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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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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은 사람이 죽기전에 체결하지만 계약의 이행은 사람이 죽어야 이루어진다.  죽고 난 다음에 계약자가 그 계약을 이행했는지 안했는지는 죽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살아있는 자는 이미 죽은 사람이 죽기 전에 바랐던 죽음 후의 일을 위해, 죽기 전에 남겨 놓은, 삭제되기 바랐던 것들을 찾아 때로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죽은 이는 죽은 후에 남겨지기를 원하지 않았던 자신의 흔적들이 실제로 지워졌는지 안 지워졌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죽음 후에 그 아무것도 없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의 무의를 위해 살아 있는 동안 쓸 수 있는 대가를 우선 지불한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까. '왜'라는 질문은 필요없다. 누구나 남기고 싶은 것이 있고 지우고 싶은 것이 있다. 죽기 전에. 사람이 동물의 가죽 대신 남긴다는 이름 석 자에 따라다닐 불명예와 치욕과 수치의 흔적을 함께 남기고 가고 싶지 않다는 건 사후 세계를 믿던 안 믿던 인간의 본능일 지도 모른다. 살아있을 때 사랑받고 싶은 것, 죽었을 때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은 것. 비밀이란 그런 것이다. 수치와 불명예 치욕, 그리고 탐욕스런 자신의 모습...

 

죽으면 없애야 할 물건이라면 살아있을 때 본인이 직접 없애는게 좋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죽으면 없애야 할 치욕이 살아 있을 땐 마지막 숨을 쉴때까지 붙들고 싶은 욕망이다.  죽으면 없애고 싶은 무의미들이 살아 있을 땐 삶의 이유다. 영혼이 숨을 쉴 때 그 영혼 곁에 찰싹 붙어 자아가 되는 것이, 죽어서 영혼이 없어지면 이름과 함께 하기를 거부하는 것들. 사라져야 하는 것들. 소중하면서도, 무용한 것. 애착이면서도 모욕인 것. 그것이 딜리팅의 타겟이다.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 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328

비밀의 가치에 따라 비용은 달라진다. 그 비밀을 없애기 위해 얼마나 위험을 무릅써야 하느냐에 따라 가격이 매겨져야 하겠지만, 구동치는 얼만큼의 비용을 지불하고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비밀인가에 따라 가격을 정했다. 그리고 나서 구동치는 삭제하기로 약속한 죽은 사람의 비밀을 완전삭제하지 않고, 자신만의 깊은 우물 속에 숨겨 두었다. 그 우물 속 비밀은 현실의 세계속에서는 삭제되었지만, 구동치에겐 자신만의 비밀이 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그들만의 이야기를 숨겨두고, 구동치 자신도 그 속에 침잠했다.  그가 삭제해야 할 물건들을 삭제하지 않고 혼자만 아는 장소에 깊숙히 보관했던 이유를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의 임무 수행이라는 것이 결국  아무 것도 손에 쥘 수 없는 허무 자체이다. 임무는 완수했으나, 일을 맡긴 고객은 이미 죽어 없다. 그를 잘했다 못했다고 평가해주거나 감사해할 고객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라야 일에 착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불법적인 방법으로, 때로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일을 계속 해야만 하는 데서 느꼈을 공허감을 구동치는 죽은 사람의 은밀함을 공유하는 데서 찾았을까.

 

나는 어쩌다 딜리터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를 없애기 위해 이렇게 힘들게 찾았내야 할 때, 어렵게 찾아서 없앴지만   고마워 해줄 사람은 이미 죽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불현듯 딜리터로서의  환멸이 찾아 들었다. 손에 쥘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173

 

계약은 사람이 죽기전에 체결하지만 계약의 이행은 사람이 죽어야 이루어진다.  죽고 난 다음에 계약자가 그 계약을 이행했는지 안했는지는 죽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이미 죽은 사람이 죽기 전에 바랐던 죽음 후의 일을 위해, 죽기 전에 남겨 놓은, 삭제되기 바랐던 것들을 찾아 살아있는 자는 때로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죽은 후에 남겨지기를 원하지 않았던 자신의 흔적들이 실제로 지워졌는지 안 지워졌는지 죽은 이는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죽음 후에 그 아무것도 없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의 무를 위해 살아있는 자는 살아 있는 동안 쓸 수 있는 대가를  죽음 후를 위해 우선 지불한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까. '왜'라는 질문은 필요없다. 누구나 남기고 싶은 것이 있고 지우고 싶은 것이 있다. 죽기 전에. 사람이 동물의 가죽 대신 남긴다는 이름 석 자에 따라다닐 불명예와 치욕과 수치의 흔적을 함께 남기고 가고 싶지 않다는 건 사후 세계를 믿던 안 믿던 인간의 본능일 지도 모른다. 살아있을 때 사랑받고 싶은 것, 죽었을 때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은 것. 비밀이란 그런 것이다. 수치와 불명예 치욕, 그리고 탐욕스런 자신의 모습...

 

죽으면 없애야 할 물건이라면 살아있을 때 본인이 직접 없애는게 좋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죽으면 없애야 할 치욕이 살아 있을 땐 마지막 숨을 쉴때까지 붙들고 싶은 욕망이다.  죽으면 없애고 싶은 무의미들이 살아 있을 땐 삶의 이유다. 영혼이 숨을 쉴 때 그 영혼 곁에 찰싹 붙어 자아가 되는 것이, 죽어서 영혼이 없어지면 이름과 함께 하기를 거부하는 것들. 사라져야 하는 것들. 소중하면서도, 무용한 것. 애착이면서도 모욕인 것. 그것이 딜리팅의 타겟이다.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 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328

비밀의 가치에 따라 비용은 달라진다. 그 비밀을 없애기 위해 얼마나 위험을 무릅써야 하느냐에 따라 가격이 매겨져야 하겠지만, 구동치는 얼만큼의 비용을 지불하고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비밀인가에 따라 가격을 정했다. 그리고 나서 구동치는 삭제하기로 약속한 죽은 사람의 비밀을 완전삭제하지 않고, 자신만의 깊은 우물 속에 숨겨 두었다. 그 우물 속 비밀은 현실의 세계속에서는 삭제되었지만, 구동치에겐 자신만의 비밀이 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그들만의 이야기를 숨겨두고, 구동치 자신도 그 속에 침잠했다.  그가 삭제해야 할 물건들을 삭제하지 않고 혼자만 아는 장소에 깊숙히 보관했던 이유를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의 임무 수행이라는 것이 결국  아무 것도 손에 쥘 수 없는 허무 자체이다. 임무는 완수했으나, 일을 맡긴 고객은 이미 죽어 없다. 그를 잘했다 못했다고 평가해주거나 감사해할 고객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라야 일에 착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불법적인 방법으로, 때로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일을 계속 해야만 하는 데서 느꼈을 공허감을 구동치는 죽은 사람의 은밀함을 공유하는 데서 찾았을까.

