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 그런거지 뭐. 

100번 이상 등장하는 이 문장은 떼죽음이거나 개인의 죽음이거나 어떤 비극이거나 피할 수 없는 순간에 죽어간 사람들을 묘사한 모든 문단에서 등장한다. 어차피 다 가버릴 인생 허무한가.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사람들은 한 번 죽지만 죽지 않은 모든 순간은 살아있는 것이니 죽음 역시 삶의 일부이며, 그것은 아주 작은 조각일 뿐이라고. 모든 시간을 1초 단위로 잘라서 넓은 평면위에 널어놓으면 죽음에 해당되는 순간은 티끌만큼 작으므로, 죽음 말고 활발하게 살아있는 상태를 생각한다면 삶이 허무하기만 한 건 아니라고. 빌리 필그림은 그렇게 시간의 축이 부재한 삶속에서 유영한다. 유영하는 수많은 조각의 삶 속에서 체념을 담은’ so it goes’는  비극을 비껴갈 수 없는 운명론적 체념을 담고 있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비극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것 말고 달리 무슨 방법으로 다룰까.


뒤죽박죽이다. 저자의 페르소나인 화자는 이 책을 쓰는 시점에서 23년전에 전장에서 살아돌아왔을 때, 드레스덴 파괴에 관해서 쓰는 게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믿을 수 없게 압도적인 사건이라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큰 돈을 손에 쥘 이야기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들이 장성하여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되풀이되는 전쟁의 역사 속에서도 그는 쓸 말을 고르지 못했다. 마침내 출간된 책은 시간이 뒤죽박죽이고 거슬린다. 그는 출판인에게, 대학살이란 모두가 죽어야 하는 거고, 어떤 말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거고, 다시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지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고 그래서, 뒤죽박죽이고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서사가 시간을 따르지 않고 의식의 흐름에 따라 뒤죽박죽 섞이는 서술 방식은 대개 각 인물이 회상을 통해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형태로 작품 전체에서 고정된 현재의 시간 시점이 있다. 이 작품은 나뉘어진 시간의 덩어리가 매우 짧고, 현재 시점이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의식의 앞뒤로 다니는 기준 시간의 축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독자로서 파악할 수 있는 가장 긴 시간 배경은 1944년 2차대전에 참전해서 군모도 군화도 없이 총도 한 번 못들어보고 낙오되어 헤매다가 포로가 되어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드레스덴으로 옮겨져 폭격에서 살아남는 이야기의 시간 배경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의 배열을 따라 조각조각 맞추어 연결한, 퍼즐 조각을 이어붙인 그림 덩어리의 일 뿐으로 기준점이 되는 시간이라 할 수 없다. 


들어보라 :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풀려났다. 빌리는 노망이 든 홀아비로 잠이 들었다가 결혼식 날 깨어났다. 1955년에 하나의 문으로 들어갔다가 1941년에 다른 문으로 나왔다. 그 문으로 다시 들어가니 1963년의 자신이 나왔다. 자신의 출생과 죽음을 여러 번 보았다. 그는 그렇게 말한다. 그 사이의 모든 사건과 무작위로 만난다. (p39)


시간에서 풀려났다는 표현은, 빌리가 시간이라는 단일 방향의 구속된 차원이 아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빌리 필그림은 누누히 강조한다.  지은탁과 도깨비는 문을 통과해서 캐나다와 메밀밭 등 이곳 저곳으로 임의의 공간과 임의의 시간을 여행하지만 누적되는 시간의 결과가 다른 시간이 된다늠 일반적인 규칙을 거스르지 않는다. 도깨비가 판타지물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3차원 세계에 살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인과 관계의 연속된 시간의 흐름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드라마에서 인연은 전생의 업으로 설명이 되며, 운명조차도 과거와 연결되는 보이지 않는 관계 속에서 탄생한다. 이런 세계에서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변형된 형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세상에서 원인을 찾으면 결과를 바꿀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적 비극은 원인을 제거하면 더 나은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빌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다르다.


