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
존 카치오포 외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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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씨 표류기>의 정려원은 방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녀가 택한 자발적 외로움은 무엇이 원인이었는지 영화 상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코믹하고 엉뚱한 행동 속에서 짠하게 전해지는 그녀의 상처를 읽는다. 언젠가 무슨 일을 계기로 사람들로부터 배척받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걸 경험했을 것이다. 신체상의 상처는 상흔을 남길지언정 언젠가는 그 아픔을 잊을만큼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지고 잊혀진다.  그러나 사회 라는 테두리 바깥으로 밀려났다면 그 상처와 아픔은 영원한 것이 되어버린다.

 

할로의 실험은 사회행동실험을 예로 드는 심리학, 행동학 계통의 책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골 실험으로, 새끼 붉은 원숭이의 애착에 대한 실험이다. 아기 때의 어미와의 신체적 접촉의 부재, 다른 원숭이와의 격리가 평생 사회적 동료와 어울리지, 새끼를 제대로 못하는 사회적 부적격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대 루마니아의 독재 정권 하에서 탄생한 고아들이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않은 채 아무런 신체적 접촉 없이 유아기를 보낸 아이들은 울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정신과 운동 기능의 발달 부진을 겪었으면 후에 영구적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거리의 부랑자가 되거나 일부는 비밀경찰로 이용되었다는 사례는 어린 시절의 사회적 친밀도와 신체적 접촉이 인간을 형성하는 데 주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로움은 고통이다. 그것은 은유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거부당할때 활성화되는 감정 영역의 뇌부위는 신체적 고통에 감정적 반응을 나타내는 부위와 일치한다고 한다.사회적 유대감이 주는 위안과 고립당했을 때의 통렬한 고통은 인간을 사회적 평가에 예민하게 한다. 초기 인류는 함께 무리를 이럴때 생존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으므로 유대감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결구 고립에 처하면 불안감을 느끼고 사고 인지도 손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외로움을 탄다는 것이 사교성의 부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외로움은 원래 가진 사교성을  억누를 때 문제가 생긴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로, 사회적 유대감의 수준을 아주 높게 설정한 유전적 영향과  사회적 유대감의 부재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회적 분위기를 꼽는다. 

 

서구 사회는 지난 5 세기 이상 반드시 서로 어울려 지내야 하는 인간이 제일 우선인 필수 조건들을 부차적인 요소로 격하시켰다. 75

지금 우리 사회가 아무리 풍요롭고 기술적으로 발전된 상태라고 해도 그 표면 아래에서는 우리가 6만년 전 폭풍 후의 공포에 직면해 한 곳에 모여들어 서로 위안을 구했던 바로 그 허약한 존재 그대로라는 것이다. 자연은 모든 사물이 연결되는 관계다. 그 관계가 단절되면 조절 장치가 무너지고 막대한 피해가 발생된다. 사회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세포 차원에서도 엄청난 혼란이 일어난다.87

 

관계의 양이 아니라 관계의 질이 중요

저자의 연구팀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방식 등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필요한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 해서 외로움의 보편적 구조를 찾았다. 그것은 브루너가 발견한 자아의 세 가지 차원, 개인적, 상관적, 집단적 관계와 일치한다. 이 세가지 차원 각각에서 문제는 관계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그 질은 우리 자신의 주관적인 욕구와 기호에 따라 결정된다.

 

사회적 고립은 고혈압 비만 운동 부족 흡연과 동일한 강도로 질병과 조기 사망의 위험 요소라는 연구결과가  사이언스지에 실렸다. 예로, 외로움을 심하게 느낀 다음날 아침 코르티솔 수치가 높고, 외로움을 느끼는 고령자의 경우 아침 소변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인 에피네프린의 수치가 높게 나온 결과가 소개되어 있다. 의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학과시험의 스트레스가 면역반응을 억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적 소외감이 수면의 깊이 와 질을 저하시킨다. 수면 박탈은 신진대사, 신경계 호르몬을 조절해 노화와 똑같은 영향을 미치친다. 옥시토신은 사회적 유대감과 가장 관련있는 호르몬으로 스트레스 반응을 줄여주고 고통을 누구러뜨리며 주의집중력을 높여 준다. 친밀한 행위인 섹스를 할 때 오르가즘을 느끼면 옥시토신이 대량으로 혈류에 유입되어 상대방에게 관심을 집중하고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와 혈압이 낮아지는데,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 배우자 사이의 유대감이 더욱 돈독해진다고 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행복한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을 보면서 자신도 비슷한 행복에 빠지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런 행복감마저 느끼지 못한다. 외로움은 충동과 감정조절 능력을 약화시키고 적대감과 불안감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게 한다. 외로운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인지와 자기 조절 기능이 손상된다.

