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의 길
마일리스 드 케랑갈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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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크푸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며 인스턴트 식품은 도시인들의 고독을 드러낸다’는 13세 모로는 주머니 속의 동전으로 그것 외의 다른 선택이 그럼 뭐가 있냐는 6인의 친구 패거리들에게 내가 있자나 하며 나선다. 여섯 친구들은 토요일마다 거리의 패스트 푸드점에서 정크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배회하는 대신 모로의 집에 모여든다. 쩡그렁거리는 깡통에 십시일반으로 식재료 값을 모으기도 전 모로는 기꺼이 시장과 대형마트들을 돌아다니며 친구들을 먹일 음식 재료들을 사들인다. 이런 일을 의무감으로 한다면 얼마나 고되고 힘겨운 일이었을까만은 모로는 더 어렸을 때부터 이탈리아 혈통의 어머니, 전설의 요리법들을 꿰고 있는 외할머니의 영향 아래 ‘매 끼니를 식구 모두가 준수하는 일상적 제의’로 만드는 다 같이 식사하는 집안 분위기, 요리에 대한 개인적 열정과 관심 덕에 즐거운 일상이 된다.  소박한 염가의 생산품들과 같은 식재료에서 창조되는 무한 변주, 그리고 외식은 일절 금지 라는 이 분위기 속에서 귀가 후 홀로 집에 남겨진 10세의 소년이 컴퓨터 게임 대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요리다. 그에게 주방은 놀이터다. 마법같은 요리의 화학적 물리적 변화를 즐기며 급고 지지고 졸이는 과정을 익히고  바삭함과 파삭함의 차이를 경험하고 분량과 온도와 시간과 관련된 감각을 벼린다. 그렇게 더 어릴 때부터 갈고 닦은 모로의 요리 기술은 이들 6인의 패거리들에게 진짜 수제 피자와 카보나라 파스타와 버터 감자 구이와 쇼콜라와 크레프 쉬젤라와 같은 주머니 속의 동전으로는 꿈도 못꿀 음식과 매주 함께하는 시간이라는 13세 소년들의 그룹에게는 흔치 않은 값지고 소중한 경험을 제공한다. 철부지 친구들은 훗날 프랑스  전역에 그의 레스토랑과 세프로서의 명성을 날리게 될 이 친구의 이런 요리와 함께하는 시간의 가치를 아직 모른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단연코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에서 읽은 저자의 집요하고 화려하고 열정적인 문체 때문이다. 어떤 책을 읽고 나서 시간이 지난 후 서사의 디테일이 희미해졌을 때, 마지막 몇가지 인상으로 남기 마련인데, 물론 전혀 아무것도 남지 않고 표지만 생각나는 책들도 많지만, 이 저자의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은 첫 챕터, 첫 문장의 느낌이 아직까지도 팔딱 팔딱 생동하는 느낌으로 남아있다. 물론 내러티브도 훌륭했지만, 사물과 현상과 행위 그 이면에 언어로는 표현 불가능할 듯한 느낌과 본질을 그토록 정교하고 집요한 문체로 담아내는 그의 고유한 문체는 혀를 두를 지경이다. 


 

한 청년이 사회학과 경영을 공부하고 대학원을 나와 박사학위 과정까지 수료한 청년이, 요리사가 되는 과정, 잡지책에 소개되고 파워블로거들에게 이슈가 되고, 멀리서 식도락가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그런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유명 요리사가 되어서도 계속되는 삶의, 실존의 고뇌와 현실적 고충들이 어떤 식으로 다가오고 어떤 다른 길로, 어쩌면 어릴 때부터 그런 분위기 속에 말없이 고용하게 내재하게 되었던 어떤 가치 철학 같은 것들을 실현시킬 색다른 길을 모색하게 되는 과정을 바로 그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에서 보여준 케랑겔의 생생한 언어로 보여준다. 


 

다큐와 소설의 중간 쯤 될까. 한 개인의 삶에서 박사 학위 취득과 관계된 삶과는 대조적인 다른 레벨의 삶, 최저 임금에 12시간의 살인적인 노동시간, 그리고 도제 같은 주방 문화 뾰족하고 날카로운 주방 기기들이 얼굴로 날아다니는 폭력으로 요약되는 요리사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인생을 결정하는 큰 전환점이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에서 보여준 것만큼, 건강했던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의 충격 만으로도 버티기 어려운 시간에 장기 기여라는 또다른 심리적 압박을 받아들이는 부모의 심정만큼, 드라마틱하고 격정적이고 감정이지는 않지만 한 개인의 인생을 결정하는 주요한 결단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아주 담담하고 간결하게 다루어진다. 마치 운명을 따라가듯, 그토록 요리에 즐거움을 느끼면서도 한 번도 커서 요리사가 될 생각을 하면서 성장하지 않았던 한 인생이 이미 남의 밑에서 주방칼의 위협을 받으며 시작하기에 늦깍이 나이로 그 일을 처음에는 1달 알바로, 그 다음에는 자신의 인생 이력에 좀 더 색다른 경험을 넣기 위해 무보수 인턴으로 일하고, 그러고 나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그렇게 서서히 요리사의 길로 접어드는 모로의 인생 묘사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한 청년의 인생 다큐에 가깝다. 옮긴이의 말을 읽고 나서야, 이 책의 그런 다큐성 짙음의 영문을 이해했다. 쇠유출판사에서 ‘나날이 파편화되어 가는 사회 속에서 그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개별적 존재들의 삶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공간 창출(P154)’을 의도로 한 <삶을 이야기하다> 총서를 위해 집필을 의뢰한 기획도서였던것이다.

 

그 작은  아파트가, 대중 교통에 허비하는 시간을 벌게 해줬던 편의가, ..일과 생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경로를 박탈해 버리고,  균열을 일으켜 단단하게 굳어 버린 대낮의 시간 속에 꿈이 웅크릴 우묵한 공간을 열어 줄 수 있는 그 틈새들, 두 흐름 사이의 중간 지대들을 앗아가 버리고 만 것이었다. (130)

 

그런 식으로 라 벨 세종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경제적 논리이자 기업의 논리이며, 대양 바닥의 한류처럼 구불구불 뻗어 나가 소멸되지 않으려면 성장하기를 요구하는 가차 없는 논리, 이 음험한 논리가 드디어 깨지고 말았다. 그의 젊음에 부딪혀 산산 조각 나고 말았다.(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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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의 신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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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몇 페이지에는 이미 일어난 주요 사건의 끝에서 볼 때 오랜 기간 고통받은 인물이 있다. 그리고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지를 궁금하게 하는 현재가 있다. 읽기도 전에 알아버린 쌍둥이의 사연은 거대한 공상주의 혁명이라는 역사의 한 장이 펼쳐지던 23년 전에 시작된다. 대의를 품은 그 큰 역사의 이면에서 그것을 움직이는 큰 신보다 하찮은 아주 작은 신들이 있다.  엄마가 나를 조금 덜 사랑하게 되는 작은 사건들, 개구장이 쌍둥이들의 작은 말썽들, 그리고 큰 사건 속에 강요된 어떤 타협.