빌리는 딸의 결혼식에 트라팔마도어라는 외계 행성에 납치되어 동물원에 전시된 상태로 몇년간 지나다가 돌아오는데, 그 때부터 그는 과거와 미래속을 유영하며 살아간다. 시간 여행을 다루는 많은 서사가 과거로 가서 그 과거의 행동을 바꿈으로써 과거의 미래인 현재를 바꾸어 다시 현재의 어떤 재앙을 피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그러므로 타임 리프는 필연적으로 판타지물, 가능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공상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빌리가 인식하는 세계에서는 현재라는 축이 없이 과거와 미래가 섞여 있으며, 어느 곳에 시점의 축을 고정시켜 놓고 과거로 간다 해도 그 과거를 변형시키지 않는다. 변형시킬 수 없다. 이미 완성된 그림의 이미지처럼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빌리의 생은 읽기 전용이다. 그는 트라팔머도어에서 외계인이 그를 시간이라는 굴레에서 풀어주었다고 믿는다. 소설은 이 믿음이 사실인지, 혹은 그가 비행기 사고로 뇌가 잘못되어 환각을 보는 것인지 논쟁할 여지를 남겨놓는다. 



트라팔마도어인은 우리가 쭉 뻗은 로키산맥을 한 눈에 보듯 모든 시간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들은 지구인들이 '이 순간'이라는 호박에 갇혀있으며 여기에는 어떤 '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트라팔마도어인의 방식으로 시간이라는 족쇄가 풀린다면 인과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왜'도 없으며 모든 것 사이의 관계는 부재한다. 시작도 끝도 원인도 결과도 없다. 커트 보니것이 이 책에서 드레스덴의 비극의 알레고리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반전(anti-war) 소설이라면 사실적인 묘사로 끔찍한 전쟁의 참상을 낱낱이 고발함으로써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를 기대하기 쉬운데, 작가는 그런 방식이 오히려 대학살의 본질을 흐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사실적인 묘사가 자극적 소재의 소비로 이어진 상업 영화들을 상기한다면 작가의 이 낯선 방식을 통한 대학살의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 동의하게 된다. 특히 출간된 시기에는 베트남전에서 또다른 종류의 폭격이 수많은 도시를 불태우고 있었다. 오히려 전쟁을 극구 반대함으로써 그러한 현상과의 공존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는 것이 아닌, 그것에 절대로 맞설 수 없는 체념적 심경을 빌리라는 남자로 표현함으로써, 전쟁이 얼마나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인지, 되풀이되는 역사에 개인들은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이는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작품 전체의 알레고리와도 통한다. 


전쟁에서 빌리의 삶은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없다. 적진 깊숙한 곳에서 낙오되어 힘겨운 생을 마감하고 싶어도, 후에 낙오병을 자신의 힘으로 구했다는 영웅담을 꿈꾸는 동료가 그를 내버려두지 않고 때리고 나무에 머리를 박고 흔들어 깨워 굴리고 들쳐매고 욕을 하며 질질 끌고 간다. 죽는 일조차 뜻대로 할 수 없다.  살려고 하는 노력, 살리고자 하는 노력, 인정받고자 복수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과 무관하게 모두가 곧 어마어마한 대 학살 앞에서 일시에 죽음을 맞게 되고, 거기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소수가 생기는 것과 상관없이 말이다. 안다고 바꿀 수 없고 살려낼 수도 없다. so it goes. 다 그런 거다. 원래 그런거다.  그로부터 미래의 어느 시점에 드레스덴을 기억하는 빌리가 똑같은 종류의 학살과 떼죽음을 베트남전에서 수수방관 목격하게 된 것을 보면 어떤 규모의 희생도 반복을 막지 못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액자 맨 바깥쪽 프레임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소설 속의 작가는 빌리를 주인공으로 하고 드레스덴 폭격을 주제로 소설을 쓴다. 비극적 역사의 상업적 소비가 이루는 문학의 위치에서 스스로를 조롱하듯 작가를 등장시킨다. 작가인 화자는 소설 내에서 주인공 빌리와 전장에서 종종 만나거나 눈에 띄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 소설을 수십년동안 기획했고, 결국은 대박을 터뜨려 많은 돈을 번다. 자본의 생태계 내에서 역사적 비극이 문학적으로 소비되는 것에 대한 조롱인데, 그러한 문학에 대한 풍자와 조롱은 빌리가 만나는 SF 소설가와의 인연들을 통해서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문학이 역사와 만나는 아이러닉한 지점을 직접적으로 문학속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빌리가 만나는 트라우트라는 소설가는 숱하게 많은 SF 소설을 써대지만 서점의 진열대 위에 장식용으로만 꽂혀있을 뿐 아무도 읽지 않고 심지어 서점 주인조차 그의 책을 사러 오는 사람을 믿지 않으며 오직 빌리와 정신 병동 병실에서 만난 로즈워터만이 읽는다. 책을 써서 먹고 살 수 없으므로 신문배달 아이들을 고용해 약탈적 방법으로 먹고 사는 모습, 그리고 그가 만난 소설가들이 이 시대에 소설은 이미 죽었네 묻었네 하는 소리들을 하는 장면 속에서 소설가들을 해학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그것은 의미심장하다.