 

외로움은 견디기 힘든 두려움을 유발한다.특히 청소년은 또래집단과 필사적으로 어울리기 위해 자신의 판단 능력과 정체성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배척당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자멸적인 어리석은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앞으로 겪게 될 실망과 좌절, 배척 당할 고통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무의미 하며 절대로 관계가 잘 풀리지 않으리라는 이유를 끊임없이 생각해 낸다 238

외로움을 덜 느끼려면

외로움을 덜 느끼는 사람들의 특징은 순간 순간에 적합한 진정한 사회적 상호작용이명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에 나가서 설치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밀어주며 모호한 상황에서는 다른사람이 행동이나 말을 선의로 해석한다. 남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주면서도 신중한 판단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지 않는다.

 

사회적 유대감을 잃지 않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손 내밀기.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 낼 확률을 높이고 실망할 가능성을 줄이려면 좀 더 안전한 자선 활동으로 실험할 필요가 있다.  노숙자쉼터 나 호스피스 병동의 자원 봉사 등을 통해 긍정적 느낌을 받기 시작하면 자신감도 생기고 자기 조절 능력이 강화된다

 

재미있는 설문조사가 있다 1985년 미국에서 자기 마음을 편하게 터 놓을 나는 친구가 몇명이나 있는가 라는 질문에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은 세명이었다. 2004년에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은 0명이었다. 4분의 1이다.  2004년 미국인 약 10%가 우울증이 조울증에 시달렸고 자녀가 우울증과 주의력 결핍 장애로 약을 복용 하는 경우도 크게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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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입니다
안도현 지음 / 느낌이있는책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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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ㅡ황진이

 

 

길고 긴 시간의 기다림. 짧은 만남. 아쉬운 이별. 님 그리워 더욱 긴 밤의 시간을 한 허리 베듯 뚝 잘라다 그걸 또 이불 밑에 두었다가 그분이 오신 짧은 시간에 꺼낼 수 있기를 바랐다. 이 시조를 볼 때마다 언어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안도현 시인이 고른 글귀에도 이 시가 있었다. 그가 아는 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우리 고시조 중 가장 아름답고 절절한 작품이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모든 시의 범주에서 가장 아름답고 절절하다.

 

 


간 밤에 자고 간 그놈 아마도 못 잊어라 와야 놈의 아들인지 진흙에 뽐내 듯이 사공놈의 성령인지 사앗대로 찌르듯이 두더지 영식인지 곳곳이 뒤지듯이 평생이 처음이요 흉중에도 야릇해라 전후에 나도 무던히 겪었어라 참말로 간밤 그놈은 차마 못 잊을까 하노라

ㅡ 이정보의  우리 사설시조 <간 밤에 자고 간 그놈> 전문

풀이는 이렇다.

 

간 밤에 자고 간 그놈 참 못잊겠네. 기와 만드는 놈의 아들인지 진흙을 마구 짓이기는 것처럼, 사공놈이 손으로 삿대를 잡고 찌르는 것처럼, 두더지의 지체 높은 아들인지 내 놈 곳곳을 뒤지는 것처럼, 평생에 처음이었네, 이 가슴도 야릇하네.  이전에도 나 그런 일 수없이 겪었으나 참말로 간밤의 그 놈은 차마 잊을 수가 없네. 87

 

사설 시조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서민 문학이라 할 만 합니다. 고리타분한 시조 형식을 파기하는 대담성도 놀랍지만 재담• 욕설• 음담 등을 시조의에 도입함으로써 풍자와 해학의 세계를 호쾌하게 열어제친 아주 귀중한 문화 유산입니다. 87

안도현 시인의 산문집 <나는 당신이다>는 그의 서재 오래된 책 속에서 찾아낸 밑줄과 그 밑줄 속 생각들을 담아낸 책이다. 10여년 전에 쓴 <100일 동안 쓴 러브레터> 라는 두 권의 책에서 추리고 개정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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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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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섬
어차피 인류의 사랑 행각이  더이상 종족 보존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므로  새로운 가치를 찾을 수 있다면 ㄱ,ㄴ,ㄷ 셋이서 경험하는 쓰리섬이 관습과 윤리와 도덕으로부터 터부시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혼전섹스가 여성에게만 특별히 범죄가 되었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았던 것, 아직까지 그런 문화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변화하는 인간 세상에서 쓰리섬이 프리섹스만큼이나 자유로운 하나의 취향으로 받아들여질 날이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이미 매우 개인적인 사건이므로 사회적 합의에 도달했느냐의 여부는 더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취향과 사생활 보호라는 관점에서 더욱 시사적일 수 있다. 일부 개방적인 나라의 자유로운 부류의 인간들 사이에선 쾌락적 관계맺기에서 쓰리섬이라는 선택이 조금 예외적이기는 하나, 사적 영역으로 크게 윤리적인 지탄을 받지 않고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세 사람이 함께하는 성행위가 많은 문화권에서 폭넓게 하나의 문화가 되어있다는 말은 아니다.  관습과 인습에 반하는 것은 때로 범죄처럼 취급받기도, 현행법상 범법 행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 사람의 기이한 덩어리지기는 독자들에게 납득을 주었는가. 외롭고 가난한 영혼들이 품은 상처받은 내면의 가시들을 접고, 오로지 서로의 육체에 탐닉한 채로 그 겨울을 나고 있었다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았는가. 문제는 그거다. 아무리 마법같은 언어로 독자들을 설득했다 해도, <은교>의 칠십넘은 노파가 어린 고등학생의 몸을 향해 욕망하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주입된 관습과 인습의 뿌리는 쓰리섬을 선뜻 받아들이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은근슬쩍 모른 체 수사적 문학 표현의 한 방법으로 존중하고, 소설의 축인 쓰리섬 문제에 대해서는 함구해도 되는가. 하나보다 둘이, 둘보다 셋이 좋다는 화자의 고백을 따라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박범신 작가의 글을 따라 읽다 보면 그들의 기이한 애정 행각을 환타지를 대하듯 무심히 넘기게 된다.  그래. 그렇구나. 그랬구나. 끄덕끄덕거리며. 

