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 필립 K. 딕 단편집
필립 K. 딕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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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토탈리콜》의 원작으로 알려진 필립 K. 딕의 단편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에는 폭력적이고 기괴한 장면은 거의 없다.  와이프도 샤론스톤급의 미녀라는 설명이 없고, 그저 어떤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주인공은 매일 화성에 가는 꿈을 꾼다. 화성의 사막같이 황량한 풍경이 너무 현실같고, 꿈을 꾸고 나면 이상한 그림움 같은 걸 느낀다. 그래서 그는 화성에 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화성에 갈 형편이 안된다. 그의 아내는 그가 화성 꿈에 대해 얘기하면, 면박을 주며 비난한다. 왜 그는 화성에 갖다 오면 안되는 거였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워진 기억의 끝자락을 쫓아 화성 여행을 꿈꾸고 그게 뜻대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자, 가짜 기억을 심기로 한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토탈리콜(Rekall)이라는 기억주입 회사다. 화성에 다녀오지 않고도 화성에 다녀온 기억을 심겠다는 거다. 비용은 거의 화성에 다녀오는 것과 맞먹는다. 화성 탐사 기억 주입은 단 몇 시간 만에 끝나지만, 끝나고 나면 그는 2주동안 화성에 다녀왔다는 모든 증명과 기념품들, 사진, 그리고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 실제로 다녀온 사람들보다 더 생생한 기억을 갖게 된다.


 토탈리콜》의 원작이 라고 해서 읽었는데, 최초로 이런 스토리를 이렇게 압축적으로 고안해낸 필립 K 딕도 대단하지만, 그걸 바탕으로 토탈리콜 같은 디테일을 창조할 수 있었던 영화 관계자들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리메이크판은 세련된 미래 사회의 상상력을 제공했지만, 구판이 더 좋다. 내가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도 엄청 좋아하지만 프라임 비디오로 갈아탄 후  일렉트릭 드림》에 흥분했던 게 필립 K. 딕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은 굉장히 건조하고, 레트로한 느낌인데 폭발적 상상력으로 기괴하고 낯설지만 흥미로운 스토리를 갖는다. 그런데 이게 현란한 SF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감독 및 극본가들의 새로운 해석에 세밀한 디테일이 더해지고 살아있는 인물들의 연기로 전해지니 두 개의 다른 매체 속 이야기를함께 읽고 보는 재미가 크다.


“무엇보다 선생 본인이 화성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나도, 우리 회사도, 이곳에 왔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선생 마음속에서는 실제 여행과 같을 거예요. 그건 확실하게 보증하죠. 이주일어치의 리콜입니다. 아주 사소한 세부 사항까지 전부 들어가있죠. 이걸 기억하세요. 만약 선생이 실제로 화성에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전액을 환불해드립니다. 아시겠어요?”



그런데, 기억주입 중 리콜 회사의 기억 조작 담당자는 퀘일을 시술하던 중 이상한 현상을 발견한다. 그가 실제로 화성에 다녀왔었고, 그 다녀왔던 기억이 인위적으로 지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가 화성에 다녀왔다는 지워진 기억의 심층부에 있는 어떤 채울 수 없는 욕망이 계속 화성을 갈망하게 했던 것이다. 시술 도중 이 사실을 알게 된 리콜 회사 사람들은 자신들마저 위험에 처했음을 알게 되고, 그의 화성 기억에 약간의 구멍을 낸다. 또한 화성에 다녀온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여러 증거품들과 함께 화성여행을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동시에 리콜 회사에서의 기억 주입의 일도 함께 기억한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즐겁고 보람찬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화성에 갔던 적이 없잖아.    

하지만 이걸 보면―    갈색 봉투에 담긴 식료품을 한 아름 든 채로, 커스틴이 문가에 모습을 보였다. 

“왜 대낮에 집에 와있는 거예요?” 

언제나 똑같은 그녀의 목소리에는 비난이 실려있었다. 그는 아내를 보고 물었다.    

“내가 화성에 갔었나? 당신은 알겠지.”


이제 아내는 화성에 갔었는지, 안갔었는지 선택하라고 한다. 퀘렌에게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을 알고 싶은 문제다. 하지만 아내에게 이것은 선택의 문제고, 삶과 죽음의 문제다. 


“세상에, 아무래도 정말로 갔다 왔던 것 같아. 그리고 동시에 가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쪽인지 선택해요.”    

“어떻게 선택을 해? 양쪽 기억이 전부 내 머릿속에 새겨져있는데, 하나는 진짜고 하나는 가짠데도 어느 게 진짜인지 알 방법이 없단 말이야. ...


알고 보니, 퀘일은 인터플랜의 스파이로, 화성에서 수십명의 무장한 보안요원들을 처리하고 최고 지도자를 암살한 자이다. 진실을 알고 있는 자를 살려두면 인터플랜 조직 자체에 치명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서 화성에서의 기억을 지우고 소시민적인 삶을 선택하게 한 것이다. 그러니 화성의 기억을 갖게 된다는 것 자체가 인터플랜에게는 큰 위협이다. 


이 짧은 소설에, 당대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거라고 여겨지는 몇가지 신기술들이 쿨하게 삽입되어 있다. 그의 두뇌에 통신 기능을 비롯한 여러 기능을 제공하는 어떤 모듈이 심겨져 있어서, 그의 생각이 인터플랜의 다른 사람들과 공유된다. 그래서 거짓말은 불가능하고(거짓을 생각하면 될까), 생각으로만 통신한다. 이러한 생각 통신 기술은 최근 Clarkesworld 매거진에서 읽은 몇몇 SF 소설과 최근 SF 소설에서는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있어서, 신체에 이식했건, 웨어러블을 착용했건 기기 없이 입 속으로 원거리의 대상과 대화한다. 