 

나는 어쩌다 딜리터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를 없애기 위해 이렇게 힘들게 찾았내야 할 때, 어렵게 찾아서 없앴지만   고마워 해줄 사람은 이미 죽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불현듯 딜리터로서의  환멸이 찾아 들었다. 손에 쥘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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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혁 작가는 소설가로서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는 이동진의 질문에 소설을 쓰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초반부는 아직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아 힘이 들고 진도가 잘 안나가지만, 중반을 넘겨 캐릭터들이 각자의 개성을 갖추고 소설적 구도가 자리를 잡고 이야기가 절정을 향해 신나게 질주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독자로서 느낀 것도 작가와 같았다. 그의 고백은 이 책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이야기 초반 거의 1/3 지점까지 작가가 갈피를 못 잡고 힘겹게 써내려 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딱히 어렵게 읽힐 일이 없는 평이한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비중 없는 인물들이 개연성을 찾을 수 없는 잡담들로 노닥거리는 초반부를 읽어 내려가는 것은 조금 인내심이 필요로되었다.. B1F1에서 보여준 그 천연덕스럽고 능청스런 새롭고 신선하고 패기넘치는 재능 있는 젊은 작가는 어디가고 소재에 목마른 진부하고 피곤한 전업 작가가 대신 앉아 있는 건가 싶었다. 중반부가 넘어가자 이야기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사후 딜리팅이라는 매력적 소재를 충분히 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성찰과 사색적인 문장으로 이어갔다면 훨씬 더 깊이 있는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참고로 이 소설은 장르 소설에 가깝다. 조폭들이 활동하는 한국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이야기 구조다. 전개가 자리를 잡아 가면서 캐랙터들과 친해지고 나면 이야기에도 속도가 붙고, 책장 넘기는 속도도 빨라지며, 흥미로와 지지만 내가 애초 김중혁 작가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었나보다. 마침, 소설의 초반부를 설명하기에 딱 알맞는 문장을 책 속에서 발견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의 섹스가 발단,전개,절정, 결말을 보여준다면 배우들간의 섹스는 전개와 결말 뿐이다. 수많은 전개들이 계속 이어지다가 어느순간 끝이 난다. 208.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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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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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속에는 유대인의 역사가 있다. 역사는 성서를 낳았다. 그렇다면 성서는 역사 책인가. 아니다. 성서는 복음서다. 신을 찬양하고 받들며 예수의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다. 동시에 성서는 시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기록 속에서 역사를 축출하는 일에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폭넓은 지식이 필요로될 것이다.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언어적, 문화인류학적 기반지식과, 역사를 해석하고  종교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통찰력, 그리고 무엇보다 숭숭 구멍뚫린 기록의 부재를 틈 빈틈 없이 막아낼 수 있는, 정교한 논리로 무장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수십년동안 이런  작은 단서들을 한줄씩 꿰어 모아 맞춘 퍼즐을 역사라고 부르려면 논리와 감동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기술이 필요하다. 2천년 동안 문명과 문명을 통해, 문화와 문화, 민족과 민족 사이, 대륙을 넘고 대양을 건너 뿌리내린 종교적 믿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빈틈없고 단단한 논리와 설득이 필요하다. 이란 태생, 작가이면서 종교학자, 복음주의 기독교에 심취했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저자 레자 아슬란은 이 일에 도전했다.

 

실존했던 예수, 역사 속의 예수를 당시 사회, 종교, 정치적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거기에서 드러나는 예수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기대했던 모습과 다를 수 있다. 성서의 기록 속에는 2000년 동안 숭배받아온 한 사람의 행적과 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적혀 있다. 그의 메시지는 전파되고 기억되고 확장되어 어떤 하나의 종교적 세계 속에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역사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선언한다. 역사속에서 예수는 혁명가였다고.

 

종교냐 역사냐. 때로 이 둘은 상충한다. 그래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 이 둘이 합치하지 않을 때 선택은 믿음의 양과 학문적 진실이라는 잣대 사이에서  부유한다. 성서의 목적은 복음의 전파이고 역사서의 목적은 전체 맥락에서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목적이 다르면 사건을 기술하는 방법, 사건에서 골라낸 장면이 다르다. 어린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나서 줄거리를 말해보라고 하면 아기들은 영화의 전체 맥락보다는 자기가 기억하는 부분, 인상깊었던 부분만 이야기한다. 영화중 극히 일부분, 아주 사소한 장면 하나가 아이에겐 기억과 재생의 전부가 된다. 응 자동차가 방귀를 뿡 꼈는데 놀랐어.  신발을 물 속에 빠뜨렸는데 잡으려고 뛰어갔는데 신발이 키득 키득 자꾸 자꾸 도망가서 못잡았어. 어른들은 언제 자동차 경적 소리와 관련된 씬이 있었는지, 언제 신발을 가지고 노는 씬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영화를 보고 말하는 장면은 유일하게 재생가능한 장면, 유일하게 기억하고 기록 가능한 장면이다. 그러니까 영화 전체의 줄거리와 맥락이 역사 라고 한다면, 6세 짜리 아이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다시 말로 기억을 재생해낼 수 있는 몇몇 장면들은 성서 속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저자의 역사적 맥락으로 해석하는 나사렛 예수와 성서 속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를 그렇게 이해했다.

 

이렇게 말 해도 될까. 나는 종교에 대해서 말할 때 조심스럽다. 누군가가 본 것을 내가 못 보았다고 '그것은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본인이 두 눈으로 확실히 보았을 때 본 사람은 단호하게 '그것은 있다'라고 말한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극명해서 충돌은 불가피하다. 조금 있는 것과 많이 있는 것, 조금 없는 것 많이 없는 것 사이에는 수많은 타협이 채워질 수 있지만,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 안보였는데 보았다고 얘기 하는 것인지, 보아 놓고 못봤다고 시침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 불확실하고 혼란스런 종교를 떠난 이유는 보이는 것과 보았다고 리드하는 사람이 추구하는 세계와의 모순 사이에서 갈등했고 언젠가 봤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꺼라던 꿈을 잠시 접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정말? 정말 내가 종교를 떠났을까? 다른 말로, 내가 떠났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곳에 속해 있었고, 그곳에 속해 있었다고 말 할 수 있을 만큼 그러니까 부활한 예수의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다시 다시. 내가 뭘 보았거나 말았거나 내가 정말 떠나기나 한걸까. 나는 거기 미련이란 걸 두고 껍데기만 빠져나와 홀가분히 잊어버리고 말면 될 것이었나.

