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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
류신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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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자료 수집을 통해, 치밀하게 계획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한 두 챕터는  뭔가가 지속적으로 읽기 과정을 방해하는 듯, 산만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저 세 사람, 발터 벤야민과 구보와 류신의 사유 뭉치들이  공존하는 방식에 있다. 이 세 사람은 구보의 사유 속에 한 덩어리로 공존하고 있지만 그들의 동거는 좀 관계가 모호하다. 세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가 두 사람이었다가 세 사람이었다가 하면서 편할 대로 합체와 해체를 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택배기사가 벤야민 씨 계십니까? 하고 물으면 구보가 문을 열어주고 본인이라며 사인을 하고, 또다시 구보씨 계십니까 하면 예 접니다 하면서 사인을 하고, 류신씨를 찾는데요 하면 실은 제가 류신이지요 하면서 사인을 하는 식이다.

 

류신은 서장에서 '벤야민을 향한 오롯한 사랑을 체현하는' 산책자 구보씨를 소환하겠다고 하면서, 이 책 속의 구보는 '식민 경성의 거리를 주유한 최초의 플라뇌르'이며 1930년대 박태원에 의해 처음 창조된 버전에 가까운 캐랙터로  '문학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낙차를 경험하는 다중적 정체성을 지닌 입체적 인물'이라 소개한다.  이해는 되지만 비일상적 어휘의 남발로 조금 거칠게 느껴지는 이 말을,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내 식대로 정리해 보면 그러니까, 벤야민이 남긴 [아케이드 프로젝트] 골격에 서울이라는 장소를 대입하여 벤야민의 철학대로 사유하고 밴야민의 시선으로 서울을 탐색해 보겠다. 그런데 저자인 류신 자신은 빠지고 벤야민의 페르소나를 가진 구보라는 산책자를 등장시켜 벤야민의 사유를 모방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보는 이 책에서 화자의 역할을 맡는디. 소설처럼 쓰여진 도시문화예술비평 쯤으로 여기고 읽으면 되겠다. 소설의 형식을 모방하여 구보라는 살아있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비평적 내용에 감성과 주관과 생동감과 자유를 시도하는 것은 색다른 발상이다. 저자는 이를 로맨티시즘이라고 명명했다. 이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독자에게 주지시키는 방식은 조금 뜬금없다. 구보가 홍대 앞 탐앤탐스에서 만난 친구 K씨와의 대화에서 본인은 지금 새로운 글쓰기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데, 그것은 소설인 동시에 평론인 장르라고 하면서,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개요를 소개하고, 스스로의 책에 색다른 발상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는 식이다. 그러니까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류신이 출간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문학평론인 이 책이기도 하면서, 책의 내부에 등장시킨 구보가 진행중인 평론인 동시에 소설인  프로젝트의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자주 화자의 시점에서 길을 잃는다.  '벤야민이 말했던 아케이드의 특성을 상기했다.', '벤야민이 말했던 아우라가 감지됐다.' '벤야민은 썼다', 그리고 구보의 사유는 그 벤야민을 상기한, 벤야민이 말했던, 벤야민이 썼던 방식 그대로 서울로 장소를 옮겨와 재현된다. '오롯한 사랑'이 일종의 사유의 모방이라 할 수 있겠다. 벤야민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았기 때문이었는지 가끔 구보가 추구하는 언어는 뜬금없으리만큼 현학적이고 거칠게 느껴진다. 결국 구보가 산책하면서 등장시킨 수많은 도시 이미지의 텍스트들은 류신과 구보가 동시에 공유하고 있는 프로젝트 자료이다.

 

아케이드는 지상의 빡빡하고 누추한 현실을 잠시나마 망각시켜 주는 판타스마고리아 즉, 요술 환등의 성전이지만 갖고 싶은 상품을 향한 리비도가 이 상품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는 각성과 꼼짝없이 독대하면서 우울이 생성되는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다.(p.101)

 

판타스마고리아, 요술 환등, 리비도 같은 단어가 내게 전달하는 독자와 필자와의 간극에 나는 작은 소외감을 느낀다.  머리맡 스마트폰을 더듬거려 찾아 쥐고 구글링을 한다(역시나 가장 정확한 정보는 위키피디아 계열의 사용자 저작 기반의 백과사전 사이트가 진리다). 잠시 반문해본다.  무엇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까지 소외감을 맛봐야 하지. 무엇 때문에 저들의 세상 속으로 편입하려 안달하는 거지..  얼마 전에 읽은 진중권의 미학에세이에서 밝힌 김규항의 주장 중 일부인 "어느 나라에서건 평론은 주로 평론가와 평론가 지망생, 인텔리들끼리 읽는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평론가, 평론가 지망생, 인텔리(의 범위는 애매하지만)의 넓은 원. 그 원 안의 주체들은 넓은 층을 끌어들고자 고군분투하기도 하지만, 거기엔 분명 파나고마고리아, 요술환등, 리비도, 아비투스 와 같은 단어들이 주석없이 소비되는 그들만의 세상이 있다.  