아내는 화성에 다녀왔다는 그를 떠나고, 바로 그를 해치우러 나타난 요원들. 그 요원들을 보자, 더욱 빠르게 지워졌던 진짜 기억이 되살아나며 자신이 아주 유능한 킬러로서 무장한 군인들을 재빠르게 처리할 수 있음을 알게 되고 행동한다. 본 아이덴터티에서 기억을 잃은 본이 본능적으로 물리적 공격을 방어하고 공격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요원을 처리하고 거리로 나온 그는 점점 더 확실하게 자신의 과거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러면서 머리속의 목소리, 인터플랜의 상급자와 대화를 한다. 살기 위해 선택해야 할 유일한 전략은 다시 모든 기억을 지우고 더욱 새로운 기억을 주입하는 것. 그것에 동의하고 방법을 살펴보지만, 이처럼 한 번 실패한 경험 때문에 어떤 기억을 주입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다가. 정신분석가에게 프로파일링을 의뢰해서 퀘일에게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환상을 찾아내어 그것을 심어주기로 한다. 


그 환상이 지구를 구할 키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꿈이었을까? 또 다른 지워진 기억이 가진 지구 차원의 비밀은 무엇일까? 킬러로서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선택했던 현재가 지워진 과거 기억과 겹치는 기억을 심고, 그 중첩된 기억을 지우기 위해 또다시 새로운 기억을 심어야 하는 처지. 그가 선택해야 할 환상이란 게 존재하기나 할까. 책에 있는 단편 하나 하나가 후루룩 읽어 치우기에는 아까울만큼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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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90분 : 기억해줘, 우리의 마지막 시간
케이티 칸 / 북로그컴퍼니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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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션, 인터스텔라, 시간 여행자의 아내 등등 내가 좋아하는 최고의 영화들과 비교된다는 찬사의 소개글만 없었어도 나름대로의 가치를 찾아 읽었을텐데 그런 작품들과 비교를 하려니 실망스럽다. 그런데 소개글을 다시 자세히 보니 이 작품들과 버금가는 작품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이것둘을 모듀 합쳐놓은 듯한 작품이라는 소린데 그 점에 있어서는 동의가 되긴 한다.

사랑하는 연인이 우주선에 올랐다가 추진기도 없이 우주선에서 떨어져나왔는데 산소통에 남은 시간은 딱 90분 뿐이다. 마션과 비교되는(아니 합쳐놓은) 부분은 우주에서 살아남기를 시도하는 부분이다. 다만 그들에게는 감자응 심을 땅도 공기와 온도 등의 생존 환경을 만들어줄 돔도 없이 무한한 우주의 허공속을 유영하고 있고 디딜 땅은 커녕 공기 조차 없어서 우주선으로 돌아갈 수도 없이 둘이 묶인 끈과 통신 장비에 의지해 서로 함께 유연하며 대화가 가능하다. 둘은 함께 남아 있는 시간을 카운트하며 어떻게든 살아남을 궁리를 하는데 그러면서 둘의 만남과 이 우주 속에서 미아가 되기까지의 사연이 플래쉬백된다.

핵전쟁후 미국은 폭망하고 유라시아 대륙 전체가 새로운 유토피아를 표방한 새로운 개념의 사회를 건설했는데 이 사회의 가치 이념은 철저한 개인주의이다. 개인이 완전하게 새인으로서의 자유와 가치를 누리려면 가족이라는 예속에서 벗어나야 겠다는 게 이 사회의 결단이라 아주 어린 나이에 독립을 하고 교육을 받으며 3년인가에 한번씩 거주지를 이동하면서 살도록 되어 있다. 


오웰의 1984가 생각나는 체제지만 자칭 유토피아적인 세계에 사는 주민들은 정부의 정책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법규룰 준수하는 편이다. 일찌감치 가족을 떠나 독립을 하고 여러 나라 말을 배우면서 각자가 살도록 결정된 곳으로 늘 이주하는 삶을 꾸리고 늘 새로우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는 참된 유토피아라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이상스러운 규율은 연애와 결혼이 일정 나이에 다다를 때까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일정 나이라는 나이가 뭐 18세 20세 이런 수준이 아니라 40세(?) 근처로 매우 높다. 그 이전에도 남녀가 가볍게 만나고 섹스를 할 수는 있지만 한 사람이 이주하면 파트너로 따라갈 수가 없으니 자연스레 짧고 즉훙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90분 후면 산소가 떨어져서 죽을 상황에서 서로의 관계를 되돌아보묘 세세 콜콜 연애 감정의 세부 사항을 교차 편집 형태로 플래시백을 하다 보니 이 소설 자체가 SF 재난 소설인지 연애 소설인지 구분이 모호한데 그 쟝르상의 모호함이 딱히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재난을 다루는 급박함은 지리멸렬한 로맨스 파트로 흡입력을 떨어뜨리고 로맨스 자체는 갈등과 의심 신뢰 등의 사랑의 본질을 건드리며 갈등 관계를 건드리다 보니 로맨틱하지 못했고 작가가 제시한 오웰적인 유토피아는 그닥 설득력을 전해주지 못했다.