 

이 책은 역사서이다. 적어도 세 개의 파트 중 첫번째 파트는 완전히 역사서이다. 예수가 태어나가 약 1세기 전부터 십자가 사건이 있고 난 후 1세기 후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의 로마 점령과 유대인들의 저항등의 고대 역사를 매우 흥미롭게 전하는 대중을 위한 역사서다. 책의 반을 역사에 할애하는 이유는 성서 속 예수가 살았던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다. 예수를 역사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배경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 아슬란은 그 시대의 역동적인 역사적 배경을 흥미롭게 그려냄으로써 역사적 인물로서의 혹독한 변혁의 시대를 살았던 역사적 예수를 독자에게 설득하는데 이미 반쯤 성공했다. 여기에 역사의 본질이 있다. 개인을 보면 답이 안나오는 것도 역사 속에서 보면 한 줄기 빛처럼 개인의 행보에 대한 그 목적과 의식이 선명히 보인다. 역사속에서 유대의 지도자들,  대제사장들과 귀족 계급들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고 그들의 개가 되어 민중을 픽박하고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려 신과 예법을 이용했다(특히 신성모독과 압제에 대한 저항으로 400년만에 이민족의 통치에서 벗어나 겨우 한 세기 동안 자기들의 '신성한 땅'을 스스로 통치한 하스모니아 왕가의 후손들은 스스로 나라를 로마에 바쳤다.) 백성들은 민족의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했다. 로마 총독과 점령군을 몰아내고, 썩어 빠진 유대 종교 지도자와 유대 귀족들을 파멸시키고 민족을 해방시키고 그들의 통치할 실제적 왕이 필요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혁명가가 되어  메시아를 자처하고 민족의 해방을 꿈꾸며 대중을 선동하고 지배계급에 폭력적으로 저항하며 다녔고 그러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거나 석형에 처해졌다. 예수도 그들 중 하나였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수많은 혁명을 꿈꾸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것이 레자 아슬란이 역사속에서 찾은 진실이고, 단호하게 내린 결론이다.

 

보이지 않는 것 두 개의 상반된 견해. 모순되고 상반된 견해들이 공존한다면, 개인의 선택에 따라 진실은 편리하게 공존한다. 개인이 직접 볼 수 없다면 믿는 것이 진실이 되고, 개인이 직접 보았다면 본 것이 진실이 된다. 어떤 한 개인이 보았다는 사실이 역사와 논리에 모순된다면 개인이 본 것은 쉽게 허상이 될 수 있지만, 많은 집단이 2천년을 넘게 보았다고 믿어왔을 때, 그것이 역사와 논리에 모순된다면 역사는 시간 속에 묻혀버린다. 어쨌든 과거는 시간 더미 속에 묻혀버렸다. 나는 궁금하다. 진실을 본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본 것과 믿는 것의 차이를 떼어낼 수 있는지. 음성을 듣고, 방언을 하고, 십일조를 내고,  월급보다 많은 건축 헌금을 내고, 평온한 주말 집집마다 벨을 눌러 아침잠을 깨우고 말씀을 전하러 다니는 선량한 교인들 하느님의 자식들, 또 대형교회의 비리와 목사직의 제왕적 세속을 지지하고, 더 큰 파이 조각을 갖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 그들이 진정 본 것. 그들이 들은 진짜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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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현대문학의 거장 필립로스에게 퓰리처 상의 영광을 안겨준 작품 미국의 목가가 드디어 국내 출판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에브리맨>과 <포트노이의 불평>만을 읽어보았지만,  필립 로스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서 제일 강렬했던 시절인 1960년대와 그 시대를 관통하던 격동을 잘 담아낸, 자신이 완성한 서른한 편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는 <미국의 목가>는 국내 번역본은 구할 수 없었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1997년에 발표되었으나, 국내 번역본은 처음 출판된다.  이 작품에서 필립로스는 이제껏 싸워왔던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벗어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몰락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팍스아메리카나의 위상에 도취되어 한껏 달아오른 미국의 취기가 베트남전쟁의 실패와 맞물리며 어떻게 한순간에 사라지는지를, 그 몰락의 파도 속에 개인의 삶이 어떻게 비극 속으로 휩쓸려 가는지를 예리하게 펼쳐 보인다.'고 한다. 기대되는 책이다.

 

타임리핑 이라면 언제든지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소재이다.  제이슨 모트 장편소설. 군더더기 없이 우아한 문체와 깊은 감정 표현으로 푸시카트 문학상에 노미네이트된 제이슨 모트. 돌풍처럼 등장한 신인 작가 제이슨 모트는 <더 리턴드>에서 인간의 본질과 믿음, 도덕성, 사랑, 그리고 책임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해럴드와 루실 부부의 아들 제이콥은 1966년 여덟 살 생일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은 제이콥이 없는 삶에 익숙해져 갔고 그들의 상처는 시간의 은총으로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불가사의하게 피로 범벅이 된 제이콥이 문 앞에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들의 사랑스러운 아이는 여전히 여덟 살이었다.

제이콥 때문에 시간의 흐름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는 더 완벽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제이콥은 그 오랜 세월을 보란 듯이 건너뛰어 예전과 똑같은 아이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제이콥의 불가사의한 귀환은 전 세계적으로 죽었던 이들이 살아 돌아오는 전대미문의 현상 중 하나였다. 전 세계에서 죽었던 이들이 살아 돌아오고 있었다.

 

 

27살에 유학생 신분으로 처음 미국 땅을 밞은 후, 천안문 사테로 이민자가 되기로 결심한 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과정이 소설의 내용인 듯하다. 고단한 이민 1세대의 삶과 성취를 그려낸 소설이다.  <기다림>으로 으로 펜 포크너상과 전미도서상을 동시에 수상하고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까지 오르는 성과는 영어를 Second 언어로 습득한 이민 1세대에게는 실로 놀라운 성취일 듯하다. 시공사에서 나왔다. 두 권인데 각 권 500~600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

 

 

 

 

 

 

 

딱 1년 전 소금을 출간하고 나서, 1년만에 새 소설을 냈다. 출판사 홈피에서 소개하는 줄거리가 흥미롭다.

 

주인공 ㄱ은 어렸을 때 오빠와 부모를 차례로 잃었으며, 한때 작가를 지망했고 결혼에 실패한 여자로 지금은 '소소'시에 내려와 살고 있다. 남자인 ㄴ 또한 어렸을 때 형과 아버지가 모두 1980년 5월, 광주에서 살해당하고 어머니가 요양소에 가 있으며, 그 자신은 평생 떠돌이로 살아왔다.

