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억 명 - 전 세계 100억 인류가 만들어낼 위협과 가능성
대니 돌링 지음, 안세민 옮김 / 알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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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더 많이 낳아야 될 것인가 덜 낳아야 될 것인가 

 

딜레마다. 맬서스 인구론을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우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 증가에 기아를 걱정했던 세대들은 이제 자신들을 부양할 젊은 인구가 늘지 않아 걱정이다. 급격하게 줄어든 출생률은 자본주의를 지탤할 높은 성장률에 장애가 된다.  많이 태어나야 많이 소비하고 많은 소비가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된다는 신앙과도 같은 믿음이 자본주의와 그 체제를 복종하는 우리 사회를 지탱한다.  일이십년의 일도 예측 못한 인간들이 2100년 2300년을 예측 한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건을 걸면 예측 자체는 가능하다. 현재와 같은 인구증가율의 유지한다는 조건 하에서 우리는 2100년 2300년을 예측해 볼 수 있다 그 조건은 하늘에서 똑 떨어진 우연 같은 거다. 우리는 불과 반 세기 전에는 한 가정에 평균 두 명 이하의 낮은 출생률이 경제성장을 위협할 만큼 높은 노인인구부양이라는 부담을 지게할 줄 몰랐다.

 

현재의 낮은 인구 증가율은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60년대 표어 탓인가. 중장년 층에 해당하는 인구의 대부분이 두명의 형제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정부의 계획된 출산율 조절에 따른 결과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노년층은 대부분 여럿 형제들을 두고 있다. 출생률 감소는 여성의 고등 교육과 사회진출의 영향을 크게 받지만, 지금 중장년층의 어머니 세대들은 대개 전업주부로 살았다. 그들은 전업주부이면서 '둘만 낳아 행복한 가정'의 환상 아래 정부에서 유도한 출산율 조절 정책을 고분고분 수용하였다. 그 세대의 2~3 낳기 경향이 전부 표어 탓만은 아니겠지만 이것은 형제가 하나뿐인 그 세대의 자식들이 막상 자신의 세대가 되었을 때는 둘 이상 낳는 일을 부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먹이고 재우고 기저귀갈고 교육하는 양육의 책임이  활발한 사회 활동과 자아 실현이 충분히 보장된 사회에서도 여전히 여성에게 더 큰부담으로 부과되었을때 여성의 선택은 자명하다. 똑똑하고 논리적인 여성과 똑같이 경쟁해야 하면서도 가정의 경제 부담은 전적으로 남자의 몫으로 바라보는 사회 속에 소외되어가는 남자들 역시 자녀 낳기에 적극적일 하등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출산율이 급격이 낮아져 경제활동 인구가 대책없는 비율에 접어들고 있는 국면에 이르자 정부는 이미 몇십년 전부터 "둘만 낳아 잘기르자" 표어를 걷어냈고 이제는 여러가지 출산장려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아이를 카우는 일은 푼돈의 세금 면제와 자잘한 혜택으로 상쇄될 수 있는 종류의 부담과는 차원이 다르다. 어쩌면 노인문제의 심각성이 어느 한계에 다다르기 직전 정부는 너도나도 아이를 낳아야 하는 파격적 정책으로 우민을 꼬셔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이 지나 봐야 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출산율이 매우 저하되었거나 매우 높아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파괴적 결과는 아무도 예측 불가능하다. 세대와 세대가 거듭되어야 나타난다.  더 많이 낳거나 더 적게 낳은 세대가 다시 또 더 많이 낳거나 더 적게 낳고 또 그들 후손이 그것들을 반복함에 따라 세기를 천천히 지나가며 인류를 위협하는 대재앙이 될 수도, 후대까지 지속가능한 삶을 지켜줄 수도 있다. 서론이 길었다.

 

멜서스는 틀렸다.