우연은 없었다. 우발적인 것도 없었다. 노상강도도 개인적인 보복도 아니었다. 한 시대가 그 시대를 살고 있던 이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킨 것이었다 422



에스타와 라헬은 쌍둥이다. 수 분을 차이로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들은 쌍둥이 임이 의문스러울 만큼 외형과 성격이 다르지만, 둘 사이에는 둘이 함께 하나로 느끼는  하나 된 정체성이 있다. 그렇게 둘이서 하나 같은 서로 다른 남매는 23년 만의 재회한다. 재회는 일방적이다. 에스타는 말을 잃었다. 그는 라헬을 보지 않고, 존재마저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 시작점에서 저자는 하얀 소녀(백인)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패 하나를 보여준다. 인도 사회에서 백인이라는 특권적 존재와 그것의 죽음은 당연히 그 죽음과 관련이 있든 없든 많은 인도인들의 책임과 비극적 형벌로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소녀의 죽음과 함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진 에스타(남)는 천천히 말을 잃어갔고, 젊지도 늙지도 않은 서른 한 살에 다시 마을로 돌려보내졌다. 낡은 저택과 함께 스러진 옛 가문의 영화를 접수해서 살고 있는 그들의 고모는 돌려보내진 에스타를 책임지라며,  이혼 후 홀로 이 일 저일을 전전하는 쌍동이 여동생 라헬에게 연락한다. 


에스타는 어디에 있어도, 배경에 녹아들어 투명한 존재와도 같아서, 그와 한 방에 있다는 사실을 한참동안 눈치채지 못한다. 그가 있음을 알았더라도 구고 전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는 건 더욱 어렵다. 그리고 그는 아주 작은 공간만을 차지했다. 어째서 말을 잃은 걸까. 엄마가 기차를 태워 6살 된 꼬마 아이를 홀로 보내는 장면이 플래시백 된다. 죽은 소녀는 외사촌, 아이들의 아빠 역할을 해왔던 외삼촌 차코의 딸이다. 그 소녀의 죽음이 소녀의 죽음과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예상은 하지만 대체 여섯살 짜리 아이가 어떻게 아홉살 자리의 죽음과 관련 있게 될지 읽을 수록 더욱 궁금한 상태로 몰고 간다. 그래서 책을 놓기가 어렵다.  



일단 찾아온 정적은 에스타 안에 머무르며 서서히 퍼져나갔다. 정적은 머리에서 뻗어나 늪 같은 두 팔로 그를 감싸안았다. 정적은 원시의, 태양의 심장박동 리듬으로 그를 얼러주었다. 정적은 흡반 달린 촉수들을 슬그머니 뻗더니 그의 두개골 안쪽을 따라 살금살금 움직여 그의 기억의 언덕과 계곡들을 빨아들이며 오래된 문장들을 몰아냈고 이를 혀끝에서 털어냈다. 정적은 사고를 묘사하던 어휘들을 그의 생각에서 벗겨냈고, 생각은 그렇게 벗겨진 채 벌거숭이로 남았다(26)



이야기의 시작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 쌍둥이 엄마 암무의 연애와 결혼과 알콜 중독과 폭력. 거기까지만이었다면 쌍둥이들이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지 모른다. 아버지 바바는 알콜 중독으로 플랜테이션 매니저에 해고될 상황에서 은밀한 제안을 받는다. 딜의 대상은 그의 아름다운 아내 쌍둥이들의 엄마 암무다. 암무는 자신이 자란 케랄라 주의 아예멤넨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전혀 딜레마일 수 없다. 아무리 힌두 사회라도, 아무리 ‘친영을 한’ 고결한 집안이라도, 남편이 자기를 팔아, 직장을 유지해서 아이들과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매일 때리는데 어떤 다른 대안적 선택이 있을 수 있나.  학대에 지쳐, 여성차별적 전통을 자랑스레 지켜온 지역 유지의 친정으로 암무는 아이들을 끌고 데려온다. 이미 친정의 대저택에는 캠브리지에서 공부하다 영국인 아내와 결혼/이혼 후 돌아온 차카도 아예멤넨의 대저택에 돌아와 있다.


어떤 상실이 쌍둥이 중 한 사람의 말을 잃게 하는 동안 쌍둥이의 다른 한 쪽, 라헬은 어떻게 했을까. 그녀는 냉담하다. 라헬을 사랑해서 결혼하고 미국으로 데려간 전남편은 그녀가 바라보는 벽 너머의 세계를, 그 공허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일 저일을 전전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바라는 만큼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된 라헬이다. 라헬과 에스다는 같은 날 태어났지만, 서로 다른 성격과 개성을 가졌고, 그럼에도 결국 이 둘을 하나로 잇는 깊은 상실감이 있다. 



그는 어딘가에서는 라헬이 떠나 온 나라 같은 곳에서는 여러 가지 절망이 서로 앞을 다툰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개인적인 절망은 결코 충분히 절망적인 수 없음을.  한 국가의 거대하고 난폭한, 휘몰아치며 밀어붙이는, 우스꽝스러운, 미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공적인 혼란이라는 성지 옆에 불시에 개인적인 혼란이 찾아오면 뭔가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큰 신이 열풍처럼 아우성치며 복종을 요구했다. 그러자 작은 신(은밀하고 조심스러운 사적이고 제한적인 ) 이 스스로 상처를 지져 막고는 무감각해진 채 자신의 무모함을 비웃으며 떨어져나갔다. 자신의 모순을 확인하는 일에 익숙해진 그는 다시 일어나긴 했지만 정말이지 무심해졌다(35)... 한쪽 쌍둥이의 공허는 다른 쌍둥이의 침묵의 또 다른 버전이었음을(36)


이 모든 이야기의 직접적인 발단은 차카의 전처와 딸아이를 인도로 초대하면서 시작된다. 전 가족이 그들을 환영하기 위한 ‘연극’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차안에서, 기차 신호대기 중 대규모 혁명 시위단과 마주쳐 일촉즉발의 위기와 고모할머니를 향한 어떤 모멸의 순간을 맞게 되는데, 이 때 이 가족들과 잘 지내고 있는 불가촉 천민인 벨리타의 모습을 아이들이  발견한다.


벨리타.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1940년대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나, 아직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데, 이 카스트 계급에 들지 못하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 집단이 있다. 그들은 종교로부터도 버림받아 경전을 읽을 수도 없고, 자기 발자국을 밟지 못하도록 뒤로 걸어가면서 비로 발자국을 쓸고 가야 할 만큼 분리되어 있다. 


1960년대 인도의 남부, 케랄라라는 주가 배경인데, 유독 이 케랄라에서 공산주의가 득세했다. 공산주의가 득세했음에도 불가촉천민을 향한 천대와 멸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을까. 일본의 부라쿠마나 우리나라의 백정 같이 변혁과 개방 속에서 사멸된 계급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1억이 넘는 인구가 차별과 빈곤 속에서 살아간다고 한다. 