 

저자의 방대한 자료 수집과 지적인 탐구로, 서울이라는 장소를 시대가 지닌 문화 예술적 생산의 파편들과 아울러 탐색하고 비판하는 탁월한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구보씨는 서울을 산책하며 포착된 이미지들을 문학의 텍스트들과 대면시킨다. 많은 문학 작품들이 도시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것들은 구보씨의 발길 닿는 곳, 구보씨의 시선이 머물고 사유가 시작되는 곳에 그림자처럼 동반한다. 문학 작품 내의 텍스트를 떠올려서 사유를 길어 올린다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심지어 구보씨는 류신이 이 책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자료 조사를 거쳐 탈고하는 단계의 축소판인 문학적 몽타지를 조동범의 시집 [심야 베스킨라빈스 살인사건]에 대한 평론의 한 형태인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초안]으로 재현한다. 중첩된 구조 안쪽의 구보가 서술하고 매듭짓는 벤야민과 조동범의 문학세계에서의 연관성과 차별성은 류신이 구보를 등장시켜 해체하고 있는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그 자체이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이 중첩된 구조는 또 다른 바깥 중첩인 구보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속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임과 연결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구보가 자신의 화신인 구보2를 만들어 내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끝내고 사회 속으로 편입되는 과정은 류신이 구보를 만들어내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끝내는 과정과 등치 관계가 아닐까. 어쨌든 류신은 '현실의 리얼리티를 직시하되 마음껏 현실을 굴레에서 이탈하는 해방의 글쓰기'를 하고 싶은 속내를 구보를 통해 드러낸다. 구보는 유학 후 룸펜 생활을 하며 창작 활동을 하지만 류신은 구보가 외면하고자 했던 그 철저히 자본주의 속에 깊숙히 편입된,  교수라는 사회적 입지를 구축한 사람이다. 어쨌든 조동범의 평론의 한 형태인 초안에서 공간의 구체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 공간의 구체성은 구보의 산책을 담은 서울 아케이트 프로젝트에서 생동감있게 재현된다.

 

 

구보는 ...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상이 아니라 이미지의 파편을 통해 진짜 서울의 풍경을 독해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p99)

 

작가 류신은 구보를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의 책 서울 아케이트 프로젝트를 스스로 평론했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완성해가는 과정 중의 사유 중 하나로 슬쩍 끼워넣은 똘똘하고 계산된 곳곳의 장치들이다. 나처럼 가끔씩 길을 잃고 헤매는 독자들에게는 유용하나,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책의 해석을 중간 중간에 권유당하는 느낌도 든다. 

 

구보가 산책했던 서울은 벤야민이 비판했던 '상품 자본주의의 원조 신전이었던 아케이드의 생명력과 끈질긴 적응력'을 보여주는 '신자유주의의 물신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 욕망과 감정, 의식과 무의식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무서운 세상'이었다.


 

경복궁 근정전 회랑은 '치욕의 역사가 진열된 고궁의 아케이드'였고, 서울광장은 '서울이라는 욕망의 분화구'였으며, 서울시청은 '21세기 통섭과 혼종의 시대를 서울의 '중심의 중심'에서 건축으로 현시'하였다. '자본주의를 신흥 종교'로 떠받들어지는 세상에서, 백화점은 구보에게 상품 물신이 존재의 공허를 일시적으로 위무해주는 자본주의의 예배당'이며, 그곳을 쇼핑하는 사람들은 '생의 불안과 두려움을 상품 구매와 소유로 보상받으려는 신도'들로 읽힌다. 오래 전 구보에게, '금지된 욕망이 밀거래되는 곳'이었던 세운상가는, '한국 근대 산업 자본주의의 신화가 좌절된 유토피아의 폐허'이다. 홍대 입구에서는 '상업자본의 진군'을, 지하철 노선도에서는 '자기 일상의 동선이 만들어 내는 고유한 별자리'를 상상했고, 지하도는 '뒤죽박죽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시종일관 한 곳으로 모아 담는 도시의 깔대기'를 떠올렸다. 

 

자동판매기에서 캔음료를 꺼내 마시며, 지불능력이라는 전제조건이 만족된다면, '서울에서 욕망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즉각적으로 충족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하철은 '대도시에 새로이 출현한 무표정한 지옥' 같다는 생각을 하며 승객들의 표정에서 '어떠한 상황에도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겠다는 무관심의 의지'를 본다. 현대 소비 사회의 상징물들을 예의 관찰하면서 무기력하고 볼모화된 현대인의 삶을 포착하던 그는  버거킹에서 점심을 해결하며, '현대인은 사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닌 사물이 지닌 기호나 이미지를 소비한다'고 결론내린다. 그리고 코엑스 수족관에 들러 수마트라의 모습에서 '현대인의 비루한 자화상'을 본다.

 

반디앤루니스에서 발견한 청소년 권장도서 변신을 보며 떠올린 카프카. 출근하면 성실했고 퇴근후엔 필사적이었던, 생활을 위해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아실현을 위해 일상의 답답함을 무시하지 않았던  카프카의 정수리에 정확히 8:2로 나뉘어진 가리마를,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밥벌이에 비해 네 배는 무겁다는 등식을 대입해 본다. 그렇다 결국 밥벌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이든 욕망이든 소비이든 밥벌이의 무거운 어깨는 제도를 떠나, 사회를 떠나, 그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근원적인 최소 자유를 위한 필수 조건인 것이다. 