 

인류가 탄생하여 세계인구가 10억이 되는 데는 6만 4천년이 걸렸다. 10억이 되던 해는 1820년이었다.  세계인구가 10억에서 20억이 되는 데는 최초의 10억명이 될때보다 6백 배가 빨라져 겨우 106년이 걸렸다  1926년 세계 인구는 20억이 되었다. 34년만인 1960년에 30억이 되었고, 그로부터 인구가 10억씩 증가하는 데는 계속해서 15년(1975년,  40억), 13년(1988,50억), 12년(2000,60억)이 걸렸다. 그리고 2011년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세계 인구는 70억명이 되었다 11년 만에 10억이 늘었다. 가파른 인구증가율은 꺽이는 듯했지만, 지난 10년 미니 베이비붐으로 2003년에 유엔에서 내놓은 2100년 인구예측은 90억에서 100억으로 상향 조정됐다.


최초, 2003년에 UN이 발표한 <2300년 세계 인구>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중간지점인 2100년까지의 세계 인구가 91억으로 증가했다가 이후 서서히 감소해 2300년 90억 수준에서 안정된다는 것이었다. 평균적인 각 가정에서 아이들을 조금 더 출산 했을때 예측 결과는 360억.  중간지점에서 4배에 해당됐다. 또한 출산율이 예상보다 조금 더 낮았을 때 예측 별관 결과는 2300년 23억명에 불과하다. 세계의 각 가정에서 조금 더 낳는것과 조금 덜 낳는 것의 차이가 2300년에는 이런 막대한 차이를 낳는다.

 

이 책의 전반에 걸쳐 인류의 역사를 통털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구의 추이와 인구 변화의 배경을 꼼꼼하게 분석한다. 그는 최근 몇십년 동안의 빠른 인구 증가가 대륙 내에서 조절되지 않는 유럽의 초과 인구가 다른 대륙으로 퍼진 것을 주요 영향으로 본다. 유럽에 넘쳐나는 사람들이 굶주림이나 질병으로 죽지 않고 다른 대륙으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 자손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이제 유럽은 이민자들의 받아들이지 않는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신대륙의 대대적인 이동이 인류에 끼친 해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국가와 대륙의 힘의 불균형과 남용이 대대 손손 이어질 인구 증가와 환경 파괴로 이어진 결과에 대해 영국인으로서 그의 입장은 단호하다.

신대륙의 부가 구대륙으로 옮겨지면서 신대륙에는 죽음이 찾아왔다. 1492년 1억명에 달했던 아메리카 대륙 중부 지역의 인구는 두  대륙의 만남 이후 질병, 살인, 사회 붕괴에 따라 천만 명 미만으로 줄어 들었다. 113

유럽 식민지 지배 국가들이 대체로 대규모 학살을 통해 그들의 영토를 얻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헨리 모턴 스탠리는 부관들에게 작은 마을에서 아프리카 사람을 만나면 새를 쏘아 죽이듯 발포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탐험에서 스텐이 자신은 거의 30개에 하는 대규모 도시와 60에서 80개에 달하는 마을을 공격 파괴했다고 기록했다. 1878년에는 콩고에 그들의 기업체를 사귀파기 위해 5년 계약을 체결 했다 그 결과는 근대 최초의 잘 계획된 대량학살이었다.117

우리는  유럽의회 과거를 개화된 문명을 전파한 것으로 착각하고 찬양하지 말아야 한다.

강대국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주로 대리전을 치렀고 소련 국경 근처에서도 그랬다. 그들은 지금 여전히 시리아, 리비아 , 이라크, 소말리아 그리고 또 다시 아프리카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사적 전쟁만큼이나 시월한 경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런 전쟁의 이면에는 특정 집단의 우월성을 확인하고 그 집단이 뒤떨어지거나 심지어 인간 이하로 여겨지는 집단을 종속시킬 권리를 인정하려는 생각이 작용한다. 121

어쨌든 멜서스는 틀렸다. 그는 우생학적 입장에서 논문을 교묘히 조작 발표했다.  법칙으로 보이는 것은 추세의 평균에 불과했다. 세계적인 인구 추이는 생존률, 교육정도, 이민 등의 다양한 환경에 따라 변했다. 이민은 세계 인구를 변화시킨 큰 요인 중 하나였다. 이민은 가장 힘 있는 자의 일시적인 기분에 좌우되었다. 필요하면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데려다 사고 팔고 죽였고, 과잉인구를 아메리카 대륙으로 쫓아보내거나 자국의 문을 닫았다.