또 다른 여자 ㄷ은 간신히 국경을 넘어온 탈북자 처녀로, 그녀의 아버지는 국경을 넘다가 죽고 어머니는 그녀가 증오하는 짐승 같은 남자와 함께 살고 있으며, 그녀 자신은 조선족 처녀로 위장해 어머니에게 돈을 부쳐야 하는 고된 삶을 살다가 소소까지 찾아들었다. 이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파르게 넘어온 자들이 소소에 머무르게 된다.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소소한 풍경>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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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2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4-05-02 11:30   좋아요 0 | URL
앗, 어디에 연결해놨을까요. 저도 방금 서재 가니 제 답글이 안연결돼있어서 어디에 연결되어 있나 찾다 찾다 그냥 왔는데..
판매하고 있기에. 그냥 추가했는데.. 6월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ㅎㅎ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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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서른 중반, 매일 아침 절망과 함께 눈을 뜨던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 1967년 어느날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우연히 조우한 후 그에게 세상은 이전과 달라지기 시작한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죽은 1979년까지 결핍과 냉소를 겉옷처럼 걸치고 다니던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우정과 그를 향한 숭배, 그리고 그의 열정과 천재성과 순수함과 도발적 광기에 대해, 온전히 그를 위해, 그만을 위해, 그만에 대해서 한 권의 책이 될 글을 썼다. 소설이라는 장르로 출판되었으나, 소설적 구성은 완전 파괴되어 서사라는 것을 건져내기 어렵고, 사건과 인물이 어느만큼 허구가 가미된 것인지도 힌트조차 없다. 

 

줄바꾸기 없이 한 문단으로 구성된 하나의 책. 하나의 소설. 이것이 오스트리아의 천재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특징짓는 요소라고 하니, 작가의 이 어이없는 행간없음에 우선 집중해보고 싶다. 왜 문단을 바꾸지 않았을까. 작가는 1931년 생이고, 67년이라면 36살의 나이에 그를 만나 48세의 중년의 나이에 그가 그토록 숭배하던 친구, 그의 삶에서 많은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해준 영혼의 친구 파울을 떠나보냈다. 처음 파울을 만나기 몇년 전부터 작가는 병적인 침울 상태에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을 둘러싼 무의미함에 저항하며 발버둥쳤지만 도리어 그 무의미함 속으로 깊이 침몰하고 있었고, 그런 무의미함 속에서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혐오하며 삶의 목적을 상실하고 있던 상태라고 했다. 그러나, 작가 연보를 찾아보니, 작가의 이런 고백과는 달리 이 기간동안 작가는 문학가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존재를 인정받기 시작한다. 56년부터 산문, 시집, 희곡 등을 출판하고 희곡이 초연되었으며 63년 첫 소설이 신문지상에서 중요 문학적 사건으로 평가받은 이후 파울을 만나기 직전인 64년 65년에 율리우스 캄페 상, 브레멘 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휩쓸기 시작하며 전성기에 입성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그는 오랜 교육과정과 습작 등의 시기를 거쳐 마침내 인정받고 전성기를 보내기 시작했을 때 반대로 절망하고 있었다.

 

1982년에 출판된 이 소설은 친구 파울이 죽은 직후 2~3년 안에 쓰여진 것이다. 그리고 그 행간없음이 뜻하는 건 파울만을 위한, 파울에 대한, 파울과 함께한 것들만 다룬다는 작가의 의지일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는 죽어가고 있는 친구를 12년동안 응시하며 그 속에 자신을 투영하였다. 그와 함께 하며 보낸 음울과 조소와 광기로 가득찬 그 날들 속에서 축복받은 순간들을 기억했고 그 속에서 자신을 찾았다. 한행 한행 죽음을 향해 달려가던 파울의 침울한 기록들로 채워가며, 파울의 죽음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죽음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과 그것을 다시 이어주는 끝도 없는 문장들의 변주를 통해 파울을 알게된 12년 그 긴 시간의 기록을 단 한 문단 속에 채워 넣고, 가두었으며, 그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고집스럽게 획일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설명하였다.  


파울이 열정과 광기로 죽음에 가까와지는 동안, 작가는 열정과 질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오르내렸다. 이렇게 열정과 광기와 질병이 두 사람 사이를 관통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파울의 인생에서 고귀한 가치를 찾는다. 그는 파울이 자신의 존재를 성향과 능력 그리고 욕구에 맞게 유용한 방식으로 향상시켜 주고 그의 삶 자체가 가능하도록 그를 지탱시켜 준 사람에 속한다고 적고 있다. 또한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해도 자유롭게 대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동성 친구라고 고백하고 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이러한 고백들은 비트겐슈타인이 그토록 치열하게 심취해있던 음악이라는 것의 테마처럼 변주곡의 곳곳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다 흩어지며 길고 긴 한 문단의 전체를 관통하며 흐른다.

 

지금 일월의 냉기와 일월의 공허를 함께 이겨내기 위하여 내 곁에 있어 줄 산 자는 한 명도 없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과 함께 하면서 혹독한 시기를 극복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모든 죽은 자 가운데서 최근에, 그리고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인물은 내 친구 파울이다. 115

 

파울은 현실 감각이라고는 눈꼽만큼도 갖지 않은 6살짜리 어린애와 같은 순수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작가가 파울을 그토록 좋아했던 것은 그의 지적, 철학적, 문화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언변, 유머 등의 능력 말고도 그가 가진 어리숙함, 전체를 관통하지 않고 표면만을 보는 선량한 마음과도 관계가 있을 듯하다. 대개 인간은 부분만을 보지 않고 전체를 보는 능력이 있다. 내가 지금 이런 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모두 나누어준다고 해서 비참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라질 리도 없을 것이고, 내가 지금 가진 모든 돈을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다 써버리고 나면 훗날 자신이 대신 비참하고 가난해진다는 사실을 꿰뚫어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파울은 일반 사람들과 달리, 가난한 사람의 피상적 모습에 눈물 흘리며 끝없이 솟아나는 샘물 같던 자신의 모든 재산을 인간의 불행과 비참함의 표면만을 위해 던져버리고는, 정작 인생의 후반부엔 모두에게 심지어 그토록 숭배하던 작가에게까지 외면당한채, 불행하고 비참하고 가난하게 죽어갔다.

