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버빌가의 테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2
토머스 하디 지음, 유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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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도 세상이 있다고 했제, 누나?”
“응.”
“우리 세상하고 같아?”
“잘은 몰라도 그럴 거 같아. 우리 사과나무에 달린 사과와 비슷할 걸. 대개는 싱싱하고 안 썩었지만, 벌레 먹은 것도 가끔 있잖아.”
“우린 어디 살아? 싱싱한 별이여, 벌레 먹은 별이여?”
“벌레 먹은 별.”
“싱싱한 별도 많은디 우린 그런 별을 못 골랐으니께 당최 운이 나쁜 거네!”
“그려.”
“누나, 그게 정말이여?” 이 기막힌 이야기를 되새겨보고 상당히 충격을 받은 에이브러햄이 누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안 썩은 별을 골랐으면 어찌 됐을까?”

"Did you say the stars were worlds, Tess?"
"Yes."
"All like ours?"
"I don't know; but I think so. They sometimes seem to be like the apples on our stubbard-tree. Most of them splendid and sound—a few blighted."
"Which do we live on—a splendid one or a blighted one?"
"A blighted one."
"'Tis very unlucky that we didn't pitch on a sound one, when there were so many more of 'em!"
"Yes."
"Is it like that really, Tess?" said Abraham, turning to her much impressed, on reconsideration of this rare information. "How would it have been if we had pitched on a sound one?"

- 토머스 하디, <더버빌가의 테스>, 문학동네, 50쪽.



<테스>는 줄거리만 따지면 슬프고 비극적인데, 막상 직접 읽어보면 유머러스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이다. 특히 인간의 선함과 악함, 약함과 강함, 못남과 위대함, 가장 비열한 모습과 숭고한 모습, (외부) 세계의 운명과 인간(내부)의 충동을 모두 껴안는 작가의 태도가 돋보인다.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이 염세적이고 순응적이어서 '답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도 그게 무력감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무척 흥미로운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언젠가 [한 책 읽기]에서 꼭 다루고 싶은 작품이다. (첫 번째 시도부터 엎어졌지만... 뭐 '언젠가'니까.) 작품 자체로도 충분히 애정할만 하지만, 시인이자 영문학도였던 백석이 하고 많은 영문학 작품 중에서 왜 하필 이 작품을 택해 한국어로 번역했는지, (거기에 무슨 필연적 연결고리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한 선택이었는지) 그 까닭을 짐작해보며 읽는 재미 또한 누릴 수 있다.


백석의 <테스> 번역 역시 출간되어 있다. 덕분에 맘만 먹는다면 백석의 언어로 세계문학을 읽는 최고급의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물론 맘 먹기가 쉽지 않지...)


그나저나 <테스>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제시하라면 '운명의 장난'이라 할 수 있겠다. 아버지가 술에 취하고, 술 취한 아버지를 대신해 배달을 나가다 집 안의 유일한 재산인 말이 죽고, 그래서 이웃 마을 부자 친척집에 찾아가서 품팔이 노동을 하고, 그러다 불한당 알렉 더버빌을 만나고...


알렉 더버빌! 그러고 보면 ‘더버빌’이란 이름 자체가 테스의 운명이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최초의 우연적 계기를 제공한다. 테스의 아버지 더비필드 씨는 여느 때처럼 술에 취해 집에 가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트링엄 신부에게 ‘더버빌’이란 이름을 듣는다. 얘기인 즉 더버빌은 유서깊은 귀족가문인데 더비필드가 그 가문의 (몰락한) 후예라는 것. 이 말에 기분이 좋아지고 흥분한 테스의 아부지는 이웃마을에 ‘더버빌’이라는 이름의 부자 친척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돈 좀 벌어오라며) 테스를 알렉의 집에 보낸다. 더버빌가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한번 만난 적도 없으면서 이름만 믿고 독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악의 소굴'로 딸을 보낸 것이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실은 친척도 뭣도 아니다.)


사소한 우연들이 겹쳐 비극을 만들어내는 이러한 '운명의 장난'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일까? 일단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결국 임신한 몸으로 집에 돌아온 테스를 보고 엄마가 하는 말은 이렇다.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지 어쩌겄냐. 이게 순리고 하느님의 뜻인가보다.”


애초에 타고나길 탁월하게 태어난 존재라면 운명과 당당히 맞선다거나 극복하겠다는 태도를 취할 수 있다. 19세기... 그러니까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의 시대에는 저런 게 가능했다. 아니면 지난 세기 모더니스트와 실존주의자들이 선보인 인물들처럼 끝까지 반항한다거나 하는 식의 태도를 취할 수도 있겠고. 그러나 테스 엄마처럼 (선량하지만) 평범하고 약하고 못난 존재(인 우리)로서는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즉 하디의 관심은 세계와 맞서는 영웅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영웅은 이미 쓰러졌다. 소설 초반부터 하디는 그점을 명확히 해둔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나요?” 잠시 숨을 돌렸다가 더비필드가 물었다. /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네. ‘용사들은 쓰러졌구나’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독이는 수밖에." (19)) 더이상 용사(영웅)는 없다. 단지 운명이 있고, 운명의 장난에 휩쓸리고, 그 결과를 순응적으로 받아들이는 보통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테스>에는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 '가장 보통의 존재'들이 등장한다.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쉽게 공감이 가고 몰입이 된다. 하지만 그뿐이라면 기분이 좀 나쁠 것이다. 작품을 읽은 후에 무력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운명의 무심+냉정한 타격에 인간이 쓰러지고 몰락하는 이야기니까. 줄거리만 따지자면 그렇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테스의 삶을 비극으로 이끄는 ‘운명의 장난’ 못지않게 작가 하디의 아재 개그… 아니 ‘유머러스한’ 서술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덧붙이자면 내 취향이다.) 예를 들면 테스가 알렉의 집으로 떠나는 (운명적인) 날 아침을 작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집을 떠나는 날 아침, 테스는 날이 새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어둠의 한 자락이 남아 있을 시간이라 숲은 아직 고요했다. 예언자를 자처하는 새 한 마리가 적어도 자신만은 정확한 시간을 안다는 듯 확신에 찬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다른 새들은 그 새가 잘못 알고 있다는 확신이 그만큼 강한 듯 침묵을 지켰다. (74)