 

그는 또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지구촌의 경계아래 다 함께 지속가능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범국가적인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을 지적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원재료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에 대한 나라 안팍의 소유권에 집착하는 대신 사용하면 사라지는 에너지를 얼마나 최소한으로 사용하여 절약할 수 있는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실에 당신이 나라의 지도를 걸어 놓으면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의식적으로 그 지도를 자기 정체성 의한 부분으로 생각한다.중략. 국가주의와 국민 국가에 대한 공동소유 의식을 전파 하는 것은 국민 대다수를 이롭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수의 지위를 강화 하는데 도움을 줄 뿐이다. 중략. 지금까지 자신을 더 넓은 세계로의 시민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점을 이미 지났다. 영국의 예

 

저자 대니 롤링은 자국인 영국의 예를 들어, 2008년 경제위기가 도래하기 전에 이미  전 제품에서 소비 하향 곡선을 그렸음을 보인다. 그 이후에도 선진국의 소비 감소 폭이 더욱 넓어졌다. 일시적인 지속적인 감소의 한 부분일 수도 있으나 이런 감소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가장 두드러진 감소는 석유 소비에서 나타났다. 생산이 감소하면 소비는 정점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북해산 석유의 경우 영국에서는 1999년 노르웨이에서는 2001년 정점에 도달했다 육지의 경우 많은 국가에서 그 이전에 정점을 도달했다. 원유가가 100달러가 넘은 이래, 공급이 감소하는데도 원유 가격이 떨어지는 이유는 소비도 함께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감소의 원인 중 하나는 불황이기도 하지만 불황 이전에 소비 감소는 이미 시작했다고 본다.

 

영국의 원재료 소비는 2001년을 기점으로 정점에 이르렀다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환경을 손상시킬 만한 소비는 불황이 닥치기 전에 이미 감소하기 시작했다. 전력 수요는 일년동안 10% 이상 감소했다. 소비가 졸면 폐기물 처리, 매립지와 소각장 운영을 비롯해 해로운 경제 활동도 줄어들게 마련이다. 소비는 2003년에 정점에 이르렀다. 이후 인구는 늘었어도 가정의 물 소비량은 꾸준히 줄어즐고 있다. 수영장은 없어졌고 빗물 받이를 설치하고, 많은 가정이 환경친화적으로 변모했다. 모든 혁신은 물소비량을 줄이는데 크게 기여 했다. 영국인들은 음식도 덜 먹기 시작했다. 칼로리 섭취량은 1974년 하루 2500Kcal로 정점의 이르렀다가 전반적으로 감소해 2012년에는 2300Kcal를 기록했다(그러나 그들은 더 뚱뚱해졌다). 목재와 질소비료 같은 미네랄 시멘트 역시 경제 불황 훨씬 이전에 이미 소비 정범을 지나쳐 감소 추세에 있다.
저자는 소비 감소는 일부 지도자의 예지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선진국에서 환경 파괴적인 성장이 중단되며 세계경제가 재편성 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본다.

 

