만은 아니라 저자는 말한다. “불성이란 바로 지금 역력한 ‘생명’의 불가사의를 가리키는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삶의 목표는 쾌락이 아니다.” 아무리 욕망을 채워도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이다. 남부럽지 않게 성공했더라도 그 “내면은 여전히 가난하고 불만족스럽다.” 탐욕은 좋은 것이라며 욕망을 무제한으로 채워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자기욕구라는 환상’ 속에 있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것이란 생명의 자연적 발현이 아닌 것 모두를 뜻하낟.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 욕구와 충동은 ‘이미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그래서 늘 ‘넘쳐난다’ 이 진단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러지?’ 그래서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다. 깨달음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낡은 것이다. ‘내가 그동안 오염된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것, 그런데 내 이제 그 실상을 투명하게 알겠다’는 발견이 곧 깨달음이다. 그래서 ‘깨달음으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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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사람이나 세속적 성취욕이 강한 사람, 그리고 사회적 교제와 정치적 성공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유형들은 불교를 가까이하기 어렵다. ‘나 이렇게 살다 갈래’하면 대책이 없다. 불교는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다. 오히려 한사코 뺏으려 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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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와 공은 동의어이다. 나는 없다 나는 비었다는 말이다. “공(空)이란 ‘자기 이해와 관심’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려보자.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눈이 있어 보고 귀가 있어 듣는 것이 아니라 보려는 욕망이 눈을 만들었고 들으려는의지가 귀를 만들었다고 한다.보려는 욕망이 없으면 사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책 제목처럼 세계는 의지의 표상이며 의지의 산물이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세계는 법(法, 객관적 실제)이 아니라 상(相, 주관적 세계) 즉 오로지 식(唯識)이다. “인간의 욕망은 이 세상을 혼란시키고 비참을 증폭시키는 원흉이다. 언어는 그 첨병이다. 언어는 실재를 드러내기보다 감추며 비추기보다 왜곡한다. 그래서 불교는 언어에 대한 불신을 선명히 드러낸다. 어떤 불교학자는 불교의 이런 인식을 언어혐오증이라 부르기도 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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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가린 것을 드러내기 위한 한 방편이 아비달마이다. “아비달마는 ‘나’를 ‘타자’로 말하고 적는 기술이다. 이 전략은 나의 개입이나 오염이 배제된 순수객관적 사태들 즉 다르마들(諸法)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가령 ‘나는 오늘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보냈다’를 아비달마는 매우 부정확하고 들뜬 문장이라 생각하여 이렇게 고친다: 1. 두 물체가 있다. 그리고 2. 사랑한다는 감정과 슬프고 아쉬운 감정(受)이 있다. 3. 눈문을 흘리는 한 물체가 다른 손 흔드는 물체를 지각(想)한다. 4. 떠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싶은 충동(行)이 있다. 5. 이 사건을 의식(識)하는 과정이 있다. 아비달마의 이 오래된 분석은 무아를 각인하고 그것을 삶 속에 구현하려는 지혜의 방편이다. 나에게 속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남의 것이엇다는 것, 아니 세계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방편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을 자기 비우기라 하며 공이라 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도 내 것이 아닌 것을 알기에 “실제 고승들은 어떤 일의 충격이 잔류하는 기간이 아주 짧고 후유증이 거의 증폭이 안된다고 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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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지혜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격과 자아를 오온의 객관(法)으로 해체하는 작업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8정도의 하나인 정념, 위빠사나는 “내 몸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것을 차갑게 주시하고 관찰하는 일이다.” 방법 자체는 쉽다. 그러나 하기는 쉽지 않다. “1분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반쯤 도통했다는 소리가 나온다. 느닷없이 끼어드는 차에 대고 바로 욕이 튀어나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것을 회광반조, ‘아하 내가 지금 마음 속에 화의 불길을 일으키고 있구나’하기는 어렵다. 어구나 그것이 일어나고 축적되고 변화하고 사라지는 생주이멸의 과정을 ‘남의 일처럼’ 차갑게 관찰해나가기는 정말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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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어려운 일은 무아를 들여다보기 위한 기초작업이다. “무아란 ‘네 자아란 없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너무 많은 자아가 있어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란 뜻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정념으로 들여다보면 “우리 각자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 그 무상한 변화는 누가 일으키는 것일까. 나는 스스로 정립하는 주체가 아니고 타자에 의해 상황에 의해 세워지는 허수아비요 물거품이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얼굴로서의 주체 혹은 자아는 없다. 이것이 무아의 뜻이다. 달마와 혜능뿐 아니라 셰익스피어도 이렇게 곤혹스럽게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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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왜 문제인가? 상은 법의 굴절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모두 나의 이미지(相)으로만 존재한다. 우리는 다만 욕망과 관심이라는 색안경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사람을 만난다. 불교는 그 좁은 새장을 벗어나 자유롭게 창공을 날고 거기서 독수리처럼 세상을 보라는 조감(鳥瞰)의 권고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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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람과 만난 적이 없다. 비즈니스 상대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가깝다는 가족이나 친구도 까마득히 멀어보인다. ‘안아도 안아도 아드간 아내의 허리’ (고은). 그는 나를 좋아거나 싫어라며 나를 찬양했거나 모욕했고 내가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스타일에 내가 좋아거나 싫어하는 인상에 습관에 또 내가 존경하는 지식 혹은 내가 경멸하는 지적 수준에… 그런 이미지를 통해서만 상대와 나는 관계를 맺는다. 이것이 우리가 늘 불행한 이유이다. 우리가 염려, 근심 걱정으로 눈멀어 있다면 우리는 황혼의 저녁이나 뜰에 핀 꽃, 아내의 젖은 손이나 남편의 어깨 위에 앉은 비듬을 볼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근본 조건을 바로 이 염려(sorge)에서 찾았다. 그는 인간의 마음 밑바닥에 깔린 이 불안의 중심을 통찰하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 ㅣㅇㅆ다면 우리는 진정 인간적 삶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 이미지들 때문에 우리는 자연과의 생생한 접촉을 잃고 다른 사람과의 의미 있는 만남을 놓치고 만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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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과 무아가 무슨 상관인가? 상관이 있다 그것도 근본적인. 상을 만드는 렌즈가 자아이기 때문이다. 스티브 테일러의 말을 빌리자면 ‘자아폭발’이 불행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자아폭발과 타락 개념에 대해선 해당 리뷰 참고)<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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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현인들은 타락한 정신이 하는 거짓말을 풀어내고 있었다. 자아가 고립되었으며 자기 이외의 우주는 저기 밖에 있는데 자기만은 머릿속에 갇혀 있으며 그리고 아무 상관도 없는 외계에 살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인식. 그들은 직접적으로 타락한 정신을 해체했다. 그들은 예리해진 자아인식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거짓된 인식을 주는 일종의 가면현상임도 깨달았다. 우리는 오도된 정체성으로 고통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자아들이라고 믿지만 자아들이 사라져야만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두가지의 다른 자신들을 갖는다고 우파니샤드는 말한다. 거짓의, 피상적인 자아자신과 우리의 진정한 자신인 아트만이다.” (스티브 테일러)<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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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의 전통에서 요가철학이 태어났다. 붓다가 위빠사나로 정리한 방법과 마찬가지로 요가의 목표는 거짓된 자아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해체해 진정한 자아를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개발되었다. 붓다가 한 때 수행했던 고행도 마찬가지 목표를 가졌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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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붓다는 두가지 모두 목표와는 거리가 멀다고 선언했고 자신의 방법을 제시했다. “붓다가 타락한 정신을 초월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이 반항은 훨씬 더 강력해졌다. 우파니샤드는 분석적이라기보다는 서술적이다. 우파니샤드는 ‘이것이 사물의 실체이다. 이것이 세상이 실재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진실된 상태이다’라고 외치는 거대한 모닝콜 같다. 반면에 불교는 완전히 반대이다. 불교는 사물의 궁극적인 사실에 대하여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런 토론은 시4간과 에너지 낭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붓다는 타락한 정신이 어떻게 고통을 낳았는지에 대해 심오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초월하기 위한 매우 상세하고도 체계적인 방법을 개발했다. 불교는 모든 면에서 타락의 측면에서 보면 완전히 이해된다. 붓다가 말하는 갈망은 자아폭발로 생겨난 권력, 부, 재산, 향락적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분리된 자아인식이 존재하는 한 갈망은 항상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갈망을 극복하는 것은 (세계와) 분리된 자아인식을 극복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해탈에 도달했을 때 정확히 일어나는 것이다.” (스티브 테일러)<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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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요가의 방법론을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연했다고 스티브 테일러는 말한다. 요가의 명상법은 자아폭발로 비대해진 자아의식을 죽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같은 목적을 갖고 있었기에 도가 역시 독자적으로 비슷한 방법을 개발했다고 그는 말한다. “명상의 전체적인 목적은 자아폭발의 결과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필립 노박은 강력하게 발달한 자아가 어떻게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를 독점하는가-자아는 (사하라시아인들이 등장하기 전 조상들이 그러햇고 지금도 남아있는 수렵채집인들의 의식이 그러하듯이) ‘개방적이고 수용적이며 현재중심적인 인지의 기쁨으로 나타나게’ 될 수 있는 에너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를 설명할 때, 명상을 수행하는 것이 어떻게 이 과정을 역전하는가도 함께 지적한다. 의식구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지속적으로 주의력이 공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명상할 때처럼 현재에 주의를 집중하면 의식구조는 주의력이라는 자양분을 박탈당하여 약화되기 시작하고 사라져 버린다. 결과적으로 노박의 말대로 ‘마음은 욕망과 걱정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정교하게 만들어내는 데 (즉 생각하는 데)보다 적은 에어지를 쓴 새로운 습관을 얻게 되고’ 현재의 사실을 인식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명상 수행은 에너지 재분배의 결과를 낳는다. 정확히 하면 타락과 동시에 발생했던 재분배의 역전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지각하는 데로 돌아간다. 그 결과 당신은 세계 안에 있는 ‘의식의 힘’을 인시할 수 있게 되고 원시인들이 알고 있는 강력한 ‘현존’과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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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이 자아폭발의 효과들을 제거하는 또 다른 방법은 우리가 주위 환경과 분리되었다는 인식을 약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인식은 자아가 만들어내는 생각의 수다로 유지된다. 자아가 조용해지면 그것들의 경계들도 덜 분명해진다. 그리고 자아가 완전히 조용해지면 모든 경계 인식은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우파니샤드가 설명한 우주와의 일체감을 인식하는 체험을 한다.” (스티브 테일러)<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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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체험을 예로 들어보자. 붓다는 라마풋다 선인에게 ‘非想非非想處’란 경지를 배웠다. “이 경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로서 가장 높은 차원인 滅盡定의 바로 앞 단계이다. 숫타니파타(874)는 이 경지를 이렇게 설명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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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o:p></o:p>
그릇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o:p></o:p>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o:p></o:p>
생각을 소멸한 것도 아니다. <o:p></o:p>
이렇게 이해한 자의 형태는 소멸한다. <o:p></o:p>
아마 거친 의식들은 생각에 근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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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지가 어떤 것인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유무의 차별을 넘어선 경지일거라고 상상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카무라 하지메)<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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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말로 할 수 있는 예를 들어보자. 신비주의 철학자 스테이스는 명상의 체험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은 하나가 됨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존재의 현시였다. 방안의 모든 사물들을 통하여 한줄기 광채가 빛났다. 모든 문제들이 사라졌다, 아니 그보다는 문제들이 없었다. 죽음도 없었고 나라는 것도 없었다. 그것은 절대적 황홀의 느낌이었다. 내가 차츰 ‘세상 속으로 돌아오자 이것에 이은 도취감이 뒤따랐다. 참으로 커다란 행복이었다.” (스티브 테일러에서 재인용)<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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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다는 붓다의 말은 이것을 말한다. “깨달음의 순간 붓다의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은 생존욕의 중심이 완전히 부수어진 것이다. 자기의 중심을 쳐부순다면 그때까지 고뇌하던 자기는 소멸한다. 자기가 소멸하면 세계는 허구로 이루어졌던 것이므로 괴멸해버린다. 그러면 오직 ‘있는 그대로의 세계’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카무라 하지메) 항상 차나 한잔 들지라 말했던 조주 선사의 평상심도 이것을 말한다. “도가 무엇입니까?”란 물음에 조주가 ‘차 한 잔 들게(끽다(喫茶去)’라 한 것은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으면 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 쉬운 것 같아 사람들은 이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이지 차 한 잔 마시기가 어렵다. 내 분노와 슬픔을 타서 차를 마시지 않을 때가 드물고 내 에고와 권위를 타서 차를 권하지 않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차를 ‘빈 마음’으로 우려 빈 마음으로 권할 때 거기 모든 것이 있다. 공(空)이라, 무심(無心)은 당연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내가 내 마음의 불순물로 탁하게 오염시킨 차를 뻔뻔스럽게 내놓고 있다는 파렴치를 알기만 하면 차 맛은 훨신 좋아진다.” 조주의 평상심은 그런 것이다. 그 평상심이 깨달음의 내용이고 돈오의 내용이다. 도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란 한 것도 평상심으로 잣나무를 보는 것을 말한 것일 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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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선사에게 누가 물었다. ‘스님도 도를 닦고 있습니까?’ ‘닦고 있지’ 어떻게 하시는데요?’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에이 그거야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 그들은 밥 먹을 때 밥은 안 먹고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 잠잘 때 잠은 안 자고 이런저런 걱정에 시달리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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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깨달음이란 밥을 잘 먹는 것이다. “몸이 음식을 맛볼 수 있도록 나는 ‘마음’을 비워주어야 한다. 마음이 차 있다면 음식 맛을 느낄 수 없다. 김치를 밥이나 ‘대학’에도 그런 경구가 있다. ‘우리 모두 음식을 먹지만 음식 맛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음식 맛을 느낄 수 있으면 도는 멀지 않다. 불교가 노리는 최상승의 경지를 나는 이곳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인류의 오랜 환상을 떠나 삶의 실제와 만나는 것”이므로.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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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맛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기에 혜능은 “서방정토가 지금 여기 있으니 내가 지금 보여주랴”고 했고 ‘화엄은 사바와 법계가 둘이 아니며 그래서 벗어나야 할 사바도 없고 들어서야 할 법계도 달리 없다고 말한다. 화엄은 ‘세상이 이미 완전하고 우리가 이룰 것은 더 이상 없다’”고 선언한다. “화엄은 과격하게도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아무 것도 따지지 말고 다만 받아들이라고 권한다. ‘네가 이 세상과 다투는 것을 그치면 세상은 고요해질 것이니 그때 진정 세상이 이미, 우리가 손댈 필요없이 완전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타락한 자아가 “깨어지고 깨어져 나가도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라는 것이다. 시냇물은 흘러가고 창밖에 차소리는 들리며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또 들으며 화를 내고 웃는 이 인간만사의 세상일들이 그대로 여여하게 들리는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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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란 깨달음이란 사건이 문득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난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화엄이 말하듯 깨달음이란 원래 오고감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다. 돈(暾)’깨달음은 이미 여기 와 있다!’는 것, 그러므로 찾거나 이루거나 하는 시간과 점차(漸)로 더듬지 말라는 것을 일깨우는 말이다.선의 실질적 창시자인 혜능은 ‘몸은 보리수도 아니고 마음 또한 거울이 아니다’라 했다. 그리고 ‘그곳은 어디 먼지 앉거나 때가 끼는 곳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것은 이미 완전하기에 우리는 더 이상 닦으 것도 찾을 것도 없다. 그것이 돈오이다. 돈오란 ‘깨달음이 이미 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선은 즉심즉불, ‘네가 곧 부처이니 어디 딴 데서 찾을 생각하지 말라’고 다그친다. 그런데 왜 다시 수행이 필요하지? 이미 깨달아 있으면서… 깨달음에 대한 지적 통찰은 그것을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살아나가는 일에서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 노력을 우리는 점수라 부른다. 돈오는 쉬운데 점수가 어렵다. 돈오를 살아가는 것이 점수이다. 그것은 끝이 없는 심화와 지속의 실천이다.” 그러므로 돈오란 깨달음이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이른바 깨달음이란 것을 얻고 나서는 한바탕 배꼽을 잡으며 ‘소 위에 타고 앉아 소를 찾았다’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한다. 깨달음 이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불법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실제(實際)를 아무런 두려움이나 공포없이 욕망의 흔적과 조바심 없이 관(觀)할 수 있을 때 그곳이 곧 구원이고 법계이다.. 진리한 피곤하면 눕고 졸리면 자는 것일 뿐, 이 밖에 무슨 특별한 소식은 없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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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는 이렇게 말한다: ‘도는 닦아 익힐 필요가 없다. 다만 오염시키지만 않으면 된다. 무엇을 오염이라 하는가. 생사를 의식하여 조작하고 선택하는 일체가 그것이다. 도와 곧바로 만나고 싶은가.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이니라. 무엇을 일러 평상심이라 하는가. 인위적 조작과 주관적 가치판단이 없고, 의도적 선택이 없는 것, 사물에 대한 고착이나 방기가 없고 진리에 대한 환상도 없는 바로 그곳을 가리킨다. 경전에 말하지 않던가 범부의 행도 아니고 성인의 행도 아닌 것, 그것이 보살행이라고. 다만 이렇게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 상황에 따라 응접해나가는 것이 바로 도이고 그 셰게가 바로 법계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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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반야심경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리자야 우리는 사물과 세계를 두고 태어난다거나 사라진다고 말할 수 없다. 그곳은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인간적 흔적을 덧붙일 수도 없고 늘어난다거나 줄어든다는 세속적 득실도 운위할 수 없다. 자아의 개입이 근원적으로 차단된 곳이기에 거기 사람과 자연은 구분되지 않으며 주체와 대상 또한 분리될 수 없고 바라보는 시선과 거기 잡히는 풍경도 둘이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인간에게는 원초적 무지가 있다는 생뚱맞고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권유도 쓸데없다. 늙고 죽음의 개념도 없으니 그 늙고 죽음을 초월할 수도 없지 않은가. 생로병사가 도무지 없는 판에 붓다가 초월과 해방의 방법으로 가르친 네가지 성스런 진리 또한 뜬금없는 소리이다. 기억하라. 요컨대 깨달음이란 것도 농담이니, 더구나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는 더더욱 황당하다는 것을…<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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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108/38/cover150/8954614248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14248</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인간 붓다 - [붓다, 그 삶과 사상 - 무우수 불교총서 1]</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433830</link><pubDate>Sun, 19 Feb 2012 18: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43383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314303&TPaperId=543383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39/56/coveroff/899531430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314303&TPaperId=543383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붓다, 그 삶과 사상 - 무우수 불교총서 1</a><br/>나카무라 하지메 외 지음, 이미령 옮김 / 무우수 / 2002년 12월<br/></td></tr></table><br/>“’수받사여 나는 29세에 오로지 善을 찾아 출가햇다. 수밧다여, 나는 출가하고서 50여년을 지내왔으며 바른 이치와 법의 영역만을 걸어왔다. 나 이외에는 ‘진리의 길’을 걷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하파리닙바나경)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토해낸 붓다의 말이다. 여기에서 붓다는 자신이 불교를 창시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오직 진리를 체득한 한 사람의 수행자로서 생각하고 있다. ‘진리의 길을 걷는 사람’ 바로 이 말 속에 붓다의 일생이 집약되어 있다. 붓다의 말을 토해 우리는 붓다가 평생 무엇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살아왔는지 알 수있다 법의 길을 걸었다는 것. 진실의 길을 걸었다는 것. 바로 그 걷는다고 하는 실천을 설했다. 붓다는 언제나 실천을 중시했다. 동시대 다른 사상가들은 논쟁으로 세월을 보냈으나 붓다는 그런 희론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앗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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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샤트리야 출신인 붓다는 자신을 바라문으로 이해했다. 그가 생각하는 바라문은 출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길’로 결정되는 것이며 그 길을 걷는자는 누구나 바라문이라 불릴 수 있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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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결코 바라문교의 전부를 부정하거나 무시하고서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 하지 않았다. ‘우파니샤드가 설하는 업, 윤회, 해탈과 같은 사상의 틀을 봇다는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 ‘참다운 바라문’이란 무엇인가를 설한 내용만을 놓고 보면 붓다야말로 참다운 바라문교의 포교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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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29세에 깨달았다. 그러나 진리의 길은 깨달음이란 한번의 사건으로 끝이나는 그런 길이 아니었다. 깨달음 후에도 번뇌는 사라지지 않는다. 경전에 나오는 악마는 “붓다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번뇌”를 상징한다. “본래 붓다는 어린 시절부터 혼자서 고요히 안으로 안으로 사색하기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붓다는 결코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오히려 유연하고 기품있고 연약했다고 전한다. 붓다는 일생동안 내면적인 성찰을 한 사람이엇는데 그런 성품은 어릴때부터 지녀왔던 것 같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고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나서서 즐기는 그ㄹㄴ 유형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번뇌는 자연스럽고 깨달음 이전이라면 그런 악마가 나타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악마는 깨달음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깨달음을 이룬 뒤에까지도 악마가 자주 나타났다면 깨달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붓다는 그런 악마를 정화해 가면서 일생을 걸어간 자이다. 진리의 길을 걷는 일은 말하자면 번뇌와 미혹과의 긴장관계에 놓이는 일이라 할 수있다. 일단 개달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말이 아니다. 붓다란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라는 의미이다. 그런 사람을 계속하여 깨달아 가게 하는 것, 계속 붓다이게 하는 것은 바로 ‘청정행’의 실천이었다. 훗날 이런 경지를 수행과 증득(깨달음)은 한 몸이라는 의미에서 수증불이라고 불렀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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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출가한 이유는 생노병사를 넘어선 불사의 길을 얻기 위해서 엿다고 한다. 그러면 붓다는 그 길을 얻었는가? “깨달음의 순간 붓다의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은 생존욕의 중심이 완전히 부수어진 것이다. 자기의 중심을 쳐부순다면 그때까지 고뇌하던 자기는 소멸한다. 자기가 소멸하면 세계는 허구로 이루어졌던 것이므로 괴멸해버린다. 그러면 오직 ‘있는 그대로의 세계’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있다든가 없다라고 분별한 세계가 없기 때문에 자신과 세계는 시원하게 통하게 된다. ‘나’는 무한한 존재가 된다. ‘내가 있다’ 거만한 마음을 부순다면 거짓으로 세워진 세계도 무너져 다르마의 세계(法界) 한 가운데 홀로 우뚝 존재하게 된다.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이러한 나는 다르마의 나이다. 다르마의 세계 즉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서는 자기는 한정되지 않은 존재 그 차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태어남도 없다. 태어남이 없기 때문에 늙고 죽음도 없다. 유체나 마음을 나의 것이라 생각하여 집착하면 늙음이 실체화되고 죽음이 존재하게 된다. 나가 없어지고 나의 것이라는 생각도 없어지면 내가 없기 때문에 늙거나 죽는 일은 없다. 이것이 붓다가 깨달은 불사의 법칙이다. 훗날에는 이것을 不生이라 부르게 되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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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불사의 길이라 햇다. 언뜻 말로는 그럴듯한데 와닿지는 않는 괘변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붓다가 깨달은 직후 사람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말하기 주저한 이유이다. 붓다가 깨달은 것은 무아이다. 무아는 말로 보여줄 수 없다. 스스로,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다. 그것을 볼 수 있게 개발된 방법이 요가였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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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은 이미 그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요가는 우리의 세계관을 왜곡하고 우리의 영적 진보를 가로막는 아집을 체계적으로 벗겨내는 것이다.” 건강체조와 별다를 것이 없는 우리가 아는 요가와 달리 “원래의 요가 수행자들은 더 좋은 기분을 얻거나 더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이 길을 갔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정상적인 상태를 없애고 싶어했으며 세속적 자아를 지워버리려 했다. 고타마와 마찬가지로 갠지스 평원의 많은 수도자들 역시 논리적이고 추론적인 방법으로 담마를 명상해서는 해방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가 훈련은 깨달음의 무의식적 장애물들을 부수고 인간의 인격을 형성하는 조건들을 없애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 에덴의 평화, 이 샬롬, 이 닙바나를 머리로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물론 붓다는 요기이기를 포기했다. 그가 요가로 얻은 경지는, “그가 얻은 의식의 고양상태는 닙바나일 수가없었다. 이 황홀경에서 빠져나오면 여전히 정열과 욕망과 갈망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여전히 세속적 자아는 거기 잇엇다. “닙바나는 일시적인 것일 수 없었다.” (카렌 암스트롱)<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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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고행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고행의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대담한 공격 뒤에 얻은 것은 튀어나온 갈비뼈와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약해진 몸이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한계로부터 나 자신을 끄집어내는 대신, 스스로 더 큰 괴로움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카렌 암스트롱) “붓다는 이렇게 고행을 실천해도 이 길이 열반을 향한 길이 될 수 없을 깨달았다. 몸은 깨달음의 토대이기 때문에 몸을 괴롭히는 고행으로는 평온한 경지인 열반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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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마에게는 이런 방법들이 모두 소용없었다. 그의 세속적 자아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욕망에 시달렸으며 여전히 의식의 싸움들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우선 명상의 전 단계로 ‘깨어 있는 마음(사티)’이라 부르는 훈련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매순간 자신의 행동을 면밀하게 살폈다. 그는 의식의 파동과 더불어 감정과 감각의 들고남에 주목햇다. 고타마는 깨어 있는 마음을 훈련하는 과정에서 괴로움과 그것을 일으키는 욕망이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을 이전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의식하게 되엇다. 그의 의식에 몰려드는 그 모든 사고와 갈망은 아주 짧은 시간만 지속되었다. 모든 것이 일시적이었다(아닉카), 갈망이 아무리 강해도 그것은 곧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다. 어떤 것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사람의 이런 덧없음이 괴로움(둑카)의 주된 원인의 하나였다… 우리는 늘 욕망의 대상을 쫓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결국 그것 때문에 불행질 것임을 알고 잇다.” (카렌 암스트롱) “어떤 사람도 괴로움과 무관할 수는 없다. 즉 괴로움이란 본래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한결같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붓다는 그 힘이 이성이나 지성과 같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치는 거무칙칙한 욕망이라 보았다.마치 오염된 강가에 쌓인 폐수 찌꺼기와도 같이 얼마나 심하게 오염되었고 끈적이며 서로 엉켜있는지 붓다는 이것을 ‘욕망의 더러운 늪’이라 표현했다. 붓다는 이것을 無明이라 불렀다. 무명은 내면의 깊은 사유와 선정에 의해서 파악된 인간존재의 근본을 표현한 말이다.” “이런 마음 상태들은 ‘서툴다’. 우리를 이기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카렌 암스트롱)<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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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마는 일반적인 추론적 방법으로 이런 진리들을 사유한 것이 아니다. 그는 요가의 기술을 통해 그런 진리들에 접근했으며 그 결과 이 진리들은 일반적인 추론을 통해 얻은 어떤 결론보다 더 생생하고 직접적이었다. 훗날 고타마는 자신이 창안한 새로운 요가 방법을 통해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 즉 갈망이나 욕심이나 아집에 지배되지 않는 새로운 인간이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고타마가 보디나무 아래에서 닙바나를 성취했던 순간, ‘나는 해방되었다!’가 아니라 ‘그것이 해방되었다!’고 외쳣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카렌 암스트롱)<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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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깨달음에 불가결했다. 수행자가 자기 자신 속으로 깊이 가라앉아 자신의 마음과 몸을 붓다의 요가적 현미경 밑에 갖다놓지 않으면 담마를 현실로 만들거나 ‘직접’ 이해할 수 없었다. 수행ㅈ는 명상을 통해 담마를 ‘실현’할 수 잇었다. 빅쿠들은 요가를 통하여 그 교리가 표현하려 했던 진리들과 일체가 될 수 있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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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한 새로운 인간은 무아의 인간이다. 그러나 “무아라고 해서 자기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윤리적 행위의 주체로서 나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유가의 말로 하자면 붓다가 말하는 진리의 길은 爲己之學, 나를 위하는 길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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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원수처럼 행동한다.’ (상윳타 니카야)<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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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든 작든 간에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한답시고 <o:p></o:p>
자기의 참다운 이익을 소홀히 하지 마라.<o:p></o:p>
자기의 참다운 이익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으면 <o:p></o:p>
최선의 노력으로 그것을 성취하라.’ (담마파다 166)<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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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에게나 남에게 이롭지 않은 <o:p></o:p>
악한 일은 하기 쉽다<o:p></o:p>
자기도 위하고 남도 위하는 착한 일은 실로 하기 어렵다’ (담마파다 163)<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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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보호하는 사람은 다른 자기까지도 보호한다. 그런 까닭에 자기를 보호하라. 그러면 그는 언제나 손해를 입지 않을 것이요 그가 바로 현자이다.’ (앙굿타라 니카야)<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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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에 대한 이런 설법만을 듣고 있자면 이런 가르침이 도저히 무아를 설한 사람의 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실은 이것이 무아설의 진정한 뜻이요 내용이다. 즉 아집의 중심을 부수고 계속 과감히 나아간다면 당연히 그 사람의 정신은 크게 변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이것은 나다, 저것은 나다’라고 생각해왔던 것이 거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리릉ㄹ 알게 된다. 인간은 분별심이 있기 때문에 어찌되었든 거짓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며 그 세계가 진짜로 존재하는 세계라 착각한다. 배가 고플 때는 돌맹이도 먹을 것으로 보이는 이치이다. 그러다 차츰 사물이 올바르게 보여지면 다른 사람의 기분을 알게 되고 자비심이 깊어진다. 아집이 무어지면 바깥의 사물이나 타인과 소통하게 되고 자연히 세계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기적인 자기를 꺾으면 자기의 독자성이 없어질까 걱정하는 사람도 잇을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이다. ‘이기’라는 이름에는 본래 독자성(identity)의 색깔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습관만이 있을 뿐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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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란 꼭 깨달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우리가 가끔씩 습관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예를 들면 당신이 아주 열심히 서류나 책에 집중해서 일을 하고 잇다 하자. 당신은 지금 완전히 삼매에 들어 있다. 들어 있다. 거기에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조차 없다. 서류도 책도 없다. 오직 일이 있을 뿐이다. 시간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주변 세상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이런 삼매의 상태, 당신이 일 그자체가 되어버린 상태를 ‘空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언제나 무의식 중에라도 ‘내가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내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또 이 심신을 있다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걸핏하면 죽음을 없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 잇는 한 죽음에 대한 생각은 소멸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죽음을 극복하기란 불가능해진다. 공의 경지에 머무는 일은 내가 있다는 생각의 소멸을 의미한다. 붓다는 결코 어려운 것을 가르치려하지 않았다. 정작 어려운 것은 계속 힘써 노력하는 일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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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어디까지나 현세에서 당하는 괴로움을 벗어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그러므로 윤회의 주체는 무엇일까, 자기의 본성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등의 실체를 제시하는 형이상학적 사색에는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붓다의 법을 받아들인다면 윤회전생을 믿을 필요는 없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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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39/56/cover150/8995314303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314303</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我? 無我! -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361262</link><pubDate>Tue, 17 Jan 2012 09: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36126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527585X&TPaperId=536126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99/37/coveroff/897527585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527585X&TPaperId=536126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 마이크로 코스모스</a><br/>베르너 지퍼.크리스티안 베버 지음, 전은경 옮김, 손영숙 감수 / 들녘(코기토) / 2007년 10월<br/></td></tr></table><br/>“어느 날 혜능 스님에게 남악회양이라는 스님이 찾아왔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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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왔는가?’<o:p></o:p>
‘숭산에서 왔습니다’<o:p></o:p>