 

생의 초반에는 소위 영화가 끝이 없다고 하던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유함을 향유하며 훌륭한 보호 아래서 자랐고, 중략. 그 이후에는 자의식이 이끄는 대로 가족들의 의사와 어긋나는 길을 스스로 닦아 나갔고,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표면적 가치였던 것들, 즉 부유함과 풍족함, 그리고 안락한 삶을 버렸다. 정신적인 삶을 영위함으로서 자기구원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중략. 루트비히는 파렴치한 철학자의 길로 나섰고, 파울은 파렴치한 미치광이의 길로 나섰다. 89

그 둘의 우정은 지적 우월함에서 시작된 냉소와 그 지적 우월함의 지나친 열정에서 비롯된 광기의 공유로 이루어졌다. 책을 덮었을 때, 나는 두 사람의 우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우정보다 더 깊은, 두 사람만이 이해하는 어떤 종류의 언어와 문법, 그리고 코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불행하고 슬픈 기록이지만, 그것이 부러웠다. 우리는 친구와 가족과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때때로 어떤 한 가지 이상의 분야에 대해 자신만의 성을 쌓는다. 더 이상 가족과 친구와는 통하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고립되고 홀로되는 섬 하나를 만들고, 틈틈이 그 섬 숲에 숨는다. 그리고 그 섬 속에서 외로움과 우울에 물을 주고 꽃을 피운다. 저자는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신의 섬과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섬 사이에 서로 왕래할 수 있는 작은 구름 다리를 놓았다. 두 섬 사이를 잇는 다리는 서로의 섬을 확장시켜 섬세하고 멋진 둘만의 고유한 세계를 완성시켰다. 그 세계에서 두 개의 섬은 때로 하나의 세계가 되고 우주가 되었다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얼마나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좋아했는지, 결핍과 우울이 가득 드리운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의 이미 완성된 문화 예술에 대한 열정적 사랑과 철학적 사고의 공유와 논쟁 속에서 둘이 얼마나 행복하고 따스한 날들을 향유하고 있었을지 상상해 본다. 그래도 슬프다. 그의 고백이 너무 솔직하다. 비트겐슈타인이 죽기 직전의 몇주, 혹은 몇달, 혹은 몇 년일수도 있는 기간 동안, 그가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다니다가 스스로가 산 사람이라기 보다는 죽음의 그림자에 더 가까운 모습이 되어갈 때, 작가는 그를 외면했다. 둘이 함께 했던 그 멋있었던 유머와 세상을 향해 마음껏 내지르던 냉소와 비난을 그토록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면서도 그가 이제 너무 병약해져 살점이라고는 붙어있지 않은 채 거리를 스쳐가도 그가 더이상 친구를 알아보지 못하자 작가는 그를 외면했다. 그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부정했다. 실제로 그랬었는지 소설적 허구가 가미된 것인지 모르겠는 부분은 가령 이 정도이다. 어떻게 외롭고 병들고 친구를 외면했을까. 하지만 그 외면을 작가는 독자에게 납득시킨다. 그래서 슬프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신랄하게 증오하고 비난했다. 그들의 우정은 증오와 저주와 비난과 조롱과 냉소와 같은 것들이 단단한 기둥을 이루었다.  여름이면 그들은 호텔 커피하우스 테라스의 늘 앉는 자리에서 오직 욕하고 비난하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무언가가 눈 앞에 나타났다 하면 그 즉시 그것은 혹평의 대상이 되었고, 몇 시간이고 지치는 법도 없이 다른 존재들을 헐뜯고 온 세상을 비난했으며, 말로 속속들이 쑤셔대고 처절하게 난도질했다. 그러나 그가 조롱하고 비난하고 맞서는 것들은 모두 자신이 발딛고 서 있는 것들이다. 자연을 증오했고, 문인들을 증오했고, 그들의 조국을 증오했고, 그들을 낳은 대지와 그들을 탄생시킨 가족들을 중오했다. 그들의 질병, 광기가 불러올 죽음으로부터 구해준 의사들을 극도로 저주했고,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예술 작품들, 자신이 쓴 희곡의 초연과 오폐라 초연을 혹평하고 비난했으며 조롱의 휘파람을 불었다, 자신에게 문학상의 주최들을 하나같이 비난했으며, 상금 때문에 똥물을 뒤집어 썼어야 했다고 회상했다,  폐수술 후, 안좋은 도시 공기를 피해 시골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지만, 살기 위해 머물러야 하는 시골을 극도로 저주했다. 원하는 예술 잡지 한권을 구할 수 없는 문화 예술의 향유와는 동떨어진 시골은 그에게 혐오스러운 곳이다. 그에게 시골은 원하는 잡지 한 권을 구하기 위해 지쳐 나가 떨어질 때까지 이 도시 저 도시로 400킬로에 이르는 여행을 하게 하는 저주받은 곳이다.

너도 나도 대도시를 떠나 시골로 몰려가는 것이 유행이다. 대도시에서는 머리를 최대한으로 사용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너무 귀찮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연으로 가려는 진짜 이유이다. 중략. 대도시의 엄청난 장점들을 활용하고 누리기보다는 잘 알지도 못하는 자연으로 도피하여 아둔한 맹목에 빠진 채 자연을 감상적으로 칭송하면서 그 안에서 퇴화해 가는 것이다. 중략. 나에게 적합한 삶은 대도시에 있는데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내 폐를 얼마나 저주했는지 모른다. 108

 

시간과 공간은 한 시점의 기억에서 다른 기억으로 자유롭게 흩어졌다 모아짐을 반복하며 배치되고,  확장하며 변화하다가 다채로운 언어로 변주되며, 클래식 음악처럼 흐른다. 사건은 오로지 사유와 사유가 맞닿는 지점에서 사고를 설명하기 위해서만 작가 임의대로 아주 조금씩 재생된다. 자전적 소설과 에세이의 아무 지점에서라도 서더라도 성립되지 않을 것 같은 무질서한 문장은 우울과 결핍을 열정과 광기로 채색하며 행간 없이 잇는다. 한 문단의 무질서한 자유는 작가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그리움과 회환을 끌어안은 채 변주를 끝낸다. 냉소적 유머와 위트가 끝나고 책을 덮고 푸욱 한숨을 쉬고 나면, 그 다음날부터 울림은 시작된다. 슬픔도 그렇게 계속된다.  아이들이 물 속에 있어서 슬픈 것인지, 인간은 검은 죽음의 그림자를 몰고 다니는 친구의 죽음을 외면해도 그것을 납득할 수 있는 존재여서 슬픈 것인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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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2014-06-11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정갈하고 성실한 리뷰,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다시 갈무리합니다.

CREBBP 2014-06-13 13: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봄밤님 글도 잘 읽었어요. 늘 잘 읽고 있어요.

rendevous 2014-06-15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어요~ 토마스와 파울 (이름만 불러보고 싶은 ^^)와 좀 더 가까워진 기분입니다. 특히 작품 창작기간 전후로 토마스의 상태에 대한 정보가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질문드리면 마지막 단락에 '사건은 오로지 사유와 사유가 맞닿는 지점에서 사고를 설명하기 위해서만 작가 임의대로 아주 조금씩 재생된다'는 문장을 풀어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연수 소설가가 말하는 것처럼 정해진 현실-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눈과 눈이 충돌하면서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고, 그렇게 재구성딘 사건은 작가의 지향성에 따라 부분적으로 재생된다는 의미일까요?