한국종합무역센터는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이 통치하는 거대한 제국의 거점이며, 이 제국의 건물과 건물들은 다양한 아케이드로 네트워크를 이루고, 그래서 경계가 없다.  요컨대 아케이드는 신자유주의라는 제국의 혈관이라 결론내린다.

 

구보는 떠올린다. 벤야민은 '대도시와 그 속에 매몰된 소비 대중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결코 유토피아적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나는 즉각적으로, 유토피아는 커녕,  근간 연일 이슈가 되어온 일련의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하나의 구호 안에 뭉쳐지고 있는 현상들을 떠올렸다. 구보씨는 안녕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유학을 다녀왔고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완성하였다. 구보씨는 현 체제 내에서 안녕할까?  물론 안녕하지 않다. 아직은. 그렇지만 체제 속에 안녕하려는 의지는 구보의 마지막 탈고를 마치는 과정과 룸펜을 벗어나기로 작정한 일련의 일상들을 짧게 기술한 에필로그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벤야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본의 물신이 대중에게 주입하는 현혹의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해체할 수 있는 사유 이미지들을 포착하려고 애썼다는 창작의도를 다시 한 번 밝히며 끝을 맺는다.

 

청계천에서 구보는 자신의 우울이 자유의 다른 얼굴이 되길 소망했다. same to m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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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만리 2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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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만리1을 읽은 지 몇달 지났다. 대기 명단이 가장 긴 책이다. 문제는 끝까지 스토리의 진전이 없이 전개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1편은 재미있었다. 이 많은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엮여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까 기대했다. 사회, 문화, 정치 전반에 걸쳐, 새로운 경제 대국으로 떠오른 거대 중국에 대한 사실감 높은 문체로 주재원과 교포들이 이국 땅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했던 1편은 신선했다.  같은 톤의 2편. 똑같다. 그게 문제다.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 1편과 딱히 달라진 게 없다. 결국 3편에서도 이러다가 말겠군 하며 마지막 장을 덮었다. 

 

중국의 실상과 중국 내 한국 비지니스맨으로서의 사고와 행동을 전달해주는 종합상사 부장 전대광은 여전히 꽌시를 사이에 두고 국내 수출기업들과 중국 내 바이어들과 바이어들의 가족들을 분주하게 상대하며, 등장인물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역을 한다. 의료 사고로 곤경에 처해 있던 서하원은 전대광의 주선으로 중국 관료 샹신원이 추진하는 성형외과 프로젝트에 차출되어 중국에서 인정받고 바쁜 생활을 한다. 철강회사 직원인 김현곤은 일본인과의 경쟁에서 밀려 시안으로 좌천되지만, 야심 많은 꽌시의 힘으로 역전의 기회를 잡고, 이 소식을 전달하러 온 전대광에게 고대 도시 시안과 진시황의 왕릉 등 시안의 관광정보 뿐만 아니라,  오래된 유적들이 함부로 파헤치고 급속한 산업 발달로 인한 매연이 가득한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부모의 반대를 이기고 중국 유학생이 된 송재형은 별 사건도 없이  정착해서 잘 사는 것으로 그려지고, 여자친구 리엔링과의 대화를 통해, 중국의 첩문화인 얼라이 문화를 전달하는 역과, 부모를 초대해 중국 짝퉁 시장을 가이드해주며, 중국의 짝퉁 문화를 전달하는 역을 맡았다. 철강 수입의 바이어인 거대 재벌의 젊은 회장 왕링링과 그녀의 최측근 앤디 박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중국의 대부호들의 비지니스 세계를 그린다.

 

모든 등장인물과 그 속의 사건들은 소설을 끌고가는 이야기의 구심력이 아니라,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중국의 모습을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전달하는 전달자들이다. 그들의 대화는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일반화한 중국에 대한 이미지를 전달한다. 누가 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어 어떤 결과를 이끌었는지, 그런 종류의 소설적 요소는 여기서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배경 위에 사건이 얹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배경을 조목조목 디테일하게 그리기 위해서 듬성 듬성 별 의미도 없는 사건과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다리처럼 연결시켰다. 캐릭터도 마찬가지이다.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없다. 무언가를 고뇌하고, 무언가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짓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깊게 그 속으로 끌어들이는 인물이 없다. 그들의 대화는 우연히 동승한  비행기 옆좌석의 모르는 사람과도 할 수 있는 종류의 대화들이다.  