 

그렇다고 해서, 그런 행위를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가능성 있는 현실적 행위로서 나에게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작가의 귀 속에 살고 있다는 그 간지러운 곰팡이들에게 전달된 불행한 가시 선인장의 얘기로, 꿈처럼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 환상으로 무심히 상징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읽는다.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익명의 세 사람, 그래서, ㄱ, ㄴ, ㄷ으로 불리고 부르는 것으로서 서로를 욕망하지 않았던 세 사람, 과거와 미래를 공유하지 못하고 단지 햇빛이 주는 명암과 온도와 바람이 주는 습도에 따라 변화하는, 서로에게 단지 풍경이었던 세 사람이 무참함의 늪 깊숙히 우물을 파고 그 속에 빠지고 빠뜨리는 삶의 무상함과 상처와 권태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우리는 세 사람의 쓰리섬을 읽으며 스크린 속 동영상에서 나오는 저속하고 값싸고  탐욕스럽게 보이는 클로즈업된 살색 장면을 상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내면이 치유를 경험하는 경이로운 순간을 환상처럼 다루게 된다. 독자들에게 쓰리섬을 거부감없이 주입시키는 작가의 탁월한 능력이다.

 

그들의  행위는 범죄와 같이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도 용납될 수도 납득되지도 않는 패륜 행위였는가. 물론 살인은 그렇다. 세 사람의 강한 정신적 일체감이 에너지가 되어 스스로 판 우물 속에 스스로 빠졌다고 설득하지만, 살인까지 용납할 수는 없다. 그것도, 불멸의 사랑 따위를 위해서라니 너무 나갔다. 그러나 쓰리섬은?  덩어리라는 일관된 표현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한 채 셋이서 서로를 만지며 탐닉함으로써 각자의 상처와 상실감에서 벗어나 혼연일체가 되고 비로소 온전한 인간임을 느끼는 시간들. 그렇게 서로를 보듬고 안는 그 치유의 시간에 우리는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살색 클로즈업을 상상할 수도 그 엄숙한 치유의 장면에 돌을 던질 수도 없다.

 

 

숭고함과 저속함 사이

인간이 결혼 여부를 떠나 성적인 부분에서 남여, 남남, 여여의  일대일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는, 그리고 이런 관계가 대다수 문화에서 윤리와 관습을 떠받치는  기둥이 된 이유는, 독점적 애정을 갈구하는 인간의 욕망과 애정 행위가 두 사람만의 은밀함 속에서 비밀스럽게 일치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만족감이 사랑이라는 언어로 치환되었을 때, 그 속에서 자라난 소유와 안락의 욕망이 다른 인간 본성과 융합되어 하나로 모여진 결과였을 가능성이 높다.  ㄱ ㄴ ㄷ 은 이 룰을 깼다.

 

성행위는 가장 숭고한 언어와, 가장 저속한 언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생물학적으로 교접이라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랑, Make love라고 말한다. 유전자 전달이 목적이었던 그 숭고한 행위가 그와 동시에 진화의 경로를 타고 이제, 어느 문화권에서나 가장 저속한 욕으로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둘이서 하나 되는 가장 고결한 순간 그 일체감이 이루는 행복을 안정되게 소유하고 싶어 우리는 일대일 배타적 관계를 택했다. 몸과 몸이 만나 서로를 핥아주고 만져주고 한 몸이 되는 순간의 황홀함을 찬미하여 동물적 교접 행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썼지만, 동시에 은밀해졌다. 소유하고 싶은 정신적 욕망을 육체의 탐닉으로 가장 만족스럽게 달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방금 정의 내린 육체의 탐닉에는 필연적으로 소유의 욕망이 내제되어 있을 수 밗에 없고 가장 추하고 역겨운 것과 자연스럽게 통할 수 밗에 없다. 그래서 성행위는 '사랑'이었다가 가장 저속한 '욕'이었다가 그 둘 사이를 언제든 빠르게 순간이동한다.