그렇다면 한국은? 영국학자가 쓴 책에 한국은 없다. 우리는, 청년 실업과 소득 불균등 심화와 같은 어두운 현실 앞에 또다시 높은 개인당 두 세배의 노인을 먹여살려야 하는 부양인구의 짐을 지고, 하루 하루 살얼음 같은 길을 조심스레 걷고 있는 우리의 어린 세대들과 그들의 후대를 위해 우리가 남겨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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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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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글을 쓰는 현존하는 작가 중 최고의 작가'라고 한다. 영문학자 에드워드 멘델슨이 한 말이다. 내가 뽑은 리뷰 제목이 엄살이 아니라는 건, 퓰리처 수상과 관련된 일화를 접해보면 알 수 있다. 핀천의 작품 <중력의 무지개(1973)>는 1974년  심사위원의 전원일치로 퓰리처상 선정대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집행위원회에서 수상을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는 작품이 난해하여 읽기 힘들고 외설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출처-위키피디아). 퓰리처상 집행위원들도 어려워하는 핀천의 작품을 내가 잘 이해하고 서평을 쓸 수 있었다면 지금쯤 내가 아마도 다른 일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작가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퓰리처상 수상자로서 상이 집행되지 못했다는 것 말고도 또 있다. 그는 얼굴없는 작가이다. 그의 사진은 아주 젊은 해군시절 단체 사진에 들어 있는 게 알려진 것의 전부인 듯하다. 코넬 대학에서 공학물리를 전공하다 잠시 해군에 복무한 후 인문대로 전공을 바꿨고 1959년 영어학으로 학교를 마친 그는, 출판사와의 계약 및 작품 활동에 필요한 모든 업무는 대리인을 통해 하고 자신은 시상식에서조차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다고 한다. 한 문학상 시상식에는 코메디언을 대리인으로 내보냈다. 얼마전 읽은 자전적 소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에서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시상식 예식을 똥물을 뒤집어쓰는 거라 비유하고 시상식에서 느낀 불쾌감을 표현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천재적인 문학가들은 문학상 시상에 초연한 것 같다.

 

어렵다. 졸리다(잘하면 불면증을 치료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위대한 작가의 초기 소설집이다.  
'대가의 탄생을 알리는 핀첨의 초기 작품들'이라는 소제가 붙은 이책은 핀천이 대학생때 쓴 습작들과 그 이후 쓴 초기작품들을 1980년대인 이삼십년의 후에 엮어 세상에 내보낸 작품집이다. 이 작품집을 내면서 작가는 매우 긴 서문을 썼는데, 대부분 자신의 이 치기어린 작품들을 비판하거나, 작품과 관련된 해설, 그리고 작가로서의 성찰을 담은 내용이었다. 젊은 날 아직 성숙하지 않은 초보 작가가 쓴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해석하고,  오류를 지적하고 비평과 힘께 집필 당시의 시대적 조류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어려운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된다.

 

그는 인생의 초년기에 자신이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초기 작품집을 통해 내보인다. 

 

우리는 자신이 안고 있는 무지의 범위와 구조에 대해 종종 알아차리지 못한다. 무지는 그저 개인의 정신적 지도 위에 존재하는 텅 빈 공간이 아니다. 그것에는 등고선과 일관성이 있다. 중략.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글을 쓴 결과로서, 우리는 자신의 무지와 그로 인해 좋은 이야기를 망칠 수 잇는 가능성에 익숙해져아 한다. 

 

<이슬비>는 핀치의 처녀작이다. 군대 내 막사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다 대화를 중심으로한 서술이 앞뒤 연결없이 느닷없고 배경도 익숙하지 않아, 작품의 서사가 잘 안보이고 안개처럼 희미했다. 대학시절에 썼다면, 아직은 모방을 통한 습작, 자전적 내용과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어떤 서사가 주를 이룰 수 밖에 없을 듯한데, 이 작가의 처녀작은 이미 기존의 소설적 구성과 틀을 벗어나 있다. 남자는 모든 게 권태롭다. 그는 군대라는 조직에 현실을 회피하듯 자신을 맡기고, 페이퍼백을 들고 다니며 읽는다. 루이니애나 지역 허리케인으로 끔찍하고 엄청난 희생을 목격하면서도 시체 차리 과정을 건조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로우랜드>의 플랜지는 중년 가까운 남자의 어이없는 하루와 그가 겪는 실제와 환상의 그 어딘가를 그렸다. 변호사인 그는 쓰레기 수거인인 술친구 스콰르초네가 놀러오자 사무실을 아예 나가지 않고 술을 푸다가 역시 술로 신혼여행을 망쳐버린 또다른 친구 피그 보딘의 방문으로 아내에게 쫓겨난다 .갈 곳이 없어진 그들은 쓰레기 폐기장에서 각종 쓰레기로 오두막을 짓고 사는 친구에게로 가서 계속해서 술판을 벌인다. 그들은 취한채 독자로서는 뭔소린지 배경도 설명도 없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바다이야기와 시체를 훔친 이야기 등을 두서 없이 하다가 집시가 산다는 말을 듣고 폐기장에서 주워온 매트리스 위에서 잠든다. 소녀가  부르는 소리에 깨어난 그는 아름다운 집시 소녀를 따라가는데 거게에서도  이상한 체험을 한다. 다른 모든 작품 중에서 그나마 가장 가독성이 있던 소설이었다. 그의 직업이 변호사라는 사실, 로우랜드라는 폐기된 쓰레기가 가득한 세상에서 어떤 환상이 지배하는 세계 속으로 매몰되어 가는 권태로운 인간의 본질 같은 걸 표현한 것 같다.