 

2편에서 전하는 중국은 대략 이렇다. 송재형의 현지 여자친구이자 산아제한의 결과로 외동딸 리옌링의 아버지는 개혁개방과 거센 산업화 물결 속에서 축재한 재산으로 얼라이들을 거느렸다. 리엔링의 아버지는 뿌리 깊은 아들 선호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아들들까지 낳아 호적에 올리고, 이를 알게 된 리엔링의 가어머니는 이혼 위기에 몰린다. 얼나이는 첩을 말한다. 이 소설을 보면 중국의 부자들과 관료들은 얼나이를 한둘 뿐이 아니라 수십명까지 거느린다. 꽌시 같은 부정 부패와 급속도로 진행된 자본주의 수혜자들의 부산물이다. 사실상의 일부다처제다. 산아제한 정책으로 얼라이들한테서 태어나는 상당수의 여자아이가 숨겨진다. 호적없는 유령 인간이 통계상으로는 1300여만명. 소문에는 1억에서 최대 4억까지도 본다. 또한 여기 저기에서 툭툭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수많은 등장인물들 또한 작가의 시선으로 중국을 단순화 일반화한 전달자의 역할을 한다. 거대 짝퉁시장, 소수민족을 하나로 묶는 중국인들의 정체성. 중국인에 대한 자부심과 한족 우월의식, 제도만 바뀌었을 뿐 황제-신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부패한 정권, 거대하고 파렴치한 짝퉁 시장과 그 시장을 공략하는 한국 사업가, 문란한 성관계. 가정 내에서 드세고 우월한 여성의 위치, 불나방처럼 돈을 쫓아 화류계를 이루는 대학생을 포함한 숱한 여성들... 작가는 그런 작은 디테일들을 적기 위해 필요에 따라 아무렇게나 1회성 조연들을 수도 없이 등장시켰다가 거두어갔다.

 

먼 내륙의 서부도시 시안은 역대 17개 왕조 1200년 동안의 수도였다. 진시황의 무덤인 병마용에는 황토와 옥가루를 빚어 만든 실물크기의 6천여명의 병사와 400여 마리의 말과 100여대의 전차가 있다. 세계 8대 불가사의라는 이곳의 발굴지역은 진시황 무덤의 10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이다. 전대광이 사업차 방문하는 곳은 시안 말고도 칭따오가 있다. 칭따오는 독일 점령의 흔적이 남아 독일풍이 짙게 배어 있는 중국의 동부 연안 도시로 상하이와 함께 장차 동북아와 태평양 시대를 열기 위한 중국의 2대 거점도시이다. 이 책은 칭따오와 시안 여행자를 위한 가이드북 역할도 한다. 대화 형식이라 읽기 편하고 시중의 형식적인 가이드북보다 생동감있고 유용할 듯하다.

 

치파오는 무릎위까지 치마가 터진 타이트한 중국 의상이다.  하양연화에서 장만옥이 조용하고 뇌쇄적 분위기를 발산하던 그 옷이다. 그 옷의 기원에 대해서도 자세히 나와있다. 시안 같은 도시에 가서 잠옷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놀라지 말아야 한다. 중국 사람들이 웃통벗고 다니는 건 많이 알려져 있겠지만 잠옷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온 중국 사람들이 비싼 잠옷을 신분과시용으로 외출복으로 입고 나선 엉뚱한 유행 바람이 몇년전부터 일어났다고 한다. 웃통벗지말기처럼 정부의 문명 10대 개조 중 하나였다.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은 조정래 작가의 역사적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 받았던 기대치가 장기 베스트셀러라는 드문 현상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한 방법으로서, 태백산맥은 대를 읽고 읽힐 불후의 명작이었다. 태백산맥을 워낙 어릴 때 읽어 지금과는 다른 느낌으로 읽었을 수도 있겠으나, 그 때 받았던 한 작가가 인간으로서 전하는 진정성 같은 것을 느낌으로 기억한다. 같은 사람이 쓴 소설이라고 잘 믿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 전반에 걸친 비지니스 가이드 북 정도라고 한다면 더 큰 가치가 될 듯하다.

 

때로, 소설이 이야기를 많이 담지 않고도 소설이 되기도 한다. 소설이 독자가 기대하는 이야기를 담지 않고, 소설의 테두리에서 실헐적이라든가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려면 기존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어떤 신선함이 독특함이 동반해야 될 것이다. 정글만리는 제목처럼 무궁무진한 기회의 땅 중국에서 사업하며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 디테일은 깨알같고, 전지적 작가시점의 다양한 사람들의 눈으로 본 중국이란 나라의 모습은 제목처럼 정글같다. 그러나 이야기는 구심이 없고, 인물들은 개성이 없고, 책읽는 재미는 소설적 재미를 비껴가 있고, 인물이 만들어내는 대화와 말투는 생동감이 빠져있다. '엄마는 베이징에 왜 왔수?'. 송재형의 여자친구 리엔링이 엄마에게 하는 대화다. 노인정에서 드나드는 정겹고 오래된 모녀의 모습이지 싱그러운 여대생이 엄마에게 하는 말로는 읽히지 않는다. 책의 시간 배경은 바로 지금 현재인데, 말투는 대하소설 속 인물이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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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쓴 후성유전학 - 21세기를 바꿀 새로운 유전학을 만나다
리처드 C. 프랜시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시공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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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존재의 시작은 어디부터일까 . 수정하는 순간의 최초의 접합체,  그 아무것도 없는 단순하고 투명하고 균일질의 상태에 이미 나란 존재적 잠재성이 스탬프처럼 찍혀져서, 앞으로  존재하게 될 나의 모든 것이 "정해져"있는 걸까. 


