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뇌 - 하버드대 뇌과학자의 뇌졸중 체험기
질 볼트 테일러 지음, 장호연 옮김 / 윌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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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책은 저자의 뇌졸증 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뇌졸증은 드문 것도 아니고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뇌졸증을 겪은 뇌과학자라니, 얼마나 기막힌 처지인지.” 바로 그 기막힌 처지 때문에 이책은 특별하다. “내가 알기로 신경해부학자가 직접 중증 뇌출혉을 겪었다가 나은 사연을 기록한 책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사연은 뇌를 다룬 개론서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뇌졸증으로 좌뇌가 망가진 저자는 언어능력을 잃어버리고 계산능력도 시간감각도 자아정체성도 잃어버린다. 끔찍한 일이다. 한 때 잘 나가는 하버드대의 학자가 세상과 소통할 수단을 모두 잃어버리고 아기만도 못하게 되다니.

“여러분의 타고난 능력이 체계적으로 하나씩 의식에서 사자져 가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보라.

먼저 여러분의 귀로 들어오는 소리를 분간하는 능력이 사라졌다고 생각해보자. 귀가 들리지 않는 게 아니다. 그저 소리가 혼돈스러운 소음으로 들리는 것뿐이다. 둘째로 눈앞의 대상의 명확한 형태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워보자. 눈이 먼 게 아니라 3차원으로 보거나 색을 알아보는 능력이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움직이는 대상을 따라가거나 대상들 사이의 명확한 경계를 구분하는 능력 또한 사라진다. 게다가 보통 때라면 그냥 지나칠 만한 냄새가 증폭되어 여러분을 압도하기 때문에 숨을 쉬기조차 어려워진다.”

“읽는 법을 다시 배우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도 힘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전에 읽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S를 보여주며 ‘이것은 S야’라고 말햇던 기억이 난다. ‘아니야, 엄마, 그건 그냥 꼬불꼬불 쓴 거잖아.’ 그러자 엄마는 ‘이 꼬불꼬불한 글자가 S야. 스으으라고 소리나지’라고 했다. 나는 어머니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냥 꼬불꼬불한 그림일 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앗다.”

“깨끗한 접시를 선반에 차곡차곡 정렬하려면 놀랍게도 계산 능력이 필요했다. 나는 접시를 깨끗이 씻는 일은 해냈다. 그러나 다 씻은 접시들을 작은 선반에 말끔하게 집어넣으려고 계산을 시작하자 아찔하리만큼 머릿속이 복잡해졋다. 그 방법을 알아내는데 거의 1년이 걸렸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글자를 타이핑하고 나서(우뇌) 방금 쓴 것을 읽지 못한다는 점(좌뇌)이엇다.”

“사람들이 내 박사학위를 빼앗아갈까? 해부학에 대해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

이후 예전처럼 회복되기까지 저자는 8년을 소비해야 했다. 뇌출혈로 죽은 뉴럼은 거의 없었다. 단지 뉴런들의 네트웤이 교란된 상태엿고 다시 네트웤을 잇기 위해 자극을 주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말은 간단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다시 유아기로 돌아가 사실상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할 판이었다. 나는 완전히 기본으로 돌아갔다. 걷는 법, 말하는 법, 읽는 법, 쓰는 법, 퍼즐을 맞추는 법을 배웠다. 신체의 회복 과정은 정상적인 발달 단계와 비슷했다. 각각의 단계를 익혀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식이엇다.”

8년 동안 저자는 하나씩 예전 기억들과 능력들을 되살릴 수 있었고 다시 유능한 학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8년이 지나고 나서도 수리능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뇌출혈로 수리를 담당하는 뇌세포들이 파괴된 것이다. “4년째에 접어들자 뇌가 덧셈에 다시 반응을 보였다. 6개월 정도 더 지나자 뺄셈과 곱셈이 가능해졌다. 나눗셈은 5년차가 될 때까지도 힘들었다.”

그러나 저자는 좌뇌가 망가진 끔찍한 상황에서도 예전처럼 돌아가야 하는지 망설여 졌다고 말한다. “회복하기로 마음먹는 것은 쉽지 않은 인지적 결단이었다. 나는 영원한 우주의 흐름에 몸을 맡긴채 더 없는 희열을 느끼는 것이 좋았다. 누군들 안 그랫겠는가? 그곳은 아름다웠다.. 내 영혼이 자유롭고 거대하고 평화롭게 빛났다. 나를 집어삼킨 희열에 빠져 회복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질문해야 했다.”

거의 예전으로 회복되었을 때 “마침내 내 몸에 대한 자각이 유동체에서 고체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 자신이 유동체로 지각되던 때가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 자신이 유동체여서 좋았다. 내 영혼이 우주와 하나이며 주위의 모든 것과 함게 흘러가는 것이 황홀햇다.”

저자가 느낀 황홀함을 요가학파들은 ‘자나(황홀경)’라 부른다.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만큼 내적인 영성을 철저하게 추구한 경우는 없었다. “축의 시대의 중요한 통찰들 가운데 하나는 ‘성스러움’이 단순히 ‘저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바닥에 내재한다는 것이었다.”(카렌 암스트롱) 이러한 깨달음은 브라만과 아트만이 같다는 ‘범아일여’로 정식화된다.

