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한 라디오 존 치버 단편선집 1
존 치버 지음, 황보석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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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외의 체호프


‘체호프의 후예’라고 불리는 작가들이 있다. 레이먼드 카버는 '미국의 체호프’로 불리고, 앨리스 먼로는 '캐나다의 체호프’라 불린다(무성의한 명명이다…) 그 밖에 윌리엄 트레버, 존 치버가 있다. 


이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체호프의 후예라고 불리는 이유는 뭘까? 단편을 주로 써서라고 할 수도 있겠고,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비슷해서, 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설명은 추상적이어서 와닿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가 생각해볼 점은 하나 또 있다.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체호프식 관점과 태도가 오늘날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되는가―어떤 위안이나 교훈, 깨달음을 주는가―하는 것이다. 


먼저 체호프의 관점을 복습해보자. 체호프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 <상자 속의 사나이>의 제목은 체호프가 인간과 세계를 대하는 관점을 압축적으로 말해준다. 즉 체호프는 인간을 ‘상자 속 존재’로 본다. 사람들은 각자의 상자 속에서 세상과 그 세상을 이루는 타인들을 바라보며, 평생 이 상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인간관이 의미하는 세계관은 이 세계에서 서로 간의 진정한 대화와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들 각자 입장과 사정이 다르고,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 다르며, ‘뭣이 중헌지’ 가치의 우선 순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세계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 사이에서도, 가장 친밀한 소우주라 할 수 있는 부모와 자식 사이, 혹은 형제 사이, 사랑으로 맺어진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도 대화와 소통, 진정한 상호 이해는 불가능하다. 카버와 먼로, 치버의 소설들은 이 점을 보여준다. 


간혹 자기 자신을 한 걸음 떨어져서 보게 될 때가, 스스로를 객관적 관점으로 바라보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입장과 진리와 가치관이 얼마나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것이었는지, 고집, 변덕, 질투에 다름 아닌 것이었는지를 문득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인식이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사랑은 변한다하더라도)”. 이것은 인간에 대한 체호프의 또 다른 명제다. 정리하자면, 체호프는 인간은 상자 속 존재이며, 그러한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봤다. 결코 긍정적인 내용은 아닌(우리 삶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이 명제, 그리고 이 명제가 녹아 들어 있는 ‘체호프의 후예들’의 작품들을 어떻게 읽고 받아들이냐는 각자의 몫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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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치버는 ‘교외의 체호프’로 불린다. 이러한 별명이 붙은 이유는 그가 미국 중산층의 삶과 그 삶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교외’를 자주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외가 과연 어떤 공간인지 그 속성을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교외는 여름 한철 또는 겨울 한철을 보내는 휴양지다. 즉 일상에서 분리된 곳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일상에서 분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욕망)’이 투영된 장소이다. 그곳은 형제들이 유지비를 분담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집일 수도 있고(<참담한 작별>), “교통사고와 빈곤,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마련하려는 안전한 오두막일 수도 있다(<그저 그런 날>). 또 누군가는 몇 년 전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던 곳”을 찾기도 하며(<하틀리 가족>), 여름에만 시골집에 살며 농부 생활을 즐기려는 뉴요커도 있다(<여름 농부>). 


요컨대 교외라는 장소는 각자의 바람 혹은 욕망이 투영된 곳이며, 각자의 결핍을 (상상적·일시적으로나마) 메워주는 곳이다. '어딘가 돌아갈 곳이 있다,’ ‘(이 복잡한 일들을 떠나) 마음 놓고 쉴 곳이 있다’는 사실(실은 믿음)이 인물들에게는 큰 위안이 된다. 이곳에서 인물들은 일상의 피곤, 일상의 트러블을 잊고서 ‘휴식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 


“그 침울함에서 빠져나오라고. 거기에서 빠져나와. 지금은 그저 여름날일 뿐이야. 너는 너 자신의 시간을 망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시간을 망치고 있어. 우리에게는 휴가가 필요해, 티프티. [...] 우리 모두가 다 그래. 그런데 너는 모든 일을 긴장되고 불쾌하게 만들고 있어.” (<참담한 작별>, 49)


간이역에서부터 힘스 북쪽에 있는 그들의 농장까지 차를 몰아가는 동안 폴과 버지니아의 대화는 소박한 농장과 서로에 대한 애정에 국한되었고, 그 이상의 것, 수지 타산이나 전쟁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화창한 아침에 오픈카를 타고 가는 시간을 망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부러 피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아래층 샤워 배수관이 새고 있다고, 7월 어느 아침에 버지니아는 폴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했다. 시누이인 엘렌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마스턴 부부가 점심을 먹으러 들렀었고, 그리고 이제 아이들이 애완동물을 가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그녀가 미리 생각을 해보고 하는 이야기였다. (<여름 농부>, 214-215) 


물론 이 휴식은 거짓과 가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가령 <참담한 작별>에서 아버지의 별장은 의도적으로 낡은 분위기를 내도록 지어진 것이다. 또 더 중요하게는 휴양지에서는 대화가 국한된다. 서로의 ‘즐거운 시간’을 망치지 않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있고 해도 되는 말들이 있다. 휴가지에서 하는 말과 행동들은 ‘행복’이나 ‘즐거움’, ‘안정된 삶’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나무’가 그 ‘뿌리’를 드러낸다(<참담한 작별>의 결말. '패밀리 트리'라는 상징을 지녔을 나무 뿌리가 상징적 '가족 살해'의 도구로 쓰이는 이 소설의 결말은 무척 인상적이다). 