‘무엇이 이렇게 왔는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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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남악 스님은 답하지 못했다. 그 후 대답을 찾기 위해 8년 동안 뼈를 깍는 수행에 전념했다 한다. 간단하기 그지없는 이 질문에 왜 대답하지 못했을까? 분명히 이렇게 찾아온 자는 남악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입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얼핏 보아선 제대로 답한 것처럼 보여도 정답은 아니다. 아마 틀림없이 ‘그 나는 누군가?’라는 질문이 나올 것이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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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 스님은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데 8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대답을 꺼냈다. ‘한 물건이라도 들어서 설명한다면 그 순간 진실에서 멀어지고 만다.’” (나카무라 하지메)<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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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질문 역시 혜능 조사가 물었을 ‘그 ‘나’는 누군가?’이다. 얼핏 그 답은 자명한 것같다. 눈 앞에 있는 바로 ‘이’ 사람이지 않은가? 그러나 과연 여기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책은 그 답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장황하게 보여준다. 먼저 이책은 뇌손상으로 정체성이 산산이 부서진 예들을 보여주면서 사람의 자아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이지부터 시작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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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량 손상 때문에 일어나는 외계인 손 증후군은 기이하기 그지 없다. 한 환자는 “난폭한 왼손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다. ‘그 환자가 한번은 왼손으로 아내를 난폭하게 흔들었는데 그동안 오른손은 공격하는 왼손을 잡고 아내를 도와주려고 애를 썼지요.’ 또 다른 사례는 다른 환자의 집 뒤뜰에서 던지기 놀이를 할 때 벌어졌다. 그, 환자가 왼손으로 벽에 세워진 도끼를 잡은 것이다. ‘공격적인 우반구가 주도권을 잡은게 거의 확실했기 때문에 나는 살그머니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이 사회가 뇌의 어느 쪽 반구를 처벌하거나 없애려하는지 알아보는 시험 케이스의 희생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이런 질환을 겪는 환자들이 사지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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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손 증후군은 교량이 손상, 또는 절단되면서 좌반구와 우반구가 분리되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 증후군을 앓는 사람을 이전의 그와 같은 사람으로 보아야 할지, 그 사람을 한 몸에 두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보아야 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뇌의 작은 손상 만으로도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이런 경우들을 보여주면서 저자들은 불교의 무아론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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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나’란 선천적인 핵심이 없으며, 언제나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깨지기 쉬운 구조”이다. 정신병원이나 신경과에는 “인간의 파괴될 수 없는 인력의 중심이 ‘나’라는 직관적인 가정과는 달리 우리의 자아가 얼마나 복잡하고 깨지기 쉬운 것인지를 증명하는 환자들과 서류들이 가득하다. 우리가 자신을 경험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경험으로 얻은 고유의 생각과 느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인상을 받는 이유는 뇌에 있는 다양한 네트웤 때문이다. 특정한 뉴런들이 우리가 어떤 특정한 장소에 있을 때 동시에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없다고 인식하게 하며 우리의 ‘나’에 대해 생각할 가능성을 준다. 기억은 한정된 뇌 영역에 저장됐다가 ‘자서전적인 나’를 구성하는데 이런 자서전적인 나에게서 기억을 뺀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게 된다. 우리가 균현잡힌 몸으로 살고 있고 그 몸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통제할 수 있는 ‘육체적인 나’라는 느낌 또한 노의 활동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파괴될 수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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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열증 초기에 나타나는 자아 인식 장애를 보자. “계약직으로 일하는 21세의 로버트는 발병하기 전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있고 더 이상 온전하게 살아 잇는 것 같지 않다고 느꼈다. 또한 자기 내부의 사람을 자신이 바깥에서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을 1년 넘게 받았다. ‘일인칭이던 내 삶이 사라지고 삼인칭 인물의 삶이 시작됐어요. 난 이제 내 몸에 없어요. 다른 사람이에요. 내 목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그 말소리는 다른 곳에서 오는 것 같아요. 난 기계처럼 움직여요. 움직이고 말하고 펜으로 뭔가 쓰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환자는 ‘나’의 육체적 경계는 어디인지 궁금해 하고 ‘나와 세상 사이의 유동적인 통로’에 대해 생각한다. 정신분열증이 되기 전 단계의 사람들은 점차 자기 자신의 생각도 잃어버린다. 환자는 가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지금 생각을 하는가? 내가 생각한다고 증명해줄 수 있는 것이 여기 전혀 없으므로 나는 내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이들은 ‘나’라는 의식을 점차 잃어간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낀다. 일반적으로 자아의 일부분으로만 인식되던 현상들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객관화되어 의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자기 인식’이 약해지면 정신분열증 증세가 확실하게 나타난다. ‘나’의 구조에 대한 깊은 성찰이 사람들을 정신착란으로 이끈다는 경악할만한 가설이다. 이성의 각성은 괴물을 낳는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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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렇게 부서지기 쉬운 ‘나’는 왜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진화론적 이유가 타당할 것이다. “사냥할 때 다양한 역할을 나누어 맡았을 원시인들은 분명히 분화된 의사소통의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런 사냥 집단은 적어도 사냥감의 이름을 부르고 사용할 전략에 대한 의견일치를 보고 개별적인 구성원에게 말을 건네고 그들에게 다양한 의무를 지워줄 수 있어야 한다. 사냥이 뭔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집단은 그 정보도 알아야 한다. 이때 누군가가 자기 자신을 가리킬 생각을 하게 되리라는 것도 가정할 수 있다. ‘나’라는 생각이 도구를 제작하고 사냥하고 계획하고 싸우고 속이고 화해하고 자신의 종말을 걱정하는 원시인들의 머릿속에 퍼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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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언제 출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 시작하는지는 말할 수 있다. 18-24개월부터 사람은 ‘나’란 개념을 갖기 시작한다. “22-24개월이 된-많은 아이들이 거울에서 자기를 알아본지 한 달쯤 지난 뒤부터- 아이들은 나, 나한테, 나를, 너, 가지 이름 등 가기와 관련된 어휘를 자주 사용한다.” &nbsp;그리고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자서전적 기억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이로써 아동기 기억상실 단계가 끝난다.” ‘나’란 느낌, 자의식은 나와 남을 구분할 수 있고 남도 나와 같은 의도와 동기, 느낌을 갖는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하며 동정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18개월 정도의 아이는 “다른 아이들의 장난감이 고장 나면 도와주려 하지만 더 어린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하거나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다. 이 시기의 아이득ㄹ은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어 생각할 수 있다. 예를들어 엄마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 역할을 하기도 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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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몇 개월부터 등장한 ‘나’는 평생 만들어져 간다. “심리학자와 교육학자들은 최근까지도 사람의 성격이 늦어도 세 살 때까지는 완전히 확립되고 사춘기에 이르면 본질적인 것은 미이 모두 지나갔다고 믿었다. 성격이 두 살이나 세살에 이미 형성된다는 프로이트와 그 계승자들의 주장이 심리학에 널리 파고들었다.” 그러나 “성격은 평균적으로 쉰살이 되어야 안정적이 된다는 사실이 최근에야 발혀졌다. 정부에 비판적인 슈폰티의 일원이었던 요쉬카 피셔가 탁월한 외무장관으로 재사회화된 일은 성격 단절 없이는 거의 상상할 수 없다. 야릇한 모습이었던 미국 가수 프린스가 얼마 전 미니애폴리스에서 집집마다 다니며 여호와의 증인을 위한 전도활동을 하거나 예전에 무대에서 박쥐의 머리를 뜯은 충격적인 록 가수였던 오지 오스본이 이제는 고루한 미국 가정의 가부장으로서 꽃무의 소파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은?캘리포니아 주지사인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예전에 슈타이어마르크에서 포즈를 취해9ㅆ던 근육질의 남자와 동일한 사람인가?”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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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가변성은 뇌의 가소성 때문이다. 뇌는 평생 새로 조직될 수 있으며 성격은 뇌의 재조직화에 따라 바뀐다. “이제 문제는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누가 될 수 있는가’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건설현장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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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계에선 그 변화를 5대 특성으로 기술한다. 아무리 바뀌더라도 그 바탕이 있게 마련이고 그 바탕은 뇌의 구조이며 그 뇌의 구조를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감정저긍로 더 안정되고 믿을만하며 더 편안한 성격이 되지만 새로운 경험을 향한 개방성은 서서히 줄어든다. 평균적으로 볼 때 외향성에서만 별 움직임이 없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이 언제나 그런 성격으로 머문다는 뜻은 아니다. 조사대상의 절반이 사는 동안 자기 성격을 바꾸었다. 다른 50%가 변하지 않은 이유는 스스로에게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게 그 사람들이 변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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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바뀌는 ‘나’에서 진정한 나를 찾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짐 모리슨은 1969년 마이애미 무대에서 즐겁게 들떠 있는 관중 앞에서 성기를 꺼내 자위를 잠깐 하고 그 결과 한동안 검찰에게 쫓기게 된 자신의 행위를 ‘나’의 진정한 표현으로 보았다 60년대와 70년대의 고전적 로큰롤과 팝에서 중요한 것은 완벽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진정성이 중요햇다. 음악가들은 사운드와 스타일의 변화를 고통스러운 자기 발견 과정이라고 말했는데 이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많은 음악가들이 자신을 찾는 과정에서 마약 때문에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러나 그 진정한 ‘나’는 있는 것일까? 오히려 진정한 ‘나’는 처녀, 창녀, 디스코 여왕, 스트립쇼 무희, 에비타를 연기하는 진지한 음악가로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마돈나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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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 교리는 서구에서 역설적으로 개인주의의 발전을 촉진했고 그 발전은 극적으로 빠르게 진전되었다. “’나’라는 기준은 특히 교회의 감독에서 벗어나기를 시도하며 등장한 인문주의자들과 학자들의 명확한 성격이 되었다. 그러나 지위가 낮은 계층 역시 자아를 발견하기까지는 수백년이 더 걸렸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이때도 인쇄기술의 극적인 발전과 같은 새로운 매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게 확산된 개인주의의 물결은 문학작품을 통해 보편화된다. ‘로빈슨 크루소’가 당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이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 작품에서는 난파를 당한 개인이 자기 계층의 질서와 종교와 국가와 가족에서 해방되어 카리브해의 섬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고 이 세계 안에서 삶을 잘 꾸려나간다.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책들은 실생활에서도 생활방식이 개인화하는데 기여했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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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개인주의가 찾으려는 ‘개인’은 뜬구름과 같다. “패션이든 세계관이든 전공이든 배우자 선택이든 모든 결정에 늘 존재하는 변경 가능성은 현대 개인주의의 본질에 속한다.” 나란, 자아란 별 것 아니다. 하루 하루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자아이고 나이다. 그러나 쉴새 없이 변해가는 ‘나’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나일까? “수천년 동안 억압받던 ‘내’가 오랜 투쟁을 거쳐 스스로를 해방하고 ‘자아’를 찾다가 그 자아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이는 역사의 희비극이자 포스트모던한 정체성의 딜레마이다. 전통이 더 이상 구속력 있는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사회적인 강압이 사람들에게 자리를 지시하지 않는 곳에서 자기실현의 기회는 오히려 노력을 필요로 하는 힘든 의무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강박적으로 찾아 헤매고 실현하려는 자아는 무엇인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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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시간은 뇌의 산물이다. “기억은 윤곽뿐인 끝없는 강물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정리하고 한 사람의 행위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눈다. 기억은 우리에게 ‘배’가 이런 모든 경험을 한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생각되는 이 현상은 “뇌의 처지에서 그렇게 간단한 임무가 아니다. 스키 여행을 다녀온 걸과 운전을 한 것과 TV앞에 앉아 있던 것이 다른 사람이 독립적으로 행한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의 ‘내’가 그것도 같은 사람인 ‘내’가 한 행위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자서전적인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비인간적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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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듯 기억은 그리 신뢰할만한 것이 아니다. 우선 기억은 감정의 강한 영향력 하에 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인간은 기분 속에 존재한다. “감정에 의해 분비되는 행복한 호르몬과 스트레스 호르몬이 기억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기쁜 일들은 도파민과 세로토닌과 신체 고유의 마취제를, 부정적인 사건들은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을 분비한다. 극단적인 양쪽 감정의 결과는 똑같다. 호르몬 분비는 뇌가 경험한 인상들을 뚜렷하게 기록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특별히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 일들을 기억한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감정은 뉴런으로 하여금 일상생활을 하면서 끝없이 흘러오는 정보의 강물 속에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기억해야 할 것과 가치가 없어 지나치는 정류장의 구별기준을 만들게 한다.” 그 기준을 만드는 것은 감정이며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관심(sorge 영어로는 care)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감정 또는 관심을 통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감정이 만드는 기억을 통제할 수도 없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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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그 기억의 내용은 변한다. 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기억을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그 불러내진 기억이 변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학자들은 이 현상에 ‘재공고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미 완성된 기억의 내용을 불러내는 일은 이를 새로 저장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뜻이다. 예전에 이미 확고하게 저장된 정보를 불러내는 과정은 이 정보를 다시 사용하게 할 뿐 아니라 다시 ‘녹인다’ 어떤 사실이 머릿속의 극장에서 새로 상영되듯이 정보는 반죽되고 달라질 수 있다. 기억이란 금방 만들어진 새로운 경험과 똑같이 불안정하고 영향을 받기 휩다. 기억은 이루 말 할 수없이 역동적이다.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자아의 이야기를 우리가 반복해 꺼내면 실제 연대기적 진실과 그다지 일치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점차 농후해진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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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유아기 가족에 의한 성학대 신드롬이나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의 기억은 그런 경우이다. 상담사와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의 기억이 변한 것이다. “이제 성인이 된 아이들이 어릴 때 성적으로 자신을 학대했다며 갑자기 부모들을 고발했는데 이런 성적학대는 치료가 시작되기 전에는 본인들도 모르던 일이었다.”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은 외계인과 밤에 만났던 일을 직접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납치를 당했었다는 기분 나쁜 느낌으로 잠에서 깬다. 그런 다음 심리상담사의 암시적인 질문을 받으면 외계인에 의한 ‘유명한’ 납치 야기를 기억해내는데 아마 다른 문화적 조건 아래서는 마녀나 유령 또는 사탄에게 납치당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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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니, 인생 전체가 기억들로 만들어져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어? 너무 빨리 지나가서 네가 거의 느낄 수 없는, 현재라는 순간을 제외하고 말이야, 정말 모든 것은 기억이야 하지만 지금 막 지가나는 그 순간은 아니지’ (테네시 윌리엄스) ‘나는 나야’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기억이다. 이 기억은 사람을 시간과 공간의 연속체에 고정시키고 그에게 스스로를 의식하는 지식, 예를 들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 있었다고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기억하는 것을 준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기억이 그다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딜레마 하나가 얼른 떠오른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할 때 어떤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경험한 인생? 아니면 기억된 전기? 자서전적 기억의임무는 우리의 모든 과거가 지금 기억을 하고 있는 나의 현재 상태와 정확하게 일치하도록 바꾸고 배열하는 것이다. 진화는 과거에 대해 숙고하라고 우리에게 기억을 준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풀라고 주었다. 기억은 ‘나’의 위대한 쇼다. 기억은 교정하고 검열하고 자르고 희석하며 머물러 있는 모든 것들을 과거가 의미를 지니도록 새로 연결한다. 기억되는 전기는 나라는 무대에서 언제나 새롭게 펼쳐지는 연극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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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라는 느낌 즉 자아는 왜 만들어진 것일까?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내용들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나’에 집중하고 ‘나’에서 출발하는 관점을 지녔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의식 영역의 중심이 언제나 ‘나’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식중추 안에 잇는 모든 상황은 경험상 자신의 상황이다. 나의 세계에는 움직일 수 없는 중심이 있고 그 중심은 나 자신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프톨레마이오스적인 세계상은 사람들이 그저 자신의 직관적인 ‘나’의 관점을 지구와 우제에 투영한’ 것일 뿐이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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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한가지 큰 문제는 우리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나’와 ‘자아’ 또는 ‘주관’과 같은 개념을 정의할 수도 없을 뿐더러 이 개념과 관계가 있을법한 대상이 이 세상에서 관찰되지도 않는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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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라는 현상은 나에게는 확고부동한 현실이다. 정신분열증 환자에겐 그렇지 않겠지만 대다수에게 Cogitio ergo sum은 증명이 불필요한 공리이다. 그러나 그 증명이 불필요한 현실에는 물리적 근거가 없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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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칭 시점은 뇌의 전기적인 활동에서 어떻게 주관적인 인식이 생기는지 검증할 수 있게 설명해야 한다는 어려움에 직면해있다. 뇌는 붉은 색을 보는 게 아니라 눈에 있는 감각세포의 신호에 의해 자극을 받아서 붉은색을 위한 신경패턴을 활성화한다. 뇌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듣게 아니라 음악과 함께 오는 아름다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신경패턴을 활성화한다. 뇌가 이날 ‘나’에게 통증을 의미하는 신경패턴이 통증을 느끼고 뇌가 아니라 행복을 담당하는 신경패턴이 행복을 안다.” 뇌가 통증을 우선 지각해야 통증이 생긴다. 그러나 “통증에 대한 주관적 느낌이 없다면 통증도 없다. 통증은 척수의 신경신호나 뇌에서 전달이 연결되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 현상이 의식에 떠오름으로써 생긴다.” 그렇다면 통증은 다시 말해 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도 없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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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시점에서 한 가지는 의심이 여지가 없다. 지금 나는 매 순간 ‘실제의 전체’를 경험한다. 데카르트가 인식했듯이 우리는 의식을 하나의 통일체로 경험한다. 그런데”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지적했듯이 감각자료는 제각각으로 제멋대로 뇌에 입성한다. 사과를 보는 아주 단순한 인식을 생각해보자. 빨갛다, 둥글다, 만지면 딱딱하다, 향기가 난다 맛을 보면 시면서 단 맛이 난다. 이런 데이터는 제각각이다. 그런데 그 제각각의 정보들이 사과라는 하나의 물건에 속한다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의식(칸트가 통각이라 부른)이 사과하는 통일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다양한 데이터에서 어떻게 하나의 사과라는 통일체가 나타나는가 더 나아가 우리가 우리의 의식을 하나의 시공간으로 통일체로 인식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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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전체 조직에 널리 퍼져 있는 중추들에서 이 모든 물리적인 정보를 분리하여 분석한다. 모든 분류가 흘러들어가고 이들이 다시 통일된 형태로 완성되는 최고사령부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물체 자체가 여러 분석으로 나누어지리라는 인상을 전혀 받지 않는다. 표면이 없는 윤곽만 춤을 추지도 않고 형태보다 앞서서 색깔만 뛰어다니지도 않는다. 신경생물학은 의식이란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아니면 ‘아직’이란 말을 넣는 것이 좋을까?”<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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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무리 주관적으로 확실하게 의식의 단일선을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뇌가 ‘나’라는 무대에서 공연하는 연극의 하나일 뿐이다. .실제로는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일하는 많은 부분들이 의식에 기여한다. 우리의 뇌는 ‘왕이 없는 제국’이다. 세상에는 자아와 비슷한 그 무엇인가는 없다. 자아는 삭제할 수 없는 진실의 기본 구성요소에 속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경험한 ‘나’라는 느낌, 그리고 지속적으로 바뀌는 다양한 자의식의 내용이다. 철학자들은 이를 ‘현상적 자아’라 부른다. 이 말은 자아라는 구상이 해체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착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뇌는 실제나 실제 속에 있는 자아가 아니라 그것의 모델과 함께 일을 한다. 이 모델은 뉴런의 복합적인 활성화 패턴과 이들의 일시적이고 역동적인 연합으로 만들어지낟. 이 모델은 육제 및 육체 움직임의 상이 있는 공간적인 영역, 우리가 느/낌을 의식하고 이를 행위의 기본으로 삼는 감정적인 영역, 문화 및 함께 사는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는 ㅅ최적 영역이라는 다양한 소단위로 분류된다. 이 모델들은 우리가 외부 세계에서 방향을 잡을 수 있게 하고 의견을 전하게 하며 우리 자신을 향한 관심과 생각을 통일된 하나로 조종하게 한다. 자아라는 느낌은 신체 내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내부 감지기들이 전달하는 전류에서 싹이 튼다. 자아 모델은 내부에서 발행한 입력이라는 부단한 원천을 통해 뇌에 고정된 유일한 표현적 구조이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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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뇌와 같은 지각 장치가 자신의 모델을 더 이상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을 ?대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다시 말해 모델들의 시스템은 의미론적으로 투명하다. “이들이 자기가 모델이라는 사실을 더 이상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스템은 자신의 표상적인 구조를 ‘통과’해서 본다. 우리는 자신의 뇌에 의해 활성화된 자아 모델의 내용과 자신을 끝없이 혼동한다. 이런 끝없는 혼동을 통해서 그 누구도 아닌 존재는 비로소 어떤 존재가 된다. 혼동을 텅해서 비로소 우리가 우리 자신-자신의 육체를 지니고 있으며 고유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깊게 생각하며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며 어쩌면 죽은 다음에도 피안에서 계속 살아가는 어떤 사람-에 대해 하는 이야기가 사실이 된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우리에게는 확고하고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핵심이 없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아트만은 없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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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트만은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순진하고 연실적인 ‘자아의 오해’라는 조건 아래에서 작업한다. 우리의 순진함은 우리가 마치 자신과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인 접촉을 하는 듯한 경험을 하는 데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사고 기관에는 일단 기본적인 ‘나’라는 느낌, 해당되는 시스템이 없는 현상적 자아가 생긴다.” 현상학에선 이를 지향성이라 말한다.<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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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적인 자아는 그저 되도록 의미 있는 생각을 하고 부딪치지 않게 움직이며 살아남기 위해 세상을 지각한다., 이를 가능한 한 사용자에게 편리한 외관을 제공하여 수많은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기 위한 진화의 기교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우리의 의식에 떠오르는 내용들을 컴퓨터 OS에 비유한다. 인터페이스에 나타나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실제가 아니라 그 실제의 상징을 뿐이다. 하드 디스크 어디에도 폴더는 없다. 그것은 그저 다루기 쉽게 만든 상징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바다와 하늘의 모든 색갈과 물결의 속삭임은 그저 상징일 뿐이고 던져준 막대기 뒤를 쫒아가는 개도 역동적인 상징이며 바람 대문에 얼굴에 와 부딪치는 머리카락도 생선 굽는 냄새도 상징이다. 그 아래는 복잡한 뉴런의 흥분 패턴이 숨어 있다.” 우리는 매트릭스 속에 살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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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의 레오가 그랬듯 이런 결론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킨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거대한 우주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기 힘들어 한다. 우리가 그 누구도 아닌 존재로 세상에 왔다가 그 누구도 아닌 존재로 죽으며 그 사이에는 포괄적인 혼동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누군가로 착각한다는 가설은 지나치게 냉정하고 인간을 경멸하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불교에선 그 느낌 너머로 나아갈 때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고,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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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99/37/cover150/897527585x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527585X</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絶學無憂 - [세계의 절반 구하기 - 왜 서구의 원조와 군사 개입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가]</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259676</link><pubDate>Tue, 06 Dec 2011 10: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25967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4142185&TPaperId=525967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348/96/coveroff/899414218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4142185&TPaperId=525967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세계의 절반 구하기 - 왜 서구의 원조와 군사 개입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가</a><br/>윌리엄 R. 이스털리 지음, 황규득 옮김 / 미지북스 / 2011년 10월<br/></td></tr></table><br/>실험물리학자와 이론물리학자 그리고 수학자가 같은 감옥에 갇혔다. 세 사람은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러다 나흘째 마침내 통조림을 공급받게 되었다. 그러나 통조림을 따는 도구가 없었다. <BR><BR>실험물리학자는 통조림을 감방 벽에 집어던지고 발로 짓밟기를 거듭한 끝에 통조림을 열 수 있었다. <BR><BR>이론물리학자는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통조림의 모서리를 벽에 긁었다. 이윽고 통조림에 작은 구멍이 났다. 이론물리학자는 그것을 벽에 집어던져 단번에 통조림을 열었다. <BR><BR>사람들이 수학자의 감방을 들여다보았을 때 수학자는 통조림을 앞에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BR><BR>“만일 통조림을 열었다고 가정해보았을 때….” <BR><BR>물론 화장실 유머일 뿐이지만 책상물림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절학무우란 말이 나오는 노자의 장을 보면 ‘뭘 좀 안다는 놈들이 설치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 나온다. 통조림을 열고 배를 채우기 보다는 통조림에 대한 가정을 세우고 논리를 건설하는 것이 우선인 수학자들을 너무 많이 보았고 그 수학자들이 세상을 위한다면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문제는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똘똘이 스머프들은 멸종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멀리 갈 것없이 한국 사회과학계를 보면 똘똘이 스머프들이 사는 법을 질리게 볼 수 있다. <BR><BR>"한국 사회과학계는 맑스주의의 가짜비급을 익히다 주화입마에 빠졌다." 어느 정치학자의 글에 나오는 말이다. <BR><BR>가짜비급이었는지 여부를 떠나 정치학자의 말대로 주화입마에 빠졌던 것은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맑스주의의 저항할 수 없는 매력때문이다. <BR><BR>다양한 분파가 있고 다양한 접근이 있기 때문에 뭉뜽그려 말할 수는 없지만 맑스주의의 기본논리는 'Stupid, It’s economy! 바보야 경제가 문제야'로 정리된다. 경제적 소유에 따른 계급이란 개념으로 사회의 모든 문제가 설명된다는 환원론 내지는 결정론이다. <BR><BR>오만잡다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없는 문제를 변수 하나로 설명이 가능하다니 이 아니 기쁠 수 없다. 문제는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의 매력은 바로 그 한계이다. 그리고 그 치명적 매력에 넘어간 한국의 사회과학계는 주화입마에 빠져 현실을 보는 눈이 멀어버렸다는 것이다. 똘똘이 스머프들에게 중요한 것은 논리가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논리에 맞아들어가는 것이니까. 수학자의 통조림 따는 법은 언제나 그러했다. <BR><BR>재미있는 것은 맑스주의가 속류 또는 부르조아들의 가짜 학문이라 부르며 증오해마지 않는 주류경제학 역시 마찬가지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Economics as Religion'이란 제목의 책이 기억난다. 밀튼 프리드먼의 시카고 학파를 공격하는 이책은 주류경제학을 과학이 아니라 종교라 비판했다. <BR><BR>경제학은 사회과학의 여왕이다. 경제학은 학문으로서도 졸업생의 취직에서도 여왕의 자리를 굳히고 있다. 경제학이 그런 지위를 차지한 이유는 사람들이 바라마지 않는 돈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학이 학계에서도 여왕인 이유는 방법론에 있다. <BR><BR>고등학생 시절 경제학과를 갈까 생각하다 다른 과를 택했었다. 이유는 수학을 못했기 때문이다. 수학자보다 수학을 더 잘한다는 말을 듣는 경제학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경제학 논문을 보면 왠만한 수학지식으로는 이해는 고사하고 읽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BR><BR>그러나 경제학이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경제학 논문은 다른 사회과학과 마찬가지로 '썰'로 승부하는 학문이었다. 그러나 한계효용이론과 함께 경제학이 수학화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BR><BR>한계효용이론은 경제학의 혁명이라 할 수 있었다. 한계효용이론과 함께 경제학이 수학화되면서 경제학은 인문학이 꿈에도 바라마지 않는 '과학'의 지위를 갖게 되었고 인간사회를 자연세계처럼 수학적으로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BR><BR>경제학의 수학화가 가능했던 것은 한계효용이론의 인간에 대한 가정 때문이다. 적어도 시장에서는 인간행위가 특정한 형식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손익의 결과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최소한 시장에서 거래할 때의 인간은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손익의 결과에 따라 설명할 수 있다. <BR><BR>문제는 인간은 시장에서 조차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기적인 인간이라도 계산기처럼 손익관계만 생각하고 살지는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경제학의 모든 오류가 태어났다. <BR><BR>새삼스러울 것 없지 않은가? 경제학에 대한 다른 사회과학자들의 공격은 항상 그런 전제를 깔고 있었고 경제학 내에서도 행동경제학은 그런 문제의식에서 태어난 접근법이다. 이미 번역된 행동경제학 서적만도 많고 많고 그렇게 쌓인 세월도 많고도 많다. 그러나 언제나 강단의 경제학자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말은 맞겠지 그래서 뭔데(So what?) <BR><BR>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숫자로 쌓아올린 모델이지 그 모델이 현실과 맞는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학자의 통조림 따는 법은 언제나 그렇다. <BR><BR>문제는 그 수학자들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덤빌 때이다. 그때 세상의 비극은 현실의 지옥이된다. 러시아는 그 지옥을 한 세기에 두번이나 겪어야 했던 억세게 운수 사나운 나라였다. <BR><BR>혁명은 역사의 예외이므로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렇기에 혁명에 관한 책은 많고도 많다. 크레인 브린튼의 ‘혁명의 해부’는 그 많은 책 중에 고전으로 꼽힌다. 혁명은 언제나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다. 그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처음부터 혁명을 꿈꾸지는 않는다. 문제해결의 시작은 온건파의 개혁이다. 혁명은 온건파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난다. 극단주의자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이상에 현실을 두드려 맞추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실이 관념에 맞아들어가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현실을 관념에 맞춰 재단해야 하고 혁명은 독재와 테러로 추락한다. 결국 혁명은 반혁명을 낳을 수 밖에 없다. 혁명의 테러는 테르미도르(혁명 이후의 안정)으로 이행한다. 브린튼이 말한 혁명의 예로 러시아 혁명은 전형적인 예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20세기를 혁명으로 시작해 혁명으로 끝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BR><BR>내전과 공포정치가 아니더라도 혁명은 언제나 끔찍한 고통과 함께 온다. 혁명이 부정한 체제가 무너지면서 혼란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세기초에 그랬듯 세기말에도 극단주의자들의 관념론은 고통의 무게를 늘리는데 탁월했다. <BR><BR>“러시아는 1992년 1월 1일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했다. 러시아인들이 오만한 서구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가격통제를 철폐하고 곧이어 국영기업을 민영화했을 때 서구는 러시아가 최소한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했음을 인정했다. 서구의 경제학자들은 1992년에 쓴 중요한 글에서 ‘몇 년 내에 러시아의 평균생활수준이 대폭 높아질 것’이라고 러시아인들에게 약속했다. 1991년 12월에는 그렇게 말했던 바로 그 경제학자가 러시아식 ‘충격요법’ 계획을 두고 ‘시장경제로의 신속한 전환을 위한 모든 필수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BR><BR>세기말에 일어난 러시아의 혁명은 충격요법이라 알려진 자본주의 혁명이었다. 브린튼의 정의에 따르면 이 혁명은 혁명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체제의 부정, 부정 후의 카오스, 카오스 이후(혁명의 부정으로서의) 안정 등 이 혁명은 브린튼이 말한 혁명의 단계를 모두 밟아갔다. <BR><BR>문제는 그것이 의도되지 않은 혁명이었다는 점이다. 그 혁명을 기안한 하버드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경제를 개혁한다고 생각했지 혁명을 ‘계획’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시장이란 것을 ‘선포’하는 것만으로 러시아가 미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BR><BR>충격요법의 거대한 실패는 어처구니 없는 것이라 ‘화폐전쟁’의 저자는 러시아를 재기불능으로 만들려는 로스차일드와 록펠러가의 음모였다고 까지 말한다. <BR><BR>쇼크 테라피의 쇼크로 러시아 경제가 쇼크사 한 후 어떻게 시장을 ‘선포’하는 것만으로 시장이 존재하게 되고 하루 아침에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로 바뀔 수 있으며 미국 같은 번영을 누릴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는지 어처구니 없어 할 뿐이다. 그 똑똑한 하버드 교수들이 어떻게 그런 어처구니 없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는지… 음모론이 유력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BR><BR>당시 음모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저자는 그 어처구니 없는 일을 설명하는데 음모론까지 동원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BR><BR>당시 세계은행에서 일했던 저자는 그 혁명모의에 참여했고 그 실패를 경험햇다,. “당시 나와 같은 경제학자들은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장의 하향식 강요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10여년이나 걸리는 실패를 감수해야 했다. 1990~1995년까지 세계은행과 함께 러시아 문제를 연구해왔던 나 역시 충격요법을 신봉했다. 러시아를 미국과 같은 모습으로 재구성하려는 공식적 개혁 운동이 시작된지 13년 후 환자와 같은 러시아는 아직도 투병 중이다. 이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BR><BR>“충격요법이란 세계은행과 IMF가 말하는 ‘구조조정’이라는 방식을 러시아에 적용한 것이었다. 우리와 같은 충격요법 전문가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은 모든 개혁은 부분적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한번에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심지어 ‘모든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한 정보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정책 결정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BR><BR>세계은행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저자는 세계은행(그리고 IMF와 서방선진국들의 원조기구들)의 접근법은 모두 충격요법의 일종일 뿐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러시아 뿐 아니라 모든 곳에서 그 충격요법은 실패해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단지 러시아라는 사이즈 때문에 그 실패가 거대해 보일 뿐 다른 모든 경우에서도 충격요법은 언제나 실패해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BR><BR>“서구 세계가 지난 50년간 대외 원조로 2조3000억 달러를 지출했지만 말라리아 치사율을 절반으로 감소시키기 위한 12센트에 불과한 약품을 어린이들에게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서구 세계는 2조 3000억 달러를 지출했지만 가난한 가정에 4달러짜리 모기장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서구 세계는 2조 3000억달러를 지출했지만 500만건의 어린이 사망을 예방할 수 있는 3달러를 초보엄마 들에게 지급하지 못하고 잇다, 서구 세계는 2조 3000억달러를 지출했지만 아마레치는 여전히 나무를 하느라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선의의 동정심을 가지고도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편의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비극이다.” <BR><BR>왜 이렇게 되었는가? 문제는 단순했다. 저자의 러시아 경험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나는 모스크바에 몰려들던 다른 많은 서구 경제학자들처럼 러시아의 제도와 역사에 대한 가장 피상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저자는 시장이 기능하려면 단지 시장을 선포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BR><BR>“시장에 대한 찬사와 관련된 문제는 바로 시장이 잘 운영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상향식 탐색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적 제도와 규범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것들 중 한 가지는 시장 참여자가 보통 ‘사기’로 알려진 ‘기회주의적 행동’에 참여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은 개인의 이익 추구를 사회적으로 유익한 것으로 평가하지만 이는 당사자 간의 상호 유익한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규범이 있을 경우에만 사실이 된다. 탐욕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부족은 시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 <BR><BR>경제학자들이 간과하는 것은 시장은 사회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폴라니 식으로 말하자면 사회에 embedding되었기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는 경제는 언제나 시장이 돌아가게 하는 사회가 있다. 러시아에서 충격요법이 실패한 것은 시장을 떠받칠, 다시 말해 시장이 embedding될 사회가 러시아엔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2조 3000억 달러가 낭비된 이유 역시 그 돈이 의도한 ‘계획’이 받아들여질 사회가 정치가 피원조국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BR><BR>서구의 원조는 “시장이 작동하는 데 필요한 선의의 법률과 훌륭한 제도를 창안하기 위해 빈국들을 대신해 포괄적 개혁을 고안해낼 수는 없다. 시장이 잘 작동하도록 하는 규칙들은 사회규범, 관계망, 그리고 가장 큰 보상을 가져다주는 공식법률과 제도에 대한 복잡다단한 상향식 탐색을 반영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로한 규범, 네트웤, 제도는 변화된 환경과 그들 자신의 과거사에 호응하면서 변화해간다. 버크, 포퍼, 하이에크는 이러한 사회적 상호작용이 너무 복잡한 나머지 모든 규칙을 단번에 바꾸려 했던 하향식 개혁은 상황을 더 좋게 만들기보다 나브게 만들 것이라는 기본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BR><BR>언제나 혁명은 실패했고 실패할 것이다. 저자는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저자는 그 실패를 ‘계획가’들의 실패라 말한다. 집을 지으려면 지형과 환경을 살피고 그에 맞춰 땅을 다지고 하나씩 하나씩 벽돌을 쌓아올려야만 한다. 저자가 모든 개혁은 부분적일 수 밖에 없다고, 점진적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세계은행을 떠나 대학으로 물러난 지금와 생각했을 때 저자는 자신이 ‘계획가’가 아니라 ‘탐색가’였어야 했다고 말한다. <BR><BR>그러나 사람들은 탐색가보다는 계획가가 되려한다. 그것이 거창해보이고 더 멋있어 보이니까. 더군다나 땅을 딛고 손을 더럽히며 티도 안나는 허드렛일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집이 지어질 땅에는 가보지 않고 표준설계도만 하청업자에게 줘어준 다음 집이 지어지길 바란다. <BR><BR>그러나 정치도 경제도 ‘헤쳐나가는 과학(science of muddling through)’이다. 부유한 나라의 경제와 정치는 시행착오와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탐색과정 없이 부유한 경제와 민주주의를 만들 설계도 따위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유일한 대계획은 대계획을 중지하는 것이다. 유일한 대해답은 대해답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BR><BR>저자는 세계은행에서 러시아의 대실패를 겪고 다른 많은 원조가 실패하는 것을 신물나게 경험한 후에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실패는 훌륭한 교사이다. 똘똘이 스머프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실패를 경험한 패자의 자리를 언제나 그런 설계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똘똘이 스머프들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50년동안 실패가 반복된 이유이다. 그러나 저자는 희망을 본다. 원조기구들도 조직 차원의 학습을 해왔기 때문이다. 오랜 경험은 공룡도 배우게 한다.&nbsp;<BR>&nbsp;