 

<엔트로피>는 삼박 사일동안 계속되는 술파티와그 건물의 4층 죽어가는 새를 가슴에 품고 지내는 커플의 이야기가 교차적으로 그려져있다. 이 소설은 모든 소설 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다. 3층의 술파티는 무질서와 혼동을 의미하고 새를 품은 4층은 완벽하고 균질된 세상을 의미한다는 것 같다. 그것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찰라를 기술한 듯. 의미만 어려운 게 아니라, 문장 자체가 한자 한자 독해가 필요하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교차지점을 알아차리기가 힘들고, 등장인물과 배경등에도 좀처럼 익숙해지기 어려운 소설이었다. 이 소설에 대해 작가는 추상적인 것으로 소설을 시작하고 나서야 플롯과 등장인물을 진전시키는 문제가 반복되고 있으며, 이는 앞뒤가 바뀐 것이며, 이같은 글쓰기는 인간의 실제 삶에 근거하지 않는 한 연습생의 또다른 습작에 머물기 쉽다고 스스로 지적하고 있다.

 

<언더 더 로즈>는19세기 후반의 이집트를 배경으로 서구 열강이 아프리카 패권을 놓고 이집트에서 각축을 벌이는 동안 독일 스파이 몰드윕과 영국 스파이 포펜타인의 팽팽한 긴장을 그렸다. 작가는 이 소설에 대하여 특히 표절에 대한 뼈아픈 성찰을 보여준다. 그는 당시 이 작품을 쓴 자신을 사십년 동안 약 200만 달러를 털었던 미국의 악명높은 은행강도에 빗대면서 자신은 베데커 여행 안내서를 털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한번도 가번족이 없던 시간과 장소의 모든 세부사항과 외교단의 이름까지 털었다고 하면서 작가 지망생들과 독자들에게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을 거라고 믿고 데이터를 훔치는 일은 더더욱 삼가'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읽을 때는 역시 어려웠지만 그 글에 영향을 준 것은 초현실주의라는 작가 서문을 다시 읽어보니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당시 그가 선택한 선택 과목 중 현대 미술이 있었는데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자신을 사로잡았고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 접근하는 게  실질적으로 불가능 했던 자신은 정상적으로는 함께 모여 있기 어려운 요소들을 하나의 틀 안에 결합해 놓으면 비논리적이고 깜짝 놀랄만한 효과를 창출한다는 생각에 매료되어 있었다고 한다.

 