손으로 뭘 잘만들고 기계를 다루는 솜씨가 좋은 벨리타는 할머니의 공장에서 인정을 받는데, 쌍둥이 아이들은 누구보다도 벨리타와 잘 지내고 있다. 쌍둥이들에게 벨리타는 엄마(암무) 다음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가정을 이루는 데 실패하고 분열된 개인이 모여사는 가정이지만, 나름대로의 질서 속에서 살던 가족들은 외삼촌의 외국인 전처와 백인 소녀는 모두에게 각자 다른 이유로 불편한 존재지만, 그들에게 백인이 어떤 존재였던가. 겉으로는 끝도 없는 환대를 펼친다. 


작은 균열과 이질감 속에서 사건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돌려보내지고 다시 돌려보내지고 또 돌려보내진 에스타가 어떤 거대한 역사에 의해 말을 잃게 되었는지, 플래시백이 천천히 23년 사연을 천천히 비추기 시작할 때,  그 23년간 계속된 상실의 중심에는 하얀 아이의 죽음보다 더 큰, 역사가 있다. 그 죽음이 역사가 되기를 부인하기 위해 아이들의 두려움이 동원되고, 아이들의 미래가, 아이들의 트라우마가, 그리고 아이들의 인생이 저당잡힌다. 하지만 그 하얀 아이는 아예멤넨의 대저택에서 함께한 짧은 십여일동안 외할머니와 고모할머니, 이혼한 외삼촌, 이혼한 엄마와 쌍둥이 아이들이 하녀와 함께 살아가는 저택에서 세상의 중심이 된다. 하얀 아이의 죽음이 건드린 역사의 귀퉁이가 지난한 역사를 조금 무너뜨렸을까. 만일 그랬다면 그것이 보상이 보상이 될까. 상실에 대한, 말을 잃은 것에 대한, 그리고 무심함에 대한 보상이?


마르크스 혁명, 대지주와 기업. 이 말도 안되는 모순된 가치들을 함께  실현하고 있는 뚱보 외삼촌은 전처의 방문을 국가 대표 트로피마냥 자랑스러워하고,  남편의 폭력에 익숙해져 그걸 사랑으로 알고 있던 있던 맘맘무가 어느날 폭력의 아버지의 손을 뒤로 꺾은 그 아들에게로 애정의 대상이 넘어간 후, 영국인 전처의 방문에 질투를 발산하고, 아이들은 더욱 말썽이다. 이런 정신적 환대를 해나가기에 지친 암무는 어느날 아이들과 벨리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바라 본다. 



그 깃발을 높이 들고 분노로 팔근육이 불끈 솟았던 사람이 그였기를 바라게 되었다. 주의 깊게 쓴 쾌활함이라는 가면 아래에 그녀가 너무나도 격분하는 독선적이고 질서정연한 세계에 대항하여 살아 숨쉬는 분노가 감춰져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녀는 그 남자가 벨리타였기를 바랐다( 244)



암무는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부모의 기업을 말아먹고 계신 기업인 남동생의 모순된 태도와 세상의 부조리를 가장 직관적으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지만, 그 시대의 여성이 깨어있어봤자 뭘하겠는가. 시니컬한 대화들은 통통튀며 인도 사회의 미세한 단면을 바라보게 만들지만, 역시 클라이맥스는 사랑과 욕망이 분출되는 순간이다. 소설 한 권으로 일약 세계적 스타가  되었지만, 저술활동은 사회활동가이며 사상가로서 주로 활동하는 저자의 이면에 이런 숨죽여 읽게 만드는 고혹적인 장면이 있다. 더욱 더 책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벨리타

몸에는 동전만한 햇빛들이점점이 춤추는 가운데 고무 나무 그늘에 서서 딸을 팔에 안은 남자가 고개를 들어 암무와 눈길이 마주쳤다.  수 백 년의 시간이 덧없는 한 순간으로 완결되었다. 역사는 방심하고 있던 곳에서 허를 찔렀다 오래된 뱀이 허물 벗듯 벗겨졌다. 오랜 전쟁의 그 흔적, 그 상처, 그 흉터와 뒤로 걷던 나날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그 빈자리에 어떤 독특한 기운이 감지할 수 있는 빛나는 무언가가 강에서 물을 보듯 하늘에서 태양을 보듯 분명하게 보였다.더운날 열기처럼, 팽팽해진 낚싯줄에서 느껴지는 물고기의 세찬 끌어당김처럼 분명했다. 너무나 명백히 있기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245


암무

자라면서 암무는이 차갑고 계산적인 잔인함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부당함을 용서하지 않는 고결한 판단력을, 그리고 ‘누군가 큰 사람’에게 평생 괴롭힘을 당해온 ‘누군가 작은 사람’에게서 나타나기 마련인 고집스럽고 무모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다툼이나 대립을 피하기 위한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런 것을 찾아 뵙고 어쩌면 즐기기까지 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252


필라이 동지 - 차코

궁핍한 환경이 자신에게 차코를 제압하는 어떤 힘을, 혁명의 시기에는 아무리 옥스포드에서 교육을 받았더라도 절대 맞설 수 없는 그런 힘을 부여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K.N.M 필라이 동지)는 궁핍을 총처럼 차고에 머리에 겨누었다 379


하지만 동지, 그들을 대신해 동지가 혁명을 시작할 수는 없어요. 자각시킬 수만 있을 뿐이죠. 그들은 그들만의 투쟁을 시작해야 해요. 그들 스스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해요. 385


이렇게 그는 요리용 합성식초의 상표 계약을 따내고서 교묘히 차코를 ‘전복시키려는 자들’의 투쟁 계급에서 ‘전복시킬 대상’이라는 믿을 수 없는 계급으로 추방 시켰다 385


죽음에 이르게 한 ‘합법적’ 폭력. 사랑의 댓가

쌍둥이는 너무 어려서 이들이 역사의 심복일 뿐이라는 것을 몰랐다. 계산을 분명히 하고 역사의 법칙을 깬 사람들에게서 벌금을 걷기 위에 보내진 자들일 뿐이다. 원초적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완전히 비인간적인 감정에서 행해진 일일 뿐이었다. 이제 시작 단계인, 아직 인정되지 않은 두려움-자연에 대한 문명의 두려움, 여성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 힘없는 자에 대한 힘있는 자의 두려움에서 생겨난 경멸감. 421


우연은 없었다. 우발적인 것도 없었다. 노상강도도 개인적인 보복도 아니었다. 한 시대가 그 시대를 살고 있던 이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킨 것이었다 422


벨리타

그들의 작품이, ‘신’과 ‘역사’에게, ‘마르크스’에게, ‘남자’에게, ‘여자’에게, 그리고 머지않아 아이들에게 버림받는 작품이 접혀진 채 바닥에 놓여있었다 반쯤 의식이 있었지만 움직이면 없었다424



자신들이 한 남자를 죽도록 사랑했었다는 각자 나름의 확실한 인식으로 세 사람은 하나로 묶여 있었다 442


자신의 소멸이 유일한 출구인 터널에 들어서려 한다는 것을 그가 알았더라면 돌아섰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어쩌면 돌아서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454


암무가 어둠 속에서 침실 문에 기대섰다  다시 저녁 식사 자리로 돌아가기 싫었기에.하얀 아이와 그 아이의 어머니가 유일한 광원인 듯 그 주위를 맴도는 나방처럼 대화가 맴도는 그곳으로. 그 대화를 한 마디라도 더 듣게 된다면 자신이 죽을 것만, 말라 죽을 것만 같았다. 만일 1분이라도 테니스 트로피 나도 받은 것 같은 차코의 자랑스러운 미소를 차만 해야 한다면 혹은 만만치가 발산하는 그 성적인 질투의 암류를 느끼게 된다면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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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6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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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1세기 가상의 애완동물

일하던 동물원이 폐쇄된 후 일자리를 찾던 애나는 블루 감마라는 게임 회사에서 뜻밖의 일자리를 제안받게 되는데 디지탈 애완동물의 일종인 디지언트들을 훈련기키는 직업이다. 고작 몇달간의 소프트웨어 테스터 교육으로 큰 게임회사에 취엄할 수 있었던 건 블루 감마가 출시하는 디지털 애완 동물이 실제 동물을 다루던 기술이 절실히 필요할 만큼 고차원적으로 진화했기 대문이다.