평점 4.5<BR>]]></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348/96/cover150/8994142185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4142185</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Social Jetlag -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 - 생체 리듬을 무시하고 사는 현대인에 대한 경고]</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212663</link><pubDate>Tue, 15 Nov 2011 08: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21266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355742&TPaperId=521266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348/33/coveroff/899235574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355742&TPaperId=521266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시간을 빼앗긴 사람들 - 생체 리듬을 무시하고 사는 현대인에 대한 경고</a><br/>틸 뢰네베르크 지음, 유영미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1년 10월<br/></td></tr></table><br/>이책의 성격은 입문서이다. 구체적으로는 시계생물학에 관한 입문서이다. 그러나 이 말만으로 이책이 무슨 내용을 다루는지 짐작할 사람은 많지 않다. 시계생물학이란 말 자체가 낯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계생물학이란 말 대신 바이오리듬이라 한다면 쉽게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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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바이오리듬이라면 쉽게 누구나 아는 말이 되었지만 그 말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그 말을 다루는 분야인 시계생물학의 역사 자체가 짧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2차대전 직후가 이 분야의 탄생시점이었다. 그러다보니 서점을 뒤져보면 수면, 바이오리듬에 대한 책은 꽤 있지만 학문적인 기초개념으로서 바이오리듬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책은 드물다. 역사도 짧고 그 분야의 학자도 적은 마이너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책은 그 드문 책 중의 하나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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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 아마 지레 겁이 날지 모르겠다. 엄밀히 말하면 생물학, 과학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책은 과학책이다. 그러나 겁낼 필요는 없다. 학부생을 위한 교과서나 전문가 동료들을 위해 쓴 책이 아니라 교양서적이라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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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이 다루는 내용은 사실 우리가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점심 후 노곤할 때마다 누구나 경험하는 것들이다. 이책을 읽고 나면 왜 누구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데 누구는 반대인가, 왜 밤을 새면 피곤이 몇배가 되는가, 규칙적으로 자고 식사하는 것이 왜 건강에 (최소한 컨디션에) 좋은가 같은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다. 경험적으로 그렇더라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사람이 어떻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는 답을 할 수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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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구성 역시 교과서처럼 기본개념을 설명하고 학설을 소개하는 식으로 된 것이 아니라 그런 실생활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현상들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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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보자. 가장 일찍 일어나는 직업군을 들자면 학생과 교사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시간표가 바람직한가? 저자는 아니라 말한다. 왜냐하면 생물학적으로 인간에게 맞지 않는 시간표이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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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따르면 청소년기에는 올빼미형이 대다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밤 늦게까지 뭔가 하고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 그 나이 때이다. 학교의 시간표는 올빼미들에게 종달새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란 말이다. 저자는 오전수업은 시간낭비라 말한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시간에 억지로 책상에 붙들어 놔봐야 졸기만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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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학교시간표처럼 생물학적 인간의 리듬과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강요된 리듬이 차이가 날 때 일어나는 문제를 사회적 시차증이라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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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시차증의 다른 예는 섬머타임이다. 섬머타임은 강제로 생물학적 리듬을 교란하는 것으로 제트기를 타고 다른 시간대로 간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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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감이 잡힐 것이다. 언제 자고 언제 먹을 것인가 언제 쉴 것인가 최상의 컨디션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생활에서 누구나 결정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이책은 그런 결정을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기본원칙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드물면서 재미있고 유용한 책이다.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348/33/cover150/8992355742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355742</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따분함을 말한다 - [권태 - 그 창조적인 역사]</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195128</link><pubDate>Mon, 07 Nov 2011 15: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19512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6370098&TPaperId=5195128"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327/76/coveroff/896637009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6370098&TPaperId=519512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권태 - 그 창조적인 역사</a><br/>피터 투이 지음, 이은경 옮김 / 미다스북스 / 2011년 10월<br/></td></tr></table><br/>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신세계의 낯선 환경을 견디는 것 못지 않게 “칼뱅주의 그 자체를 견뎌내기 위해서도 분투해야 했다. 자기혐오에 이를 정도의 자기반성과 끝없는 노력을 요구하는 칼뱅주의의 무게는 신도 개개인이 감당하기엔 벅찬 것이었다. 엄혹한 종교는 아이들을 겁에 질리게 했다. 17세기의 판사 새뮤얼 시월의 글에는 열일곱 살 난 딸 이야기가 나온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조금 뒤에 딸이 대성통곡을 했다. 아내가 이유를 물었지만 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딸이 입을 열고 한 말은 자기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갈까 봐 너무 무섭다는 것이었다.’ 그런 불안은 사람들을 병들게 했다. 칼뱅주의는 고통받는 영혼에게 오직 하나의 위안거리를 주었는데 그것은 물질적 세상 속에서” (바버라 에런라이크) 자신이 쓸모있는, 구원받을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힘들게 일하는 것이었다. 베버는 그런 위안을 자본주의 정신이란 말로 포장했지만 그런 위안을 찾아야 하는 사람에겐 결코 위안일 수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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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그런 식으로조차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가정주부 같은 경우, “남은 것은 병적인 자기성찰이었다. 사람들은 소화불량, 불면증, 요통 등 신경쇠약 증세를 불러들이기에 딱 좋은 상태에 놓였다. 유행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몰라도 여성의 병약함은 강제된 나태함과 불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에서 기인한 것이었고 실제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주었다. 수십 년 동안 병약함으로 고통을 겪었던 (핸리 제임스의 누이인) 앨리스 제임스는 유방암 판정을 받자 곧 죽을 수 잇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일상의 노동이 비정형적이며 많은 부분 여성의 노동과 겹치는 성직자들 또한 마찬가지엿다. 칼뱅주의를 믿는 영혼, 혹은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영혼은 진짜 일, 그러니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기혐오로 자신을 소진시킬 수 밖에 없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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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주의의 음울함에 대한 반동으로 1860년대 신사상 운동이 막을 올린다. 신사상은 헨리제임스의 표현을 빌리면 “지옥불 신학과 관계된 병”에 대한 치료제였다. “신사상의 관점에서 보는 신은 냉담하고 무관심한 존재가 아니라 편재하는 전능한 정신 또는 영혼이다.” 신사상의 핵심은 “물질적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있는 것은 오직 생각과 마음, 정신, 미덕, 사랑일 뿐이다. 따라서 질병이나 가난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실체는 해체되어 정신, 에너지, 진동으로 변하며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의식적 통제에 잠재적으로 복종한다. 이것이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과학’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 일체유심조니 고통은 마음에 달렸다는 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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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상운동은 ‘시크릿’으로 대표되는 미국식 성공학으로 변질된다: 세상은 마음 먹기에 달렸으니 돈도 성공도 멋진 애인도 내 마음에 달렸다는. 나중에 어떻게 변질되었든 신사상운동은 칼뱅주의가 정신에 가하는 고문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칼뱅주의는 그들의 머리를 ‘정신적 공허함, 고립감, 냉담함이라는 강렬한 감정’으로 채웠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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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겪은,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압박감을 사르트르는 ‘우연(Contingency)’이란 말로 요약한다. 나와 세상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필연적 관계가 없으니 세상은 나에게 선의를 갖지 않으며 나에게 무관심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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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우연’이란 개념은 하이데거의 실존적 권태란 개념에서 빌린 것이다. “하이데거는 권태를 단순한 권태와 실존적 권태로 나눈다. 그는 개인이 어떤 환경에 의해 완전한 무관심의 상태로 빠졌을 때 실존적 권태를 겪는다고 말한다. 이런 개인은 공허함을 느끼고 주변 세상으로부터 어떤 의미 있는 것도 기대하지 못하고 또 받지 못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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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자는 청교도들이 겪었던 만성적 권태를 실존적 권태라 할 수 있는가 의문이다. 청교도들이 겪은 고통은 분명 자신과 세계의 관계가 부서지는 경험이었고 그 경험은 사르트르가 말한 ‘우연’이란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실존적 권태의 희생자들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청교도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자살은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다. 나와 세계의 관계가 깨진 마당에 자살이 대수인가? 그러나 헨리 제임스의 누이는 죽을 수 있다고 기뻐했지 자살을 하진 않았다. “권태와 자살의 상관관계는 실생활보다 문학적인 텍스트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듯하다.” 저자는 실존적 권태란 개념은 그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한 예로 영국의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은 젊어서 룰렛 게임을 자주 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무사히 오래 살다 세상을 떠났다. 자살은 창조적인 사람들에게서 더 흔히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실존적 권태 때문이 아니라 병에 걸리거나 노쇠해졌기 때문에 죽는다. 그렇다면 엠마 보바리는 어떨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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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바리 부인의 탈선은 권태 때문이다. ‘보바리 부인’은 “19세기 프랑스 북부 지방의 순응적이고 관습에 얽매인 부르주아 계층의 만성적 권태에 대한 반발 속에서 주인공 엠마를 그려낸다. 이 소설에서는 관습 타파를 향한 개인적인 열망을 엿볼 수 있다. 관습 깨기의 목적은 평탄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에 다시금 기복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녀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된 딸마저 유모에게 맡겼기 때문에 엄마로서도 역할이 없었다”. 엠마에게 관습 타파의 목적은 그런 무위도식으로부터의 도피였고 그녀가 깬 관습은 성적인 것이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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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는 따분한 삶 때문에 불륜관계를 시작했을지는 모르나 그녀가 자살한 이유는 치욕 때문이다. 실존적 권태의 희생자들은 자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살과 관계된 어떤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그건 대부분 글을 통해서다. 삶의 무의미함을 지적으로 깨닫는데는 죽음을 양산하는 고통이 따르지 않는다. 그런 깨달음이 고통스러운 우울증의 결과가 아닌 한, 그렇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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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엠마가 겪었고 청교도들이 겪었던 고통을 만성적 권태라 말한다. 그 권태는 논리로 짜여진 실존적 권태가 아닌 생리현상이 원인이라 저자는 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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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키워봤다면 따분해하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을 것이다. 동물들은 따분함을 느끼면 더 많이 잔다. 또 깨고 나면 놀이를 하거나 산책을 하자고 주인을 조르고 괴롭힌다. 만약 주인이 놀아주거나 산택을 시켜주지 않으면 풀 죽은 채로 집안이나 정원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하낟. 그 모습은 시무룩하니 축 늘어져 맥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동물이 느끼는 권태는 당연히 실존적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성격의 불안감이다.” 할 일이 없는 애완동물은 감금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감금 상태에서 그들이 느끼는 1차적 감정은 지금 상태에 대한 혐오이며 지금처럼은 좋지 않다는 불안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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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 상태가 지속되면 동물은 우선 권태를 실질적으로 인식한다. 이는 관찰이 가능하다. 이후 좌절, 동요, 화 폭력 그리고 끝내는 우울증이 찾아온다. 감금된 동물은 권태에서 광적 반응 (동요하고 화를 냄)으로 그리고 우울 반응으로 옮겨간다.” 이 과정은 인간의 경우와 일치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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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는 분노에 찬 행동이나 광적인 행동은 물론 우울증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보다 권태는 감금, 고독감, 감각 상실이 지속되면서 시작되는 일련의 정서적 과정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라 할 수있다. 권태는 다른 여러 정서들과 함께 찾아온다. 권태는 이들 정서를 일으키는 원인이 아니다. 권태는 분노와 우울함이 차례로 나타느는 과정에서 첫번째로 나타나는 정서라 할 수 있다. 권태는 앞으로 나타날 보다 해로운 상태를 조기에 알리는 경고 신호이다. 권태는 태풍 전의 고요함 같은 건지도 모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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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와 우울함의 차이는 권태는 밖을 향하지만 우울은 안으로 자기 자신을 향한다는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신호가 권태이고 그럴 수 없어 포기했을 때 우울로 넘어간다는 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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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들이 겪었던 고통은 권태가 만성화되고 그것이 우울로 진행된 것이다. 사르트르가 우연이라 불렀고 하이데거가 실존적 권태라 불렀던 것은 정확히는 우울이 맞다고 저자는 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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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계획은 무엇일까? 신의 뜻에 어떻게 순응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신은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실존적 권태를 겪는 사람들과 같은 소극적이고 절망적이며 비관적인 태도로 이 착잡한 질문들에 반응한다. 루터교인인 한 동료는 그 느낌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루터교인들은 신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지. 그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하는 성직자들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하지만 그건 동시에 우리가 신을 대신해서 선을 행해야 한다는 말도 되지. 선을 행하는 건 그리 단순하지가 않아. 가끔은 막연히 선이 무엇인지 모를 때도 있어. 그럴 때면 무척 걱정괴도 불안해지지. 그럼에도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할 책임이 있어. 아주 간단해. 그러나 쉽지는 않지.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천성적으로 어쩔 수 없이 무척 불안해하고 우울해 하는 거야.’”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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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불안감은 ‘실존적 권태’란 말로 잘 요약된다. 그러나 저자는 실존적 권태는 “좌절, 식상함, 우울, 혐오, 무관심, 무감각, 갇혀 있다는 느낌 들의 서로 연관된 장애들을 두루 포함한 말’이라 본다. 다시 말해 만성적 권태로 시작되는 일련의 감정 메커니즘의 총합이라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저자는 본다. 그 시작은 단순한 권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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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는 단순한 생리적 반응이며 오래가지 않는 기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만성적으로 권태를 자주 느끼는 사람은 근심과 우울증 내지는 약물, 알코올 중독에 빠지거나 분노와 공격적인 행동을 보일 위험이 크다.” 우리에 갇힌 동물과 그리 다르지 않은 메커니즘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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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권태가 18세기 계몽시대에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왜 나오는 것일까? 그런 주장은 “권태가 소외감이나 사회적 무질서라는 개념과 직관적으로 연되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따라서 권태, 소외감, 사회적 무질서는 모두 근대의 독특한 현상이다.” 물론 그런 주장이 권태가 언제 어디서나 있었다는 것을, 권태가 생리적인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18세기 이전까지 권태는 기껏해야 주변적인 경험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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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시대에 들어서야 개인의 지위가 중요해졌다. 이 시기에는 신탁 정치, 독재젗치, 전통적인 특권, 그리고 집산주의 전통의 맹목적인 고수에 도전이 가해졋다. 그러다보니 이 소용돌이치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개인과 개인의 감정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어 권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졋다.” 그리고 “후기 근대사회에 접어들어 여가 생활이 늘어나고 인간의 행복할 권리가 부각되었으며 기독교가 쇠퇴하는 대신 세속화가 뚜렷해졌다. (이를 ‘서양 문명 한가운데서 커져가는 형이상학적 허공’이라 칭하기도 한다) 또 개인의 권리와 더불어 내적 경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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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의 풍부한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여가는 늘었지만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개인의 소외감이 커졌고 그 시간을 제대로 보낼 책임은 개인이 모두 져야 했다. 그리고 증상에 대한 진단이 권태라 설명되고 나면 권태는 “’무의미함의 흔적’이 된다. 그 안에서 문제의 본질이 흐려진다. 분노에 이어 떠올라 근심으로 치닫는 권태 안에서 인간은 당연히도 모든 삶이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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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실존적 권태는 허깨비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까? 실존적 권태라는 것이 있다면 정말로 잇는 것이다. 물론 나 같은 회의론자들은 실존적 권태를 각종 장애를 두루 나타내는 하나의 용어 내지는 그저 상대적으로 사소한 현상으로 여기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권태는 보편적인 경험이다. 대부분의 시대에서 사람들이 권태를 느껴왔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권태는 대개 이로운 정서다. 하지만 만성적인 단계로 넘어가면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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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327/76/cover150/8966370098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6370098</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힘을 원하는가? - [권력의 기술 - 조직에서 권력을 거머쥐기 위한 13가지 전략]</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085099</link><pubDate>Sun, 18 Sep 2011 20: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08509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208868&TPaperId=5085099"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280/60/coveroff/893520886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208868&TPaperId=508509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권력의 기술 - 조직에서 권력을 거머쥐기 위한 13가지 전략</a><br/>제프리 페퍼 지음, 이경남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08월<br/></td></tr></table><br/>이책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마키아벨리나 한비자가 말하는 것과 같은 내용을 말한다: 권력을 어떻게 잡고 권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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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재난은 사람을 믿는 데서 비롯된다. 다른 사람을 믿으면 그에게 지배받게 된다. 신하는 군주와 골육의 친분을 맺고 잇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위세에 얽매어 어쩔 수 없이 섬기는 것이다. 따라서 신하된 자는 군주의 마음을 엿보고 살피느라 잠시도 쉬지 않는데 군주는 그 위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교만하게 처신하니 이것이 세상에 군주를 협박하고 시해하는 일이 발생하는 까닭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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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의 말이다. 한비자도 마키아벨리도 권력의 자리에선 아무도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교만하게 되면 죽음에 이른다고 경고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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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 역시 같은 경고를 한다. “힘이 막강하고 일이 잘 풀릴 때는 자신감이 지나쳐 주의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아랫사람들의 말을 잘 믿고 그들의 제안을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람을 너무 잘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면 그 자체가 화근이 될 수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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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들이 원래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자리가 그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첨에 관해 많은 경고들이 있어온 이유이다. 그러나 아첨이 사라지지 않고 번창하는 이유는 그 자리에선 누구든 아첨에 취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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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저자는 권력으로의 길은 우선 권력자와 가까워지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눈에 띄어야 한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임명할 것인가? 권력자에게 가까이 가는 방법은 우선 눈에 띄어야 하고 그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 신임을 얻는 방법의 하나는 권력자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것이다. “일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상사와의 관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사가 실수할 때 누가 그것을 지적했는지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한번 되짚어보라. 실제로 권력자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침’이다. 좋은 기분이 들면 자신의 영향력도 아울러 강화되기 때문에 아첨의 효과는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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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첨에는 흔들린다. 아첨은 칭찬의 일종으로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의 자리에 앉은 사람은 그 선물에 특히 취약하다. 그 자리가 그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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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접근을 부르고 금기를 줄인다. 처음에는 힘 있는 사람도 사람도 자신이 누리는 특별대우가 그들이 앉아있는 자리와 그들이 장악한 자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고 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생각은 희미해지고 자신이 잘나서 그렇게 되엇다고 생각하게 되낟. 권력은 과신과 위험한 상황, 다른 사람에 대한 무감각, 고정과념을 낳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권력자는 사람들을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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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있는 자리는 오만을 부르고 “지나친 자신감과 무감각은 권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자신감이 지나치면 알력과 불화로 문제가 생겼을 때 반대편의 요구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자신이나 조직의 목적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 권좌에 앉아 있으면 그렇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보기가 어렵다.” 그러다보면 권력자에 대한 반대자들이 동맹을 만들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의 자리를 넘보는 야심가들이 그의 눈을 가려 마침내 그를 쓰러트릴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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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마약과 같아 권력을 쥔 사람을 취하게 하고 그의 눈을 가리며 머리를 마비시켜 제 무덤을파게 한다. 권력은 언제나 그래왔기에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는 동과 서, 고와 금이 다르지 않다. 어차피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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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이 그리는 권력자의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저자는 그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지만 그건 실제 힘있는 엘리트들 대다수의 진실이기도 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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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을 거둔 사람들을 분석하면 우리가 보통 정서적으로 안정됐다고하는 개념과는 어울리지 않는 공통의 특징이 나타난다. 슈퍼클래스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공통적으로 정신병리학적 특징을 갖고 있다. 종종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들은 일종의 노이로제 때문에 성공의 문턱에서 좌절하지만 성공한 사람들은 정신병리학적 특징을 이용해 성공을 거머줜다. 그들은 글자 그대로 심한 스트레스와 높은 수익을 안겨주는 업무로 인해 뇌에서 만들어지는 엔도르핀에 중독된다. 한 국가나 기업, 군대, 교회를 다스리는 일은 일종의 극한 운동이며 날마다 중대한 이해관계가 걸린 상황에 직면하다보면 매일 엔도르핀이 생기고 점점 더 엔도르핀에 의지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인이 하던 일을 그만두면 종종 우울증에 빠지는데 그러한 우울증은 금단현상처럼 보일 뿐 아니라 실제로 금단현상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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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정계에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성공할 수 잇는 특징’은 사실 ‘미국 대통령에게서 보고 싶지 않은 특징’이라는 통념이 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 많은 시간을 들여 아주 집중해야 한다. 즉 맹목적으로 야심을 가져야 한다. 평범한 존재로서의 모습은 버려야 한다. 부모와 배우자 역할을 제대로 하면서 평생동안 끈질기게 선거운동을 벌이기는 어렵다. 그리고 통치에 필요한 지식보다는 정략을 우선시해야 하며 사생활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비열하고 정치적인 동기를 띤 마녀사냥을 벌리고 그보다 더한 일도 척척할 수 있을 각오로 대통령 자리를 원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자리에 오르려는 사람에게서는 확실히 자아도취적인 모습이 나타나며 강박관념과 대중으로부터 얻는 피드백에 중독된 모습 또한 나타난다. 그들은 성공에만 눈이 먼 특이하고 불완전한 개인들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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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클래스의 일원이 되고 싶다면 꼭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그것은 아주 지독히 슈퍼클래스가 되길 바라야 한다’는 것이다. 나무나도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미칠 정도가 되어야 한다.” (데이비드 로스코프)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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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권력은 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물론 지위와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앤디 그로브 식으로 말하면) '미친' 놈이다. 'Only the paranoids suvive' 어느 분야든 정상에 남는 자는 그 목표에 미쳐야 한다. 그 목표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충분한 사람만 정상에 오른다. 맑스의 신조처럼 “남이 뭐라 건 네 갈길을 가라.” 그런 각오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착함'과는 거리가 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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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감으로 어떤 사람이 좋으냐는 질문에 대해 여성들은 문화와 관계없이 무엇보다도 친철함과 공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도 상당히 중시한다. 그러나 친절함과 공감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과 충돌한다. 여성들이 이 두개의 서로 엇갈리는 가치를 어떻게 관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현실적인 문제다. 여성에게 화려한 삶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삶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대니얼 네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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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저자가 그리는 권력자들의 모습 역시 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저자는 거기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권력을 잡기 위해 희생해야 할 것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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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점심은 없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권력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하려거든 정말 무엇을 위한 노력인지 그리고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권력을 손에 넣은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른 사람들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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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잡고 유지하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권력을 얻고자 한다면 개인적인 생활은 포기해야 한다. 구너력과 지위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취미도 즐기고 친구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개인적인 관계를 이어가기는 어렵다. 특히 여성은 더욱더 그렇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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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신발 회사에서 매우 활동적이고 뛰어난 능력으로 인정받는 41세의 한 여성 중간관리자는 2009년 현재 그 회사의 고위직 여성 100명 중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햇다. 고위직 여성 중에는 그녀처럼 독신이 많았고 결혼한 사람도 대부분 아이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진정한 의미의 개인 생활은 없다고 말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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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정유회사의 중국 직영점을 운영하는 한 여성 중간관리자는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잇지만 남편이 일을 하지 않는다. 힐러리 클린턴처럼 성공한 남편을 가진 강하고 성공한 여성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커플은 어디까지나 예외에 불과하다. 나는 많은 전문직 여성들의 입에서 나도 ‘아내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면 집에서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재능있느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더 많은 시간과 자원을 하나의 직업에 집중하면 그만큼 성공의 확률이 높아진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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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 38년 동안 미국영화협회를 이끌었던 잭 발렌티도 마찬가지엿다. 그는 평생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야망을 추구한 세월이 ‘우울한 행로’였다고 탄식하면서 80대에 들어섰어도 여전히 바쁜 스케줄에 쫓기듯 움직이며 자식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고 안타까워 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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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길을 가려면 즐겨야 한다. "억만장자들의 기본적인 특징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부의 추구를 즐긴다는 것이다. 상을 받는 것보다 이겼다는 만족감 그 자체가 그들을 보통의 슈퍼리치의 대열로 이끈 원동력이다. 자수성가한 억만장자들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에 무관심하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사는 모습이 소박하다. 샘 월튼과 워렌 버핏은 자신들의 막대한 재력으로 사치스러운 토지를 사들이는 것을 거절한 사람들이다. 로스 페로와 필 얀슈츠는 그리 비싸지 않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만족했으며 해마다 최신 모델을 찾지도 않는다. 다른 슈퍼리치들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물질적 욕망을 쫓기보다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햇다." (마틴 프리드슨)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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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미칠 수 있는가? 즐길 수 있는가? 간절히 원하는가? 그렇다면 이책은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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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내용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새로울 것이 없다. 이미 2천년도 더 전에 쓰여진 한비자에도 500년도 전 마키아벨리도 말한 내용들이 반복될 뿐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유행한 ‘권력의 법칙’도 대동소이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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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책의 가치는 현실감에 잇다. 한비자와 마키아벨리의 이야기는 어딘가 다른 세상의 일처럼 들린다. 그 독자가 이미 권력을 쥔 왕이 대상이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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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비현실감은 ‘권력의 법칙’ 역시 마찬가지이다. 권력의 법칙은 수많은 일화들을 모아 놓은 편집이다. 책상머리 편집서란 말인데 물론 흔한 자기계발서들과는 격이 다르다. 그러나 그책의 문제는 비현실감에 있다. 아둥바둥 하루를 넘기기 위해 발버둥 치는 보통사람들에겐 별로 와닿지 않는 거창한 일화들이란 점에서 한비자나 마키아벨리와 별 다를 것이 없다. 더군다나 권력의 법칙은 57법칙이란 영어원제가 말하듯 나열식이다. 내용들을 모아서 생각하면 어떤 줄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잘한 테크닉을 그러모았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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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책은 그렇지 않다. 이책은 우선 직장에서 어떻게 권력의 길에 오를 수 잇는가를 설명한다. 어떻게 권력자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권력을 쥐려면 첫출발을 어떤 부서에서 시작해야 하며 직장 내에서 자원을 통제할 수 있는 네트웤의 게이트 키퍼가 되는 방법,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구축하는 방법 그리고 적대자들과 어떻게 파워게임을 하는가에 대한 방법 그리고 권력의 자리에 올랐을 때 어떻게 권력을 유지할 것인가 등 이책의 내용이다. 물론 이런 디테일은 위에서 말한 책들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이책의 장점은 직장이란 환경을 무대로 한다는 현실감이며 권력의 길을 시작부터 끝까지 서술하는 체계에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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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책은 ‘미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인가? 저자는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가 전작인 ‘권력의 경영’에서 자세히 다루듯 사내정치는 조직의 생리이다.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파워게임은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필수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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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내정치는 바람직하지 않다. 얼마전 구글에 매수된 모토롤라는 사내정치 때문에 몰락했다. “정치적 술수가 만연한 직장에서는 직업만족도나 직원들의 사기나 조직 참여도가 떨어지고 이직 희망도 높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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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그러므로 권력으로 가는 길을 닦기 위해 들이는 당신의 노력이 당신을 고용한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것인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는 당신을 걱정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파트너나 동업자가 있다면 그들도 역시 마찬가이다. 그들은 틀림없이 당신이 어떤 쓸모가 있는가를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더 이상 사용가치가 없어지면 언제든 당신을 내쫏을 수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시만 걱정하라. 그렇게 하기 위해 할 수 잇는 조치만 취하면 된다. 언제 왜 쫓겨나는지도 모르고 혼자 힘으로 직장에서 진로를 헤쳐가야 한다면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잇는 수단은 다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대응일 것이다. 그 수단에는 권력과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기술과 개념을 습득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리고 이책은 그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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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280/60/cover150/8935208868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208868</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품격을 정의한다? - [품격 - 무엇이 우리를 최고의 자리로 이끄는가]</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5052532</link><pubDate>Sun, 04 Sep 2011 17: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505253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7802489&TPaperId=505253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288/26/coveroff/892780248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7802489&TPaperId=505253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품격 - 무엇이 우리를 최고의 자리로 이끄는가</a><br/>이시형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08월<br/></td></tr></table><br/>이책은 품격 또는 기품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기품이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품격은 쉽게 말해 자기 존중감, 자기긍정감이다.” 저자의 정의이다. 정확하다. 그러나 이 한줄의 정의로 그 뜻이 잡히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품격이란 말은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보면 아는 그런 말 중의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품격 또는 기품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누구나 기품이 있는 사람을 알아본다.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보면 아는 그런 말은 그 말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하는 것이 이해가 빠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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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보다 바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관계를 맺을 때 <br />
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스스로 문제를 만들지는 않았는지, 문제해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핑계 만들기에 급급할 때 <br />
 자기 자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만 스스로 해야 할 일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 <br />
 동료들을 못살게 굴거나 놀리고 별명을 부를 때 <br />
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끼어들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을 때 <br />
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주위 사람을 관찰할 때 <br />
 다른 사람의 업무성과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많지만 자신의 생각을 생산적으로 정교화하지는 못할 때 <br />
 일을 더 잘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현 상황의 부정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출 때 <br />
 동료의 성공을 시기하며 못마땅해하고 심지어 훔치려 할 때 <br />