다시 액자 속 소설로 돌아가 보자. 2차세계대전의 막바지에서 시작되며 시간여행 속에서 주로 만나는 때는 2차대전과 베트남전의 기간이다. 현재와 과거, 혹은 현재와 미래의 두 축으로 구성된 시간 속에서 전쟁은 상반된 양상을 띤다. 젊은 날의 그는 혹독한 전장 속에서 총 한 번 못들어보고 낙오되어 죽어가지만, 드레스덴 폭격이라는 어마어마한 학살에서는 살아남았다. 반면 아들이 자원해서 나가 있는 베트남전 때에는 전쟁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다. 1967년 딸의 결혼식날 변기뚫는 도구처럼 생긴 트라팔마도어인에게 잡혀가 외계행성의 동물원에 갇혀 몇년을 있다가 되돌아오며, 그 몇년 동안의 시간은 지구에서 흐르지 않았다. 외계생물이 빌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자신들이 보는 방식인 4차원의 세계다. 그들의 세계에서 시간은 단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방향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방식대로 본다면 사람이 죽는다 해도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은 늘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이다.(...) 모든 순간이 영원하다는 것을 봐서 알 수 있고, 그 가운데 관심이 있는 어떤 순간에도 시선을 돌릴 수 있다. (p43)


그들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어느 순간 다음에는 또다른 순간이 뒤따르고 그 순간이 흘러가면 그 순간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은 지구 사람들의 착각이라는 것이 이 외계행성에서 트라팔머도어인에게 배워 온 ‘진리’며 능력이다.  '트라팔머도어인은 주검을 볼 때 그냥 죽은 사람이 그 특정한 순간에 나쁜 상태에 처했으며, 그 사람이 다른 많은 순간에는 괜찮다고 생각한다(p44)'. 빌리 역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뒤죽박죽 오간다. 테드 창의 중편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외계인의 언어를 이해하자, 외계인의 방식으로 세계를 볼 수 있게된다는 설정과 비슷하다. 빌리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여행한 후 지구인의 현실에서는 알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현실을 알게 된 것이다. 빌리가 보는 세계에서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며, 죽지 않은 다른 모든 순간에는 살아있다. 시간여행을 한 현재 죽는다고 해도, 여전히 과거에 살아있으므로 모든 순간은 영원하다. 


현재는 과거의 시간에 대한 결과가 아닌가. 그러니까 미래는 오로지 현재에 혹은 현재를 포함한 과거에 종속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듯 모든 순간이 존재하므로 영원하다는 트라팔머도어인들의 상상은 경이롭다. 삶이 유한하다는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명제에 수많은 가정의 세례들이 쏟아져서 생각도 하지 못한 풍부한 상상 속을 유영한다. 


외계행성에 다녀온 후 빌리는 ‘시간의 개념’을 배운다. 시간에서 풀려난다는 것은 시간을 묶은 1차원적 선에서 벗어나 과거와 미래의 모든 방향으로 가는 게 가능한 것을 말한다. 외계 행성에 다녀왔을 때가 1967년 딸의 결혼식이었으며 만일 그 때부터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그의 시간 여행은 현재에서 과거로 흐르게 된다. 하지만 그 스스로 밝히기를 처음으로 시간에서 풀려난 것은 1944년이다(p47). 그러므로 트랄파마도어인은 시간여행의 통찰을 제공했을 뿐이지, 애초부터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래와 과거를 지칭할 기준이 될 현재 축이 1944년인 것도 같고, 1968년인 것도 같으며 또 그도저도 아닌 것 같이 모호하다. 