 

ㄱ, ㄴ, ㄷ은 서로를 욕망하지 않았을까. ㄴ은 더플백을 메고 사라질 사람이라, 자기가 빠지게 될 깊은 우물을 스스로 파는 사람이라 욕망할 수 없으며. 욕망하지 않기에 셋이서 함께 행복하게 덩어리져 지낼 수 있었다. 둘이라면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서 발산하는 충족감이 너무 커서 다시 또 욕망하게 될지도 모를 것이었다. 그들은 셋이 함께 세 개의 꼭지점에서 삼각형 대신 둥근 원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모든 상처를 잊고 한 덩어리가 되었기에 서로를 욕망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그들은 서로의 이름도 과거도 미래도 묻지 않음으로써  서로에게 다만 풍경이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물이 완성되는 순간 이별의 긴박감이 감돌던 순간. 이제 ㄱ, ㄴ, ㄷ 덩어리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풍경이 아니었다. 그들의 몸은 각자 다른 위치에 있음에도 동시에 한 몸처럼 그들 스스로가 만든 원형 안에서 살의를 느꼈고 불멸의 사랑을 욕망했다. 그들이 서로를 욕망하는 순간 아니 욕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아름다운 환상들은 터부와 범죄 가득한 어두운 먹색으로 마법처럼 세상을 변화시켰다. 숭고함은 저속함으로 순식간에 바뀐다. 그렇게 풍경은 빛과 구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었기에, 그들의 쓰리섬은 애초에 서로를 욕망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행위였다. 인간이 인간에게 소망을 품고 위로를 구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티끌만큼이나 작은 감정일지라도 서로에게 풍경이 될 수 없다.


선인장 가시, 우물, 풍경, 풍경이 된 몸짓

강렬한 프롤로그에 이끌려 책을 읽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ㄴ과 ㄷ의 이야기를 ㄱ이라는 화자에게 듣게 되는 일. 이 때 ㄱ, ㄴ, ㄷ은 이상한가. 작가는 묻는다. 그러면서  풍경1 풍경2 처럼 어떤 풍경에 숫자를 붙이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풍경과 사람은 다르다. 풍경은 경계가 없는 연속적인 어떤 것이고 가만히 그 상태에 있지만, 인간의 감정과 외부의 환경에 따라 사람을 변화시킨다. 한 인간에게 어떤 풍경은 시시각각 옮기는 발걸음에 따라, 그 사람의 감정에 따라. 빛의 강도와 바람의 세기와 해와 달의 위치와 계절과 환경에 따라 다채로운 색상을 인간에게 부여하지만, 풍경 자체는 어떤 대상이 아닌, 나, 나를 둘러싼 환경, 그냥 뭉뚱그림 그 자체이다. 인간은 풍경이 될 수 없다. 인간의 고유성은 그가 통과했던 역사와 그 속에서 품은 가시와 몸뚱아리는 욕망과 결합되어 그 모든 사람들에게 풍경이었다가도 순식간에 욕망의 대상으로 변한다. 보이지 않는 아픔을 공유했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겠다고 가시로 몸을 감쌌다고 해서 애초 풍경으로 설정한 대상이 영원히 풍경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아니 그런 소망울 가졌다면 그것 자체가 욕망이다. 우리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상처받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으리, 무엇이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상실의 슬픔과 결핍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리. 절망의 끝자락을 가시로 품으며 자신을 감추고 혹독한 겨울을 덩어리지기로 의지했던 서로에게 익명이었던 세 몸짓들처럼 우리 역시 저마다의 사연을 가시에 품고 있는 선인장이다. 부모가 살아계시다고 해서, 형제가 나로 인해 죽지 않았다고 해서, 폭력과 광기의 현대사가 내 가족에게 총구를 들이대 쏘아버리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당한 취급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가시 없을까.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 가꾸어졌다 해도, 그 고른 온도 속 변화없음의 망망함, 매일 똑같은 일상의 무료와 권태가 작은 가시로 뻗어나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할 뿐. ㄷ의 어미가 딸을 겁탈한 남자와 몸을 섞고 살고, 그 남자의 딸을 죽여 자기 딸의 호적을 만들었듯 비루한 삶은 어디에서든 희망 없이 이어진다. 너무 크고 아파서, 꺼낼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상처들은 깊은 우물 속 비밀스레 연결된 지하의 물길들을 가슴 속에서 흐르게 놔둔 채 소소한 풍경들 속에서 하루를 맞고, 하루를 맺는다. 그리고 다시 상처받고 상처줄 인간에게 건네는 한 마디 말, 한 모금 물을 통해 다시 그를 욕망하며 풍경을 사람으로 바꾸는 기적을 경험한다. 그게 인간이다. 그게 사랑이다. 익명의 서로가 풍경이 되어 한덩어리되는 것은 살색으로 뒤덮인 네모난 스크린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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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성의 후예 - 나는 천문학자입니다
이석영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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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쓴 책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과학책일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제목이 '초신성의 후예'일  때는 뭔가 과학적인 것을 기대한다. 작가 이석영은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교수를 지낸후 현재 연세대학교 천문우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에서도 손꼽을 만한 훌륭한 학자이다. 표지 소개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세계 상위 1% 피인용 논문 횟수가 가장 높은 한국 과학자 10인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이런 대단한 과학자의 글을 읽을 때 가지는 기대에서 벗어나, '과학' 컬럼이라기엔 애매한 글들이 차지하고 있다. 유학 시절의 경험과 학교 내의 문화 차이, 지도교수와 담당 학생들과의 이런저런 개인적인 일화, 천문학회 내의 풍경 등이 지면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기본 판형보다 조금 작고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 230 쪽 정도의 얇은 분량 중 '1부 나의 우주는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인다',  '2부 박사가 되는 길에서 제일 쉬운 것'은 거의 개인적인 소소한 이야기이고 '3부 우주의 생강'에 해당되는 14편의 컬럼 약 80 페이지 정도가 천문학과 관련있는 에세이들이다.