20여년 전 다마고치의 형태로 전세계에 가상펫 열풍을 일으켰던 가상펫의 21세기 버전이라 생각할 수 있다.  디지언트들은 뉴로 블래스터 라는 게놈 엔진을 사용하여 다양한 형태로 개체의 진화가 나타나고 의식이 있다. 이들의 서식지는 데이타 어스라는 게임 플랫폼으로 인간과 상호작용하지 않을 때에도 데이터 어스 환경 내 에서 다른 디지언트들과 상호 소통하면서 스스로를 진화시키고 있다. (참고로 유전학적 진화와는 다른 의미로 이 책에서는 개체의 변화를 진화라는 말로 쓰고 있다) 침팬지와 곰 등 여러 형태의 아바타를 사용하여 개별 사용자의 선호도와 니즈를 만족시킨다. 뉴로 블래스트 게놈 엔진을 사용한 디지언트들은 기본적으로 애완 동물의 필수 조건인 순종적 성격과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력적이고 언어 능력을 비롯해 학습과 훈련에 의해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당연히 출시와 함께 전세계적인 빅히트를 친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여러 단편과 중편에서 보여준 소재의 신선함과 참신함으로 작가 테드 창에게 큰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여러 문학상을 받고도 전업작가가 아닌 모양이어서, 작품 발표눈 가뭄에 콩나듯 어쩌다 한 편이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비교할 때 임팩트 있는 반전의 묘미는 없지만 훨씬 성숙된 느낌을 받았고 무엇보다도 이 작은 소설이 현실과 근미래의 가상적 현실에 투사하는 방식에서 보여주는 핍진성과 현실에 대한 통찰은 놀랍기만 하다.

과학 소설이 독자에게 인도하는 것은 조금 다른 버전으로 대체된 가상의 시스템을 경험함으로써 철판같은 현실에서 제공하는 가치관과 철학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하는 것이다. 익숙한 일상 속에서는 자각하지 못한 다른 시선이 보는 미러를 통해 세계관을 이루는 것들을 자각하는 것이다.

소프트웨어에 객체라는 말이 붙기에 프로그래밍을 배우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제목부터가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사실 내용도 마찬가지로 소프트웨어의 개발과 테스트, 출시, 고객 대응 유지보수 등의 일련의 주기를 다룬다. 따라서 소프트웨어 개발자이거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익숙하다면 훨씬 풍부하게 컨텐츠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IT 산업의 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이 책의 문장 하나 하나가 주는 의미와 현실에 대한 비유를 일부 놓칠 가능성이 있다. 장황한 설명이 없기 때문인데, 이는 테드 창의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다. 그가 주로 중단편을 쓰는 이유는 서사가 부족해서가 아니고, 핍진성을 생략해서도 아니다. 나는 이 작가의 간결함이 주는 울림이 좋다.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사 놓은지 오랜만에 읽은 이유 중 하나가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은 독자평 몇개를 읽고 기대가 조금 떨어져서였는데, 전작을 읽은 독자들의 그런 실망감은 아마도 반전을 기대하는 장르적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내게는 오히려 잔잔한 울림이 오래도록 남는 과학기술적 상상력이 감성과 결합한, 전작 이상의 수작으로 평가된다.

소프트웨어의 소프트함 때문에 소프트웨어는 흥하고 소프트웨어는 망한다

인간의 뇌가 그렇게 생겨먹었는지 몰라도 우리는 무생물 소유물에게 자주 감정이입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아끼던 물건들을 쉽게 방치하고 잊고 버린다. 유행이 밀물처럼 온세상을 덮쳤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듯 한 때 세상 전부라도 가진 듯 소유 속에 행복을 찾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것들로 변하고 새 것들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크게 보면 이 소설은 그 대체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SNS만 해도 우리는 대세의 변화에 따라 천리안에서 각종 커뮤니티 카페 블로그 싸이월드에서 페북과 트위터 인스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이 파도 타듯 갈아타기를 반복하머 영원할 것 같았던 가치들 영광과 몰락을 지켜보았던가.

소프트웨어의 유지 보수가 어려운 건 아이러닉하게도 소프트웨어의 그 소프트함에 있다. 공장에서 찍어낸 상태에서 고작 망가진 부품을 교체하는 수리 차원의 유지 보수를 요구하는 하드웨어 기계와 달리 소프트웨어는 출시 후에도 고객의 다양한 요구 사항을 쉽게 수용하고 변경할 수 수 있다. 계속되는 업그레이드는, 계속 생겨나는 다른 버전을 의미한다. 안드로이드 앱은 기본으로 자동 업데이트 되도록 설정되어 있어서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기능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갑자기 원하지 않는 (광고) 기능이 추가되거나 오래된 폰에서 메모리 문제나 오류 등이 나타나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거나 혹은 있던 기능이 사라지고 그 기능을 쓰려면 유료 버전을 사야되는 것 같은 정책의 변화를 수용해야 할 때가 있다. 원치 않은 업그레이드를 정지시키면 새로운 기능을 포기해야 하는 딜레마를 경험하며 툴툴거리겠지만 개발사 측에서는 매번 발생하는 버전마다 다르게 발생하는 오류와 문제들을 개별적으로 관리할 수 없으므로 다른 대안이 없다.

동일한 유전자,  다른 객체
 
객체라는 것의 예를 들면 이렇다. 마르코와 폴로는 같은 게놈을 가졌으므로 동일한 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디지언트들은 일정 기간 사이버 공간 상에서 훈련받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각기 다른 성격이 발현하기 때문에 똑같은 게놈을 가졌다 해도 둘은 다른 개체이다. 쌍둥이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트레이너들이 이 디지언트들을 훈련시키는 이유는 유아기가 끝나 말을 배운 상태에서 주인과 소통할 수 있고 기르는 재미를 줄 수 있는 훈련된 상태의 애완동물을 구입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고 배변 훈련을 시키고 세상을 이해시키는 데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가. 디지들도 마찬가지.