 혼잣말을 할 때도 분노를 폭발하거나 고함을 지를 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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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흔히 보는 꼴불견이다. 이런 사람을 기품이 있다 품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기품의 본질은 여유이기 때문이다. 기품은 강자의 여유이다. 세상 무엇도 자신을 흔들지 못한다는 자신감이다. 기품은 귀족을 말할 때 쓰는 말이었다. 귀족은 여유를 타고 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주역인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주어진 사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어서 아무 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기품은 제2의 천성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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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어머니의 애정을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 평생 동안 그를 특징지은 것은 하나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도 유쾌한 기분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낙천적일 수 있었던 것은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나이에게 최초로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은 어머니의 애정이다. 어릴 때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면, 자연히 자신감에 뒷받침된 균형감각을 얻게 된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는 적극성도 어느새 저절로 몸에 배게 된다.” (시오노 나나미)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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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모욕을 당해도 너그럽게 웃어넘기는 사람이었다. “분노나 복수는 상대를 자신과 대등하게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고 일어날 수 있는 행위다. 카이사르가 평생 이것과 무관했던 것은 분노나 복수가 윤리 도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우월성에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월한 자신이 왜 열등한 타인의 수 준으로 내려가서 그들과 똑같이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그들과 똑같이 복수심을 불태워야 하 는가.”(시오노 나나미) 정적을 가차 없이 제거했던 술라와 정적을 포용하고 관용을 베풀었던 카이사르는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었지만, 이 점에서는 양극단이었다. 후세 역사가 들은 이런 카이사르를 '진정한 귀족 정신의 소유자'라고 평한다.” 카이사르가 해적에게 잡혔던 이야기는 그 귀족정신의 본질을 보여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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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해적에게 붙잡혔을 때 카이사르는 타고난 천성대로 해적을 마음껏 무시했고 이런 점은 오히려 해적들에게 큰 매력으로 작용했다. 이들은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며 공포에 빠진 포로는 익숙했지만 카이사르처럼 해적을 자신의 바쁜 일정을 잠시 방해하는 훼방꾼 이상으로 보지 않는 포로는 처음이었다. 카이사르는 자기 몸값이 겨우 20달란트(어마어마한 거액이었다)밖에 되지 않는다는데 모욕감을 느끼고 스스로 몸값을 50달란트(은화 30만냥)까지 올리기도 햇다. 카이사르는 동료 한 명과 노예 두명만 남기고 나머지 일행에게 몸값을 가져오게 햇다. 카이사르는 포로로 지내는 40여일 동안 해적과 어울려 식사를 했고 그들의 체력훈련에 동참하기도 했다. 시를 지어 들려주었다가 해적들이 시를 이해하지 못하면 천박하고 난폭한 야만인이라고 면박을 주기도 햇다. 이런저런 주문을 하기도 했고 잠자리에 들어서는 노예를 시켜 해적들에게 조용히 좀 하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또 자신이 풀려나면 반드시 다시 돌아와 모두 책형에 처해 죽이고 말겠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하기도 햇다. 해적들은 이 대담한 젊은이를 무척 좋아햇고 몸값을 실은 배가 도착하자 아쉬움을 드러낼 정도였다. 카이사르는 떠들석하게 웃고 손을 흔들며 해적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바로 배와 의용군을 징발해 해적들에게 돌아와 모두 체포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필립 프리먼)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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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더 이상 귀족이 없는 세상에서 기품은 어떤 의미인가? 기품은 타고나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질 수 잇다고 저자는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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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다큐 프로그램에서 본 91세 인어 할머니, 김화순 씨. 구부정한 허리, O자형 다리에 겨우 제 몸 가누기도 힘든 할머니다. 하지만 잠수복을 입고 뱃전에 서면 그 당당한 카리스마가 바다를 압도한다. 풍덩-. 홍합을 찾아 유연한 몸짓으로 헤엄쳐 내려간다. 누가 그를 91세 해녀라 할까. 이윽고 그물 가득 채워 배에 오른 늙은 해녀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피어난다. ‘오늘은 바다가 고바서…’ 바다가 잠잠해서 많이 땃단다. 속에서 우러나오는게 품격이라면 그리고 참 아름다움 속에서 피어오르는 내적 미가 품격이라면 저 늙은 해녀의 품격과 웃음을 누가 당하랴.”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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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런 품격은 귀족으로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이다. 돈으로 살 수도 없고 꾸밀 수도 없기 때문이다. “명품족을 지켜보노라면 아는 짓이 도대체 격이 없다. 큰 재산에도 베풀기는커녕, 오로지 내 것, 그리고 더 크고 화려한 것만 찾을 줄 알지 단아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모른다. 자기에게 맞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걸 명품이라고 걸치고 다닌다. 졸부라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옹졸한 부자, 가짜 부자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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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이란 말이 어울릴 지위에 올라도 부를 쌓아도 명예를 얻어도 기품을 얻을 수 잇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기품은 얼마든지 스스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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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7가지 덕목을 ‘나열’한다: 절제, 포용, 배려, 정직, 신의, 배움.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가 보면 아는 ‘기품’이란 말을 분석해보면 그런 덕목을 보았을 때 말하는 것이니. 그러나 기품은 그 덕목들로 분해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기품이란 말을 할 때는 그 덕목들의 합 이상의 무엇을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기품이란 말을 쓸 이유가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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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위는 격렬하다. 길을 막는 건 예사고 유혈충돌, 방화, 투석, 보기만 해도 끔찍하다. 자기 회사 기물을 파괴, 불도 지른다. 구호부터 살벌하다. ‘결사쟁취’. 강한 의지를 보여줘야겠다는 의도이긴 하지만 합리적인 눈으로는 이해가 안된다. <br />
‘목숨까지 걸다니…’ <br />
외국인 투자자가 발길을 돌리며 한 소리다. 그리곤 끝내 공장문을 닫게 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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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LA에서 일어난 한국교포 상점 약탈 방화사건,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왜 한국인 상점만 당했을까? 그 옆에 중국, 일본 상점도 있는데 왜 하필 우리만 피해를 입었을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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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포들은 빈민촌에 슈퍼마켓을 열어 번 돈으로 벤츠를 타고 백인 동네에 산다. 땡볕에서 땀을 흘리며 길거리 농구를 하는 이웃 아이들에게 콜라 한병 주는 법이 없다. 유행이 지나 창고에 쌓인 신발 한 켤레 준 적이 없다. 거기가 내 삶의 터전인데 이웃 아이들에게 너무 인색햇다. 그 난리 통에도 평소 인정을 베풀었던 한인 상점은 아이들이 ‘이 집은 우리 친구야’라며 안전하게 지켜주엇다고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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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절제, 배려란 덕목을 설명하면서 든 예이다. 저자가 이책에서 하려는 말은 그런 덕목 들 하나 하나를 몸에 배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책에서 하는 말은 위에서 직장의 꼴불견을 나열한 것 이상은 아닌 것 같다. 물론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기품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기품이 있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이 이책의 한계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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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3.5]]></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288/26/cover150/8927802489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7802489</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연구노트 - [언씽커블 Unsinkable - 역경을 이겨내는 힘의 원천]</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994224</link><pubDate>Fri, 12 Aug 2011 01:3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99422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6381160&TPaperId=4994224"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257/97/coveroff/8996381160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6381160&TPaperId=499422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언씽커블 Unsinkable - 역경을 이겨내는 힘의 원천</a><br/>소니아 리코티 지음, 윤경미 옮김 / 빅북 / 2011년 07월<br/></td></tr></table><br/>이책의 주제는 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Unsinkable, '가라앉지 않을'이란 말은 회복탄력성(resilience)란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일 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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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저자도 한몫하는 미국 성공학파의 주장과 달리 사는 건 힘든 일이다. 언제나자잘한 스트레스로 넘치고 어려움으로 넘친다. 그리고 가끔은 위기를 만나기도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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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끌어당김의 법칙'을 말하며 '생각대로지'라는 카피처럼 세상이 된다고 설교하던 저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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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금융위기로 저자도 피해를 보았다. 남편의 사업이 망해 남편은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이혼해야 했고 집도 잃었다. 저자는 죽음까지도 생각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저자가 이책을 쓰게 된 동기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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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만 그때 위기를 만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잘 견디고 어떤 사람은 무너진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보통 회복탄력성이라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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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물리학 용어인 회복탄력성이란 말은 공이 바닥을 차고 튀어오르는 것처럼 스트레스나 어려움, 또는 위기를 만나도 빠르게 중심을 잡고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는 여유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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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어려움을 겪어도 더 쉽게 털어버리니 여유 또는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은 당연히 남보다 삶을 쉽게 헤쳐나가고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갖게 된 것일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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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는 타고난다. 성격이 스트레스에 민감한 신경성인 사람은 스트레스에 더 취약하고 회복탄력성이 높지 않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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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개 탄력성이란 타고나기 보다는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얼마전에 나온 ‘튀어오르는 공처럼’은 광범위한 심리학 조사에 근거해 회복탄력성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책이다. 이책이 연구대상으로 한 사람들은 고위직 임원이나 고위관료들이다.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어린 시절은 대부분 보잘 것없었다. 어린 시절의 고난을 극복하고 자신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극복 과정에서 얻은 능력이 탄력성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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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느껴지는 사람은 자신감이 있고 낙관적이다. 그책이 대상으로 하는 탄력성이 높은 사람들의 가장 두드러진 기본특징이다. 성공학에서 말하는 특징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들의 자신감은 근거없는 자만심이 아니며 대책없는 낙천주의가 아니다. 그들의 자신감과 낙관주의는 그들이 현실을 이겨내면서 얻은 전리품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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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극복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다. 나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자부심은 언제나 근거가 있다. 그냥 ‘생각대로지’란 주문을 외운다고 자부심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자기최면은 현실의 무게 앞에선 너무나 연약하다. 현실에 근거가 있는 자부심만이 진짜 자신감이 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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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의 근거가 되는 현실은 안정되어 있게 마련이다. 안정된 현실에서 그들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할 수 있다. 자신의 현실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다고 느낀다면 오기와 뚝심은 남을지 몰라도 자신감이 있을 수 없다. 미래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기 때문에 그들은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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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만하고 밝은 성격인 사람은 일에 솔선수범하며 책임감을 느끼고 실수를 하더라도 고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작은 잘못이나 실수쯤은 웃어넘길 수 있고 실패에서도 배울 수 있으며 현실을 똑바로 보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남의 도움을 요청하고 받는데 거리낌이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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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은 위기가 닥쳐도 극복할 에너지가 높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회복탄력성이 높지 않으니 그냥 주저앉아야 하는가? 이책의 주제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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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런 책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책 중에서 이책만의 가치가 있는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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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목차만 훑어보아도 제목에 ‘우울’이란 말이 들어간 책들과 내용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도 그렇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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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그렇다치고 그 내용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깊게 다루어져 있는가?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 이책을 보고 느낀 것은 급하게 썼다는 것이다. 저자의 전공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생각대로지’이다. 그런데 그렇게 안되는 상황을 저자 스스로 겪게 되었고 그 상황을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 이책을 썼다는 느낌이 든다. 저자 스스로 탐색하는 연구노트라고 할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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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3.5]]></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257/97/cover150/8996381160_2.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6381160</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문명의 유전학 - [성격의 발견 - 내 안에 잠재된 기질.성격.재능에 관한 비밀]</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904203</link><pubDate>Thu, 07 Jul 2011 16: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90420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761049&TPaperId=490420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185/10/coveroff/895276104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761049&TPaperId=490420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성격의 발견 - 내 안에 잠재된 기질.성격.재능에 관한 비밀</a><br/>제롬 케이건 지음, 김병화 옮김 / 시공사 / 2011년 05월<br/></td></tr></table><br/>"만일 당신의 조상들이 오랫동안 농부였다면 당신은 당당하게 서서 죽기보다는 무릎을 꿇고라도 살아남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한 사람들의 후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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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은 엘리트증을 만들어냈고 그들의 권력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렵채집인들은 멀리 떠날 수 있었지만 토지는 버리고 떠나기에는 너무 귀한 것이었다. 따라서 농부들은 권위에 굴복해야 했다. 옛 스타일의 독립적인 마인드, 즉 평등주의자들인 수렵채집인들 사이에서 잘 통했던 성격들('결국 사람은 사람이다')은 씨가 말랐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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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사람들 역시 지배 엘리트증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적응도에 손해를 입었을 것이다. 강력한 국가가 있을 때 공격적인 개인이 갖는 이익은 더 작아지고 법과 질서는 자기 방어를 위한 전투적 태도를 덜 필요하게 만들었다. 북적이는 환경 그 자체만으로도 과거에 선호되었던 몇몇 성격 형질들이 냉대받게 되었을 것이다. 낯선 사람과 만날 일이 자주 있는 사회에서는 높은 공격성에 대한 선호가 떨어질 것이다. 너무 자주 사우면 반드시 지기 마련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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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공격성을 유발한 대립유전자들의 빈도가 변했을 것이다. 강하고 오래 존속한 국가들에서는 특히 그랬을 것이다. 이는 곧 개체군이 전체적으로 더 순해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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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에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유전자를 알고 있다. 그것은 DRD4(도파민 수용체 D4) 유전자의 7R(7-repeat) 대립유전자다. 이 대립유전자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와 관련이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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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곳곳에서 차이는 있지만 상당한 수준의 다형성이 나타나는데 동아시아에서만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중국의 경우 7R 대립유전자들 자체는 매우 드물지만 7R 대립유전자에서 파생된 대입유전자들이 상당히 흔하다. 중국에서는 문화적 패턴 때문에 7R 대립유전자들을 갖는 사람들이 선택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에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그런 돌은 뽑혀나가 멀리 내던져졌을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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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으로 생긴 강력한 정부들이 사람들을 더 '길들였다면', 농경의 경험이 가볍거나 없는 집단의 구성원들은 오랫동안 농경문화를 경험한 집단의 구성원들보다 평균적으로 덜 복종적일 것이다." (그레고리 코크란, 헨리 하펜딩)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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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계와 몽골리안계의 유전자는 1/4이 차이난다. 그리고 그 차이는 두 인종간의 기질을 다르게 만들고 문화를 다르게 만들었다고 가정해도 그리 큰 무리는 아니다. 저자는 자신의 실험에서 두 인종의 차이를 확인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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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아시아인과 코카서스인의 기질 편향 간의 차이를 암시하는 행동은 생후 몇 주 이내에 일찌감치 나타난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아시아계 신생아들은 같은 지역에 사는 코카서스계 신생아들에 비해 조용하고 얼굴에 이불 등이 덮이더라도 덜 바둥거리며 울더라도 금방 그쳤다." 그러나 "코카서스계 아기들은 중국인 아기보다 더 불안정하고 더 쉽게 흥분하는 것으로 보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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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러한 차이를 유전자상\의 차이로 해석한다. 저자의 용어로 말하자면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기질에서 아시아계와 코카서스계는 체계적인 차이를 보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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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그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시아계와 코카서스계는 촉진자 부위에 위치한 유전자의 25%^가 다르다. 이런 대입유전자 가운데 하나가 뉴런 사이의 간극인 시냅스에서 세로토닌을 흡수하는 분자의 기초가 되는 구조적 유전자의 발현을 통제한다. 아시아계는 짧은 유전자라는 것, 즉 구조적 유전자가 발현되는 수위를 낮추는 대립유전자를 지닐 확률이 다른 인종보다 더 높다. 그 결과 세로토닌 운반자의 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세로토닌이 약간 더 오래 시냅스에 남는다." 그 결과 "시냅스에서 세로토닌이 과잉이 되는 동시에 인근 뉴런에 있는 세로토닌 수용체의 수가 줄어든다. 세로토닌은 웃고 미소 짓고 목소리를 내는 것 등 쾌감의 행동적 신호에 기여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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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대립유전자의 존재는 사회적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짧은 대립유전자를 가진 원숭이에게 높은 지위의 수컷 원숭이 사진을 보여주면 경계심이 커진다. 인간 역시 화난 얼굴을 보면 더 크게 반응한다. 같은 종의 다른 구성원이 가하는 잠재적 위협의 신호에 유달리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그런 개인은 복종적이거나 집단 규범에 순응하는 편향을 갖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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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유전적 편향은 위에서 길게 인용한 역사적 변수(오랜 농경과 높은 인구밀도 그리고 제국의 역사)에 의해 자연선택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 자연선택의 결과는 위의 인용의 저자들이 말하듯이 인간을 길들인 결과로 볼 수 있고 그러한 결과는 '가축화'의 과정과 생물학적으로 유사하다. 이책의 저자 역시 비슷하게 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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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화된 동물은 야생의 사촌보다 유순하다. 그런 기질은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을 생산하는 두뇌 회로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의 실험에서 중국계 아기들은 코카서스계 아기들보다 불안을 덜 느꼈고 코카서스계보다 심장박동이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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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화된 동물과의 유사성은 외형적 차이에도 나타난다고 저자는 본다. 가축화된 동물은 야생으로 사는 친척보다 "겁을 덜 내고 덜 공격적이며 코 길이가 더 짧다. 평균적인 아시아인이 평균적인 코카서스인이나 아프리카인보다 더 평평한 얼굴을 갖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 생물학적 시각에서 아시아인들이 더 길들여진 편향을 갖고 있다는 즉 타인과 더 온화한 관계를 맺는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족과 사회집단에 대한 충성심이 아시아인들의 핵심가치가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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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집단 내의 차이는 집단 간의 차이보다 크다. 그러나 집단 평균의 차이가 개인간 차이보다 비교적 작더라도 그 차이는 기질적 편향의 체계적 차이로 나타나고 그러한 차이는 문화적 차이를 낳기에 충분하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유럽의 문화가 개인주의적이고 동아시아의 문화가 집단주의적인 차이는 그런 기질적 편향으로 해석으로 할 수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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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4 유전자의 차이는 세로토닌 뿐 아니라 도파민 수용체에도 영향을 주어 충동성의 정도를 결정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4차례 반복되는 짧은 형태의 D4를 갖는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7차례 반복되는 긴 변종을 보유한다. 긴 D4는 도파민에 덜 민감하고 결과적으로 뇌의 도파민 생산량에 장애를 유발한다. 다시 말해 뇌 속에 존재하는 도파민이 보통의 경우보다 좀더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들은 도파민 파티를 시작하려면 일반인보다 더 많은 화학물질을 긁어모아야 하고 따라서 이들은 여분의 자극적 활동을 요구한다.” 문제는 도파민에 항상 굶주린 뇌는 도파민 즉 자극의 과잉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럭저럭 만족하는 일을 금방 지루해한다. 다시 말해 방황하는 이들 영혼은 더 많은 도파민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디든 자극이 있는 곳을 찾아 헤매야 한다. 과속을 즐기는 운전자가 될 수도 있다. 안전을 위한 지침을 무시하거나 주먹을 치켜 올린 채 링안으로 뛰어들지도 모른다. 그 정도는 돼야 ‘평범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도파민은 순전히 기분전환용은 아니다. 도파민이 지나치면 흥분이 쉽사리 공포와 불안으로 바뀐다. 끊는 충동을 안겨주는 상황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공포만 안겨줄 가능성이 높다.” (닉 태슬러) (물론 코카서스계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인용문의 저자는1/4 정도로 추정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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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4 유전자의 차이는 문화의 온도를 결정했다고 이책의 저자는 생각한다. 그 차이의 좋은 예로 저자는 불교의 열반적정(涅槃寂靜)과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말한다. 저자는 유럽의 철학자 가운데 그런 수동적이고 고요한 초연함을 찬미할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욕망하거나 꾸짖는 일 없이 삶을 고요히 받아들이도록 권장하는 철학과 귀중한 목표를 얻기 위해 모든 장애를 적극적으로 넘어가기를 요구하는 철학 사이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해 온 학자들은 대개 문화와 생태 환경의 역할만 강조해 왔다.” 그러나 “나는 두 그룹의 게놈이 기질적 편향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이런 각 이데올로기가 가진 차별적 매력에 작지만 진정한 기여를 했다고 주장하고 싶다. 신체의 고도 흥분 상태 및 불안, 죄책감, 새로운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 해석되는 신경화학을 지닌 사람은 더 고요하고 욕망에서 자유롭고 타인으로부터 초연해지라는 철학에 저항감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매일 살아가는 평소의 감정 톤이 초연한 상태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유럽인은 열반이라는 아시아적 관점을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볼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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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달리 전형적으로 낮은 수준의 흥분을 특징으로 하는 의식의 소윺자들에게는 만성적 불안, 죄책감, 좌절된 소망 등을 인간 조건의 결정 요인으로 보는 철학이 별로 효과가 없어 보일 것이다. 이들은 강력하고 불쾌한 감정 때문에 방홰받는 삶에서 진정으로 해방될 가능성이 있다고 기대할지 모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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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을 쓰는 중국인들은 아편을 선호하는데 그것은 기분을 이완시킨다. 이와 달리 코카서스계 사람들이 선호하는 마약은 코카인이나 암페타민인데 그것은 흥분을 증가시킨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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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5 <br />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185/10/cover150/8952761049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761049</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어른이란... - [남자, 다시 찾은 진실]</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894753</link><pubDate>Sun, 03 Jul 2011 21: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89475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2911612&TPaperId=489475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186/13/coveroff/896291161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2911612&TPaperId=489475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남자, 다시 찾은 진실</a><br/>스티브 비덜프 지음, 박미낭 옮김 / 푸른길 / 2011년 06월<br/></td></tr></table><br/>“나는 어른이란 말을 좋아해” 1학년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선배가 한 말이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인 그 선배는 그런 성격에도 (아니면 그런 성격 때문인지) 존재감이 있던 선배엿다. 말이 없는 사람이라 그 말이 그 선배에게 어떤 의미엿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그 말이 선배에게 의미가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몰랐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지금 나는 어른인가? 이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질문이다. 이책은 그 질문의 의미를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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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은 남자를 딱 두 단어로 요약한다. 좋은 남자란 척추와 심장을 가진 사람이다. 척추는 확고하며 참을성이 있고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키며, 때로 아주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에 자신의 안전이나 이익을 맨 나중에 놓는 그런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척추를 가진 남자라면 신뢰할 수 있는 남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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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를 떠올리면 된다. 그런 남자는 의지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이해하거나 가까이하기는 어렵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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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남자, 즉 베트남 전쟁 이후의 시대에 당시 남자들이 갖게 된 것이 바로 심장이었다. 이전의 남자들에게도 심장은 물론 있었다. 그러나 이 시절에야 남자에게도 심장이 잇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시대에 들어서서야 사적이거나 공적인 삶 속에서 가족들에 대한 사랑과 슬픔, 염려, 자비 등의 감정을 드러내는 남자들이 등장햇다. 그 새로운 남자는 말을 걸어도 되는 남자엿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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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제는 그 새로운 남자에게는 척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남자는 종종 믿을 수 없고 약속을 잘 저버리고 나르시시즘이 심했다. ‘섬세한 신세대 남자’는 교통사고나 산불이 났을 때 혹은 힘든 결혼 생활 중에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니엇다.” 신세대는 척추를 잃어버렷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저자는 어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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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심리에 대해 긍정적인 점도 많지만 일반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성급하며 즉각적인 만족을 구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것이 ‘나’ 중심이다. 그런 소년이 남자가 되려면 그에게서 자기중심성을 몰아낼 수 있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과거의 모든 공동체는 그런 사실을 알랐고 그런 부분을 공동체 전체가 합심해서 다루었다. 이 과정이 성인식이다. 성인식은 소년들에게 때로는 강제적으로 그러나 절대로 친절함을 잃지 않고 세상에는 스스로를 기브게 하는 일 말고도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을 소년에서 남자로 바꾸고 다른 이들을 돌보고 보호하는 즉 공동의 이익을 위한 삶을 사는 남자로 개종시키는 의식이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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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인식은 더 이상 없다. 성인식에서 전수되던 교훈은 소년들 스스로 알아서, 자기 힘으로 세상과 부딫히며 배우도록 방치되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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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올바른 도움과 지식이 결합된 다양하면서도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 성인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현재는 그것을 운에만 맡긴다. 아주 신중하게 계획된 과정 없이 삶의 경험이 성인식을 대신하게 한다면 그들은 너무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 과거의 성인식도 거칠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언제 어떻게 닥칠지 아무도 모르는 파괴적인 현실과 마주친다. 그리고 아무런 도움 없이 그런 황폐한 현실을 뚫고 나가야 한다. 오늘날 정말로 생기있고 성숙한 사람들이 아주 드문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러면 성인식에서 가르치던 교훈은 무엇인가? 저자는 5가지를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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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신은 죽을 것이다. 2. 삶은 힘들다. 3. 당신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4. 당신의 삶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5. 결과는 당신 손에 달려 있지 않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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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자면 겸손이다. 이 우주에서 ‘나’란 존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리고 그 주어진 작은 것조차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 그것을 아는가의 차이가 소년과 남자의 차이라 저자는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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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세상을 살다보면 어떤 조직이나 단체, 이웃, 혹은 당신 자신의 삶 속에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마주친다. 남자든 여자든 이들은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인격, 온기, 헌신, 그리고 이상 등으로 주변 사람들을 이끈다. 그들은 생명으로 가득하고 세상을 편안하게 느낀다. 마치 우주의 흐름 중 일부 같다. 버락 오바마나 마틴 루터 킹간츤 이들에데고 이런 자질들이 있었다. 미얀마의 정치가 아웅 산 추지, 넬슨 만델라 등도 그런 사람이다. 물론 특별한 사람들 중에는 잘 알려지지 않는 오직 주변의 친구와 동료들에게만 알려진 경우도 많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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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은 갑자기 부상했는가?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었는가? 그들의 삶은 늘 그렇게 순조로웠는가? 그래서 그들의 삶은 항상 성공적이엇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실제로 이와는 완전히 반대이다. 이들의 위대함은 거의 예외 없이 고통 속에서 탄생햇다. 어떤 일들은 삶이 산산조각 나버릴 만큼 힘들었지만 그들은 그 고통스러운 일에 무너지는 대신 그 일을 변화의 계기로 삼았다.” 그 고통은 그들에게 삶의 현실에서 치룬 성인식이었다. 그 고통은 그들에게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쳤고 ‘나’를 넘어선 나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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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성인식에선 소년은 죽어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고 말해졋다. 자기중심적인 소년은 죽고 더큰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다른 존재가 되기 때문이엇다. “성인식의 목적은 젊은 남자나 여자를 성인의 세계로 데리고 가는데 있다. 그리고 성인식의 과정은 언젠가 당신이 원로가 될 때까지 공동체가 힘을 합쳐 강력하며 평생 지속되는 네트웤으로 당신을 지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내포한다. 성인식은 당신을 사랑하고 가치 있게 여기며 평생 동안 지지해줄 성인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환영의식이다. 다섯 가지의 이 어려운 메시지를 견딜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공동체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없다면 젊은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서 어른의 세계로 건너뛰는 모험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고통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을 것이다! 이 얼마나 즐거운 메시지인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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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런 공동체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공동체가 사라지면서 ‘아버지’는 더 이상 남자란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사라진 것은 아버지만이 아니다. 전 시대에 있었던 이웃이나 마을의 어른들, 삼촌들, 멘토들도 덩달아 그림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 운동을 잘하거나 보이스카우트에 들거나 우자 특별한 교사를 만나지 않는 한 남자아이가 다른 성인 남자를 자세히 알 기회란 거의 없다. 바로 이 점이 자라나는 소년에게 거대한 진공 상태를 초래한다. 남자들이 ‘연극’을 하는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정한 남자들의 내적 세계를 모르는 소년들로서는 자아 이미지를 형성할 때 tv,나 영화, 친구같이 외부에서 주어들은 빈약한 이미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다음 그들은 자신도 남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배운 이미지를 행동으로 옮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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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으로 친밀감을 키우는데 뛰어난 여자들은 다르다. 여자들끼리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여자들은 ‘자기들 위에 걸어 둘만한 수호전사를 갖게 되고 평생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든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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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 각자가 가면에 의존해 최선을 다해 보지만 그 자아는 친구와의 우정, 여자들과의 관계, 자녀들을 기르는 일 등 삶의 개인적인 영역들 중 그 어느 공에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자라 아버지가 된 소년들은 당연히 자기 아버지처럼 될 수 밖에 없고 이 피해는 고스란히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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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우리가 배웠어야 하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에 관해 말한다. 물론 말로 가르칠 수 잇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직업인으로서 남자가 되어 알아야할 것들이 무엇인지 방향은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이책의 목적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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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5 <br />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186/13/cover150/8962911612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2911612</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긍정심리학의 진화 - [행복의 완성 - 하버드대학교 ‘인생성장 보고서’ 그 두 번째 이야기]</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894495</link><pubDate>Sun, 03 Jul 2011 20: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89449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5960096&TPaperId=4894495"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199/79/coveroff/896596009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5960096&TPaperId=489449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행복의 완성 - 하버드대학교 ‘인생성장 보고서’ 그 두 번째 이야기</a><br/>조지 베일런트 지음, 김한영 옮김 / 흐름출판 / 2011년 06월<br/></td></tr></table><b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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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초, 네브라스카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던 나의 할아버지 도널드 클리프턴 박사는 연구 도중 매우 김각한 문제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거의 모든 심리학 분야들이 사람들의 ‘부정적인 면’만을 다룬다는 사실이엇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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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긍정적인 면’을 연구하는 것이 그보다 중요하다고 믿던 할아버지는 지난 50년간 인간이 가진 긍정적인 면에 중점을 두고 동료들과 함께 수백만 번의 인터뷰를 실행해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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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40여년 째 연구를 진행오던 1990년대에 새롭게 떠오른 심리학 분야가 바로 인간의 긍정적인 면을 연구하는 긍정심리학이다.” (도널드 클리프턴, 톰 래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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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심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도널드 클리프턴의 이론은 ‘물통과 국자 이론’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물통을 가지고 있다. 그 물통은 주변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따라 지속적으로 채워지거나 비워진다. 물통이 가득 차 있을 대 우리는 행복을 느끼고 비어 있을 때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우리는 또한 보이지 않는 국자를 가지고 있다. 그 국자로 타인의 물통을 채워줄 때 즉 긍정적인 감정을 이끈 ㄴ말이나 행동을 할 때 우리의 물통도 채워진다. 그러나 국자로 타인의 물통에서 물을 퍼낸다면 즉 긍정적인 감정을 줄어들게 만드는 말이나 행동을 한다면 우리의 물통에서도 물이 빠져나가게 된다.” (도널드 클리프턴, 톰 래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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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심리학의 논리는 반세기가 훨씬 넘었지만 그리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물통에 담긴 물의 정체는 세월과 함께 바뀌어갔다. 초창기 긍정심리학의 내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이다. 위에서 인용한 물통과 국자 이론을 소개한 책에서도 첫번째 사례로 드는 것이 칭찬의 효과를 보여주는 피그말리온 효과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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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긍정심리학의 논리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미국식 성공학의 학술 버전에 불과하게 되었다.원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시크릿’류의 자기계발서와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긍정심리학에서 ‘긍정’의 기초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실험적으로 증명된 가설이다. 그러나 칭찬을 아무리 해도 백치가 전교 수석이 되고 하버드에 들어갈 수 없고 아무리 나는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무장해봐야 청소부가 대기업 CEO의 역할을 해낼 수는 없다.&#160;&#160;