 

3부의 내용은 현대 우주론의 개념 중 일반인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주제들로 채웠다. 빅뱅 이론, 초신성 폭발 태양의 운동, 나사의 세 개의 우주망원경 프로젝트의 발사와 실패 과정,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 우주의 완벽한 균일 상태에서 생명 탄생의 기원인 원시 밀도 요동의 불완전험에 대한 비유,  초기 우주의 열역학적 평형, 자기 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원리, 외계 생명체의 가능성,  밤하늘이 어두운 이유 등에 대한 흥미로운 주제들을 인간과 사회에 빗대어 현대 우주론의 개념을 재미있게 제시한다.

 

그 중 우리 은하 내에 우리와 같이 서로 교신 가능한 지성 문명이 몇 개(N)있는가를 산출해 내기 위한 드레이크 방정식이 흥미로웠다.

 

 

R은 별 생성률이다.  우리 은하에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대략 일년에 하나 꼴로 별이 태어났으므로 R=1이다. fp는 별들이 행성을 가지는 비율로, 우주의 별들은 대략 절반 정도가 날별로 태어나기 때문에 fp는 0.5 정도가, 아마도 0.3~0.7 값을 가질 듯하다. ne는 별이 행성을 가진다면 생명 탄생에 적합한 행성을 몇개나 가질수 있을까에 대한 확률이다. 우리 태양계의 예를 들자면 7개의 행성이 있고 그 중 생명체가 탄생한 행성은 지구 1이므로 ne는 1이다. Fl은 적당한 크기의 행성이 있다면 거기에서 생명체가 발현할 확률로 지구의 경우 1 화성은 0이므로 이를 근거로 정할 수 있다.  Fi는 행성의 생명체가 지적 생명체로 진화 하는가에 대한 비율이다. 행성에서 생명체가 탄생하고 그 생명체가 오랜 세월을 통해 지적 생명체로서 문장을 발달시키는데는 너무나 많고 복잡한 과정과 조건이 만족되어야 하므로 fi는 매우 불확실하다. 다만 지구의 인류가 존재하는 이유로서 fi가 0 보다는 크다는 것만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Fc는  외부에 생명체가 있을 경우 우리와의 교신가능성이다. 지구의 경우  6천년 역사 중 최근 60년 동안만 교신 가능한 점을 들어  fc는 0.01이라고 저자는 어림짐작한다.  맨 마지막 L에는 교신 가능할 만큼 발달한 지적 생명체가 얼마나 오래 존속될 수 있을까에 대한 값이다. 과학자들은 현재 수준의 지구 문명이 약 1천년애서 1만년 정도 지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드레이크 방정식에 가장 낙관적인 값을 대입하면

 

 

이 낙관적 결과를 가지고 우리 은하에 50개의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리라는 가정하에, 우리와 비슷한 외계 문명이 우리와 문양을 교류할 확률을 따져 보면. 은하의 부피를 1조 세제곱광년으로 어림잡아 만광년 부피 안에 약 100억 개의 별 중 단 하나의 행성에서 빛의 속도로 소식을 전하고 소식을 받는데,  1만광년x 광년이 걸린다. 결국 교신에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빛의 속도로 운행이 가능한 매우 발달한 외계 생명체가 1만여 시간동안을 지구로 날아오는 동안, 비행체 내에서의 시간은 더디 흐르게 되므로 그들은 1년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된다. 따라서 외계 생명체가 우리를 먼저 발견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도 있다. 태양계는 우리은하 내에서도 젊은 별이므로, 훨씬 오래된 별들에서 선진화된 더욱 발전된 생명체가 생성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들에 의해 빛의 속도로 우리 행성 지구와 교신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지구에는 외계 생명이 넘쳐나야 한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갔나'가 페르미의 반격이다.

