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박선경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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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만년이라도 아무 변화없이, 영원히 아무 기쁨도 없을 것 같이, 고단하고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도 문득 문득 그런 순간을 마주할 때가 있다. 어떤 순간의 스냅 사진 속에서 포착되는 난데없는 진실, 밀려오는 폭풍 감동 같은 것 말이다. 오래전 일이다. 학생이었을 때였다. 버스를 집어타면서 운전기사님에게 'XXX가요?'라고 물으며  차비를 넣는데 내 손을 가로막으며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xx번을 타라며 알려준 적이 있다. 그 때 그 버스 기사님이 선사한 하루는 말하자면 뻔한 일상에 훈훈한 생기를 주었다. 그 작은 즐거움은 버스비가 굳어서 생긴 공돈 때문만은 아니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다 그렇듯, 도시의 일상은 늘 내게 날을 세운다고 생각했고,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는 언제나 단단하게 무장한 채 벽을 만들고 다니는 것을 철학쯤으로 여기던 때였다. 예기치 않은 타인에게서 발생한 작은 친절이 넓게 원을 그리며 파동처럼 퍼져나갈 수 있음을 알아내던 순간이었다. 사소한 일상의 아주 작은 일들은 준비할 틈도 없이 갑작스레 작은 변화를 만들어낸다. 


두껍지 않은 페이지의 단편집에 40개의 소설이 담겨져 있다면 소설들이 얼마나 짧은지 짐작할 수 있다. a4 용지로 2~3장 정도의 분량의 이야기들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힘겹고 나른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청년들과 오늘날 우리의 일상의 단면을 여러 방향으로 베어내어 가볍고 경쾌한 문체를 통해 언뜻 언뜻 스치는 진실들을 포착한다.  대한민국의 구석구석을 잠식해가고 청년 실업과 빈부 격차의 문제, 노인 문제, 인터넷과 SNS로 변화되는 우리의 생활 등 다방면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포착하지만, 마냥 무겁고 어둡게 다루지는 않되 또 그것을 무심한 시선으로 지나치지 않으면서, 잘못탄 버스비를 받지 않던 버스 기사의 아주 작은 친절만큼이나  훈훈한 이야기들을 포함한다.  <그녀와 마주친 어느 오후>, <낮은 곳으로 임하다>, <비치보이스>, < 미드나잇 하이웨이>, <아파트먼트 세르파>, <초조한 또띠아 레시피>는 모두 우리의 청년들이 오갈데 없이 오롯이 마주하고 있는 남루한 실업상태를 그린다.   


<그녀와 마주친 어느 오후>에서 만날 사람도 없이 나른하고 무료한 청년 실업자는 심심풀이 수작으로 약속한 여성 보험 판매 스팸 마케터가 아이와 통화하는 소리를 목격한다. 타인일 때의 그녀는 직장도 없이 빈둥거리는 루저가 상대할 유일한 심심풀이었지만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아이를 어쩌지도 못하고 전화로 달래는 개인으로 대면하는 순간, 생활 전선에서 분투하는 여성의 막막한 현실은 어떻게든 남자의 마음을 건드린다. 


<낮은 곳으로 임하다>에서 한끼조차 부담스런 실업자에게 친구가 제안한 고향집 방문은 맛나게 차려주는 한 끼 밥상이라는 미끼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일만큼 삶이 피폐하지만, 막상 긴 여행을 통해 도착한 시골에서 친구는 자신을 방패로 부모에게 사업자금을 벌리려는 수작이었음이 드러나고, 배반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배추수확을 돕자고 제안하자 일당이 얼마냐고 물을 수 밖에 없는 친구는 몸도 마음도 자존심까지도 모두모두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는 청년 실업자의 자세를 반영한다. 


<미드나잇 하이웨이>는 더욱 절망적인 인간을 등장시킨다. 생활고와 빚, 더는 사는 일을 감당할 수 없어 자살하기로 결심한 남자는 번개탄을 사들고 자동차 틈새를 테이프로 꼼꼼히 마감한다. '오베라는 남자'도 아닌데 막 자살의 성공적 실행을 눈앞에 둔 찰라, 커다란 트럭을 옆에 주차한 기사가 자꾸 문을 열고 뭘 물어보고 뭘 부탁하고 담배불까지 빌려달라고 하면서 자살을 방해하는 것이다. 자살을 막기 위해 트럭 운전사가 보여주는 작은 마음 나눔의 등불이 비록 자살희망자의 상황을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그의 따스함을 알아챈 순간 다시 조금은 더 살아갈만한 동력이 되어주기를 나는 바랐다.