리처드 C. 프랜시스가 쓴 쉽게 쓴 후성유전학에서는 위의 질문에 대해 아니다라는 답을 옹호한다. 200여개 종류의 줄기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그 가장 처음의 하나에 이미 인간의 모든 것이 잠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전성설(preformationism)이다. 유전자는 그 이론을 지지하기에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러니까 정선설에서 보는 '드러난 나'는 발생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정선설은 유전자가 지시를 내리고 세포가 그 지시를 따른다는 관점을 공통점으로 하여 연구의 흐름에 따라 "청사진","조리법","프로그램"으로서의 유전자에 비유되어 왔다.


반면, 후성설(epigenesis)은 발생을 통하여 내가 존재하게 된다고 본다. 발생은 창조적인 과정이라는 것이 후성설의 기본 입장이다. 접합체 속의 유전자들이나 다른 생화학 분자들이 생명의 고유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것들이 이미 형성된 나로서 기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성설과 후성설 사이의 논쟁의 중심에 있던 독일의 과학자 한스 드리슈는 성게의 수정 직후 첫 세포 분열 과정의 초기 분화 단계에 개입해 분열된 세포들을 분리하여 각각의 분화된 세포들이 완전한 성게 유생으로 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것은 이른 배아 단계에서 각 세포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발생을 조절함으로써 온전한 배아로 자란다는 결론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는 발생의 더 나중 단계에서, 세포 환경이 유전자 조절에 관여한다는 상호 인과관계를 발견했다. 그의 연구가 심화될 수록 그는 점점 더 발생의 복잡성에 압도되어 모든 자연주의적 설명을 버리고 결국 철학자의 길을 걸었다. 후성학의 발견이라는 생물학적 연구적 환경이 그의 인생의 궤도를 180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세포의 운명은 다능성 단계를 지난 후에도 배아에서의 위치, 이웃 세포들과의 화학적 상호작용에 크게 좌우된다. 후성설의 가장 큰 난제는 어떻게 단순하고 균일해 보이는 상태로부터 훨씬 더 복잡하고 질서정연한 상태가 탄생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후성유전학이 이를 설명한다.


책의 도입부에서는 네덜란드의 나치 점령군이 퇴각하며 내린 봉쇄조치로 인해 생긴 약 8개월간 기근 기간 동안 태어난 아기들의 몸무게와, 그의 자식, 그리고 손자 세대에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관찰을 통해 태아때의 장기적 기근이 높은 우울증, 비만율, 정신분열증, 반사회적 성격장애, 당뇨 등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후성유전학의 바탕 위에 소개한다. 


이어서, 리처드 C 프랜시스는 스테로이드 복용으로 악명을 떨친 미국의 메이저리구 야구선수 칸세코의 사례를 통해  만성적인 스테로이드 복용이 어떻게 후성유전학적으로 몸의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한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작용을 설명하고, 포유류의 양육방식과 스트레스 반응을 관찰함으로써,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같은 질환들이 대를 이어 후세에 까지 영향을 주는 사실을 주지한다.  테스토스테론으로 몸속의 자연적 테스토스테론 생산을 중단시키면서 우울과 성욕감퇴를 겪고, 테스토스테론 대사의 부산물중에 발생하는 에스트로겐 호르몬 수치가 올라가면 고환이 쪼그라들고 발기부전을 겪는다. 인체의 생리적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진화된 스트레스 반응은 생식에서 면역까지 거의 모든 생리적 체계들과 관련되어 있다. 세포핵 수용체와 결합함으로써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치는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손이 태아의 폐 발달을 촉진하기 위해 처방된 경우,  높은 코르티솔 수치를 경험한 태아는 자라서 스트레스 축이 평생 과다 반응성을 보여 심장질환과 당뇨를 포함한 여러 질병의 발생률이 평균보다 높고 수명이 짧았을 뿐만 아니라 정신장애를 겪을 가능성도 높았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이것은 홀로코스트 때문에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PTSD와 우을증의 발병률이 높게 나타났던 연구, 기니피그의 부적절한 모성 행동이 세대를 통해 자식 기니피그의 코르티솔 수용체의 유전자 반응성에 영구적 영향을 남기는 연구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록 (쉽게 썼다고는 하나) 전문적인 생리 메카니즘을 모두 따라가기에는 벅찬 감이 없지 않았으나, 후성유전학을 납득시키기 위해 그 복잡한 생리 작용의 기초를 꼼꼼히 기술한 저자의 성실성과, 전문 독자가 아닌 일반 독자도 쉽게 이해하도록 다양한 사례들을 각 챕터의 도입부에 소개하고 이론과 사례의 적절한 연결을 통해 이해를 돕는 저자의 서술 방식을 높게 평가한다.

