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토마스만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주말에 <베네치아에서의 죽음>과 <토니오 크뢰거>를 읽었다. 두 권 모두 중편인데 전자책으로 모아놓은 세트에 겹치기로 중복되어 있어서 골라가며 읽을 수 있었다. 토니오 크뢰거가 들어 있는 전자책은 세 권으로, 문예출판사 버전은 <토니오 크뢰거>를 표제작으로 환멸, 트리스탄, 마리오와 미술사까지 총 네 개의 중단편이 들어있다. 열린책들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표제작으로 글라디우스 다이(1902) , 트리스탄(1902) , 굶주리는 사람들(1902), 토니오 크뢰거(1902), 신동(1903), 힘든 시간(1905), 벨중족의 혈통(1905), 베네치아에서의 죽음(1912) 까지 총 7편이 들어있고, 마지막으로 현대문학에서 나온 토마스만 단편집 여기서 언급된 것 외에도 키 작은 프리데만 씨 행복에의 의지,타락,죽음,어릿광대,루이센,토비아스 민더니켈이 더 들어있다. 집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판으로 민음사의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 등도 더 언급할 수 있겠다.




























전부터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알았는데 못읽고 있다가 우연히 펼쳤더니 중단편 분량이라 얼씨구나 시작했는데, 처음 읽는 토마스만이 뭔가 잡아끄는 듯한 힘이 있어서 <<토니어 크뢰거>>를 읽게 되었다. 특히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경우는 더 그런데, 두 권 읽고 작가의 전체를 언급하는 건 무리지만 두 권 모두 스토리상으로만 보면 사실 크게 드라마틱한 내용이 없이, 주인공의 자아가 일으키는 내적 상태와 욕망 갈등을 산문처럼 쓰고 있다. 따라서 호불호가 크게 갈릴 수 있는 작가일 거 같다. 내 경우, 먼저 읽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계기로 그 작가의 뭘 읽어도 후회 않을 안심 작가 목록 같은 거에 자동 등록되었다. 헤르만 헤세같이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을 받는 독일 작가도 많은데, 토마스만을 굳이 찾아읽게 되지 않았는데, 그 유명한 헤세도 제대로 읽은 게 없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사실 단편 소설에서 어떤 대단한 스토리를 기대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100~200페이지 분량의 중편이라서, 나름 지지부진하게나마 스토리의 전개가 이루어지고, 결정적인 반전이 사소한 외부 사건을 계기로 주인공의 내면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스토리는 사건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가 만들어낸다. 읽기에 집중이 요구되었다. 100년전의 소설 답게 내면 묘사는 세세한 풍경 묘사와 더불어 이루어진다. 주인공은 주로 여행중이어서 이국적 혹은 낯익거나 낯선 풍경에 내면을 투사하는 경우가 많다. 


소설은 토니오 크뢰거의 14세 16세 그리고 중년의 현재로 시간이 쪼개져있으며 단막단막 쪼개져서 공간적 배경이 바뀐다. 14세 소년 남국적 외모와 이름을 지닌 토니오 크뢰거는 금발 소년 한스를 사랑한다. 16세가 되어 사랑한 잉게는  이성이지만 한센과 마찬가지로 금발에 강철빛 눈을 가진 밝은 세계, 의심하고 고뇌하지 않는 밝고 쾌활한 세계에 속해있다.크뢰거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뮌헨은 남국이라 부르고, 유럽의 북쪽과 출생에서 소년 시절까지를 보낸 덴마크와의 국경 도시 루벡을 북국이라 부른다. 이러한 분류는 애초에 토니오 크뢰거가 사랑했던 대상들이 푸른눈과 금발, 이성, 쾌활함, 상냥함 등으로 자주 분류되는 북쪽을 상징하고 남쪽은 그 반대의 대척점으로 놓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설속에서는 소시민과 예술인을 남북으로 가르고, 이성과 열정, 쾌활함과 우울함, 냉정함과 광기 등의 속성을 심는다. 남과 어울리지 못하고 우울한 예술가 성향의 크뢰거지만 정작 자신이 동경하는 것은 금발머리의 환하고 순정적이고 착한(?)것들이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 어쩌면 자신이 반쪽은 혈통으로서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며 그 속에 소속되어 있어야 했을 그 세계와는 정반대쪽의 세계에 속해있으며, 이제 그 속된 세계가 자신이 속한 예술가의 세계에서는  때로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안다. 


시를 쓰는 것을 수치로 여겼던 크뢰거는 조금씩 그 대단하던 가문이 쇠락하면서, 자신 역시 그 금발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길을 가서 이제 대단한 문학가가 되어 있고, 그의 옆에는 연인인지 지인인지 애매한 관계의 예술가가 예술가들의 세계와 대화의 창이 되고 있다. 예술가란 무엇인가. 고뇌하고, 슬퍼하고, 밝은 빛 아래 어둠을 보고, 그것들을 열정적으로 표현해 내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정신적 고통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제 그 세계에서 인정받았고, 자신이 미운오리새끼처럼 따돌려졌던 푸른눈의 금발의 세계는 이제 잊어도 좋을 위치에 있다.  그럴까.