그러나 범아일여를 깨닫기 위해선 폭력이 필요햇다. 저자가 뇌출혈로 좌뇌가 마비된 것과 비교될 만한 폭력이. 범아일여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스러운 것과 자기를 보호하려는 의식적인 자아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을 깨야 했다. “거룩한 존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끔 문명화된 개인의 정상적인 반응을 부정하고 세속적인 자아에 폭력을 휘둘러야 했다.

요가 수행자들은 정상적인 사고 과정을 파괴하고 사고와 감정을 없애소 깨달음에 저항하며 버티는 무의식적인 바사나를 제거할 때에만 ‘자아’가 해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카렌 암스트롱)

우리가 아는 요가는 건강체조에 가깝다. 그러나 요가의 목적은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고 내공을 쌓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을 부수기 위한 기술로 개발된 것이다.

요가 수행의 초기단계에서 “수행자는 음악, 특히 스스로 연주하는 음악을 듣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웅장하고 고아대하며 차분하면서도 고상한 영역에 들어선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몸을 소유한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러한 느낌이 아마도 저자의 좌뇌가 무너졌을 때 느낌일 것이다.

요가 수행 최고의 경지는 이렇게 묘사된다. “수행자가 정말로 능숙하면 자나의 단계들을 넘어서 네 개의 아야타나(四空處)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상태는 매우 강렬해서 초기의 요가 수행자들은 자신이 신들이 사는 영역에 들어왔다고 느꼈다. 요가 수행자는 네 개의 정신 상태를 차례로 경험하면서 존재의 새로운 양식에 진입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무한에 대한 느낌(空無邊處)이다. 두 번째는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순수한 의식(識無邊處)이다. 세 번째는 부재에 대한 인식(무소유처(無所有處)이며 이것은 역설적으로 풍요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오직 재능이 뛰어난 요가 수행자만이 이 세 번째 아야타나에 이를 수 있었다. 이 단계는 ‘무(또는 空)’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세속적으로 경험하는 존재의 형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다른 존재가 아니다. 이것을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말이나 개념은 없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무’라고 부른 ㄴ 것이 더 정확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방 안에 걸어들어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묘사한다. 그럴 때 우리는 공허, 공간, 자유를 느끼게 된다.

일신교에서도 신을 경험하는 일에 대해 비슷한 언급을 햇다.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인간의식에서 거룩한 것의 가장 고양된 방출상태를 ‘무’라고 했다. 신은 단지 또 다른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나 거룩함과 마주치는 것은 말로는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한 경험이기 때문에 언어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신비주의자들은 그 ‘다름’을 강조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이런 종류의 부정적 용어법을 채택했다. 요가 수행자들은 그들의 존재의 핵심에 자리잡고 잇는 무한한 ‘자아’를 마침내 경험하게 되었다고 상상했을 것이다.” (카렌 암스트롱)

저자가 느낀 평화와 기쁨, 행복, 우주와의 일체감은 영적 체험의 느낌과 거의 일치한다. 물론 저자가 요가의 최고 경지를 느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경험은 영적 체험이 신경학적인 근거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체험은 뇌과학 서적에서 종교적 체험을 설명할 때 거론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종교적 혹은 영적 경험의 밑바탕에 있는 신경해부 구조가 확인되었다. 우리가 개인의 존재에서 벗어나 우주(신, 열반, 극도의 행복감)와 하나가 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 뇌의 어느 부위가 관여하는지 확인된 것이다.

티벳 수도승과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녀들을 불러 SPECT 기계 안에 들어가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올리게 햇다. 이어 명상이 절정에 달하거나 신과의 합일을 느끼는 순간, 실을 잡아당시도록 했다. 이 실럼을 통해 뇌의 특정 부위의 신경 활동이 달라지는 것이 확인되었다.” 좌뇌의 언어중추와 공간지각, 자아중추가 침묵한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저자의 좌뇌가 마비되고 우뇌가 의식을 지배할 때와 비슷한 상태이다. 저자가 “몸을 고체가 아니라 유동체로 지각하고 우주와 하나가 되는 기분을 느낀 것”이 신경학적으로 설명 가능해진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세상 모든 번뇌로부터의 해방감”이라 말하며 “열반과 같은 느낌일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책에서 자신의 체험을 종교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단지 자신의 체험을 삶에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교훈으로 받아들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뇌졸증 경험으로 축복에 가까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누구든 언제라도 깊은 마음의 평화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열반과도 같은 경험이 우뇌의 의식 속에 존재하며 언제라도 스스로 뇌의 그 부분에 접속할 수 있다고 믿는다.”

“뇌졸증이 나에게 가르쳐준 최고의 것은 감정을 몸으로 느끼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기쁨의 감정이 내 안에 있었다. 평화의 감정이 내 안에 있었다.” 그러나 좌뇌의 힘이 점차 강해지면서 예전의 감정이 돌아왔다. “판단은 몸이 어떻게 느끼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분노, 좌절, 공포 같은 감정이 몸 안에 차오르면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어떤 감정 프로그램을 되찾고 싶고 어떤 감정 프로그램(조바심, 비난, 불친절)에 발언권을 부여하고 싶지 않은지 무척 까다롭게 골랐다. 뇌졸증은 내가 세상에서 누구이고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지 선택할 수 있게 해준 놀라운 선물이었다. 사고 이후 나는 내게 선택의 권리가 있다는 걸 실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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