결말 부분이 흥미로워서 별점을 좀 더 주고 싶으나 쓰다 보니 앞부분을 읽으면서 느낀 점들이 더 부각되는거 같아 평가가 좀 박해졌다. 오픈 결말이라고도 할 수 있고 서로가 바랐던 결론이었을 수도 있다. 처음부터 둘이 살아날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희박하다. 로맨틱 소설인지 SF 소설인지 헷갈리는 진행 속에서도 호맨틱에 별로 흥미가 없는 독자가 끝까지 책을 들고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마션처럼 이 둘이 어떻게든 살아남게 되는 과정 그 어떤 숨어있는 반전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작가는 우여이 아닌 엔지니어적 과학지식과 상상력을 결합하여 두 사람이 혹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여로 시도들을 제시하였고 마지막까지 가능성을 열어두었지만 뻔한 엔딩이 아닌 사랑의 완결에 방점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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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최고 흥행 히트를 쳤던 영화 아바타는 표절 문제로 꽤 시끄러웠었다. 첫번째 표절은 제작사의 전 직원이 재직 중에 썼던 이야기인 <K.R.Z. 2068>이 <아바타>와 연관이 있다고 주장이다. 두번째는 제랄드 모라우스키의 작품 <Guardians of Eden>을 영화화하기 위해 제임스 카메론과 여러번 미팅을 했지만 무산되었는데, 아바타에  작품을 베꼈다는 것. 이 작품의 내용은 사악한 광산업자가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자 자연의 우림을 파괴하고 원주민과 대립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출처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235 ). 실제로 법정으로 이어진 표절 시비보다도 [포카혼타스+늑대와춤을]의 결합이라는 일반적인 시각에 더 동의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굳이 원조를 찾자면 폴 앤더슨의 <조라고 불러다오>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표절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두 곳에서 찾을 수 없는 아바타의 가장 독창적인 파트가 바로 아바타의 몸을 원격으로 조정한다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 아바타의 원격 조정이라는 작품 전체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되었던 가장 중요한 파트가 바로 이 폴 앤더슨의 중편 <조라고 불러다오 call me joe>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내가 애정하는 명예의 전당의 중편 모임인 3편 첫번째 작품이다. 작품의 선별 과정과 인지도 등을 모두 종합해봤을 때, 명예의 전당에 수록된 작품 자체가 SF 클래식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카메론이 이 작품을 안읽었을 리가 없다.


영화 아바타는 여러가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SF적 부분의 가장 핵심적인 파트인 아바타 제어 기술과 동기 등의 모든 부분이 바로 이 소설에서 그대로 가져왔음을 읽고 나서 알 수 있었다.  일단 폴 앤더슨의  call me joe는 SF 명예의 전당의 중편 10여 개에 선택된만큼 클래식에 가까운 SF 중편이다. 인터넷 리뷰 사이트들을 뒤져보면 실제로 이 소설을 읽은 독자의 상당수가 아바타를 본 후, 카메론이 폴 앤더슨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보고 있다. 내 경우 아바타는 관람한 지 엄청 오래되어 자세한 디테일을 기억하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참 후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아바타의 원작이라고 착각했을 정도다. 컨셉상의 유사성이 있다라거나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전체적으로 구조적으로 많이 유사했다. 언제나 영화화 할 때 삽입되는 로맨스 파트만 제외한다면 결말까지 거의 비슷한 구조를 따르는데, 그 연애파트 마저도 포카혼타스와 비슷하다고 하지 않는가. 뭐 연애가 다 그렇지, 


우선 아바타를 조정하는 조정자가 장애를 가졌다라는 점이 같다. 휠체처를 타고 다니는 주인공이 아바타의 몸을 입고 자유롭게 훨훨 날다시피 다니는 장면은 내게만 강렬하게 각인된 기억이 아닐 것이다. 이 소설에서 앵글시는 가슴 아래의 몸이 거의 마비되었고, 아바타(물론 아바타라는 용어는 없다)의 몸을 가졌을 때 목성의 원시인이 되어 자유롭게 된다. 이 소설은 아바타라는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기 이전에 쓰인 소설이다. 컴퓨터는 존재했겠으나 집채만한 크기의 진공관들이 수학 계산이나 겨우 했을 성능을 보였던 시기쯤에 쓰인 이 소설이 아바타에서 보여준 현란한 디테일을 모두 서술한 것은 아니지만 가상현실이나 게임 공간 같은 건 꿈도 못꾸던 시대에 오로지 상상만을 바탕으로 이러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두번째 유사점은 공간적 배경이다. 영화 아바타에서 껍데기뿐인 아바타를 보내는 곳이 미개척 우주다. 조라고 불러다오에서는 개념적으로 아바타와 동일한 인공 목성인인 조를 목성으로 보내 중증 장애를 가진 앵글시가 그를 조정한다(인공목성인=아바타). 앵글시가 있는 곳은 목성의 다섯번째 위성에 설치한 돔으로 보여지고, 헬멧을 쓴 채 조가 되어 목성 탐사를 한다. 이 두 작품 모두 어느 미개척 행성의 환경에 살아남을 수 있는 몸체를 보내 장애를 가진 인간에게 그 조정을 맡긴다는 설정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유사성이다.  아바타에서는 지구에 없는 어떤 자원 채취를 목적으로 인공으로 태양계가 아닌 다른 계로 여행을 가지만, 이 소설에서는 목성에 보낸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사람이 살지 못하는 우주 행성의 탐사와 개발을 목적으로 인공 꼭두각시를 보낸다. 그런데, 목성의 대기와 압력 등에 적합한 목성인은 실제로 목성에 거주하는 생물체가 아니다. 아바타처럼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거주민이 목성에는 없다. 인류와 같은 개념의 생명체는 없지만 목성의 높은 중력과 기압 온도 같이 혹독한 자연 환경에 적응한 강철같은 바디를 가진 생물이 암모니아 비를 맞고 수소 같이 그 행성에 존재하는 공기로 호흡하며 살아간다.  꽝꽝 얼어붙어 돌처럼 딱딱한 얼음을 조의 몸을 가진 앵글시가 제련하여 무기와 도구들을 만들며 분투하는 장면은 아바타의 아름다운 정글 만큼이나 인상적이다.