 

뭔가를 더 알아간다는 건, 더 알아야 할 것들과 더 생각해야 할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후성유전학은 정도의 문제이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발생 과정의 어디부터를 인간으로 볼 것인가는, 발생과정에서 연속적으로 달라지는 인간성의 정도를 파악하는 문제이며, 이것은 사회적이고 정서적이고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면에서의 합의로 결정될 문제이다. 고로 "유전자+알파 = 나" 의 문제는 더 읽어야 되고 알아야 되고 더 경험해야 하고 더 살아야 하는 철학의 문제로 귀결된다. 철학자가 된 유전학자 한스 드리슈의 끝없는 탐구 정신이 책의 한 귀퉁이를 통해 흐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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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수 혁명 - 안전한 식수를 향한 인간의 권리와 투쟁
제임스 샐즈먼 지음, 김정로 외 옮김 / 시공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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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제는 물, 씻는 물도, 강물도 아닌 먹는 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은 식수 라는 주제에서 단 한발짝도 옆길로 새지 않는다. 물에 대한 진지하고 깊이 있는 탐색과 균형잡힌 정치적 견해는 가장 흔하고, 가장 무심하게 대하고 있는 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처음 두 개의 챕터는 식수의 역사, 식수와 관련된 법률의 역사, 신화 등을 통해 물의 세계로 흥미롭게 독자를 인도한다. 다음 세 개의 챕터는 생수를 포함한 식수의 안전에 전념한다.  식수에 대한 생물학적, 화학적 오염, 테러리스트의 공격 등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식수의 위험 가능성을 알려준다. 그러나 제임스 셀즈먼은 이러한 위협에 대해 어느 쪽으로도 편중된 정치적 견해를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균형잡힌 어조로 어느 수준만큼의 위험을 안전이라는 개념 내에 수용하고, "보이지 않는 위협" 가능성에 대해 얼만큼의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에 이를 필요가 있음을 밝힌다. 마지막 파트인 두 개의 챕터는 최근의 정수 기술과 민영화 문제를 다룬다. 물 민영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인의 인식과 실제 민영화에 따른 서비스 질에 대한 대학의 연구 사례를 통해, 국가가 통제하는 조건하에서의 민영화가 생각만큼 거대 자본의 물 독점이라는 피해의식으로만 볼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볼리비아 정부는 1990년대 말 코차밤바시의  서비스 향상을 목적으로 민영화 개혁을 시도했는데, 계획이 시작되자마자 길거리 시위와 폭력 사태로 확대되는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고, 극빈층들은 여전히 수돗물의 혜택을 못받아 부자들보다 열 배 가까이 넘는 돈을 지불하고 물장사들에게 물을 사 먹는다. 코차밤바 선언으로 알려진 이 수돗물 민영화 반대 선언문은 권리 대 시장 인간의 필요 대 기업의 탐욕을 대변한다. 그리고 이 책은 식수의 본질 즉, 물을 인간의 기본적 권리로 보아야 하느냐 거래할 수 있는 상품으로 보아야 하느냐 것의 사이를 고대 이집트 로마 시대의 신화, 종교적 성수, 영화와 문화 속의 물에서부터 최근 UN결의안 사이를 종횡으로 누비며 끊임없이 저울질한다. 

"물은 인간의 근본적인 권리이고 모든 정부는 이 공공재를 보호해야 한다 따라서 물은 상업화 되어서도 안되고 그 사유와 되어서도 안되며 상업적 목적으로 거래 되어서도 안된다." -코차밤바 선언문 중

