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ip Studio Paint, 캐릭터를 살리는 배경 그리기 노하우
요-시미즈 지음, 김재훈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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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 상세히 얘기하기 전에 우선 클립 스튜디오 페인트라는 프로그램에 대해 먼저 알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림 및 아트 분야에 문외한이지만, 최신 도구를 이용하여 멋진 일러스트를 그리는 과정 자체에 관심을 가진 나로서는 실제 산업에서 어떤 툴들이 이용되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도 근사한 일이다. 제목이 시사하듯, 당연히 이 책은 클립 스튜디어 아트의 기초 사용법이나 강의가 아니라, 배경 그리기 노하우에 관한 책이다. 붓으로 그림을 그릴 때 붓의 선택과 붓에 대한 성질 사용 법 물감과 캔버스 등의 자재에 대해 이미 숙지하고 있어야 하듯, 디지털 일러스트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이 선택한 프로그램에 대한 사용법은 대략적으로 숙지하고 있을 것이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일러스트 하나로 모든 걸 다 하는 줄로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프로들은 채색 소프트웨어를 별도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클립 스튜디오 페인트가 바로 그 채색 프로그램이다. 


물론 책에서 제공하는 테크닉으로 그림을 그리는 기본적이고 단편적인 방법은 책에 나와있지만,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소개는 없어서 클립 스튜디오 아트 한국어 페이지를 방문해 보았다. 짐작했던 것처럼 클립 스튜디오 아트는 그리기와 채색 작업에 특화된 소프트웨어이며, 종이에 펜과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우수한 태블릿 엔진을 장착하여, 현존하는 최고의 필압인 8192 단계를 제공하는 와콤 태블릿의 8192 단계의 필압을 모두 지원하여 정교한 표현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책과 함께 세 개의 커스터마이징된 브러시를 제공하는데, 이미 1천여종의 커스터마이징 가능한 브러쉬가 제공되고 있다는 홈페이지 소개를 토대로, 얼마나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 쓸 수 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매뉴얼은 영어로만 지원되는 듯하고, 딥러닝에 디반한 AI 자동 채색 기능이 탑재되어 있다. 아도브사의 모든 도구들이 CS 버전으로 매달 통장에서 돈을 뜯어가는 것과 달리, 무엇보다도 이 소프트에어는 전통적인 판매 방식으로 한 번 구입하면 영원히(?) 소유하고 업데이트도 받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책을 읽기 전에, 책의 부록으로 영진닷컴에서 함께 제공하는 부록 파일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재밌다. http://www.youngjin.com/reader/pds/pds.asp 에서 스케치로 시작하여 다양한 과정을 거쳐 채색이 완성되어 가는 부록 파일들을 살펴볼 수가 있다. 워낙 많아서 그림 완성 및 변형 단계의 일부를 축소해서 화면을 배치해봤다. 


그림에서 살펴보듯,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실무에서 직접 응용이 가능한 그리기 제작 과정을 담고 있다. 클립 스튜디오 페인트의 아주 기본적인 사용법과 용어, 특전 브러시의 사용법, 입체를 그리는 기본 방법들이 매우 간략하게 그림 위주로 소개되어 있고, 33쪽부터 바로 실무에 들어간다. 위에서 예를 들은 배경의 이름이 벚꽃 지는 거리인데, 이 씬 외에도 총 8 개의 씬의 초기 스케치에서부터, 마지막 완성 단계, 그리고 변형까지를 단계별로 설명하고, 상세한 단계 컷은 jpeg 파일로 제공된다. 


배경은 원근법적 지식이 없어도 그럴 듯하게 그릴 수 있는 하늘, 구름, 자연물 등과  원근법이 필요한 배경으로 나뉠 수 있다. 위의 그림과 같이 지면이 포함되지 않으면, 원근법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건물이 포함되거나 실내, 지면 등이 있다면 원근법의 지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처음 세 개의 씬은 원근법이 필요없는 모티브와 구도를 선택하여, 주로 무플 위 부분을 중심으로 자연적 배경을 하는 그림을 설명하고, 이후 씬은 보다 복잡한 원근법적 지식이 필요한 씬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린다.  처음 배경은 회색으로 채우는데, 완성 이미지와의 인상 차이를 줄인다. 배경 채색이 끝나면 캐릭터의 채색 후 머리속의 이미지와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실루엣을 가장 먼저 그린다. 이후 간단한 러프를 그리고, 라이팅을 넣고 배경 이미지를 조금씩 완성해 나간다. 