마르코가 먼저 태어났고(생성되었고) 집중된 훈련을 통해 분별력도 생기고 말도 잘하게 되었을 때 이를 복사하여 복사판은 폴로라고 이름지었다. 애완동물로서 상품의 가치가 높아졌을때를 2살 버전이라고 한다면 이 때가 어떤 사용자에게는 가장 분양받기 적합한 상태일 수 있다. 이 버전의 복사본이 체크포인트에 저장되고 복사본은 언제든 얼만큼이든 판매가 가능하다. 소프트웨어는 매 업그레이드가 있을 때마다 체크포인트가 생성되어 모든 단계의 소스 코드들을 저장하고 있지만 학습된 버전은 매 순간 ‘진화’가 진행되므로 체크포인트는 주기적 혹은 어떤 임계점을 넘을 때로 임의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원치 않는 버그가 발견되면 이전 버전으로 롤백하기도 한다. 여기서도 그런 일이 발생하는데 한 디지언트가 욕을 배워 쓰는 것이 발견되자 모든 디지언트들을 한꺼전에 롤백하여 해당 트레이너가 디지언트 앞에서 욕하기 이전의 체크포인트로 되돌아간다. 

이들은 블루 감마가 채택한 뉴로블래스터 계열의 게놈 엔진으로 순종적이고 높은 지능을 가진 특성을 지냈고 각 개체마다 고유 게놈을 가지고 학습과 환경에 따라 개체 차원의 ‘진화’를 하게 된다. 회사에서는 일정 수준까지 학습을 시키고 이를 전시하는데 이들은 애나와 동료들이 각각 한두 명씩 맡은 프로토타입으로 블루감마의 마스코트라 불린다. 마스코트들은 여러 단계의 체크포인트에서 복사본으로 팔려 나가게 된다.

가령 내가 만일 디지언트라면 1살 버전 2살 버전.....10살 버전 이렇게 많은 나의 체크포인트에서 멈춘 상태의 여러 나이의 복사본이 존재하며 각기 다른 상태에서 각기 다른 무수히 많은 주인들에게 팔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른 객체가 된 복사판들은 각자의 세계에서 각기 다른 능력을 획득하며 각기 다른 성격으로 변화해 가기에 둘은 서로 만나도 각기 다른 개체가 된다. 여기에 설상 가상으로 소프트웨어 자원의 평등을 외치는 해커들에게 노출되어 해적판 디지언트들이 난무하게 되고 더욱이 데이터 어스 플랫폼 그러니까 가상세셰 자체도 복제판이 생겨나기까지 한다.

아무튼 마르코와 폴로는 애나와 평생 썸을 타면서도 안타깝게 매번 비껴가는 아바타 디자이너 데릭이 키우는 침팬치형 디지언트고 잭스는 애나가 맡은 로봇 바디를 가진 디지언트다. 마르코의 특정 나이에서 복사되어 동일 환경에서 양육 되었지만 둘의 성격은 다르다. 하나는 더 신중하고 하나는 더 모험적이다. 트레이너들 역시 가상 세계에서 디지언트들을 만나야 하므로 아바타를 쓰고 그들을 만난다.

가상세계가 현실세계를 만날 때

가장 소름끼치는 설정은 이들이 가상 세계에서 현실 세계를 만나는 장면이다. 디지언트들이 크게 세계를 휩쓸자 로봇 회사에서 디지언트들의 기능과 감각에 상호 작용하는 로봇 바디를 만들어낸 것이다. 가상 세계에서 아바타를 갈아입듯이 디지언트들은 아바타를 이 현실 세계의 로봇으로 갈아입으면 그들의 현실은 가상이 아닌 현실이 된다. 아바타로만 보던 애나의 몸을 현실에서 본 애나의 디지언트 잭스는 매끈한 아바타로만 만났던 애나의 실제를 보고 미세한 신체의 특성들 작은 땀구멍과 솜털들 같은 것들에 놀라고 매료당한다. 로봇 회사는 홍보를 위해 감마 블루의 디지언트들에게 주기적으로 이 로봇 바디를 입히고 현실 세계로 소풍을 내보낸다. 사회적 동물인 그들은 함께 어울려서 동물원에도 가고 현실 구경을 한다.

디지언트들의 성장과 쇠퇴는 현실의 소프트웨어의 흥망성쇠와 같은 맥락으로 흥하다가 쇠퇴의 길을 걷는다. 초기 투자와 유지 보수 비용이 워낙 크기에 판매만으로는 유지하기 어려워 사료 산업과 같은 보조적인 수익을 기대했지만 몇년 후 휩쑬고간 유행이 잦아들다 신규 고객의 유입은 줄고 디지언트를 중지시키는 고객이 점점 늘어나고 수입 창출을 기대했던 사료 투입 소프트웨어는 실패한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디지언트들이 성장하면서 제조사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요구사항들이 늘어난 것이다. 그들의 게놈에 내재하는 예측불가능성은 개발자들의 목표를 빗나갔다. 너무 어려운 게임처럼 디지언트들의 도전과 보상 사이의 균형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하는 재미를 벗어나 기울어졌고 이를 감당할 수 없는 고객들은 그들의 디지탈 애원 동물들을 정지시키게 된다.

어떤 생태계도 인구 자체의 감소는 쇠퇴와 궁국적으로는 몰락이라는 길로 예언처럼 흘러가기 마련이다. 까탈맞고 돈도 많이 드는 디지언트들을 정지시키거나 유기하는 사례가 늘면서 이들을 보호하려는 여러 시도는 번번히 물거품이 되어간다. 그러는 사이 데이터 어스에서 게임도 하고 애완동물도 키우고 사회 생활을 하던 많은 사용자들은 새로운 플랫폼으로 옮겨 가고 그들이 즐기던 게임둘도 새로운 플랫폼으로 이식이 시작되면서 데이터 어스는 점점 인적없는 폐허가 되어 가고 남아있는 디지언트들은 몇몇 매니아층이 소유한 한 줌 안되는 디지언트들 뿐이다. 새로운 플랫폼에서 제공하는 새로운 게놈의 디지언트들은 이런 복잡한 자아가 제거되고 한 가지에 집착하는 특성을 가졌는데 매력은 없지만 전문적인 일을 학습하는 데 뛰어나서 돈벌이가 되어 여러 산업에 응용되고 있지만 귀엽기 위해 태어난 디지언트들은 골고루 잘 하지만 어떤 특수 분야에 부각을 보이지는 않는다. 혹시 발현될 지 모를 천재성을 발굴하기 위해 없는 살림에 디지언트들의 교육비로 더욱 생활은 짜듯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충성 고객과 몇몇 대형 게임들로 근근히 유지하고 있던 데이터 어스는 결국 잘나가는 새 플랫폼회사와 통합라는 이름으로 폐쇄하기에 이르는데 데이터 어스에 기반한 모든 게임 앱들은 그쪽우로 이식되어 통폐합하기로 결정된다. 그러나 디지언트들의 게놈 엔진을 설계한 뉴로 불래스터는 데이타어스 통합 이전에 이미 망한 회사라 새 플랫폼에 이식할 수 없게 된다. 하루 아침에 길바닥에 나앉게 된 상황이 온 것이다. 예를 들어 네이버에 블로그를 차려 놓고 콘텐츠를 관리하던 사용자가 하루 아침에 네이버가 망하면 블로그까지 쫄딱 망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 내 경우 드림위즈 때 파놓은 이메일 계정이 드림위즈 통폐합으로 서버를 잃은 경험이 있는데 다행히 인수한 네이트가 메일 계정을 유지해 줘서 근근히 1세대 메일계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런 경헙들은 나만 해당되는 건 아닐것이다. 플랫폼이 없어지면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소프트웨어는 새로운 플랫폼에 이식해야 하는데 니 경우 처럼 이미 엔진 회사가 망해버렸다면 그야 말로 하루 아침에 길바닥에 나앉는 거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다행히 해커들이 만든 복제판 풀랫폼에서 기거할 수는 있지만 인적 없는 텅빈 그곳에서 몇 안되는 수의 디지언트들은 새로운 자극을 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로 삶의 질이 크게 낮아지고 유기되는 디지언트들에 대한 사회적 지원도 점점 즐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자신이 일시 정지되는 동안 시간이 흐르면 그 시간에 대한 상실을 슬픔으로 인식할 줄 아는 디지언트들을 이러한 폐허 속에 사느니 차라리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일시정지시키라는 의견을 내기도 한다. 남은 디지언트 소유자들은 디지언트의 양욱의 부담이 매니아 수준을 넘어 사회적으로 이해 불가이 가정 생활이 파탄날 지경에 이른다.