 

세이건 : 만일 우리뿐이라면 우주는 엄청난 공간낭비다.

코코나와 모리슨 : 찾으려고 시도하지 않으면 발견할 확률은 영이다.

페르미 : 그들은 어디로 갔나. -180

사회도 열역학적 평형과 비슷한 개념 있다. 공감이다. 어떤 새로운 가치 개념이 사회의 소개되고 받아들여지고 의미있는 결과를 창출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우주에서는 매개체가 빛이거나 유체의 움직임이고 사회에선 일의 종류에 따라 소문, 미디어, 인터넷, 공청회, 실제 사람들 간의 공동 협력 등이 그 역할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같은 시각을 갖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걸린다.165


4부의 주제는 나는 천문학자입니다로, 천문학자로서 국제 학회와 유학중 있었던 여러 일화와 자신의 철학을 가볍게 풀어나간다. 결국 과학에 대한 이야기, 과학자에게 기대했던 글은 80 쪽 조금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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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도망의 고수들은 자기 몸만 잘 숨기는게 아니다. 그들은 여기저기에 가짜 흔적들을 만들어 추적자를 교란시키고 따돌린다. 탐정 소설의 고수는 패를 보여주고 시작해도 추격하는 독자들을 기막히게 따돌려 반전에 성공한다. 몽환화라는 제목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미 독자들에게 큰 패 하나를 보여줬다.  몽롱하고 환상적인 것이라는 암시가 책 제목을 통해 주어졌지만, 눈앞의 작은 실마리를 잡고 안개속을 더듬듯 페이지를 넘기면,  조각조각 흩어진 퍼즐들을 하나로 맞추지 못한 채 의문만 쌓는다.  

 

수많은 단서들 중 한 가지를 선택하고 그 선택에 집중한다. 나의 상상력은 진부했다. 몬산토와 같은 다국적 종자화사가 어떻게 동남아와 아프리카 저개발국의 자생 식물들에 대한 특허권을 비열하고 야비한 방법으로 획득하고 독점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지를 얼마 전 알게된 터라, 애도시대 때부터 존재했다는 신비로운 기능을 숨긴 노란색 나팔꽃이 국제적 종자 전쟁에 얽힌 비화와 정치적 내막을 가졌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자의적인 확신은 추리의 경로를 엉뚱한 쪽의 한 방향으로 몰두하게 했다. 노련한 고수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언제든 추리소설을 읽을 때, 작가와 독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유리한 쪽으로 유지하려면 고수가 보여준 패를 잘 기억해야 한다. 둔함을 깨닫는 건 뼈아프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반전이 주는 묘미는 잔잔한 메시지와 완벽한 구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아 완벽한 결말로 독자를 이끈다. 피를 보이지도, 잔인한 살해 장면을 묘사하지도 않으면서 사건을 통해 우리는 가족간의 소외와 단절, 개인의 정체성의 상실, 금지된 욕망을 취한 과거의 빚이라는 문제들을 소통과 이해, 개인의 성장, 과거의 청산이라는 결말로 이끌어가는 작가의 저력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을 쫓지 마라. 멸한다.

 

마약이 주는 쾌감이란 자신의 모든 것과 맞바꿀 만큼 황홀한 것이었을까. 도취감에 취했을 때 경험하는 환상의 세계는 치명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유혹했다. 기묘한 정신 이상으로 감각이 왜곡되면서 느끼는 순간적인 환희는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순간에도, 익명의 선량한 사람들을 향해 마구 칼자루를 휘두르는 순간에도,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하루하루 무너져내려갈 때에도, 감각적 만족감을 주었을까.

 

마약의 역사는 고대 때부터 흔적이 남아있다. 아편은 기원전 3천년 메소포타미아에서 나타나, 고대 이집트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의료 및 종교적 목적으로 쓰여왔다. 로마의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아편 중독자임을 암시하는 글들을 남겼고, 페루 아마존의 현지 샤먼들은 아야후스카라는 환각성 약초 음료를 제조하는 비법을 전해받는다. 동물들까지 매혹하는 마약 중독은 행동과 쾌감 사이에 강한 연합을 만들어 냄으로써, 중독을 낳는다. 좋은 느낌에서 시작하여 내성으로 발전하고, 의존성이 높아지면 갈망이 나타나면서 약물이 제공하는 도취감이 점차 미약해지면 쾌감은 욕구로 바뀌고 좋다는 느낌은 부족하다는 느낌으로 변한다. 마약의 황홀감을 경험한 이상 누구라도 중독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애도시대때부터 그것의 환각 작용이 알려져 심한 사회적 문제를 겪은 막부는 몽환화라는 은어로 통하는 마약, 노란 나팔꽃의 재배를 금했다.  나팔꽃은 예뻤지만 꽃이 아닌 씨앗은 금단의 열매였다. 한 번 취하면 스스로 멸하게 되는 중독적 마약이었다. 치명적 위험을 알면서도 은밀히 이용하고자 했던 댓가는 대를 이어 갚아야 할 빚이 되고 말았다.