식수 관리에 대한 다양한 종교와 신화, 전통적 문화를 살펴보면 목마름의 권리가  보장되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목마른 자가 식수에 접근하는 것은 기본 권리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플라스틱 생수의 등장과 날카로운 상승세의 시장 확대, 그로 인한 수돗물 기피, 공공 식수대의 감소 현상 등의 최근의 변화는 이러한 기본 적 목마름의 권리가 아직도 유효한가 혹은 유효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제임스 셀즈먼은 양극단의 견해에 대새 시종일관 균형잡힌 시각으로 일관한다. 거대자본의 식수원에 대한 독점과 이로 인한 물자원의 고갈에 따르는 환경 파괴, 막대한 이익창출 등의 생수시장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을 아끼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 어느 편을 옹호하지도, 자극적으로 선동하지도  않으면서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식수에 대한 예민한 사안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면으로 풀어 나가면서 식수에 관련된 팩트들을 꼼꼼하게 제공하고 독자들에게 사고의 전환과 판단의 몫을 남기는 객관적 글쓰기는 다소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환경에 대한 문제는 알아갈수록 점입가경이다. 물 속에 의약품이 섟여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아플때 먹는 온갖 종류의 약물, 가축의 대량 사육을 위해 사료에 섞어 멕이는 항생제와 스테로이드들이 신체 대사와 변기와 하수처리장을 거쳐 자연 속 지하수로, 식수원으로 흘러 들어 돌아 결국 다시 식수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10여년 전 30개 주의 80퍼센트의 개울에서 발견된 82개의 오염물질의 대부분이 의약품, 개인미용 및 위생용품이었으며 대도시를 비롯한 정화된 식수에 56개의 의약품과 그 부산물이 들어가 있다는 AP의 보도가 그 실상을 말해준다. 문제는 '오염이 법적 허용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해도 그 물이  여전히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해 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원가의 수백 배 수천배를 주고 사서 마시는 생수는 한술 더 뜬다. 생수의 안전성에 대한 문제 제기는 우리가 고급 레스토랑이나 카피전문점에서 와인 가격에 해당하는 값을 지불하고 사먹어야 하는 푸른색의 탄산수 페리에에서 우연히 발견한 허용치 네 배에 해당하는 벤젠 화합물의 존재로부터 제기되었다. 미 환경보호국의 규제에 따라 매일 검사하고 오염물질이 발견되면 신속히 주민에게 알려야 하는 수돗물과 달리, 식품의약국의 규제를 받는 생수는 간헐적 매주 검사에서 오염물질이 발견되더라도 이를 줄이면 되지 사람들에게 알릴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수에 대한 엉성한 식품의약품의 규제 또한 주경계를 넘어 거래되는 30~40퍼센트에 해당하는 브랜드에 한해서만 적용되며 주경계 내부에서 생산 소비되는 나머지  2/3는 그마저 도 피해가고,  거의 무방비상태의 주정부의 규제 내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구글링을 해보았으나 지자체에서 관리하는 듯하나 구체적인 정보는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안전에 관한 한 우리가 옛 사람들이 안전하다고 믿고 아무 거리낌 없이 마셔온 물이 최근 100여년 전에 와서야 질병의 원인으로 인싣하게 된 것처럼, 우리가 매일 마시는 물은 그 잠재된 위험에 무감각해져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옛 사람들이 마시는 물을 두려운 눈으로 볼 수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은 으레 자기가 마시는 물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사실이다. 내가 살아온 짧은 생애 동안에만도 많은 것들의 가치가 변하고 역전하기를 반복했다. 자연과 전통의 가치는 자본과 물질 앞에서 고리타분하고 불편한, 타도 대상이었다가, 환경파괴가 정점을 찍자 어느새 여유롭고 지적인 것의 상징이 되었다. 자연의 고유 가치는 변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마지막 챕터에서 제임스 셀즈맨이 언급한 말이 생각난다. 우리가 가정에서 빨래, 목욕, 세차, 청소, 놀이 등을 위해 마구 흘려 보내는,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수돗물은 음용 식수로서의 기준에 맞게 정화되었다. 그러나 그 수돗물을 음용에 사용하는 양은 전체 정수된 물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99%의 음용 이외에 소비되는 물을 목마름의 권리로 확장하여 국가에게 권리로서의 물을 자유와 평등 같은 기본 권리로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하고 살아야 할 것은, 아직도 지구상의 남쪽 반구의 대다수의 어린이와 여성들은 물 한동이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몸무게의 반 이상의 물통을 지고 나르며 학교를 가지 못하고, 박테리아와 세균이 들끓는 오염된 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으며, 가난한 도시의 수도시설이 미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곳에 사는 같은 도시의 부자들에 비해 20배의 물 값을 지불하며 물차에서 물을 사먹는다는 사실이다. 기본 권리는 식수의 99%를 비음용에 사용하는 사회에서가 아니라 이런 곳에서 주장하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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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커스 - 새로운 수요를 만드는 사람들
크리스 앤더슨 지음, 윤태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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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앤더슨의 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끊임없이 독자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면서, 그 새로운 세계에서 형성되고 있는 질서와 변화를 쉽고 빠르게 캐치할 수 있도록 돕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불확실하고도 희망이 없어 보이는 세계에 뭔가 기대해볼 수 있을 만한 새로운 출구를 일관성있게 제시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책을 읽으면 재미있으면서도 걱정이 줄어들고 마음이 산뜻해지는 느낌과 더불어, 그가 글을 통해 보여준 수많은 새로운 세계를 웹을 통해 함께 탐험해보게 된다.

 

  취미로 컴퓨팅을 하던 사람들이 모여서 웹을 만들던 것을 목격했듯,제조업 분야에서도 세계 최대 기업들이 하향식 혁신을 일으키기 보다는 수많은 개인이 상향식 혁신을 일으킬 것이라는 게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다. 크리스 앤더슨은 미국 내 수많은 사례를 통해 이러한 변화와 혁신 방향을 디테일하게 전달한다.


  21 세기의 제조업은 데스크탑 제조 도구와 제조 시설에 대한 접근이 쉬워지면서 누구나 아이디어만 있으면 제품을 만들어 파는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변화를 겪고 있다. 또한 웹을 통한 글로벌 시장 판매로 이어져 물리적 제품을 제조해 판매하는 기업가가 넘어야할 장벽이 20세기에 비해 크게 낮아졌다.

 

     최근 몇년 사이 물리적 제품 제조 과정이 점점 디지털화, 네트워크화 개방화되어 가며 디지털 제품 제조과정을 닮아 가고 있다. 대형 제조업체의 생산 라인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3 차원 프린터 제조업체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같고, 고객 취향에 따른 주문 생산과 소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이것이 제조업이 미래다. 누구나 마우스 클릭 한번으로 공장을 가동 시킬 수 있다. 

   

  그의 주장은 제조업이야 말로 차세대 혁명을 주도할 분야라는 것이다. 그는 1 차 산업혁명은 방대한 잉여 시간을 창출하였고 이러한 잉여 시간은 근대 사회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발명하는데 투자되었다고 하면서 컴퓨터 기술 혁명이 제조업을 민주화하고 확장하지 못한다면 아직은 산업혁명이라고 부를 수 없고, 무중력 경제는 물리적 재화를 생산하는 제조업 경제에 비하면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개 주지사킨다. 이를 위해 변화하고 있는 키워드들은 오픈소스 기반, 크라우드 펀딩, 소셜 프로덕트 개발 등이 있다.