<은밀한 통합>은 작가 스스로 습작에서 벗어난 초기 작품이라고 했는데,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돋보이는 작품성을 집작할 수는 있었다. 인종 차별 문제를 어린이들의 환상적 놀이의 세계에서 우회한 방법으로 제기하는 이 작품은 왜 핀천에게 비범한 찬사와 수식어들이 따라다니는지를 알게 하는 작품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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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 - 하버드대 박사가 본 한국의 가능성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이만열)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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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멀지 않은 과거, 한국은 강대국의 틈 사이에서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변방의 한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외국에서 어쩌다 Korea를 아는 사람들은 우리가 베트남을 전쟁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한국을 전쟁으로 기억했다. 못살고 못입고 못먹는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이 고아원에서 입양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던 나라로 각인된 기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외국인들이 아직도 살아있는 같은 세기 동안 한국은 큰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는 한류라는 거대한 흐름에 때로 자만함과 의아함 섞인 자조를 발견한다. 새로운 패션, 새로운 도시, 새로운 집, 새로운 길, 새로운 문화, 새로운 제도, 우리가 5000년 동안 세대와 세대를 통해 전하고 받아서 다시 전해온 것들은 멸시와 천대 속에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언제든 부수고 새로 만들 수 있는 윤나고 반짝반짝하고 편하고 가벼운 것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발전이라고 불렀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이만열)은 예일대에서 중문학 학사, 동경대에서 비교문화학 석사, 하버드에서 동아시아언어문화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분으로 현재는 경희대에서 교수로 재직중인, 한국어에 능통한 분이다. 한국을 사랑하여 한국의 아내와 결혼해서, 한국에서 살고 있으면서, 매운 음식도, 불고기도 싫어하며 한류의 핵인 아이돌의 노래도 모르고 드라마도 보지 않는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한국적인 것,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리고 점점 더 빠르게 사라져가는 한국적인 것을 발견햇고, 그것을 사랑한다. 이 책은 이만열이라는 한국식 이름까지 가진 저자의 한국에 대한 생각을 적어 놓은 책으로, 책의 전반에 걸쳐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명확하다. 한국의 전통적인 것으로부터 한국의 브랜드 가치를 찾고 세계로 도약하자는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게 존경과 감사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샘해밍턴처럼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사람들과 교류하고 한국 문화를 사랑할 수는 있겠지만, 한국에서마저 외면하고 버려지는 한국적인 전통을 찾아 연구하고 이것을 다시 현재의 한국적 현실에 적용하고 발전시키자고 제안하는 만큼의 애정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학을 전공한 것도 아닌데,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에서 기초한 깊은 애정을 그의 글 구석구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예로 한국 홍보의 핵심 개념으로 선비 정신을 추천하고,  세계와 인간을 읽는 틀로서 주자학을 바탕에 둔 소박하고 검소한 전통적 사상을 한국적 삶의 가치로 삼고 극도의 소비 문화와 환경 문제를 극복할 것을  제안한다.


없어져가는 것들, 사라져가는 것들. 새마을 운동과 함께 없어져 간 수많은 그 푸근하고 애틋하고 소박하기 짝이 없는 초가 지붕의 시골 집들은 대체 그걸 없앤 사람의 딸이 지배를 하는 이제는 부자가 된 이 시점에서 그것의 대대적인 몰살에 대해 그 누구도, 아쉬워하지도, 책임을 지려 하는 사람도 없다. 이만열은 그렇게 한국인이 잃어버린 것들  값싸고 인스턴트적 직각의 생활공간과 무비판적 서구문화 추종으로 인해 버려진 수많은 한국적인 것들이 사실은 더없이 훌륭하고 가치있고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는 주요 문화 유산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공기와 물의 원활한 흐름과 자연과의 조화와 배치를 분석하는 풍수지리를 하나의 미신으로 치부하지 않고, 생태도시의 롤모델이자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주요 문화자원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우리가 오래 전에 버려 버린 한국적 문양, 자개와 목조 공예를 새로운 디지탈 기기들의 디자인에 활용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나는 누가 한 나라의 문화와 속성에 대해 자신이 가진 약간의 경험을 토대로 일부를 전체로 일반화시켜,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이러니 저러니 떠드는 것을 아주 경멸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대체로 내가 평소에 나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것들과 비슷하다. 다만 그가 제시하는 세계는 더 넓고, 한국인이 갖는 내 애착보다 더 크고, 전통문화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다. 부끄럽지만, 저자가 여러 번 책에서 지적했듯, 외국인이 한국에서 오래 살면서 함께 일하고 대화할 때,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고 그 문화와 사회 전반에 대해 많은 것을 아는 걸 신기하게 여기는 것 또한 잘못된 편견임을 스스로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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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히스토리 - 한 권으로 읽는 모든 것의 역사
데이비드 크리스천 & 밥 베인 지음, 조지형 옮김 / 해나무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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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히스토리는 융합학문이다. 즉, 이 책은 세상이 태어나던 순간부터 지금 현재까지의 과학이며 역사이고, 문화 인류학의 통합된 세계이다. 미국에선 이 분야를 중고등학교, 대학교의 과목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빅히스토리라는 영상프로젝트를 기반으로 만든 텍스트 북인데, 그 대상이 중3에서 고1까지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우 설명적인 사진과 그림과, 도표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문체도 경어체로 친절하다. 수식으로만 가득찬 과학 교과서로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해못함을 증오했던 그 시절 생각에, 중고등 교재가 이정도라면 공부할 맛 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태초에 신이 있었다면, 만일 그 신은 빅뱅의 순간, 그 아무것도 없는 무로부터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것으로 변화시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자신을 숭배할 인류가 출현하기까지의 그 기나긴 억겁의 시간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심심하게스리..