 

 

 

 

상처 혹은 성장

 

우리는 살면서 크게 작게 어떤 결핍, 어떤 소외를 경험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하지만, 자잘한 상처들이 삶 전체에 걸쳐 때때로 말을 걸어온다. 아프다고. 상채기들이 나이테처럼 쌓여가며 삶을 형성해 가는  과정 속에 사건이 우연과 필연으로 얽히고 그것을 통해 성장한다. 사촌의 자살과, 할아버지의 살해, 의문스런 형의 행동을 쫓는 과정은 리노와 소타가 각자 자신에게 시련과 부딪치는 과정에서 만난다. 그 만남 속에 그들은 깨닫고 성장한다. 추리 소설이면서 동시에 성장 소설로 읽히는 이유이다.

 

소타가 느낀 소외는 몽환화를 둘러싼 비밀을 풀어 나가는 과정에서 어쩌면 평생을 풀어야 할 수수께끼였을 수도 있을 진실과 마주침으로써 그 정체가 밝혀진다. 출생의 비밀과 함께 해온 노란 나팔꽃에 얽힌 사연은 가족들 사이에서 소타를 하나의 섬으로 만들었다. 맏이다운 책임감과 신뢰로 다져온 냉철한 엘리트 지식인의 모습에 안타깝게 세상을 먼저 떠난 전처 자식이라는 사실이 형 요스케의 이미지에 신비감을 더하면서 소타는 열등의식과 반감을 품고 긴 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을 보내고, 집을 떠났다. 나팔꽃을 매기로한 아버지와 형 사이의 연대감 사이에 소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소외를 해소시킬 수는 없었다. 죽은자는 정정할 수 없는 기억으로만 콩크리트처럼 단단히 굳어있을 뿐 말이 없다. 죽은 자는 해명할 수 없다. 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 기억과 만나는 것. 소타는 그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감춘 채 돌아가는 것을 최대한 미루고 거부한다. 

 

부모는 피해자와 간접적 가해자로 만났다. 몽환화로 인한 가해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빚이라는 유산을 피해자의 직접 핏줄인 소타에게만은 물려주지 않게 하기 위해, 요스케 혼자서 그 짐을 짊어지기로 했지만, 그것이 소타에게 또다른 상처가 되었으리란 것을 가족들은 생각지 못했다. 오직 집을 떠나는 핑계를 찾기 위해 먼 곳으로 대학을 갔지만, 첨단 미래 에너지로 각광받던 전공은 후쿠시마 원전 사태로 길을 잃는다. 원전은 이제 파괴와 종말을 상징한다. 소외와 단절을 벗어나기 위해 회피한 곳, 청춘의 한 가운데서  또 다른 층으로 만난 막다른 골목이다.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질주하던 트랙에서 갑자기 길을 잃기는 리노도 마찬가지다. 골을 향해 최대 속력으로 마구 달려가던 리노에게 고지 바로 앞에 나타난 가파른 절벽은 소타의 것보다도 치명적인 것이다.  올림픽 수영 국가대표라는 자신의 이상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던 리노에게 심인성현기증이라는 원인 불명의 병은 삶의 목적 상실이라는 고민만을 가져온 게 아니었다. 그동안 함께 해 온 친구와 모든 인관관계와의 단절, 불투명한 미래를 의미했다. 시간의 대부분을 수영부 선수들과 함께, 수영 연습과 수영 강습 알바로 쓰던 그녀에게 수영을 빼고 나니 내동댕이 처진 광활한 시간, 할 일마저 없어졌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대 사회다. 매우 잘 하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는 사회에서 인정받으려면 남은 인생을 걸고 삶의 다양한 여러 경로 중 한 가지만을 선택해 아주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그곳에 모든 나머지 인생을 걸고 집중해야 하고, 그렇게 한 우물을 향해 깊이 파내려간 곳에 암석이 있거나, 파다가 실패하면 쓰린 패배감을 안고 고스란히 산 것만큼의 인생 뒤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두사람은 모두 열씸히 자기가 믿은 길을 선택 했지만,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살아오던 삶을 무용하게 만들었고, 사방으로 뻗은 넓은 교차로, 빠르게 질주하는 도로의 한 가운데 서서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길 잃은 미아가 되었다.

 

우연과 필연

 

차를 신형으로 바꾸면, 그 동안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았던 동일 모델이 갑자기 길바닥에 천지다. 이상한 일이다. 인기 모델도 아니고, 개인의 필요와 경제적 사정과 선호도에 따라 결정된 일인데, 사고 나면 온통 같은 색상, 같은 모델의 차들이 유독 많아진다. 작가에 의하면 싱크로니시티는 어떤 행동을 하면 우연히 그것과 관련된 사건이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현실에서는 이 정도의 우연은 빈번히 일어나는데, 문제는 그것을 깨닫느냐 아니냐라는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책에서 우연을 설명하는 방법은 그런 것이다. 많은 우연이 의미있는 인물들과 사건들을 하나로 묶어가지만, 그 우연은 사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연과 운명은 서로 반대되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의 범주 안에 있다. 