CREBBP 2014-06-16 13:07   좋아요 0 | URL
방문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시는 의미가 맞는 것 같아요. 제가 소설론은 잘 모르지만 플롯이라거나 서사라거나 그런 것들이 완성되려면 일반적으로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을 통해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생각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 소설의 경우, 생각이 우선이라는 거죠. 에세이처럼요. 그런데 그 생각은 오로지 파울에 대한 기억, 파울에 투영된 자신에 대한 기억에 의존해요. 추상적인 생각들을 먼저 하기 시작하고, 그 사고의 여기저기에 사건들이 개입하는 식이요. 그런데 그것이 급작스럽게 문단바꿈 챕터 바꿈을 통해 주목되지 않고, 딱 클래식 음악으로 치면 변주곡 같아요. 문장 한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가면서 앞의 문장의 생각과 부분을 끌어오고 그다음 문장도 또 그 다음문장으로 그렇게 끝없이 한권끝까지 계속되요.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 이거 뭐야 왜 갑자기 얘기가 바꼈어 이런 생각이 들을 새가 없이요.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문단을 끊을 수 있는 데를 끊어봤어요. 여기 저기서 계속 문단끊기를 시도했는데, 그게 잘 안되는 거에요. 전체적으로 한 문단으로 유기적으로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굳혔지요. 또 다른 예를 들면, 작가가 문학상 시상식 때의 사건을 회상하는 장면이 있는데, 사건이 먼저 나오는 게 아니라, 자신과 파울이 세상을 증오하고 냉소하는 것에 대한 생각들을 풀어나가다가 시상식이 똥물이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변주되고 계속 읽다보면 그건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사고의 일부, 파울에 투영된 자신의 일부(사실 가끔 파울과 자신이 큰 차이가 없기도 해요) 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의견 교환 좋군요. ^.^

rendevous 2014-06-16 22:34   좋아요 0 | URL
클래식 음악에 대한 메타포 좋은 것 같습니다 ^^ 실제로 토마스가 음악애호가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몰락하는 자> 글렌 굴드 나오는 거 보면 음악적 소설을 안 했을 지 몰라도 음악에 확실히 애정이 있었던 것 같아 보여요 ㅎㅎ
 
내 아내에 대하여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누구나 한 번은 겪어야 할 이 마지막 관문에는 죽음의 문턱, 삶과 죽음의 경계를 통과해야 하는 잔인하고 무서운 시간들이 있다. 이 책은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국의 사회 구조와 제도권 내에서의 중산층의 삶에 대한 불공평함을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잭슨, 그리고 중피종이라는 암에 걸린 여자 글리니스의 죽음이다. 그러니까 충격적인 방식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에서 스스로 사라진 한 사람과, 서서히 저항하며 사라진 한 사람, 그 두 사람의 대조적인 죽음을 통해 우리가 언젠가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기 직전의 문제, 그 아무도 이야기하지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책을 가득 메운 죽음의 그림자는 도도하고 심술궂고 이기적이고 예술적이고 우아한 글리니스의 것이다. 그리고 'So Much For That'이라는 원제의 이 책은 그 죽음에 따르는 부수적인 것들, 한 사람의 죽음에게는 기막힐만큼 부수적이지만, 남겨질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될 만큼 중요한, 하지만 여전히 '부수적인' 것들을 다룬다.

 

글리니스가 중피종이라는 희귀암을 통해 죽음으로 다가가는 방식은 현대인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의 표준에 가깝다. 아프고, 여러가지 검사를 하고, 위험한 병이라는 소식을 듣고, 살기 위해 살아있는 많은 것들을 버리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지조차 모른 채, 인내하고, 견디고, 참고, 싸우면 한 줌 희망이 보일 것이라는 헛된 기대에 모든 것을 건 채, 한발 한발 주위의 사람들과 멀어지고, 남겨질 사람들의 생을 위한 담보들을 곶감 빼먹듯 빼먹으면서, 죽음에 다가간다. 이 고비만 넘기면, 마지막 치료만 끝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품은 채. 그렇게 우리 시대에게 죽음에 다가가는 방식은 그 어느 시대의 죽음에 이르는 방식보다 잔인하다. 다른 시대의 죽음을 이렇게까지 천천히 600쪽 페이지 전체에 걸쳐서 얘기한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이보다 더 무섭고 이보다 더 파괴적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끝갈 데까지 가버려 이제는 브레이크를 걸어 세울 수도 속도를 늦출 수도 없이 계속해서 최고 속도로 달려도, 자멸로 치닫는 설국열차, 그 자본주의와 닮아 있다. 우리는 어느새 의학이 거의 포기한 불치병마저도 긍정의 힘으로 누를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는 타도 대상이자, 누가 이기나 악물고 싸워야 할 경쟁 대상으로 여기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병마와 싸운다는 은유가 그렇다. 누가 무얼 휘두르고 찌르고 부러뜨리고 파괴하나. 병이 와서 몸이 아픈 것 뿐인데.. 그 아픔을 겪는 것, 경험한다는 것, 그것일 뿐인데, 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상태를 우리는 싸운다 여긴다. 사실 죽음은, 병은, 암세포는 그렇게 내가 고통을 참고 견디고 언젠가는 살아낼 수 있다고 소망하는 것으로 '이길' 수 있는 적군이 아니다. 의지와 분투와 노력으로 오르고 정복할 수 있는 어떤 숭고한 지상 목표도 적군의 진지도 아니다.

그녀는 물 없는 사막을 건너고 있었다. 하지만 저편에는 '그 후 이후의 글리니스'라는 오아시스가 놓여 있었다. 과거의 글리니스와 똑같지만 그보다 더 나아진 미래의 글리니스, 그녀를 버티게 해주는 것은 마지막 항암 치료 광경이었다. 닥터 골드먼이 의기양양하게 이제 다 끝났다고 선언하는 광경. 셰퍼드가 일 년에 한 번씩 뒤뜰에 있는 그 바보같은 분수들을 씻어낼 때 부스러기와 침전물이 빠져나가듯 그녀의 피에 남아 있는 사악한 물질도 곧 빠져나갈 거라고 선언하는 광경. 그녀의 소변에서 나던 젖은 콘크리트의 칙칙한 냄새도 하루하루 조금씩 빠져나갈 것이다.