이제 그는 여행을 하고 있다. 자신이 떠나온 도시로 돌아가 자신을 알아보지만 존재감이 없던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는 그 도시 주변을 맴돌며,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자신이 떠나온 도시에서 이방인이 되어 경찰에 잡혀갈 뻔한 상황을 떫떠름하게 여기며 발트해를 여행하는 크뢰거는 고독하다. 예술가에게 고독은 형벌처럼 따라다니는 짐일까. 어쩌면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도 그렇고, 아마도 내게 이 두 소설이 꽂힌 이유는 작가의 고독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화에서조차 그는 소통하다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침잠해서 스스로의 생각을 꺼내놓는 창구일 뿐이다.  대화에서조차 타인의 말은 자신의 말에 대한 반향으로 읽힌다. 그는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북쪽 출신의 대단한 가문의 아버지와 그가 닮았다고 생각하는 남쪽 출신의 정렬적인 예술가 기질의 어머니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간다.


처음에 열린책들 버전을 읽다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나와 문예버전을 읽다가 또다시 이해가 안되는 버전이 나와 현대문학 버전을 읽다가 했는데, 비교를 해보려고 퍼온 부분을 공개해보면 이렇다. (스포에 해당되기 때문에 주의).


내 그대들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그는 스스로 반문했다. 천만에,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한스, 너도 그렇거니와 금발의 잉게, 너 역시 잊은 적이 없다! 내가 일을 했던 것은 그대들 두 사람 때문이었고, 내가 박수갈채를 받을 때, 너희들이 그 속에 섞여 있지나 않을까 남 몰래 돌아보곤 했다……. 네가 네 집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약속했던 《돈 카를로스》를 이제 읽어보았느냐? 한스 한젠, 그런..고독해서 우는 왕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너는 시(詩)와 우울을 넋 잃고 들여다보다 네 맑은 눈을 흐리거나 꿈꾸듯 몽롱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도 너처럼 되고 싶...다시 한번 처음부터 시작해서 너와 같이 자라나고, 마음을 곧고 즐겁게, 그리고 순박하고, 올바르고, 질서 있게, 신(神)과 사람들과도 뜻이 맞아 순진하고 행복한 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리고 잉게보르크 홀름, 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한스 한젠 너 같은 아들을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인식(認識)과 창조의 고뇌라는 저주를 벗어나 복된 평범함 속에 살고, 사랑하고 찬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문예출판사 /강두식역)


내가 너희를 잊었을까? 토니오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냐.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 한스 너도, 금발의 잉게 너도! 내가 글을 쓴 것도 너희 때문이야. 나는 박수갈채를 받을 때면 혹시 너희가 그 자리에 없는지 몰래 주위를 살피곤 했어. 한스, 예전에 너희 집 정원 문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돈 카를로스』를 읽었어? 읽지 마외로워 눈물을 흘리는 왕이 너하고 무슨 관계가 있겠어? 너는 시와 멜랑콜리 같은 것으로 눈을 흐리고, 바보 같은 꿈에 젖을 필요가 없어…… 아, 너처럼 되고 싶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너처럼 자라고 싶어. 너처럼 성실하고 쾌활하고 소박하고 올바르고, 질서에 잘 따르고, 신이나 세상과도 아무 갈등이 없고, 천진하고 행복한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잉게 너를 아내로 맞아 한스 너 같은 아들을 낳고 싶어. 인식의 저주와 창작의 고통에서 벗어나 지극히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사랑하고 찬양하고 싶어……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 

<세계문학 단편선 03 토마스 만> (토마스 만 저, 박종대 역) 중에서

내가 너희들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그는 물어보았다. 아니, 한 번도 없었어! 한스, 너도, 금발의 잉에, 너도 결코 잊은 적이 없었어! 그래, 내가 작품을 쓴 것은 바로 너희들 때문이었지. 그리고 박수갈채를 받을 때면 몰래 주위를 둘러보면서 너희들이 있는지 살펴보았지…. 한스 한젠, 넌 너의 정원 문에서 나에게 약속했던 대로 『돈 카를로스』를 읽었느냐? 읽지 말거라! 네가 그걸 읽기를 더는 요구하지 않아. 외로워서 우는 왕이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니? 넌 우울한 시 따위를 보느라 밝은 눈을 흐리게 하거나 어리석은 꿈에 잠겨서는 안 돼…. 너처럼 되고 싶구나! 다시 한 번 시작하여, 너처럼 올바르고 즐거우며 소박하게, 규칙과 질서에 맞게, 신과 세상 사람들의 동의를 받으며 자라나, 아무런 악의가 없고 행복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싶구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 열린책들 세계문학 020> (홍성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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