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지독한 오후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깨알같은 일상의 디테일과 대화가 어느 한 사건이 일어나던 날의 하루와 이미 사건이 일어난 후의 두 개의  병렬된 시간 위에 나란히 배치된다. 한 편으로는 사건을 향해 진행되는 과거의 그 '정말 지독한 오후'의 아침부터 다음날 아침까지의 하루동안 사건의 발생 경위가 느린 속도로 천천히 드러내고, 또 한 편으로는 몇달 후인 현재 시점에서 그 끔찍한 하루로 인해 달라진 오늘이 과거의 사건을 궁금해 하는 독자들에게 무한 떡밥을 던지며 흘러간다. 이 두 시점은 서로 교차되며 계속되는데, 과거의 시점은 현재를 현재의 시점은 과거를 서로 설명한다. 삶의 우연과 필연, 그리고 선택이라는 명제 앞에서 과거와 현재의 연속된 삶이 서로를 어떻게 간섭하고 연결하는지를 암시한다.


그 날, 서로 이웃인 두 커플과, 서로 베프인 두 커플은 양쪽을 다 아는 커플인 에리카와 올리버 커플을 매개로 알게 되어 세 커플은 바베큐 파티를 즐긴다. 에리카는 첼리스트인 클라멘타인에게 어릴 때부터 헌신적인 단짝 친구이고, 티파니는 에리카의 옆집에 사는 부자 커플이다. 에리카와 샘  부부에게는 아장거리는 두 딸 홀리와 루비가 있고, 티파니와 비드 커플에는 10세 정도되는 딸이 한명 있고, 에리카와 올리브 커플은 아이가 없다. 그리고 비드네 옆집에는 해리라는 매우 심술궂은 독거노인이 한 명 있는데, 이 독거노인의 사망은 초반 현재의 시점에서 계단을 굴러 고독사한 노인으로 무심하게 그려지고,  바베큐 당일의 과거 시점 아침에는 살아있는 심술궂은 모습으로 잠시 등장한다. 

초반의 느린 진행과 두서없는 산만함은, 후에 빈틈없이 계산된 사건과 주제를 설명하는 장치들이며, 알고 보면 주제를 설명하거나 사건의 배후를 부연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의미없어 보이는 수다들은 후에 인물의 성격과 트라우마, 혹은 심리적 상태를 짜임새 있게 설명한다. 패미니즘, 우정, 수집벽, 양육, 상처, 트라우마에 인공수정과 난자 기증에 대한 윤리적 성찰이라는 무거운 주제까지 소설이 다루는 전방위적인 주제는 책읽기를 마친 후에도 여운을 준다.

우정에 대하여. 
에리카는 클라멘타인에게 둘도 없는 친구다. 에리카와 클라멘타인 사이는 상식적인 베프와는 다르다. 가족 이상으로 서로를 보살피며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서로 큰 의지가 되고 외롭지 않겠다는 점에서는 부럽지만, 클라멘타인이 에리카에 대해 느끼는 구속감, 또 에리카가 클라멘타인에 대해 느끼는 집요함은 그 둘 사이의 우정을 답답하고 숨막히게 보이게 한다. 에리카는 클라멘타인에게 헌신적인 친구고, 둘은 거의 매일 통화를 하고 자주 만난다.  클라멘타인이 양육하는 방식을 에리카가 일일히 참견하고 교정할만큼 밀착된 관계에 있지만, 클라멘타인은 그것을 좀 불편하게 여기는데, 거기에는 까닭이 있다. 

에리카는 정상적인 가정환경에서 양육되지 못했다. 그의 엄마는 바깥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집안에서는 강박적 수집벽(hoarding)이 있는 사람이다. 전에 TV에서 이런 강박적 수집벽 때문에 썩은 물건들 사이에 파묻혀 죽은 형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에리카의 엄마가 그렇다. 어릴 때부터 그런 자신의 엄마와 집이 부끄러워, 누가 벨을 눌러도 문을 열어주지 않은 채로, 몸에는 벼룩에 깨물린 자국을 드러내며 자란 것이다. 이 때 구세주가 된 것이 클라멘타인의 부모이고, 그 부모의 압력(?)으로 클라멘타인은 에리카에게 친절한(?) 친구가 된다. 에리카의 부모가 역할을 제대로 못하니, 아이를 집으로 초대하고 함께 휴가를 다니며 클라멘타인을 붙여주어 함께 놀게 하면서 제2의 부모 노릇을 해온 것이다. 변변한 친구도 없는 에리카에게 그 부모가 준 가장 큰 선물은 클라이멘타인이라는 친구다. 하지만 클라멘타인은 그녀가 자신에게 너무 집착하는 것을 부담스럽고, 또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겨 속상하기까지 한데, 그것을 내색하지 않는다.

꼼꼼하고 성실하고 똑똑한 에리카가 클라멘타인처럼 자유분방한 성격에게는 조금 답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클라멘타인을 세심히 관찰하고, 그녀가 한 말을 꼼꼼히 기억하고 덤벙대고 실수하는 그녀를 보살피는 것이 에리카이기 때문에 클라멘타인은 습관적으로 그녀를 의지한다.  그러던 날, 바베큐 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에리카와 올리브가 2년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말하면서 상상도 하지 못한 큰 부탁을 한다. 