잘 죽는 것도 하나의 소망이다. 나는 나의 마지막을 글리니스처럼 가정의 재정을 파탄에 빠뜨리고, 자신의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의 삶을 벼랑끝까지 몰아 함께 파멸하는 길을 택하고 싶진 않다. 또한 글리니스처럼 희박한 생존가능성이라는 팩트를 외면한 채 허무하고 덧없는 희망을 품고 독성 화학요법에  몸이 부스러기 재처럼 조금씩 타 없어지듯 고통스런 방식으로 서서히 죽음과 마주하기도 싫다.  죽어 시체가 되기 전 숨쉬고 있을 동안엔 최소한의 인간된 존엄성을 지키는 것. 남겨진 사람들의 몫을 죽음을 가지러 가는 길목에 다 소비해 버리지 않는 것. 그렇다. 그것은 누구나의 소망이기도 하다.

글리니스랑 나는 늘 빠듯하게 살았어. '두 번째 삶'을 위해 종잣돈을 마련한다는 이유로 말이야. 샴푸는 두 개 사면 하나 끼워주는 행사를 할 때까지 기다렸다 샀어. 화장지는 값싼 홑겹으로 열두개들이를 사다 쓰고,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도 칠면조 버거를 할인하면 그걸 사다 먹었지. 그런데 이젠 한 번에 5백 달러, 5천달러씩 나가. 게다가 얼마인지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 맘먹고 돈 쓰러 나온 것처럼 가격표도 없는 물건을 카운터에 잔뜩 쌓아놓은 것 같아. 본인 부담 비율은 20퍼센트 밖에 안되지만 가입자 우선 부담금 5천달러를 낸 후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거잖아. 검사 비용 하나만 해도 화장지를 엄청나게 살 수 있는 돈이라고

 

결국 글리니스는 자신의 중피암의 암세포 증식을 3개월 더 연장하기 위해 백만장자라고 불리웠던 돈, 우리돈 10억을 모조리 써버렸다. 이것은 물론,  기업의 이윤을 목표로 한 불합리한 사설 의료보험 서비스의 제도적 헛점과 우리나라의 의사들이 그렇게나 목청높여 주장하는 초현실적 '미국적으로 현실적'인 의료수가가 교묘하게 모의한 미국의 현실적 항암 치료비이다. 게다가 우리의 미국적 긍정 철학을 가진 담당 의사는 3주 겨우 남아 있는 글리니스에게 보험 적용이 안되는 새로운 항암제 1억짜리 항암제를 시도해 보자고 설득하고 있다. 제정신인가. 3주 남은 시간, 그 한 줌 남은 숨결을 또다시 항암제 투여로 때우라는 것이다. 게다가 잭슨에 의하면 이렇게 막대한 개인 의료비를 지불하는 미국이 의료 서비스 면에서는 내가보기에 OECD 국가 중 꼴찌다.

다른 부유국들과 비교해보면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의(내가 보기에 OECD 국가 중) 유아생존률이나 암 생존율 뭐 그런 주요 통계를 보면 맨 꼴찌야 게다가 돈도 두배로 내고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끝을 향해 치닫고 있다. 아이러닉하게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셰퍼드와 잭슨의 파산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소시민적 삶이 파산과 함께 파멸되는 것을 느꼈고 그것과 더불어 탐욕의 끝, 자본주의의 끝을 보는 듯했다. 이렇게 하나씩 둘씩 작은 귀퉁이가 마모되다 보면 둑은 무너지고 시스템 전체는 붕괴된다.


남편은 대학을 포기하고 그가 숭고하고 정직하다고 믿는 육체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만물수리상을 차려 집안을 일구었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백만 파운드에 사업체를 넘기고 잠시, 그 꿈을 실현할 준비를 한다. 그가 꿈을 위해 타협되지 않은 많은 것을 과감히 내던진 채, 드디어 일생을 통해 꿈꾸어왔던 그 소박한 미래, 건강한 꿈을 위해 성큼 한 발짝 내딛었을 때, 매력적인 그의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복수하 듯, 도도하게 말했다. 당신의 의료보험이 필요해.

 

미국의 사회와 제도는 잭슨의 입을 통해 통렬하고 시니컬하게 해부된다. 어찌 보면 그는 미국 내 보수 성향에 가깝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 의료 보험의 헛점은 잘 통제된 의료수가와 사회안전망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에게는, 정직한 서민의 월급을 온갖 종류의 세금이라는 이름하에 갈취해가는 정부와, 무임 승차를 권리로 아는 게으른 하층민들에게 자신들의 원래 몫을 떼어주지 않아야 했다. 그는 메디케이드와 메디케어의 혜택을 위해 49퍼센트의 '찐드기'들을 위해 51퍼센트의 '찐따'들이 죽도록 일하고 있다고 보았다. 잭슨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65세 이상의 환자에게 무료로 제공된다는 메디케어는 응급 관리만을 제공해준다. 장기 환자는 정부로부터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호구 주인공 셰퍼드의 아버지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자 수술비만 덩그러니 지원받고, 그 이후의 서비스는 온전히 그의 몫으로 돌아가 버렸다.

 

몰염치하고 뻔뻔한 찐드기 여동생 베릴의 등장은 공평하지 않은 사회에 대한 작가의 가치관에 다채로운 색상을 보탠다.  베릴은 40이 넘도록 자신의 집세를 감당하지 않으면서 골절 때문에 요양중인 아버지의 재산을 탐하는 뻔뻔녀이다. 부모의 집을 차지한 대가로 병든 부모를 돌보기는 커녕, 함께 살기 싫어, 돌보기 싫어, 근처의 사설 요양원에 보내 놓고는 집을 차지하고  방문조차  하지 않는다. 1년에 1억씩하는 사설 요양비를 부담해야 하는, 지리적으로 먼 곳에 위치한, 죽어가는 아내의 병수발을 하고 있는 오빠에게 요양원 방문조차 미루는 인간 쓰레기이다. 돈이 많은 사람이 자신의 난방비까지 부담해야 공평한 게 되어버리는 찐드기. 왜 미국의 중산층이 그토록 오바마의 사회안전망 확충 제안에 대해 그토록 치를 떨고 반대하는지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는 캐랙터이다. 베릴은 잭슨이 혐오하는 찐드기, 즉 성실하게 일을 하고 정직하게 세금을 내면서 자신의 몫을 정부라는 탐욕스런 괴물에게 갈취당하는 찐따들의 피를 빠는 흡혈귀에 등골 브레이커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예를 들어 가족 내 찐따와 찐드기를 구분하자고 치면,  설사 그녀가 항암에 치르는 막대한 비용을 예외로 치더라도,  사실 가장 큰 찐드기는 바로 셰퍼드의 아내 글리니스이다. 그녀는 결혼생활 27년동안 오로지 남편의 수입에 의존해 그녀의 고상한 취향을 만족시켜 왔으면서, 막상 남편이 원했고 처음부터 두 사람의 함께 설계했던 미래, 그토록 남편이 갈망하는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결국은 이런 저런 핑계로 배반해 왔다. 여기서 나는 그의 제 3국 이민과 육체적 노동을 통한 소박한 삶이라는 숭고한 계획에 동의하려는 게 아니다. 셰퍼드의 주위 사람들이 누누히 말해 오고 있듯 제 3자들에게 제3국은 도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녀의 핑계는 구구절절 옳다. 내가 주목한 것은 저자가 주인공들을 통해 말하는 것, 두 사람의 공생관계, 더 나아가서 인간과 인간의 제도적 공생관계가 찐따와 찐드기들의 일방적 퍼주기 관계로 이루어진다는 시각이다. 우리 여자도 여자에게 불리한 수많은 편견과 핍박과 관습의 역사에서 살아남다 보니 영악해져서 21세기쯤에는 본인의 능력으로 살아남는 것보다 찐따와 가족을 이루고 찐드기가 되어 사는 편이 훨씬 유리한 경우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그건 찐따의 2세를 출산할 수 있는 생물학적 요건이 우월한 신체적 정신적 매력과 결합해 찐따에게 만족스런 찐드기상을 소유했다는 착각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경우에 한해서이다. 그러나 그녀는 예술을 핑계로 집안일도, 아이키우기도 잘 하지 않았으면서, 가정 경제를 위해 자신이 가진 노동력을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집을 구성하는 물건들의 색깔과 위치와 가격과 브랜드를 선택할 수 있는 실제적 소유주였다.