혹독한 겨울 적의 후방에서 낙오병이 되어 군모도 군화도 없이 동료에게 질질 끌려 가는 동안 그가 첫번째로 방문한 곳(시간)은 죽음의 순간이다. 외계행성에는 미래에 다녀오는데, 현재의 시점에서 이미 시간여행을 하는 것은 이미 미래에 과거의 시간 마저 자유롭게 놓아주었으므로 가능하다. 죽음 이후 다녀간 곳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 '붉은 빛과 거품이 보글거리는 소리(p63)'가 나던 곳, 아버지가 아이에게 수영을 가르치겠다며 던져버린 수영장 밑바닥이라는 드레스덴 폭격 이전의 과거에서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늙은 건지를 묻는 노모를 만나는 양로원의  1965년의 미래, 파티에서 만난 여인과 세탁소에서 정사를 벌이다 발각되는 또 1961년의 미래로 다양하다. 떠났던 시간으로 돌아온 그는 독일군 방어선 뒤편에서 잠든 채, 그를 흔들어 깨우는 동료에게 끌려가며 계속해서 1967년 얹어리와 죽어가는 사람의 환각 사이를 맴돈다.  


화자가 기술하는 빌리의 인생은 인생을 사는 건지 기록된 인생을 읽는 건지 구분되지 않는다. 비행기 추락으로 자신을 제외한 승객 전원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 없이 비행기에 오른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두 개의 전쟁과 전쟁의 명분이 행한 무참한 학살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삶이 종속된다. 전쟁의 무수한 명목 앞에서 개인의 삶은 한없이 무력하다. 비극이 일어났던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예정된 비극 앞에서 아무 손도 쓸 수 없는 무력한 한 명일 뿐이다. 전쟁 앞에서 무력한 인간은 제 삶에 개입할 기회가 없다. 그걸 아는 개인은 자국의 북베트남 무차별적 폭격에 항의할 마음도 없이  무심하게 점심을 먹는다. 세상에는 한 개인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1967년도에 검안사였던 빌리의 사무실에 걸려있는 기도문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그리고 그 둘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빌리의 삶은 현재도, 미래도, 과거도 바꿀 수 없는 것, 고정되어 있는 이미지다. ‘다 그런거지 뭐’는 바꿀 수 없는 비극을 맞는 체념적 상태를 그 거대 비극을 대하는 역사적 사건의 크기 만큼이나 자주, 하지만 역설적으로 경쾌하게 반복한다. 다 그런거지 뭐. so it goes.


빌리는 소설 내 소설 속 주변 인물들에 의해, 망령이 들어 의식의 경계에서 돌아다니는 것으로 인식되며, 그런 맥락에서 그의 시간여행은 정신착란으로 설명될 수 있지는 않을까. 더욱이 그는 비행기에서 추락한 후에 라디오 쇼에서 트라팔마도어 행성에 다녀온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는데, 그것 때문에 딸과 주변인들은 그가 추락 외상으로 인한 뇌수술 후유증이라고 믿는다. 물론 소설 속의 소설가가 그러한 믿음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남득시키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포함해서 유난히 위기를 많이 겪은 빌리가 의식의 경계를 오락가락하면서 수많은 꿈을 꾸고 환각을 보는 것도 사실이지만, 작가는 환각을 비롯한 꿈과 진실을 분명하게 분리한다. 


"이틀간 의식을 잃었고 수많은 꿈을 꾸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진실이었다. 진실한 것들은 시간여행이었다 (p167)


소설 내에서 인용된 바에 의하면 영.미 폭격기가 1945년 봄 드레스덴 공격에서 살상한 인명은 13만 5천명이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탄은 71,379명을, 고성능 소이탄을 이용한 도쿄 공중전으로 죽인 인원은 83,793명을 죽였다. 역사는 이 사람들을 죽여야 했을 이유는 죽은 사람들의 숫자 만큼이나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전쟁을 끝내야 했으므로, 역사는 이러한 파괴를 승리자의 필연적 선으로 간주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