 

소타와 이바 다카미의 우연은 소설 내에서 유독 남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둘이 어린 시절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사건을 쫓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나타났다 사라진 것도, 소타의 형과 은밀한 일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도, 고층 건물의 창으로 몸을 던진 사촌의 공백을 대신하여 밴드에 나타났던 것도 모두  두 집안 모두 몽환화에 얽힌 비밀에 깊이 관여했고 그로 인해 몽환화의 비밀이 사회에 일으킨 파괴와 파장을 바로 잡고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그 빚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장남과 장녀가  나섰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모는 노란색 나팔꽃이 또다시 사회의 어딘가에서 비밀스레 퍼지고 있는지를 감시해야 했다. 그래서 소년과 소녀는 우연처럼 필연적으로 만났다. 소타가 첫사랑의 행방을 알 수 없었던 것과 또다시 우연히 마주치고 추격하게 되었던 것도, 모두 노란 나팔꽃에 대한 선조들의 유산을 청산하기 위한 양심이자, 노란 나팔꽃에 얽힌 리노 할아버지의 죽음을 쫓는 과정이었다. 선조들은 한쪽이 피해자인동안 가해자였고, 다시 만난 후대의 소타와 리노는 가해자의  칼과 피해자의 피를 이어받았다.  쫓고 쫓겨야 했고, 감추고 파헤쳐야 했다. 운명처럼 만났지만, 우연이 아니었다.

 

단 하나의 꽃, 개별적인 것의 아름다움


한 송이 노란 꽃이 내내 머리속을 맴돌았다. 수줍어서일까. 활짝 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밝고 번잡한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이른 아침 홀로 피었다가 한낮이 되기 전에 스스로 스러진다. 하나의 생명을 품은 꽃 하나는 그렇듯 고결하다.  금단의 씨앗을 취해 황홀감을 얻고, 창작의 모티브를 찾고, 감각을 마비시키려는 인간의 욕망을 위해 한밭 가득 재배된 나팔꽃 밭은 책을 읽는 동안 내 머리속을 채웠던 그 꽃이 아니었다. 리노의 할아버지가 매일 물을 주고 말을 건네며 가꾸었던 꽃도 아니었다. 

 

우리의 아이들과 잠시 겹쳐져 보였다.  채 피기도 전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우리의 어린 꽃싹들,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새벽, 꽃이 피기도 훨씬 전 금단의 열매를 취하려는 어떤 무리의 인간들에 의해 무참히, 무기력하고 허망하게 가버린 세월호의 아이들을 생각했다. 세월호의 아이들은 군집명사였다. 한명 한명의 아이들은 개별적으로 인격체를 갖추고 한 가정의 부모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들이었지만, 학교라는 제도권 아래 한꺼번에 경쟁의 칼끝에 겨누인채, 웃고 떠들고 나누러 나가는 여행길조차 개별 인간으로서가 아닌 군집명사가 되어 스러졌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지시받고, 뭉처서 하나처럼 취급받은 집단명사였다. 배가 가라앉는 그 무서운 시간에 단체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에 따라야 했던, 개별적인 저항없이 똑.같.이 따라야 했던, 그래서 함께 동시에 바다 밑으로 가라 앉은 아이들은 집단적인 희생 뒤에서 무언가를 황홀하게 취하게 될 보이지 않는 어떤 인간들에 의해 군집명사가 되었다. 부모와 친척이 아닌 이상 우리는 그 군집 명사를 향해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릴 망정, 누구도 한 명씩 그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우리들은 그들의 집단 떼죽음만을 알 뿐, 그 한명 한명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노란색의 나팔꽃.  단 하나의 생명만을 본다면 얼마나 고결한가.   많은 씨앗들이 모여서 군집명사가 되었을 때, 그 속에서 개별 꽃들이 꽃잎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한 알의 씨앗으로 꽃을 피우기 위해 매일 물을 주고 정성을 기울여 보아야 그 꽃의 개별적 가치를 알게 된다.  환각제가 되어 군집명사로 사라졌던 꽃이었지만 단 한송이가 홀로 피어 났들 때, 씨앗을 취하려는 어리석은 인간의 음모가 개입되기 전, 그것이 이른 새벽 막 피어오르던 순간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리노의 할아버지는 죽기 전 얼마나 정성껏 그 꽃에 물을 주고 꽃이 피기를 바랐던가. 인간의 욕심이 지독한  업이 되어 다시 만나, 손자의 생명을 앗아가버리고, 자신의 생명을 빼앗았지만,  한 개의 꽃일 때, 개별 생명일 때의 노란색의 꽃, 그 순수성에 온 마음을 빼앗겼던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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