&#160;이책은 긍정의 개념화가 잘못되었다는 반성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긍정의 기초를 새로 놓기 위해지난 10년동안 진화심리학과 생리심리학(보통 뇌과학이라 알려진)의 성과를 원용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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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야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라면 그동안 심리학에서 무시되어온 감정의 메커니즘을 튼튼한 생물학적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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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두려움, 짜증과 같은 스트레스성의 부정적 감정이 왜 진화했으며 어떤 메커니즘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밝혔듯이 사랑, 기쁨, 관용과 같은 긍정적 감정이 어떻게 진화했고 어떤 메커니즘인지를 진화심리학과 생리심리학은 분명한 논리로 설명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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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저자는 긍정심리학의 ‘긍정’을 두 분야에서 설명해낸 긍정적 감정으로 재해석한다. 저자가 열거하는 그 감정들은 이렇다: 사랑, 희망, 기쁨, 용서, 연민, 믿음(또는 신뢰). 저자가 이 6가지 감정을 다루는 이유는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행복’에 결정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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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면서 고통은 불가피하다. 저자는 같은 고통을 겪더라도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행복이 결정된다고 이전 저서인 ‘행복의 조건’에서 말한다. 같은 고통이라도 누가 더 성숙한가에 따라 행복한가 불행한가 차이를 만들며 그 성숙함이란 6가지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라고 저자는 이책에서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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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6가지 감정을 선택을 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 감정들이 사회적인 다시 말해 도덕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행복의 조건’에서 보여준 것은 도덕적인 능력 또는 사회적인 능력이 높을수록 더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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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책에서 저자는 그 능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말하려 한다. 원론적인 수준에서 감정들로 재정의하고 그 감정들이 어떻게 진화론적으로 형성되었는지 즉 우리의 생존에 어떻게 그 감정들이 유용했는지 다시 말해 그 감정들이 사회적 능력으로서 왜 선택되었는지 그 감정들이 개인의 삶에서 어떤 유용성이 있고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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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행복의 조건’의 연장선에서 보아야 그 의의가 제대로 이해된다. 그 책을 읽은 사람에겐 의미 있는 독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행복의 조건’과 같은 수준의 책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이책은 이전 저서와 같이 탄탄한 실제 연구에 기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책은 어디까지나 시론에 불과하다. 저자가 의지하는 진화심리학과 생리심리학이 저자의 전공이 아니란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이책이 하려는 시도가 현재로선 지나치게 대담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말하듯이 긍정적 감정에 대한 논의는 드물었다. 그리고 저자가 의지하는 두 분야의 성과가 쏟아져 나온지도 10년이 조금 넘는다. 아직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영역에 대해 이책은 기초를 놓으려는 대담한 시도를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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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논의는 무난하다. 아직 튼튼하지 않은 기초에서 많은 것을 말할 수 없고 저자가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만큼 이책의 논의는 무미건조해진다. 현재 학계의 수준에서 긍정적 감정에 대한 종합이 어떤 수준으로 가능한지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이책의 의의일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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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199/79/cover150/8965960096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5960096</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노년의 창조 - [마음의 시계 -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매혹적인 심리 실험]</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835572</link><pubDate>Sun, 05 Jun 2011 22: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83557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3719621&TPaperId=483557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154/90/coveroff/898371962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3719621&TPaperId=483557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마음의 시계 -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매혹적인 심리 실험</a><br/>엘렌 랭어 지음, 변용란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04월<br/></td></tr></table><br/>저자가 이책을 쓰게 된 것은 한가지 실험 때문이었다. 여러 심리학 책에 등장하는 이 실험은 통제권 또는 선택에 관한 실험이었다. 요양원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실험집단은 “스스로 결정을 더 많이 내리도록 장려”했다. 보통 요양원의 규칙이나 통제에 따라 결정되던 사항들인 언제 방문객을 만날 것인가, 어떤 영화를 언제 볼 것인지를 요양원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다든가, 화분에 심을 종류를 스스로 결정하고 어디에 놓을지도 스스로 결정하고 돌보는 것도 스스로 하는 것 등 사소한 것들을 노인들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었다. 통제집단은 원래 요양원에서 하던 대로 놔두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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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는 놀라웠다. “1년 6개월이 지난 뒤, 우리는 실험 전과 후에 실시한 다양한 검사를 바탕으로 첫번째 집다느이 구성원들이 더 쾌활하고 활동적이며 민첩한 것을 확인했다. 실험 참가자들이 더 쾌활하고 활동적이며 민첩한 것을 확인했다. 실험 참가자들이 모두 연로하고 허약한 노인들이었기 때문에 우히는 실험 이후 그들이 훨씬 더 건강해졌다는 사실에 매우 기뻤다.” 여기까지는 원래 실험의 의도대로 였다. 요양원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실험이었고 개선방향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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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험 결과는 그 이상이엇다. “그런데 보다 적극적인 생활을 한 노인들의 사망률이 그렇지 않았던 대조군의 절반에도 못 미칠만큼 낮다는 사실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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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이책은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한 저자의 오랜 탐구결과이다. 요양원 실험의 후속 연구로 저자는 1979년, 이책의 원제이기도 한 ‘시계 거꾸로 돌리기 연구(counterclockwise study)’란 실험을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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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험의 내용은 간단하다. “이 연구에서 우리는 1959년의 세상을 재창조하여 피험자들에게 20년 더 젊은 나이로 살도록 요구”했다. 저자가 이 실험에서 알고 싶었던 것은 “마음을 20년 전으로 되돌려 놓으면 그 변화가 몸에도 반영될까?”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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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후반에서 80대 초반의 노인들을 모집해 59년처럼 꾸며진 환경에서 1주일 동안 지내게 햇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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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는 놀라웠다. “우리는 일주일이 채 다 지나기 전에 행동과 태도에 변화가 있음을 알아차렷다. 실제로 실험 이틀째가 되자 다들 음식을 나르고 식사 후 뒷정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실험 전 인터뷰를 위해 하버드대 심리학과에 왔을 때 차로 데려다 준 친지에게 극단적으로 의존하던 그들이 은둔처에 도착한 순간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같은 경험을 한 두 집단 모두 청력과 기억력이 향상되었고 체중이 평균 1,5킬로그램 늘어났으며 악력도 현저히 향상되었다. 수많은 측정 결과에서 참가자들은 ‘더 젊어졌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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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험 결과에 대한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를 울타리에 가두는 것은 신체적인 자아가 아니라 신체적인 한계를 믿는 우리의 사고방식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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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 실험과 시계 거꾸로 돌리기 실험에서 달라진 것은 피험자들인 노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에 대한 우리의 기대였다. 요양원에선 돌보아야 할 무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으로 피험자를 재정의했었고 시계 거꾸로 돌리기 실험에서는 노인들이 더 젊었던 20년전으로 돌아가도록 강제되었고 그 당시에 살았던 것처럼 행동하도록 요구되었다. 은둔처에 도착해 가방을 자기 방으로 가져가는 것도 스스로 해야 했으며 걷는 것부터 세수부터 설거지, 청소, 옷 입는 것 등도 스스로 해야 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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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생물학적 노화는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노인들에게 기대하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물리적인 근거를 가진 것일까? 우리가 그리고 그 생물학적 노화 자체도 우리의 기대에 크게 좌우되기도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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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훨씬 어린 남자와 결혼한 여자들은 평균 수명보다 오래 사는 반면,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와 결혼한 여자들은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런 결과는 소녀경에 나오는 회춘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이 ‘사회적인 시계’의 영향을 크게 받아 특정한 행동이나 태도에 어울리는 ‘올바른 나이’가 있다는 암묵적인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한다. 우리는 자신의 사회적 또는 생물학적 시계를 배우자의 나이에 맞추면서 상대적으로 젊은 배우자는 ‘더 늙게’ 되어 예상보다 일찍 죽는 반면 나이 든 쪽은 ‘더 젊어’지고 예상보다 오래사는 것이라 추론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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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자신의 실험들과 연구들을 통해 인간의 노화는 생물학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우리가 노화에 대해 가지는 사고방식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이 아닐까 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여행 가방을 옮길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중 일부는 절말로 한 번에 한 걸음씩 옮겼지만 결국 모두 다른 이의 도움없이 자기 짐을 방까지 가져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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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노화에서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과 우리의 의식이 결정하는 것이 어느 정도나 될까? 저자는 노화란 이런 것이다 노인은 마땅히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고정관념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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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과 늙음, 건강함과 건강하지 못함과 같은 구분은 사회적인 구성물일 뿐 그 의미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회적인 구성물일 뿐인 늙음과 ㄱ건강함에 대한 고정관념은 상식이란 이름으로 그리고 의학의 권위를 입고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주입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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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우리에게 늙음이란 이런 것이다 노인은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 고정관념들에 대한 반박으로 쓰여졌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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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에서 지내 보지 않는 한 그곳에서 사는 것이 어떤지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개인의 방으로 이어지는 문은 언제나 열려있고 모든 일이 내가 정하지 않은 스케줄에 따라 나를 위해 이루어진다. 식사는 물론 언제 샤워를 할지 어디는 갈 수 있고 어디는 갈 수 없는지 모두 나의 권한 밖이다. 요양원에서 노인 호나자들과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서글퍼지고 말앗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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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선택에 대한 실험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요양원이 운영된 것은 무력하고 무능한 돌보아야 하는 존재로 노인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전제를 제거했을 때 노인들은 무력한 존재가 아니었고 무능하지도 않은 존재라는 것이 드러났으며 그들의 행복도 수명도 늘어났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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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은둔처에 들어온 실험 참가자들이 처음에 자기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하나같이 그 같은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모두들 자신의 한계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쉽게 소화된다고 알고 잇는 음식만 먹엇고 미뢰가 줄어들었다고 생각하여 음식을 선택할 때도 모험은 삼갔다.” 그들에게 늙음이란 결국 자신들이 받아들인 한계가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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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은둔처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불가능하다고 받아들인 한계를 간단하게 극복햇다. 저자는 그 한계를 그은 고정관념을 깨버리라고 말한다. 무엇이 가능한지 모험을 해보라는 것이다. 고정관념에 따라 미리 선을 긋지 말고 현실에 부딪히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자고 저자는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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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정관념은 의학이란 권위를 입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의학이란 자체가 너무도 쉽게 변하는 지식의 집합일 뿐이며 의학 자체가 과학이 모두 그렇듯이 무엇 무엇은 이러 이러할 때 이럴 확률’이 높다는 추정일 뿐이지 절대진리가 아니다. 왜 그런 흔들리는 권위에 기대 고정관념에 자신을 맡기는가? 저자가 이책에서 하려는 말이다. <br />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154/90/cover150/8983719621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3719621</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커뮤니케이션 실전 교과서 - [몸짓의 심리학 - 속마음을 읽는 신체언어 해독의 기술]</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799163</link><pubDate>Thu, 19 May 2011 13: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79916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0930250&TPaperId=479916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138/62/coveroff/8950930250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0930250&TPaperId=479916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몸짓의 심리학 - 속마음을 읽는 신체언어 해독의 기술</a><br/>토니야 레이맨 지음, 강혜정 옮김 / 21세기북스(북이십일) / 2011년 04월<br/></td></tr></table><br/>요 근래 바디 랭귀지에 대한 책이 많이 나왔고 몇권은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이책의 제목을 보면 아 이책도 그런 책의 하나이구나,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짐작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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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원제는 ‘The Yes Factor’이다. 어떻게 하면 예스란 말을 끌어낼 것인가, 다시 말해 설득에 관한 책이다. 그렇다면 왜 ‘몸짓’이란 제목이 붙었는가? 트렌드에 끼어보려고? 그런 것같다. 그러나 꼭 그 제목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책의 상당부분은 몸짓에 대해 말해진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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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바디 랭귀지 전문가이다. 그러나 저자가 바디 랭귀지에 밝기 때문에 이책의 상당 지면이 바디 랭귀지에 할당되는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커뮤니케이션에서 말로 전해지는 의미는 극히 일부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의미는 언어 이외의 수단으로 전해진다. 이런 사실은 예전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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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라는 명칭으로 세가지 설득수잔을 이야기했다. 에토는 말하는 사람의 성품과 신뢰성으로 호소하는 설득방식이다. 그러므로 말하는 사람을 믿음직하게 보이게 하는 자질들이 강조된다. 두번째 설득 방식인 파토스는 듣는 사람의 감정에 역점을 두는 방식이다. 로고스는 특정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사실에 역점을 두는 설득방식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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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릴 때부터 열심히 교육받은 것은 로고스, 말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러나 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을 누가 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그 말을 누구에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서 누가 누구에게라는 문제는 언어 이외의 수단으로 전달되는 의미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보자.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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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의 식탁 세트를 주문한 나의 동료는 목소리 톤을 통해 상대방을 판단하고 이를 효과저긍로 활용했다. 애초에 판매원은 6주 뒤에 가구가 도착할 것이라고 했지만 가구는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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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전화를 해서 묻자 판매원은 말했다. ‘아, 20주 정도 걸릴 겁니다.” 무슨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어조엿다. 동료는 상대의 어조를 통해 그가 뭊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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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었던 말하고는 다르네요. 남편이 화가 많이 났어요. 주문을 취소해야 할 것같네요.” (누구에게나 핑계 삼을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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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판매원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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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장아야지요.” 남성 특유의 지배적인 말투, 조직의 우두머리처럼 한껏 힘이 들어간 목소리엿다. ‘이런 일이 생겨서 죄송합니다. 사과의 의미로 탁자 보호용 덮개를 드리겠습니다.” 친구는 판매원이 전통적인 남성성을 강조하며 우월한 위치에서 은혜르,ㄹ 베푸는 그런 역할을 좋아하는 사람임을 간파했다. 그리고 상대의 그런 특성을 활용하기로 했다. 식탁 세트를 90일 동안 기다리느니 보호용 덮개를 포기하고 말갰다는 말을 수화기 저편의 남자가 믿을까? 친구는 속으로 자문해보았다. 아무래도 좋은 방법이 아니다 싶었고 친구는 생각 끝에 난처해진 여자 역할을 하기로 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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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계약을 취소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좋죠? 도와주세요.” (누군가 약한 모습을 보이며 도움을 청하면 사람들은 흡족해하는 경향이 있다.) <br />
‘좋습니다. 그럼 400달러를 깍아드리지요.” <br />
“죄송해요. 400달러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br />
“500달러?” <br />
“제발 제 말을 들어주세요. 환불받지 않으면 남편은 폭발하고 말거에요. 도와주세요. 벌써 10주나 기다렸는걸요.” <br />
“600달러?” <br />
“남편이…” <br />
“더 이상은 깍아드릴 수 없습니다. 집에 필요한 다른 가구는 없으세요?” <br />
“글쎄요. 소파가 아쉽긴 하죠.”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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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친구는 식탁 세트 600달러 할인에 새 소파까지 받았다. 왜일까? 남자의 목소리를 파악하고 기준을 정한 다음, 여기에 협상 스타일을 맞췄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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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가 다른 성격이엇다면 예를 들어 온순하게 사과하는 태도로 나왔다면 친구는 고압적인 자세로 나갔을 것이다. 핵심을 직설적으로 말하면서 “이봐요 찰리. 400달러를 깎아주겠다는 건데 나한테는 공평하다는 생각이 안 드네요.”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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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해당 판매원이 상황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보스기질’이ㅏ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접근법은 효과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알고 친구는 남자가 원하는 역할을 해주기로 했다. 그녀는 자기한테 ‘진짜 문제가 있다고 말했고 ‘유능한’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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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긴 인용이었다. 그러나 이책의 성격이 어떤지 파악하는데 충분했을 것이다. 이책은 아리스텔레스가 말한 에토스와 파토스를 다룬다. 다시 말해 어떻게 내 말을 믿을만하게 들을만하게 만드는가,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를 다룬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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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책만 그런 것은 아니다. 많고 많은 커뮤니케이션 스킬 관련 서적이면 다 그것을 다룬다. 그러나 이책과 다른 책들이 다른 점은 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상대의 큐를 읽어내는 동시에 내가 내보내는 큐를 어떻게 다듬을 것인가, 큐의 의미를 읽고 쓰는 방법에 대해 다룬다는 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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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례에서 그 큐는 말 이외에 그 말이 실리는 톤이었다. 전화상의 대화에서도 언어 이외에 읽어낼 수 잇는 큐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이책의 대부분은 목소리만 들리는 상황이 아닌 얼굴을 맞대고 상대의 몸짓을 읽을 수 잇는 보통의 대면접촉 상황을 가정한다. 상대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것은 긍정인가 부정인가, 턱을 치켜든 것은 무슨 의미인가 호흡이 빨라진 것은 무슨 의미인가? 저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잇는가? 아니면 긴장하고 있는가? 등등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138/62/cover150/8950930250_3.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0930250</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스페이스 스파르타 - [환영의 도시]</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756131</link><pubDate>Sat, 30 Apr 2011 13:0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75613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739033&TPaperId=4756131"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57/3/coveroff/8982739033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739033&TPaperId=475613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환영의 도시</a><br/>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06월<br/></td></tr></table><br/>&#160;이책의 플롯은 ‘토털 리콜’과 비슷하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 새로운 기억 위에 쌓은 정체성, 또는 인격을 포기하고 기억을 잃기 전의 정체성을 되찾는다. 물론 이책의 내용은 토털 리콜과는 전혀 다르지만 비슷한 플롯의 기본구조가 만드는 긴장감은 상당히 닮아있다. 아마 토털 리콜이 이 작품의 플롯 구조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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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인 시리즈 3부에 해당하는 이책의 배경은 연맹이 무너진 후 멸망한 지구에서의 이야기이다. 연맹이 무너진 후 지구에는 오직 하나의 도시만 남아 과거 문명의 잔해를 기억한다. 그리고 지구는 그 도시의 지배를 받고 그 도시의 지배자, 싱의 지배를 받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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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시를 제외한 지구의 나머지는 숲 속에 흩어져 가족단위로 자급자족을 하는 사람들, 고대 유목민 사회로 퇴보한 사람들, 남은 것은 과거의 잔해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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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도서실을 통해 사라져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전기 관련 기술 한 가지를 알 수 잇었다. 그래서 사내아이들은 방에서 방으로 서로에게로 연락할 작은 원격장치를 즐겨 만들었다. 그러나 텔레비전도 전화도, 라디오도, 개척지 너머로 소식을 전하거나 받을 수 있는 전신도 없었다. 그러ㅓ니까 원거리 통신수단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은 다른 집에 방문하여 거래할 일이 있으면 걸었고 먼 길일 때는 말을 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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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적이 누구지?” <br />
“싱이지요” <br />
“어째서 그런가?” <br />
“그들은 ‘모든 세계의 연맹’을 무너뜨리고 사람의 선택권과 자유를 빼앗았으며 모든 사람의 일과 기록을 파괴하고 종의 진화를 막았습니다. 그들은 폭군이요 거짓말쟁이입니다.” <br />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잘 살아가게 내버려 두고 있지.” <br />
“우린 숨어삽니다. 놈들이 내버려 두도록ㄷ 따로 떨어져 살고요. 우리가 대규모의 기계를 만들려 한다면 우리가 뭔가 큰일을 하려고 모이거나 마을이나 국가를 만든다면 싱이 침투해서 일을 망치고 우리를 흩어놓을 겁니다.” <br />
“우린 싱에게서 숨어살지, 또한 예전의 우리로부터 숨어 살아. 알겠나, 팔크? 우린 따로 떨어진 집에서 잘 살고 있네, 아주 잘 살고 있지. 하지만 우리는 공포에 지배당하네 한때는 배를 타고 별 사이를 날아다녔는데 우린 집에서 100마일 떨어진 곳에도 가지 못해. 얼마 안되는 지식을 품고 그걸로 아무것도 안 하지. 하지만 한때 우린 그 지식을 써서 밤과 혼돈을 가로지르는 태피스트리 같은 삶의 패턴을 자아냈어. 삶의 기회를 확장했지. 사람다운 일을 했던 거야.”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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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이라 불리는 도시의 지배자들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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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싱으로 알고 있는 우리는 사실 인간입니다. 당신의 조상, 웨렐(2권의 행성) 첫 거류지의 자콥 아가트와 마찬가지로 지구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 테라(지구) 인이죠. <br />
<br />
머나먼 별들로부터 모든 세계의 연맹을 공격하러 온 적은 없었습니다. 연맹은 혁명과 내전, 내부의 부패와 군국주의, 폭정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모든 행성에 반란, 폭동, 찬탈이 벌어졌고 ‘최초의 세계’로부터 돌아온 보복은 많은 행성을 불태워 검은 모래로 만들어버렸지요. 더 이상 위험한 미래를 향해 나거는 광속선은 없었습니다. 오직 미사일 우주선이며 세계의 파괴자인 FTL기만 움직였습니다. <br />
<br />
절망에 빠진 일부 지구인은 새로운 무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거짓말을 한 겁니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이름과 언어, 그들이 온 머나먼 고향 세계에 대한 애매모호한 이야기들을 지어낸 다음 지구 전역에 자기네 군대와 충성파 주둔지 양쪽에 적이 왔다는 소문을 퍼트렸지요. 내전은 모두 그 적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어디에나 침투해서 연맹을 무너트리고 지구를 조종해 온 적이 이제 힘을 갖고 전쟁을 멈추려 한다고, 그리고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사악한 외계의 힘으로 이루어냈다고, 텔레파시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힘으로 그랬다고 말입니다.” <br />
<br />
그리고 자신들은 그 악역을 맡아 싱이라 불리며 그 거짓을 지키고 있다고 말한다. “에스 토지의 우리들은 태초에 창조주가 어마어마한 거짓말을 했노라는 자그마한 신화를 이야기하지요.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으나 창조주가 있다고 말하자 존재했다고, 그러니 보십시오. 신의 거짓말을 신의 진실로 만들기 위해 우주가 존재하기 시작하게 아닙니까… <br />
<br />
인류의 평화가 거짓에 의해 윺지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거짓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적이 와서 지구를 지배한다고 주장했기에 우리는 그 적이라고 자칭하고 통치했습니다. 엄청난 거짓말을 했기에 지금 우리는 엄청난 법칙을 떠받들어야 합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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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하고 슬픈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의 이야기가 진실일까? 그 거짓말이 진실이라기에는 에스 토치는 뭔가 이상하다. 도시 밖의 사람들이 ‘거짓의 도시’라 부르는 그 도시는 뭔가 이상하다. <br />
<br />
“엘로나에, 인간이 있을곳. 그러나 이 도시는 그에게 근심만 더해 주었다. 열 채가 넘는 이나 백명이 넘는 사람을 한꺼번에 본 적이 한 번도 없기는 하지만 군중 때문에 마음이 심한 것은 아니었다. 팔크의 기를 꺾은 것은 도시의 현실이 아니라 그 비현실성이었다. 이 곳은 ‘인간의 장소’가 아니다. 에스 토치에는 역사의 흔적이 없었다. 이곳에서는 이전 시간이나 바깥 공간이 느껴지지 않았다. 1000년이나 세계를 지배했는데도 말이다. 조브의 집에 있던 고대 텔레스크롤에 나오는 도서관이나 박물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위대한 인간의 시대를 되살려주는 기념물이 전혀 없었다. 배움의 흐름은 물론이고 상품의 흐름도 없었다. 이곳에서 쓰이는 돈은 싱이 인심 쓴 물건일 뿐, 그 돈에 진짜 활력을 부여할만한 경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많다는 지배자들은 지구상에 이 도시 하나만을 유지했다. 지구ㅜ 자체가 한때 연맹을 형성했던 수많은 세계와 멀리 떨어진 것처럼 이 도시도 홀로 떨어져 있었다. 에스 토치는 독립적이고 자급자족하며 뿌리없는 도시였다. 에스 토치의 광휘와 덧없는 불빛, 기계와 얼굴들, 넘쳐나는 이방인과 사치스러운 복잡성 모두가 갈라진 틈, 공허한 장소 위에 걸쳐서 있었다. 이곳은 ‘거짓의 장소’였다. 그러나 훌륭했다. 지구의 너른 황야에 떨어진 보석 세공품처럼 훌륭하고 처음도 끝도 없이 영원했으며 이질적이엇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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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싱은 외계인 침략자이고 그들은 마음으로 거짓말을 하는 능력으로 연맹을 무너트렸다는 것이었다. “팔크가 조브의 집에서 배운 옛 역사에서는 싱이 하이아데스 너머 어쩌면 수천 광년 떨어진 머나먼 은하계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보았다. 정녕 그렇다면 그렇게 광대한 시공을 많은 수가 건너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타고난 마음 거짓말 능력과 소유하거나 소유했던 다른 기술 혹은 능력으로 잠입하여 연맹을 무너트리기에는 충분한 숫자였겠지만 과연 그들이 분열시키고 정복한 모든 세계를 통치하기에도 충분했을가?” 그들은 소수였기에 오직 파괴와 거짓으로만 통치할 수 있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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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은 이상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연맹을 무너트린 후 학살을 하지 않았다. “싱은 정말로 지각력 있는 존재를 죽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를 살려두었고 아마 다른 승무원도 죽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공들여 정체를 감춘 그들의 음식은 모두 식물성이었다. 인구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부족간에 싸움을 붙였고 전쟁을 시작하되 살인은 인간이 하게 했다. 그리고 역사에 따르면 통치 초기에 그들은 대량 학살 대신 우생학과 재식민을 이용하여 제국의 초석을 다졌다. 그러니까 그들은 정말로 자신들의 법에 복종하지는도 모른다.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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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통치는 “관습과 책략과 두려움과 무기를 이용해서 강력한 부족이 일어나거나 그들을 위협할 수도 있는 지식이 모일 경우 재빨리 막아버림으로써 인간을 통제했다. 그들은 인간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지배하지 않았다. 오직 파괴할 뿐이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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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와 거짓의 통치. 그것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놈들은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그런 두려움을 생명 존중이라고 불렀다. 싱, 적, 거짓말쟁이들… 그들이 정말 거짓말을 한 걸까? 어쩌면 그건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의 거짓말이란 본질적으로 뿌리 깊고 고칠 길 없는 이해 부족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인간과 접촉하지 못했다. 그들은 마음의 거짓말을 크나큰 무기로 만들었고 그 무기를 이용하고 그로 인해 득을 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보낸 시간만큼의 가치가 있었던가? 먼 별에서 온 유배자인지 해적인지 제국 건설자인지는 몰라도 그들과는 마음이 전혀 통하지 않고 육체도 영원히 볼모인 인종을 지배하기로 결심하고 처음 여기로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거짓말로 이루어진 십이 세기의 세월, 환영의 세계에서 벙어리를 다스리는 외롭고 고독한 벙어리들. ‘망망하도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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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57/3/cover150/8982739033_2.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739033</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세계화의 충격 -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736168</link><pubDate>Thu, 21 Apr 2011 16: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73616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618576&TPaperId=4736168"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91/74/coveroff/899061857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618576&TPaperId=473616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a><br/>강상규 지음 / 논형 / 2007년 04월<br/></td></tr></table><br/>“21세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9.11 테러로 불길하게 개막한 새로운 밀레니엄의 출발 이후 우리는 어떠한 ‘거대한 변환’의 소용돌이 위에 떠있는 것은 아닌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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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21세기의 불확실성과 19세기의 불확실성이 같은 이유였다고 말한다. 19세기와 20세기말의 공통점은 세계화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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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라면 보통 경제를 떠올린다. 세계정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가 하나의 문화로 묶인 것도 아니니 현실적으로 세계화는 경제현상이라 생각하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다. 세계화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세계는 평평하다’도 경제현상으로 세계화를 다룬다. <br />
<br />
그러나 세계화를 단순하게 경제현상으로 이해한다면 세계화가 어떻게 가능하고 세계화가 어떤 역학으로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br />
<br />
지난 30년간 세계화와 함께 가장 많이 말해진 것은 글로벌 스탠다드일 것이다. 세계화를 경제적으로 이해하더라도 세계시장이란 실체가 있어야 세계화가 가능하다. 세계시장이 가능하려면 그 시장에서 통용되는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거래가 가능하다. 그 규칙을 글로벌 스탠다드라 불렀다. 국경을 넘어 적용되는 규칙이 있다는 것은 세계화가 단순히 경제현상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느슨하더라도) 정치적 통합이 없다면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묶을 수 없다. 글로벌 스탠다드는 세계가 하나의 문명표준으로 묶인다는 의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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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가 그런 시대였다. 19세기 동북아 3국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세계화의 개념으로, 문명표준이란 시각으로 그 시대를 봐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19세기 동아시아의 경험을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발전과정이라는 틀에서 단선적으러 이해해온 기존의 논의방식과는 달리 상이한 문명 간의 충돌과 패러다임 변환이라는 보다 복합적이고 상호구성적인 틀 위에서 검토”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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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봐야만 일본은 제국이 되고 중국과 한국은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로 떨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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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흔히 서세동점으로 집약되는 거대한 변환의 과정이란 동아시아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던 중화질서가 현실적으로 붕괴되고 서구의 국제질서로 재편되어가는 과정이었다.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은 이 과정에서 이른바 ‘예의 관념’에 의거한 중화질서로부터 ‘부국강병’과 ‘국가평등 관념’에 입각한 근대 국제질서로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하는 패러다임의 변동을 겪어야 했다.” <br />
<br />
그 과정은 말그대로 ‘문명의 충돌’이었고 ‘문명의 표준’이 바뀌는 ‘거대한 변환’이었다. 그런 과정이 쉽게 될리가 없었다. 수천년을 이어온 질서가 표준이 쉽게 바뀔 리가 없었다. 당하는 입장에선 하늘(천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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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질서의 “’무대’가 예의 관계에 입각한 ‘천하질서’에서 상위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주권국가 간의 관계, 즉 ‘근대 국제질서’로 변화해 간 것을 지칭한다. 무정부적 속성을 지닌 새로운 무대 호나경에서는 덕치나 예치, 왕도정치, 사대자소와 같은 기존의 ‘연기’와는 다른 부국과 강병, 균세(세력균형)와 자강의 능력이 보다 중시되었고 이에 적응하지 못한 배우들은 무대 밖ㅇ,로 밀려났다.” 중국과 조선은 그 무대에서 밀려났고 일본은 그 무대에 남았다. 왜 그랬을까? <br />
<br />
저자는 그 이유를 문명의 표준이란 관점에서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19세기 문명의 표준으로 떠오른 ‘만국공법’을 중국과 일본에서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그리고 만국공법이란 표준에 따라 자신이 자신의 정체성을 즉 국체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검토하면서 적응과 부적응의 이유를 설명한다. <br />
<br />
중화질서의 붕괴 또는 문명의 충돌은 아편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에서 아편전쟁은 심각한 사건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아편전쟁이 영국한테는 국가의 전쟁이었으나 청국에게는 회민기의나 백련교도의 난과 같은 지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중국은 태평천국의 난이나 염군의 난 같은 내부문제가 아편전쟁 같은 외환을 압도했다. <br />
<br />
청국 입장에서 불평등조약으로 양보하는 문제는 예전 중화질서에서처럼 오랑캐를 달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청은 서양의 여러 나라가 중국과의 조약을 통해 획득한 특권을 기본적으로 천자가 이적에게 베푼 은혜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에 어차피 일방적인 성격이 강할 수 밖에 없었고 오히려 상국인 중국의 편벽되지 않은 공정한 은혜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별다른 거부감없이 수용되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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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860년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황제가 도망가는 경신변란이 일어나면서 양이의 문제는 심각한 사안이 되었고 중국 최초의 외교전담기구인 총리아문이 만들어진다. 예부 관할의 조공관계에 포섭되지 않는, 천하질서에 포섭되지 않는, 중국 자신이 일개 국가에 불과한 무질서의 국제질서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질서의 규칙인 ‘만국공법’에 주목한다. <br />
<br />
그러나 중국의 입장에서 만국공법은 적극적으로 수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양이들과 대화를 하기 위한 지피지기의 전략적 차원에서 수용되엇고 참고문헌이요 실무지침서일 뿐이었다. <br />
<br />
그에 비해 일본에선 “막말의 2대 베스트셀러는 뭐니뭐니해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과 휘튼의 ‘만극공법’이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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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이가 두 나라의 운명을 갈라놨다고 저자는 말한다. <br />