8개의 씬에 필요한 테크닉이 각 단게별로 그 때 그 때 소개되어 있어 유용하다. 초원 그리는 방법 나무 그리는 법, 소품 그리는 법 같은 기본적인 그림 기법도 틈틈히 소개되고, 사진 합성, 색함성 등의 트릭, 인상주의나 추상주의를 연상시키는 고난이도 <인식 그리기> 기법 등도 소개된다. 저자가 진격의 거인, 갑칠성의 카바네리 등의 일러스트에 참여했다고 소개되어 있으며, 여기 나온 그림들이 영화나 포스터에서 익숙한 듯한 씬이라서, 이런 씬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세하게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를 느낄만한 책이었는데, 일러스트에 관심이 있거나, 직접 제작을 원하는 사람들이 입문하고 실습까지 실무적 느낌으로 해보기에 적당한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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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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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일처의 평생혼 제도가 인류 공통의 문화로 자리잡은 시점은 언제부터일까. 만일 이 제도가 따지고 따져 결국 진화의 산물이라고 결론짓는다면 유전자의 무작위적 변이는 전혀 다른 방향의 문화와 제도로 인류를 이끌었을 지도 모른다. 이 책의 작가가 상상한 세계에서는 인공수정 기술의 보편화와 성욕의 소멸화로 인해 전혀 다른 결혼제도를 갖는다. 이 사회는 남녀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함께 아이를 만들 수는 있지만 성교는 터부시된다. 성교 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니어서 부부 이외의 애인을 갖는게 보편화되어 있는데 혼외 애인 사이에서 성교가 보편적인 건 아니다. 성교는 욕망이라기 보다 동물적이고 야만적인 행위로 인식된다. 게다가 혼외 애인은 살아있는 인간인 경우보다는 캐릭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사회애서 주인공 여자는 자라면서 자신이 엄마와 아빠 사이의 교미로 태어난 사실이 비정상이고 구역질나는 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수치스러워하고 숨기지만 부모로부터 받은 저주 혹은 비정상의 유전자만은 피해갈 수 없다. 그녀는 성욕이 왕성하여 첫사랑인 어떤 만화 캐릭터와 성교를 경험하고(실은 마스터베이션)는 현실에서도 끊임없이 사랑에 빠지고 성교 행위를 탐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혼내 정사라는 근친상간 행위에는 큰 저항감을 느껴 어느날 남편이 성적으로 접근하자 역겨움에 토하고 난리 부르스. 현재의 남편과는 성적인 이끌림없이 편안하고 친근한 가족적 친밀함으로 오누이처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서로에게 생긴 혼외 연애를 격려하며 북돋아주며 훈훈하게 살아가지만 둘다 연애 자체에 큰 상처를 입고 실험 도시 지바로 사랑의 도피를 떠난다. 


상처받은 이유가 재미있는데 끊임없는 연애와 성교를 하는 여주는 어느 날 남친이 그걸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짤 수 없이 해왔지만 도저히 더이상은 못하겠다는 고백을 듣고 사실상 두 사람의 행위는 성교가 아니라 마스터베이션이었음울 깨닫는다. 반면 남편은 정신적으로 사랑 자체가 감정적으로 너무 힘겨워 우울증과 행동으로까지 이어지는 반복적 자살 충동을 겪는다.

여기까지가 1부인데 성진국의 면모를 아주 잘 드러내는 전개와 적나라한 묘사 때문에 불편을 느낄 한국 독자가 많을 것 같다. 그렇다고 설레게 야시시한 느낌이 아니라 뭔가 날것의 묘사를 그대로 포르노 화면처럼 전달하는 느낌이다. 캐릭터를 사랑한다던지 성교 과정을 탐구하며 따라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듯 조금은 장난과 과장이 큰 청소년 대상의 수위있는 라노벨 정도쯤에 해당된다고 생각했는데 2부가 되자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바뀌어 디스토피아처럼 여겨지는 세계관이 펼쳐진다. 


그들이 정착한 실험도시 지바에서 인공수정으로 남편이 아이를 낳고 그토록 거부해왔던 그 사회의 시스템에 시간차를 두고 서서히 동화되는 과정인데. 여기서 핵심은 공동육아 시스템이다. 인공수정으로 임신하고 누가 누구의 아이인지 누가 누구의 엄마인지 구분이 없는 곳. 양재추 밭처럼 끝없이 펼쳐진 신생아의 밭에서 '아가'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공동으로 양육되고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스타일로 자라나는 곳. 식탁의 치킨이 되기 위해 혹육 소고기가 되기 위해 비좁은 우리에 때가 되면 쏟아지는 닭장 속의 닭들이 샹각난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진화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인간의 성이 더이상 세대 전달이라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때 성욕 자체도 퇴화할 수 있다는 가정은 흥미롭다.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반복적인 성행위의 탐구라는 묘사는 때때로 불편하다. 흥미로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진지하지 못한 세계관의 설절, 가령 캐릭터와의 섹스나 연애 같은 설정은 다소 유치한 느낌도 있다. 세계관과 서사가 자연스럽게 융합되지 못하고 따로 논다는 느낌도 받는다 작가가 만든 세계관과 주제에 주인공이 억지로 끌려간다는 느낌도 떨칠 수 없다. 