세번째로 쓸모없어진 지구인으로서의 육체를 버리고 새로운 행성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육체를 선택한다는 결말의 필연적 유사성을 꼽을 수 있는데, 사랑을 위해 나비족의 아바타가 된 제이크 셜리보다는 오히려, 막지 못할 죽음을 통해 진정한 (인조) 목성인 조와 결합하여 아예 조가 되어 버리는 이 작품의 앵글시가 훨씬 설득력과 통찰을 준다. 아바타는 원주민 나비족과 유사한 아바타를 DNA 조작으로 만드는 데 비해, 이 소설의 조는 순수하게 인간이 창조한 완전히 새로운 생명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는 혹독하기만 할 거라고 추측한 목성의 환경에 적합하게 창조된 인간이므로 그곳에서 앵글시라는 인간이 갖는 경험과 지식을 흡수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그곳에서 진화하며 생명을 이어가게 되는 설정이다.(조를 돕기 위해 다른 목성인들이 계속 투입된다. 그들은 더이상 앵글시에게 조정되지 않으며 조에게(조가 된 앵글시?) 지식을 전수받으며 목성의 인류가 된다.


표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이 이야기에는 또다른 기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클리포드 시맥은 우리나라에서 종이책으로 출간된 적이 없는 SF 작가인데, 그의 단편 작품 중 <desertion>이 이 작품과 유사성이 있다. 클리포드 시맥의 단편집은 국내 번역 출간된 것이 전혀 없고, 명예의 전당 1편에 허들링 플레이스라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고,  두 개의 이북 단편 전용으로 다섯 개의 작품이 위즈덤커넥터와 미니문고에서 번역 출간되어 있다. 어렵게 텍스트를 구해 그 작품을 읽었는데,  목성 탐사라는 점과 아바타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는 설정이 있다.  지구의  1천배나 되는 압력(중력?) 과 끊임없이 내리는 암모니아 비 등, 혹독하고 끔찍하기만 한 새로운 행성에서 호흡과 생존 가능하도록 해주는 변환기가 있고, 그 변환기를 통해 몸이 다른 생명체로 변환하면 직접 목성에 내려가는 설정이다. 지구는 더이상 생존 불가능한 곳으로 변해가고 있고, 식민행성을 개척하고 있는 중인 이 세계에서 이 변환기는 이미 성공하여 우주 곳곳에 식민 행성을  개척하고 있지만 목성에 보내지는 사람들은 보내는 족족 돌아오지 못하자, 책임자가 직접 자신의 개와 함께 목성에 간다. 왜 그동안 보낸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했는지를 직접 깨닫게 되는 순간, 그동안 알고 있던 목성의 이미지와 진실의 차이를 깨닫는다. 새로운 진실을 마주한 순간의 어마어마한 충격은 세월의 간극을 초월한다. 


SF는 소재 자체가 상상력에 기반한 것이기에, 처음 그것을 생각해 낸 사람의 기여가 중요하다는 게 내 지론이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새로운 아이디어였다고 하더라도 계속 재생산되면서 아예 장르가 되기도 한다. 최초의 소설이 아름답고 우아하고 기술적으로 변환시켰다고 한들 구조와 아이디어 철학 등의 모든 것이 유사한 오리지낼리티에 대한 기여를 인정하지 않은 채로 최초의 아이디어 자체가 모두 자신의 상상력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도덕관을 드러내놓는 일일 뿐이다.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표절인지 아닌지를 심판하고 싶지도 않지만, 뒤늦게 폴 앤더슨의 작품을 읽은 후 영화 아바타에 대한 배신감과 SF 팬들의 비난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오디오 드라마 시맥 desertion 의 유튜브 사이트

https://www.youtube.com/watch?v=WYOk9D0Zw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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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더 초이스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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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더 판타지 


오버 더 판타지


전작인 오버 더 호라이즌에 실린 작품들의 연작을 이루며, 그것들과 주제의식과 세계관을 공유한다. 현실의 어느 중세 시대와 비슷한 배경이지만, 판타지적 존재들과 함께 어울어져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사건들이 동력이 되어 서사가 진행된다. 하지만 결국 딜레마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고 실험을 하고,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곳은 바로 현실의 삶이다. 작가가 정교하게 창조한 세계가 현실적 입장에서 볼 때 충분히 마법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를 가득 담고 있지만, 그 속에는 또다른 판타지가 존재하며, 오버 더 시리즈의 전작들에서처럼 판타지가 그어놓은 판타지 속의 판타지와 분리되어 있고, 경계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한다. 위어울프들이 늑대로 변하고, 뱀파이어 법관이 낮에는 둥둥 떠다니는 관을 타고 다니고, 나무가 책장 모양으로 자라는 판타지적 세계지만, 그 곳에서 바이올린이 죽고, 마법사가 대를 이으며 마법의 세기가 커지고, 개양이가 태어나는 일들은 모두 비현실적으로 비춰지며 더더욱 부활이란 가당치도 않은 믿음으로 치부되는 곳이다. 그러나 연작을 통해, 오버더 시리즈의 서사와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며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던 그 세계관 내의 경계를 지난 시리즈에서는 희생을 치르며 지키는 것으로 보였다. 음악은 죽지 않았고, 마법은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계승되지 않으며, 개양이들은 그냥 자기 길을 간다. 그렇다면 부활은? 아이러닉하게도 지켜져야 할 것은 바로 죽음. 부활없는 죽음. 훼손되지 않는 영원한 죽음이다.