<br />
중국의 입장에서 만국공법이 전제하는 ‘국가평등’에 근거한 주권국가의 개념은 받아들일 수 없엇다. 그것은 ‘제국으로서의 중화라는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중국적 세계질서의 해체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중화문명권에서 문명의 정수를 구현하며 문명 기준을 제공하던 화(華)의 입장에서 새로운 문명 기준인 유럽문명에 의해 스스로를 재편해야하는 이(夷)의 입장으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br />
<br />
천하질서의 논리는 화와 이의 구분에서 시작한다. “화와 이의 관계란 문명의 완전태와 결여태의 관계”였다. 서구의 국제질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관계가 뒤집힌다는 의미엿고 화에서 이로 전락한다는 의미였으며 정체성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의미엿다. 왕조의 “흥망성쇠를 넘어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br />
<br />
그러나 중화질서에서 주변이었던 일본의 입장에선 중국보다 적응이 쉬웠다. 주변에 있었기에 일본의 화이관에서 화는 실체가 불분명했고 이로서 서양에 대한 관점은 중국보다 유연할 수 있었다. 일본은 “중국의 천하 개념에서 드러난 자기완결성’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화이사상은 중국과 달리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경향성이 현저했다. 지배층이 사무라이 집단이었으며 화이사상을 지탱한 문화적 기반이 상대적으로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br />
<br />
아편전쟁이후 “양이(攘夷)로 대표되는 배외주의적 기운이 일본열도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들어갓다.” 그러나 그 기운의 뿌리는 “화이라는 명분보다 이기느냐 지느냐 죽느냐 사느냐라는 긴박한 위기의식’이었다. 그들이 본 것은 “서양제국의 군사적 우월성”이었고 “그 저변에 놓인 서양의 과학기술을 섭취해서 국력을 충실히 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전략적 인식이”었다. <br />
<br />
일본에겐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생존의 문제였고 적응의 문제엿다. 그렇기에 만국공법을 읽는 것은 적응의 생존의 수단이었다.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91/74/cover150/8990618576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618576</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경찰은 심리학자 - [숨겨진 심리학 - 최고의 프로파일러가 알려주는 설득과 협상의 비밀]</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726581</link><pubDate>Sun, 17 Apr 2011 21: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72658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4013342&TPaperId=4726581"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127/75/coveroff/899401334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4013342&TPaperId=472658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숨겨진 심리학 - 최고의 프로파일러가 알려주는 설득과 협상의 비밀</a><br/>표창원 지음 / 토네이도 / 2011년 03월<br/></td></tr></table><br/>“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과거의 피의자 취조실은 공간과 환경이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 수 있다. 범인은 주로 차갑고 사무적인 느낌의 책상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마주앉아 있다. 조명은 어둡고 피의자를 향해 있다. 심문을 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어두운 공간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어둠은 경찰을 위압적으로 보이게 하는 반면 표정은 감춰 피의자를 더욱 초조하게 만든다. 여기에 더해 낮은 실내온도와 외부소음 차단,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 등을 활용해 불안과 두려움을 가중시킨다. 범인 아니라 누구도 오랫동안 있고 싶지 않은 환경이다.” <br />
<br />
은근한 고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은 그런 취조실은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의 기제는 취조실에 활용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br />
<br />
“대부분의 피의자들은 인터뷰 룸에 들어와 카메라 장비를 보는 것만으로도 위축되낟. 특히 일면경은 거울 뒤쪽에서 누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 알 수 없어 피의자의 물안을 가중한다. 거울 뒤에서 목격자나 피해자가 자신을 지목하고 있을 수도 잇다는 생각에 인터뷰 룸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불안과 두려움,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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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심리학은 면담자 선정에도 활용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면담자는 피의자의 연령이나 연고지역, 취미 등에서 유사성을 갖고 잇는 인물을 투입하는 것이 공감대 형성이 쉽고 상대방의 얘기에 대한 이해도도 높다. 그러나 때로 역으로 상대의 수치심을 유발할 만한 어린 수사관을 면담자로 들여보내는 전략을 활용하기도 한다.” 바로 그런 전략의 희생자가 작고한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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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면담자와 상대하면서 ‘내가 대학 다닐 때 저 녀석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저런 놈 앞에서 머리 굴려가며 거짓말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런 곳이 아니라면 눈도 마주칠 일 없는 신참내기를 상대하면서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킬 수 없다는 판단이 큰 몫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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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런 전략은 자살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수치심을 자극해 취조실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심리처럼 그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려는 심리를 조장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대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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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프로파일러인 저자는 자신이 경찰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이나 경찰수사의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경찰수사와 프로파일러들이 어떻게 심리학을 활용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사례들 중에는 정몽준 회장처럼 큰 이슈가 되었던 사건들도 많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이책의 재미는 위에서 소개한 취조실의 심리학처럼 실제 경찰현장의 구체성이 풍부한 사례들과 그 사례들로 설명하는 심리학의 연결에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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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이 설명하려는 것은 설득이다. 프로파일러의 목적은 피의자를 설득해 자백을 얻어내는 것이다. 설득의 프로인 프로파일러가 어떻게 심리학을 응용하는지 보여주고 거기서 비즈니스 협상에 유용한 팁을 전하려는 것이 이책의 목표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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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몇 년 전 쏟아졋던 설득과 협상 서적들 위에 이책이 갖는 가치는 재미에 있다. 사실 저자가 비즈니스 협상에 대해 조언하는 내용은 간략하고 그리 큰 참고가 되지 않는다. 위에서 소개한 취조실의 심리학을 비즈니스 협상에 응용한 저자의 설명은 상대와 격이 맞게 하라. 불안을 느끼는 장소를 택하지 마라 정도에 그친다. 저자가 비즈니스 협상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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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문제를 떠나서 구체적인 경찰업무를 읽는 것만으로도 그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책이다.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127/75/cover150/8994013342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4013342</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디지털 비만으로부터의 해방 - [속도에서 깊이로 - 철학자가 스마트폰을 버리고 월든 숲으로 간 이유]</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726560</link><pubDate>Sun, 17 Apr 2011 21: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72656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0929856&TPaperId=472656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123/33/coveroff/895092985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0929856&TPaperId=472656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속도에서 깊이로 - 철학자가 스마트폰을 버리고 월든 숲으로 간 이유</a><br/>윌리엄 파워스 지음, 임현경 옮김 / 21세기북스(북이십일) / 2011년 03월<br/></td></tr></table><br/>“사무실에 앉아 계속해서 이메일과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 웹 사이트를 돌아다니고 휴대전화를 들고 종종거리다 또다시 이메일을 확인하고 이 모든 과정이 디지털 축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깊이 있는 경험의 가능성과 기회는 점점 멀어진다. 물론 제품을 혁신적으로 개선해 달라는 고객의 이메일을 받고 제품 개선에 대한 간략한 밑그림이 떠올라 시장 전제를 뒤흔들 수 잇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 자기만의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러면 당신의 삶 전체가 바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꽃피울 만한 시간을 잠시도 허용하지 않고 또 다른 스크린으로 옮겨가기를 반복한다면 새로운 사람은 결코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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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과를 떠올려보자. 데스크톱에서 스마트폰으로 다시 데스크톱에서 스마트폰으로 하루중 스크린과 눈이 만나지 않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정보와 정보 사이에 조금의 빈틈도 없이 스크린이 토해내는 정보를 탐할수록, “디지털 네트웤을 추구할수록 더 창의적이고 똑똑해질까?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모두들 ‘하이퍼 커넥티드’된다면 가족과 지역사회의 유대감이 더 강해질까? 더 나은 조직을 세우고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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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스크린은 그런 목표들을 이루는데 좋은 수단이다. 그러나 좋은 것도 정도가 있다. 과하면 없느니만 못하다. 지금 우리의 일상이 그렇다고 저자는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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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가 없어 보이는 디지털 세상의 삶은 흥미지진진하지만 두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우리를 뒤흔들고 있다. 첫째 여러가지 업무를 동시에 다루다 보면 시간과 집중력을 끝없이 쪼갤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언제나 새로운 자극과 일거리를 찾아 헤메면서 초조해 하고 결국 매 순간을 분주하게 살아간다. 심지어 스크린에서 떨어져 있을 때조차도 초조해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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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측면은 다소 철학적이다. 디지털 네트웤이 확장도리 수록 우리의 사고는 외부 지향적이 된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돌아보며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피는게 아니라 부산한 바깥 세상을 내다보면 ‘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만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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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간은 유한하다. 우리의 주의력도 유한하다. 스크린이 토해내는 무한한 정보의 홍수는 그 유한한 자원을 쪼개고 쪼개며 더 많은 몫을 요구한다. 그러나 정보는 정보다. 정보를 소화해 의미를 만들 시간이 있을 때만 정보는 가치가 있다. 저자는 정보와 정보 사이에 공백, 정보를 소화할 시간의 여유가 없어지면서 우리 삶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가벼워지며 무의미해져간다고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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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친구가 인사를 하러 잠깐 들렀다고 하자. 친구와 막 대화를 나누려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친구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부탁하고 전화를 받는데 웨이트리스가 와서 리필을 원하느냐고 묻는다. 커피가 담긴 주전자를 들고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카페의 화재경보기가 울리기 시작한다. 이 상황의 경우 잠재적 관심의 대상은 3가지(책, 음악, 커피)였고 그중 한가지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몇 분 만에 잠재적 관심의 대상이 7가지(책, 음악, 커피, 친구, 전화, 웨이트리스, 화재경보)로 늘었으며 그중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엇다. 만족스러웠던 몰입이 불만족스러운 혼란으로 대체된 것이다. 다시 마음을 가라앉힌다 해도 몰입의 상태는 사라져버렸고 어쩌면 무슨 책을 읽고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선불교 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삶은 죽은 삶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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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성은 오직 시간과 정신적 여유가 있을 때만 발휘된다.” “사실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잘 모른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눈에[ 보이는 확실한 형태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불필요한 요구나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것들이 없는 상태. 즉 존재가 아닌 부재의 상태다. 설명하기 조차 힘든 그 부재의 상태를 어떻게 되찾을 것인 것?” 이책의 물음이다. 저자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과거에서 찾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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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답을 찾아 떠나는 과거는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는 본격적인 도시가 등장한 시대엿다. “고대의 대도시 역시 당시 기준으로 본다면 실로 무척 바쁜 곳이었다. 아테네에 산다는 것은 수천명의 사람들로 밤낮 구분 없이 둘러싸여 있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활동, 소음, 냄새, 타인의 관심을 요구하는 수많은 주장과 함께 한다는 뜻이었다.” 디지털 스크린이 만들어내는 분주함과 산만함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대도시가 등장하기 이전 촌락단위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보량이 거리를 흘러다녓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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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을 때 우리의 사고와 감정은 내면을 향하며 이 경험은 다소 조용하고 느리다. 반대로 실제 군중이든 가상의 군중이든 구중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외부지향적이 된다.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도 많고 관심을 기울일 대상도 많기 때문이다. 군준 안에서의 삶은 보통 더 바쁘고 더 빠르다.” 아테네에 사는 사람은 스크린에 포위된 지금의 사람들과 마찬가지 문제에 부딫혔고 공백을 만들 필요를 느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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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라는 공간은 그 자체가 커뮤니케이션의 속도와 밀도를 높였다. 그리고 그 속도와 밀도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았던 시절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문자매체에 의해 더 가속화되었고 더 촘촘해 졌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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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안에서의 삶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불어올 수 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생각할 시간이 없는가? 떨쳐버리기 힘든 이 허전하고 불안한 느낌은 무엇인가? 어디까지가 군중의 의견이고 어디서부터가 내 의견인가? 이 도구가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잇는가? 우리가 상황을 바꿀 수 있는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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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은 “ㄱ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길을 포장했고 잘 훈련된 군대를 파견했으며 행정제도를 마련하고 우편제도를 정착시켰다. 로마 사회는 새로운 종류의 네트웤을 대변했는데 그 새로운 네트웟은 특히 상류층에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만큼의 대가도 치러야 햇고 그중 일부는 꽤 까다로웠다. 세상을 더 가깝게 만들면서 제국의 일상은 매우 분주했고 개인의 의무 또한 무거워졋다. 어디를 가든 그곳이 제국의 영토라면 쭉쭉 뻗은 도로, 수로, 요새, 용병, 우편배달부와 같은 같은 다양한 수단이 여전히 로마 ‘안에’ 있음을 일깨워주었고 개인에게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 자율성을 요구햇다. 문자언어를 통한 의사소통때문이었다. 우편물은 오늘날의 이메일처럼 급히 확인해야 할 대상이엇다. 세네카는 이집트에서 막 도착한 우편선을 맞이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이웃에 대해 묘사한 적이 잇다. 로마 사회의 유력자들은 세네카가 언급한 ‘언제나 쫓기는 듯한 분주한 마음’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그리고 “문자언어의 폭발적인 증가로 로마제국은 읽어야 할 자료로 넘쳐 났다. 수십만원을 넘어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장서를 읽기 위해 이집트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읽을 거리가 많아질수록 진정으로 지식을 쌓기가 어려워졌다. 수많은 책을 정독하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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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보와 철도는 그런 분주함과 정신없음을 새로운 단계로 올렸다. “힘든 하루를 마친 무역강들은 늦은 저녁을 먹을 기대를 품고 집으로 돌아간다. 가족의 품에 안겨 일에 대한 생각은 잠시 잊고 싶지만 런던에서 온 전보 때문에 그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밀 2만 포대를 사들이라는 급전을 받은 가련한 남자는 허겁지겁 저녁을 먹어 치우고 캘리포니아로 전보를 보내기 위해 최대한 빨리 서둘러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사업가는 쉴 틈 없이 바쁘게 뛰어나녀야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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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 기술 때문에 정신없어지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이다. 문제가 동일했기에 그에 대한 답도 비슷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먼저 플라톤은 가끔씩 도시의 군중으로부터 물리적 거리를 두어 내적 자유를 얻을 필요가 있다는 말을’파이드로스’에서 하고 있으며 플라톤의 물리적 거리두기에서 한단계 더 나아가 세네카는 군중 속에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후퇴하여 내적 거리를 만드는 기술에 대해 언급한다. 구텐베르크는 세네카의 내적 거리두기의 수단으로서 책을 손쉽고 싸게 구할 수 있도록 인쇄술을 발명했다. 그러나 구텐베르크의 발명으로 쏟아진 인쇄물의 홍수에 대응하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는 넘쳐나는 정보를 통제하는 도구로서 손으로 언제든 썼다 지웠다 할 수 잇는 ‘테이블’이란 도구가 만들어진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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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그러한 거리두기와 내적 자유를 위해 어떤 방법을 생각해냈는지 플라톤부터 프랭클린, 소로, 맥루한 등 7명의 시대와 그들의 대응을 검토하면서 디지털 시대에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123/33/cover150/8950929856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0929856</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심리학의 의미 - [댄 애리얼리, 경제 심리학 - 경제는 감정으로 움직인다]</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599837</link><pubDate>Sun, 06 Mar 2011 22: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59983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208639&TPaperId=4599837"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874/32/coveroff/893520863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208639&TPaperId=459983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댄 애리얼리, 경제 심리학 - 경제는 감정으로 움직인다</a><br/>댄 애리얼리 지음, 김원호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02월<br/></td></tr></table><br/>이책의 주제는 특별할 것이 없다. 요 몇 년간 쏟아진 행동경제학 서적을 몇권 보았다면 이책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들이 친숙할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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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들은 이렇다. 인센티브의 적정수준은 어떠해야 하는가, 사람에게 일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사결정에서 감정의 영향은? 등등. 이런 주제들은 다른 책에서도 널리 다루어지는 것으로 특별할 것은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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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책은 특별하다. 주제가 아니라 주제가 다루어지는 방식에서 특별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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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들과 이책을 비교하자면 다른 책들은 결론만 다루어진다면 이책은 서론, 본론, 결론이 모두 갖춰져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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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들도 주제를 말해주는 심리실험들이 소개되고 그 실험결과가 경제현상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기술한다. 그러나 왜 그런 주제를 연구하게 되었는가라는 연구자 개인은 빠져있다. 독자가 원하는 결론만 전달하는데 집중하고 되도록 많은 사실을 알려주는데 집중하기 위해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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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찌된 것인지 그리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런가보다 남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 연구의 의미가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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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책은 같은 주제를 다루는데도 기억에 잘 남는다. 단지 한 주제를 다루는 분량이 많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연구자 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그 주제를 다루게 되었는가부터 시작하는 이책의 서술방식 때문일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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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저자는 이케아 매장에서 산 가구를 왜 다른 완제품 가구보다 자신이 더 좋아하는가라는 의문에서부터 실험을 고안하게 된 이야기부터 자신이 만든 것을 남이 만든 것보다 더 좋게 평가하는 심리과정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장을 시작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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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체험에서부터 시작해 그 체험에서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실험을 설계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그 실험결과가 경제현상이나 일상생활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로 한 챕터를 설명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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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한가지 주제에 대해 상당한 양이 할애된다. 다른 책에서라면 비경제적이라고 피할법도 한 방식이다. 그러나 그런 서술방식은 저자가 설명하는 현상이 어떤 의미인가를 확실하게 전달한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려는 결론이 어떻게 도출되었는지 쉽게 이해되기 때문에 쉽게 다른 상황에도 적용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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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이 다루는 주제는 그런 서술방식 때문에 그리 많지 않다. 기껏해야 10가지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가지 주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 그 주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저자같이 다루는 방식 때문에 다른 책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잇다는 점에서 이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874/32/cover150/8935208639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208639</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Nature and Nuture - [개성의 탄생 - 나는 왜 다른 사람과 다른 유일한 나인가]</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536331</link><pubDate>Thu, 17 Feb 2011 15: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53633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247365&TPaperId=4536331"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92/96/coveroff/899024736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247365&TPaperId=453633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개성의 탄생 - 나는 왜 다른 사람과 다른 유일한 나인가</a><br/>주디스 리치 해리스 지음, 곽미경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7년 06월<br/></td></tr></table><br/>행동유전학자들은 사람의 성격은 평균 45%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개성은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이 45%이고 나머지 차이는 환경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는 그 환경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그 환경을 가정환경이라 생각해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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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환경이 가정환경이라면 쌍둥이가 다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쌍둥이는 유전자도 동일하고 가정환경도 공유한다. 그러나 어떤 쌍둥이도 같지 않다. 게다가 다른 가정환경에서 자란 쌍둥이의 차이는 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쌍둥이의 차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가정환경과 개성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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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가정환경과 개성을 연결하는 사고방식이 19세기 상류계층의 특수한 여건 때문이었다고 추정한다. “부모의 힘에 대한 감정은 우리 문화의 특색이다. 이 개념이 유럽과 미국 문화의 일부로 뿌리를 내린 것은 프로이트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부모와의 동일시를 통해 행동하는 법을 배운다는 프로이트의 개념은 자신의 유년 시절의 기억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비엔나에 살던 자신의 이웃이나 동료의 자녀들에 대해 아는 사실에 기반을 두었을 지도 모른다. 이 아이들은 취학 전의 어린아이들이었으며 어쩌면 오늘날의 아이들보다 또래들과의 접촉이 적었을 수도 잇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맏이나 외동이었던 것처럼 보여 형제도 별로 없었다. 아이는 주변의 누구라도 모방하기 마련이지만 이 아이들은 모델 선택이 매우 한정적이엇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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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어린 침팬지의 손에 자라면서 그 침팬지를 모방한 이야기를 예로 든다. “형제자매도 없고 부모는 어린아이한테 침팬지를 선물할 정도로 방치하는 지경이니 아이는 달리 대체할 어른을 찾아 모방한다. 아동발달 교과서에 면도하는 흉내를 내는 어린 사내아이와 요리하는 체를 하는 여자아이의 사진이 실려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아이들은 어른 흉내를 내는 것이 심지어 집에서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가상의 놀이에서는 어른인 체할지도 모르지만 일찍부터 현실과 놀이의 차이를 인식한다. 어쨌든 아이들이 흉내내는 어른은 부모가 아니다. 그 대상은 자기 부모가 되엇든 다른 아이의 부모가 되었든 사회화 체계의 핵심 경향 계산기가 산출해 낸 원형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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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의 탄생’ 리뷰에서 보았듯이 인간의 기본적인 성격 패턴은 유전자가 결정한다. 그러나 쌍둥이처럼 유전자의 성격패턴이 동일하더라도 개성이 다른 사람으로 자란다. 그 이유는 환경이지만 그 환경은 가정환경이 아니라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개성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이가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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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은 인간이 사회에 적응하려는 과정이며 그 과정은 “개인적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려는 성향과 자신이 속한 사회의 규범과 관습에 자신의 행동을 맞추려는 성향, 그리고 사회의 다른 성원들과 경쟁하려는 그리고 가능하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앞지르려는 성향, 세가지가 있다.” 저자는 3가지 성향을 관계체계, 사회화체계, 지위체계라 부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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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체계는 사람을 구분하는 시스템이다.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그 누구는 어떤 사람이라는 정보를 연결하는 시스템이다. “신세는 갚아야 하고 표리부동은 기억해야 하고 뜻이 맞는 동료는 찾되 미운 놈은 피해야 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는 예를 갖춰야 한다. 정보가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시스템이 관계체계이다. 사람을 구분하고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저장하며 그 정보에 따라 그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와 같은 인물사전을 작성하고 관리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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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관리는 아기의 제1임무다. 관계체계는 출발선에 서는 순간 가동할 준비를 갖추고 잇다. 인간 유아는 첫 숨을 들이키자마자 인물사전을 만들 태세인 것이다.” 인물사전을 만들어 누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이것은 규칙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규칙을 배우는 것을 사회화라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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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집단은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집단에 소속되는 데 필요한 행동을 모두 타고날 수는 없었다. 상당부분은 학습되어야 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기의 제2의 임무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다른 성원들에게 용납되는 행동방식을 터득하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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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화는 성격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환경변수이다. “미국 사람들과 유럽 사람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 비해 외향적이며 경험에 열려 있지만 상냥함이나 순응성이 떨어진다.” 문화권에 따라 유전자 분포가 다르기 때문이라 말할 수도 잇다. 그러나 “홍콩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온 중국계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시아계 대학생을 대상으로 인성검사를 햇다.” 결과는 “최근에 캐나다로 건너온 피험자의 성격이 여전히 홍콩에 사는 대학생 또래 사람들의 성격과 평균적으로 거의 비슷했다. 그러나 캐나다에서 태어난 피험자의 성격은 캐나다 대학생과 거의 비슷했다. 어릴 적에 캐나다로 건너온 피험자들은 홍콩 기준과 캐나다 기준의 중간이었다.” 이런 차이는 유전적일 수 없다. 그리고 부모에 의한 양육의 효과라 볼 수도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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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아이들이 어릴 때 언어를 배우는 모듈이 활성화되듯이 사회화 역시 특정 연령에 활동하는 뇌의 모듈이라 말한다. 그 모듈의 목적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준비작업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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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직면한 도전을 생각해 보자. 아이는 사회에 적합한 행동을 익혀야 한다. 남에게 비웃음이나 비난을 사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는 행동방식을 익혀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사회에 몸담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현저한 개인차는 차치하더라도 각기 다른 사회적 범주에 속한 사람들의 행동에는 조직적 차이도 존재한다.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남자는 여자와 아이는 어른과 다르게 행동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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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범주별 행동의 차이는 아이가 단순히 엄마를 흉내 내는 것만으로 제대로 된 행동을 배울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는 아이이고 엄마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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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아이답게, 여자아이는 여자아이답게 남자아이는 남자아이답게 행동하는 법을 아이는 어떻게 배울까? 분화된 마음의 장비를 요한 ㄴ 인지과정을 통해서라는 것이 그 대답이다.” 아이는 먼저 관계체계를 통해 인물사전을 만들었다. 그 과정은 차별화의 인지과정이다. 그러나 사회화의 과정은 그 “자료를 통합하고 그에 대한 통계를 내어 평균을 계산”해 범주를 추출하는 일반화의 인지과정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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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화 과정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저자는 자신의 예를 든다. “나는 맏이였지만 꽤 불안한 유년시절을 보냇다. 나는 또래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그러나 그것은 따돌림의 결과였다기보다는 원인이었다고 본다. 나는 동갑내기 아이들이 왜 나를 받아들이지 앙ㄶ는지를 알지 못햇을 뿐 아니라 이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우리 반의 어떤 여자이이가 몰래 나를 불러서는 아이들과 어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교를 늘어놓앗다. 그 여자아이는 엄마끼리 친한 친구여서 우리 집을 드나들던 아이였다. 여저아이가 말해 준 지침에는 내가 늘 따분하다고 여겼던 주제인 옷을 제대로 입는 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그 아이의 강의는 지루하고 당혹스러웠던 터라 대수럽지 않게 흘려듣고 말앗다. 그것이 친절이엇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몇 년이 지나고 나서엿다. 그 친구는 나를 도우려고 햇던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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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사회화체계가 프로이트의 초자아를 제대로 해석하는 개념일 수 있다 말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의 이론은 거의 전적으로 관계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관계체계는 대부분 드러난 상태로 작용한다. 그의 이론에 가장 큰 버팀목이 된 것은 무의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가장 큰 아군은 의식이엇다. 프로이트가 그렇게나 몰두했던 성과 공격성의 동기는 관계체계의 메커니즘에 의해 제공되며 의식의 접근이 용이하다. 그가 피험자들로부터 이끌어낸 대화는 모두 관계에 대한 것이ㅏㄷ.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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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관계체계와는 대조적으로 사회화체계는 대부분 의식에 쉽게 접근하지 못한느 차원에서 은밀하게 작용한다. 우리는 어떻게 사회화되는지 알지 못한다. 정작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잇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화체계는 프로이트의 초자아와 닮은 구석이 있다. 그리고 기능도 비슷하다. 그러나 같은 성별의 부모와의 동일시에서 초자아가 형성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아이가 동성 부모와의 동일시를 통해 행동을 배운다는 생각은 분석 가능한 예측을 프로이트 이론의 측면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증거가 없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남자아이도 양쪽 부모 밑에서 자란 남자아이 못지않게 남자답다. 양쪽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정도에서 동성 부모를 닮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를 조사한 발달심리학자는 “남자아이는 자기 아버지의 행동만큼 다른 아이들의 아버지의 행동을 닮는다.”는 증거가 있다고 햇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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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사회화의 기관은 가정이 아니라 말한다. “전통 사회에서 아이는 실제로 부모에게 별로 배우지 않는다. 주로 아이들의 놀이집단에서 사회화되기 때문이다. 놀이집단은 아이의 놀이를 전수하듯 언어와 관습을 전수한다. 나이 어린 아이는 나이가 많은 아이에게서 어휘와 규칙을 익힌다. 놀이와 언어 그리고 관습은 수 세대의 아이들이 이 놀이집단에 들어가 나이가 많은 아이에게서 규칙을 배우고 그 집단에서 나오기 전에 이를 다시 더 어린 아이에게 전수해가는 식으로 수백년 동안 그대로 간직되기도 한다. 아이의 문화는 부모의 문화와 일치한다. 아이와 부모는 동일한 집단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사회화되겅끼 때문이다. 놀이집단은 세월이 가면서 구성원은 바꿔도 놀이와 문화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맹자의 어머니는 옳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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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회화가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집단에 속하고 싶어하지만 그 집단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사회화는 행동을 비슷하게 만들지만 지위를 차지하려는 동기, 즉 지위체계는 경쟁하도록 만들며 개인을 차별화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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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사회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지위체계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지위체계 즉 경쟁이 성격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예를 들어보자. “평균적으로 기가 큰 남성이 작은 남성에 비해 급여수준이 높다. 이 차이는 무시해도 좋은 정도가 아니다. 인치 당 약 800달러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러나 고용주들이 키 자체에 다시 말해 성인이 되어서의 큰 키 때문에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엇다. 임금에서 중요한 사항은 성인기의 키가 아니라 청소년기의 키다. 경제학자들은 ‘십대의 키 프리미엄’을 설명할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그들의 연구에 따르면 십대의 키 프리미엄의 1/3 가량은 고등학교에서의 과외활동, 특히 스포츠 활동의 참여엿다. 덩치와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등학교 선수들은 대개 또래들 사이에서 지위가 높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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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의 체구와 힘, 운동능력의 두드러진 차이는 성격과 사회행동의 차이를 수반했다. 성장이 빠른 아이들은 침착하고 느긋하고 현실적이다. 반대로 성장이 느린 아이들은 열심이고 수다스럽고 긴장이 팽배하며 ‘영향받기 쉽고’ 남의 ‘관심을 좇는다’ 나이에 비해 체구가 작은 소년들은 또래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십상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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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의 높은 지위는 성격에 지속적인 영향을 준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강하며 지배적이고 경쟁적이며 리더의 자질을 보인다. 이러한 성격상의 특성이 고용주뿐만 아니라 유권자에게도 좋은 인상을 준다. 미국 대통령 선거를 보면 흔히 키가 큰쪽이 당선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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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여성의 지위는 미모로 결정된다. “잘생긴 자기주장과 자신에 대한 확신이 좀 더 강한 편이다. 어느 실험에서는 참가한 여성 피험자에게 무례한 대우를 한 것은 물론이고 가짜 인터뷰를 하는 도중 연구원이 방을 나가버리기까지 햇다. 매력이 떨어지는 여자들은 그냥 앉아서 기다리다가 평균 9분이 지나서야 불만을 제기했다. 반면에 매력적인 여성들은 3분 20초 만에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강한 자기주장을 초래한 것은 잘 생긴 외모 그 자체가 아니라 잘생긴 외모가 갖는 사회적 영향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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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경쟁하는 분야는 숱하다. 오로지 힘의 우열을 통해 얻은 정보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를 들어 아이들의 지위는 힘이나 외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가령 우등생은 비리비리하더라도 학교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한두가지만이 아니다. “힘으로 경쟁자들을 제압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본다. 제일 웃기거나 제일 똑똑한 사람이 될 수는 있지 않을까. 아니면 식물을 귀신같이 알아본다거나 골프 공 하나는 제일 잘 칠수도 잇다. 내가 제일 예쁠 수는 없다고? 그럼 제일 착한 사람이 될수는 있다. 이도저도 안 통하면 차라리 제일 비열해지는 것도 방법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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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아이들은 어떻게 자신의 지위를 아는가? “내가 제안하는 장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를파악하고 각기 다른 수많은 출처를 통해 수집된 정보를 통합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장치다. 지위체계가 늦게 가동되는 이유도 정보의 상당부분이 남의 의중을 읽는 메커니즘에 의해 제공되기 때문이다. 이 메커니즘은 네 살 무렵이 되어야 어느 정도 인상적인 업무를 수행할 정도가 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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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치는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작성된 인물사전을 읽는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인물사전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이득이므로 숨기려 한다. 그러므로 장치가 그리는 그림은 모호하다. 