SF로서는 아쉬운 작품이지만 서사적으로는 꾸준한 충격 요법 때문애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은 작품이었다. 후반부의 디스토피아적 세계와 충격적 결말은 인상적이었으나 지나친 동어반복적 설명은 지루함을 피할 수 없다. 단편이나 중편 정도로 압축해서 여운을 살렸다면 더욱 오래 기억에 남을 훌륭한 작퓸이 되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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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하는 여자들
조안나 러스 외 지음, 신해경 옮김 / 아작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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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텔라는 늑대여자다. 늑대일 때는 제시, 여자사람일 때는 스텔라로 불린다. 여자는 한달 중 며칠은 늑대로 변신한다. 늑대와 인간의 시간은 7배 차이가 있다. 시간은 삶의 양에 비례하지 않는다. 늑대이거나 인간이거나 사는 시간에 상관없이 스텔라는 제시의 시간을 산다. 늑대의 시간을 2년간 살았을 때 인간의 나이로 14세가 되었고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녀를 발견한 생물학 교수는 그녀의 변신 사실을 학계에 알리지 않고 그녀를 소유한다. 늑대일 때는 길들이고 소녀일 때는 사랑한다. 남자는 서른 중반이다. 1년에 7살씩 나이가 먹는 소녀는 몇년 내 그녀가 남자보다 나이가 많아지는 날이 올 테고 늙고 병들어 죽는 날도 뒤따르리라는 사실을 걱정한다. 그는 그녀가 영원히 아름다울 거라고 안심시킨다. 

매달 돌아오는 변신이지만 변신 그 자체에는 극심한 고통이 뒤따른다. 뼈가 뒤틀리고 새 자리를 잡기 위해 고통으로 신음하고 소리지르고 몸을 뒤트는  동안 그는 그녀와 함께 고통을 나누며 보살펴준다. 늑대일 때도 소녀일 때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를 매혹시킨다. 변신 과정의 고통마저도 성적인 자극이다. 제시(늑대)가 3살이 되고 스텔라(그녀)가 20살이 되자 그녀의 아름다움은 절정에 다다르고 교수들 모임에서 늘 다른 교수들의 눈길을 사로잡지만 이로 인해 교수 부인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그들 모두는 스텔라와 섹스하고 싶어하고 조나선은 그런 스텔라를 소유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4발짐승 제시의 나이로 4살이 되자  스텔라는 27세가 되고 여전히 아름답다.  5살이 되자 남자와 같은 나이가 된다. 여전히 그윽한 아름다움과 지적인 매력이 솟아나지만 평평한 배를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엄청난 시간을 복근 운동에 쏟아야 하고 가느다란 주름을 감추기 위해 세심한 화장을 하고 타이트하고 섹시한 옷 대신 이국풍의 느슨하고 세련된 패션 감각이 필요하다. 이제 다른 교수의 부인들은 그다지 그녀를 미워하지 않으며 그녀의 지적 매력이 더욱 돋보인다.  점점 스텔라는 남편의 사랑과 새로운 매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식 탐구에 보다 몰두한다. 모임에서 그녀가 가진 방대한 지적 세계를 우아하게 드러내고 여전히 매력적이다. 


늑대 나이로 5살 6살이 되자 40세 50세로 급격히 진행되는 노화를 주변에서도 눈치채고 괜찮은지 어디가 아픈지를 묻는다. 늘어진 피부와 주름은 진한 화장으로도 더는 감출 수 없고 노쇠하고 무거운 몸은 나이를 속일 수 없다. 이제 여자들은 그녀를 더이상 미워하지 않지만 그녀 자신이 새로 들어온 젊은 여자 교수를 미워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녀를 보던 욕망하는 눈길로 새로 온 젊은 여자 교수를 모두가 바라본다. 그녀도 똑같이 자신의 남편이 그녀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불안과 질투를 느낀다.


그녀의 나이는 70세 80세로 급격히 노화된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서서히 변해가던 남편은 이제 그녀의 고통스런 변신을 지켜보거나 돌보지 않으며 제시에게도 학대에 가까운 방치로 그녀를 섭섭하게 한다. 조나선이 돌보지 않아, 늑대는 인간으로 변신한 후에야 무겁고 노쇠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똥들을 스스로 치우며 외로움과 사랑에 대한 열망으로 지쳐간다. 이제 그녀는 남자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것 같다. 출렁거리는 살들을 지방흡입하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보지만 잠자리마저 회피하고 침대에서는 멀찌막한 구석으로 몸울 웅크리고그녀를 점점 멀리한다. 외로움에 지쳐 울다 지쳐 잠드는 날들이 늘어간다.