 

우주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어떤 계기를 통해 빵 하고 터진 후 팽창해나가고 있다. 이것은 천문학적으로 우주가 팽창한고 있다는 증거로부터 시작된 가설이 점차 더 많은 증거를 통해 힘을 얻고, 진리로 굳어져가고 있는 과학적 사실이다. 만약 우주가 현재 팽창한다면 머나먼 과거 어느 시점에 우주는 엄청나게 작았을 것이며,그 공간은 매우 조밀하고 매우 작았을 것이다.  당시 정상 우주론을 처음 주장한 프레드 호일은 이 아이디어를 풍자적으로 비웃어 빅뱅 이론이라 칭했고, 그렇게 그 이름이 굳어졌다. 빅뱅 우주론은 왜 빅뱅이 일어났는지 혹은 우주 창조의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빅뱅 이후 바로 찰라적 순간인 10의 마이너스 36승 초 부터의 일들부터는 비교적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충분한 근거와 증거들을 가지고 설명한다. 별의 탄생은 우주 전체에 걸친 동일한 온도, 동일한 밀도, 동일한 유형의 원소 구성 상태에서 아주 지극히 미비한 만큼의 차이에 의한 발생한 빅뱅 이후의 첫번째 임계국면으로, 그 무수히 많은 별들의 탄생과 소멸 과정을 통해 주기율표를 구성하는 다양한 원자들을 풍부하게 만들어 냈다.  그 이후 행성의 탄생, 최초 생명의 탄생, 그리고 진화, 인류 역사까지 이 한권에서 모든 것의 역사를 다룬다.

 

이 책 한 권으로 양성자와 중성자를 이해하고 우주의 탄생과 문화 인류의 기원을 모두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이미 알고 있는 원자와 분자 같은 확립된 기본 개념은 좀 더 쉽게 그 의미를 되돌아 볼 수 있게 되었고, 전혀 몰랐던, 우리가 학교에서 과학 시간에 이런 것들을 다루기에는 아직 그 주장이 보편적 진리로 확고하게 정립되기 전이어서 배우지 못했던 그냥 오며 가며 이런 주장도 저런 주장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은 흐릿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즐겨보는 미국의 시트콤 빅뱅 이론의 가사가 생각났다.

빅뱅의 순간과 함께 흘러간 시간과 비례해서 화면이 빠르게 지나가고,

 

our whole universe was in a hot dense state.

then nearly 14billion years go expansion started... wait

the earth began to cool, the autotrophs began to drool

neanderthals developed tools, we built the wall, we built the pyramids.

math, science, history, unraveling the mystery

that all started with a big bang b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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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지 않는 의사, 믿지 않는 환자
제롬 그루프먼 & 패멀라 하츠밴드 지음, 박상곤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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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사를 잘 믿지 않는다. 의사의 지식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학이라는 분야의 불확실성과 투약, 주사, 수술과 같은 의료 행위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에 대한 의사의 신중하지 않은 선택을 의심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은 잘 주워먹는 편이다. 진통제나 지사제, 수면유도제 같이 직접 삶의 질에 즉각적으로 개선을 주는 의약품,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복용해야 하는 관리용 의약품을 먹는 기준은 결국 나의 의료행위에 대한 가치관과 편향을 반영한다. 이 책은 그러한 의료 행위에 대한 의사와 환자와 보호자의 가치관을 사례를 통해 적고 있다.