그러나 어쨌든 그렇게 남의 사전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타인이 자기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알면서 그들이 무엇을 평가하는 가를 알게 되며 자신의 지위를 알게 되고 사회적 피드백을 통해 성격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쌍둥이가 달라지는 것이다. 쌍둥이라도 미세한 차이가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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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들 집단에서 강자는 오직 한 명뿐이다. 여자아이들 집단에서 제일 예쁜 아이도 오직 한명이다. 만약 어떤 집단에 일란성 쌍둥이가 속해 있다면 설사 두 아이가 모두 힘이나 미모가 특출하더라도 둘 중의 하나는 어절 수 없이 두번째가 되고 하나는 주목구조으ㅢ 상위를 차지한다. 사람들로부터 응시의 눈길을 더 많이 받는 쌍둥이가 집단 내에서의 목소리도 커지고 그 결과 더욱더 많은 눈길을 끌게 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차이는 출발은 사소했지만 갈수록 벌어진다. 집단 내의 다른 구성원들에게서 받는 질문이나 평가도 둘 가운데 상대적으로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으며 이쪽이 쌍둥이의 대변인 노릇을 톡톡히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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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사회화체계와 지위체계의 변증법이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이라 말한다. 두 체계 때문에 노동분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개미와 달리 전적으로 가까운 혈연으로만 구성된 것은 아닌 집단에서 갈기 때문에 이기심이 동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 인간 종이 대박 신화를 일궈 낸 비결 가운데 하나도 반드시 혈연에 기반한 것은 아닌 대규모 집단을 ㅅ형성할 수 있었던 능력때문이다. 모든 집단의 딜레마는 구성원이 집단 동료를 희생하여 자신의 성공을 극대화할 것인지 아니면 집단을 지원하고 지키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인지 어려운 선택에 봉착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집단을 위해 일하거나 죽을 때 그러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사회화 체계였다. 집단의 성원들이 가까운 혈연으로 구성되어 잇던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체계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위체계가 제공하는 동기는 전적으로 이기적이다. 인간 집단에서 분산을 초래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기심이다. 지위체계는 노력하면 승산이 있는 분야하면 직접적인 경쟁을 유도하고 그 밖의 분야는 가능하면 경쟁을 피하고 보는 장기적인 전략을 꾀한다. 그리하여 개개인은 임자가 없는 틈새분야를 찾게 된다. 각기 다른 분야를 전문화하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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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결과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노동분업이 이루어지고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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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5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92/96/cover150/8990247365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247365</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Five Factor Model - [성격의 탄생 - 뇌과학, 진화심리학이 들려주는 성격의 모든 것]</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536311</link><pubDate>Thu, 17 Feb 2011 15: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53631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845759&TPaperId=4536311"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584/14/coveroff/899584575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845759&TPaperId=453631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성격의 탄생 - 뇌과학, 진화심리학이 들려주는 성격의 모든 것</a><br/>대니얼 네틀 지음, 김상우 옮김 / 와이즈북 / 2009년 12월<br/></td></tr></table><br/>본성인가 양육인가(nature or nuture)? 오랜 논쟁이다. 전공이 전공이라 본성보다는 양육이 결정적이라 배웠다. 인간은 문화 때문에 다른 동물과 다르다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형편없는 인간이 동물들의 위에 군림하는 이유는 문화에 맞춰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유연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때는 인간은 인간 스스로 만든 환경이 결정한다는 환경결정론이 상식이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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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화론과 유전학의 영향력이 인간을 다루는 분야, 특히 심리학으로 확장되면서 환경결정론은 구닥다리 헛소리가 되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심리학에선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 놓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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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들은 환경이 성격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 환경이 성격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는 근거도 부족하고 검증도 부족한 어려운 분야다. 그리고 이런 분야에서 가장 큰 성과를 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행동유전학자들이었다. 행동유전학자들은 유전적 요인이 성격 형성에 약 50%의 영향을 준다고 결론 내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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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이 같을 때 일란성 쌍둥이들의 성격이 이란성 쌍둥이들보다 비슷하다는 것은 일란성 쌍둥이들이 동일한 유전자 변형체를 50%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유전적 요인이 적어도 50%는 성격에 영향을 준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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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라면 그다지 대단할 것은 없다. 쌍둥이는 더 비슷하게 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환경이 달라도 일란성 쌍둥이가 닮은 정도는 같다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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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등으로 서로 다른 가정에서 자란 일란성 쌍둥이들의 성격은 함께 자란 일란성 쌍둥이들만큼이나 비슷했고, 떨어져 자란 이란성 쌍둥이들의 성격은 떨어져 자란 일란성 쌍둥이들보다 더 달랐다. 또 쌍둥이가 아닌 형제로서 각자 다른 가정에 입양된 형제들은 거의 또는 전혀 만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닮았고 같은 가정에 입양되엇지만 생물학적 부모가 다른 형제들과는 타인만큼이나 성격이 달랐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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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유전자가 성격의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다. 행동유전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성격의차이는 50% 정도 유전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일란성 쌍둥이도 성격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유전적으로 동일한 쌍둥이 끼리도 달라지는 것은 나머지는 환경이 만들 것이라는 예상은 직관적이고 옳다. 문제는 그 환경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최소한 가정환경은 아니다. 다른 가정에서 키워진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가정에서 키워진 일란성 쌍둥이가 성격이 다른 정도는 동일하고 “생물학적 부모가 서로 다른 입양 형제들 간의 성격 유사성은 거의 0에 가깝”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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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혼한 부모의 자녀들도 성인이 된후 이혼할 가능성이 높고 어린 시절 부모의 폭력을 경험한 사람이 자라서 더 폭력적이 된다는 연구결과는 어찌된 것인가? 이런 연구들도 유전적 영향으로 설명된다. 신경질적인 사람은 우울증과 이론의 가능성이 다른 사람보다 높고 그들 자녀도 그럴 가능성이 높은데 그것은 자녀들이 부모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 애당초 부모를 그런 사람으로 만든 유전형질을 자녀들이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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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성격 형성에 환경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환경이 무엇인지는 애매하다. 가정환경은 적어도 아니다. 다른 환경요인들은 “예컨데 아이가 동년배 집단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성격 형성에 미세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전적 영향보다 더 강한 설명력을 갖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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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유전된다는 것인가? 저자는 유전적으로 성격이 결정되는 것은 뇌구조와 뇌기능의 차이 때문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 차이에 따라 5대 성격특성(Five Factor Model, 스눕을 보았으면 이 모델을 알 것이다)의 값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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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특성 중 외향성부터 보자. 외향적인 사람이라면 보통 사교적이고 활동적이란 이미지가 떠오른다. “융이 묘사한 외향적인 사람은 외부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사색보다 활동을 좋아하고 자신의 생각에 빠지기보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며 끊임없이 밖으로 나가고 움직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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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외향적인 사람은 사교적인가?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외향성이 좋은 인간관계와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외향성은 파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사교활동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쓰는지 새 친구를 얼마나 쉽게 사귀는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되기는 하지만 그런 인간관계를 얼마나 잘 유지하는지 알려주는 지표는 아니다. 외향적인 파티에 가서 신나게 취하고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과 대판 싸움을 벌이는 부류드,ㄹ이다.” 대부분의 출세지향적인 사람들이 그렇듯이 (뒤에서 볼) 친화성이 낮은 외향적인 사람들은 “아무런 가책 없이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친구를 무시하기도 하며 이런 행위를 통해 뭔가 얻는 것이 있으면 그런 행동을 즐기기도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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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외향적인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사람 자체를 만나기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을 통해 얻을 ‘보상’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무엇인가 가치 잇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을 통해 얻어지기 때문이다. 보상추구성이 외향성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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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향적인 사람들은 야망을 가진 경우가 많고 높은 지위와 사회적 관심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여가활동도 좋아하지만 명예와 돈을 좇아 열심히 일할 준비도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목표를 추구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 활동적인 사람들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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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이 외향적인 사람을 외부에 관심이 있다고 정의한 것은 그들이 원하는 보상이, 자극이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의 기쁨, 흥분 등 긍정적인 감정을 즐긴다. 물론 누구나 같은 것을 원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외향적인 사람은 “더 큰 기쁨과 자극을” 느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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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이 말한 “내향적인 사람은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만 몰두하며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고 고독과 평화롭게 사색하는 것을 즐긴다.” 그들은 외향적인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끌리긴 하지만 “그런 일에서 느끼는 흥분은 상대적으로 적다. 약간 더 많은 돈이나 명예를 얻으려고 여유시간을 쓰는 일, 파티에 가려고 시내를 가로질러 차를 몰고 가는 일, 또는 새로운 섹스를 시도하기 위해 현재의 결혼생활을 포기하는 일을 시도할 가능성이 적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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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외향성과 내향성을 나누는 것은 도파민이 말한다. “도파민 관련 뇌 영역에서 반응성이 높은 사람이 외향적인 사람이다. 이런 뇌 영역은 보상을 기대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동기를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외향성 수치가 낮은 사람은 이 부분의 반응성이 낮고 따라서 보상을 찾아 나서는 일이 적다.” (구체적으로 이 뇌구조를 결정하는 유전자를 D4DR이라고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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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향성이 긍정적인 감정과 관련 있는 것처럼 신경성은 부정적인 감정과 관련 있다. 부정적인 감정이란 무엇인가? 공포, 걱정, 모욕감, 죄책감, 혐오, 슬픔 등의 감정이다. 긍정적인 감정이 존재하는 이유(설계특징)가 좋은 것을 추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면 부정적인 감정이 만들어진 목적은 먼 조상 때부터 나빴던 것을 피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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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신경성 수치가 지나치게 높을 때이다. 표현하는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분류되는, 보통 쓸데 없는 걱정이란 말로 가리키는 감정은 누구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균적으로 “쓸데없는 걱정의 비율이 80%라면 신경성 수치가 놓은 그룹은 99%다. 신경성 수치가 높은 사람들은 정말 사소한 걱정거리를 아주 오랫동안 고민한다. 예컨데 ‘최선을 다했지만 운이 안 좋았어’ ‘저 사람들은 틀렸어’ ‘다음엔 더 잘될 거야’하는 식으로 반응하기 보다 ‘그건 다 내 탓이야’ ‘모두 나를 싫어해’ ‘나는 절대 성공 못할 것야’하는 식으로 반응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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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성에 관계하는 유전자는 세로토닌 전달유전자이다. 이 유전자가 짧으면 “긴 유전자를 가진 사람보다 신경성 수치가 높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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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성은 충동을 통제하는 능력을 말한다. “술과 약물에 굴복하는 정도는 외향성 정도에 따라 다르다. 외향성은 스릴 넘치는 자극에 대한 뇌 보상시스템의 반응성으로 측정되는데 술, 약물, 도박은 모두 스릴 넘치는 자극이다. 그러나 중독을 유발하는 것은 외향성이 아니라 성실성 수치와 관련이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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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으로 무엇을 시작할 수 있다. 성실성은 그것을 시작하는 것이 멈추는 것과 관련된다. “많은 중독자들의 경우 마약주사로 얻는 쾌감은 사실상 없다. 뇌가 이미 마약에 아주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담배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끊지 못하는 것은 쾌감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이미 형성된 버릇을 끊을 통제 메커니즘이 약하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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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성과 관련된 뇌의 회로는 전에 금연 서적 리뷰에서 언급한 G0-NOGO를 관장하는 영역이다. “충동성은 성실성의 반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목표나 원칙을 위해 즉각적인 반응을 억제하는 전두엽 뇌 메커니즘의 반응성(활성화)의 정도라고 할 수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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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성이 다소 낮으면 일에도 영향을 준다. 성실성 수치를 가지고 전반적으로 직업적 성공을 가장 잘 예측할 수 있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성실성 수치가 높을수록 일을 더 잘한다.” 스눕에서도 언급하듯이 문제는 애석하게도 면접으로는 성실성을 체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성실성은 겪어봐야 알 수 있는 특성이다. “일하는 사람에게 많은 자율성이 부여될 경우 이러한 성실성의 혜택은 더욱 두드러진다. 성실성이 내적으로 설정된 목표나 계획을 추구하는 능력이라면 어떤 누구도 개입하지 않을 때 성실성은 더 빛을 발한다. 그러나 성실성 수치가 낮은 사람은 목표를 실행하지 않는 방편으로 일을 미루고 연기하는 경우가 많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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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이론(theory of mind)’은 마음읽기와 공감하기 두가지로 나뉜다. 그러나 마음읽기를 잘하면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다. 그러나 꼭 공감할 필요는 없다. 마음읽기와 공감하기는 서로 연관되지만 다른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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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하기도 역시 타인의 마음상태를 읽는 것이지만 그중 특히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경우다. 공감하기는 마음읽기에 관여하는 뇌 영역 일부 그리고 관련된 감정을 느끼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뇌 영역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두 기능은 중첩된 작용이다. 그러나 두가지 기능은 별개로 작동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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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화성은 두 기능에서 공감하기를 가리킨다. “친화성 수치가 높은 사람은 협조적이고 사람을 잘 믿고 타인의 감정을 잘 이해하는 반면 친화성 수치가 낮은 사람은 차갑고 적대적이며 온순하지 않다. 친화성 수치가 높다는 것은 타인의 마음상태에 관심을 갖는 경향이 강하고 이를 행동에 옮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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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으로 낮은 친화성을 보이는 사람이 바로 사이코패스다. 사이코패스는 완전히 자기중심적이며 죄책감이 없고 부정직하며 사랑할 줄 모르고 타인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만 이용하는 사람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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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친화성만 낮다고 사이코패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이코패스가 되려면 친화성과 함게 성실성, 신경성도 낮아야 한다. “친화성이 낮은 사람은 공감이 부족하다. 그러나 사려나 공포가 있으면 반사회적 행동을 억제할 수 잇다.” 3가지 특성이 모두 낮아 심리적 구속이 없어야 “심각하고 냉혹하며 잔인한 사이코패스적 행동이 나온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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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화성이 높은 사람은 누구나 환영한다. 친화성이 높아는 것은 타인의 이익을 고려하는 성향이 높다는 것이고 자신을 존중해주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그러면 친화성은 높을수록 좋은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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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회 및 인관관계 차원에서는 친화성이 높은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개인적인 성공의 차원에서는 불리하다. 40대의 기어 임원 4,000명의 성격과 경력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친화성이 높을수록 수입, 승진, 그리고 CEO가 되는 데 불리하다.” 친화성은 성공과만 반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성과도 반비례한다. “창조적인 일에서 실제로 성공한 ㄴ 사람은 친화성이 낮은 사람들이었다. 왜 그런가? 성공하려면 냉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공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정도로 냉철해야 하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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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감으로 어떤 사람이 좋으냐는 질문에 대해 여성들은 문화와 관계없이 무엇보다도 친철함과 공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도 상당히 중시한다. 그러나 친절함과 공감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과 충돌한다. 여성들이 이 두개의 서로 엇갈리는 가치를 어떻게 관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현실적인 문제다. 여성에게 화려한 삶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삶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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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개방성은 “가장 신비로우며 설명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흔히 개방성을 지능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는 지능과 개방성은 별개라고 말한다. 개방성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집단은 시인이나 예술가들이다. 그러나 예술적 감성과 지능은 상관성이 높지 않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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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성은 독창성 또는 창조성과 관련된다. 개방성이 그런 효과를 낳는 이유는 개방성이 ‘확산적 사고’이기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모든 개념과 지각된 내용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연상을 하면 독특한 믿음을 가질 수 도 있다. 생각을 청각으로 연상하면 환청이 되고 우발적인 사건을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연관시켜 생각하면 텔레파시를 느끼거나 신비한 관념을 갖게 된다. 본질적으로 개방성이 낮은 사람의 마음혹에서는 각각 분리되어 존재하는 서로 다른 의미영역과 의미처리 과정이 개방성이 높은 사람의 마음속에선 활발하게 상호작용하고 서로 관련된 것으로 인식된다.” 개방성이 높은 사람에게 자주 나타나는 “환청, 환영, 그리고 비과학적인(다시 말해 비상식적인) 믿음은 모두 이런 광범위한 연상에 따른 부작용이다. 언어를 독특하고 은유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영역에 속한 의미들을 서로 관련시키고 비언어적 사례를 통해 유사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시의 본질”이며 개방성의 본질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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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개방성의 심리적 기초가 뭐냐고 묻는다면 의미영역과 의미처리 네트웤 간의 광범위한 상호작용 즉 광범위한 연상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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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개방성이 높을수록 좋은가? 꼭 그렇지가 않다. 광범위한 연상이란 비용이 높다. ‘뇌의 분리된 회로들 간의 상호작용이 증가하면 회로들 각각의 전문영역에서 효율성이 떨어진다. 독특한 경험 수치와 지능이 약간 반비례하고 개방성 수치가 노ㅠ은 사람들의 마음이 쉽게 산란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개방성 수치가 낮은 사람이 개방성 수치가 높은 사람보다 실용적이고 실제적 문제 심지어 아주 어려운 문제도 더 잘 푼다. ‘전구 하나를 바꿔 끼우는데 얼마나 많은 시인이 필요한가’란 ㄴ 농담을 해도 될 정도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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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심각한 것은 개방성이 증가할수록 서로 멀리 떨어진 인식영역들이 더 많이 얽히고 그러다 보면 점점 이상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ㅓ. 미학적인 것과 신비주의적인 관념이 얽히고 신비주의적 관념은 비과학적인 관념이 되고 비과학적인 관념은 서서히 망상이 된다.” 그러므로 “개방성이 증가하면 예술가적 명성이 높아질 가능성은 있지만 정신병적 장애를 겪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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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5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584/14/cover150/8995845759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845759</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이에는 이 눈에는 눈 - [무엇을 해도 잘 풀리는 사람의 금연 기술]</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496673</link><pubDate>Sun, 06 Feb 2011 19: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49667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302643&TPaperId=449667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847/32/coveroff/896030264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302643&TPaperId=449667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무엇을 해도 잘 풀리는 사람의 금연 기술</a><br/>구보타 기소 지음, 홍성민 옮김, 서홍관 해제 / 황금부엉이 / 2010년 12월<br/></td></tr></table><br/>금연에 대한 책은 많다. 그러나 저자는 제대로 된 금연책은 드물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책들이 인내하라고 말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금연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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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뇌의 메커니즘을 이용하라고 저자는 말한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이유는 뇌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뇌가 원하는 것을 담배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대신해 주면 된다는 것이 이책의 기본 아이디어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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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피우면 체내에 들어간 니코틴이 아세틸콜린 리셉터에 달라붙고 아세틸콜린 리셉터가 전기신호를 일으켜 도파민이 나온다. 그러면 쾌감행동 시스템에 자용하여 쾌감이 생긴다. 니코틴이 뇌에 도달하는 단 7초만에 사람이 담배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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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는 마약이나 알코올과 달리 중독성은 없다. 단지 니코틴이 자극하는 쾌감 시스템 때문에 뇌가 니코틴을 원하는 의존증일 뿐이다. 그 의존증은 도박과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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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를 예로 들어보자. 우선 마권을 사고 그 마권이 맞으면 보상이 따라온다. 보상심리가 행동과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기회가 생기면 같은 행동을 하려고 한다. 질 때가 많아도 한번 당첨되면 쾌감행동 시스템이 강화되기 때문에 결국 도박을 그만둘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린다.” 도박은 물론 물리적인 중독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도박에 중독되는 것은 니코틴과 마찬가지 메커니즘에 따르며 담배와 마찬가지로 뇌가 의존증에 걸린 것이라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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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그 메커니즘을 극복할 것인가? 쉽지 않다. 의지로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의지력이니 인내니 하는 말로 금연에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흡연은 이처럼 쾌감을 동반한 반복 행동이라 끊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담배를 치우지 않는다’는 새로운 행동의 뇌내 네트웤을 만드는 것이 현명하다. 이미 구축된 행동 네트웤을 파괴하지 말고 새로운 네트웤을 만들어 금연하라.”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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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쾌감 시스템을 만들어줄 긍정적인 의존증을 새로 만들라 저자는 말한다. “우선 NOGO 금연법을 시작함녀서 동시에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취미를 갖는 것이다. 지금까지 해봤던 또는 해보고 싶었던 운동이 잇을 것이다. 할 만한 취미가 없다면 우선 달리기라도 하자. 달리기는 단순한 운동처럼 보이지만 하면 할수록 매력적인 운동이다. 습관이 되면 그만둘 수가 없다. 나는 매일 운동화를 신은 채 일한다. 운동화를 신고 있으면 기회가 생길 때마다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20년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달리기를 했다. 날씨가 나빠 달릴 수 없는 날은 기분이 불쾌해진다. 무사히 달리기를 하고 나면 오늘도 이만큼 달렸구나 싶어 저절로 만족감이 든다. 이것도 쾌감행동 시스템에 따른 일종의 의존증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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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달리려면 담배를 끊어 심폐기능을 높여야 한다. 따라서 금연을 지속할 좋은 동기가 생긴다. 뭐든 좋아하는 운동을 하면 금연의 괴로움을 이길 목표가 명확해진다. 그것이 요령이다.” 폐활량을 요구하는 노래부르기도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담배를 끊어야 더 잘하게 된다면 담배를 피우고 싶은 갱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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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가 충분해지면 이제 금연 자체의 쾌감행동 시스템을 구축하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시스템은 행동에 대한 개념화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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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에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인내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생각하기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뇌에게는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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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지면 멈추고 파란불이 켜지면 걸어가는 행위가 그렇다. 이때 GO/NOGO의 판단이 뇌안에서 이루어진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받을 것인가 그대로 있을 것인가? 바빠도 점심을 먹으로 갈 것인가 가지 않을 것인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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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안을 보면 이 GO/NOGO의 행동을 관장하는 부분이 있다. 주목할 점은 이 부분은 행동을 할 때뿐만 아니라 행동하지 않을 때에도 신경세포 네트웤가 강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대개는 행동할 때만 명령을 내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다르다. 행동할 때나 행동하지 않을 때나 뇌의 사령탑에서 행동 명령을 내린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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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금연을 ‘담배 피우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 ‘담배 피우지 않는 행동’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무런 보상없이 하고 싶은 것을 참는다면 그것은 인내가 아니라 오기다. 그런 인내는 이내 하기 싫어지고 억지로 하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러면 소극적인 행동밖에 못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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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인내를 적극적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렇게 정의하면 금연은 “다른 쾌감을 준비해 NOGO 명령을 강화하는 트레이닝”이라 재정의된다. 이런 전략은 금연 뿐 아니라 금주, 다이어트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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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담배 피우지 않는다’는 목표를 제대로 실행했다면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보상을 하자. 새로운 취미를 장려핶던 것은 이 보상에 관련짓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취미에 필요한 도구를 ‘사흘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일주일 동안 해내면’ ‘열흘 성공하면’ 하는 식으로 기간을 정해서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상으로 주는 것이다. 고령자에게 금연을 권할 경우 ‘담배를 피우면 손자와 놀지 마라’는 말이 효과적이다. 손자와 노는 것이 보상이 돼 금연을 할 수 잇다.” 정년퇴직하신 분이 실제 그렇게 금연에 성공한 경우를 보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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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기만 하는 금연은 누구나 실패한다. 뇌를 트레이닝한다는 생각을 갖고 적극적으로 보상을 준비해”야 극복할 수 잇다고 저자는 말한다. “뇌 안에서 행동하지 않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똑같이 ‘명령’으로 결정된다. GO 명령을 방해할 것이 아니라 적극저긍로 NOGO 명령을 내리자. 소극적인 방어자세가 아니라 앞으로 나가는 공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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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선 보상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금연에 쉽게 실패했던 이유는 조작적 조건화 팽동으로서 보상과 연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건강에 좋ㅇ른 것이지만 확실한 강화인자가 없다. 그 때문에 담배를 피웠을 때 도파민이 일으키는 쾌감의 강화인자 쪽을 택한다.”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847/32/cover150/8960302643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302643</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남은 날을 위하여 - [무조건 행복할 것 - 1년 열두 달, 내 인생을 긍정하는 48가지 방법]</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493653</link><pubDate>Sat, 05 Feb 2011 13: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49365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0927349&TPaperId=449365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839/91/coveroff/895092734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0927349&TPaperId=449365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무조건 행복할 것 - 1년 열두 달, 내 인생을 긍정하는 48가지 방법</a><br/>그레첸 루빈 지음, 전행선 옮김 / 21세기북스(북이십일) / 2010년 12월<br/></td></tr></table><br/>30대 후반, 40을 바라보는 시기를 제2의 사춘기라 한다. 정신없이 살다 문듯 정신을 차리는 시기란 뜻이다. 그 나이가 되면 그때까지 해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성공한 인생이었는지 알 수 있는 때이며 남은 생애가 어떠할지 보이는 때이다. 그런 때이기에 흔들리는 사람도 많다. 한 사람 몫을 하기 위해 제 몫을 찾기 위해 아둥바둥해오다 그때까지 해온 것을 돌아보고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나 자신에게 묻는 때이니 흔들리는 것도 당연하다. <br />
<br />
저자가 이책을 쓴 이유도 그렇다. 이책을 쓰기 전까지 저자는 잘 나가는 법조인의 경력을 쌓아가고 잇었다. 그러나 과연 앞으로 남은 시간도 그 일을 하며 살고 있는 자신이 그려지지 않는다. 저자는 남은 삶을 모두 쏟아부을 수 잇는 일로 작가를 선택한다. 이제 인생의 반환점에 이른 나이에 큰 모험이다. 불안할 수 밖에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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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그런 저자가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그때까지 별 신경을 쓰지 않던 당연한 것들, 습관대로 해오던 것들을 다시 돌아보며 쓴 일기라 보면 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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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구성은 잡다하다. 연초면 누구나 해보기 마련인 올해의 결심들을 항목별로 나열한 것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결심을 실천했다는 것이 다르다. 이책은 그 결심들을 어떻게 실천해나갔는가를 저자의 일기 형식으로 써나간 것이라 보면 된다. <br />
<br />
잡다하긴 정말 잡다하다. 남편에게 잔소리 하지 않기, 운동하는 습관들이기, 불면증 고치기, 떠넘기기 하지 않기, 사랑한다고 말로 표현하기, 가족에게 노래로 아침을 알리기 등등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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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둥절할지 모르겠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책으로 낼만한 것인가? 낼만하다. 저자가 그런 연초의 결심을 한 것은 사소한 그런 것들이 행복의 기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기에는 사소하지만 사실 실천하기는 힘들다. 행복이란 말은 거창하다. 그러나 그 행복은 사소한 것에서 만들어진다. 행복하기 어려운 이유가 그런 사소한 것들이 지키기 어렵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br />
<br />
이책은 그런 사소한 것들을 하기 위해 저자가 어떻게 해나가는지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책의 매력은 바로 그 구체성이다. 읽다보면 다른 사람도 그런 것이 어렵구나, 이렇게도 사는군, 흠 나라면 어떻게 할까, 그런 의미가 있었나 등등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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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5]]></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839/91/cover150/8950927349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0927349</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영적 체험의 생리학 - [긍정의 뇌 - 하버드대 뇌과학자의 뇌졸중 체험기]</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427962</link><pubDate>Wed, 12 Jan 2011 11: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42796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141676&TPaperId=442796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830/64/coveroff/899411416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141676&TPaperId=442796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긍정의 뇌 - 하버드대 뇌과학자의 뇌졸중 체험기</a><br/>질 볼트 테일러 지음, 장호연 옮김 / 윌북 / 2010년 12월<br/></td></tr></table><br/>이책은 저자의 뇌졸증 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뇌졸증은 드문 것도 아니고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뇌졸증을 겪은 뇌과학자라니, 얼마나 기막힌 처지인지.” 바로 그 기막힌 처지 때문에 이책은 특별하다. “내가 알기로 신경해부학자가 직접 중증 뇌출혉을 겪었다가 나은 사연을 기록한 책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사연은 뇌를 다룬 개론서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br />
<br />
뇌졸증으로 좌뇌가 망가진 저자는 언어능력을 잃어버리고 계산능력도 시간감각도 자아정체성도 잃어버린다. 끔찍한 일이다. 한 때 잘 나가는 하버드대의 학자가 세상과 소통할 수단을 모두 잃어버리고 아기만도 못하게 되다니.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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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타고난 능력이 체계적으로 하나씩 의식에서 사자져 가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보라.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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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여러분의 귀로 들어오는 소리를 분간하는 능력이 사라졌다고 생각해보자. 귀가 들리지 않는 게 아니다. 그저 소리가 혼돈스러운 소음으로 들리는 것뿐이다. 둘째로 눈앞의 대상의 명확한 형태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워보자. 눈이 먼 게 아니라 3차원으로 보거나 색을 알아보는 능력이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움직이는 대상을 따라가거나 대상들 사이의 명확한 경계를 구분하는 능력 또한 사라진다. 게다가 보통 때라면 그냥 지나칠 만한 냄새가 증폭되어 여러분을 압도하기 때문에 숨을 쉬기조차 어려워진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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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법을 다시 배우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도 힘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전에 읽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S를 보여주며 ‘이것은 S야’라고 말햇던 기억이 난다. ‘아니야, 엄마, 그건 그냥 꼬불꼬불 쓴 거잖아.’ 그러자 엄마는 ‘이 꼬불꼬불한 글자가 S야. 스으으라고 소리나지’라고 했다. 나는 어머니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냥 꼬불꼬불한 그림일 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앗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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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접시를 선반에 차곡차곡 정렬하려면 놀랍게도 계산 능력이 필요했다. 나는 접시를 깨끗이 씻는 일은 해냈다. 그러나 다 씻은 접시들을 작은 선반에 말끔하게 집어넣으려고 계산을 시작하자 아찔하리만큼 머릿속이 복잡해졋다. 그 방법을 알아내는데 거의 1년이 걸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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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내가 글자를 타이핑하고 나서(우뇌) 방금 쓴 것을 읽지 못한다는 점(좌뇌)이엇다.” <br />
<br />
“사람들이 내 박사학위를 빼앗아갈까? 해부학에 대해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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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예전처럼 회복되기까지 저자는 8년을 소비해야 했다. 뇌출혈로 죽은 뉴럼은 거의 없었다. 단지 뉴런들의 네트웤이 교란된 상태엿고 다시 네트웤을 잇기 위해 자극을 주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말은 간단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다시 유아기로 돌아가 사실상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할 판이었다. 나는 완전히 기본으로 돌아갔다. 걷는 법, 말하는 법, 읽는 법, 쓰는 법, 퍼즐을 맞추는 법을 배웠다. 신체의 회복 과정은 정상적인 발달 단계와 비슷했다. 각각의 단계를 익혀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식이엇다.” <br />
<br />