그러던 중 미술관에서 19세기에 그린 그림에서 한 여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굽은 등으로 차를 따르는 노인의 모습은 숨막히도록 아름답다. 그녀는 화가도 그 여인을 자신이 보는 것처럼 아름답게 보았음을 안다. 그러나 남편은 자신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 아픈 자각은 그녀에게 무엇을 알려주었을까.  조나선을 떠나 자신의 무리들이 있는 곳 자기가 떠나온 곳 (유럽)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왜 미련이 남았나. 무거운 몸으로 반나절동안 멋진 요리를 하고 식탁과 자신을 꾸며 놓고 대화를 시도하지만 마음이 떠난 사람에게 진정한 대화가 될 리가 없다. 대화는 돌이킬 수 없는 더 큰 상처를 남긴다. 그는 함께 쓰던 방마저 떠나 다른 방에서 잔다. 침실에 남겨진 그녀는 후회한다. 똥 얘기를 하지 말 걸 그랬나 다른 방식으로 얘기를 꺼낼 걸 그랬나. 홀로 침실에 남겨진 스텔라는 울다 지쳐 잠들고 다음날 아침 평소보다 이른 변신이 찾아와 고통에 몸부림치는데 침실 문을 안에서 닫아 놓은 걸 이미 때가 늦은 변신 단계에서 깨닫는다. 늑대 제시는 문을 스스로 열 수 없음과 방에는 먹을 것이 없음을 그리고 조나선이 그를 꺼내주지 않을 것임을 안다. 침실에 갇혀 화장실 변기 물로 갈증을 때우며 울부짖는 제시를 조나선이 꺼내주는 반전(?)이 일아나고 조나선은 제시를 착한 개주인처럼 달랜다.

그는 제시에게 참으로 오랜만에 다정하게 대한다 불쌍한 제시 배고팠지? 하지만 거기까지. 늑대를 꺼낸 조나선은 제시를 목줄에 짧게 매어 기둥에 묶어둔다. 조금 후 웬 젊은 여자가 집으로 찾아오는데 그에게 아내가 떠난 걸 위로하는 소리가 들린다. 조나선은 그 젊은 여자에게 밖에 있는 개는 누이가 맡겨두고 간 개라고 둘러댄다. 조너선은 어쩔 작정으로 왜 스텔라를 떠나지 말도록 말렸을까.  스텔라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

독특하게도 이 소설은 2인칭이다. 너라는 지칭으로 서술되기에, 마치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스텔라 이야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우리가 여성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전혀 나의 이야기가 아닐 때조처 일부에서 나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철저하게 남성의 성적 욕망만을 위해 대상화된 스텔라는 자신이 네 발일 때조차 본능을 억제하고 개처럼 조나선에 의해 길들여진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어떤 작은 별에서 어린 왕자의 사랑을 얻기 위한 장미의 밀당처럼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다. 길들여진다는 건 상대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내가 온전히 내가 아닌 상대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본성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계속 사랑하도록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이 소설에서 스텔라는 늙어가는 자신의 육체적 매력의 감소를 왕성한 지식욕으로 무장하여 새로운 매력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애초 조나선이 했던 말을 돌이켜보면 헛된 소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늙고 못생겨지면 자신을 떠날거냐고 물었을 때 조나선은 뭐라고 대답했나. 늘고 못생겨져도 당신을 여전히 사랑할거가 아니라 안돼 당신은 늘 아름다울 거야라고 대답하지 않았나. 이 대답은 중의적이다. 당신이 늙어도 여전히 아름다울 거라는 뜻과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당신의 아름다움이므로 만일 그렇게 된다면 당신을 떠날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가 늙어도 그 초상화 속의 그림처럼 내적 아름다움을 그가 알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착각이었다. 

발화 당시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도 모를 것이다. 다만 그가 사랑한 건 그녀의 외적인 아름다움이란 것만은 확실하다. 노화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오는데 만일 남성과 여성이 바뀌었다면 어땠을까. 늑대와 인간의 수명 및 성장 차를 이용하여 늑대인간을 페미니즘적으로 접근한 이 작품이 스토리 구조만 본다면 그냥 뻔한 나쁜 남자에게 당하는 바보같은 여자의 뒤늦은 자각이라는 프레임 속에 있다. 시대는 변했고 이런 식의 프레임이 식상한 건 사실이지만 너라는 인칭의 영리하고 단아한 문체는 이야기가 의도한 메시지를 떠나 문학적으로 반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이 있다. 