지켜야 할 선과 넘어도 되는 선 사이에서
여기서 나는 다시 우정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는데, 만일 난자의 문제 때문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 난자 제공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베스트 프랜드라고 정의할 수 잆을까. 아니 질문이 바뀌었다. 정말로 아주 친한 친구라면 난자 제공을 부탁할 수 있을까. 게다가 에리카는 자신의 아이가 자신의 엄마의 유전자를 받아 강박적 수집벽이 있게 될 공포가 있는 데다가, 클라멘타인의 외모와 성격을 닮으면 완벽하게 원하는 아이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 점이 역겨웠다. 클라멘타인은 이 부탁을 받은 후, 더럽혀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남편에게 이야기하는데, 하필이면 그 말을 엿듣게 되고 더욱 상처를 받게된다. 


집을 쓰레기더미로  만들고, 수도와 전기까지 떨어진 집에서 아이를 거의 방치 상태로 두었던 에리카의 엄마가 아직도 철딱서니 없는 행동과 말을 하고 다니는데, 이 난자 제공 문제에 대해서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녀 한명 뿐인 것 같다. 아무리 과학이니 뭐니 해도 너무 나간 거 아니냐고...늘 에리카에게 받기만 하는 클라멘타인은 자신이 한 말을 엿들었을지 모른다는 죄책감과, 그 정말 지독한 날의 오후에 있었던 사건의 영향으로 난자 제공을 결심하게 되는데,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난자로 두 사람에게 태어난 아이는, 자신의 아이 같은 느낌이 들을 거라는 거다. 그러니까, 완벽한 에리카에게서 완벽한 양육을 받지만, 사실은 자신의 아이라는 느낌이 들 거라는 거다. 


내 유전자를 받은 남의 아이라는 점을 어떻게 감당할까. 그들이 아무리 완벽한 부모라고 할 지라도, 그들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는 동안 남의 남편이 자신이 자기 아이라고 생각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아이인 남의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 그 친밀감? 혹은 가까움은 에리카는 어떻게 감당할건가. 우정이란 그런 것을 제공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우정이란 사랑과는 달라서 한 쪽이 한 쪽을 일방적으로 좋아할 수 없다. 물론 그렇게도 약한 우정 혹은 우정같은 관계가 생길 수 있겠지만, 두 사람 사이의 균형과 질서가 필요하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도 똑같은 비중으로 여겨지는 심적 친밀감. 그런 거 말이다. 그것이 불균형을 이루면, 우정은 겉돌고, 베프에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이다. 


잘못되면 엄마 탓인 세상

클라멘타인이 조금 덜렁대는 성격이고, 자상한 샘이 아이를 주로 돌보는 쪽이다. 하짐나 그녀의 첼로 레슨과 앙상블 행사 연주는 클라멘타인의 자아 실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보탬이 된다. 많은 것을 남편이 돕고 있지만, 돕는 것과 생활의 주체가 되는 것은 입장이 다르다. 그녀는 아이들이 없는 곳, 조용한 곳에서 원없이 연습을 하고 싶다.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는 곳에서 남편의 헌신에 기댄 채 오케스트라 오디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고 있는 상태라는 사실은 슈퍼워먼 컴플렉스 시대에서 크게 나아간 게 없다. 자상하고 착한 샘이 아이들을 주로 돌보고 클라멘타인의 오디션 연습도 시키는 것이 굉장히 훈훈하고 부럽고 좋았지만 결국 아이가 잘못되면 그 모든 비난의 화살을 온몸으로 받아야 하는 쪽은 엄마라는 보편적인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를 소설은 매우 잘 반영한다.  게다가 그토록 민주적이고 훌륭한 부모까지 클라멘타인의 탓을 하는 것이 마치 내 일처럼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다. 페미니즘은 멀리 있지 않다. 아주 작디 작은 일에서 매순간 분하고 원통한 일이 일어나고, 그 때마다 자신을 죽이고 또 죽이며 살아가는 것이 여성의 인생이다.


사람들이 베프를 만들고, 베프를 챙기고, 서로를 너무 강하게 의지하는 것은 상대방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의 어떤 만족감, 자신의 파워. 그런 것들.. 그 정말 지독한 오후의 일을 계기로 매일 똑같은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반성없이 살던 이 호주의 중산층 사람들이 상처와 용서, 진실을 대면함으로써 생기는 반성 등으로 인해 서로와 서로의 관게에 대해 다시 확인하게 한다. 바른생활처럼 끝나기는 결말이기는 하지만, 엿보는 삶이 주는 인간이란 것의 보편성을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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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8-06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즈번드 시크릿 재밌게 봤는데 CREEP님의 평점때문에 이 책도 기대되네요^^

CREBBP 2017-08-07 12:50   좋아요 0 | URL
매번 리안 모리타이의 소설을 재미있게 보는 편인데 이 책은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도 많았구요.

고양이라디오 2017-08-07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빌려서 조금 읽었습니다^^ 이 책이 작가의 두번째 책이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