8년 동안 저자는 하나씩 예전 기억들과 능력들을 되살릴 수 있었고 다시 유능한 학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8년이 지나고 나서도 수리능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뇌출혈로 수리를 담당하는 뇌세포들이 파괴된 것이다. “4년째에 접어들자 뇌가 덧셈에 다시 반응을 보였다. 6개월 정도 더 지나자 뺄셈과 곱셈이 가능해졌다. 나눗셈은 5년차가 될 때까지도 힘들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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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자는 좌뇌가 망가진 끔찍한 상황에서도 예전처럼 돌아가야 하는지 망설여 졌다고 말한다. “회복하기로 마음먹는 것은 쉽지 않은 인지적 결단이었다. 나는 영원한 우주의 흐름에 몸을 맡긴채 더 없는 희열을 느끼는 것이 좋았다. 누군들 안 그랫겠는가? 그곳은 아름다웠다.. 내 영혼이 자유롭고 거대하고 평화롭게 빛났다. 나를 집어삼킨 희열에 빠져 회복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질문해야 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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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예전으로 회복되었을 때 “마침내 내 몸에 대한 자각이 유동체에서 고체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 자신이 유동체로 지각되던 때가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 자신이 유동체여서 좋았다. 내 영혼이 우주와 하나이며 주위의 모든 것과 함게 흘러가는 것이 황홀햇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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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느낀 황홀함을 요가학파들은 ‘자나(황홀경)’라 부른다.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만큼 내적인 영성을 철저하게 추구한 경우는 없었다. “축의 시대의 중요한 통찰들 가운데 하나는 ‘성스러움’이 단순히 ‘저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바닥에 내재한다는 것이었다.”(카렌 암스트롱) 이러한 깨달음은 브라만과 아트만이 같다는 ‘범아일여’로 정식화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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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범아일여를 깨닫기 위해선 폭력이 필요햇다. 저자가 뇌출혈로 좌뇌가 마비된 것과 비교될 만한 폭력이. 범아일여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스러운 것과 자기를 보호하려는 의식적인 자아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을 깨야 했다. “거룩한 존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끔 문명화된 개인의 정상적인 반응을 부정하고 세속적인 자아에 폭력을 휘둘러야 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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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수행자들은 정상적인 사고 과정을 파괴하고 사고와 감정을 없애소 깨달음에 저항하며 버티는 무의식적인 바사나를 제거할 때에만 ‘자아’가 해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카렌 암스트롱)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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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요가는 건강체조에 가깝다. 그러나 요가의 목적은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고 내공을 쌓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을 부수기 위한 기술로 개발된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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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수행의 초기단계에서 “수행자는 음악, 특히 스스로 연주하는 음악을 듣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웅장하고 고아대하며 차분하면서도 고상한 영역에 들어선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몸을 소유한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러한 느낌이 아마도 저자의 좌뇌가 무너졌을 때 느낌일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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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수행 최고의 경지는 이렇게 묘사된다. “수행자가 정말로 능숙하면 자나의 단계들을 넘어서 네 개의 아야타나(四空處)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상태는 매우 강렬해서 초기의 요가 수행자들은 자신이 신들이 사는 영역에 들어왔다고 느꼈다. 요가 수행자는 네 개의 정신 상태를 차례로 경험하면서 존재의 새로운 양식에 진입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무한에 대한 느낌(空無邊處)이다. 두 번째는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순수한 의식(識無邊處)이다. 세 번째는 부재에 대한 인식(무소유처(無所有處)이며 이것은 역설적으로 풍요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오직 재능이 뛰어난 요가 수행자만이 이 세 번째 아야타나에 이를 수 있었다. 이 단계는 ‘무(또는 空)’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세속적으로 경험하는 존재의 형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다른 존재가 아니다. 이것을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말이나 개념은 없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무’라고 부른 ㄴ 것이 더 정확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방 안에 걸어들어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묘사한다. 그럴 때 우리는 공허, 공간, 자유를 느끼게 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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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교에서도 신을 경험하는 일에 대해 비슷한 언급을 햇다.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인간의식에서 거룩한 것의 가장 고양된 방출상태를 ‘무’라고 했다. 신은 단지 또 다른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나 거룩함과 마주치는 것은 말로는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한 경험이기 때문에 언어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신비주의자들은 그 ‘다름’을 강조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이런 종류의 부정적 용어법을 채택했다. 요가 수행자들은 그들의 존재의 핵심에 자리잡고 잇는 무한한 ‘자아’를 마침내 경험하게 되었다고 상상했을 것이다.” (카렌 암스트롱)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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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느낀 평화와 기쁨, 행복, 우주와의 일체감은 영적 체험의 느낌과 거의 일치한다. 물론 저자가 요가의 최고 경지를 느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경험은 영적 체험이 신경학적인 근거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체험은 뇌과학 서적에서 종교적 체험을 설명할 때 거론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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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혹은 영적 경험의 밑바탕에 있는 신경해부 구조가 확인되었다. 우리가 개인의 존재에서 벗어나 우주(신, 열반, 극도의 행복감)와 하나가 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 뇌의 어느 부위가 관여하는지 확인된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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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수도승과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녀들을 불러 SPECT 기계 안에 들어가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올리게 햇다. 이어 명상이 절정에 달하거나 신과의 합일을 느끼는 순간, 실을 잡아당시도록 했다. 이 실럼을 통해 뇌의 특정 부위의 신경 활동이 달라지는 것이 확인되었다.” 좌뇌의 언어중추와 공간지각, 자아중추가 침묵한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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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경험은 저자의 좌뇌가 마비되고 우뇌가 의식을 지배할 때와 비슷한 상태이다. 저자가 “몸을 고체가 아니라 유동체로 지각하고 우주와 하나가 되는 기분을 느낀 것”이 신경학적으로 설명 가능해진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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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세상 모든 번뇌로부터의 해방감”이라 말하며 “열반과 같은 느낌일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책에서 자신의 체험을 종교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단지 자신의 체험을 삶에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교훈으로 받아들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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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뇌졸증 경험으로 축복에 가까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누구든 언제라도 깊은 마음의 평화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열반과도 같은 경험이 우뇌의 의식 속에 존재하며 언제라도 스스로 뇌의 그 부분에 접속할 수 있다고 믿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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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졸증이 나에게 가르쳐준 최고의 것은 감정을 몸으로 느끼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기쁨의 감정이 내 안에 있었다. 평화의 감정이 내 안에 있었다.” 그러나 좌뇌의 힘이 점차 강해지면서 예전의 감정이 돌아왔다. “판단은 몸이 어떻게 느끼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분노, 좌절, 공포 같은 감정이 몸 안에 차오르면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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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는 어떤 감정 프로그램을 되찾고 싶고 어떤 감정 프로그램(조바심, 비난, 불친절)에 발언권을 부여하고 싶지 않은지 무척 까다롭게 골랐다. 뇌졸증은 내가 세상에서 누구이고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지 선택할 수 있게 해준 놀라운 선물이었다. 사고 이후 나는 내게 선택의 권리가 있다는 걸 실감한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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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5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830/64/cover150/8994114165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141676</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때로는 숨 쉴 시간이 필요하다 - [인생사전 - 당신의 운명을 바꿔줄 위대한 질문 100]</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402479</link><pubDate>Tue, 04 Jan 2011 15: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40247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4013261&TPaperId=4402479"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818/58/coveroff/899401326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4013261&TPaperId=440247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생사전 - 당신의 운명을 바꿔줄 위대한 질문 100</a><br/>좌우명연구회 지음, 박혜령 옮김 / 토네이도 / 2010년 11월<br/></td></tr></table><br/>국민학교 다닐 때 교문을 들어서면 수위실 옆 공터에 신문팔이들이 앉아있엇다. 요즘은 나오지 않는 소년신문을 팔기 위해서였다. 그때 그 신문을 사서 본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러나 집에서 꽤 오랫동안 소년동아일보(제호가 맞는지는 모르겠다)를 구독햇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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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 신문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여러가지가 실려 있었는데 즐겨 봤었던 것은 연재만화와 과학상식이라든가 역사상식 등이었던 것같다. 애들용답게 삽화가 재미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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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에도 챙겨봤던 것이 오늘의 명언 (제목이 아마 맞을 것이다)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날 그날 짧막한 명언들이나 속담 또는 4자성어등이 실렸는데 영어원문이 같이 실리는 것이 기본 포맷이었다. 그때 외었던 것으로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Everybody’s business is nobody’s business 정도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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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는 명언을 모아 편집하는 책들도 상당히 많았다. 지금도 집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백과사전 크기에 1000 페이지가 세계명언사전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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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기획이 당시에 많았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사이 소리소문 없이 그런 기획이 사라진 이유도 모르겠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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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왜일까? 사람들이 여유가 없어진 것이 아닐까? 명언 같은 짧은 말은 내용을 담기에는 너무 가볍다. 가벼운 말이기에 내용이 있으려면 무게를 읽는 사람이 채워넣어야 한다. 그러기엔 사람들이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나부터가 뜬 구름잡는 듯한 아포리즘 형식은 읽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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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을 읽던 어릴 때를 지나면서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소화불량과 연관된 것이었다. 최대한 많이 우겨넣고 소화되지 않는 것은 그냥 흘려버리는 식이었다. 아포리즘 같이 되새김질을 하면서 소화될 때까지 씹는 것은 논외의 일이 되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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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소화불량이 걸린다. 정보는 늘지만 정보로 받아들일 지식이 지혜가 없는 말은 그냥 배설되어 잊혀지는 것이다. 읽어도 읽어도 현명해지는 것과는 성장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조금만 느리게 살 때가 된 것일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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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느리게 살려고 해도 어디서 무엇부터 해야할지 막막하다. 생각을 느리게 하는 것은 어떨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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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시간에 대해 과서는 뒤에, 현재는 지금, 미래는 앞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데스산맥에 살고 있는 인디언 부족들은 반대로 생각한다. 아이마라족은 과거의 위치를 물으면 시야의 앞쪽을 가리킨다고 한다. 과거의 사건들은 이미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볼 수 있는 앞쪽에 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미래의 사건들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등 뒤에 있다고 생각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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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간개념은 아이마라족의 생활에 깊숙이 배어 있다. 그들에게 ‘내일’은 ‘사람 등 뒤의 어느 날’이다. 오랜 조상은 앞쪽 멀리 있고, 미래 세대는 어깨 뒤 저편에 있다. 그러므로 자신보다 앞서 있는 조상들의 지혜에서 인생을 배우고 깨닫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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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란 챕터에 실린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앞에는 10여개의 아포리즘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시간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 역류하지 않고 흘러가는 사람은 행복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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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이야기와 아포리즘들을 편집한 책이다. 예전에 많이 나오던 책들과 달리 아포리즘만 담은 것이 아니라 이야기도 같이 편집한 것이 특이하다. 그러나 아포리즘에 해설이 없듯이 이야기에도 해설은 없다. 이야기가 위에서 보듯이 아포리즘과 내용적으로 연관은 있지만 딱히 해설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아포리즘을 나열하듯이 이야기도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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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을 읽으면서 메워넣으라는 말이 된다. 목차를 보면 주제별로 아포리즘을 편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모아놓은 아포리즘들은 서로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충돌하는 경우도 많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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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성한 편집이다. 그러나 엉성하기에 이책은 가치가 있다. 엉성하게 짜인 사이 사이를 띄엄 띄엄 천천히 읽어가면서 의미를 메워넣다보면 그 가치를 알게 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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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읽어갈 수 밖에 없기에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생각을 하면서 여유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책읽기의 명상이라 할 수 있겠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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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면 여전히 바쁠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스스로에게 느리게 느리게를 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점이 이책의 가치일 것이다.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818/58/cover150/8994013261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4013261</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박세리 키드의 이유: 타고나는 재능은 없다 - [베스트 플레이어 - 왜 우리는 열광하고 그들은 세상을 지배하는가]</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334405</link><pubDate>Mon, 13 Dec 2010 17: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33440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6541419&TPaperId=4334405"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822/63/coveroff/8996541419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6541419&TPaperId=433440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베스트 플레이어 - 왜 우리는 열광하고 그들은 세상을 지배하는가</a><br/>매슈 사이드 지음, 신승미 옮김, 유영만 해제 / 행성B웨이브 / 2010년 11월<br/></td></tr></table><br/>“박세리 선수는 내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었어요. 당시에 나뿜난 아니라 내 또래 많은 여자아이들이 골프를 알게 됐고 박세리 선수처럼 됙고 싶어했죠. 경기는 한국 시간으로 새벽에 열렸는데 잠이 덜 깬 상태였던지라 재방송을 여러 번 봤어요. 중계방송이 수없이 재방송됐거든요. 나는 박세리 선수가 한국 국민에게 해준 일이 정말 기뻐요. 내게도 큰 영감을 줬고요.”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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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US 오픈에서 우승한 박인비의 말이다. 박세리 이후 한국 출신의 여자선수들을 ‘박세리 키드’라 부른다. 저자는 비슷한 사례를 여러가지 들고 있다. 그리고 저자 자신이 그런 예의 하나이다. <br />
<br />
“이런 패턴은 1980년대 내 고향 레딩이 탁구에서 거둔 경이로운 성공에서도 나타난다. 1970년에 레딩 출신의 어린 소년 사이먼 힙스가 유럽 유소년 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땃다. 10년 후 레딩의 작은 거리인 실버데링 로드에서 배출된 베스트 플레이어ㅓ들은 영국 전 지역에서 배출된 수보다 더 많았다.” 저자도 그중의 한명이다. 저자는 영국대표로 올림픽에 두번 출전했고 영연방 탁구 단식에서 3차례 우승을 했다. <br />
<br />
저자는 이러한 패턴이 일어날 수 있는 이유를 동기라 말한다. ‘나도 할 수 있다’는 동기를 준다는 것이다. 박세리 키드들이 처음부터 재능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저자가 살던 빈민가 꼬마들이 재능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웃집 누구가 할 수 있다면 내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br />
<br />
저자는 그런 동기화는 ‘고정형 사고방식’을 깨버린다고 말한다. 탁월함은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사고방식 말이다. 저자는 눈에 보이는 재능은 ‘빙산의 착각’이라 말한다. 저자는 묻는다 “마이클 조던의 나이키 광고를 기억하는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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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9,000개 이상의 슛을 실패했다. <br />
거의 300개의 게임에서 패배했다. <br />
승리에 쐐기를 박을 26개의 슛을 놓쳤다. <br />
나는 아주 많은 실패를 거듭한 삶을 살았다.” <br />
<br />
마이클 조던의 화려한 전적 아래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실패가 깔려 있다. 바닷물 아래 숨겨진 빙산처럼 말이다. 빛나는 성공과 재능에는 실패가 있다. 그리고 성공은 재능은 실패가 있어야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저자는 베스트 플레이어와 평범한 플레이어의 차이는 “유전이나 개성이나 가족배경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의 차이는 훈련에 있었다. “사람들은 난이도가 높은 점프를 하면 최고의 선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히 어려운 점프를 시도한다고 뛰어난 경지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베스트 플레이어는 자신의 능력에 비해 훨씬 어려운 점프를 시도한다.” 바로 실패를 의도한다는 말이다. “최고의 스케이팅 선수는 훈련을 할 때 보통 선수보다 훨씬 자주 넘어진다. 기량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실패라는 기반 위에 쌓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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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실패의 결과로서 눈에 보이는 빙산의 일각을 타고난 것이라 ‘착각’하는 사고방식, 재능을 타고난 소수가 베스트 플레이거가 된다는, 재능은 고정되어 있다는 사고방식을 ‘고정형 사고방식’이라 부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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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고방식은 지능이라든가 체력이라든가 운동신경이라든가 타고난다고 생각하는 것을 칭찬한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재능이 많아서 힘을 들이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면 열심히 훈련할 필요가 없잔아?” 그리고 그런 칭찬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그리고 그렇ㄹ게 자란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신의 ‘재능’을 부정하는 실패를 기피한다. <br />
<br />
“엔론은 재능을 완전히 신뢰함으로써 불행을 자초하는 일을 저질렀다. 재능을 숭배하는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비범한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행동하라고 강요한 셈이다. 엔론은 직원에게 고정형 사고방식을 강요했다. 그러나 고정형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거나 바로잡지 않는다. 그저 곧바로 거짓말을 할 뿐이다.” <br />
<br />
저자는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마이클 조던처럼 수많은 실패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문제라는 것이다. 저자는 타고난 능력보다 지금의 능력보다 노력을 칭찬해야 한다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실패를 하더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 자체를 칭찬해야 한다고 말한다. 재능보다 노력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을 저자는 ‘성장형 사고방식’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영리하게 문제를 풀었구나’라 말하지 말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구나’라고 말해야 한다고 본다. <br />
<br />
“시도해봤는가? 실패해봤는가? 문제없다.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멋지게 실패하라.” 저자는 베케트의 말을 인용한다. <br />
<br />
평범한 삶에선 고정형이든 성장형이든 문제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베스트 플레이어가 목표일 때이다. 저자는 베스트 플레이어의 길은 베케트의 말을 따라가는 길이라 말한다. 그 길은 “가파르고 험난하며 고되다. 지나치게 길고 장상에 다다르려면 수천에서 수만 시간 동안 애간장 태우는 노력을 해야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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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성장할 기회로 보는 성장형 사고방식이 아니면 그 길고 긴 고난의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남들에겐 재능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숨겨진 실패의 결과이며 따분한 연습의 결과라는 것을 인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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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최고의 골프 선수 아홉 명을 분석한 내용에 따르면 이들이 국제대회에서 첫 우승을 한 시기는 골프를 시작하고 평균 10년이 지난 스물다섯 무렵이었다. 이와 동일한 결고가ㅏ 수학, 테니스, 수영, 장거리 경주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났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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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학계에도 적용된다.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과학자 120명과 가장 유명한 시인 및 작가 123명을 조사한 연구에서 처녀작을 낸지 10년 뒤에 최고의 성과물이 나왔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br />
<br />
10년 이란 시간은 1만시간의 연습량으로 환산된다. 베스트 플레이어와 보통 플레이어를 나누는 것은 그 시간이지 유전이 아니다. 그 지루하고 답답하고 힘든 시간을 견뎠는가가 최고와 평범을 나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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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만이 최고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시간을 견뎌내면 경지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뛰어난 경지에 오르는 것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성공하려면 경쟁의 순간에 자신의 기량을 최고의 상태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숙달하기 어려운 기술이며 종종 베스트 플레이어와 평범한 사람을 나누는 요소가 된다. <br />
<br />
이런 요소는 단박에 감지된다. 베스트 플레이어는 걱정과 불안, 의심과 긴장을 모두 초월해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고 상대 선수를 무력하게 만든다. 베스트 플레이어는 기술의 안정감과 정신의 예민함을 유지한다. 깊고 복잡한 이 기술은 수천 시간에 걸쳐 형성되며 경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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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능력을 자신을 속이는 플라시보 효과라 본다. 구체적으로 이 능력은 증거를 무시하는 ‘낙관주의’이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이 이길 것이라는 데 대한 ‘근거는 없지만 유용한 믿음’이다. <br />
<br />
“선수 시절 나는 팀 회의에 수십 번 참석했는데 그때마다 팀원들이 부정적인 일을 마음에서ㅓ 금세 떨쳐내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후 뛰어난 경지에 오른 수십 명의 선수를 인터뷰할 때도 그들이 증거에 맞춰 믿음을 바꾸는 게 아니라 믿음과 일치하도록 증거를 조작하고 최고 기량에 방해가 될 경험을 걸러내는 것을 보며 그 능력에 감탄하곤 했다. <br />
<br />
그러ㅓ면 그 능력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1단계에서 선수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보호하는 ‘긍정적인 점’을 찾아낸다. 2단계에서는 이전 시합에서 드러난 부정적인 면을 통합해 약점을 강화하는 훈련을 한다. 3단계에서는 다시 자신에 대한 믿음을 쌓는 방향으로 초점을 바꾸어 다음 시합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도록 한다. 프랑스 아스날 축구팀의 감독 아르센 웽거는 “활동 주기 동안에 자신의 믿음을 변경할 능력이 없ㅇ르면 운동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제대로 기량을 발휘하기 어렵다.”고ㅗ 말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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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다보면 현실과 다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긍정적인 점을 강조하고 부정적인 점을 억눌러야 하며 과거의 충격적인 경험을 차단해야 한다. 또는 현실과 다른 그럴싸한 이야기를 꾸며내기도 해야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생존하기 위해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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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이책의 주된 골자이다. 이외에도 이책에는 약물남용이라든가 중요한 경기에서 얼어버리는 초킹현상이라든가 운동선수들의 자동화된 암묵지와 직관에 대한 것이라든가 여러가지가 나온다. 이책의 주된 내용은 스포츠 심리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내용 중에서도 이책은 베스트 플레이어가 되기 위한 심리적 메커니즘에 집중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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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자 자신이 베스트 플레이어 였기 때문에 저자의 설명은 현실감이 풍부하다. 저자 자신의 경험과 저자가 인터뷰한 내용들 그리고 스포츠 심리학의 연구결과들이 다양하게 인용된다. 그러나 저자 자신이 최고 경지의 선수였기 때문에 그 인용들은 단순한 인용에 그치지 않고 저자의 경험을 통해 해석되면서 생생하게 살아나며 그렇기 때문에 쉽게 이해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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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재미있고 쉽다는 말이군. 그러면 이책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책의 가치는 다른 분야에도 스포츠 분야의 논리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데 있다. 위의 요약에서 언급했듯이 재능이 만들어지는 논리는 스포츠나 예술이나 학문이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최고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만한 책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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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5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822/63/cover150/8996541419_2.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6541419</link></image></item><item><author>Cura</author><category>수신/심리</category><title>걱정도 팔자 - [이렇게 인생을 열어나가라 - 카네기 인간관계론]</title><link>http://blog.aladin.co.kr/706688166/4321269</link><pubDate>Wed, 08 Dec 2010 13: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706688166/432126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5070484&TPaperId=4321269"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821/40/coveroff/897507048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5070484&TPaperId=432126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렇게 인생을 열어나가라 - 카네기 인간관계론</a><br/>데일 카네기 지음, 김영선 옮김 / 문장 / 2010년 11월<br/></td></tr></table><br/>“나는 미주리 주의 한 농장에서 자랐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버찌씨를 따는 것을 도와드리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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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 왜 우는 거니?’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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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 이렇게 묻자 나는 울면서 ‘산 채로 매장될까봐 걱정되어 그래요’라고 말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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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나는 모든 일이 고통스러웠다. 비 오는 날에 번개가 치면 벼락을 맞아 죽지 않을까 걱정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 굶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죽으면 지옥으로 떨어질까 걱정햇다. 노자를 벗고 인사를 하면 여자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웠다. 그리고 나와 결혼해줄 여자는 한 사람도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결혼 후에는 어떤 말을 해야 좋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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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내가 지금까지 걱정해온 것 가운데 99%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엇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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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을 보통 쓸 데 없는 걱정이라 한다. 걱정도 팔자인 것이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가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는 것을 모른 채 생매장해버릴까 걱정을 하다니.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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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자의 팔자가 과연 남의 팔자일까? 그렇게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책은 바로 우리의 쓸 데 없는 걱정에 관한 책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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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가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의 90%는 아무 의미없는 무용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또 걱정하고 고민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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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럴까? 쓸데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럴까? 사람이니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다. 이책은 어떻게 하면 그런 쓰잘 데 없는 걱정으로 소중한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는가에 관한 책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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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단순히 걱정도 팔자라며 그런 것이 쓰잘 데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런 것은 다 알고 있는 말이니 시간낭비이다. 그보다 저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그런 팔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작은 팁들을 보여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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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보자. 저자가 캐리어 씨의 ‘마법의 공식’이라 부르는 것을 읽은 사람의 이야기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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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서운 협박을 받고 있었다. 내가 경영하는 석유회사에는 여러 대의 배달용 트럭과 운전사들이 있었다. 그 즈음 물가 관리국은 거래처에 주는 배급량을 규제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몇몇 운전기가가 거해처에 주는 배급량을 속여서 남은 석유를 뒤로 빼돌린 모양이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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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런 부정행위를 알게 된 것은 어느 날 가독관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사건을 묵인해 줄테니 뒷돈을 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증거서류를 보이면서 돈을 내지 않으면 고발하겠다고 협박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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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이 신문에라도 나게 되면 신용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회사가 무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24년전에 아버지가 새운 자랑스런 회사가… 고민했다. 사흘 동안 식사도 잊고 잠도 자지 못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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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일요일 밤. 우연히 카네기 씨의 강좌에 나갔을 때 얻은 책을 집어들고 캐리어 씨의 ‘최악의 사태에 직면하라’는 대목을 읽게 되엇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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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돈을 주지 않아 그자가 검사에게 고발한다면 최악의 경우는 어떻게 될 것인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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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망한다. 그것이 최악의 경우이다. 교도소에 들어갈 리는 없다. 업계에서 신용을 잃고 회사가 문을 닫게 될 뿐이다. 좋다. 그렇다면 회사는 망한다. 그건 그렇다고 하자.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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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문을 닫게 되면 무언가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나는 석유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잇다. 일자리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자 나는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사흘 밤낮을 나를 괴롭히던 걱정의 안개가 옅어지고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일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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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제 3단계인 ‘최악보다는 나은 해결책’에 직면할 수 있을만큼 머리가 맑아졌다. 그래서 해결책을 생각하는 동안 아주 새로운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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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를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내가 몰랐던 해결책을 찾아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변호사는 검사를 찾아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라고 했다. 검사는 내 이야기를 듣고 이런 협박건은 예전부터 자주 있었으며 감독관이란 자는 수배 중인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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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험 이후 나는 난처한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캐리어의 공식을 정용하고 있다.”캐리어의 공식은 이렇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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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무엇인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br />
2.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br />
3. 그런 뒤에 조용히 그 최악의 상황을 개선해간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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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15년 동안 나는 하루의 반나절을 회의로 소모햇다. 챗바퀴 돌듯 끝도 없고 결말도 없는 회의 때문에 나는 녹초가 되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인가? 방법이 있었다. 간단한 트릭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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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나에게 문제를 제출하고자 하는 사람은 다음의 4가지 물음에 답하는 각서를 제출하라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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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문: 그 문제란 무엇인가? <br />
제2문: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가? <br />
제3문: 그 문제 대한 모든 가능한 해법은 무엇인가? <br />
제4문: 당신이 제안하는 해법은 무엇인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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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부터 나의 동료들은 어떤 문제를 갖고 나를 찾아오지 않았고 그들이 4가지 질문에 답하려면 온갖 사실을 파악하고 그 문제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을 다 한 뒤에는 의논이니 하는 것이 필요가 없었다. 적당한 해법이 토스터에서 빵이 튀어나오듯 나왔기 때문이다. 회의시간은 1/3로 충분햇다. 순서 있게 논리적인 방법을 거쳐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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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회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고민하고 의논하는 데 시간을 소모하지 않는다. 모든 일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의논보다는 실행에 중점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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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걱정과 고민은 회의이다. 그리고 그 회의라는 것은 엄청난 증오를 받으면서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소개한 캐리어의 공식처럼 회의를 없애버리는 것도 간단한 팁으로 충분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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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잇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책은 걱정도 팔자야 란 무책임한 말만 던져놓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 그 팔자를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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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5 <br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821/40/cover150/8975070484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5070484</link></image></item></channel></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