같은 질병이라도 전문가 사이에서 치료 방법은 다르다. 예를 들어 고혈압 치료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미국과 유럽의 전문가 위원회에서 각각 치료 기준이 다르다. 치료의 효과보다 부작용을 더 걱정하는 것을 손실피경향이라고 하고, 인위적인 치료보다 자연치유법이 훨씬 더 현명하고 안전하다고 강하게 있는 신념은 자연주의적 편향이고, 우리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개개인의 경험을 가용성 편향이라 한다. 이런 저마다의 가치 기준에 의해 의사건 환자건 치료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다. 치료에는 측정하기 어려운 순효과라는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 순효과란 치료로 얻는 효과에서 부작용을 뺀 것이다. 어째꺼나 주변 사람의 말을 듣고 치료를 선택하는 것은 가용성 편향이며 일화는 단지 n분의1인  여러가지 경험 중 하나일 뿐이지만 그 일화에 강한 인상을 받아 생각을 왜곡하게 되므로 이성 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가용성 편향은 이미 일찌감치 극복했고 치료효과가 거의 없는 자연주의 편향은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내게 잘 안맞을 뿐더러 거기에 개입된 상업주의와 미신적 요소들은 불신을 부축인다. 손실회피경향이 두드러지지 않는 이유는 두통이 지속되는 상태라든가 배가 아파 화장실을 가야하는 상태가 알약 한알이면 말끔히 없어진다는 경험적 지식이 다른 선택의 여지를 말끔히 없애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다른 유전자 조합과 환경의 상호작용 속에 고유한 존재다. 치료 방법은 통계와 확률이지 진리가 아니다. 내게는 좋은 효과를 내는 펜잘이 비슷한 유전적 조합을 가진, 같은 환경에서 자란 동생에게는 안듣는 것처럼 치료란 개인의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사전의료지시서에 대해 바람직한 문서이고 삶이 무의미해지는 광범위한 상황에서 인간이  법적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전의료지시서 living will은 본인이 직접 지시할 수 없을 정도로 위독하게 되었을 때 존엄사할 수 있게 뜻을 밝힌 문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전의료전향서로 도입된지 몇년 안된 걸로 안다. 기도삽관, 혈액투석,영양제 공급 등으로 이미 소생이 불가능한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의지의 법적 효력이 있는 문서이다. 내 할머니는 내가 어릴때부터 이와 비슷한 뜻을 분명히 밝혀 오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까지만 해도 당사자가 의식불명인 경우 보호자는 의료행위에 대한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없었고, 생명 존중의 원칙에만 충실해야 하는 의사들은 환자의 뜻과 무관하게 존엄하지 않을 지라도 생명을 연장시키지 않으면 살인에 해당될 수 있었기 때문에 원칙에 맞는 그러나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의료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도 할머니는 오랜 당뇨병을 지니고도 장수하셨고 비교적 짧은 병상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셨다. 때문에 나는 이 사전의료전향서가 시행된다고 했을 때 관심을 가졌으나 실제로 이것이 생의 마지막을 직면한 환자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미국 의료 드라마에서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고, 어쨌거나 생사의 갈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바람직한 권리로서 치매나 파킨슨과 같은 정신적으로 무의미한 삶에도 죽음을 합법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 책에서는 이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한 사람들의 상반된 마지막 사례가 그려져 있다. 건강할 때 작성한 문서는 실제로 죽음과 가까우리 만큼 병이 깊어질 미래의 상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장애인 채로 침대에서만 누워지낸다면 삶이 무의미해질 것이라는 예측은 실제로 침상에서 겨우 숨만 쉬며 지내게 되는 일에 적응했을 때 아주 작은 일에조차 행복을 느끼고 삶의 의지를 준다. 그래서 막상 자신이 상상했던 무의미한 병상에서 오히려 사전의료지시서의 내용과 모순되는 행동을 보인다. 인간의 생명은  스스로 존엄사 따위보다 훨씬 존엄한 것이다. 어쩌면. 그냥 숨 쉬는 것만으로도.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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