섹스 로봇은 궁극의 구세주가 될 것인가

이 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섹스로봇 회사의 제안. 그리고 새 타입의 무뚝뚝한 디지언트를 훈련시키기 위해 트래이너들에게 친밀성을 높이는 항정신성 약물 주입을 요구하는 회사의 취업 제안. 이 두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의식이 있는 디지언트들을 섹스 산업의 돈벌이 수단으로 훈련시키킬 것인지 혹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 스스로가 약물투여라는 비인간적인 수단으로 전락할 것인지에 대한 딜레마이다. 디지언트들은 자기들이 쓸모가 있으려면 스스로 모든 법적 책임과 의무와 자유를 갖는 법인등록을 하여 성인으로서의 지휘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섹스 로봇 회사의 제의를 주인 맘대로 거절할 수 없다. 디지탈 애완동물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려는 애나와 이를 미친짓이라고 여기는 애나의 남편은 그렇다 쳐도 자신의 두 디지언트들에게 법인 등록을 함으로써 스스로 책임과 의무에 벗어나고 한 발 더 나아가 섹스 산업에서의 직업을 스스로 판단케 하고 애나를 구하려는 데릭은 그러한 배반이 다시 애나를 화나게 하여 친구인 둘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비록 아바타 없이는 형체조차 없지만 조금씩 의식이 께어나고 자아를 표현하고 슬픔과 기쁨을 느끼고 자기 주장을 할 줄 아는 객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딜레마들이 서로 얽힌 상황을 너무나도 지적으로 담담하게 그려내었다. 키보드 몇 스트록으로 일시에 그동안 쌓은 모든 추억, 기쁨과 슬픔, 함께 했던 모든 기억을 얼려 버리고 시체도 남지 않는 영원한 유기 방기 상태에서 죽음도 삶도 아닌 어떤 상태로 남겨졌다가 휘발되듯 잊혀지고 사라질 이 존재들이 소프트웨어라서 아바타 없이는 물적인 형체가 아니어서 쉽게 잊혀질 수 있을까. 그 기억, 그 시간, 그것들에게 쏟았던 내 애정을 사랑한다면 그렇게는 안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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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07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드 창 책 읽고 싶은데...김겨울이 추천해서 더 읽고 싶은데...계속 이러고만 있네요 ...ㅋ

CREBBP 2019-01-14 17:42   좋아요 0 | URL
정말 추천해요. 당신 인생의 이야기보다도 저는 개인적으로 더 좋았어요. 잔잔한 전개가..

2019-01-07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9-01-14 17:43   좋아요 0 | URL
기대해보겠습니다 ^^
 

시중에 건강 서적이 많이 나와 있는데 나의 불만은 이거다. 우선 첫째로 이게 좋다 저게 좋다 이게 나쁘다 자게 나쁘다 하는 종류의 대중서들에는 근거 없는 낭설이나 일화를 바탕으로 과장된 차료법을 소개하눈 경우가 많다. 이런 책들은 그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책들도 많고 의사한테 가서 책에 그렇게 써 있던데요?하고 말하면 혼나고 오기 일수다. 그렇지 않고 좀 더 상세한 내용이 나온 책은 전문적 내용이 많아 못알아먹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굉장히 쉽고 재미있게 쓰여져 있으면서도 신뢰가 간다.

소화관이라는 게 우리가 하루 종일 먹고 싸는 일상 속에서 가장 자주 가까이 의식하는 입에서부터 시작해서 항문까지의 모든 통로로 볼 때 단지 장이라는 건 대장 소장 위장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단 먹을 게 입에 들어가면 침샘에서 분비되는 침과 혀의 작용부터 소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고 당연히 편도와 식도 위로 이어지는 소화의 전과정이 꼼꼼하게 설명된다. 침이 고이는 것만 해도 그렇다. 침이 혓바닥에서 나오는가 입천장에서 나오는가 궁금했었는데 찾아볼 생각을 못했었다. 혓바닥 밑에 아랫 송곳니 뒤쪽 두 곳과 어금니 근처 양 볼의 안쪽 사이드 양쪽 이렇게 네 개의 구멍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건 정말 대단한 발견이다. 늘 침이 고이는 게 입전체에서 땀처럼 나오는 게 아니라 샘물처럼 어떤 구멍에서 조금씩 분비되는 것이었다니 신기하다. 편도에는 공기와 음식을 통해 그리고 이빨 사이에서 기생하는 박테리아 세균들에 맞서 면역 세포가 활발히 싸우는 관문이라고 한다. 조금만 피곤해도 목이 붓고 아픈 이유가 바로 편도의 지나친 면역 기능 때문인 것 같다는 추론이 가능한데 환절기잉 수록 양치를 자주하라는 건강 가이드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이러스나 세균이 편도에서 전쟁을 하느라 과도하게 작용하게 되면 목에 염증이 생기고 기침 재채기 비염등의 중상으로 나타나는 거 같다.만성 염증에 시달리게 되면 면역 세포가 쉴 틈이 없는데, 장기적으로 볼 때 이는 면역 세포에 좋지 않다. 네 살, 일곱 살 혹은 쉰 살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그리고 편도를 제거하는 것은 과민한 면역 체계에도 이롭다. 편도 제거는 찬반양론이 있지만 면역 잣업은 혀뿌리돌기와 인두에서도 진다.