페미니즘, SF, 동식대 여성 작가, 등을 키워드로 하는 이 단편집에는 흔히 접항 수 없는 다양한 동시대 여성 작가의 단편들이 들어있다. 좋은 기획,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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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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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단에서 빼기>는 여성독자들이 사랑했지만 남성들 또한 좋아했다는 점이 흥미롭다고 레싱이 직접 밝힌 소설인데, 나 역사 이마를 딱 치며 아 이거다 싶게 유쾌했다. 이 소설집 중에서 가장 좋아했다고 볼 수 있다. 남자 또한 좋아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운 건 이 남자가 홍상수 영화에나 나옴직한 전형적인 찌질남이고, 유명 여성과의 섹스를 통해 정복력과 성취감을 금메달처럼 전시하는 남성의 심리를 통쾌하게 조롱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성폭력에 대한 법적 규제나 안전 장치가 부족했던 시대에, 남녀의 섹스라는 행위가 남성에게는 정복, 여성에게는 굴복이라는 프레임 속에 위치했기에 가능한 이야기이다. 만일 이 소설을 100년 쯤 후에 읽는다면 이게 무슨 뜻인지, 무슨 맥락에서 이런 소설이 나왔는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세상이 되어 있기를 바란다. 물리적으로 보나 행위적으로 보나 두 사람이 서로 같이 몸을 만지고 뒹굴고 그러다보니 생기는 자연스레 욕정을 해소하는 행위를 남성은 갖는 것으로, 여성은 주는 것으로 느끼고 표현하던 이상한 관습적 사고를 예측 불가능한 방법으로 파괴한다. 쉽게 섹스하는 여성을 헤프다며 질타하던 시기에 쓰여졌다는 걸 감안할 때 다욱 파격적이다.


요즘도 성범죄의 책임을 여성들의 지나친 노출로 몰고가는 몰상식한 여론을 접할 때가 가끔 있다. 여자들이 치마를 짧게 입는게 성범죄를 조장한다는 논리는 여성에게 부르카를 씌워 아예 여성의 실존 마저 지우고자 하는 이슬람 세계의 논리와 오십보백보다.  <옥상 위에 여자>는 어떤 문화적 변화 속에서도 집요하고도 끈덕지게 여성에게 집중되게 덧씌워지고 강요되는 성윤리에 대한 웃지 못할 풍자극으로 읽힌다. 무더운 날씨에 옥상에서 작업하는 세 노동자들은 반대편 건물에서 반나로 일광욕 중인 여성에게 각기 다른 마음을 품는데, 한 명(스탠리)은 휘파람을 불고 조롱하고, 한 명은 그런 그녀를 동료로부터 지켜줘야겠다는 망상과 그녀와 다정한 관계가 되는 착각을 한다.  그러나 결국 남자들이 도달한 감정은 그녀를 향한 분노다. 조롱과 욕설 혐오 등 그녀를 향한 온갖 행동에도 불구하고 아랑곳없이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음에 더더욱 혐오와 분노를 표출하는 이 가엾은 남성들은 길거리의 모든 여성들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 잘보이려고, 섹스하려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일베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자기를 지켜보는 새 남자에게 무심하기 짝이 없는 (발가벗은) 여자 때문에 세 사람 모두 화가났다 68


<내가 마침내 심장을 잃은 사연>에 대해 도리스 레싱은, 독자들에게는 이 소설이 어떻게 비쳤는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을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처음 읽었을 때는 작가가 좋아한 이유를 독자인 내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서사에만 관심을 두고 읽다보니 여성의 심리에 대한 문제 의식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했다.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서사는 고골의 코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피가 뚝뚝 흐르는 심장이 몸 속에서 밖으로 빠져나와 손에 달라붙어 다니는 모습은 코가 달린 부분이 평평하게 변한 우스꽝스런 모습에 비해 다소 괴기스럽다. 레싱의 작품으로는 처음 접했던 <다섯번째 아이>부터 일관되게 레싱의 작품 속에는 이런 그로테스크함이 있다. 순수하게 심리적인 소설 속에서도 이해 불가능해 보이는 괴기한 심리와 미친듯한 행동이 드러난다. 하지만 코보다는 심장이 의미하는 게 보다 명확해 보인다. 


일생을 통해 두 번의 ‘진지한’ 사랑 A, B를 했지만 두 번 다 뼈아픈 실패로 끝났고, 그 진지한 사랑 A와 B 사이에 셀수없는 십 수번의 진지하지 않은 교제가 있었지만 부푼 기대를 품고 다시 진지한 사랑의 후보 C와의 만남을 앞두고 있는 여자는 그 두 번의 진지한 사랑이 끝났을 때마다 돌덩이처럼 무거워진 심장을 기억하며, 다시 핑크빛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꺼내 버렸으면 하고 소망한다. 그런데 그런 말같지 않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C의 만남을 앞두고 전화 통화를 하다가 자신의 심장이 자신의 손에 걸려져 있는 거다.  원하던 일이었지만 그 선홍색 심장은 손에서 떨어지지 않고 여전히 신체의 일부처럼 붙어 있다.  이렇게 떨어지지 않고 있던 심장을 알미늄에 감싸고 외출을 하는데, 지하철에서 허름한 차림을 한 미친듯한 여자를 만나며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 미친여자는 자신의 드라마에 빠져서 비난, 사랑의 배신, 혹은 부정 같은 개인적 비극을 연기하는 사람처럼 영혼없이 계속 혼자서 떠들고 있다. 모두에게 당혹감과 수치를 느끼게 하던 미친 여자를 보던 주인공은 손가락에서 자신의 그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의  심장을 그녀 앞에 갖다 놓고, 문제의 미친 여성은 그것을 품에 안고 좋아한다.