주인공의 운명과 관련하여 꽤 심각한 상황이 펼쳐질 참인데도, 서술자(=신) 하디는 자못 한가하고 딴청부리는 듯한 태도로 유머를 구사하고 앉았다. 여기서 놀라운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소설 줄거리 상으로 보자면 테스를 둘러싼 무수한 우연적 계기들(즉, 운명의 장난)은 그게 마치 필연인 듯 비극으로 이어지지만, 서술자가 구사하는 유머는 무심하게 인간을 타격(strike)하는, 그리하여 인간의 삶에 무거운 비극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 운명을 strikes back(역습)하는 효과를 낸다. 말하자면 하디의 개그 드립... 아니 저 서술자적 개입으로 인해 작품 전체의 톤이, 아니 작품 자체가 '비극'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건 뭘까…… 운명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장난이고 착각이고 실수투성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일까? 에이브러햄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벌레 먹어 썩은 별'이라는 테스의 말에 아니 세상에 그런 기막힌 일이 있냐는 듯 반문한다. "누나, 그게 정말이여?" (아... 귀여워...) 이러한 반문,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우리가 안 썩은 별을 골랐다면 어찌 됐을까?")... 바로 여기에 운명과 세계와 그 안의 인간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드러난다. 설사 이 별이 정말 썩은 별이고, 이 세상이 (알렉 더버빌과 같은) 독뱀들로 가득한 곳일지라도, 에이브러햄과 같이 천진한 태도로 반문과 질문을 할 수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완전히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운명(또는 인간사에 무심한 자연)을 소재로 유머를 구사하는 토머스 하디의 태도는 에밀 졸라의 정말이지 냉혹한 ‘자연과학자적 태도’와 비교될만하다.


"유머는 분위기가 아니라 세계관이다" 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나치 독일에서 유머가 사라졌다면, 그건 그냥 사람들의 기분이 나쁘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심각한 무언가를 의미한다, 는 내용의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그 점, 그러니까 유머가 곧 세계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테스>를 읽고 얼마간 느낄 수 있었다. 백석도 그랬을까?


20141223
#막독13기 #Lady 두 번째 책


잘 판단해서 계획한 일도 잘못 실행하면 뜻한 바를 이루기 어렵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때 만나기는 아주 어렵다. 자연은 불쌍한 피조물이 보는 것만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순간에도 그에게 "보라!" 하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숨바꼭질이 지루하고 낡아빠진 장난이 될 때까지, "어디 있어요?"라는 인간의 질문에 "여기"라고 답해주지 않는다. 인류의 발전이 절정과 극치에 이르면 이와 같은 시간의 엇갈림이 더 섬세한 직관으로 교정될 수 있을지 모른다. [...] 지금의 경우는―셀 수 없이 많은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완벽한 합일의 순간에 완벽한 전체의 쪼개진 두 반쪽이 만난 경우가 아니며, 보이지 않는 반쪽은 끝에 이를 때까지 어리석고 우둔하게 기다리면서 대지 위를 홀로 떠돌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렇게 어줍게 지체하다가 걱정과 실망, 충격과 재난 그리고 얄궂은 운명과 마주하게 된다. (67)

사랑할 사람은 좀해서는 사랑할 시간과 일치하지 못하는 것이다. 서로 맞나보면 행복하니 될 때도 자연은 그의 가엾은 인간들에게 ‘맞나보아라’ 하고 하는 때가 드믈고 또 인간이 ‘어데서?’ 하고 물을 때에도 ‘예서’ 하고 대답하는 길도 별로 없는 탓에 인간에게는 이 사랑이라는 숨굴막질이 아주 몸 고단한 작난이 되여 벌이고 마는 것이다.

현재의 경우도 다른 수많은 경우와 같이 이렇게 아조 좋은 때에 서로 맞난 것은 완전한 인격의 두 반신이 아니고 이제는 벌서 다 늦었다고 할 때가 되도록 어리석게 우둔하게 서로 각각 헤여져서 이 땅읗을 방황해 다니든 서로 짝을 잃어벌인 사람들끼리 맞난 것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이 미욱한 지체에서 근심과 실망과 놀람과 재난과 뜻밖의 운명이 튀여 나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대목을 백석이 번역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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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근 2016-04-24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yrytyryrty

blaue 2018-01-03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만나니 반갑네요 ^^ 막독회원입니다~알라딘 메일에 시로님 이름이 나와서 깜짝놀랐어요. ㅋ

시로군 2018-01-04 03:27   좋아요 0 | URL
엇 반갑습니다. ^^ 요즘은 서재에 글을 안 올리고 있는데 메일에 왜 제 이름이 나왔을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