그 밖에도 입안에서의 일은 ‘침구멍이 뮤신 그물을 발사해 치아를 보호하고 진통제를 분비함으로써 과민한 통증을 막아준다. 발데이어 편도고리가 낯선 입자들을 검문하고 면역 세포 병사에게 방어훈련을 시킨다. 이 모든 일이 다 낯선 입자들이 목을 타고 우리의 내부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체 구조와 역할을 이해함으로써 건강에 대한 실딜작 정조를 얻는 것이 유용하다. 왜 그래야 하는지를 알게 하니까. 뿐만 아니라 알아두면 편한 정보도 많다 가령 식도는 위의 오른쪽 꼭지와 연결되므로 가스가 차는데 가 위의 오른쪽 꼭지와 연결되기 때문에 위에 찬 가스가 옆으로 난 구멍을 찾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럴 땐 마중물을 넣듯 먼저 약간의 공기를 삼키면 식도 구멍이 가스 근처로 살짝 밀리며 ‘꺼억’ 소리와 함께 가스가 밖으로 올라온다. 누워서 트림을 할때는 왼쪽으로 누우면 더 수월하다고. 또한 식도는 구불구불하게 힘줄을 통해 척추와 연결되어 있다. 꼿꼿하게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히면 식도가 세로로 늘어난다. 그러면 식도가 좁아져 위아래 구멍을 쉽게 막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과식을생겼는데 똑바로 앉으면 식도가 좁아지며 길게 펴지기 때문에 과식 후 신물이 올라오면 구부정하게 앉는 것보다 똑바로 앉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알아두면 좋겠다.

위는 한쪽이 다른 쪽보다 월등히 길어서 휘어진 모양인데 물과 고형음식의 통로가 다르다. 물은 위의 오른쪽 좁은 면을 지나 소장으로 통하는 문에 빠르게 도달하는 반면, 음식물은 위의 왼쪽 넓은 면으로 떨어짐으로써 잘게 쪼개야 하는 것과 빨리 내보내도 되는 것을 노련하게 분리한다.


대장과 소장에서 흡수된 모든 수확물은 혈액을 따라 간으로 운송되고 거기서 검사를 받은 후 대순환계로 전달되는데 이 순환과정을 따르지 않는 놈이 있으니 바로 지방이다. 지방은 간을 거치지 않도 림프관을 통해 바로 심장으로 간단다. 왜 심장병 예방으로 나쁜 기름을 조심하라고 마르고 닳도록 얘기들을 해대는지 이제야 알겠다.대장 끄트머리에 있는 직장의 혈관 역시 해독 작용을 하는 간을 통하지 않고 곧장 대순환계로 간다. 그래서 좌약은 먹는 약보다 약 성분이 아주 적지만 대신 빠르게 효력을 낼 수 있다. 먹는 약은 약 성분이 높게 조제되는데, 약 성분이 효력을 낼 곳에 도달하기도 전에 간이 많은 부분을 해독해버리기 때문이다. 간을 보호하려면 해열제로 좌약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할 거 같다.


장 파트에서는 장의 운동 뿐만 아니라 박테리아의 역할에도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박테리아 부분은 지난 번에 읽은 책 《10퍼센트 인간》과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에서 본 내용이지만 훨씬 간결하고 귀엽고 재밌게 소개되어 있어서 지루하지 않게 복습하는 의미에서 재미있게 읽었다. 식물성 단백질에 대한 궁금증도 조금은 풀렸다. 영양표를 살펴보면 쌀이나 곡류에도 단백질이 포험되어 있지만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있는데 그건 한두가지 특정 아미노산이 부족하기 때문니라 여러 곡류을 골고루 먹으면 해결된다고 한다. 잡곡밥이 왜 좋은지 문제도 해결된 듯 싶가 ( 아래 밑줄 인용문 참조). 과일이 좋다 나쁘다 말들이 많은데 과당은 좋을 게 없는 듯하다. 독일인응 기준으로 한 책이라 우리나라에도 해당되는 지 모르겠지만 과당이 너무 많이 섭취되면 장으로 보내지고 거기 사는 나쁜 박테리아가 먹는데 과당이라는 게 이미 다 쪼개진 분자라 소화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데다가 불내증까지 있으면 먹은 게 다 대장으로 가서 불편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세라토닌을 생성하는 데 필요한 트립토판은 소화될 때 과당을 끌어안기 때문에(잘 이해는 안가지만 아무튼) 과당을 많이 섭취하면 트립토판이 부족해 우울증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아래는 모두 밑줄)


살모넬라는 열에 약하다. 75도에서 10분만 끓여도 살모넬라를 모두 제거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잘 익혀 먹는 닭고기가 아니라 냉동 닭을 해동시킨 싱크대에서 씻은 채소가 불행을 낳는다.


알레르기의 기원
소장이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분해하지 않으면 단백질은 알갱이 형태로 남는데, ... 분해되지 못한 알갱이가 지방 방울에 갇혀 림프관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주의력 깊은 면역 세포에게 발각된다. 면역 세포는, 예를 들어 땅콩 알갱이를 림프액에서 발견하면, 당연히 이 낯선 존재를 공격한다.


#매력적인 장여핼


우리 몸에 맞는 세로토닌의 95퍼센트를 장 세포가 생산한다. 세로토닌은 힘들게 근육을 움직이는 신경의 짐을 가볍게 덜어주며, 중요한 신호분자로서 일한다. 그런 신호분자 생산에 변화가 있으면, 뇌에 전혀 다른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그러면 삶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갑자기 심한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 이럴 땐 장만 치료를 받으면 된다. 어쩌면 머리는 아무 잘못이 없을 것이다!

식물성 단백질에는 필수 아미노산이 적기 때문에 종종 ‘불완전 단백질’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떤 식물성 단백질에는 (단백질로 합성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의) 필수 아미노산이 겨우 한 가지만 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그 한 가지 아미노산을 제외한 나머지 아미노산 분자들은 그냥 소변으로 배출되거나 어찌어찌하여 재활용된다. 콩에는 메티오닌methionine 아미노산이 부족하고, 쌀과 밀(그래서 밀 고기에도)에는 라이신lysine이 부족하고, 옥수수에는 심지어 동시에 두 가지, 라이신과 트립토판tryptophane이 부족하다!.. 콩에는 메티오닌이 부족하지만 그 대신 라이신이 아주 많다. 밀가루로 만든 토르티야에 맛있는 콩으로 속을 채우면 우리에게 필요한 아미노산을 모두 섭취할 수 있다. 계란과 치즈를 먹는 세미채식주의라면 불완전 단백질을 넉넉히 보완할 수 있다. 콩과 쌀, 치즈와 스파게티, 참깨 소와 빵, 토스트와 땅콩버터 등 어느 나라에서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수백 년째 불완전 단백질이 보완되도록 식사를 해왔다. 꼭 한 끼 식사에서 보완하지 않아도 된다.

-알라딘 eBook <매력적인 장腸 여행 : 제2의 뇌, 장에 관한 놀라운 지식 프로젝트> (기울리아 엔더스 저) 중에서

상처가 났을 때는 이런 메커니즘이 도움이 된다. 염증이 박테리아들을 쓸어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테리아들이 장 점막에 머무는 한 그들이 가진 신호물질은 무용지물이다. 그런데 점막에 머물지 않는 나쁜 박테리아가 있을 때, 그리고 기름진 음식물을 많이 먹었을 때는 너무 많은 신호물질이 피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의 몸은 신호를 받고 가벼운 염증 모드에 돌입한다...