 

  오늘날 메이커 스타일 가내공업 업자들은 자신만의 제품을 발명하고 작은 브랜드를 만들고 가격경쟁보다는 혁신 경쟁을 하는데, 이러한 변화가 미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책의 앞부분의 챕터에서는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3d 프린터의 현황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3 차원 프린터는 레이저프린터 보다 빠른 속도로 가격이 낮아지고 성능이 향상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대표적인 3D 프린터 Thing-O-Matic은 메이커봇이라는 오픈소스 기반의 회사에서 출시한 대표적 3 차원 프린터로, 이 회사의 웹 사이트에 접속하면 이 프린터로 출력할 수 있는 각종 디자인 파일을 받아 볼 수 있고, 3D 프린터 사용자들 사이에 바로 물건으로 출력이 가능한 디자인 파일의 공유가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여기서 인상깊은 것은 이러한 변화를 소개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디테일한 정보까지 상세히 제공한다는 점이다. 실생활에서 3D 프린터를 이용한 같은 제조과정을 직접 경험해 보기 위한 각종 소프트웨어 도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autocad 123d cad 프로그램은 제조 메뉴를 클릭하면 집에 있는 3 차원 프린터로 시제품을 제작할 지 서비스 업체에서 제작할 지 선택할 수 있다.phonoko는 사용자 들과 글로벌 제조업체들을 웹으로 연결해서 제조 메뉴만 클릭하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예를 보여주며, 오늘날 하드웨어는 디지털 생산도구에 지시를 내리는 3차원 디자인 파일로, 물리적 형태를 띤 지적재산권에 불과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결국, 현재 제조업 분야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무어의 법칙이 몰고 온 기술적 진보의 조합이라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오픈소스 하드웨어 기업의 전략은 모든 디자인 파일과 소프트웨어를 온나인에 무료로 공개하고 누구든 계속 공개하고 공유하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하는 헌편 제조 와 판매 과정에서 실제로 비용이 발생하는  물리적 제품은 돈을 받고 판다. 개방형 커뮤니티 내에서 자발적이고 빠른 정보공유를 통해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기술 개발이 이루어 지므로 무료의 제품개발 비용과 마케팅비용 이라는 큰 이점울 갖는다. 개방형 기술은 우리도 알게 모르게 이용 하고 있다. 개방형 모바일 운영체제인 안드로이드, 오픈소스 블로그 플랫폼인 wordpress는 각각 수만개의 앱과  수백개의 플러그인 유틸리티를 지속적으로 생산해 내고 있다.

 

  저자는 세계최초의 오픈소스 자동차 공장으로 로컬모터스를 소개한다. 크라우드 소싱으로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커뮤니티를 통해 자동차 디자이너들이 아이디어를 공유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디자인의 투표하는 방식으로 설계된 자동차를 협력업체들을 통해 조달된 부품으로 20 명 정도의 직원이 근무하는 작은 공장에서 조립하고 품질 테스트 하여 완성된 자동차를 고객에게 전달한다.

생산도구의 민주화가 새로운 생산자 계층을 창조한 것처럼, 크라우드 펀딩은 자금 조달 도구의 민주화를 통해 새로운 투자자 계층을 창조 했다. 킥스타터는 대표적인 미국의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다. 공개적 제조 과정은 소비자와 유대 늘 형성하고 제품출시에 기여했다는 심리적 보상을 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책을 읽다 말고 킥스타터 사이트에 접속해 봤다. 200 불의 벽을 깬3d printer와 날 커피콩을 볶고 갈고 축출하는 전 과정이 포함된 커피머신이 기술 파트의 핫한 아이템들이었다. 영화 제작과 예술 공연 분야에서 한국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프로젝트 성사 여부는 불투명해 보였다(얼마 전 광주5.18을 소재로 한 영화도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되는 현장을 다른 게시판을 통해 목격한 바 있다). Quirky.com는 소셜 product 개발 서비스로, 커뮤나티에서 아이디어를 받아 회원들의 투표를 통해 제품 개발이 진행되고, 그 프로젝트의 기여도에 따라 보상금이 지급된다. 반면 에치는 손으로 직접 만든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사이트이다. 자금 조달이 나 제품 생산을 돕지 않지만 ebay처럼 저렴한 비용($20)으로 메이커에게 쉽게 팔 수 있는 길 만 제공한다. 사물의 롱테일 법칙만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시장이다.

 

  오픈소스 운동은 값비싼 실험 장비들의 설계 파일을 공유함으로써  유전자 증폭기와 같이 10만 달러에 달하던 장비의 가격을 600달러에 구입할 수 있게 만들었고, DIY 바이오 운동이라는, 고가에 생물학적 실험도구를 값싸게 제조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과학 도구의 민주화 작업을 선도했다. 미래에 생물학과 유전 공학에서도 diy 운동이 일어난다면 생물을 해킹 하는 일도 가능해질 것이라는 게 저자의 우려지만, 그렇게 된다면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우 흥미로운 일들이 지구상 곳곳에서 일어나게 될 것 같다.

 

  **오픈소스 에콜로지 : 소형 전기톱부터 소형 combine까지 기본적인 농사 건설 제조에 필요한 50까지 도구들의 디자인 파일을 오픈소스로 공개. 문명의 편리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자립할 수 있는 마을을 건설하자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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