지하철의 미친 여자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소설집에는 글자 그대로 읽는다면 미치거나 조금 정상이 아니거나, 정신적인 혼란을 겪는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한 남자와 두 여자>에서 도로시 브래드퍼드는 산후우울증을 겪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남편의 외도 그 자체보다는 남편의 외도에 대한 자신의 상관않는 심리에 대해 더 의아해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도로시는 자신의 부부를 방문한 스텔라에게 자고 가라 권하면서 자기 남편과 관계를 맺을 것을 은근히 암시하여 실제로 그렇게 될 뻔하게 만든다.


<영국 대 영국>에서 개천에서 용난 케이스인 찰리는 옥스포드 대학을 다니던 중 자신을 위해 가족 모두가 희생하고 있는 광산촌의 집을 방문하고, 정신 분열적인 증상을 경험하고, <두 도공>에서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서, 꿈을 통해 타인의 현실을 제어하며, <목격자>에서 부룩은 외로운 알콜중독자이고, <20년>은 20년 전 어긋난 사랑 때문에 헤어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착각하고 있으며, <19호실을 가다> 역시 우울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 중 <20년>은 서로 만나기로 한 곳에서 서로가 기다리다가 어긋난 지나간 사랑을 20년만에 우연히 파티에서 만난 상황을 묘사한다. 안타까운 영화같은 설정이지만, 독자도 화자도 두 사람의 기억 중 어느 기억이 맞는지 알 수 없다. 서로는 약속된 같은 장소, 같은 시간 서로를 애타게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결국 서로에게 나타나지 않아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인데, 평행우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한 사람이 날짜를 헷갈렸을 수도 있고, 같은 장소가 두군데 있었을 수도 있고, 수많은 가능성이 있으므로, 누구 한 사람이 반드시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헤어졌어야만 했을까. 오늘날처럼 휴대폰과 인터넷 이런 게 불가능하니 서로의 연락처를 알 수 없었을 수도 있으므로 이런 안타까운 뜻하지 않은 어긋남과 이별은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휴대폰 시대에서 우연과 착각에 의한 비극적 요소는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같다.


<남자와 남자 사이>는 <최종면단에서 빼기>만큼 유머러스하게 읽힌다. 새삼 시대적으로 여성에게 경제적 독립이 어떤 의미인지를 새삼 따져볼 기회이기도 했다. 남자의 정부로서 이남자 저남자 등에 빨대를 꽂아 몸을 가꾸고 먹고 사는 꽃뱀들의 이야기이도 하다. 말 나온 김에 여담 하나, 친구가 목욕탕에 갔다가 거기 출퇴근하는 유한마담들과 안면을 텄는데, 그 중 꽃뱀으로 알려진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했더니 뭐 예를 들어 배찌(?)를 한다든지 하며 티를 낸다고 한다. 그 여성과 나름 진솔한 이야기를 하였다고 하는데, 기억나는 건 일단 한 남자랑 친해지면 초기에 가방이며 보석이며 마구 선물하고, 점점 시간이 갈수록 선물이 왜소해진단다. 그러면 그게 이별의 징조이므로 꽃뱀은 새로운 물주를 물기 위해 동분서주 해야한다고. 길게 가봐야 몇년 안가므로 끊임없이 정부를 탐색해야 하고, 그래서 몸치장에도 돈이 많이 든다고. 정확하지도 않고 뭐 막 섞이기도 했지만 대략 그런 내용이었는데, 나는 그 목욕탕 뱃찌녀가 자신의 삶의 패턴을 서비스 노동의 가치로 설명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이 소설속 여성들이 크게 다름없다. 


단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요령이 대가의 손에 의해 과장적으로 설정되었음을 주목한다. 잭을 사이에 두고 두 명의 꽃뱀 이 붙었는데 그 중 한사람은 정식 부인이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정부가 되었다. 정식부인이 되면 계약 상태가 되어, 이혼후에도 위자료를 받을 수 있는데 대신 남편과의 정사는 주로 정부와 이루어진 듯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났을 때, 결혼했던 여성이 이혼했던걸 바로 알아차리는데, 그 이유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워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혼을 했으니 다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가꾸기 시작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둘은 술을 마시고 대화(인지 술주정인지)를 하면서 둘이서 남자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낸다. 만일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사회라면, 정부이든 정식부인이든 꽃뱀이든 먹고 살기 위한 방법이 궁극적으로는 남자를 통해야 한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라고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여전히 구석구석 층층히 존재하는 성차별이 특히 성적으로 여성을 취약하게 하는 이유다.