박테리아의 신호물질이 간이나 지방 조직에 머물며 이곳에 지방이 쌓이도록 한다. 흥미로운 것은 박테리아 염증 신호물질이 갑상선에도 효력을 미친다는 점이다. 갑상선의 일을 방해하여 갑상선호르몬 생산에 지장을 주고, 그 결과 지방 연소가 더 느려진다...

심한 염증은 몸을 쇠약하게 하고 마르게 하지만 무증상 염증은 뚱뚱하게 만든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박테리아만 무증상 염증을 일으키는 게 아니다. 호르몬 불균형, 에스트로겐 과다, 비타민D 결핍, 글루텐 함량이 높은 음식물도 무증상 염증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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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서울대 공대를 나와 삼성전자에서 일하다다 전업작가로 직업을 바꾸고《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썼다. 이 책은 자신의 인생관과 작가로서의 가치관을 자본론의 관점에서 가볍게 꺼내려간 에세이집이다. 사실 작가가 이 챡에거 말하고자 하는 것은 월급받을 때보다 경재적으로는 훨씬 못미치지만 대신 온전히 자신의 시간을 자신을 위해 그러니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을 위햐서만 쓰고 있으미 행복하다는 내용이지만 실제로 재미있는 일화라고 써놓은 세부 사정은 실제로 전업 작가로서 먹고 살기가 얼마나 팍팍한 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소비에는 소유형 소비와 체험형 소비가 있다고 한다. 엥겔 지수가 빈부의 차이를 말해준다는 것도 옛말, 우리는 좋은 식당과 맛있는 맛집들을 찾아 다니며 풍요롭게 먹는 미식가들에게 엥겔지수로 빈부를 측정할 수 없다. 저자 역시 할부로 해외 여행 가고 호텔에서 파는 빙수 먹으러 가서 강제적 발렛 파킹비를 생각한다. 서점에서 인기 없는 사회과학 서적을 쓰고 있지만 그동안 원숭이자본론을 비롯해서 여러 책들이 서점에서 네임 밸류를 얻고 방송과 강의 등을 활동으로 많이 알려져 꽤 이름 있는 저자임에도 수입이 충분치 않은 것을 보면 전업 작가로서 가족을 꾸리고 생활하려면 오랜 시간동안 조금씩 알려지고 책도 꾸준히 내야 할 것 같다.

가벼운 내용이긴 하지만 원숭이자본론에서 자세히 썼겠지만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회와 인간의 삶을 해석하는 그의 고유한 견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대략 어떤 책인 지 알고 보는 것도 필요할 듯하다. 경희대에서 마르크스 자본론 관련 2학점짜리 교양 강좌를 맡도 있는데 신입생이 국정원에 신고하는 해프닝까지 있었다니 헌법으로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명시된 대한민국에서 자본론을 국가 전복적 공산주의와 연결시켜 노동과 인권을 탄압했던 구시대의 유물은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크게 재활했던 듯 싶다.

5.18이 국가 전복을 꾀하는 불온 세력의 폭력적 사태라고 믿어졌던 예를 보면 국민 대다수가 누군가의 의도로 특정한 관점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국가는 정권 유지를 위해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국민의 시선을 향하게 한다. 나는 그게 국가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임승수는 이 책에서 남이 보여주는 의도에 맞춰 사리를 판단하는 사람은 진정한 자유인이라 할 수 없고 사실상 정신적 노예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민주화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 대다수 국가가 정권 유지를 위해 자신들이 가진 시선으로 세계를 보도록 유도한다고 생각한다.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서 말이다. 저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외부로부터 주어진 특정한 ‘관점’을 잣대로 삼아 사물·현상·사건을 가치판단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가장 한 가운데 있는 관점이 바로 돈이다.

한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길거리 요요 공연을 하는 학생들이 수상을 했는데 상금을 얼마 받았느냐로 공연의 가치가 매겨진다는 사실을 토로하는 내용이 있다. 자본론을 이야기 하면서 화폐로 환산되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서 저자는 반문한다. ‘그렇다면 화폐로 교환되지 않는 시간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예컨대 아이를 키우는 시간은 화폐로 교환되지 않는다. 되레 적지 않은 화폐가 소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부모는 화폐로 교환되지 않는 그 시간을 기꺼이 감내한다. 오히려 화폐로 교환되지 않는 그 시간을 통해 행복과 보람, 감동을 느낀다. ‘

저자가 말하는 행복한 시간이란 돈과 바꾸지 않은 시간이다. 취업난과 취업난의 공포에 시달리는 학생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사실 어떻게 다가올 지 의문스럽지만 막상 회사라는 조직은 자본론에 의하면 회사에서 고용한 노동자의 노동의 가치에서 ‘착취‘한 만큼의 이윤으로 기업이 굴러가고 자본주의가 풍요로와지는 것이므로 노동 시간은 내가 행복한 시간이 아니라 고용주에게 팔아버린 시간인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에 몰랐던 세계에서 일을 배우고 시스템이 돌아가는 동작 과정을 이해하고 어떤 일의 전문가로서 성장하는 데서 누리는 행복은 없나? 사실 이런 이야기는 빠져 있다. 본인이 적성에 안맞는 과를 가고 적성에 안맞는 일을 하다가 글쓰는 전업작가로 전환을 했을 뿐인데 이것이 자본이 주가 되는 사회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한 불행한 인간에서 자기 주도적 작가로서의 삶에서 행복한 삶으로 전환한 전형적 예로 잘못 일반화할 수 없다.

전업 작가가 되면 작가로서의 경험이 글의 소재나 소재의 일부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작가로서 명성을 가졌던 그러지 못했든 상관없이 작가가 아닌 일보다는 작가로서 더 적성에 맞을 것이고 그것은 반대로 작가가 아닌 일은 작가 일보다 더 못하거나 좋아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것은 굉장히 드문 케이스이며 작가가 책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흔히 책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로서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재미는 있었지만) 책의 의도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나는 행복한불량품입니다


아내가 자기 자식 돌봐주고 밥그릇 닦아주면 마누라 집에서 논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내가 가사도우미로 남의 자식 봐주고 남의 밥그릇 닦아주면 마누라가 일한다고 말한다.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까? 차이를 만드는 기준은 ‘돈’이다. 아내가 자기 자식 봐주면 돈이 생기지 않지만, 남의 집 가사도우미를 하면 돈이 생기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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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이병욱 2019-01-1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인문사회 관련 글을 잘 읽었습니다 이 땅의 우리는 좋든 싫든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야 하고 그 탓에 갖가지 병폐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 어려움의 정점에 선 전업작가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봐야 될 시간이었습니다

CREBBP 2019-01-23 12:00   좋아요 0 | URL
책을 내는 작가들이 흔히 자신의 선택을 독자들에게 예시하는 경우 독자들이 알아서 잘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아요. 자본주의의 병폐가 많지만그걸 이해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건 어렵겠지요

2019-01-22 2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9-01-23 12:04   좋아요 0 | URL
제가 잘 전달을 못한 것 같습니다. 작가로서 소질이 있는 사람이니까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거지 일반 독자가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막 회사 그만두고 들어앉아 글쓰는 건 생각해봐야 할 거 같다는 취지로 쓴 단락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