파이와 아이들, 부엌 바닥 이외에 '그 전의 글리니스'가 정확히 뭘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전의 글리니스'가 평소에 금속 공예를 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그것이 수수께끼였다.

그리고 그녀의 착한 남편이 그의 친동생에게 퍼주는 돈에 대해 베릴을 험담할 권리를 똑같이 행사했다.

"오히려 정 반대지. 자기가 수혜자는 커녕 피해자라고 생각한다고, 항상 불만이 가득하잖아". 셰퍼드는 그건 글리니스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굳이 말하지 않았다.

꼼짝없이 집 안 혹은 병실이라는 공간에 유폐되어 회복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희망을 붙잡고 고통과 마주하고 있는 불치의 암 환자에게 병문안은 유일한 사회적 접속 포인트이다. 그러나 주위사람들에게 면회를 요청하는 암이라는 충격 요법은 대개 한 두번이면 끝난다. 게다가 대화 주제는 갈수록 빈곤해진다. 환자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라고는 모두 몸에 일어나는 것들 뿐이고, 병문안자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아픈 환자에게 염장지르는 자랑질 혹은 불평 중 하나에 해당된다. 그래서. 환자는 자신의 소박한 집 밖에도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점점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불치병 환자의 마지막에 고립은 덤이다.

사람들은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맹렬하게 목숨을 유지하려고 버틴단다(p426)

한 때 그녀가 동행을 원하지 않는다면 혼자 두고 떠났을 하지만, 이제, 고통을 저당잡아 헛된 희망에 유배된 채 나날이 죽어가고 있는 그녀의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켜보아야 하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차라리 의식을 잃는 편이 행복이 되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바랄 수 없어 그저 경감되기만을 바라는 세상. 그는 이곳에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너무도 간절한 나머지 정말 이곳을 떠나게 된 것 같았다. 저 관들이 쇠사슬처럼 지하 감옥에 그녀를 묶어 놓은 것 같았다. 강력한 칼로 그것들을 끊고 싶었다. 사랑하는 그녀를 품에 안고 가운을 질질 끌면서, 택시와 핫도그와 코카인 중독자와 도미니카공화국 출신 전당업자 등이 가득한, 댕댕거리는 밝고 부산스러운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곳에서 그의 여인을 내려주어 그 분홍빛 맨발이 차가운 콘트리트에 닿으면 그녀는 다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무섭다. 누구나 거쳐야하는 죽음을 이렇게 실존적으로 묘사해 놓은 책을 본 적이 없다. 소설과 드라마 영화 속의 죽음은 극적 효과를 일으키는 감상적인 것들이었다.  슬프거나, 아름답거나, 멋지거나 그런 종류의 형용사이거나 부사였지 동사나 주어나 목적어가 아니었다. 

생각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 못했다. 알고 보니 힘겹게 해낸 생각 가운데 투자한 에너지만큼의 가치가 있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이 생각, 즉 '생각 없이 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그게 모든 것의 표준이 되었다. 그냥 사는 것, 살아 있는 것.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은 주로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상태'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경우, 살아 있는 것이 그토록 소중한 일이 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서히 소멸해가는 것, 생각하는 에너지를 잃고, 생각하는  생각 마저 잃고, 그래서, 살아있는 의미와 집착을 잃고, 기억을 잃어가는 것. 죽음에 이미 그만큼 성큼 다가가 있는데도, 그녀는 기계적으로 항암제를 투여받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생각할 힘과, 집착을 잃은 채로..상상할 수 없어 그리워할 수도 없는 채로 숨쉬고 있는 시간들 말이다.

더 이상은 집착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었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은 그리워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착이 사라진 것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그녀가 아는 것은 그 뿐이었다.

나는 엉뚱하게도 글리니스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딸과 마지막 포옹을 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났다. 끝까지, 아픈 엄마의 면회를 주저했던 딸 아멜리아도, 끝까지 자신의 죽음을 인생의 패배로 규정하고 맞서 싸우려 했던 글리니스도, 숙연하게 끝을 받아들이고 마지막이 될 그 순간에 서로를 포옹하던 그 순간에, 울지 않고 편히 보내주던 그 순간에...

 

마지막 그의 선택에 대해서는 내 나름대로 작가의 유토피아적 환상이라 결론짓는다. 비극적 결말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데 전혀 무리없는 설정이었고 완벽한 소설적 구성을 이루는 결정적 몫을 했다.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고, 섹스할 수 있는 사람은 섹스하고. 헐리우드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듯 완성된 결말이 많은 사람의 비극적 죽음을 결국은 해피하게 받아들이도록 유도한 것은 그 험난했던, 600 페이지에 걸친 글리니스의 죽음에 이르는 긴 여정을 헉헉거리며 따라오다 녹초가 된 독자의 감정 상태를 복구시키는 힐링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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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4-05-15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의학은... 브래이크도없고, 안전밸트도, 에어백도 없는 시속 200킬로달리는 스포츠 카 입니다. 오로지 장렬한 충돌만이 멈출 수있죠.. 천천히 우아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내려올 수있어야 합니다. 의사가 잘 돌봐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마시길.. 온전히 스스로의 깨달음으로만 가능한 일이랍니다.

CREBBP 2014-05-19 18:18   좋아요 0 | URL
뒤늦게 댓글을 보았네요. 방문 감사합니다. 시속 200km로 달리는 스포츠카라는 말이 공감되네요. 깨달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 혼란스럽기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