표제작인 <19호실로 가다>는 외로움과 자유 그 둘은 붙어다녀야 하는 건지, 성공한 가정이라는 따뜻하고 푸근한 울타리의 허위와 그것을 위해 포기된 자유와 속박, 그리고 그 속에서 느끼는 불안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제는 전체 작품에서 계속 반복된다. 가정이 없이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외로움 때문에 그토록 심장을 찔렸으면서도 새로운 사람을 찾아 나서는 여성(<내가 마침내 심장을 잃은 사연>)처럼, 우리 모두는 한편으로는 자유를 원하면서도 누군가와 꾸준히 사랑을 하고 함께 살기를 원한다. 깨질까 다칠까 조심조심 보살피고 가꾸어온 완벽한 가정 속에서 허위와 불안을 느끼고(<19호실로 가다>, <한남자와 두 여자>), 애정과 결혼 제도에 속박되지 않는 정사를 갈망한다 (<최종명단에서 빼기>, <남자와 남자 사이>). 하지만 <19호실로 가다>의 수전은 그녀의 정신 분열적 최종 선택과 관계없이 누구나 느끼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녹여내었다.


전에 읽은 중장편들(다섯번째 아이, 그랜드마더스)에 비해 압축적이라, 맥락 파악이 잘 안되는 부분이 다소 있어서 읽는 데 시간도 걸렸고 다시 읽어야 한 것도 많았지만, 다 읽고 나서 보니 대가의 작품다운 품위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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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의 모험 -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상 세계들로의 여행
로라 밀러 엮음, 박중서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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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100'이라는 광고 카피가 너무 식상하게 느껴지지만, 실제로 목차를 보면 이 카피가 실은 이 책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문자 그대로의 사실임에 동감하게 된다. 100개의 이야기는 커다란 컬러 도판에 실린 관련 명화와 함께 다섯 개의 챕터로 시대별로 나뉘어져 있는데, 모두가 환상소설의 범주에 속한다. 우리가 속해있는 익숙하고 따분한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세계의 현실에서는 물리학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가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독자를 아득한 꿈과 환상 속으로 안내한다. 그 가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믿기지 않는 일들은 다시 현실을 비춘다.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 이야기를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인간의 삶만이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고대의 신화와 전설 편에서는 고대부터 1700년까지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약 20개의 책 중 실제 첨부터 끝까지 단기간 내에 끈기있게 완독을 한 책은 오디세이아와 산문 에다, 돈키호테 밖에 없지만 그래도 읽은 책이 나왔을 때는 반가왔고, 안읽은 책들의 개요를 알 수 있어서 더없이 빠져들었다. 사실 이런 신화들은 오며가며 제목들은 대개 들어서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게 언제 어느 공간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이 책을 읽으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신화와 전설들을 인류라는 전체적 시각에서 그 맥락을 이해하며 바라볼 수 있었다. 


길가메시 서사시, 오디세이아(호메로스), 변신 이야기(오비디우스), 베오울프, 천일야화, 마비노기온, 산문 에다(스노리 스툴루손), 신곡(단테), 알리기에리(아서 왕의 죽음), 토머스 맬러리(광란의 오를란도), 루도비코 (아리오스토), 유토피아(토머스 모어), 선녀 여왕(에드먼드 스펜서), 서유기(오승은), 태양의 도시(토마소 캄파넬라), 돈키호테(미겔 데 세르반테스), 폭풍우(윌리엄 셰익스피어), 달나라 여행(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광휘세계’라는 신세계에 관한 보고,(마거릿 캐번디시) 여기까지가 편집부가 뽑은 17세기라는 긴 기간동안 쓰여지고 전승된 위대한 전설과 신화들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한권 한권 모두 방대한 스토리를 담고 있는데 이를 요약한다는 것 자체가 실제 이야기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 될 수도 있을 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어린이용 축약본이 과연 필요할까, 축약본은 흥미 위주로 쓰이기 때문에 재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릴 때 읽은 축약본을 읽고 그 책을 읽었다고 착각하는 바람에 성인이 된 후에도 실제 스토리를 읽지 않게 되고, 그 때문에 원전의 깊이를 세상에서 감추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현상이 우려되기도 한다. <돈키호테>와 <걸리버여행기>가 대표적이다. 


이후 챕터는 과학과 낭만주의(1701~1900), 환상소설의 황금기(1901~1945), 새로운 세계질서(1946~1980), 컴퓨터시대(1981~현재)로 나뉘고 각 시대에 해당되는 신화, 전설, 서사시, SF, 판타지 모험서들이 빼곡하게 책장을 메운다. 한 사람이 쓴 책이 아니고 팀이 작업을 하여서 각 작품에 대한 해설과 총평은 딱히 어떤 일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정된 지면이지만 비교적 상세히 이야기 자체를 요약 전달하는 것도 있고, 비평에 가까운 것도 있고.