삶과 죽음, 부활 


제국의 한 개척 도시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다룬 소설로, 폐광의 무너진 환기구에 갇혀 열하루 만에 시체로 발굴된 6세 서니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죽은 자가 있다면, 남겨진 자가 있고, 그 죽음을 소유한 자들은 죽은 자가 아닌 남겨진 자들이다. 아이의 죽음은 작은 개척도시를 통채로 흔들고, 아이의 부모는 이성을 잃어 독미나리를 먹은 후 부활을 믿기 시작한다. 같은 날 마차 사고로 죽음에서 구조된 덴워드 이카드가 소유했던 장검이 부활의 도구로 부각되면서, 아이의 죽음은 마을을 큰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뜨리고, 오버 더 시리즈에서 막지 못한 더 많은 이의 죽음을 소환하기에까지 이른다. 


전작에서 가장 신뢰하는 친구 케이토의 약혼녀 지데를 죽여야 했던 티르는 비록 그 행위가 보안관보로서 도시를 지키기 위한 직업적이고 정당한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잠재 의식은 그 살인의 밤을 지우고 싶다. 이야기가 진전됨에 따라  누구도 믿지 않았던 부활은 뭔가를 대가로  지불하고 교환 가능한 선택이 된다. 인간이 부활을 얻는 대가로 지불해야 할 것은 식물을 태우지 않는 것. 불 없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부활이 보장된다면 추운 겨울은 죽었다가 여름에 다시 태어나면 될까. 부활에 대한  찬반 논쟁은 때로 코믹하고 때로는 깊은 철학적 명제를 제시하며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크게는 제국을 지키기 위해 주민과 숲을 파괴함으로써 부활을 막고자 하는 덴워드의 논리와 죽은 자를 부활시키고 싶은 몇몇 주민의 뜻으로 양분되지만, 도시는 불능 상태가 되고, 죽은 지데의 부활과, 그녀가 죽음으로 인해 빼앗겼던 소중한 삶을 목격한 티르는 딜레마에 빠진다. 



원본과 사본, 정체성 , 그리고 나하다.


1인칭 화자는 자신이 티르 스트라이크라며 그 이름을 밝히고, '삼십여년 전부터 티르 스트라이크하고 있다'는 투덜거림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 가 동사가 되는데, 타동사도 아닌 자동사다. 자신을 하다니, 기묘하고 신선한 발상이다. 하긴, 스트라이크라는 이름은 가지고 놀기 좋은 이름이긴 하다.  그런데 지금은 티르 스트라이크하기 힘든 시기란다. '나'라는 유일무이한 정체만이 할 수 있는 사유와 기억과 행동과 표정과 말투 그 모든 행위(행위라는 말 밖에는 그 모든 내가 하는 걸 설명할 길이 없는 게 답답하다)인 내가 내가 되게 만드는 것들을 하기 어려운 시대라는 거다. 이야기의 후반부에 가서야 비로서 '나를 하는 것'이 오버 더 시리즈에서 온갖 (마법적) 종족들이 활개치는 개척도시에서 보안관보로서 ‘나’의 직업적 행위와 고초 뿐 아니라, ‘나’의 전체에 대한 정체성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내가 비누풀인지 티르 스트라이크인지, 둘 다인지 독자로서는 완전히 이해불가능한 상태를 경험할 때, 화자인 티르 스트라이크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자신이 아닌 자신의 모든 정체성을 뒤집어 쓴 정교한 복제품이며 그 본질은 비누풀이라는 걸 알고, 그걸 독자에게 어떻게든 설명하지 못해 전전긍긍한다. 이 이상한 타자로서의 나와의 동거와 향후 시점의 분리는 점차 식물 전체와 죽은 이들의 복제로 확대된다.  지데를 죽인 티르는 지데의 사본을 원본과 구분하지 못했다. 지데를 사랑한 케이토는 눈앞에서 생생하게 티르 뿐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지데라고 믿고 있는 여성이 사실은 지데가 아님을 증명해 내며 눈물을 흘린다. 위어울프가 팔찌를 벗고도 변신하지 못한다면 정교하지 못한 복제품이다. 자신이 지데라는 믿음까지 완벽하게 복제한 복제품은 변신이라는 본질적 복제에 실패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은 예상치 못한 버그일까. 혹은 반복되는 복제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중유한 본질을 잃게 됨을 뜻하는 걸까.  