<아파트먼트 세르파>는 시급이 센 치킨 배달 알바를 구한 남자가 알고 보니 고층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이용이 배달부에게 금지당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상황을 그린다. 세상 최강의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아파트 주민은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며 배달부의 엘리베이터 탑승을 금지한다. 치킨집 사장은 치킨 배달을 해야 치킨을 팔아야 먹고 살 수 있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한 번이라도 이용하면 CCTV로 지켜보고 있던 관리소에서 바로 알람이 온다. 그러나 이 짧은 소설이 향한 곳은 그 이기심의 공간에서도 한 개인의 별거 아닌 아주 티클만한 배려다. 고층아파트까지 치킨 배달을 하기 위해 그 힘겨운 계단을 올라야 하는 배달부에게는 그 작은 제안이 삶의 에너지가 되기를 나는 바랐다. 


<초조한 또띠아 레시피>에서는 밤을 새며 먹방을 보는 한국적 상황과 무능하고 무력한 개인이 만났을 때의 작은 용기와 그 용기가 부딪히는 절망을 절묘하게 그렸다. 웃기면서도 슬픈, 자책하는 청년들의 자화상이 아닐수 없다. 세프들에게는 그렇게나 초간단한 레시피가, 이 무기력하고 가엾은 청년에게 그 무엇이라도 해보려는 엄청난 용기를 끌어모아야 했던 행동이었음을 오밤중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부엌에서 어리둥절해진 그의 노부모는 알 턱이 없다. 먹거리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대한민국, 먹는 일에 그토록 에너지를 쏟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개굴개굴>은 삼형제를 키우는 맞벌이 부부의 남자에게 어느날 툭 떨어진 아이돌보기 하루가 가져다주는 웃지 못할 해프닝을 통해, 양육의 힘듬을 몸소 경험하는 남자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말처럼 쉽지않네>는 마을에 하나 뿐인 폐교를 막으려고 조기 축구회를 조직해 소도 논도 밭도 다 방치하고 하루 종일 운동장에서 뛰는 시골 친구를 두고 영문을 모른채 도시에 사는 친구들이 하는 뒷담화들로 이야기가 풀어나간다. 중년과 노인에 대한 시선은 더없이 따스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무참함을 보여준다. 


<봄비>에서 노모를 업고 논두렁을 걷는 아들의 모습은 눈시울을 젖게 한다. 치매로 요양원에 모셔다 드렸지만 계속되는 실종, 그 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 무덤가에 와 계신 것이다. 봄비내리는 어느 날 다른 날처럼 아버지 무덤가에서 어머니를 찾은 주인공은 한 손으로 우산을 잡고, 한 손으로는 흘러내리는 어머니를 업은 채로,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택시 운전사였던 아버지에게 우산을 가져다 주러 회사를 가던날, 어머니가 급히 아들을 가린 투명한 비닐 우산 밖으로 아들의 눈에 들어온 장면은 아버지가 사장에게 뺨을 맞는 장면이다. 그 때, 아들은, 어머니가 우산으로 시야를 가린 것은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시야였다는 것을 살면서 깨닫는다. 우산으로 보호하고자 한 것은 '아들이 아버지가 맞는 장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맞다가 행여 아들을 볼까봐' 그런 것이었다는 걸 말이다. 


아버지가 맞다가 행여 아들을 볼까 봐, 그러면 정말 아버지가 못 견딜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렇게 한 거겠지. 그는 생각했다.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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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6-09-28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서버 단편선 글들은 A4 2장도 안 될 정도로 엄청 짧은데 피식거리며 웃다가도 그 통찰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라고요. 이기호 소설가 책도 제목만 알았지 읽어본 적이 없는데 조금 궁금해져요. 일상을 포착한 짧은 글에 훈기와 씁쓸함을 담았나 봐요. 어찌 보면 뻔할 수도 있는데 그런 아이러니들이 모여 삶을 구성하는 거란 생각도 들고요.

CREBBP 2016-09-28 19: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단편을 길이로 판단할 수는 없죠. 에드거 알렌 포 소설도 2~3쪽 짜리 으스스한 것들도 있고, 디킨스, 모파상 등도 짧으면서 위대하다 싶은 글들이 많더라구요. 허버트 조지 웰스든가, SF 작 중에서도 정말 2~3쪽 안되는 소설을 영화화한 것들도 있구요