무엇보다도 최근 읽은 소설이 나타날 때면 그 작품을 읽을 때 그걸 골랐던 나의 안목에 자랑스러움이 생기면서 막 흐뭇해지는데, 그 중에서는 순전히 우연히 그러니까 작품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이 아무거나 집어 들었는데 얻어걸렸던 작품도 많다. 지극히 일부 중에서도 아주 조각만 읽었지만 H.P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 신비한 이야기란 건 알았지만 해당 단편은 듣도 보도 못했던 보르헤스의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어쩌다 손에 들어온 토베 얀손의 <무민 가족과 대홍수>(무민 버전이 하도 많아 이건 이게 그건지 그게 그건지 확실치 않음)이 그런 것들이다. 


까마득 오래 전에 읽어서 다시 봐야 할 소설들 마이클 쉐이본의 <유대인 경찰연합>가 있고, 어릴 때 읽어서 아마도 축약본이었을 테고 기억도 나지 않는,  <보물섬>, <나니아연대기>, <오즈의 마법사>, <해저2만리> 등등, 최근 5년 내에 다시 읽었던 것 같기도 한 <어린왕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반쯤 읽고 여전히 읽고 있는 중이라고 우기고 있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게르 멘 브란텐베르크의 <이갈리아의 딸들>, 해리포터 시리즈(원서로 사서 그런거니 스스로에게 이해를 구함), 관심 있어서 사두고 아직 펼쳐도 보지 못한 책들이 널렸고, 무엇보다도 최근에 읽었고 예스블로그에서 리뷰까지 찾아볼 수 있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스노리 스툴루손의 <산문 에다>, 미겔 데 세르반데스의 <돈키호테>,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여행기>,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커트보니것<제5도살장>,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하루키 <1Q84>,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마>들이 눈에 더 잘 들어올 수밖에 없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필자들이 설명하고 논평하고 이야기해주는 것들 사이의 갭들을 글자로 채워가는 즐거움이 아직 잘 모르는 이야기들의 겉을 핥는 것보다 더 크다. 


읽으려고 사둔 책도 몇권 있었고 보도 듣도 못한 생전 처음 제목과 저자를 들어보는 책들도 많았다. 특히 맨 마지막에 소개되는 동시대 작품들의 경우 제목은 익숙한데 읽을 생각도 못한 책들이 많은데 그 이유가 미국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이 많아서다. 장르 문학으로의 입지가 굳건한 유명 작가의 작품 중 딱히 1개만 꼽기도 어려웠을 거 같다. 모든 작품이 골고루 다 주옥같은, 내가 좋아하는, 르귄 여사의 작품은 <어스시의 마법사>를 꼽았다. 얼마전 <로캐넌의 세계>와 <어둠의 왼손> 등 헤안시리즈의 몇 편을 읽고 어스시 보다는 헤안 시리즈에 더 관심이 갔기에 , 어스시를 1편만 먼저 읽었는데, 해리포터 시리즈보다 훨씬 앞서 출간된 책이지만, 해리포터에서 등장하는 주요 핵심 요소를 어스시에서 많이 차용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마법사 학교라든가, 마법사의 돌, 그리고 볼더모트를 지칭하는 "you know who"가 사물의 이름에 진정한 힘이 들어있다는 사상적 기반등을 찾아볼 수 있고, 조지 마틴 RR의 하늘을 나는 용은 로캐넌의 세계에서 주요 통신수단이고, 'The winter is comming'이라는 유명한 말 역시, 다가오는 재앙, 혹은 긴 겨울에 대한 암시와 긴 공전 주기를 갖는 특별한 행성이 배경인 로캐넌의 세계와 어둠의 왼손과 유사성을 갖고 있다. 물론 르귄 여사 역시 소설의 여러 요소를 신화와 전설에서 많이 차용하였으므로 단적으로 오리지낼러티를 주장하기는 어렵지만, 한 소설의 핵심 아이디어가 다른 소설의 매우 주요한 모티브로 동작한다는 것은 그 오리지널 소설의 아이디어가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마치 반 고흐의 그림이 우리가 만나는 일상적 사물의 곳곳에 색상과 그림의 요소들이 침투해있는 것처럼 르귄의 책들에서는 현재 상업적으로 드라마와 영화 등의 매체에서 유래없는 성공을 거둔 작품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영감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늘도 기승전르귄예찬으로 빠졌다.  보고 싶은 책도 많고, 그 이유도 끝이 없는데,  그래서 이 책에 대해 얘기를 하자면 삼박 사일을 해도 끝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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