부활은 과거와 미래, 파괴와 회복에 대한 주제로 연결된다.  과거에 죽은 자들은 살아나면 이제까지 알고 있던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케이토는 사본을 사랑하면 왜 안될까. 똑같은 눈동자를 하고 똑같은 웃음을 짓고, 똑같이 말하고 있는데 탄로난 일부의 정체성의 결핍을 무시하면 케이토의 미래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고, 친구의 약혼녀를 죽였다는 티르의 과거는 지워지는데. 결국, 티르에게 내가 내가 아니라 비누풀인데, 내 정체성과 내 기억을 모두 지니고 있다면 무엇이 나를 비누풀이게 하는가하는 문제가 이 부활의 복제 문제와 다르지 않다. 가장 인상적이면서 무언가가 가슴에 찡하고 박혀오는 듯했던 장면은 다름아닌 10명의, 자신이 모두 서니라고 믿고 있던 서니 복제품 앞에서 누가 더 서니인가의 선택 앞에 직면해야 했던 부모들의 당황한 모습이다. 그들은 이제 서니의 완전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변하지 않는 세계


작은 개척 마을에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다양한 종들의 개성이 인상적이었다. 오크와 유니콘 뱀파이어 엘프 웨어울프 등 알려진 종들도 있지만 야채 뱀파이어와 카닛 아니제이와 같이 생소한 족속들도 있다. 이들 다양한 족속들의 생물학적 다채로움과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작은 마을에서 어느 족속도 생물학적 혹은 문화적 우월성에 기반한 계급적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모습은 까마득한 선사 시대에 흩어져 이주하면서 만나는 모든 호모 종의 씨를 말리고 멸종에 이르게 하고 피부색과 얼굴형의 작은 차이로 노예를 구분했던 현실적 인간의 행태와 차이를 보인다. 티르 스트라이크는 인간이지만 어떤 우리 인간이 현실 속에서 누리는 인간으로서의 특권도 없으며 오크인 보안관의 부하직원일 뿐이고 발이 닳도록 마을의 크고 작은 사건을 따라다니며 해결사 역할을 하는 지극히 평범한 개체일 뿐이다. 


조금만 달라도 괴물로 치부하는 인간들의 세계에서 이렇게 다양한 족속들이 인간적인 지성과 시스템을 갖추고 살아간다는 설정은 신화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신적 존재가 부재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만담처럼 푸근하고 따뜻하다. 작가 특유의 개성있고 센스있는 혼자말과 드립력이 특히 가독성과 몰입을 높인다.  그런데 이 작품은 설사 인간이 더 존엄하다는 인간적 세계관을 대입한다고 하더라도 작품의 서사가 전체 식물계와 대립하는 동물(?)계의 대립구도로 확대되면서 누가 인간이건 누가 ‘괴물’이건 그런 인간 더 존엄의 문제는 지엽적인 게 되어버린다. 


삶이 존엄한 건 유일하게 공평한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부활이 죽음 만큼이나 공평하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는 낮잠 만큼이나 가벼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리 재고 저리 재고 곰곰 생각하여 역시 죽음은 한 번에 영원에 도달하는 게 덜 골치아프다고 결론내리겠지만 만일 그 선택이, 청천벽력 같은 급작스런 죽음 앞에서라면 어떨까.  전 인류를 대상으로한 투표로 부활의 가부가 결정된다면, 나는 어떤 편에 설 것이고 또 전 인류가 하나의 목소리로 내린 결론은 어느 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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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서재에 마가렛 애트우드의 원서 Testaments가 종종 떠서 무슨 일인가 봤더니, 시녀이야기 2탄이라는 부제들이 딸려다닌다. 원서를 찾아서 읽는 독자가 많을 정도로 애트우드의 위상이 한국에서 이토록 높은 지는 알지 못했다. 매년 노벨상 후보로 지목되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시녀이야기 자체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중적 인지도가 높기도 하려니와, 패미니즘적 정서를 높은 수준의 독특한 SF 적 상상력으로 담아 내고 있어서 당연한 일이기도 한데, 내 경우 흥미롭게 읽히기는 하는데 원초적인 자극을 지향하는 느낌이어서 그닥 내취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 번 책을 들으면 계속 궁금하게 끝까지 읽게 하는 다이나믹한 서사의 힘을 강하게 분출하는 작가라 언제라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책을 많이 샀다는 뜻)









이 쯤해서 시녀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자. 조지 오웰적 디스토피아에 여성의 인권이 사라진 시대를 그렸다. 사실 주제의식이 너무 선명한 작품은 식상할 것 같고 오웰적 디스토피아라면 읽기 힘들 거 같아서 책을 사두고도 오랫동안 펼치지 않고 미루어 두었다. 읽은 소감을 거칠게 정리하자면《1984》에 《안나의 일기》를 섞어놓은 느낌이다. 애트우드 특유의 거침없는 상상력과 엽기적 장면을 배합한 수작다. 유명 작품은 유명한 이유가 있다.


오웰의 《1984》가 상상의 사회이기는 하나 누구라도 스탈린 통치의 소비에트 연방을 모델로 했다는 점을 알수 있게, 그 사회와 유사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반면 이 작품을 보면 무슬림 근본주의가 장악한 아랍권의 어느 나라들을 떠오른다. 암울한 어떤 미래를 그린 것이 아니라 소설의 출간 시점인 1985년에서 근미래 혹은 현재 역사를 바꾸고 상상의 사회로 대체한 듯 하다. 동시에 해당 서사의 액자 바깥의 에필로그에서 150년 후 미래의 관찰자들을 두어 대체 역사가 이어진 이후의 만 미래가 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점까지 입체적 시각을 보여준다.