교외는 거짓과 가식의 공간이다. 



관리자들

교외-휴양지는 ‘(날씨가) 가장 좋을 때’를 골라 ‘즐기기 위해’ 찾는 곳이다. 그러나 그 ‘가장 좋음’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요리사, 정원사, 보모 등 ‘관리자들’이 그들이다. <그저 그런 날>에서 스웨덴 출신 요리사 그레타와 아일랜드 출신 하녀 아그네스가 주방에서 나누는 대화, 정원사 닐스 런드의 항의는 휴가지의 일상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관리자들의 존재와 노동을 드러낸다. 


또한 이 ‘일상 관리자들’은 시골 별장 말고 도시에도 존재하는데, 엘리베이터 운전수인 찰리,(<가난한 자들에게는 슬픈 날, 크리스마스>), 클랜시(<바벨탑의 클랜시>), 아파트 관리인 체스터(<아파트 관리인>)와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여러 세대가 모여 사는 거대한 주거 공간에서 이들은 일종의 부품처럼 존재한다. 오직 크리스마스와 같은 특별한 날이나, 누군가 불행에 빠져 자살을 하려드는 날, 몰락한 한 가구가 이사를 가는 날에만 이들은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또한 동정심의 실체와 한계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삶의 축’으로서의 헛된 환상

존 치버의 소설들은 인물이 어디서 어디로 가느냐를 두고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즉 도시에서 시골로 가는 사람들(주로 중산층)이 있고,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다. 덧붙여 세 번째 분류도 가능한데, 그건 (도시의 아파트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다룬 작품들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분류에 속하는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가난하거나 몰락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존 치버의 소설들은 인간 욕망의 헛됨을 파헤치고 풍자한다. <부서진 꿈들의 도시>나 <황금 단지>는 성공과 부에 대한 환상이 어떻게 깨지는지를 다룬다. 부와 성공에 대한 환상은 물론 헛된 것이고, 그러니 독자들에게는 그런 환상에 매달린 인물들의 모습이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치버는 모든 인간에겐 어떤 식으로든 매달릴 환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서술한다. 헛됨의 농도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모든 이이게는 환상이 필요하다. 환상의 다른 이름은 꿈-이상이며, 그것은 곧 한 사람의 세계관의 축이자 삶을 지탱하는 축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부와 성공에 대한 환상은 사회가 주조해낸 환상이라는 점에서 주체적인 꿈-이상과는 다르다. 하지만 이 둘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분리할 수도 없다. <부서진 꿈들의 도시>와 같은 작품은 희곡 작업이라는 ‘주체적인 꿈’과 부와 성공이라는 ‘헛된 환상’이 서로 긴밀히 얽힌 채로 한 사람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와 당신의 '가장 좋은 모습'

좀 더 복잡한 플롯을 가진 <서턴 플레이스 이야기>는 환상이 깨지면, 세계와 인간에 대한 믿음도 깨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오로지 치명적인 위험이라는 관점에서만 도시를 보았다. 하나하나의 맨홀 뚜껑, 움푹 꺼진 구덩이, 옥외 비상계단들이 음화 필름에서 명암이 역으로 강조되는 것처럼 한낮의 광휘보다도 더 두드러졌고 그는 센트럴파크의 사람들과 푸른 나무들이 불경스러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턴 플레이스 이야기>, 201)


이 소설에는 칵테일 파티가 일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젊은 부부, 일요일의 미사가 중요한 보모 할리 부인이 등장한다. 젊은 부부에게는 칵테일 파티에서 ‘세련된 옷’을 입고 오는 손님들을 만나는 게 중요한 일상의 교류인데, 이 소설집 전체에서 파티나 옷에 대한 묘사들(특히 밍크나 모피 코트)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파티 옷차림’이란 한 사람의 ‘가장 좋은 모습’이며, 그런 의미에서 ‘가장 좋을 때의 휴양지’와 의미상 상통하기 때문이다. 


휴양지를 방문한 중산층이 그 장소의 ‘가장 좋은 모습’만 볼 수 있는 것처럼, 파티장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가장 좋은 모습’만을 본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을 계속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삶은 가장 좋은 모습이 가리고 있는 이면의 어떤 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 이면의 모습, 각자가 품고 살아가는 비밀이 겉으로 드러났을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가령 클래식을 듣기 위해 거금을 들여 산 라디오가 이웃의 내밀한 불행과 비밀을 들려주기 시작할 때(<기괴한 라디오>), 우리는 그러한 타인들의 삶에 대해, 그리고 (그와 별로 다르지 않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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