에필로그에서 드러나는 이 이상한 계급 사회의 이름은 길리아드이고,  소설의 이야기 전체는 길리아드가 해체된 후 한 여성이 카세트 테이프의 음악 사이에 남긴 기록으로 밝혀진다. 기록이 발견되어 심포지엄이 열린 시기는 2195년으로, 이 기록의 발견은 길리아드 시대에 핍박받은 여성을 생생하게 기록한 의미있는 역사 기록으로 여겨지지만 한편으로는 기록물의 진위 여부 또한 확실치 않다. 만일 조작되었다면 은폐된 시대를 조명하는 귀중한 사료로서의 가치의 필요성 만큼이나, 조작 자체가 내포하는 20세기 말의 역사적 시대적 의미를 대변한다. 에필로그가 전체 서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본문이 고통받는 한 개인을 그렸다면 에필로그는 본문의 화자가 겪은 사회가 전체 인류 역사에서 갖는 인과 관계를  다룬다. 그러므로 에필로그가 비록 짧고 뜬금없기는 하지만 주인공이 처했던 짧은 길리어드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우리가 안나의 일기에서 갖는 감정은 단순하다. 피상적으로만 들리는 홀로코스트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한 개인이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옥죄어오던 삶 속에서 느끼던 공포와 불안의 나날의 생생한 기록은 바로 감정이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본문의 화자(오브프레드 OfFred) 역시 길리어드로 가는 전조 증상에 무감각하게 노출되지만, 본인이 직접 그 사회의 희생양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매일 뉴스에 폭력과 공포가 보도되는 불안한 사회 속에서 그 무엇도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 평화로운 듯 일상을 살고 있다. 그것은 ‘천천히 데워지는 목욕물’처럼 조금씩 그들에게 다가왔고 끓기 얼마 전까지도 무지로 이겨낼 수 있는 상황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무시하며 살았다. 무시한다는 건 무지와 달리,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즉시 변화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천천히 데워지는 목욕물처럼 자기도 모르게 끓는 물에 익어 죽어 버리는 거다. 물론 신문에는 많은 뉴스가 있었다. 도랑이나 숲에서 발견된 시체들, 둔기에 맞아죽거나 사지가 절단되거나, 속된 말로 성폭행당한 시체들. 하지만 그런 건 다 다른 여자들 이야기였고, 그런 짓을 하는 남자들도 다 다른 남자들이었다. 그 누구도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신문에 나는 이야기들은 우리에겐 꿈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이 꾸는 악몽처럼. 진짜 끔찍하지 않니 하고 우린 말하곤 했고 실제로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끔찍하다는 게 도통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너무 신파조여서 우리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만 같았다. 우리는 신문에 이름이 오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신문 가장자리의 여백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게 훨씬 더 자유로웠다. 우리는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간격 속에서 살았다.”(본문 인용)

하지만 신문 속 이야기들은 간격을 점점 좁혀오고 결국 그녀와 모이라가 신문에서 나는 이야기 자체가 된다. 끔찍한 이야기.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공포 속의 주인공. 처음에 그녀는 자신이 이제껏 모아온 계좌 속의 돈이 더이상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가게에서 카드 결재를 시도할 때 깨닫게 된다. 직장에서 당신들은 해산되었음을, 더이상 직업을 가질 수 없음을 알려준다. 대통령이 사라지고 국회가 해산되고 계엄군이 정치적 주최가 되었을 때까지, 그건 나의 일이 아니니까 상관없었던 일들이, 계좌가 동결되고 여성이 인간의 자리에서 밀려나 어떤 다른 무언가가 도구인지 소유물인지 알지도 못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그에 따라 어느날 갑자기 법적으로 재산은 물론 직업조차 가질 수 없게 된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 모든 전조들이 결국은 나의 이야기였음을 이해한다. 


그렇다. 방관하면 그 방관의 대상이 어느 새 나의 이야기가 되어도 더이상 그 이야기를 들어줄, 저항의 공간이 사라진다. 망명 계획은 허술했고, 함께 도망치던 남편은 생사조차 모르고 아이는 빼앗겼고 자신은 정신 교정을 받고 어느 사령관의 집에 보내진다. 사령관의 집에서 사령관의 시녀가 되었다는 의미는 단순하다. 이보다 더 단순할 수 없다. 자궁일 뿐 한 인간이 출산 이외에는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우리는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하다. 성스러운 그릇이자 걸어다니는 성배(聖杯)다.”(본문 인용)

핵전쟁과 환경 파괴 환경 오염 성병 등으로 추정되는 이유는 이렇다. 불임이 늘고 인구가 줄자 사회는 불안해지고 폭력이 만연하는데 패미니즘의 영행으로 여겅의 인권이 신장되고 직업과 재산을 가진 여성들이 늘자 사회 불안을 ‘성경’에 반하는 여권 신장으로 본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성경’ 말씀에 따라 여성의 인권, 재산, 직업, 아이까지 강탈한 후 임신 가능한 여성들을 불임 가정에 보낸다.이런 씨받이들의 사회적 구분은 시녀라고 불리는 계급이고 만일 출산에 성공하지 못하면 콜로니로 유배되어 방사선이 노출된 채 핵폐기물을 치우며 폐기된다.

자신의 이름조차 잃고 주인의 소속으로 오브 주인이름의 형태로 불리는 시녀들은 의복의 색깔이 결정하는 신분이 요구하는 역할 즉 출산 이외에는 아무 존재 의미가 없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빈궁이라 불리는 불임의 아내들이다. 워낙 인구가 줄고 있어 성공적인 출산이 진급을 결정하는 사회에서 시녀의 역할은 필요악임에도 불구하고 아내들은 이 씨받이 시녀들에게 경멸감을 숨기지 않는다. 여기에서 근원적 모순을 본다. 인간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구조적으로)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계층을 얼마나 경멸하고 멸시했던가. 필요해서 가두고 남편과 섹스를 강제하면서도 그 행위에 의한 혜택은 자신과 남편이 공유하게 될 것이면서 마치 시녀들의 태생이 더럽다는 듯이 자기 남자를 유혹해서 빼앗는 사람을 대하듯 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출산을 의한 섹스에 은밀한 공간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인터코스에 매뉴얼이 있는 건지 의식이 치러지는 날은 무슨 종교 의식처럼 경건함을 추종한다.

쓰리섬에 대한 묘사는 대단히 형식적이고 엽기적이다. 시녀와 몸을 포갠 아내들은 숨죽여 울며 아이를 만드는 과정에 동참하고 있다는 환상 속에 억지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출산은 더더욱 엽기적이다. 그것은 구역의 축제다. 고대 이교도들의 새디스트적 봉헌 의식에 가깝다. 모든 시녀들이 보는 앞에서 출산의 고통을 맞는 시녀와 그것을 지켜보며 정신적으로 고취되어 그의 고통을 경험하는 분위기가 그렇다. 해당 아내가 두 개의 출산 의자 중 윗 의자에 앉아 출산자와 똑같은 포즈를 취하고 케어를 받고 소리까지 지른다. 그렇게 하면 시녀가 낳은 아기가 마치 자신의 아기라도 된다는 듯이.

나치가 그러했듯이 스탈린이 그러했듯이 수많은 죽음이 전시된다. 공포는 단기간 내에 정권을 확립하는 데 효과가 있다. 한 마디 말이 한 발자국의 어긋난 경로가 혹은 나도 모르게 비어져 나온 웃음이, 참고 참아도 통제할 수 없어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 자신에게 하얀 올가미를 씌우고 바람에 휘날리는 빨래처럼 목매달 수 있다는 걸 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오늘을 살며 오늘을 믿을 수 없는 오브프레드는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 하루를 견디고 있을까.

“그렇게 믿을 필요가 있다.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 이런 것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심지어 아무도 없더라도 말이다.”(본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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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인간의 육신이란 풀잎 같아. 자기 의지로 되는 게 아니라고 리디아 ‘아주머니’는 말했다. 하느님이 남자들을 그렇게 만드셨지만, 여러분들은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어. 여자들은 다르게 만드셨지. 선을 긋는 건 여러분에게 달린 거야. 그러면 훗날 그들이 여러분에게 고마워할 거야.

행주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가끔 이렇게 문득 비치는 정상적 삶의 흔적이 매복하고 있던 병사처럼 옆에서 나를 덮칠 때가 있다. 평범한 것들, 일상적인 것들, 세찬 발길질처럼 과거를 환기시키는 것들. 문맥에서 떨어져 나온 행주 한 장을 보며 나는 그만 헉 하고 숨을 멈춘다.어떤 사람들에겐, 어떤 면에선, 세상이 그렇게 많이 달라진 게 아닌 것이다.

“누가 목욕을 시키지? 나는 이 닭을 보들보들 연하게 만들어야 되는데.” 리타였다. 내가 아니라 코라한테 한 말이다. “내가 나중에 할게요. 먼지 털고 나서.” 코라가 말한다. “그럼 되겠네.” 리타가 말한다. 두 사람은 내가 귀머거리인 양 말한다. 그들에게 나는 집안일, 그것도 숱한 일거리 중에 하나일 뿐이다.



나 또한 메마르고 하얗고 딱딱한 과립형 분말이 되어 있다. 마치 그릇 가득 담긴 말린 쌀 속에 손을 담그고 휘젓는 느낌이다. 꼭 눈송이 같다. 어쩐지 죽은 듯한, 버려진 듯한 느낌이 감돈다. 나는 마치, 한때는 갖가지 사건이 일어났으나 이제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방 같다. 창 밖에서 자라는 잡초의 꽃가루가 바람에 날아 들어와 마룻바닥에 먼지처럼 쌓일 뿐.

너희처럼 젊은 사람들은 고마운 줄을 몰라. 너희에게 이런 세상을 만들어 주려고 우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상상도 못할 거야. 저 친구 좀 봐, 당근을 썰고 있잖아. 바로 저걸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몸을 탱크가 밀고 지나갔는지 모르는 거냐?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말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말이란 결코 정확할 수 없으며 언제나 뭔가 빠뜨리기 때문이다. 현실에는 너무 많은 단편들이 있고, 관점들이 있고, 반목들이 있으며, 뉘앙스가 있다. 이런 의미도 저런 의미도 될 수 있는 몸짓들이 너무 많고, 말로는 절대로 완벽하게 표현할 길 없는 형상들도 너무 많으며, 허공에 떠다니거나 혀끝에 감도는 향(香)도 수없이 많고, 어중간한 색채들도 한없이 많다.



나는 그 여자에게서 뭔가를 빼앗고 있었다. 좀도둑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빼앗은 것은 그녀가 전혀 원하지 않았고, 그녀에게는 쓸모도 없으며, 심지어 스스로 거부한 것이라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여전히 그건 그녀 것이었고,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 신비스런 ‘그것’을 내가 빼앗아 버린다면, (사령관이 내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극단적인 감정이라고 여기는 것을 나는

출생률이 다시 일정 수준을 회복하면 이 집 저 집으로 옮겨다니지 않아도 될 테지. 인력이 많아질 테니까.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애정의 유대가 생겨날 거야.

나는 기억한다. 혀가자미, 대구, 황새치, 가리비, 참치, 속을 채워 구운 가재, 분홍빛 통통한 살을 지글지글 구운 연어 스테이크. 그것들이 전부 고래처럼 멸종되어 버렸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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